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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5 20:34:32 조회 : 99         
광주강의20191129a 마가복음14장 32-42절(겟세마네 기도)-이 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IP:122.43.170.138)

광주강의20191129a 마가복음14장 32-42절(겟세마네 기도)-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4장 32절, “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라고 했잖아요. 예수님은 지금 기도하러 간다 이 말이죠. 근데 제자들은 덩달아 예수님의 기도에 지금 일방적으로 끌려가고 있는 거예요. 끌려가고 있을 때에 기도라는 개념에 대해서 예수님이 생각하는 것과 제자들의 생각이 지금 서로가 맞다고 제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맞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갈 때는 인간들이 알고 있고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 하나님 쪽으로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예수님만 알지 다른 사람은 알 수가 없습니다. 자, 예수님만 아신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먼저 선도해서 일을 해야만 여기서 의미가 발생된다는 거예요. 그럼 예수님께서 먼저 선도해서 기도를 했다면, 이것은 인간 쪽에서는 그 기도에 합세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지금 주님께서 제자들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거예요.

 

내 기도에 그들이 합세할 수 있는가. 만약에 내 기도에 제자들이 의미 있게 합세할 수 있다면, 제자들이 평소에 하는 기도라는 그 의미도 합당할 뿐 아니고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것도 이 예수님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일치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의 기도에 그들이 합치할 수 못할 경우에는 그들이 평소에 생각하는 그 하나님 있잖아요. 그 하나님 자체가 예수님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자체가 다르다면, 인간들이, 그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열심히 했겠습니까? 한 그것이 진짜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이 돼요. 이게 아무 일도. 마치 전기밥솥에 밥을 한다고 얹어놨는데, 이건 한 시간이 돼도 두 시간이 돼도 밥이 안 돼요. 보니까, 전기코드를 안 꽂은 거예요. 그렇게 전기밥솥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예요. 연결이, 커넥트connect가 이미 끊어진 상태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뭐냐 하면은 너희들은 연결이 끊어졌다는 일을 하시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은 다 끊어졌거든요. 끊어졌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인간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은, 자 여기서부터 참 어려워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들은 뭐냐 하면은 여호와의 말씀을 안 지키면 어디 간다? 지옥 간다. 말씀을 지키면 천국 간다고 이미 그 당시에서 가르쳤던 거예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지금 제자들은 뭐냐 하면은 지옥갈 수도 없어요. 지옥은 인간들이 가냐 안 가냐 관계없이, 지옥의 규정은 예수님이 먼저 선도해서 일을 벌여야 비로소 지옥이라는 개념이 규정이 되는 겁니다. 규정되지 않은 미규정의 입장에서는 지옥이라는 그 자체도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군에 갈 나이도 안 된 고등학교 3학년 보고, 집에 앉아있는데 니 사격해보라고 할 수가 없잖아요. 군에를 가서 사격술을 배워야 뭐 이렇게 사격을 하는데, 군에도 안 갔는데 사격술을 할 수는 없잖아요. 이게 안 되죠.

 

니는 이러니까 지옥가야 된다는 그 규정자체, 그러한 통보자체가 인간사회에서는 성립이 안 된다 이 말이죠. 성립이 안 돼요. 그러면 성립이 안 되면, 성립이 안 됨에도 불구하고 인간세상에서 그렇게 뭔가 자기끼리 여호와종교, 여호와 섬기기가 나오죠.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고린도후서 3장에서 이걸 이렇게 하는 거예요. 문자라고 하는 겁니다. 문자. 인간은 문자에 속았어요. 속았어요! 속았어요! 있잖아요. 문자에 속았어요. 문자에.

 

문자란, 인간을 이렇게 가두어버리는 기능이 있어요. 문자는. 문자는 가두어둔다고요. 창세기 3장에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명령을 줬죠. 그것도 명령도 문자니까. 하나의 명령이니까. 명령이 오게 되면, 그 명령은 인간에게 이것 지켜서 니 선에서 벗어나라가 아니라, 마귀가 그런 이야기를 했고요. 니는 여전히 그 안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다.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벌써 옥죈다 할까요? 꼼짝 마라! 한다고요. 그렇게 해버려요.

 

그러면 인간이 우선이 아니고 뭐가 우선이 아니냐 하면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이 되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지 마라가 인간보다 먼저 우선이 되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지 마라. 고린도후서 3장을 제가 한번 읽어볼게요. 6절에 보면,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라고 되어 있죠.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다.

 

이게, 문자가 뭘 유발하느냐 하면은 죽음을 유발합니다. 문자가 인간을 죽이는 목적이 아니고, 문자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예수님이 문자에 의해서 죽는 죽음을 유발하라고 문자가 있는 거예요. 예수님조차도 문자로 봐서는 이게 죽어야 마땅한 겁니다. 왜냐하면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으니까. 이걸 설명하기가 참 난해한데요.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잖아요.

 

그럼 사람들은 선악과 안 따먹으면 안 죽겠네, 라고 이렇게 이해를 하는데, 이게 주님이 주신 명령의 취지를 몰라서 그래요. 꼭 죽어야 된다 이 말이에요. 죽음이 살아나야 돼요. 죽음이. 죽음이 없으면 일이 아무것도 안 돼요. 죽음이 없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부채표가 없는 활명수는 활명수가 아니듯이. 죽음이 없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에요.

 

이 죽음은 무슨 죽음을 겨냥 하냐면 새 언약이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겨냥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아들과 언약하기를 아들이 죽어야 된다는 겁니다.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자기 아들을 주가 되시게 하시는 거예요. 죽음 안에서. 그 죽음은 바로 문자, 다른 말로 쉽게 하면 말씀이죠. 말씀에 입각해서 예수님은 죽어야 되는 겁니다. 이게 예수님이 죄를 지어서 죽었다. 이래 되면 안 돼요. 그럼 예수님이 죄를 안 지었으면 안 죽을 건데. 이래 되잖아요.

 

지금 무슨 문제 때문에 복잡하고 어렵게 되느냐 하면은 여기 36절 보면,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이 대목이 나오죠.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해가지고, 이 대목에서 예수님의 원보다 뭐가 우선이냐 하면은 아버지의 원이 먼저 우선이 되는 겁니다.

 

근데 아버지의 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보고 “똑바로 해! 바르게 해!” 이것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원은 아버지의 원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소원이 있어야 하고, 그 예수님의 소원과 아버지의 소원 사이에서 두 개를 이질적으로 만듦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뭘 생산하려고 하느냐 하면은 죽음이라는 것을 생산하기 위해서 두 개의 소원이 서로 다른 식으로 하나님께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겁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바르게 하지, 똑바로 못해서 죽었다고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죽음자체를 끄집어내려고 하시는 거예요. 죽음자체를.

 

그러면 왜 죽음자체를 끄집어내려고 하는가, 라고 한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을 예수님 중심으로 재규정하시려고 한다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예수님 중심으로 재구성한다는 말은 골로새서 1장에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이 누구를 위하여? 하나님이 아니고 누구를 위하여?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지기 위해서 하나님의 취지대로 창조가 되어 있고, 하나님의 취지의 창조가 나중에는 뭐로 변합니까?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될 때, 여기서 이렇게 옮길 때의 변화 또는 과정이 나오겠죠. 이 과정이 어디를 근거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근거해서 이렇게 전환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그 바탕에 뭐가 포함이 되었느냐 하면은, 그 토대가 그라운드가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으로 모든 게 규정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 여기 물컵이 있잖아요. 이게 물이거든요. 물이 왜 있느냐?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물이 있었다 이 말이에요. 모든 게. 카메라도 마찬가지고.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위해서 지금 주어진 거예요. 이게 아까 제가 이야기한 미규정성에서 뭐로 바뀐다? 규정성으로 바뀌는 겁니다.

 

죄었으니까 지옥 간다고요? 아니에요? 죄지어도 지옥에 못가요. 기다려봐! 예수님이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돼요. 예수님이 죽으실 때까지. 지옥조차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옥이 있어야 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전까지는 지옥도 지옥이 아니라 낙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전부 다 대기상태에 있어야 돼요. 죽고 난 뒤에 지옥에 가는 거예요. 문자로 보면 죄지으면 어디에 간다고 되어 있어요? 지옥 간다고 되어 있죠. 이게 문자거든요.

 

그러나 문자의 반대가 뭡니까? 고린도후서에. 성령으로 받았으면 뭐냐, 왜 지옥 가느냐? 주님이 보냈으니까 지옥 가는 거예요. 지금 이 관점으로 바뀌는 겁니다. 주님이 뭔데 나를 지옥 보냅니까? 나는 죽었잖아. 죽었다가 주가 되었다고요. 그러면 예수님이 죽었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서 같이 죽어있어야 돼요. 지금 겟세마네기도 문제가 아니고요. 제자들, 너희도 같이 죽을 수 있느냐? 그걸 묻는 거예요. 너 나처럼 기도할 수 있느냐? 라고 물으면 요즘 교회에서 기도 꽤나 하는 권사들은 “주여, 믿습니다.” 깨어서, 막 깨운다고요. “주님이 계속 기도하니까 나도 못지않게 따라붙어야지.”라고 하면서 기도한다고요.

 

지금 기도 문제가 아니고, 내가 갈 수 있는 그곳에 너희도 갈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갈 수 있어요? 못가요? 못가요.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왜냐 하면은 예수님에 의해서 겟세마네기도에 감으로서 제자라는 규정은 날아가 버리고 뭐로 바뀌느냐 하면은 육으로 바뀌는 거예요. 육으로. 그래서 니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자로 규정이 바뀌어요. 육신이 약한 자로. 제자라는 것은, 제자라는 인간들이 뭐 이렇게 주님 바라보면서 일방적으로 생각하는데, 제자라고 할 때는, 나는 주님의 제자야, 라고 할 때는 지금 본인이 죽어있는 상태에요? 살아있는 상태에요? 살아있는 상태로, 나는 예수님하고 어떤 관계지? 아, 제자구나! 이건 지금 살아있다는 티를 내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밤새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할 때 그들은 자고 있었다는 말은, 이건 결국 뭐였다? 왜 니가 졸음이 많으냐? 약 먹었냐? 그걸 따지는 것이 아니고, 너는 뭐가 된다? 육신의 범위를 못 벗어나는 거예요. 육신의 범위를 못 벗어났다는 것은 바로 인간이 문자의 범위를 못 벗어나는 것을 이렇게 인간의 신체성을 통해서 지금 표현해주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 신체를 못 이기잖아요. 마찬가지로 인간은 그 말씀을 문자로 이해하는 범위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문자로. 선악과 따먹지 마라. 따먹었다. 죽었다. 따먹었기 때문에 죽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선악과가 왜 있는데? 왜 죽는데? 몰라요. 문자로만 이해한다고요. “아휴,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따먹었으니까 죽었구나!” 만약에 주님께서 우리가 선악과 따먹은 것을 문제 삼을 것 같으면요, 주님께서는 해독제를 만들어주든지, 선악과와 생명나무하고 이걸 바꿔 먹으라고 이렇게 먹는 걸로 하지만,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막 냅다 때려가지고, “토해! 인간아! 빨리 토해!” 토하게 해놓고 그 다음에 아가리 벌리게 해서 생명나무 먹이게 할 수 있거든요. 그래봤자 육이잖아요. 등짝 때리는 그 등짝도 육이고. 아직까지 육신이 약해서 아무것도 못한다가 완전히 규정되지 않았잖아요. 누가 오실 때까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선악과 따먹었다고 손가락 집어넣어서 토하면 이거는 인간이 호들갑 떠는 거예요. 인간이 호들갑 떨어봤자 하나님 보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아무 일도. 악마는 대단하게 여기는데, 인간이 아무리 설치고 아무리 착한 일하고 아무리 나쁜 일 해봐야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예요. 아무 일도.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말은 평소에 누굴 대단하게 생각한다? 내가 나를 대단하게 생각한다는 것이고 나를 대단하게 생각한다는 말은 내 나름대로 나를 규정하고 있다는 거예요. “나, 이정도인데 이런 짓 하면 안 되지. 나 이정도인데 이런 짓은 해야지. 이 정도는 해야지.”라고 규정하고 있었죠.

 

그 규정에 뭐가 빠졌습니까? 니가 죽은 자라는 그 요소가 빠진 거예요. 내가 죽은 자라는 요소가 빠져버린 겁니다. 내가 죽은 자가 아니고 내가 살았다고 여기니까 뭘 하려고 하는 거예요. 착한 일 하려고 하고 나쁜 짓해서는 안 되려고 하고. 뭔가 하려고 하는 거예요. 겟세마네 기도는 기도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기도에 대해서 뭘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하고 니는 결별이라는 뜻이에요. 결별. 오늘 제목을 ‘결별’로 해볼까요?

 

배제 또는 결별. 이쯤해서 헤어질 때가 되었다는 거예요. 제자들 너희들은 나와함께 하고 있다고 해서 뭔가 큰일하고 있다고 하는데, 너희들과 헤어지지 아니하면 너희들은 큰일이라고 오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헤어지고 난 뒤에는 너희들은 아무 일도 한 적도 없고 그 자체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중에 시작한 것이 뭐냐 하면은 기도를 했는데, 예수님은 열심히 기도했는데 제자들은 뭐했습니까? 아무 일도 안 했죠. 그저 주무셨죠. 그것도 3교대로 주무신 게 아니고 세 명 다 주무셨어요.

 

예수 믿는 중국집 같은 데 그림 한번 보세요. 예수 믿는 중국집. 또는 교회 교육관의 그림 한번 보세요. 겟세마네기도 그림이 나오죠. 예수님께서 무슨 폼 나는 옷 입고 기도하고 있고, 밤이니까 시커먼 배경하고 있고, 저 한 구석에 보면 세 명이 바위 하나 붙들고 자고 있는 것을 보신 적이 있죠. 기도도 안 하고 세 명이 자고 있는 거요. 그게 바로 분주하고 바쁘기 짝이 없는 우리의 일상입니다. 그게 여호수아 할 때 했어요. 깨어있으라!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에요. 깨어있으라! 어디서 어디로 깨는데? 방향이 없어요. 그냥 열심히 사는데 그게 잠자고 있는 중이에요. 오늘 34절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깨어있으라고 되어 있죠. 인간은 어디에서 어디로 깰 줄을 몰라요. 구원받겠다고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그 구원받겠다는 게 잠자는 거예요. 왜냐하면 구원받겠다고 할 때 누가 구원받겠다고 하냐면 내가에요. 내가. 왜 니가 구원받아야 해? 나 살아있거든. 그러니까 이게 문제가 있는 거예요. 나 깨어있거든. 나 살아있거든.

 

그러니까 주께서 우리를 미규정으로 봤는데, 미규정,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봤는데 우리가 우리 스스로 자신을 규정으로 봤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참조로 했느냐 하면은 성경을 문자로 본 참조로 인하여 이러한 사단이 난 거예요. 이러한 탈이 난 겁니다. 인간의 정신은 내가 어떤 존재라고 하는 것은 주변에 떠다니는 언어 있잖아요. 언어. 문자. 문자를 주워 모아서 이걸 하나의 고유영역으로 만들어요. 고유영역으로.

 

자, 고유영역으로 만드는데, 제가 예를 들겠어요. 여러분 시저, 가이사랴죠. 시저가 나오는 연극에서 진짜 시저가 연기를 잘하겠습니까? 시저 역을 하는 배우가 연기를 잘하겠어요? 누가 잘하겠어요? 찰리 채플린 일화에 이런 게 있어요. 일화에. 찰리 채플린이 미국의 어느 남부에 가니까 찰리 채플린 흉내 내는 대회가 있었던 거예요. 찰리 채플린이 거기에 신청을 해가지고 거기에 참가를 했어요. 3등 했습니다. 3등 했어요. 1등한 사람은 뭐냐 하면은 찰리 채플린에 대해서 인간들이 각인되어 있는 특징들을 자기 것으로 유사 흉내를 낸 거죠.

 

찰리 채플린은 그냥 자기 모습을 이야기했는데. 흉내 내는 것은 1등 했고 그냥 사는 것은 3등 했다는 말은 인간의 문자와 인간이 문자를 볼 때 이미 문자 자체가 갭(간격)을 생산하고 있는 거예요. 문자 자체가 자신의 갈라진 틈을 억지로 위선적으로 감추고 있다는 겁니다. 문자는 계시를 더욱 깊숙이 감추게 한다.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것이 십계명에 있죠. 사람이 그걸 지키게 되면 그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거짓말이 돼요. 이게 로마서 7장에 나오는 방법이고.

 

뭔가 문자를 지키려고 할 때 가만히 있는 내가 발작을 일으킵니다. 어떻게? 거짓말 안 하는 쪽으로 해보겠다는 거예요. 나는 거짓말을 안 해야지, 하는 순간 거짓과 거짓 아닌 것을 누가 임의로 결정하느냐 하면은 내가 결정해요. 내가. 이게 바로 인간의 미규정성인데, 인간이 일방적으로 자기를, 나를 규정하고 있으니까. 이게 바로 평소에 내가 말씀을 안 줄 때도 니는 거짓이었어, 라는 것을 규정짓게 하기 위해서 십계명을 줬는데, 인간은 그걸 가지고 나는 거짓말을 최선을 다해서 안 하고 있습니다, 라고 새로운 거짓말을 양산하는 계기가 된 거예요.

 

율법을 준 것은 죄로 하여금 더욱더 죄 되게 하시는 거예요. 주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한다면, 나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할 때 이 구원이 어디서 나온다고 했습니까? 지금까지의 강의에 의하면 어디서 나와요? 예수님의 죽음에서 나오기 때문에 구원 문제는 내 문제입니까? 주님 문제입니까? 이게 주님 문제잖아요. 그걸 믿는 것이 믿음이잖아요. 그거는 인간이 문자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된다고요. 그런데 인간은 “나 구원이 있네. 천국 가겠네. 천국, 구원 내 거 만들어야지.” 이렇게 되면 그거는 성령이 하는 것이 아니고 문자로 하는 거예요. 문자로. 문자로 한다는 것은 주님의 규정을, 주님을 더욱더 죽게 만드는 요소가 돼버리는 거예요. 문자는.

 

주님은 문자에서 무엇으로 벗어났습니까? 문자에서 영으로 벗어났잖아요. 근데 인간은 문자에 갇혀가지고 영으로 벗어난 예수님의 다리몽둥이를 잡는 거예요. 이게. 그게 바로 영의 등장으로,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니가 육이 되는 겁니다. 육과 영, 사도바울에게 육은 악마가 작용하는 영역이죠. 육, 육으로서는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다. 육으로서는. 참, 사도바울의 단어 하나하나가 그렇게 어려워요.

 

제자들은 진정 죄인이 되지 못했다. 제자들은 진정한 죄인이 되지 못했던 거예요. 그러면 진정한 죄인은 누굽니까? 제자들과 결별했던 예수님이 진정한 죄인이 된 거예요. 왜? 아버지한테 버림받으니까? 그걸 어려운 말로 아버지와 자기 사이의 뜻에 갭이 있다는 것을 제대로, 처음으로, 모범적으로 보여주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는 자살이에요. “주여, 아버지의 뜻과 내 뜻은 이렇게 차이남을 내가 인정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나를 제거하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를 어느 인간이 그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할 수가 없죠. 기도 자체가 노동인데, 사람이 노동을 하면 대가가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기도한 만큼 뭐 구원에 가까이 가게 하옵소서. 이렇게 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뜻은 뭐냐 하면은 그 갭을 메울 수가 없어요.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한테 맡겨야 되겠어요? 아버지한테 맡겨야 되죠. “아버지여,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초월이라고 합니다. 진정한 초월. 초월이라는 말은 보통은 ‘뛰어넘는다.’라고 하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초월은 영웅적인 것,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잖아요.

 

이 초월이 어떤 본질을 갖고 있는지, 구약을 한번 찾아봅시다. 열왕기상 19장 5절을 누가 한번 읽어볼까요?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엘리야가 거사를 이뤘는데, 850대 1로 이겼잖아요. 뭔가 하나님이 좀 도와줘야 하는데. 그때부터 엘리야가 본격적으로 경찰한테 쫓기게 됐어요. 현상금 걸리고. 3년 6개월이 비 안 왔다가 비 내리게 했는데 소용이 없어요. 실권자인 이세벨이 엘리야를 잡아 죽이라고 이렇게 한 겁니다. 이세벨 눈앞에서 이스라엘이고 하늘나라고 하나님이고 없어요. 자기 집안밖에 몰라요.

 

그래서 엘리야를 죽이라고 이렇게 했고, 엘리야는 쫓기다, 쫓기다 계속 쫓기는 겁니다. 브엘세바 저 남쪽까지 아주 굉장히 멀리 쫓겨요. 이스라엘 북단에서 제일 남쪽까지 쫓기는데, 사흘 동안 갔다가 하룻길쯤 로뎀나무 아래서, 4절에 보면 뭘 구했습니까? 죽기를 구했죠. 죽기를 구했다 이 말이죠. “이렇게 숨어 다닐 바에야 하나님 차라리 죽여주옵소서.” 이거하고 예수님하고 다르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거죠. 이거는 뭐냐 하면은 엘리야가 너무 힘드니까, 어떻게 나를 타의에 의한 자살을 해달라고 이렇게 했어요.

 

그런데 로뎀나무 아래에 있는데 거기에 누가 나타났어요? 5절에. 천사가 나타났죠. 여러분 여기서 좀 신기한 게 없습니까? 좀 신기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도와주려면 천사가 진작 도와주지, 기껏 도와준다는 게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을 달랑 갖다 놨어요. 이거는 뭐 요새 만 이천 원 주고 숯불갈비 먹으면 되거든요. 아니 하늘에서 천사가 왔으면 제대로 도와줘야죠. 그렇지 않습니까? 화끈하게 도와줘야죠. 적들을 물리치고. 이거 뭐예요? 와가지고 물 한 병하고 숯불에 구운 떡만 달랑 주고 가버렸어요.

 

이 말은 뭐냐 내가 죽는다는 것은 이거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예요. 니가 죽는다는 것은 주의 일에 속하지 않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니는 죽고 싶어도 내가 너를 못 죽이는 거예요. 안 죽이시는 거예요. 그게 죽을 지경이에요. 그게.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죽자고 안 죽이시는 거예요. 죽자고 안 죽여요. 아, 미치겠어요. 환경은 다 만들어놔요. 죽는 환경 다 만들어놓고, “니 곧 죽을 것 같지? 안 죽인다.” 이게 뭡니까? 그래서 힘을 내서 거기 8절에 보면 하나님의 산 호렙산 까지 40일 동안 가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엘리야의 존재는 엘리야 자체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엘리야는 아무 일도 없었고 엘리야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엘리야의 일이 아니고 이건 하나님의 일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이. 엘리야 자체적으로 어떤 고생을 했다는 이것은 바로 미규정성이에요.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규정은 어디서 와야 되느냐, 내가 나를 규정하면 안 돼요. 나는 고생한다, 나는 배고프다, 규정하면 안 되고. 나는 착하다, 나는 나쁘다, 규정하면 안 되고. 반드시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관되어서 또는 관련되어서, 관계 지어져서 비로소 뭐가 온다? 비로소 규정이 되는 겁니다. ‘아, 나는 하나님과 이런 관계에 놓여있구나.’ 이런 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을 비로소 아는 거예요.

 

그럼 이 관계가 있어버리면, 이 관계를 통해서 나의 일은 애초부터 없었고 전부 다 누구 일이냐 하면은 주님의 일이죠. 나의 일은 없고 전부 다 주님의 일이 되는 거예요. 주님의 일. 주님의 일을 현상화 하기 위해서 또는 표현하기 위해서 나라는 피조물이 그동안 하나님에 의해서 이렇게 휘둘리고 저렇게 휘둘리고 이리 끌려 다니고 이렇게 한 겁니다. 엘리야도. 천사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그래서 죽자고 안 죽인다는 말도 되지만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못 죽게 만들면서까지 기어이 죽게 만든다.

 

못 죽게 만들면서까지 기어이 죽게 만든다는 말은, 중요한 것은 니 목숨이 끊어진 것이 아니고 너의 규정성이 죽어야 된다. 이게 주의 일입니다. 내가 살아도 내가 산 게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 내가 죽어도 내가 죽는 게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 하여튼 나라는 존재는 어떤 상황이 와도 그 앞에 붙여서는 안 되는 그런 의미입니다. 의미는 주님께 가져가야지 나한테 달라붙을 의미는 아예 없다는 것까지를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못 죽게 만들어서 죽게 만들어버려요. 기어이 못 죽게 만들죠. 왜냐하면 지옥이니 천국이니 하는 것은 우리가 가고 안 가고의 문제가 아니고 주께서 친히 만드셨다는 것이 중요한 문제지, 내가 어느 쪽에 가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로마서 9장을 한번 봅시다. 9장 3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저주죠. 저주거든요. 끊어질지라도 내가 뭐하는 바이다? 원하는 바로다. Do you understand?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이 말 이해되시겠어요? 사도바울이 바로 문자에 매인 사람이 아니고 성령에 이끌림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어느 것도 내 일은 있다? 없다? 일체 없기 때문에 끊어진다 할지라도 그것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내가 지옥 간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나하고 상관이 없는 거예요.

 

이렇게 되려면 자아가 바로 두 개의 자아가 필요한 겁니다. 하나는 문자에 의해서 스스로 규정했던, 문자에 갇힌 나, 자아. 다른 말로 하면 나. 이걸 나1로 봅시다. 그 다음에 예수님의 성령이 와서, 오순절 성령이 와서 생겼던 나, 자아. 이걸 나2로 보자 이 말이죠. 그러면 누가 구원받느냐고 할 때에 여기 나1에서 나2에 과정이 있겠죠. 과정, 변화가 있겠죠. 이 변화를 구원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변화 속에서 누가 개입하기 때문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라는 그 기도의 응답차원에서 이 과정이 발생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면 예수님의 ‘내 뜻대로’가 있겠죠. 그 다음에 아버지의 뜻이 있죠. 이게 벌어졌잖아요. 벌어졌는데 예수님께서 성령에 의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령에 의해서 부활될 때 내 뜻과 아버지의 뜻은 어떻게 됩니까? 일치가 되죠. 이 과정. 예수님이 이렇게 겪었던 이 과정이 성령을 통해서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고 이 과정 속에 개입하신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면서,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해서 우리가 만들어진 피조물이고 주를 위해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이것이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을 나타내게 되죠.

 

이게 제가 처음부터 말씀드렸던 바로 결별 또는 배제. 이것이 필연적인 절차가 됩니다. 자, 그러면 이 첫 번째 나1의 입장에서, 성령을 받지 않은 입장에서 인간들은 뭐가 문제냐 하면은 비-통일성, 뭔가 모든 게 통일되지 않아요. 전부 다 그때그때마다 파편처럼 이렇게 다가올 뿐이지, 하나로 이렇게 모아지지 않아요. 어떤 확실한 토대위에서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이 불분명해지는 겁니다. 통일성이 없으면 흐리멍텅하죠. 흐리멍텅하게 되면 여기서 관계라는 것도 나올 수가 없어요. 이 말 아십니까? 방사체. 방위사업체 말고 방사체. 하나의 중앙이 있으면 중앙에서 거미줄처럼 쫙 퍼지는 것이 있잖아요.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을 해가지고 모든 의미를 해버리면 이게 통일이 되지 않아요. 이럴 때는 이렇게 대처하고 저럴 때는 저렇게 대처하고 도대체 내가 누군지를 모르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모르고, 나는 왜 사는지도 모르고. 왜 사는지 모르고 통일성이 안 됐으니까 여기서 공포와 두려움과 걱정근심이 떠날 날이 없어요. 계속 나만 조마조마 붙들고 있는 거예요. 나만. 그런데 아까 로마서 9장 3절에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라고 할 때에 사도바울은 이미 뭘 갖추고 있어요? 이미 통일성이 갖추어졌죠. 통일성이 갖추어져서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의 통일성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예수님 중심체가 예수님 한분이죠. 예수님 한분. 예수님이 한분이기 때문에 한분에 모이기 위해서 내 중심이라고 하는 이것은 전부 다 이게 어떻게 돼요? 전부 다 배제되고 제거되고 죽어야 되겠죠. 그래서 제 말은 뭐냐, 기도란 죽어야 될 의무를 수행한 것이다. 기도란. 기도라고 하는 것은 내 뜻대로 해주옵소서가 아니라 제발 아무 쓸모도 없는 나를 주의 중심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중심으로 들어가는 변화가운데서 저 자신을 없애주세요. 이게 내 뜻대로 마옵시고, 내 뜻 자체가 없다는 것은 나를 있으나마나한, 살아있어도 산 게 아니게 하옵소서. 이 기도가 성도가 성령에 의해서 한 기도에요.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그런 기도 같으면 아예 안 해도 괜찮지 않느냐?” 이래 되겠죠. 세 가지로 생각해봅시다. 1. 하나님을 모른다. 2. 하나님을 안다. 3. 하나님이 안 계신다. 자, 이 세 가지의 차이점을 한번 봅시다. 1번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것은 알지만 하나님을 잘 모르겠다. 2번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것도 알고 그분이 누군지도 안다는 거예요. 3번 하나님이 안 계신다는 것은 알고 모르고 이 자체가 성립이 안 되죠. 아예 없으니까. 그러면 예수님과 제자들하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한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 존재는 인정하지만 잘 모른다. 1번 같잖아요.

 

이 1번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은 3번으로 바꾸는 겁니다. 너희들은 니가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예 없다고 보는 거예요. 이게 결별이에요. 하나님이 안 계신데 인간은 뭘 하느냐, 기도를 해요. 그러면 이 방사체 중앙은 누구입니까? 본인이 기도를 하면서 본인이 원하는 신을 만들어내죠.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만들 때, 이런 저런 요구사항 자체가 새로운 하나님을, 그때그때마다 다른 하나님을 내가 만들어낸다고요. 내가 중심이기 때문에. 내가 구심체기 때문에. 계속 만들어내요. 우리 애가 몸이 아프다. 몸을 낫게 해주옵소서. 이게 자기가 하나님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열심히, 간구, 간절히 구하면 응답해주실 거죠? 이게 본인이 하나님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런 기도를 한다는 것은 본인이 여기 3번에 살아있다는 말이죠. 근데 예수님께서는 여기 2번에 하나님을 알잖아요. 아시기 때문에 같이 있어버리면 이 제자들이 혼동을 하겠죠. 예수님하고 붙어있다는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아는 하나님이 마치 자기 하나님인 냥 착각을 하겠죠. 그럼 뭘 해야 돼요? 예수님과 결별해야 돼요. 떠나야 돼요. 십자가 지면서 빠이빠이 하는 거예요. 너희들은 하나님을 모른다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이 없는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이 없어요. 인간은 하나님 자리에 누가 있습니까? 본인이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본인이 하나님이지 하나님은 없는 거예요.

 

한 신앙생활 50년이나 60년 한 교회 목사나 장로한테 이야기해보세요.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 믿는 것이 아니고 그들은 하나님이 없다니까요. 하나님이 없어요. 하나님을 언급하는 본인이 있지. 본인이 있는 거예요.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이 계신 그 앞에서 자기가 어떻게 됩니까? 쓴잔, 죽지요. 근데 하나님을 안다는 인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 자기가 죽습니까? 아니잖아요. 나도 살고 하나님도 살고 다 살려고 하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없는 거예요. 가짜니까. 근데 하나님이 없는 인간들은 자꾸 1번 하나님을 모른다고 해요. 모르는 게 아니고 아예 자기가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으니까. 3번 하나님이 안 계신 거예요.

 

자, 하나님이 없으니까 인간에게 뭐가 없느냐 하면은 죄라는 것도 없고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왜냐하면 항상 죄, 천국, 지옥을 규정할 때 항상 바닥에는 뭐냐, 내가 여기 있다 또는 내가 여기 살아 있다는 것을 자기는 절대로 포기를 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목사님 기도 어떻게 하면 되지요?”라고 물을 때, 자, 이렇게 물을 때 그 바닥, 그라운드에 뭐가 깔려 있습니까? 여기 살아있는 내가 기도를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응답받습니까?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이거는 겟세마네에서 한 예수님의 기도 자세하고 다릅니다. 기도 자세가 달라요. 예수님을 갭이 있었잖아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이 있었는데, 인간들은 갭이 아니고 그냥 내 뜻이 주의 뜻인 냥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베드로와 누굽니까? 다시 한 번 봅시다. 야고보와 요한과 베드로를 왜 데리고 갔느냐? 그렇게 버려두지 왜 데려 갔느냐? 아무 문제없는 것으로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에. 드디어 문제를 만들어내요. 그러면 제자들은 뭐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제자들에게, 여기에 본인이 원치 않는 주님의 일으킨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관계를 살리기 위해서, 창세전에 있었던 택한 백성의 관계를 살려내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 관계가 안 보이죠. 왜 안 보이느냐, 우리는 내 중심의 방사체기 때문에 내가 행한 것에 대해서 신경써가지고, 그 단절을 극복한 새로운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꾸 내 쪽에서 뭔가 열심히 하고 내 쪽에서 먼저 성의를 내면 도와준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핀셋으로 그 가느다란 선을 끄집어내는데, 우리는 아주 호들갑을 떨어요. 호들갑을. 번잡스럽게. 대단한 신앙적인 모습을 띠면서 마치 바알과 아세라가 자기 가슴을 치고 칼 가지고 자기 벗은 몸을 그으면서, 이케요? 저케요? 더할까요? 하면서 자학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거는 뭐 지 기분상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없거든요.

 

그런데 엘리야의 제단으로 할 때는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관계를 끄집어냅니다. 제물에다가 물을 부었는데 그게 뭐로 변했습니까? 물이 불로 변하면서 주의 살아계심을 보이죠. 자, 주님이 살아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니와 끊어진 관계를 내가 나의 죽음으로 인하여 이게 이어졌음을 다시 한 번 인식시키는 그 관계를 느끼게 하는 그 일, 그게 주의 일입니다.

 

첫째 시간을 결론 내린다면 주의 일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느껴지는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도 나는 안 돼!”라고 했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 “그래, 니 원래부터 니가 하는 것을 내가 안 받았어. 그러나 나는 너를 이미 걸치고 있었던 거야. 이미 연결되어 있었던 거야.” 그 연결성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우리 안에 숨어있는 주님의 관계성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 끄집어낸 관계성이 뭐냐 하면은 성령이고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의 자유성, 주님의 자유 됨입니다. 니 하는 것과 별개로, 니가 어떻게 사는가를 아무 문제 삼지 않고 일방적으로 너를 내 자유에 의해서 너를 자유케 했다는 그 사실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주강의20191129a 마가복음14장 32-42절(겟세마네 기도)-이 근호 목사.hwp (62.0K), Dow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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