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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6 16:51:44 조회 : 95         
26강-빌 3장 17-19절(땅의 일)200816-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61.84.208.92)
26강-빌 3장 17-19절(땅의 일)2008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3장 17-19절입니다. 신약성경 320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3:17-19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사도바울이, 이렇게 세상을 보고 환경을 보는 그 평가에 대해서 너희들도 같이 나와 동감을 해달라는 겁니다. 내가 세상을 보는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보고 살아가고 있느냐, 라는 것을 17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본받으라” 하는 것은 “내가 세상을 이런 식으로 보는데 너희도 거기에 대해서 공감을 하고 있지? 내가 세상을 이렇게 살아가는 것처럼 너희도 세상 그렇게 살고 있지?”라고 우리에게 되묻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 단어가 오늘 본문 19절 끝에 나와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수치스러운 것도 모르면서 수치에서 나온 영광이 영원한 것처럼, 대단한 것처럼 그렇게 그들은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19절 끝에 나온 단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땅의 일을 생각한다.

사도바울이 세상을 보면서 땅의 일을 생각한다는 단어를 쓰는 것은, “본인은, 이 세상 전부가 기껏해야 땅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전지적 관점 자리에 나는 놓여 있는데 여러분도 나처럼 같은 자리에 있습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인간의 세상일, 모든 일이 그저 한낱 세상일에 불과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세상일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세상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정도로 나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습니다.”

세상바깥에 나와서, 저쪽은 모두 세상입니다, 라는 관점을 여러분들이 장착하고 있느냐, 라고 묻는 거예요. 세상에서 나왔기 때문에 세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가 있는 거예요. 세상에서 이미 나왔기 때문에. 이 비슷한 단어가 마태복음 16장 23절에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한테 아부한다고 주님이 고생한다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하는 식으로 “절대로 고난 받으면 안 됩니다.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이렇게 좋게좋게 이야기할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는 말이 호칭이 달라집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베드로보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할 때 이 ‘사람’이라는 단어하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상일’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자리가 어떤 자리냐 하면, 이미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어떤 폐쇄적인 구조에 놓여 있음을 그 바깥에서 볼 수 있는 사람만이 사람의 일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본인은, 그렇게 이야기하는 예수님은 “너희들 보기에 내가 사람으로 보이지? 아니야. 너희들이 생각하는 사람의 일, 그 바깥에 있는 게 나야.” 그런 뜻이에요. 사도바울이 “너희들은 세상일을 생각한다. 땅의 일을 생각한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사도바울보고 “네가 사는 것도 땅의 일이잖아.” 할 때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너희들 보기에 내가 땅의 일을 한다고 그렇게 보이느냐? 나는 땅의 일에서 벗어난 그 전지적 관점, 땅과는 다른 자리에 있으면서 너희들이 하는 모든 것이 땅의 일이라고 평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나를 본받으라. 너희들도 나처럼 살아가고 있지?” 그렇게 묻는 거예요.

인간이면서도 인간의 일이라고 따로 구역을 정할 수 있는 권한, 땅에 살고 있으면서도 너희들이 하는 짓들은 땅의 일이라고 해서 땅의 일 따로 구분할 수 있는 그러한 관점, 그런 관점이 지금 사도바울이 우리보고 너도 같은 관점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나 사도바울이 보는 대로 너희들도 세상일을 그렇게 보고 있습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어떤 학교의 선생님이 학교에서 한 40년 봉직하다가 퇴임을 했어요. 한 1년 뒤에 옛날에 자기가 일했던 학교에 놀이삼아 갔다는 말이지요.

옛날에 가르쳤던 자기 반 학생들이, 아직 졸업을 안했으니까, 대번에 하는 이야기가 “선생님, 어제는 왜 종례 안 해줬어요? 선생님, 어제 왜 청소만 시켜놓고 검사 안하고 어디 가셨는지 안 보이데요?” 이렇게 따질 때에 그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나 퇴임했잖아. 나 퇴임했어.”

이 말은 오늘날 뭐냐? 이 세상, 땅의 일은 이렇고, 세상일 이렇고, 인간이 이렇다, 라고 예수님이나 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할 때 이게 무슨 뜻이냐? “나 고인이야. 나 이미 죽었어. 나는 이미 이 땅에서 죽은 자야.” 그걸 지금 언급하는 겁니다. “내가 이 땅에서 죽은자인 것처럼 너희도 이 땅에서 죽은 자 맞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동안 여러분이 성경을 볼 때 어떻게 봤어요? 어떻게 봤습니까? 사도는 본인이 이 땅에서 죽은 자로서, 고인으로서 이 땅을 지금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우리는 이 땅에서 고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 땅의 일 외에는 다른 일이 없다는 거예요. 계속 우기는 것이, 이 세상에 인간의 일 외에는 없고 땅의 일 외에는 없다는 겁니다.

사람의 일 외에는 이 땅에는 없다는 것이 베드로의 이야기에요. 예수님은, 사람의 일을 했기에 그것이 악마의 일이라고 이렇게 규정할 수 있는데 그 규정하는 관점이 그 당시 베드로에게는 없어요. 우리가 이 땅에 여기 고인이 되어서 등장했다면,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한다면, 사실은 죽은 자로 간주하는 것 맞고요, 맞는데 그걸 아무리 설명해도 아, 정말……, 아……, 들어보면 이상하게 정리가 안 된 이야기가 막 흘러나와요.

수련회가 끝났습니다. “참석은 못했지만 수련회 강의한 것 들어봤습니까?” “예, 들어봤습니다.” “어떤 내용이던가요?” 룻기수련회 참석 했다 안했다가 중요한 것은 아니고요. “들어봤다면 무슨 내용입니까?” 하고 물으면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친절한 금자씨처럼 아주 친절하게 이야기해 줬어요.

룻기의 내용은, 룻은 율법이 없는 저주받은 여인입니다. 율법이 없으면 저주받은 거예요. 율법이 없는 저주받은 여인 룻이 이스라엘로 와서 허리를 굽혀서 땅에서 이삭을 줍는데 이삭 주울 때 남들 보기에는 완전히 땅거지에요. 거지인데 룻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삭을 남겨준 것은, 밭주인이 몽땅 이삭까지 긁어가지 않고 이렇게 남겨준 것은 율법에 의하면 거지같은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이 특별간식을 주는 거예요.

율법이 죽지 않고 살아 있기 때문에 율법 없는 이방여인도 땅에서 주워 먹을 것이 있는 거예요. 내가 땅에 있는 것을 주워 먹으면서 ‘야, 율법이 살아 있으니까 이런 혜택을 입는구나. 만약에 율법이 없었으면 나는 굶어죽었다.’라는 정신이 장차 이스라엘 왕의 정신이고 왕의 자리라는 거예요. 그 족보가.

그러니까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룻기에 의하면 ‘하나님이 말씀이 살아 있지 않으면 나는 지옥 간다.’ 이것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오롯이 예수 그리스도만 찾는 거예요. 우리의 왕이시니까. 왜? 우리의 후견자니까. 우리의 고엘이니까. 히브리말로 고엘(גא Goel), 후견자.

그런데 나오미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율법이 있는 백성이잖아. 하나님 뭐하나 우리한테 복 줘야지.’ 이게 바로 엉터리 같은 나오미에요. 룻은 자기남편이 일찍 죽었어요. 그랬어도 룻기 어떤 대목에서 “내 남편이 죽어서 내 팔자가 더럽다.”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스스로 살아 있다면 그걸로 나는 감사하다. 말씀이 살아 있다면 그걸로 나는 감사하다.” 그게 룻이에요.

왜? 자기 것이 없으니까. 자기 것이 없다고 수련회에서 몇 번을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룻기를 듣는 사람이건 아니건 간에 여전히 자기 것이 있어요. 지금 손자 봐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 마음가짐으로 룻기를 보는 거예요. 그것은 나오미지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제가 전에 봉화에 살았는데 여름이 되면 대한예수교장로회, 그 다음 괄호 열고 합동, 괄호 닫고,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교회교사가 여름수련회하기 전에 그 교단의 청년들 다 모아서 교단차원에서 교사강습회를 열어요. 새영주교회라 해서 오래되고 제일 큰 붉은 벽돌의 예배당이 있어요. 지금도 어떨 때는 꿈에도 나타나요.

나는 교사로 명찰하나 달고 앉아 있고 앞에는 교단의 전도사님, 강도사님, 목사님들이 교과를 정해서 특강들을 죽 하는데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게 정리가 되었어요.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 세월이 벌써 40년이 지났는데 40년 전에 젊은 교사들 앞에 놓고 그들이 성경 들춰가면서 하는 강습회의 내용이 뭐냐? 다시 새록새록 기억이 나요. 이거였어요.

첫째, 하나님 계시고. 둘째, 하나님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세 번째, 그러면 복 받는다. 그 이야기였어요. 잊혀질 수가 없어요. 잊지를 못하겠어요. 살아계신 하나님 믿고, 그 다음에 그 주신 말씀이 있잖아요.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하게 되면, 하게 되면, 세 번째가 복 받고. 천국 가는 것은 기본이고, 이 땅에서 복 받고. 그들이 그것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지금, 40년 세월이 지나서 지금 성경을 보니 성경은 그것이 아니었어요. 그들은 전부 사기꾼들 이었어요. 그들도 사기꾼이고 그 자리에서 듣는 그들도 전부 다 사기꾼들이었어요. 성경은 뭐냐? 십자가 사건 터졌고, 그 십자가를 우리한테 적용시킬 때 이미 너는 죽었다. 그게 성경이에요.

십자가사건이 터졌고, 그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 믿고 복 받고 하는 그것이 전부 사기꾼들이고 다 사기고, 그것은 그래서 한국교회가 그만큼 많고 지금도 광화문에서 태극기 흔들고 있고, 그 다음에 그걸 십자가에 적용시켜 버리면 우리는 이 땅 일에 대해서 비로소 땅의 일이라고 할 수 있는 전지적 관점 자리에 놓여 있는 거예요.

그 자리가 뭐냐? 십자가의 자리고, 오늘 본문에서 보면 그 십자가의 자리에서 볼 때 모든 인간들은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이게 지금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에요. 십자가의 원수에요. 십자가의 원수 된 여기에 대해서 땅의 일에서 벗어나서, 아까 말한 그 인간의 일에서 벗어나서 보면 살아 있는 모든 인간의 일은 마귀의 일이거든요.

마태복음 16장 23절, 살아 있다고 여기는 모든 인간의 일은 마귀의 일이에요. 인간의 일을 인간의 일이라고 지목,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바깥 자리가 마련되어야 됩니다. 인간의 일이었는데 이미 거기서, 그 교사는 이미 퇴임했어요, 그처럼 다시 말해서 이미 우리는 이 땅에서 죽었어요. 죽은 자리에 가서 보면 모든 인간의 일은 마귀의 일이고 예수님에게 대적하는 원수의 일인 것이 눈에 보이는 겁니다.

성경해석 그렇게 해야 돼요. 룻이, 개뿔도 아무것도 없는 여자 하나가 이스라엘 왕의 자리를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기존의 이스라엘 자리, 나오미 자리, 이스라엘을 유지하려는 자리에서는 절대로 룻의 가치를 몰라요. 성경해석 자체가 안 되는 겁니다. 사기꾼 모여 봤자 사기꾼 교회 되지요 뭐.

이렇게 전지적 관점의 자리가 눈에 보이면 그 다음부터 세상에 대해서는 사도바울이 자기를 본받으라고 했으니까 아주 살아가는 것이 사도바울 같은 그런 시선을 가지고 보게 됩니다. 소가 지붕위에 올라갔다는 거예요. 어쩌라고? 어쩌라고! 의암댐에서 아무 죄도 없는 공무원 여섯 명이 죽었다는 거예요. 어쩌라고! 이혼했대요. 어쩌라고! 죽었는데. 우리 애가 아프대요. 어쩌라고! 아무문제거리도 안 되는 거예요 . 이미 고인이기 때문에.

제가 오늘 설교 뜸 들이는 이유가 있어요. 너무 어려워요. 오늘 설교 내용이 너무 어려운데 무엇이 어려우냐 하면, 아, 이 세상이 닫힌 구조가 되어서 무엇이 문제인가를 모르고요. 문제가 어디서 오는지도 몰라요. 이 세상 자체가 닫힌 구조가 되어서. 어떤 점이 문제냐 하면, 수학문제 풀 때 답만 쓰는 사람이 있잖아요. 수학선생님이 영점처리 합니다.

그 과정을 봐야 돼요. 그 과정을 봐야 된다고요. 과정이 없으면 정답이 맞아도 그것을 정답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전지적 십자가 자리는 단 한분이에요. 예수님뿐이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세상이라는 것은 한 사람이 만들어낸다는 점이 어려워요. 이걸 지금부터 설명할거예요.

세상은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네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너와 내가 합쳐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세상은 단 한분에서 왔다고요. 단 한분이에요. 한 놈만 조진다는 말도 있듯이 딱 한분 한군데서 왔어요. 선악과를 하나님이 왜 심어놨느냐 하면, 이제는 말한다. 내 이제 말할게요.

선악과를 하나님께서 왜 심어놨느냐 하면, 악마로 하여금 하나님의 원수를 생산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선악과 따먹을 때 아담도 몰랐지요. 아담도 하나님의 원수가 따로 있다는 것을 몰랐어요. 그냥 아담은 ‘저거 따먹고 싶다.’ 이렇게 자기생각밖에 없지 세상바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몰랐어요.

주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해서 뒤에 악마가 들러붙게 만들었어요. 들러붙게 만들고 창세기 15장에 보면, 그 다음부터는 뱀의 후손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뱀의 후손은 그 특징이 뭐냐? 아, 그 특징이 그 원수가 메시아를 뜯어먹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원수가 있다, 악마가 있다. 사람들에게는 이게 동화이야기에요.

실제 증거, 객관적인 증거가 있어야 돼요. 뜯어 먹힌 증거. 객관적인 증거 없이 악마 이야기하지 마세요. 그것은 괜히 심리적인 두려움에서 나온 허구적 개념이에요. 진짜 악마가 있다면 그 악마는 어떤 증거를 남기게 되어 있는데 그 증거가 뭐냐? 메시아의 발꿈치를 뜯어먹게 되어 있다고요. 주님이 깨물린 그 자리에서 주님의 새로운 천국백성이 쏟아져 나오게 되어 있어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나라가 만들어져요.

뱀에 물린 자, 뱀에 뜯긴 자, 그 분이 메시아입니다. 인간은? 인간은 아무 상관도 없어요. 뱀이 와서 주님의 발꿈치를 뜯어먹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성도 맞아요? 여러분이 사도바울처럼 성령 받았습니까? 여러분은 사도바울처럼 고인입니까?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뭘 증명해야 되느냐 하면, 주님이 뜯겼던 그 수모, 상처, 그 상처를 우리의 남은 인생사를 통해서 그걸 증명해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주님하고 한패에요.

주님이 실제적으로 악마에게 상처받은 그 상처를 주님께서는 자기백성에게 그대로 흘려 내보내 줍니다. 보내주면 성도의 평생이라 하는 것은 이제부터 어떤 체험을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마귀한테 뜯겼던 그 수모의 체험을, 남은 체험을, 그 고난의 체험을 성도인 우리 인생이 그것을 증명하는 거예요. 그걸 증명해 내는 겁니다.

나 아니야, 나는 이미 고인이고, 죽은 자고 이 죽은 자를 통해서 나오는 것은 주님이 악마에게 이렇게 당했다는 그 체험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고인으로, 죽은 자로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의미가 그 의미에요.

광화문에서 수천 명 모였다. 뭐 어쩌라고? 앞으로 한국이 2천 몇 년 되어서 경제대국에서 몰락한다. 뭐 어쩌라고요. 세상 바깥에 나가서 세상을 볼 줄 알아야 되는데 세상 안에 있으면서 세상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체험은 없고요. 예수님을 공격했던 하나님의 원수, 악마가 스스로 나를 지키려는 그 체험만 온전히 우리의 남은 세월을 다 채우고 있습니다. 그래놓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거예요. 사는 게 힘들다는 겁니다.

그런 광고가 한 십년 전에 있었어요. 어떤 여학생이 버스를 탔는데 그 버스 안에 현 빈처럼 아주 미남이고 맘에 드는 남학생이 타고 있었어요. 오래전이라 정확한 기억은 아닌데 하여간 그래요. 여학생이 그 남학생이 마음에 너무 드는데 버스에서 내리면서 하는 말이 “나 지금 내려요.” 어쩌라고! 그냥 내리세요. 같이 내리자, 그 말이거든요. “나 지금 내려요.” 뭐 어쩌라고!

이 세상은 내가 만든 세상이 아닌데 뭘 어쩌라는 말입니까? 나보고 어쩌라고! 이 세상 내가 만든 것이 아닌데. 내가 살아서 세상을 개혁시킬까요? 사도바울의 관점이나 주님의 관점은 이미 세상 땅의 일에 대해서는 확정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3장 20절에 보면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겁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이게 이 땅에서 이미 우리가 죽은 자로서 귀신처럼 어슬렁대는 그런 자세가 아니면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말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교회의 목사라는 사기꾼에 같이 속아 넘어갑니다. 그들은 땅의 일만 생각하는 거예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들의 신을 믿는 이유가 자기육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믿는다는 뜻이에요. 바디, 배, 육신이라는 말입니다.

나 잘되기 위해서, 복 받기 위해서 하나님 믿고 순종한다는 그 말이거든요. 사도바울의 말이. 이 관점에 대해서 여러분이 지금 동의하십니까, 라고 사도바울이 지금 묻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 13절에 보면 “저희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저희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여러분, 무덤은 봉인되어야 돼요. 안 그러면 썩은 냄새가 나서 못 견딥니다. 아무리 자기의 사랑하는 가족, 사랑하는 자기 애인이 죽어도 썩은 냄새가 나면 엄마야, 하고 도망갑니다. 썩은 계란냄새라느니……, 하여튼 표현도 안 될 정도로 썩은 냄새가 나요. 무덤은 깔끔하게 봉인해야 되고 좋은 냄새로 썩은 냄새가 바깥으로 새어나오지 않도록 철저한 조치를 하는 것이 무덤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뭐냐? 열린 무덤이라는 겁니다. 오늘 기온이 섭씨 37도에요. 이 날씨에 죽은 지 일주일 된 시신 여기에 던져놔 볼까요? 어떻게 되는지. 과거에 그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었고, 얼마나 착한 일을 했고, 얼마나 훌륭하고, 인격자라 해도 인격이고 훌륭이고 관계없이 “이거 빨리 치워라.” 무덤은 닫혀야 되지 열어놓으면 안되잖아요.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지금 죽어 있으면서도 닫힌 무덤이 아니고 열려 있어요. 코로나나 전파하고 말이지요. 전부 무덤이 열려 있다고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면서 이 말씀을 하는 겁니다. 성경 유다서 1장 13절에 보면 멋진 표현들이 나와요. 13절에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자기의 수치의 거품, 인간은 거품이라는 겁니다. 태풍에 시커멓게 몰려온 바다위의 거품 있지요. 터져서 없어지고 다시 생겨나는 추잡한 거품들, 수치의 거품들, 한때 권력 잡았다, 잘했다. 그것 더러운 물위의 거품들이에요. 한때 이 땅의 권력을 세웠다, 권세 있다. 그거 거품들입니다. 거품들. 주 기철, 한 경직, 거품들이에요. 전부 다, 그것도 수치스러운 거품들이에요.

죽은 고인에게 무슨 이름을 그렇게 붙입니까? 고상한 이름을. 거친 바다에 끊임없이 들락날락하는 그 종잡을 수 없는 파도의 한 때 잠시 등장했다 사라지는 거품 같은 존재, 그것도 수치스런 지저분한 존재. 이게 바로 인생이라는 것, 인간이라는 겁니다. 성경에서.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밤에 잠간 나타났다 낮에는 다 사라지는 별들. 세상에 대해서 그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라는 것은 없고 특정 개인으로부터 뿜어져 나오고 만들어졌다는 이 이야기, 하나의 특정개인이 있을 뿐이고 이 세상이란 개인이 만든 거예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예레미야 1장 10절에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세우고, 건설해놓고 세운 당사자가 뽑고, 파괴하고, 부수고, 무너뜨리고, 건설하신 분이 박살내시는 거예요.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자기가 만들어놓고 자기가 부수는 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에요. 그러면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이야기하는데 이스라엘의 의미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단 한분을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성경에 그 많은 구절가운데서 또렷하게 샛별처럼 떠오르는 구절 하나 뽑으라면 예레미야 31장 22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이 대목입니다.

여자가 남자를 안는다는 대목. 뱀의 후손에게 뜯겼는데 그러나 이 세상에는 뱀의 후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도 있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인간의 모든 생각은 빠지세요. 내 생각 빠지세요. 이 세상은 나를 위한 세상 아닙니다. 어른들끼리 싸우도록 놔두세요. 우리는 빠지세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도록 놔두세요.

내 걱정하면서 인생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쓸데없는 내 걱정이나 하면서. 나는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 전쟁터입니다. 아담은 거기에 말려든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숫자가 많지만 그것은 다 없애버릴 거예요. 이스라엘이 소멸될 겁니다. 있는데 없어졌어요. 분명히 하나님이 세워놓고 하나님이 없애버렸어요.

이스라엘이 소멸된 것을 가지고 두 자로 그걸 종말이라 합니다. 끝. 끝났어요. 이스라엘이라는 인간을 대변해주는, 인간을 대표하는 나라의 등장, 그렇게 세우시고 주께서 없애버리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나라는 없어요. 모든 것이 땅의 일이고 모든 것이 사람의 일이에요. 더 이상 의미 있는 것이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여자가 남자를 안는 겁니다. 여자가 남자를 안아요. 그렇다면 이야기가 어떻게 되느냐? 우리가 생각한 이야기와 완전히 거꾸로, 반대로 나갑니다. 예레미야 34장 20절에서 22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가 너희 원수의 손과 너희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붙이리니 너희 시체가 공중의 새들과 땅 짐승의 식물이 될 것이며 또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 방백들을 그 원수의 손과 그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희에게서 떠나간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붙이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 성에 다시 오게 하리니 그들이 이 성을 쳐서 취하여 불사를 것이라 내가 유다 성읍들로 황무하여 거민이 없게 하리라.”

잘 들으셔야 돼요. 예수님을 인하여, 예수님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원수로부터 수모를 당해야 된다는 것이 예레미야 34장 20-22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의도적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도적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바벨론에게 침노를 당해서 하나님이 세운 성전까지 하나님 스스로 부숴 뜨려야 될 이유는 장차오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그래야 이스라엘을 치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원수의 객관적인 증거, 정체가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수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망한 것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책임질 필요가 없네요. 없지요.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이스라엘멸망의 사연과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어요. 지금 모든 생각은, ‘내가 어떻게 순종해서 내가 천당가는가?’ 지금 관심사가 거기에 담겨 있는데 그렇게 되면 주인공이 예수님이 주인공이 아니고 내가 주인공 되어버려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이 성경에 그런 내용은 없어요.

마리아가 임신하고 싶어서 임신한 것이 아니잖아요. 제 말 맞지요. 마리아가 임신하고 싶어서 임신한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해서 억지로 임신하게 된 거예요. 우리도 오늘날 똑같은 입장입니다. 우리 인생에 대해서 우리가 책임질 것은 하나도 없어요. 예수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뭘? 주님이 누구한테 발목이 깨물렸는가를 네가 체험해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다, 할 때 그냥 안다 하지 말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게 된 그 합리적인 논조 있잖아요, 논조, 논리, 거기에 대해서 네가 배우라는 겁니다. 바리새인과 사탄이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다는 그 논조, 논리, 이성적 구조, 평생 살아 있을 동안에 그것에 대해서 네가 체험하라는 거예요. ‘아, 물만 했구나. 예수님을 죽일 만 했구나.’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온몸으로 짜릿하게 그걸 습득을 해야 돼요. 평생을 살아가면서.

그러고 난 뒤에 룻처럼 이야기해야 됩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예수님은 세상을 보면서 섬뜩하게 보는데 우리는 이 세상을 보면서 섬뜩하게 안보고, 소름도 안 끼치고 그냥 덤덤하게 봐요. 주님은 이 세상을 사이다로 보는데 우리는 고구마로 본다고요. 밋밋해. 그냥 이 세상을 하루하루 생각 없이 살아가요. 아무 생각없이.

사도바울은 지금 소름이 끼치는 거예요. 이 악마의 세계가 자체적으로, 합리적으로,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정당성이 있어요. 정당성이 있다고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룻이 자기 남편 죽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이여, 왜 내 남편 죽여서 팔자 이렇게 괴롭게 합니까?”라고 한 적이 없어요. 나오미는 남편이 죽었다고 그렇게 닦달을 냈는데 룻은 자기 남편 죽은데서 일언반구 아무 말이 없어요. 그냥 생기발랄해요. 왜 그렇습니까?

도대체 룻의 사고방식이 뭡니까? “주여, 제가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왜? 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율법을 몰라서 내가 봐도 저주받을 여자입니다. 마땅히 저주받아야 됩니다. 이 땅에 떨어진 이삭, 이게 웬 횡재인가. 이게 바로 저같이 불쌍한 여자 살리려고 주인이 싹쓸이 안하고 일부러 이삭을 땅에 떨어뜨리게 하셨지요? 율법이 아니었으면 이 이삭을 내가 건져서 나와 우리 시어미가 같이 먹을 수 있었겠습니까?”

거지 된 것을, 내가 거지로 살아가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있어요. 룻은. 십자가 정답만 이야기하지 마시고요. 평생을 살면서 왜 이 세상은, ‘하나님 믿고, 말씀 실천해서 복 받고, 나중에 천당 가자’, 왜 세상은 그런 사기꾼들 하나님의 원수가 하는 말이 그렇게도 육신에게 와 닿는지를 평생을 살아가면서 체험해보세요. 하나님의 원수의 체험을. 그들의 이론이 왜 그렇게 우리에게 정당한지를.

이 말이 어려우면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주 어릴 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잠수함에서 사람들이 나올 때 궁금했던 것이 뭐냐? 잠수함 안에는 물이 없어요. 그런데 잠수함 바깥은 물이잖아요. 바닷물속이니까 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물이 없는데서 물 있는 바다로 나올 때 어떻게 그렇게 몸 하나 안 젖고 나올 수 있는지 그게 굉장히 신기했다는 말이지요.

잠수함 영화를 보면 그게 나와요. 일단 물이 없는 실내에서 잠수복을 다 입어요. 입고 난 뒤에 어디로 가느냐? 잠수함 내에 바다하고 동일한 환경을 만들 방을 만들어놨어요. 일단 문을 열게 되면 그 방은 비어 있어요. 물이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그 사람만 남기고 바깥에서 문을 잠가버립니다. “그래. 임무 잘 하고. 수고해.” 손 흔들고 스위치를 누르면 잠수함내의 그 방만 바닷물이 차버립니다.

그러고 난 뒤에 잠수함 바깥으로 나 있는 문을 열어버려요. 그러면 그 사람은 몸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바다 속을 헤엄치는 겁니다. 그 중간 경계지점이 있어요. 주님께서 사도바울로 하여금, 사도바울은 이미 고인입니다, 자기는 죽었어요, 죽은 자로 하여금 예수님을 깨물은 그 사고방식, 그 논조가 가득 넘치는 이 세상의 논조를 입혀버려요.

이 인간세계, 이 땅의 일, 사람의 일, 땅의 일에 통용되는 그 사고방식을 입혀버립니다. 그러면 이것은 모기약 안 바르고 모기서식지로 들어가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사도바울을 보고 물어뜯기 시작합니다. “네가 왜 우리에게 납득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는 소리만 나불대느냐?” 하고 물어뜯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바울은 평생 동안 예수님을 공격했던 합리적 논조에 온몸이 다 물어뜯기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믿는 사람들 아닙니까?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 살해했잖아요. 그 하나님을 믿고 우리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라는 그 논조, 그 논리, 그 신학적인 체계, 예수님은 그대로 모기약 바르지도 않은 채로 노출되어서 죽어버렸어요.

그 일을 사도바울한테 그대로 예수님의 남은 환란을 뒤집어씌우는 겁니다. 그 다음 차례는 저와 여러분차례에요. 룻은 나오미한테 앵벌이 당했잖아요. 나오미 사고방식은 뭐냐 하면, 하나님 덕 봐서 우리 가정이 어떻게 회복되느냐, 온통 관심이 그거밖에 없어요.

그러나 그 가정이 회복되어버리면 그 나오미가 속한 이스라엘은 왕을 얻을 수가 없어요. 왕이라는 자리는 이스라엘 내에 없어요. 이방여인이 왔기 때문에 선악적인 노선이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자들의 노선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거예요. 왕의 자리가.

룻은 다윗의 증조할머니입니다. 우리 할머니들은 뭐했는지 몰라요. 다윗의 증조할머니에요. 룻은 정말 이 세상사람 아니에요. 이 세상 사람은 나오미입니다. “내 건데 주께서 다치게 했다, 내 건데 내 손자가 아파요, 내건데 내 아들이 아파요, 아이고, 아들이 취직이 안 되었어요, 주님 어쩔까요?”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내 거, 내 거, 내 거, 내 교회, 내 교회, 내 나라, 내 나라, 내 민족, 어쩌라고? 어쩌라고! 이미 죽었는데.

사도는 “나를 본 받는 자 되세요.” 해놓고 하는 말이 “우리 시민권은 지금 하늘에 있어요. 땅에 없어요. 기쁘지요? 그지요?” 이러고 약을 올리고 있다는 말이지요. 자기는 세상 온갖 핍박 다 받아가지고 모기한테 물려서 퉁퉁 부어 있는 육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소원이 있는데 너무 뜯겨서 빨리 죽고 싶은 그것이 소원이에요.

죽고 싶지만 못 죽게 만들어요. 증명해야 되니까. 주님이 누구한테 당했는지 증명해야 되니까. 예레미야 34장 20-22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가 너희 원수의 손과 너희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붙이리니……” 붙인다는 말은 의도적으로 했다는 말이지요. 너희 시체가 공중의 새들과 땅 짐승의 식물이 될 것이며……”

내가 일부러 너희 자식들과 네 몸까지 공중의 독수리가 뜯어먹은 시체가 되겠다는 겁니다. 얼마나 차가운 주님이십니까! 주님이 스스로 주님을 찌른 거예요.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하나님을 찔러버린 사건 아닙니까? 이게 어떻게 납득이 될 수 있어요? 인간의 입장에서. 좋으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그런 사람한테는 하등 납득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개인적으로 있게 되면 율법이 달려들어요. 율법이 달려들어서 우리를 한 놈만 죽이자, 하는 식으로 달려듭니다. 율법이 달려들게 되면 우리는 그 율법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어요. 아무리 성공하고 아무리 착해도 계속해서 율법은 더, 더, 더, 를 요구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게 견딜 수가 없어요.

알 수 없는 공포, 그래서 사람이 살아 있다, 목숨 건졌다, 하지만 그 목숨은요, 협박 줄입니다. 목숨 줄은 곧 협박 줄이에요. 내 목숨이 느껴지십니까? 여러분은 협박받고 있습니다. 좋은 직장 있으면 어떤 협박받는지 알아요? ‘당신, 철도공사 쫓겨나면 어떻게 살래?’ 내가 여기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협박을 받고 있는 중이에요. 마귀가 ‘똑바로 살아야 네가 오래 머물러.’ 이게 율법이에요.

율법은 ‘똑바로 살게 되면 네 목숨 유지해줄게. 네가 자식 잘되는 것 기도 많이 해서 그래. 네가 기도를 안 하게 되면 네 자식 책임 못 진다.’ 이게 협박이에요. 협박공갈입니다. 공갈 받고 있는 거예요. 내가 살아 있다고 여기시면 협박 공갈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내가 목숨 부지하는 차원에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도대체 왜 주님은 왜 사람들이 죽였는지, 그것을 내가 온몸으로 실습에 나서는 겁니다. 주님의 실습, 주님의 수모를 체험하는 거지요.

그 전까지 이스라엘은 왜 망했는가? 모세의 체험을 한 거예요. 율법체험. 모세의 체험. 말씀대로 살면 복 받고 말씀대로 안하면 저주받는다. 그 율법의 대상되는 체험을 한 거예요. 모든 인간이 그랬으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율법 줘놓고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겁니다.

이게 인간의 한도다, 한계다. 네가 그렇게, 그렇게 떠나기 싫은 이 세상 땅의 일의 한도가 뭐냐? 결국은 율법의 노리개가 되고 악마의 협박을 받으면서 백세인생을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너희의 형편이고 신세라는 말이지요.

여러분이 정말 구원받은 자라면 악마에 의해서 뜯긴 그 자리로 들어가셔야 돼요. 하나님의 원수라는 그 입장으로 들어가야 돼요.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로마서 5장에 나옵니다. 원수 된 자를 의롭게 하시다 했으니까. 원수 되었다는 이것이 그냥 망상이 아니고 객관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요.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은 악마가, 온천지가, 세상전체가 한 마음으로 악마화 되어 있다는 겁니다. 악마라는 한 인물과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물 사이에서 우리는 그 사이에서 없습니다. 없는 인간이 율법의 요구를 들어줄 필요가 없어요. 주님을 뜯어먹은 그 인간의 평가를 들을 이유가 없습니다. 남들로부터 이러쿵저러쿵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들을 이유가 없어요.

그들이 추구하는 한명은 악마고 우리의 추구는 주님 한분뿐이에요. 십자가 지신 한 분뿐이에요. 그래서 그런 전지적 관점에서는 그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그 원수라는 객관적증거가 뭐냐? 자기의 육신만 섬기고 자기의 육신의 영광만 추구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땅의 일만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 외에는 도통 생각할 줄 모른다는 겁니다.

여러분, 바울로부터 그리고 이 악마로부터 검증받으세요. 검증받으시기 바랍니다. 안 그러면 저는 신자라고 간주 안하겠어요. 악마로부터 검증받으세요.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검증받고 예수님이 사두개인, 바리새인에게 검증받듯이 주께서는 성도인 것을 검증받으라고 지금도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 속에 살게 만듭니다.

우리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세상의 그 결이, 윤곽이, 질감이 탄력성 있게 감지돼요. 우리가 움직일수록. 가만있으면 좋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뭔가 한마디 이야기하게 되면 저쪽에서 들고 일어납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신을 이야기해요. “당신같이 이야기하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는데?” 그쪽의 결, 속해 있는 결의 윤곽이 드디어 나온다고요. “너는 대한민국 사람 아닌가?” 이런 식으로. “너는 우리 집안사람 아닌가?” 이런 식으로. “너는 우리교인 아니야? 우리교회에 왜 충성 안 해?” 아 참 제가 안할 소리를 하고 있어요.

이미 우리는 고인입니다. 닫힌 무덤이에요. 열린 무덤 아닙니다. 닫힌 무덤으로 열린 무덤과 같이 살면서 그들로 하여금 얼마나 썩은 냄새 나는지를 주께서 여러분을 데려가기 전에 고역스럽지만 이것도 주님이 당했던 수모의 그 길이다, 체험하시고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것을 룻의 입장에서 감격하고 너무 너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평소에 우리가 도대체 뭘 생각하고 하루하루 무슨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남한테 안 지려고,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인생 되려고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다 부질없는 것, 주께서 의도적으로 우리를 죽였다는 이 사실, 이 죽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복이고, 최후의 선물이고 기쁨인 것을 놓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6강-빌 3장 17-19절(땅의 일)200816-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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