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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1 06:55:01 조회 : 58         
5강-암 3장 1-8절(약속을 찾으심)200930-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61.84.208.92)
5강-암 3장 1-8절(약속을 찾으심)2009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3장 1-8절까지입니다.

아모스 3:1-8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를 쳐서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온 족속을 쳐서 이르시기를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야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고야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창애를 땅에 베풀지 아니하고야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아무 잡힌 것이 없고야 창애가 어찌 땅에서 뛰겠느냐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오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냈다는 이야기고요. 그 선지자가 누구한테 오느냐 하면, 2절에 보면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라고 되어 있어요. 이것은 이방인은 상대 안한다는 뜻입니다. 이방인이 되었으면 제쳐 놓는다는 겁니다. 왜 이방인들은 상대하지 않는가? 그것은 1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라고 나옵니다.

이스라엘을 만드신 분이 따로 있는데 그분이 바로 여호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실 때에 그 때는 이스라엘이 없었어요. 없었고 어떻게 이스라엘을 만들었는지 1절 끝에 나옵니다.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족속 애굽이 있었지 이스라엘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애굽땅에서 여호와의 그 무엇, 여기서 ‘무엇’이라 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주신 것이 주어질 때 여기서 없는데서 이스라엘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무엇을 담아서 이스라엘 나라를 만들었는가? 여호와께서는 약속을 제시하면서 이스라엘 나라를 만들었어요. 이렇게 하면 여러분 머리 좋은 사람은 단박에 알아듣습니다. ‘아, 약속이 없으면 이스라엘이 아니구나.’ 약속, 더 머리 좋은 사람은, ‘하나님은 약속만 바라보는구나.’

나의 구원에 대해서는 이것은 이방인들이나 추구하는 것이지 여호와, 진짜 여호와께서 만들고자 하시는 그 나라, 오직 하나님께서는 약속만 주목하시고 그 약속만 주목하시는 것에 대해서 이스라엘 너희들도 나와 동일하게 약속만 주목해야 된다.

약속 없는 구원은 없으니까요. 여호와께서 “너 거기 있나? 구원할게.” 그게 아니라 없는 거예요. 이스라엘 자체가 없는 겁니다. 이스라엘보다 먼저 있는 것이 약속이었고 약속을 지상에 던지니까 뭐가 나왔느냐? 이스라엘 나왔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정말 구원받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라면 관심사가 약속에 있지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 거기에는 없는 겁니다.

그 약속에 의해서 약속의 그 결과가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 하면, 그게 3절에 나옵니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약속으로 인하여 연결될 경우에만 하나님과 동행이 성사되고 성립되는 거예요. 약속이 있을 경우에만 약속을 매개로 해서, 약속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과 하나님이 함께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보낸 것은 나 여호와하나님은 백성과 함께 있고 싶다, 라는 자신의 뜻을 분명히 드러낸 거예요. 그러면 이 이론, 이 논리를 따르면 약속이 빠져버리면 천하의 백성이라도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함께 할 수가 없어요.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 약속에 의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원리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뭐냐? 1이 아니고 2가 되는 거예요. 약속을 통해서 하나님 1, 이스라엘 1, 해서 2가 되는 거예요. 약속은 마치 아령처럼 두 개의 불뚝한 동그란 것이 하나의 작대기를 통해서, 둘 다 역기의 바벨처럼 2가 성립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방민족은 뭐냐?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밖에 없지요. 왜? 약속이 없으니까. 처음도 하나고 끝도 하나고. 처음에 내가 여기 하나로 있고 끝도, 마지막도 내가 하나로 있으면 되고, 모든 관심사는 하나에서 시작해서 하나로 마감되는 것, 이게 바로 약속이 없는 사람의 보편적인 공통점 특징이에요.

누구와 엮이기가 싫은 겁니다. 나는 나로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그 사고방식, 그 의식이에요. 그게 이방민족이에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약속을 줬으면 약속을 구현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추구해야 될 이스라엘이 선지자를 통해서 보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됨을 포기하고 약속을 포기한 거죠. 이방민족화 되고 말았어요.

그러면 다른 민족 이방민족이 이방민족화 되는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냥 놔둬버려요. 어차피 그것은 약속이 없는 거니까. 그것은 이래 사나 저래 사나 망하기 마련이에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지옥 가는 사람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오늘 날 성도들도 세상에 나가서 복음 전하고 전도할 때 지옥 가는 사람을 방해하지 마세요.

혹시나 천국 가는 사람 아니겠는가, 확인 차 복음을 던지는 것은 좋은데, 반드시 그래야 되는데 지옥 가겠다는 사람을 방해해버리면 그 사람을 지옥 보내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 돼요. 그러면 지옥이냐 천국이냐? 당신이 무슨 권리로 어떻게 아느냐? 약속입니다. 지금 아모스는 그 약속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약속이 나오면 백성이고 약속이 안 나오면 그것은 백성이 아닙니다.

그러면 약속이 안 왔을 때 같은 이야기를 또 되풀이하는데 약속이 없을 경우에 나오는 것은 뭐냐? 1이 나와요. 나의 구원이 나온다고요. 약속이 있는 백성, 성령을 받아서 참된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은 뭐냐? 2가 나와요. 약속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약속을 가지고 중매 되어서 묶여 있고 동행하고 있다. 약속 때문에. 그게 나온다고요.

그러면 1이 2 되려면 그냥 될 수 없어요. 자기 1을 부인해야 돼요.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 십자가가 신약에 나오는 약속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언약의 완성은 십자가기 때문에, 다 이루었다 했기 때문에 그 약속 앞에서는 1이 1로 계속 고집할 수가 없어요. 내 구원을 추구하는 이것이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하고 고백이 나와야 돼요.

“내가 행복 하는 것, 내가 잘 먹고 잘사는 것, 이것은 약속이 아니었었습니다, 하나님. 이것 달라고 기도하는 그것이 죄였습니다.”가 계속 나와야 되겠지요. 이건 약속이 아니니까. 약속은 우리의 소원이 아니고, 우리의 소원을 들을 것도 없이 너 자신을 부정해버리는 거예요. 그 약속을 약속대로 이루신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도 거기에 있고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랑하는 자로 오셔서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과 함께 계셔서 약속을 홀로 다 이루셨습니다. 홀로. 약속을 위해서 다른 몸을 주신 적이 없고 오직 그 한 몸만 주셨다고 되어 있거든요.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히 10:5-7)

하나님의 약속에 기록된 그 몸으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다른 몸은 약속을 성취할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을 예수님 홀로 이루심으로서 이미 확정 났어요. 다른 몸은 아무리 구원을 추구해도 구원될 수 없다. 왜? 약속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그게 약속의 조건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되었지요. 참 비참하게 되었어요.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냥 부인한다, 부정한다,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 비참하게 봐야 돼요.

또 예수님께서 죄로 인하여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뭘 로 봐야 되느냐 하면, 저질로 봐야 돼요. 자기를 보면서 비참하게 보고 자기 자신을 보면서 저질로 볼 때 뭐 감사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지요. 왜 사람들이 감사가 안 나오고 고맙소, 가 안 나옵니까? 자기자신을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그래요.

진짜 죽으면 죽었지, 자기를 남에게 인정받고 싶지 비참한 존재임을 본인이 거절해요. ‘내가 뭐가 못나서 비참하게 돼? 아니야 내가 뭐가 못나서 내가 쫄딱 망해야 돼 이럴 수는 없어.’ 이러고 있는 거예요. 그게 2가 아니고 1이에요.

남자들만 있으니 제가 한 예를 듭니다. 이거 응용문제입니다. 남자가 남편이 아내를 때립니다. 때릴 때 제 3자가 묻지요. “왜 당신은 당신 아내를 때립니까?” 남자가 하는 말이 “말을 안 듣거든요.” “때리면 어떤 결과가 주어집니까?” “겁이 나서 잘 듣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면 말 잘 듣는 아내, 때려서라도 말 잘 듣게 사육시켜서 그런 결과, 그런 아내가 있으면 당신은 어떤 점이 좋습니까?” “내 가정이 편안하거든요.”

앞에 ‘나’가 붙어요. 결국 그 남자는 그 가정이 내 가정이에요. 2가 아니고 1이 돼요. 이건 뭐 여자 편드는 것 같지만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당신은 왜 남편에게 그렇게 바가지를 긁고 잔소리를 많이 합니까?” 여자가 하는 말이 “내 말을 안 듣거든요.” “그러면 내 말 듣게 해서 당신이 얻는 이익은 뭡니까?” “내가 편안하거든요.” “이 가정은 누구 가정입니까?” 그러면 “나 편안하려고 있는 가정”이라는 거예요. 여자도 1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에 아담에서 태어난 어떤 부부도 하나 된 적이 없어요. 1과 1이 만나 이을 수 있는 중간이음새가, 엮일 수 있는 이음새가 하나도 없어요. 전부 다 각자 따로 자기 속 채우면서 너는 네 인생, 나는 내 인생 살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이 세상 약속이 없을 때 나타나는 응용문제에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간단해요. 첫째는 돈이 있어야 되고요. 둘째는 인정받는 거고요. 돈 없고 인정 못 받으면 세 번째가 있어요. 자살. 인생은 딱 그걸로 이미 결정 났어요. 결정 난 겁니다. 이걸 또 응용문제로 하면 쉽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 간단해요. 응용문제 여기에 다 집어넣으면 해결돼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무슨 뜻이에요? “돈 줘” 돈 주고 나면 “날 인정해줘.” 세 번째, “그거 안주면 당신 미워할 거야.”

모든 말 속에, 행동 속에 첫째는, 돈. 두 번째는 인정받기. 그거 안 되면 자살. 딱 그 원칙으로 어딜 적용해도 희한하게 이게 다 적용이 돼요. 모든 것이 적용이 돼요. “오늘 날씨 좋다.” 이 말도 마찬가지고 칼빈 5대 교리. 그걸 왜 이야기하는데요? “너는 영지주의자야.” 그걸 왜 이야기합니까? 나도 돈벌어먹고 살자, 그 이야기. 돈과, 나도 참된 목사로 인정받자, 이게 다 있어요.

그것 저것 안 되면 나 죽으련다. 이게 원칙이에요. 이게 바로 이방민족이거든요. 약속이 없는 사람들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을 버리면 이방민족 되는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방민족도 버려야 되지 않겠느냐?

그런데 선지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4,5절에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야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고야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창애를 땅에 베풀지 아니하고야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아무 잡힌 것이 없고야 창애가 어찌 땅에서 뛰겠느냐”

이런 생뚱맞은 예를 든다 이 말이지요. 그렇다면 아까 원리 이야기하고 응용문제 말씀드렸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약속을 통해서 나는 내 백성과 동행하겠다는 원리를 제시하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응용문제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초식동물 등 뒤에 짐승이 올라탄 격이라고 보면 됩니다. 쉽게 말해 그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서로 이질적이 된 그것을 버리지 아니하고 둘이 이질적인데 한쪽이 적극적으로 달라붙는 겁니다. 더 알기 쉽게 말해서 전설의 고향에 보면 이게 있지요. 내 다리 내놔라, 하는 것이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통해서 기어이 약속만은, 그 대목만큼은 뽑아내려고 하는 거예요.

어떻게? 초식동물 뒤에 짐승이 사자가 올라타서 갈 때까지 끝까지 달라붙어서 약속을 뽑아내는 거예요. 이 점에 대해서 하나님은 실패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방민족은 그게 없어요. 하나님의 약속이 없습니다.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살면 되지.” 아무 약속이 없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당하면서도 약속과 관련된 사태를 그들은 느끼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 성도의 모습 아닙니까? 육신으로 아담의 몸으로 태어나서 이방인처럼 우리는 약속도 없이 세상사람 부러워서 오직 하나, 마지막 최후의 1, 나는 나를 섬긴다는 것이 철두철미하지요. 거의 양보 없잖아요.

잠자나 깨 있으나, 눈을 뜨나 눈 감으나 오직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이 무슨 상황입니까? 약속이 등에 달라붙는 거예요. 주님의 약속이. “너는 지옥 못가. 너는 지옥 못갈 자야.” 약속이 달라붙어서 “네가 어디서 망했는지, 네가 뭐가 문제인지, 네가 어때서 약속의 위반자로 내 앞에 들통이 났는지, 내가 이제 너의 존재에 대해서 물을 것이다.” 존재에 대해서 묻는 겁니다.

그러나 이방사람들은 아무도 주님이 본인한테 묻지를 않아요. 성령이 안 오니까 물음이 없는 거예요. 선지가가 있습니까? 선지자가 있으면 묻지요. 선지자도 없고 말씀도 없고 성령도 없으니까 아무 물어주는 사람이 없어요. 주님께서는 물을 때, 질문할 때 명사로 질문하지요. 왜냐하면 약속에 관심이 있으니까. “내가 준 약속 어떻게 했지?” 이렇게 질문하지요. 내가 준 약속을 어떻게 했느냐.

그런데 인간들은 그 주님의 질문에 답변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동사로 답변해요. 동사로 답변한다는 것은 움직임을 보이는데 그 움직임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시간벌기 식으로 움직여요. 내일 잘할게요, 한 달 뒤에 잘할게요, 하나님, 두 달 뒤에 잘할게요, 이번 일만 성사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자꾸 시간에다 그걸 미뤄버려요.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 인간이 동사로 내빼는 방식을, 약속이 와야 그 죄성을 발굴해 낼 수가 있습니다. 이 점이 참 어렵지요. 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이 땅에 살면서 참 사는 것이 힘들어요. 힘들 때 정신적으로 뭔가 굴복감, 압박감을 느껴서 정신적으로 굴복을 당하는데 악마적인 추궁에 쫓겨 가지요. 쫓겨 가면서 시간을 지연시키면서 해결 보려고 시도해요.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나중 되면 형편 나아지겠지, 나중 되면 내가 하나님 잘 믿는 그날이 오겠지.’ 그러나 하나님이 묻는 것은 그런 움직임, 동사를 묻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이 말하는 그 시간이라 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자아의 길이에요. 시간의 길이가 자아의 길이입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희망이라고 해요.

희망이라 하는 것은, 포목점에 가면 둘둘 말린 포목이 있잖아요. 그 포목을 한번 쫙 펴보자 그 말이지요. 펄럭이면서 쫙 펴보게 되면 나로부터 시작된 시간이라는 포목이 펄럭이면서 쫙 펼쳐지면 거기다가 아름다운 미래의 꿈을 무늬로 새겨 넣어요. ‘언젠가는 내가 남 앞에 보란 듯이 무시당하지 않는 인생이 되겠다.’ 시간 탓으로 자꾸 돌리는 겁니다. 내가 희망하는 거기 까지의 길이가 나의 자아, 나의 잘남의 길이에요.

‘이번일은 한 6개월, 그 때 되면 앞으로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또는 ‘아, 이건 6개월 갖고는 모자라. 이것은 이번 사업이 제대로 되려면 한 3년, 3년 뒤에는 아마 내가 정상적인 신앙인 될 거야.’ 이렇게 자꾸 미루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는 제가 많이 듣지요. “요새는 바쁜데 내가 한 2년만 있다가 교회 나오겠습니다.” 또 “목사님, 잠시 쉬겠습니다.” 이런 사람들 있잖아요. 그게 자아가 시간을 갖고 놀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묻는 것은 그런 동사가 아니고 명사에요. “네 본질 속에 아직도 약속을 갖고 있느냐?” 다른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아직도 이 세상이 가짜고 망하는 세상이라는 인식을 아직도 네가 유지하고 있느냐? 이 세상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하나님이 자기백성만 건지고 나머지기는 불 심판으로 보낸다. 완전히 온 천지가 불바다 된다.’는 그 뚜렷하고 명확한, 결론 난 생각을 아직도 너의 인생관으로 유지하고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그게 네 본질로서 네 안에 들어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천국 갈 사람은 천국 가지만 지옥 갈 사람은 지옥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그 기쁜 소식이 아직도 네가 너의 가장 모든 행동과 생각을 우러나게 만드는 그라운드 바탕으로 자리 잡고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네가 누구냐를 묻는 거예요. 우리의 본질, 명사를 묻는 거예요. 그 질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그 질문에 대해서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이스라엘은 답변할 수가 없어요. 왜? 이방 민족화 되었기 때문에 답변이 안 되겠지요. 답변이 안 되니까 하나님께서 초식동물 위에 짐승처럼 올라탄 겁니다.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야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질문을 던지면서 그 질문에 대해서 그냥 아무 대가 없이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워어어어, 뭔가 부르짖는, 너는 나에게 잡혔어, 하는 어떤 결과성을 뽑아내는 거예요.

두 이질적인 것의 만남을 통해서, 교체를 통해서, 중복을 통해서 드디어 끄집어낼 약속을 끄집어냈다고, 주님께서 선지자를 보낸 그 역할을 제대로 했다고 하는 결과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게 뭐냐? 구원이에요. 구원이라는 것은 한쪽이 강압적으로 해서 둘이 이질적으로 만나야 구원이 돼요. 중첩이 되어야 구원이 된다고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국수를 맛있게 해요. 어떤 손님이 온다는데 그 손님이 국수를 되게 좋아해요. 그래서 손님맞이 하는 분이 ‘아, 저분이 오시면 내가 국수를 해 드려야지.’ 미리 국수를 하는 거예요. 그러나 보통 우리의 단선의 역사 같으면 국수를 해놓게 되면 아무리 손님이 바로 오더라도 국수가 퍼집니다.

국수가 퍼지면서 그 위에 올린 미나리 같은 채소도 흐물흐물해지면서 맛이 안나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국수를 미리 삶되 삶는 그 시간을 압축을 시켜서 콤팩트 cd에 그 시간을 담아버려요. 상상도 안 되지요. 단선적인 우리의 시간관으로서는 상상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콤팩트 cd에 담아버립니다.

그 다음에 손님이 딱 오니까 “잠간 기다려보세요.” 하고 cd를 꼽으니까 거기서 단박에, 그냥 평소 같으면 30분 걸릴 식사준비가 cd가 돌아가면서 3분 만에 방금 만들어낸 국수가 나오면서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접하는 경우. 시간 자체가 콤팩트, 응집이 되고 응축이 되는 것. 뭘 로? 완료된 시간, 완료된 시간으로 딱 준비가 되어 있다가 왔을 때는 마련되고 준비된 그 시간을 틀어줘 버리면 거기서 맛있는 국수가 즉석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되는 거예요.

부엌에 나가서 음식 한다고 재료 손질할 필요 없이 그 cd에 포함된 것만 딱 집어내면 됩니다. 그 cd에 포함된 것이 뭐냐? 선지자의 말씀이에요. 그 콤팩트 cd, 이미 말씀이 다 이루었다가 선행적으로 압축이 되어서 그 말씀 속에 들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신약에 와서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을 통해서 받게 되면 새삼스럽게 내가 천당 가려고, 구원받으려고 뭔가 싸댈 필요 없이 이미 완벽하게 퍼팩트하게 완료된 그 구원이 주님의 약속덩어리로서 우리에게 들어오는 겁니다.

여러분, 너무 신기해서 안 믿어지지요. 그게 바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요한계시록 보기 전에 6절에 보면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지금 여기서 제가 초식동물위에 짐승이 달려든다 했는데 원래 동행할 때는 사이좋게 동행해야 돼요.

그런데 3장 1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를 쳐서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그냥 이르시는 것이 아니고 쳐서 이른다고 쳐서. 그리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온 족속을 쳐서 이르시기를” 여기도 쳐서. 어떤 번역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적으로 간주해서.” 라고 되어 있어요.

적으로 간주해서 치시기를 “내 약속 내놔라, 처음 약속, 너희를 애굽에서 건져낼 때 내가 줬던 약속 내놔라.” 내 다리 내놔라, 전설의 고향 나오는 이야기하고 똑같은 거예요. “내 약속 내놔라.” “없는데요.” “그러면 내가 뽑아내야지.” 하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을 받아야 될 백성이기에 백성자체를 하나님께서 없애버립니다.

없애버리고 약속에 의해서 없는데서 다시 이스라엘을 만들어서 그 만든 백성에 참된 이스라엘에 해당되도록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통해서 그걸 콤팩트로 미리 사전에 그 날이 오기 전에 미리 cd로 구워서 거기에 정보가 다 담겨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6절 다시 보면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그 다음에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두렵다, 재앙, 이런 단어를 봐서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멸망시키도록 이미 조치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왜? 약속에 의하면 약속대로, 율법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스라엘은 망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망해야 된다는 그 망하는 그 자리가 바로 구원의 자리로서 적용되는 겁니다. 아까 제가 처음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자기를 비참하게 보는 것, 자기를 저질로 보는 그것이 약속만을 드러낼 수 있는 상대자가, 대상자가 돼요.

2가 되어야 될 것인데 자기가 잘나버리면 자기 쪽에서 비중이, 모든 인생의 관심이 나 잘되는 쪽으로 다 쏠리게 되는 거예요. 2가 되어야 할 텐데 1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1, 그것을 사태를 통해서 말씀에 의해서 그걸 제거해버리면 유일한 1로 누가 남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1이 되고 그 약속으로부터 새롭게 시작된 새로운 상대역, 그러면 약속을 통해서 2가 돼요. 없는 2가 발생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7절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하는데 이 방금 읽었던 이 말씀이 어디서완성이 되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10장 7절에 나옵니다. 아모스 3장 6절에 보면 나팔 이야기가 나오지요. 요한계시록 10장 7절에 나팔 중에서 마지막 나팔이 나옵니다.

7절에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 방금 우리가 아모스 3장 7에서 들었던 그 이야기를 그대로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모스 3장 7절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이렇게 되어 있지요.

요한계시록 10장 7절에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복음과 같이, 십자가복음같이 이루리라. 복음은 십자가지요. 다 이루어져야 되니까.

그래서 오늘 말씀을 처음부터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합당한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그 누구에게도 약속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에. 다만 애굽나라가 있을 뿐이지요. 애굽나라와 그 유사한 나라가 있을 뿐이지요. 전부 다 그렇고 그런 제 2 제 3의 애굽나라 또는 애굽나라를 지향하는, 애굽나라처럼 살려는 그렇고 그런 나라들뿐이에요. 하나님의 상대역은 없어요. 언약의 상대역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 약속을 딱 주지요. 약속을 주면서 그게 이스라엘나라에 약속이 스며들게 되어 있어요.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실제로 시내산에서 율법을 줬고요. 그리고 그들과 피를 가지고 계약을 맺었고요. 그리고 그런 하나님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대로 이루어나가는 여호와 하나님이다.”라고 했어요.

여호와 하나님 자체가, 다시 말씀드리면 여호와 하나님 자체가 뭐냐 하면, 자기가 던진 약속만 주목하고 그것만 찾는 분, 그 하나님이에요. 우리의 구원은 아니에요. 약속이에요, 약속. 약속이 있으면 구원되고 약속이 없으면 지옥 가는 겁니다. 그 방법은 무엇인가? 약속에 의해서 모든 인간을 다 죽여 버려요. 심지어 예수님도 죽여 버렸지요. 모든 것을 다 죽여 버려요.

그런데, 죽었는데, 죽은 자 가운데 약속을 가지고 도로 깨우십니다. 어떻게 깨우시는가? 산자로? 아니! 죽어있는 자를 죽은 자로 깨웁니다. 죽어 있는 자를 죽은 자 상태로 깨워요. 그래서 죽었음을 아는 사람만이 약속의 상대자이며 영생을 얻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사람이 안 죽었으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대로 우선은 돈 있어야 살고, 그 다음에 그냥 돈만 있으면 안 되고 남에게 인정받는 사람, 당신은 날 위해 존재한다는 거예요. 인정받고 싶어 해요.

그런데 여러분이 알다시피 누가복음 16장에서 돈 없고 인정도 못 받은 사람이 등장해요. 나중에 그 사람이 구원받는 모델이 되지요. 거지 나사로. 거지 나사로는 돈 없고 끝까지 사람들한테 무시당했어요. 인정 못 받았어요. 그래도 뭐 죽어서 낙원에 갔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는 것 죽는 것이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약속에 의하면 약속이 없는 세상에서는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구분이 없어요. 둘 다 죽은 거예요. 왜? 여호와는 약속만 바라보기 때문에. 약속이 살아 있으면 살아 있는 것이고 약속 없으면 살아도 죽은 거예요. 바로 그런 약속이 있는 사람은 더 이상 나를 최고의 1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 주님 앞에서 나는 마땅히 비참한 존재고, 저질중의 저질이며, 나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한테는 전부다 감사하고 과분한 일이 되는 겁니다. 아까 부부이야기를 했지요. 이 세상에 하나가 된 부부는 존재하지 않아요. 그러면서도 어떤 부부는 말썽 없이 행복하게 살잖아요.

그 이유는 어느 한쪽이 자기를 찌질이로 보고, 자기 자신을 저질로 보고, 자기를 비참하게 볼 때 상대방이 과분한 존재, 그리고 고맙소, 고마운 존재, 상대방을 감사하게 보기 때문에 비록 전적으로 하나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그럭저럭 ‘여보, 우리 강 건너가기 전에 행복하게 살자.’ 이렇게 그럭저럭 살 수 있는 거예요. 그럭저럭.

자기 자신의 가치를 누구한테 인정받을 필요도 없는 쓰레기 같은 인간으로 간주할 때 그 애 하나 가정에 있는 것, 또 그 어떤 것도 모든 것이 고맙고 과분한 것으로 감사히 받아들이지요. 진정한 부부는 주님이 신랑 되고 주님의 신부되는 것, 그게 진정한 부부고 그 외에는 진정한 하나는 없습니다. 너무 하나 됨에 기대하지 마세요. 우리 아담의 속성으로서는 말씀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아는 사람 같으면 고맙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어요. ‘너 나 무시하지 말라’ 그런 생각이 없으니까.

오늘 본문 아모스 3장 8절에 보면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두렵다, 또는 재앙 또는 6절에도 두렵다는 말을 하는 것은, 너희들이 내 약속을 개과천선할 수 있는 능력은 이제는 내가 없는 줄을 안다. 어디로 가자? 끝까지 가자. 어디? 시간의 끝까지. 시간의 끝까지 가서 시간 자체를 마감시켜버려요. 십자가에서 다 죽여 버립니다.

예수님이 죽은 즉 모든 인간이 죽은 거예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따라서 약속이 없다는 것은 이것은 확정된 겁니다. 딴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말씀을 이루자는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절대로 약속을 이룰 수 없고 말씀을 이루지 못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나팔은 모조리 다 멸망시키거든요. 일곱 나팔의 마지막이 뭐냐? 요한계시록 14장 19, 20절에 나옵니다.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천사가 예리한 낫을 들고 완전히 전 세상을 포도송이 타작하듯이 피천지로 만듭니다. 20절에 보면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다고 되어 있어요. 전 세계를 피바다로, 심판의 저주의 바다로 만드는 것이 나팔이 갖고 있는 함유하고 있는 약속의 마감입니다. 따라서 약속을 약속대로 하시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박수를 치고 거기에 동감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땅에서 죽어 마땅한, 망해야 마땅하고 비참해도 우리는 할 말 없어요. 그런데 마태복음 6장 29절에 보면 그런 우리를 위해서……, 자기 자신이 저질이고 약속을 아무것도 못 이루니까 저질이지요. 말씀 못 지키니 비참해야 마땅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29절에서 이런 복음을 주십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그동안 우리가 솔로몬의 영광을 추구하고 있는 거예요, 아니면 들풀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들풀은 보면 초라하고 아무것도 아니지요. 비참하고 밟아도 아무 반응도 못하지요. 우리는 ‘그 들풀이 얼마나 불쌍한가?’ 하고 생각합니까?

반면에 솔로몬의 그 모든 영광은 얼마나 출세고, 성공이고, ‘세상에, 저 자리가 내 자린데.’ 얼마나 부러워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반대에요. 솔로몬의 모든 영광, 뒤집어쓴 세상 모든 영광,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모든 영광, 모든 인간의 성공, 내일 베여서 아궁이에 들어가는 들풀보다 못한 이것이 바로 약속의 관점의 안목이에요. 그 안목입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뭡니까? 주님의 안목을 고스란히 우리가 부여받은 거예요. 들풀 추구하면서 인생 살아가는 사람 없잖아요. 이제는 들풀 속의 아름다움을 추구할 때 그 사람 속에서는 하나님이 원하는 약속이 완성된 채로 주님과 동행하고 있는 중인 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우리가 반대로 보고 있지 않았습니까? 남들 살아가니까 덩달아 그렇게 사는 줄로 잘못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자기에게,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데 마치 남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남 탓 하지 않았습니까? 세상 탓 하지 않았습니까? 주여, 이제는 우리 속에 있는 약속이 얼마나 고귀하고, 그 용서가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한 것인지를 더욱 더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5강-암 3장 1-8절(약속을찾으심)200930-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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