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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2 06:30:31 조회 : 60         
광주강의20200925a 마가복음15장 24-32절(생겨난 죄)-이 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IP:122.43.170.138)
광주강의20200925a 마가복음15장 24-32절(생겨난 죄)-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5장 24절부터 하기로 그렇게 되어 있죠. 근데 21절부터 보게 되면,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그렇게 되어 있죠. 여기 시몬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하는 대목에서 십자가가 부각됩니다. 근데 십자가를 지는데 어떻게 지느냐 하면은, 십자가와 시몬이 부각되는데, 이게 억지로 해요. 억지로. 십자가가 부각이 되면서, 마가복음 15장 21절부터는 십자가가 연이어 계속 나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사도바울에게서도 갈라디아서 3장에도 그렇고 6장에도 그렇고 십자가를 증거 한다. 십자가가 모든 인간에게 일어난 모든 의미를 포함시킨다. 이래 보시면 되죠. 모든 의미는 어디서 나오는가, 십자가에서 나온다. 말이 굉장히 쉬운데, 어떻게 해서 모든 의미가 십자가로 이게 모아지고, 그리고 모든 의미가 십자가에서 펼쳐지고 그렇게 되는가, 그걸 한번 생각해봅시다.

십자가를 강조하는 것은 죄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 시몬이라는 사람은 십자가를 억지로 졌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강조한다는 것은 앞에다가 “억지로”를 붙이는 겁니다. 억지로 죄를 드러내게 하는 겁니다. 이 땅에 죄라는 것을 억지로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죄가 억지로 드러내는 이 상황이 모든 것이 십자가로 거기서 모아진다. 여기서 종합이 되고 집중이 되고 응집이 된다. 응집이라는 말이 적당하겠네요. 모든 것이 다, 이 세상의 것이 다 십자가로 응집이 된다. 이 말은 죄를 드러내는 이 일을 하나님께서는 억지로라도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죄라는 것을, 인간은 죄라는 것을 모르는데, 모른다. 그런데 죄라는 것을 생각하면 죄가 돼요. 죄라는 것이 없는데, 중요합니다. 인간이 죄라는 것을 생각하는 순간 그것이 바로 죄가 돼요. 모든 길에 지뢰를 깔아놨는데, 집에 가만히 있으면 지뢰를 밟을 일이 없죠. 근데 길로 나서버리면서부터 팍팍 터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인간이 죄라는 것을 생각하는 순간 죄가 되고, 그것이 죄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 죄책감이 들고, 죄책감이 드는 순간 그 죄를 억지로라도 지워야 내 마음이 편해져요. 내 마음이 편해진다고요.

그러니까 죄라는 것을 생각하고 그 죄를 없애기 위해서 선한 행동, 바른 행동, 이런 것으로 죄에 대해서 회수를 시키려고 하는 그것조차도 뭐가 되느냐 하면은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이 죄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그냥 죽은 시체가 되어서 관속에 가만히 있으면 죄를 모를 텐데, 인간은 그냥 가만히 있는 돌멩이가 아니잖아요. 뭔가 밥을 짓거나 빨래를 하거나 뭘 해야 되지 않습니까? 하면서, ‘아이고, 이거 잘못했다. 드럼세탁기에 넣지 말아야 될 것을 넣었구나.’ 만약에 소금을 너무 넣어서 반찬이 짜게 되고. 이럴 때, 우리는 뭔가 잘못 되었다. 일이 뭔가 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는 그 순간, 죄를 아는 것이 아니고, 그 순간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거예요. 인간에게 죄가.

그렇게 이해하게 되면 시몬+십자가, 시몬은 촌에서 왔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진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랐으니까 억지로 지게 했죠. 시몬이라는 보통사람, 우리같이 그냥 보통사람이 억지로 뭘 졌습니까? 십자가를 진 거예요. 근데 시몬은 죄라는 것을 모르는데, 뭘 알게 되었느냐 하면은 죄의 원천을 알게 된 겁니다. 결합이 된 거예요. 죄의 원천과 결합이 된 거예요. 이럴 때, 시몬은 무엇의 원형이 되느냐 하면은 성도의 원형이 돼요. 성도의 원형이.

성도는 뭐냐 하면은 제가 수요일에 이야기했죠. 원형과 닿게 되는 것. 원형과 이어지는 것. 그게 성도고 그게 이스라엘이고 그게 하나님 백성입니다. 인간의 인간적인 모든 해결책이 왜 소용이 없느냐 하면은, 인간인 내가 해결책을 하는 것은 원형과 닿지를 않아요. 십자가와 닿는 것이 아니고 뭐와 닿느냐 하면은, 나와 닿아져요. 나. 나와 닿아진다고요. ‘에휴, 이건 분명히 내가 죄를 지어서 이런 벌을 받는구나. 그러면 내가 앞으로 기도를 더하든지 아니면 열심히 하나님을 섬겨야지.’라고 해결책을 내놓는다면, 그건 십자가와 닿는 것이 아니고 나와 닿아서, 죄의 원천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은, 내가 잘못해서 죄를 지었다. 이래 되는 거예요. 내가 잘못해서.

들어보면 굉장히 겸손한 것 같지만,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는 이게 바로 오만함이죠. 인간은 죄를 짓는 최초의 인물이 될 수가 없어요. 인간은. 인간 이전에 죄가 먼저 있으니까. 죄가 왕 노릇하고 있으니까. 여러분 이건 상식인데 옛날 동양역사에 보면 그런 게 있죠. 나라가 있는데 홍건족이 등장했다. 북방의 마적 떼가 등장한다든지, 적군이 쳐들어온다든지 할 때, 왕이 하는 말이 “각 가정마다 남자장정을 내보내어 군대로 모집해서 이 적들을 쳐부수자.” 이렇게 합니다. 그럴 때, 어떤 가정에서는 남자가 다리가 아파서 병들었을 때, 딸이 나서서 아버지가 나설 수 없는 그것을 대신해서 갑옷입고 칼 들고 홍건족인지 북방 왜적을 물리칩니다. 물리칠 때, 이 모든 것은 뭐냐 하면은 황제를 내가 지키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해야 된다. 지금 하고 있는 뮬란이라는 영화에 보면 이게 나와요.

황제를 위해서, 황제를 지키고 나라를 지키는 것이 우리의 도리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가정은 마지막 누구의 말을 듣느냐 하면은 황제의 말을 듣는 거예요. 황제를 위하여. 이문열 소설에도 이런 게 있죠. ‘황제를 위하여’ 황제의 명, 황제가 있어야 나라가 되니까, 황제가 나라의 대표니까. 나라가 있어야 우리 가정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면 황제를 위해서 하면 나의 의미는 황제로서 마감이 돼요. 마감이 되는데, 이 시몬이라는 사람은 난데없이 십자가와 이렇게 엮여져버린 거예요. 십자가와.

자, 그러면 물어볼게요. 시몬이 십자가를 억지로 지기까지, 그 당시 유대나라의 제일 통치자가 누굽니까? 로마가 권세를 가지고 있고 정신적으로는 유대지도자가 권세를 갖고 있죠. 그러니까 로마 군인이 억지로 지게 하니까, 시몬이 반항하지 못하고 십자가를 억지로 진 거예요. 억지로. 명령은 따랐는데 본의 아니게 십자가와 엮어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는 전에는 뭐냐 하면은 황제를 위해서, 동양으로 말하면 황제를 위해서, 지금은 로마의 권세자를 위해서, 그 권세자를 위해서 사는 것이 자기 존재의 의미라고 생각했는데, 본의 아니게 뭐와 닿게 됐느냐 하면은, 원형, 모든 의미의 원형. 이 원형과 이렇게 닿게 되면 죄라는 것은 나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돼요. 죄라는 게.

사람은 이 십자가와 만나고 죄의 원형과 만났을 때에 무엇이 구멍이 나느냐 하면은, 내가 있는 곳, 내가 있는 세계, 나의 이 모든 것에 구멍이 나버리는 겁니다. 여기 21절에 보면,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들 구레네 사람” 이래 되어 있죠. 구레네 사람이라고 되어 있죠. 자, 이 시몬은 고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고향이 있죠. 자기의 고향. 나의 살던 고향이 있다 이 말이죠. 고향, 그 고향, 돌아갈 고향, 그것이 구멍이, 빵꾸가 나버린 거예요. 왜? 내가 지금까지 알았던 나의 살던 고향, 내 눈에 보이는 이 나라, 황제, 지도자, 사람 사는 것은 이렇게 사는 것, 이게 당연하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뭐 그렇게 사는 것. 그런데 거기에 빵꾸가, 구멍이 나버린 거예요. 그것도 억지로.

왜냐 하면은 십자가 지신 분은 이 땅에 고향이 없어요. 이 땅에 고향이 없습니다. 고향이 없고, 이 땅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형편만 주어졌어요. 형편. 그런데 사람들은 이 형편이 우선이 아니고 뭐가 우선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면은 자기의 성질이나 성격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부모로부터 “니는 여자면서 성격이 왜 이렇게 와일드해? 이래가지고 시집이나 가겠어? 너에게 장가올 사람이 있겠어? 성격 고쳐. 니는 성질이 문제야.” 이래잖아요. 어느 부모가 “니가 그렇게 살아온 것은 형편이 그렇고 환경이 그래서 그런 거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어요. 니 성격을 고치면 이 형편에 맞춰서 잘 살 수 있다고 이렇게 보는 겁니다.

자, 한번 봅시다. 형편과 반대말은 뭐라고 했습니까? 성질 또는 성격. 성질, 성격이 현재 주어진 형편의 반대말이라고 보시면 돼요. 왜 그러냐 하면은 성질, 성격은 우리가 고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형편은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손을 못되잖아요. 그래서 주어진 형편 가운데 내가 보다 나은 삶을 살려면 성질과 성격을 고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성질과 성격을 어떻게 고치느냐 하면은 죄가 많이 끼어있는, 죄 지을 수 있는 성격, 성질을 선하게 바꾸면 이 형편에 맞춰서 나는 사람답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따라서 내가 이 형편 속에서 편하게 살기 위해서는 또 우리는 뭘 의식하느냐 하면은 이 죄라는 것을 의식해야 하는 거예요. 내가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죄라고 의식하는 순간 그게 없던 죄가, 죄가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죄라는 것을 의식 안 하려면 성격이나 성질 이거는 문제가 아니고, 주어진 형편이 어디서 왔는가가 이게 우선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되죠. 그 대표적인 예가, 이 시몬이라는 사람은 그냥 길을 갔는데 억지로, 뭐와 만납니까? 억지로 뭘 지게 되죠? 십자가를 지게 되죠.

십자가는 누구 형편이냐 하면은 십자가는 예수님의 형편이다. 예수님의 형편. 근데 예수님은 지금 이 땅에 고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고향이 없어요. take me home country roads, 고향으로 날 보내달라는 그게 안돼요. 그게. 존 덴버 노래. 날 웨스트버지니아로 데려갈 일이 없어요. 십자가 지신 분이 있는데 그분은 이 땅에 고향이 없어요. 이 땅에 뭐가 없느냐 하면은 이 땅에 자기의 자리가 없어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 땅은 자신의 원형이 아닙니다. 원형은 따로 있다 이 말이에요. 따로 있는 그분의 형편과 이 땅의 고향에 적을 두고 있고, 이 땅에서 사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구레네 시몬과 이게 억지로, 강제로 만난 겁니다.

이렇게 만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자체에 원형이 되지 못하고 이 세상 형편에 구멍이 뚫렸다. 구멍이 뚫려버리면 이게 출입구가 되죠. 하늘나라 출입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긴 이야기가 처음에 시초를 뭐로 뒀습니까? 이 땅에는 죄가 없다. 이 땅에는 죄를 알지 못한다. 이 땅이 죄를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자기의 성질이나 성격을 고쳐서 내가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동원된 의식이거든요. 그런데 이 죄의식은 원형을 찾지 못하고, 원형이 아니에요. 원형은 뭐냐, 내가 보다 더 훌륭한 사람, 이것이 원형이고. 이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어떤 병행되는, 연동되는, 같이 생겨난 개념, 필요한 개념 정도. 필요한 개념정도로 보는 거죠. 근원적으로 죄라는 것은 나하기 나름이다. 내가 착하게 살면 죄가 없어지고 내가 마음을 놓게 되면 죄가 들어온다. 뭐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쨌든 간에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우리는 죄라는 것은 없는데, 우리가 나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면 그때부터는 보다 죄가 더 적어지고 죄가 많아지는 나를 생각하는 게 되고, 그 순간 이미 그 자체가 죄가 된다는 거예요. 죄가 돼요. 그러면 억지로 십자가를 진 구레네 사람 시몬은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죄가 없죠. 왜냐하면 자기는 억지로, 죄가 없는데, 자기가 짊어진 십자가 사건이 죄의 원형이거든요. 원형을 딱 보는 순간 자기는 그 안에서 죄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죄짓는 원자, 원형이 아니거든요. 내가 죄짓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왜냐하면 죄는 십자가라는 사건 안에서 죄가 시작이 되기 때문에, 나부터 죄가 시작된 것이 아닌 차원에서 나에게는 죄가 없는 거죠. 그렇다면 그 뒤에 여기 24절에,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누고 하는 그 대목이 나오죠. 이 사람들의 죄는 뭐냐 하면은 십자가도 모르는 체,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 처형을 통해서 예수님의 흔적을 지워버리고자 하는 그 의도, 그 의도가 죄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인이고, 예수님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왜? 자기 세력에 위반이 되니까 죄잖아요. “자기가 저거는 죄인이야. 사형시켜도 마땅해.”라는 순간, 그들은 이미 죄를 짓고 있는 겁니다.

지금 20분이 지났는데 이쯤해서 이해를 해야 돼요. 이쯤해서 진짜 이해를 해야 됩니다. 인간이 자기 형편을 개선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내 성격상, 내 성질상 할 수 있는 일을 조치를 할 때, 그게 바로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거예요. 죄가. 그리고 지금 나오는 로마군인들과 거기에 있는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 서기관들이 30절에 나오죠. 이 사람들이 지금 뭘 빨리 치워버리려고 하는 거예요? 예수그리스도라는 존재를 치우기 위해서 분주하죠. 왜 분주하냐면 자기들 보기에 그게 죄고 나쁜 것이기 때문에 지우려고 하잖아요.

예수님을 지우려고 하는 순간, 그들은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는 거예요. 없었던 죄가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 누구 때문에? 예수님 십자가 때문에. 그들은 본의 아니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게 죄냐, 아니면 죄의 원형은 따로 있는가에 대해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추궁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게 로마군인들과 제사장들이 자기 단도리, 자기를 선하게 만들기 위해서 애쓴다는 이러한 시도, 시도가 그때만의 일이 아니에요. 오늘날 우리들이 평소에 하는 모든 생각들이 바로 이 제사장들이 하는 짓을 지금 그대로 하고 있어요. 우리가.

그러니까 성경이죠. 성경은 특정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들에게 다 해당이 되잖아요.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가게가 지금 코로나 때문에 폐업을 할 지경인데, 폐업을 해야 되는데, 전에 아홉시에 출근했던 직원이 새벽 여섯시에 와가지고 청소하고 번쩍번쩍하게 광이 나도록 청소하고 그러면 주인 입장에서는 이게 부담이 됩니까? 고맙습니까? 부담되죠. 끝났는데. 되게 미안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고 하는 이런 이야기가 오늘날 식당가게하고 애 키우는 사람들에게 부담이 돼요? 안돼요? 부담되죠.

왜? 너무 오버하는 희생을 하는 거예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는데, 내가 죄지을 것 안 짓고 착한일하고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는데, 왜 유난떠느냐 이 말이죠. 우리 주님이. 왜 유난을 떨어요? 너무 희생해요. 우리는 그런 희생을 요구한 적도 없는데. 십자가에 죽기까지 그 정도로 희생할 필요가 없는데, 우리 생각에는 그런 거 전혀 필요가 없어요. 왜냐 하면은 내 성질, 내 성격을 바꾸는 데는 내가 알아서 하면 되거든요. 게으름 피우지 않고 아침 일찍 나와서 성경보고 기도하면 되는데. 이러면 되는데 너무 예수님이 유난을 떠는 거예요.

십자가에 죽고 피 흘리고. 희생당하고. 누가 하라고 했어요? 내가 요구했습니까? “주여, 나는 내 힘으로는 죄용서 못 받으니 주께서 뭐 어떻게 좀 해주세요.” 이렇게 요청한적 있어요? 우리는 요청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은 내 인생은 누가 책임집니까?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내가 책임지잖아요. 내가. 내가 책임지기 때문에 극도로 누구에게도 짐 지우기 싫은 거예요. 우리의 본성상. 모든 인간이 그런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뭘 생각하느냐 하면은 내가 깨끗하고 건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뭘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느냐 하면은 이것이 죄일까? 이것은 착한일일까? 늘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자신이에요.

그게 바로 죄인이에요. 그게. 그게 예수님 십자가에 죽인 죄인이라고요. 그게. 구레네 시몬을 보세요. 이거는 난데없이 걸려들었잖아요. 난데없이. ‘저 십자가를 져줄까? 말까? 힘든데.’ 이거 아니라니까요. 억지로, 억지로 짊어진 거예요. 억지로. 주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졌다고요. 죄의 원형을 직접 만났어요. 죄냐, 아니냐는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결정한다? 주님이 결정하거든요. 주님이 결정한 죄를 직접 만나보니까, ‘내가 어떤 짓은 나쁜 짓인데, 아이고, 길거리에 침을 한번 뱉으면 그건 죄가 아닐까?’라는 그런 생각조차, 이제는 더 이상 십자가 지는 순간 그런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 죄라는 것을 생각할 필요조차가 없어요.

‘이거는 죄일까? 아닐까? 조심스럽게 인생을 살아야지. 남한테 배려해야지. 내가 하는 행동이 남한테 죄가 되고 이웃사랑 아닌데.’ 이러한 생각을 십자가 짊어지는 순간, 그런 것은 다 부질없는 생각이에요. 다 쓸데없는 생각이에요. 죄라는 것은 이 땅에 인간들이 찾아낼 수 없었다. 이 땅에 없어요. 죄라는 것은 이 형편에, 이 환경에 자리가 없는, 고향이 없는, 그분이 여기에 알려줘야, 그분이 십자가 져야, 그게 바로 죄의 원천, 죄의 원형이에요. 죄의 원형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자기를 위해서 노력해도 그것은 원형과 닿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제가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원형과 닿지 않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제가 강남강의 두 번째 강의에서, 자꾸 강남강의를 언급하는 이유는 그때 강의하면서 뭔가 정리가 안 된 것 같아가지고 제가 찝찝해서 그러는데. 강남강의 두 번째 강의하면서 내가 과연 구원받은 사람인가, 자꾸 생각하고 사색하고 검토하고 그걸 측정하려고 하는데, 내가 죄인일까, 아니면 의인일까, 내가 이렇게 하면 구원받은 사람이 맞나, 성령 받았나, 안 받았나, 죄 씻음 받았나, 라고 생각하는 것을 제가 동그라미를 쳤죠. 동그라미 친 걸 바로 뭐라고 했죠? 이게 바로 무의미하다. 이게 무의미한 거예요.

구레네 시몬처럼 십자가를 억지로 한번 져봐야, 이런 나에 대한 사색, 나에 대한 관찰이 해도 소용이 없고 안 해도 소용이 없는 아무런 의미 없는 짓이 돼요. 아무 의미 없는 짓이에요. 내가 그때 나쁜 짓을 해서 내 딸에게 나쁜 일이 생겼구나, 라는 거라든지. 내가 말을 잘못해서 멀리 계신 분이 기분 나빠서 악플은 아닌데 이상한 문자를 보내왔구나. 다 내 탓이요, 해봤자 자기 가슴만 아플 뿐이죠. 내 탓이요, 해가지고 다음에 말할 때는 조금 조심해서 말해야지. 주여, 반성합니다. 회개합니다. 이게 다 의미 없는 짓이에요. 바로 그렇게 행동을 한다는 자체가, 자기가 뭔가 죄를 의식하게 돼 있잖아요. 그 의식하게 된 게 바로 몰라도 될 죄를, 죄를 알게 된 거예요.

누구 생각할 때? 내 생각할 때. 내가 뭔가 고치면 이 환경에 맞출 수 있다. 내 쪽에서 내가 수정하면 된다.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은 뭐 자기가 성화된다고 우기는데 성화되는 게 아니죠. 여기에 대해서 적절한 사자성어가 있어요. 자기연민이에요. 자기연민. 자기를 굉장히 불쌍하게 여기는 거예요. 자기를. 그래서 가게를 폐업하고자 하는데, 내보내야 될 직원이 뭔가 눈치를 챘는지 열심히 하고, “사장님! 또 뭘 해드려야 할까요?”라고 할 때에, 그게 굉장히 부담스러운 거예요. 미안하고. 내가 예수님을 사랑 안 하면 내가 지옥가면 그만인데.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받는다고 했잖아요. 그럼 저주받으면 그만인데, 자꾸 예수님이 십자가 지니까 그게 부담스러운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 져봤자 내가 믿을 위인이 아니거든요. 예수님께서 열심히 해봐야 내가 믿어줄 위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 가게가 어떻게 잘 되느냐 그것만 관심이 있지, 우리 집 직원이 뭐 어떻게 열심히 하고, 이거는 이차적인 관심이고. 일차적인 관심은 내가 우선 살고 보는 것이 일차적인 관심인데. 예수님은 타인이잖아요. 내가 왜 그것까지 신경을 써야 됩니까? 예수님의 사정까지 왜 고려해야 돼요? 내 사정도 급한데. 우리는 내 사정이 급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보기에 괜찮다 싶으면 그냥 만족하고 싶어요. 근데 괜찮고 싶은데, 내가 보기에도 참 얼굴 들기에 곤란할 정도로 나쁜 짓을 하고 나쁜 생각을 갖는 거예요. 이것 때문에 고민이다 이 말이죠.

근데 나쁜 짓, 나쁜 생각이라고 고민하는 그 순간, 그게 바로 내가 죄인으로 드러나는 순간이 되는 거예요. 여기엔 억지가 없거든요. 자연스럽지 억지가 없다 이 말이죠. 억지스러운 사태가 안 벌어지고 있고, 나는 내가 보기에 만족스러운 그것이 나의 희망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구레네 시몬은 억지가 됐거든요. 그 사람도 자기연민이 있죠. 있는데, 여기에 억지가 개입이 돼버리니까 십자가가 쑥 들어온 거예요. 들어오니까 자기 연민을 해도 죄가 아니고, 안 해도 죄가 아니고. 이래도 죄 아니고 저래도 죄 아니에요. 왜냐 하면은 시몬은 십자가가 죄의 원형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도구로서 자기 존재의의는 끝난 거예요.

십자가진 내가 어떠냐가 아니라 자기가 진 십자가가 무슨 의미냐에, 거기에 자기가 종속되고 마는 겁니다. 십자가 쉽습니까? 나는 무지무지 쉬워 보이는데. 이런 인생이. 얼마나 쉬워요. 여러분, 밤에 잘 때 온갖 꿈을 꾸잖아요. 또 잠을 깨기도 하고. 갱년기가 돼서 잠이 안 온다고 새벽 세시에도 TV틀고 하잖아요. 온갖 생각을 다하죠. 그런데 바퀴벌레가 여러분 팔위에 올라온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올라오게 된다면 뭔가 느낌상 이상하게 되죠. 이만한 자벌레가 올라왔다고 한다면, 그때 그래도 TV를 보십니까? 급선무가 뭡니까?

내가 예상 못한 억지환경, 자벌레가 올라오는, 바퀴벌레가 올라오는 이 환경에 대해서 나는 어떤 조치를 하겠죠. 그 순간 나의 꿈 이야기, 오늘밤 내가 어떻게 했다는 이런 이야기가 싹 달아나는 거예요. 뭔가 이질적인 것이 덮어씌우면. 이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찾아오신 거예요. 온종일 나만 생각하다가 나를 놓쳐버리는 순간, 이것이 바로 내가 예상 못한 다른 형편이 나에게 덮쳐버린 거예요. 그렇게 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아니고, 무슨 관계냐 하면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새로운 형편을 통해서 우리에게 침투한 거예요.

죄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모든 관계를 사람 대 사람의 관계 또는 나와 나의 관계로 이게 전부 다 굳어져 버린 거예요. 이게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소망하는 것, 희망하는 것이 이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희망하고 소망하는 것. 지금보다 더 내가 좀 더 좋은 인간성을 갖자. 이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은 그 의미가, 원형이 항상 나에게서 종결되고, 그게 자기 연민이거든요. 그런데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뒤집어써야 되니까, 이거는 본인이 예상한 형편이 아니에요. 근데 그 십자가가 무슨 관계냐 하면은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잖아요.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 이거는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아닙니다.

근데 여기서 예수님을 못 잡아먹어가지고, 그 뒤에 한번 봅시다. 24절,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자, 이런 짓을 왜 하는 겁니까? 이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옷을 나누고, 왜 그렇게 합니까? 방금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이 사람들의 모든 관계는 모든 것이 사람 대 사람의 관계로서 이 환경이라는 것이, 삶의 환경이라는 것이 조성된다. 거기에 완전히 굳어져버린 거예요. 모든 것은 사람 대 사람의 관계다.

그 사람들이 언제 예수님한테 원한관계에 있었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까? 위에서 지시한대로, 지시하니까 하는 거예요. “어? 바닷가에 사람이 있네. 여봐라! 총 쏴라!” 두두두두두~~ “불태워라!” 확 불 지르고. 왜 그렇게 합니까? 그 사람하고 남쪽 공무원하고 북한 공무원하고 언제 아는 사이였어요? 아는 사이였습니까? 모르는 사이였죠. 근데 그거 누가 지시했어요? 윗사람이 지시하죠. 그럼 윗사람하고 나하고 무슨 관계입니까? 그게 바로 사람 대 사람의 관계잖아요. 사람 대 사람의 관계.

지시하신 분이 주님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까? 아니죠. 사람이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사람에게 묶여있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사람한테 왜 묶여 있느냐 하면은 내가 사람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말 저 말을 다 끌어 모아버리면 누구한테 묶여있다? 내가 나한테 묶여있는 거예요. 내가 나한테 묶여있으면서 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된다면, 사람 대 사람으로 형성되는 이 사회에서 나는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살 수 있다. 이런 것 때문에 노력하다보니까 우리는 뭘 생각하느냐 하면은 ‘이게 지금 나쁜 짓 일거야. 아니, 이거는 선한 일이니까 하고 나쁜 짓은 안 해야지.’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사람은 소속이 결정되어 버린 거예요.

소속이 어딥니까? 이 땅이 고향이라. 이 세계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이 된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이 오게 되면 죽여 버리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이 오게 되면. 왜? 예수님은 사람 대 사람의 관계의 사람이 아니고 인간에게 없는 하나님과 예수님 자신의 관계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거 분명히 해야 돼요.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는 것을 분명히 해줘야, 왜 마가복음, 복음서 이후에 왜 사도의 편지에서 전부 다 십자가로 일관하는지를, 왜 십자가로 일관하는지를 우리가 알아야 돼요. 왜 십자가로 일관하는지를.

지금 우리가 원형도 아니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원형도 모르고 있으면서,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돈독하게 되고 그 사람과 좋은 관계가 유지되게 되면, 아마 하나님도 착하게 살았다고 좋은 점수를 줄 거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제가 한 문장으로 써보겠습니다. 뭐냐 하면은 인간은 자기에 대한 사명감밖에 없다. 뭐 안 하는 짓 해볼까요? 다 같이 한 번 읽어봅시다. “인간은 자기에 대한 사명감밖에 없다.” 자기 사명감에 투철합니다. 끝이에요. 없어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자기 사명감밖에 없어요.

복음십자가 그게 나한테 도움이 됩니까? 복음이야기하면, 그거 나한테 도움이 됩니까? 물음 자체가 이미 글러먹었어요. 억지로 나 안 믿겠다는 거예요. 내가 계산기 튕겨보고 나에게 이익이 된다면 나는 십자가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왜? 나는 어디에 투철하기 때문에? 나는 나를 지키는 사명감에 투철하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하는 그 일꾼들과 지시하는 로마군인들, 그걸 지켜보는 제사장들, 이 사람들이 다 어디에 투철한 사람들입니까? 내가 평생 일궈놓은 나에게 투철한 거예요. 제사장으로서 이 예수를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내 자리, 제사장이라는 이 직분에 대해서, 이 권세에 대해서 의심을 하기 때문에, 의심이 가면 누구만 손해다? 나만 손해잖아요. 미쳤다고 내가 손해 보는 짓을 합니까?

그래서 저 예수는 누군지 모르겠고, 내가 찾는 것은 본능적으로, 본능적으로 내가 아는 것은 나는 나만 지키면 그만이에요. 나는 나만 지키면. “당신은 남편이 돼가지고 왜 자꾸 복음 전하러 돌아다니느냐, 복음 전한다고 왜 자꾸 돌아다니느냐, 그러면 나는 당신한테 뭐고? 뭐야? 복음에 대해서 그렇게 신경 쓰는 거, 10분의 1만큼이라도 나한테 신경 써봐라.” 이런 소리 들어본 적 없어요? 들어본 적이 없습니까? 그런 소리를 누르고 눌렀다가, 누른다고 스프링처럼 없어지는 것이 아니거든요.

에이, 터트려가지고 나오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당신이 복음을 찾는 것은 당신 본인에게 이익이기 때문에 그렇게 복음을 찾잖아. 그렇다면 나도 내 이익에 대해서 충실할 권리가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서로 협상해서 당신 복음 전하는데 쫓아다니는 거 10분의 1만이라도 나한테 양보해서 우리 산이라도 함께 놀러가자. 나는 내 행복을 찾고 싶어. 내 행복을. 당신을 복음한테 뺏겼고, 도대체 나는 뭐고?” 보통 고함을 지를 때는 순수한 상황이 있을 때 고함지르거든요. “당신한테 나는 뭐고? 당신은 당신 좋을 대로 했는데, 나 좋을 대로 할 때는 당신은 왜 안 도와 주냐? 부부가 돼가지고.”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뭐라고 해야 됩니까? “나 지금 억지인데. 나도 당신처럼 나 개인을 위해서 할 것 같으면 나도 복음은 대충 듣고 또 놀러가겠는데. 이게 나도 내 맘대로 안 돼. 나도 구레네 사람 시몬이야.” 주께서 강제로, 억지로 뒤집어씌워버렸어요. 그렇지 않고, “아이고, 당신 말이 맞아. 내가 너무 복음 전한다고 따라다니느라 부부로서 당신에 대한 의무감을 좀 소홀히 했네. 그래, 당신 말대로 당신이 좋아하는 거 내가 많이 들어줄게.” 이러면 그 사람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구레네 사람 시몬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그 부인이나 그 남편의 말 그대로 자기 즐거움을 위해서 복음 쫓아다닌 거예요. 자기 즐거움을 위해서. 자기 취미생활 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머리가 좋으신지, 하나님께서 머리 좋다는 말은 어폐지만. 여차하면 이거 욕 얻어먹을 일이에요. 하나님 까불지 말라고 해서 욕 얻어먹은 사람 있잖아요. 하나님이 바로 가짜, 진짜를 구분하기 위해서 주위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반박이 안 되는 그런 이야기를 기존에 있는 형편에다가 마구 쏟아지게 만드는 겁니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국궁표적지. 계속 쏘아버리는 거예요. 뒤에서. “니는 니 복음 듣는 게 재미있지? 나는 재미 하나도 없어. 니만 재미대로 살 거면 결혼은 왜 했는데? 나도 나 재미있는 것으로 돌아다녀 도!” 이런 식으로 계속 화살을 쏘아오는 거예요.

주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마귀를 보내가지고 일부러 하는 거예요. “에휴, 그래, 나 즐거움을 위해서 그렇게 하자.” 이러면 그건 가짜죠. 가짜인데, “아닌데, 나 즐거움 때문이 아닌데, 니 형편하고 내 형편이 달라. 니 형편은 눈에 보이는 고향, 이 세상, 이것이 종착점이잖아. 근데 내 고향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멍이 뚫린 저쪽 세계야.”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또 내가 못 알아듣는 괴상한 논리를 억지고 갖다 붙인다고. 니하고 이야기한 내가 바보라고 삐져가지고 돌아서버리고. 거기에다가 뒤에서 한마디 해주세요.

“당신이 당신 행복을 위해서 하고자 하는 그 모든 취미활동 이런 것들은 결코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왜? 당신은 진짜 우주의 원형과 닿지 않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기 때문에 해답도 없고, 의미도 없는데, 한번 찾아보려고 꾸준히 내세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라고. 그리고 “내가 복음을 볼 때 프로야구 봤잖아. 새벽 두시고 세시고 손흥민이 뛰는 유럽축구 생중계로 봤잖아.”라고. 인간은 아까도 봤지만 사명이 있잖아요. 누구한테 사명이 있습니까? 본인 자신을 본인이 지킨다는 사명이 아주 투철해요.

누가 그렇게 했겠어요? 바로 십자가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미 그 내용을 알려줬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이렇게 학대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은 결코 인간의 뜻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권세다. 너희들이 모르는 권세. 알 수 없는 권세. 악의 권세. 너희들은 생각하기를 내가 죄 지으면 악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야. 악이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사건이 터져야, 악의 원형은 바로 예수님과 관련되어서 악이라는 것이 등장하는 거야.” 내가 불행하고 비극이라고 하는 그것과 관련되어서 나오는 악은 그건 악이 아니거든요. 내가 불행해진다. 내가 슬퍼진다. 내가 아프다. 이것은 악이 아니에요. 악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악이에요.

그 악의 원형과 결합이 되어야, 우리는 애초부터 악에 대해서 몰라도 돼요. 왜? 알아봤자 해결책이 없으니까. 악에 대해서 아시는 분은 누구만으로도 충분합니까? 예수님만으로 충분해요. 악을 유일하게 아셔야 악의 해결책도 원형과 연결되어 있거든요. 원형.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그게 죄 씻음이 된다는, 악의 해결책은 예수님만 알고 있어야 돼요.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성령을 통해서 나중에 우리가 통지를 받게 되죠.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되죠.

이 말은 니가 아무리 몸부림친다고 해서 니가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은 니 성격과 노력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니 성질, 성격고치는 것하고는 아무상관이 없고, 니가 니 삶의 형편을 바꾸는 것하고도 아무상관이 없는 거예요. 이거는. 이 세상 돌아가는 형편이. 우리가 걱정하는 것도 주님께 누(累)가 됩니다. 염려하는 것도 누가 돼요. 왜?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염려하고 걱정합니까? 일은 주님이 벌여놨는데. 우리한테 일이라는 것은 일도 아니에요. 일은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다시 첫째시간 끝내면서 복습을 합시다. 자, 모든 의미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결정된다? 안 된다? 결정되지 않죠. 모든 의미는 어디서 나옵니까? 하나님과 주님 사이에 모든 것의 의미와 개념이 거기에 전부 다 담겨 있잖아요. 그럼 우리가 ‘이번 일은 안 돼. 이번 일은 실패야. 왜 하는 일이 안 되지. 왜 몸은 아프지. 염려되네.’ 이 모든 것은 전부 다 내가 이 땅에 살면서 눈에 보이는 사람들, 사람들에게서 기껏 얻은 정보에 불과해요. 정보.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요. “니가 그렇게 복음 좋아하면, 이러려면 헤어져.” 그럼 우리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건 주께서 이야기 하신 거야.” 왜? “그들은 그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주께서 이야기했거든요. 본인은 본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왜? 모든 의미는 어디에 닿았기 때문에? 인간 대 인간에게서는 모르고. 하나님과 아들,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과 예수님, 아버지와 그 아들, 모든 개념은 그것과 닿아져서 우리에게 흘러 넘치는 거예요. 십자가만을 드러내기 위해서 흘러넘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이고, 이거 죄구나!’라고 할 때는, ‘아, 내가 내 생각하고 있구나. 이게 바로 죄구나!’ 주께서 오늘 주님의 뜻에 의해서 살게 했는데, 우리는 살아있는 내가 얼마나 행복할까를 또 은연중에, 본연 중에 자기 연민, 그걸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내가 나를 무조건적으로 지켜야 될 의무가 있다는, 사명감이 있다는 생각, 이 생각이 도진 거예요. 이게 바로 마귀생각이라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광주강의20200925a 마가복음15장 24-32절(생겨난 죄)-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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