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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2 06:31:56 조회 : 50         
광주강의20200925b 마가복음15장 24-32절(생겨난 죄)-이 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IP:122.43.170.138)
광주강의20200925b 마가복음15장 24-32절(생겨난 죄)-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자기연민, 자기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 사람은 자기에 대한 헌신, 사람들은 이걸 유혹이라고 생각하지를 못하고 있어요. 나에 대한 헌신이. 평생을 살면서 죽어가고 있는 자기에게 매달려가지고, 자기 자신에게 교주가 되고 거기에 대해서 충실하고 유일한 신자가 되어 살아가는, 이게 인생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허망하다는 것을 인간들은 모르고 있어요. 그럼 왜 자기에 대해서 헌신하고 유혹하느냐, 인간들이 자기에 대해서, 마귀에 의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절대성을 추구하다보니까 뭐에 쫓기느냐 하면은, 절대적 절망인 것을 피하려고 하는 겁니다. 도망치려고 하는 겁니다.

절대적 절망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절망이라는 말과 반대적인 것은 자기에 대한 헌신, 항상 자기에 대한 희망, 낙관적인 희망을 추구합니다. 희망의 반대말이 뭡니까? 절망이죠. 이미 일방적으로 자기에게 희망을 걸기 때문에, 무엇이 공포스러운가 하면은 희망이 좌절될까봐 노심초사 늘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걱정거리를 자기가 만들었어요. 제가 요 근래 통계를 보면서 적잖이 놀란 게 있어요. 한국에서 하루 자살하는 사람이 38명이에요. 통계에 60대 있고 20대 있고 30대도 있는데. 38명이나 해요. 자살한다는 말은 내가 우선이 아니고 내가 갖고 있는 나보다 더 우선된다는 의식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살하는 겁니다.

희망이 끊어졌으니까, 그걸 절망으로 여기고 절망을 피하는 방법은 자살이 최고죠. 절망을. 죽을 때까지 나에 대해서 그 희망을 유지하는 방법은 이참에 내가 내 목숨을 끊는 거예요. 그러면 절망한테 안 가도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희망이 마귀가 준 유혹인데요? 왜냐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 모든 것을 결정지으려고 하고, 이 땅에서 모든 얻고자 하는 것은 이 땅에만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이 땅에만 있는 것으로 여기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고향도 없고 가족도 없고, 이 땅에 뭐도 없느냐, 뿌리가 없어요. 예수님은.

그런데 그분은 하나님께 유일한 아들이에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칭찬받은 유일한 분은 바로 이 땅에 뿌리도 없고, 고향도 없고, 가족도 없는 그분이에요. 누가 내 형제며 누가 내 모친이냐? 어디서 나한테 가족을 들이대 밀어? 주님은 이 땅에 가족이 없어요. 이제 가족을 만들 거예요. 주님이. 성령을 보내서 만드실 거예요. 누구 운명처럼? 자기운명처럼. 이 땅에 고향도 없고, 가족도 없고, 뿌리도 없고. 이게 없으니까 뭐도 없습니까? 이 땅에 어떤 희망도 없는 거예요. 희망이 없으면 뭐도 없어요? 이 땅에 유혹거리가 없어지는 겁니다.

류현진 이번에 한번 또 올라가지.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는데. 김광현이는 우에 그리 잘 던져가지고. 자꾸 뭔가 일이 잘 되면 잘 되는 쪽으로 희망을 변경시켜요. 희망을 변경시킨다고요. 한화야구팀 내가 응원하는데 했다 하면 지고, 했다 하면 지고, 지금 9등이라 이 말이죠. 응원한 팀을 한번 바꿔봐. 희망을 바꾸는 거예요. 내가 첫째 애한테 바짝 기대를 걸었는데, 이 첫째 애가 사춘기에 들어가지고 이거 뭐 공부도 안 하고, 안 되겠다. 둘째 애한테 희망을 걸어야 되겠다. 희망 거는 겁니다. 뭐 항상 이렇게 희망을 바꾼다는 것은 자기가 한 그 유혹거리에 자진해서 자기가 노예가 되는 거예요. 종이 되는 거예요.

그 희망과 유혹은 어디서 온 겁니까? 이 땅에서 왔잖아요. 이 땅에서. 예수 믿으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자신을 알자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예수 믿으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희망이 없어지면, 절망에 졌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항상 뭐 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면은 자살할 준비가 돼있어요. 따라서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자살대기자에요. 뭐 순번을 뽑아야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자, 방법은 뭐냐, 이거는 특별히 여러분에게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방법은 이렇습니다. “내 일을 남의 일로 여겨라!” 이겁니다. 내 일을 남의 일로. “그 집 애 요새 직장 그만두고 집에서 논다며요?” “그 집 애요? 누구 집 애요?” “남의 부인 잘 있어요?” “그 집 빌라 방 나갔어요?” “나갔나 봐요.” 나로부터 거리두기를 하는 겁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내가 나를 내 것이라고 덤벼들기 전에 밀어내는 겁니다. 이미 내 몸은 누가 접수했어요. 주님의 몸인데 내가 내 것이라고 덤벼드는 거예요. 평소에 자기 자신이 이렇게 되면 어느 수준이냐 하면은 그냥 자기가 왕이거든요. 왕 수준이에요. 왕의 반대말이 의외로 뭐가 되느냐 하면은 유배지에요.

우리는 이 땅에 왕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유배당한 겁니다. 귀양살이 한 거죠. 밧모섬에 귀양 살이 한 사도요한처럼. 그리 되는 겁니다. 제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있는 것은 살아있어도 이미 죽은 자 입장에서, 밧모섬 입장에서 세상을 다시 보는 거예요. 이미 죽은 자로서. 이미 죽은 자로서 앞으로 세상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살아있으면서 보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죽은 자로서 보는 거예요. 그게 첫째 부활이에요. 이미 부활된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겁니다. 이 땅에 우리는 유배지에 있기 때문에, 감옥이죠. 풀려나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 절대적 절망에 대해서 우리는 자꾸 기피하려고 하는데, 아까 구레네 사람 시몬, 이 사람은 구레네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고향이 있죠. 자기 고향이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어요. 그럼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이 싫다는 거죠. 예수님이 하는 이야기는 너무 절망적이니까. 내가 갖고 있는 모든 희망을 아주 쓰레기 취급하는 것이 되니까. 예수님이 하는 모든 것이 자기에게 욕으로 들리니까. 그런 부정적인 존재가 싫다는 거죠.

쉽게 말해서 예수님 자신이, 절대적 절망이 예수님이에요. 그 당시에.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예수님이니까, 하나님께서 이 절대적 절망을 억지로 자기백성과 결합을 시키는 겁니다. 절대적 절망. 그러면 절대적 절망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보니까,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들어있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유일하게 기뻐하는 관계, 하나님께서 만족스러워하는 관계가 절대적 절망 안에만 들어있어요. 절대적 절망 안에만.

이번에 제주여행을 하면서, 바라기는 십자가마을 모든 사람이 제주도 한번 갔으면 좋겠어요. 그래가지고 모든 사람이 제주도에 방주교회를 한번 봤으면 좋겠어요. 방주교회 보게 되면 물로 포위가 돼 있다 이 말이죠. 한쪽 면은 아니지만 나머지기는 물로 포위됐다 이 말이에요. 이 방주교회에 물을 거치지 않고는 들어갈 수가 없어요. 절대적 절망으로 휘감겨져있기 때문에, 이 절대적 절망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주님을 만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절대적 절망 속에서 보면 이미 우리 자신은 없어진 거예요. 자꾸 내가 있으면, 내가 다시 유혹이 되니까, 이미 너는 사라졌기 때문에, 희망거리조차도 사라졌기 때문에, 절대적 절망이 오히려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둥지가 되는 겁니다. 이게 원형이에요. 원형. 진즉에 우리가 이 원형에, 둥지에 모여 있어야 돼요. 둥지하면 생각나죠. 남진의 노래, 둥지. 둥지를 틀어봐, 라고 안 합니까? 둥지를. 주께서는 둥지로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갑자기 둥지 냉면이 생각나네. 이 땅에 둥지로서 왔다고요. 이 땅에 고향도 없고 일가친척도 없는데 그냥 둥지로서 왔다 이 말이죠.

왔는데, 사람들은 보니까, 메시야를 기다리는 그 사람들 속에 어떤 철침을 박듯이 박아버리니까, 사람들한테는 가장 싫어하는 상황이 돼버린 거예요. 절대적 절망이거든요. 내가 당신을 믿어서 얻을 이익이 뭐냐를 챙길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익이냐, 손해냐를 누가 결정하는데요? 평소에 세상 유혹에 빠져있는 내가 판단하는데, 그 판단기준을 동원시켜보니까 예수님한테는 그 어떤 것도 나를 좋게 하는 내용은 단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나를 행복하게 하는데 쓸데없고 필요가 없는 예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너희에 대한 유혹을 돌파하라. 뚫어버려라. 방주교회를 그려볼게요. 왔는데, 방주교회 싫어서 그런 곳에 안 간다고 삐친 사람도 있어요. 이게 뭐 대단한 것이라고 삐져가지고 구경도 안 하고. 물로 되어 있다 이 말이죠. 이게 방주 같으면 이게 물이다 이 말이죠. 물로 들어가서 방주로 가겠다고 하지만, 사실 실제로는 다 죽죠. 실제로는 물이 얕아서 안 죽지만. 방주가 떠있으면, 이쪽에서 방주를 보면 방주는 도저히 불가능한 장소에요. 성경에 방주는. 불가능한 거예요. 육지에 있을 때 방주 생각하지 마세요.

이미 홍수로 심판이 이루어지고 난 뒤에 방주를 한번 찾아보세요. 인간의 힘으로 건너갈 수 있는지. 안 되죠.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방주를 하나님께서 영원으로, 세상 끝 날까지 계속 영원토록 이 취지를 지속시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무지개에요. 무지개로. 그럼 방주가 어디로 올라가느냐, 하늘로 올라갔다고 보시면 됩니다. 무지개의 특징은 아름답다는 거죠. 에스겔에서 하나님의 보좌,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보면, 천사의 네 그룹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무지개가 떠있어요.

무지개가 떠있다는 것은 아름답다는 겁니다. 뭐가 아름다우냐, 심판이 아름답다는 겁니다. 에스겔은 이걸 가지고 내가 속이 다 시원하다. 속이 시원하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이래하면 돼요. 위청수. 하나님께서 심판해놓고 위청수 잡수신 거예요. 부채표 활명수 잡수신 거예요. “아이고, 내가 심판해놓고 내가 속이 다 시원하다.” 이 심정을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전달받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벌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단도리 한다고 신경 쓰면서 예민에 예민을 극도로 다하면서, ‘나쁜 짓 안 해야지. 나쁜 짓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면 그리스도의 형상이 안 드러나잖아.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빛과 소금이 되라고 했는데..’

이렇게 온 신경을 쓸 때는 이게 아름답습니까? 아름답지 않죠. 서해안에 있는 한국공무원을 휘발유 뿌려서 죽여 놓고 누가 속이 시원한가 하면, 김정은이가 속이 시원하죠. “아이고, 코로나 방역한다고 잘했다. 이제 내가 어느 정도 대단한 정도인지 알아먹겠지. 내가 이 정도로 무서운 사람이야. 이정도로 존엄한 거야.” 완전히 하나님처럼 사그리 죽이잖아요. 자기보기에는 굉장히 아름다운 거예요. 그런데 네 명의 천사들, 스랍들이라고 하는데, 그 천사들이 하는 일이 뭐냐 하면은 이 세상을 심판하는 일이에요. 이 세상을 사그리 심판하는 거예요.

근데 그것이,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겁니다. 이런 마음가짐을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알게 된 거예요.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니가 세상 보는 것하고 내가 세상 보는 것하고 다르다는 거예요. 그럼 이렇게 기뻐하려면 기쁨덩어리가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피자 좋아하는 사람은 피자 한 조각만 맛봐도, 전체 피자를 다 안 먹어봐도, 그 피자 맛이 살아있어요. “아, 이 맛이었어! 피자가 이 맛이야!” 살아있는 것처럼, 정말 하루하루 살면서, 정말 한순간이라도, 주님의 심판 맛을 보게 되면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가 터지는지 몰라요. 작은 심판 맛이라도 불구하고 그날 하루 종일 감사가 폭발해버립니다.

내가 죽은 존재인데 아직도 이렇게 사는 것은 주의 은혜다. 그동안 이 심판을 안 받았으면 또 내가 죄 안 지으려고, 내가 바르게 살아서 될 수 있는 대로 우리 가정에 우환이 없도록, 내가 얼마나 벌벌 떨면서 인생을 살았을까? 이 바보! 바보! 등신 같은 인간아! 마귀한테 속아가지고. 내가 나에 대한 사명 충실하면 내가 할 일 다 한 것처럼. 그렇게 마귀한테 속아 넘어왔잖아요. 내가 유혹거리인지 모르고. 주님은 내가 한 것 가지고 구원을 시키고 안 시키고 그게 아닌데. 의미가 없는데. 자꾸 의미 없는 것에다가 의미를 두라고, 그만큼 속아온 거예요.

따라서 그것이 힘들다, 힘들다, 정도가 아닙니다. 결국 자살로 이어져요. 자살로. 그 많은 연예인들이 자살충동을 굉장히 많이 느낍니다. 왜? 인기를 얻었기 때문에. 근데 갑자기 인기가 없어져버리면, 남들에게 내 인생이야기를 할 때 부끄러운 인생이 돼버리면 자살충동을 받죠. 왜? 살 의미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살 의미.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니가 있기 때문이야. 니가 있기 때문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김종환이가. 존재의 이유에서. 쓰러져 잠이 들었지. 도대체 나 왜 이렇게 사는 거야. 뭣 때문에 이렇게... 조금만 기다려봐. 희망이잖아요. 세상에, 대중가요가 복음이라.

희망! 조금만 기다려줘. 내가 너에게 달려갈 테니. 지금 내가 짜장면 배달이 힘들지만 내가 언젠가는 성공해서 너하고 결혼할게. 조금만 기다려줘. 잘 때도 니 사진을 손에 쥐고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 정도로. 히트 쳤어요. 그 노래 히트 쳐서 확 일어났거든요. 희망이 있고 뭔가 해보겠다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자기를 우상시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거 외에는 학교에서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진화론이고 뭐고, 과학과 철학과 모든 국가의 운영자체가. 눈에 보이는 인간 대 인간의 세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전부라는 겁니다. 다른 생각하지 마라. 종교는 아편이고 마약이고 거기에 물들지 말고 오직 눈에 보이는 이것이 전부다. 이렇게 살아왔던 그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드디어 예수님에게, 15장을 보면 예수님을 죽입니다.

15장 22절을 봅시다.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고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3절,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 하시니라” 24절,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이제 여러분들이 그 당시 사람들의 심정을 충분하게 이해하겠죠. 우리가 만약에 그 현장에 있는 군인이라면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하겠죠. 왜? 내가 나에게 충실해야 월급 받잖아요. 지시대로 움직여줘야, 그 상사가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서. 내가 사는 의미와 목적이 오직 나한테만 꽂혀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누고. 뭐 이거는 우리도 같은 한패입니다.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누구 이야기입니까? 지금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에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예수님이 우리보고 “니가 나를 알아? 언제 봤다고 나를 믿어?” 실컷 모르는 사람을 니가 믿나? 이 말이죠. 아느냐 이 말이죠. 모르면서 왜 자꾸 믿는다고 구라를 떠느냐 이 말이죠. 나를 모르면서. 니가 천당 가는데 내가 도움이 될까 싶어서? 내 피가? 나를 알아야지. 나를 모르고 그냥 저분은 피를 흘렸다. 그 피 찍어먹으면 죄 씻고 천당 간다고. 주님을 이용할 생각을 하는 거예요. 누굴 이용한다는 것은 자기를 포기했습니까? 포기 안 했습니까? 자기를 포기를 안 하고 자기한테 충실한 거죠.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방주 들어가려면 이미 나를 잊어버렸다고.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짊어질 그러한 운반체에요. 운반체. 십자가를. 그것도 억지로 주님께서 지워준 그런 운반체로서의 우리의 기능을 할뿐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의 말이 충분히 이해가 돼요.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충분히 이해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25절을 한번 봅시다. “때가 제 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26절,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절,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래 되어 있어요.

제 삼시니까 아침 아홉시쯤 됐겠죠. 아침 아홉시에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왜,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어요?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 돼버리면, 왕이 보는 두 종류의 유대인이 있어요. 유대인1, 유대인2가 있다면, 유대인1은 유대인이 있으므로 왕이 되는 방향이 돼요. 유대인이 있고 그 유대인들의 왕이 되는. 그럼 이 왕은 누가 원하는 왕입니까? 유대인들이 자기 구미에 맞아서 자기들의 왕으로 삼는 거죠. 그럼 유대인2는? 존재하지 않아요. 없는데, 유대인2에서 왕이 된다면, 여기에는 새롭게,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을 새롭게 구성할 자격자로서 왕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1과 유대2가 겹치지 않는 이유는, 유대인1이 예수님을 버렸잖아요. 이미 깔끔하게 버렸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유대인1 속에 예수님이 포함이 됩니까? 안 됩니까? 포함이 안 되고 상관이 없고 관계성이 없어요. 유대인1들은 아무 상관이 없는 인물로 여기고 갖다 버린 거예요. 건축자들의 그냥 돌이 되면 안 되고,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되어야 해요. 성전1, 성전2가 있다면, 성전1을 짓는 건축자들이 이 돌은 필요 있다? 없다? 전혀 필요 없다고 갖다 버린 돌에서 성전2가 된다면, 성전1에서 성전2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인간들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래서 이것은 아무도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새로 만들어야 돼요. 만들어야 된다고요. 성전1에서 성전2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고, 유대인1에서 유대인2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행함의 의미가 아직도 남아있어요. 내가 이런 식으로, 이런 식으로 한다면 이제는 예수님의 이스라엘사람이 될 수 있다고, 아직도 우리 속에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는 게, 좋고 선한 것,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지만 십자가는 뭘 부정해버리는 겁니까? 일말의 모든 가능성 자체가 인간 속에는 아예 없는 거예요. 아예.

베드로가 예수님 따라가기 위해서 자기의 귀한 마지막 목숨을 담보로 내놨잖아요. 내놨는데 주님께서 그걸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받지를 않아요. 니가 목숨을 바쳤다 할지라도 내가 있는 곳에 니가 올 수 없다고 단정했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 천국의 백성을 결정하고, 백성 되고 구원되기는, 베드로 너의 머릿속에 생각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누구의 결정이냐 하면은 일방적인 예수님의 결정이에요.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는 그 원칙을 주님께서는 계속 고수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어떤 내용들이 있어야 해요? 이 내용이 담겨야 돼요? 안 담겨야 돼요? 마땅히 담겨야 되죠. 이 내용이. 인간의 어떤 종교적 노력도 구원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노력이 도리어 예수님에게 구원받기는커녕 예수님을 버리게 되는 그런 계기로 작용하게 될 겁니다. 헌금하든, 기도하든, 전도하든, 철야하든, 그 모든 것이 주님을 버리는 계기예요. 버리는 하나의 작업이 되는 거예요. 참, 이 교회라는 것을 보게 되면 일반 회사하고 똑같아요. 그래서 기도회라는 것은 그냥 단합대회고. 헌금하는 것은 종자돈으로 자가주 구매하는 거예요. 주식에서 자가주. 목사가정은 오너가족. 오너가(家). 오너식구들입니다. 일반적으로 회사에서 행할 수 있는 행함을 교회에서 그대로 행해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지만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안 된다고 이야기하면 돼요. “여러분들이 어떤 수를 쓰더라도 천국가지 못합니다.”라고 하면, 여러분들 같으면 그 말을 어떤 사람도 못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되겠죠. 그렇습니다. 못 알아듣습니다. 못 알아듣는데, 그 말을 알아듣는 사람들이 생긴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저는 분명히 그 사람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는 사실. 이건 그 사람의 자기의 노력과 성과가 아니라는 사실. 저 사람은 자기를 우상시하는 그런 결과로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눈으로 목격하는, 아마 신기로운, 신비한 일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말씀을 보는 어떤 즐거움이랄까? 교회 다니는 행복이랄까? 바로 그거는 뭐냐, 그런 신비로운 일을 접할 때 그동안 모든 고생은 전부 다 녹아져요. 한순간에 그걸 느낄 때, 내가 그동안 노력하고 고생하고 설움 받은 그런 것들은 우리의 기쁨을 갉아먹지 않습니다. 충분히 보상함으로 넉넉해요. 기쁨으로 흘러넘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피구나! 예수님의 피지 내 피가 아니구나!” 그게 한순간에 섬광처럼 확 다가올 때, 진짜 거기서 비타민c가 나옵니다. “아이씨, 정말 내가 무의미하게 살았구나. 해도 해도 소용없는 짓을 가지고 걱정하고 고민했구나. 애들아 나가 죽어라. 나도 죽을게. 그래도 괜찮아. 우리는. 우리는 괜찮다고.” “엄마, 왜 괜찮은데?” “나도 이유를 모르겠어. 무조건 괜찮아. 지금 그만 살아도 괜찮아. 애들아, 우리 그만 살자. 그래도 괜찮아. 이제는.”

살아온 내 역사가, 어느 글에도 나오지만 김밥 옆구리 터져버린 거예요. 어! 그렇게 구멍이 날 게 아닌데 터져버린 겁니다. 구성된 김밥 형틀이 다 깨졌어요. 깨져도, 깨져서 감사해요. 깨져서 고마워요. 그동안 내 형틀을 유지한다고 얼마나 노심초사, 고민걱정하고, 애교부리고 아양 떨고 굽신굽신 거렸습니까? 부질없는 짓들을. 지금 오늘 본문을 보고 있잖아요.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뭘 알면 되는가, 도대체 그때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철저하게 인간들이 예수님을 버린 거예요. 모든 인간을 대표해서 예수님을 버렸잖아요. 예수님을 버렸는데, 버릴만해서 그들이 예수님을 버린 거예요. 그 심정을 우리가 충분하게 이해를 해야 돼요. 그들이 예수를 버릴만해서 버린 거예요. 정말 아무짝도 소용이 없는, 구멍 난 헌신 발, 짚신보다도 못한 존재기 때문에 버린 거예요. 이리재보고 저리재보고해서, 그래도 혹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숙고하고 탐색하고 해봤는데, 결론은 돌아이다. 버리자. 미친 자다. 버리자. 우리의 희망에 보탬이 안 된다. 버린 거예요. 그래서 신학자들이 예수 다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목사들도 예수 다 버리고. 바리새인들이 예수 버렸듯이 다 버리는 거예요.

아무 쓸모없는 예수를 아직도 신봉한다는 것은, 진짜 의아해하죠. 저 사람은 도대체 아무리 봐도 쓸모없는 것을, 왜 예수님한테 매여 사는가, 하고 오히려 염려하고 걱정이 될 정도로 되죠. 그래서 우리는 다가가 봐야 됩니다. 진짜 예수님이 좋아서 그런지, 아니면 예수님에게 이용할만한 게 나와서 그런지를 분간해야죠. 두 개가 하늘과 땅 차이거든요. 나한테 필요한 게 있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지. 아니면, “나 같은 것은 버려도 괜찮아요. 주님만 좋으면 좋아요. 됐습니다. 주님의 존재가 내 존재를 대신하는 그걸로 저는 족합니다.”라고, 예수 믿는지를 한번 살펴보면 돼요. 알 수 있어요.

유대인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버리면서 뭐냐, 유대인의 왕인데, 앞에 뭘 하나 더 붙이고 싶어 했겠습니까? 자칭 유대인의 왕입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입니다. 주님께서 이걸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이걸 의도적으로 유도했습니다. 그래야 인간의 자력으로 구원을 못 받기 때문에. 인간의 자력으로 구원을 못 받아야, 온전히 예수님의 피 흘리신 공로가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천국의 기준은 언약이지 인간의 선행이 아닙니다. 인간의 열심히 아니에요. 언약이에요.

근데 그 언약에 대해서 이 세상에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언약을 지키는 방법도 아무도 못 지키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홀로 아시고, 홀로 혼자서만 완수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인간을 배제시키는 겁니다. 베드로를 밀어버리죠. “가있어. 가있어. 내가 다시 와서 부를게.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제자들은 이랬을 거예요. “안 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안 오시면. 온다고 해놓고 안 오시면 어떻게 됩니까?” 이래 할 수 있겠죠. 그럼 믿든지 말든지, 원래 인간의 한도가 그거밖에 안 되니까, 나무랄 필요가 없어요. 인간의 한계가 그거니까. 걱정하는 게 인간의 한계거든요. 자기만 생각하는 게 인간의 한계잖아요.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 주께서 찾아오시면, 김밥 옆구리 터져버리면 그런 거 묻지도 않아요. “니가 전에 나 의심했지?” 이런 거 묻지도 않아요. 빤히 알기 때문에 묻지도 않는다고요. “니가 한 거 내가 가만둘지 알아.” 이러지 않아요. 빤히 아시기 때문에 그냥 일방적으로 주께서 퍼부어버립니다. “니 죄를 내가 사했다.” 끝난 문제에요. “니 죄를 내가 사했다. 니는 죄짓는 거밖에 안 했는데 내가 그 죄를 다 사했다. 나는 너에게 문제 삼지 않으마.” 그런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없는 데서 이스라엘을 만드는 거예요.

이게 원래 처음에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만들 때, 그 원칙을 그대로 준수한 거예요. 새삼스런 원칙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없었잖아요. 없었는데, 야곱의 언약에 의해서, 이삭의 언약에 의해서 이스라엘을 만든 겁니다. 자, 이삭의 언약을 아시지만, 제가 여기서 적어보겠습니다. 이삭의 언약은 1번, 일단 죽자. 2번, 죽었냐? 그럼 대신 살려줄게. 이게 이삭의 언약이거든요. 모리아 산에서. 일단 좀 맞자. 일단 좀 죽자. 살아있는데요? 걱정하지 마! 내가 니가 살아있어도 죽은 자로 인정해줄 테니까. 죽은 자가 죽은 자 행세하는 데에 있어서 내가 일체 문제 삼지 않아. 내가 거기에 대해서 일체 이의를 걸지 않아. 원래, 니 하는 행세가 죽게 하는 행세기 때문에, 그걸 새삼스럽게 토를 달아서 똑바로 하라고 그걸 말하는 자체가 의미가 없기 때문에. 니는 죽었어.

이게 첫째 사망이죠. 니는 죽었고. 죽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이제 내 솜씨를 보라! 죽은 자를 어떻게 살려내는지. 이게 이삭언약이에요. 이삭이 죽었는데 수풀에 대신 양이 있어서 살려내잖아요. 여기에 모든 초점을 두라는 말이죠. 너한테 두지 말고, 니가 어떻게 하면 사느냐에 두지 말고. 너 빼고. 너는 죽은 인간으로 빼고. 죽었다가 살아난 그 예수그리스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거기에 주목을 하라 이 말이죠. 니는 안 중요해. 니 자신은 니한테 하등 중요하지가 않아요. 전혀 중요하지가 않다고요.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강남강의 첫 번째 강의에서 박구윤씨가 불렀던 “뿐이고”하는 노래 있죠. (뿐이고~ 뿐이고~뿐이고)

그 많은 문둥병 가운데서 나아만 장군뿐이고. 그렇게 문둥병이 많은데 왜 그한테 갑니까? 인간은 문둥병을 낫게 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이 인간에게는 없다는 거예요. 그게 인간의 본성인 것은 이해하겠는데, 이게 나의 본성이에요. 하나님한테 나를 구원해달라는 그 본성은 충분히 이해하겠는데, 그 본성에 대해서 전혀 하나님께서는 고려하는 바가 없어요. 사람들이 자기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에 구원받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해요. 좋은 설교, 복음적인 설교 다 듣고. 이거는 뭐 식후 30분 후에 먹으라고 해도 밥 먹으면서 듣고. 신약구약을 듣고. 약을 먹어도, 아무리 먹어도 나중에 결국 뭐냐 하면은, 자기 부인이나 자기 남편이, “여보 나한테도 좀 충성해 도!”하면, 알았다고 해버리고. 다시 그 말에 납득을, 수긍을 해버려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예수 믿는 것이 주님께서 찾아온 것이 아니고, 내가 악바리처럼, 손톱이 닳아서 피가 나도록 절벽을 기어 올라가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이 한 250미터쯤에 계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절벽을 한번 올라가보세요. 주님께서는 250미터가 아니라 2400미터로 옮겨졌어요.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지, 라고 하는데, 일곱 번 딱 용서하고 난 뒤에 목 싹 내놓고 까꿍하니까, 주님께서는 이미 기준을 일흔 번씩 일곱 번, 사백 구십 번으로 올려놨어요. 또 손톱이 다 깨졌네. 다 닳았어요. 어느 세월에 다 올라갑니까? 복음 알아서 구원받겠다고 갖은 노력을 다하는 사람들은, 그거 세상에서 옷깃만 살짝 땡겨 버리면, 알았어, 알았어, 하고 다시 갈 사람들이에요.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유혹거리기 때문에. 자신의 무게가 올라가면 갈수록 점점 더 질량이 무거워져요. 주님한테 가면 갈수록, 그동안 내가 갖고 있는 의에 대해서 집착을 하게 돼있습니다. “하나님! 천국가기 위해서, 빛과 소금되기 위해서 이만큼 의롭게 살았는데, 아직도 저에게 부족한 게 있습니까?” 주님께서 딱 보고, “너에게 아직도 못 버린 게 있구나. 니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그걸 어떻게 알았지?” “니가 고맙소 빌라 팔고 나를 따르라.” “그건 어떻게 알았지? 주여, 이거만큼은 안 됩니다.” “그러니까 니는 도로 떨어지게 되어 있는 거야. 아무리 노력해도.”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십자가 쪽에서 완성된 것이 오는 거예요. 완성된 것이. 99퍼센트 오고 내가 1퍼센트 마저 채우는 것이 아니고 100퍼센트 오는 겁니다. 100퍼센트. 100퍼센트 오면 100퍼센트를 그대로 훼손시키지 말고 100퍼센트 그대로 유지하기만 하면 돼요. 100퍼센트를 벗기고 자꾸 흠집 내지마시고요. 자, 그렇다면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그 옆에 강도 둘을 구색 맞춰서 달리게 했다 이 말이죠. 예수님을 한쪽에 달아놓은 게 아니고 중앙에 딱 달아놓게 한 것은 유대인들이 보기에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이 말이죠.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당신이 아무리 유대인의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 하늘에서 왔다고 우겨도 그 평가는, 그 결정은 내가 내린다는 거예요. 내가. 십자가지시고 여러분들의 죄를 씻어줬습니다. 아무리 니가 나한테 복음을 전해도 결정은 내가 내리는 거야. 내가. 복음을 받아들일 건지, 말건지는 내가 하는 거야. 이게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십자가에서 함축해서 다 보여주는 거예요. 얼마나 성경이 고맙습니까?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여기 모욕한다고 해요. 모욕하는 사람들. 29절에, “지나가는 자들이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머리를 흔든다는 말은, 아휴, 참 사람 괜찮았는데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가나. 안됐다. 머리를 흔든다, 모욕한다는 말은 부정적이다 이 말이죠. 그만큼 우리는 긍정적인데, 예수 당신은 사는 게 참 가련하고 안됐다. 불쌍하다. 참 좋게 할 수 있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막 가냐. 너무 극단적이었다. 조금 양보하지. 강도와 같이 간다는 것은, 니가 주장하는 것은 살인강도와 같이 험악한 같은 레벨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살인강도와 구색을 맞춤으로서 우리의 사형집행은 정당하다. 합당하다.

이것은 그 당시의 모든 인간들의 이구동성이에요. 합치된 의견입니다. 이 합치된 의견 속에 우리의 의견도 포함이 될까요? 안 될까요? 마땅히 포함이 되죠. 마땅히 포함이 되어야 해요. 합리적으로 따지고 이성적으로 따져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필요 없는 존재입니다. 내게 도움이 안 되는 존재가 예수님이에요. 합리적으로 따져서. 우리는 매일같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그것이 계속 가동되고 있어요.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 누가 이의를 걸 수 있는 자가 없어요. 예수님 제자들이 다 도망갔잖아요.

로마당국에서 걱정한 것은 이쪽에 또 와가지고, 집회한다고 와가지고 광화문에 모일까봐, 그런 것도 없어요. 그냥 겁나서 다 가버렸어요. 별것도 아닌 것들이 말이야. 감히 우리가 예수를 죽이겠다고. 저희들이 뭔데. 아무것도 없으면서, 별것도 없으면서 까불고 있어. 승자죠. 승리자예요. 승리를 구가한 겁니다. 그들의 아이디어 속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은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하는 아이디어가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들의 아이디어 속에는. 그럼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하는 기쁨이 없다는 점에서 그 당시 사람들이나 오늘날 대한민국 사람들이나 북한사람들이나 세계에 어떤 사람들이나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아요. 똑같아.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잘하는 것은 딱 한가지입니다. 우리는 죽지 아니한다. 그 이야기. 우리는 죽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죽지 아니한다. 이거 하나 전한 겁니다. 그럼 사람들이 묻죠. 왜? 왜? 예수님이 죽었는데 살아났기에. 그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요? 죽어도 괜찮아. 이런 뜻이에요. 죽어도 괜찮아. 만약에 집사람이 파리채를 들고 있다. 근데 파리가 한 열 마리가 더 있는데, 그중에 한 파리가 말하기를, 성령 받은 파리예요. 원래 아파트에 파리가 없는데 왜 이렇게 파리가 있는지 모르겠다. 파리채로 쳤는데, 근데 그 파리가 죽으면서 우리는 죽지 아니해! 죽지 아니해! 이 파리부터 파리채로 치면서 이래도? 죽었잖아. 봐!

그러니까 그 당시에, 십자가사건 당시에 그들이 한 행동이 옳았다고 증명한 이유는 3일의 텀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는데, 십자가에서 묶인 것을 풀고 나오면 안 돼요. 완전히 죽어야 돼요. 왜? 완전히 예수를 못 믿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시간적인 존재가 아니거든요. 좀비가 아니다 이 말이죠. 죽을 때는 확실하게 죽어버려야 해요. 심지어 제자들도 못 믿고 도망가도록. 그래야 성령이 주신 믿음만이,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믿음은 절대 섞이면 안 돼요.

그래서 이 십자가사건의 기록은요, 멋져요. 이 기록이. 모욕하는 자가 우리고. 그 다음에 옆에 있는 강도도 같이 욕해요. 강도도. 강도도 같이 욕하고 제사장들도 희롱하고. 32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32절, “이스라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니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이 누굽니까? 못 박힌 자가 아니고 못 박힌 자들, 두 명이거든요. 이 강도들도 예수님을 공격하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요한복음 3장에서는 이 대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2절,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원래 땅의 일을 주께서 십자가에서 객관적으로 보여줬는데, 보여주는 그것이 너희가 믿음이 없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땅의 일을 만든 거예요. 믿지 아니하는 거예요. 마치 뭐와 같이? 모세가 놋뱀을 든 것같이. 놋뱀. 모세가 놋뱀을 들었잖아요. 놋뱀은 뭡니까? 이건 악이죠. 죄 그 자체죠. 죄 덩치 그 자체죠. 악마 그 자체, 뱀이니까. 뱀을 들었다는 말은, 너희들이 뱀에 물린 상태에 있을 때 뱀을 들었기 때문에, 너희들은 뱀에 물린 악마와 한패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보낸 뱀에 물려도 마땅하다는 것을 너희들이 알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놋뱀을 든 것은.

그럼 예수님이 십자가에 들린 것이 뭐와 관련되어 있다. 놋뱀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요한복음 3장의 이야기에요. 다시 말해서 놋뱀이 들릴 때, 우리는 물릴 만하다고 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들렸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말은, 십자가에 들렸다, 십자가 죽으심 자체가 부활됐거든요. 그러니까 부활은 뭐냐, 십자가의 이동이죠. 십자가의 확산이죠. 확대. 증강. 십자가의 증강이 부활이에요. 죽어 마땅함을 계속해서 언급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이 땅에서 심판받아 마땅하고, 저주받아 마땅함을 보여주는 마지막 증거로서 놋뱀을 든 거예요.

그러니까 기어 다니는 뱀을, 이걸 몸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기어 다니는 뱀을 바로 곧추 세운 거예요. 기어 다니는 것을 곧추 세운 거예요. 십자가 죄패에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너를 왕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둘러봐라. 누가 있느냐? 아무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니 혼자 왕이지. 혼자 왕이라는 사실은 이미 유대인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거죠. 주님이 메시야를 버렸다는 사실을 부활을 통해서 증명하는 겁니다. 부활은 부활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의미를 증명하는 거예요.

이렇게 하게 될 때, 모세가 하는 말이 뭐냐 하면은 “쳐다보는 자는 다 산다.” 쳐다보는 자. 이 말은 안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다는 겁니다. 안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다는 말이죠. 왜냐 하면은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거울 보면 알 수 있는 것을. 거울 말고 놋뱀을 보고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그거 왜 봐야 돼? 이렇게 되겠죠. 왜 봐야 돼? 거울을 보면서 내 꼬라지가 이렇구나! 알 수가 있는데, 꼭 내가 백령도 헤엄치다가 불에 타서 시체 된 그 모습이 내가 되어야 내가 압니까? 아니죠. 우리는 기피하죠. 바로 진짜 내 모습을 기피하고 싶은 우리의 원형과 닿게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들리게 하는 겁니다.

그 십자가를 요한복음에서는, 이미 마태마가누가가 있기 때문에, 그걸 함축해서 놋뱀이라고 했지만, 오늘 본문 마가복음 15장에서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가? What happened then?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 어떤 일이 있었는가? 보니까, 그들 인간은 인간다운 일을 하셨네요. 그들이. 인간다운 일을 하셨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죽을 만했네요. 심지어 같이 달린 강도도 예수님을 부정했으면, 예수님을 긍정할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나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면, 그 예수는 내가 만든 가짜입니다. 나 잘되기 위해서.

그러나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주님을 죽인 자라는 것을, 그 한패였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일깨워진다면, 그 사람은 구레네 시몬입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져야 될 운명을 새롭게 부여받게 된, 십자가 자체를 운반하는 운반체, 이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부터 내 일이 없고, 내 일조차 남의 일로 여기고,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내 일이 아니라 주의 일로 여기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일을 증거 하는 일로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광주강의20200925b 마가복음15장 24-32절(생겨난 죄)-이 근호 목사.hwp (69.0K), Down: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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