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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2 07:11:57 조회 : 53         
대전-62강 사무엘상20장1절(언약방출)20200928-이 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IP:122.43.170.138)
대전-62강 사무엘상20장1절(언약방출)20200928-이 근호 목사

원래 진리는 실패를 통해서 알아요. 진실은. 실패하지 않으면 진실을 몰라요. 왜 그러냐 하면은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멀쩡하다고 생각할 때 생각하는 진실은 진실이 아니에요. 내 자신이 멀쩡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여기서 진실에 다가갈 때는 반드시 어떤 과정을 거치느냐 하면은 실패를 통해서 진실에 접근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십자가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알잖아요. 그러면 십자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냥 십자가를 알면 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알고자 하는 내가 십자가 접근에 실패해야 돼요.

그러면 십자가를 수정해야 될까요? 나를 수정해야 될까요? 내 쪽을 수정해야죠. 내 쪽을 수정하기 위해서 여기에 고맙게도 뭐가 있느냐 하면은 삶의 환경이 주어져있습니다. 삶의 환경을 통해서 십자가, 하나님이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사실은 십자가, 하나님을 찾는 의도가, 최종적인 그 의도가 나를 진실 되게 붙잡기 위해서 하는 얄팍한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삶의 환경이 주어져서 나로 하여금 진실에 다가서고 있다 할지라도 실패로 끝나게 해서, 내가 진실에 다가서는 것은 없고, 진실이 나에게 다가오게 되면, 내 안에 진실의 자리가 마련된다.

지금까지 한 것을 여러분들이 잘 아시겠죠. 예를 들면 이것이 언약인데요. 언약할 때 뭐 여러 가지 언약이 있지마는, 노아언약 같은 경우에는, 노아하고 사람들이 있을 때에, 노아하고 그 당시 사람들하고 섞여 살죠. 섞여 살고 함께 살잖아요. 오늘날 여러분들이나 대전 사람들이나 뭐 이런 오늘날처럼. 섞여 살 때, 섞여 사니까 서로 통한다고 생각하고,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 언약이 다가오니까, 방주 만들라는 지시가 오니까, 노아와 그 당시 사람들, 둘 사이가 날카롭게 분리가 됩니다. 너는 너 갈길. 나는 나 갈길. 분리돼요. 오늘 사무엘상 20장과 다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상 20장은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인데, 오늘 바꾸겠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요나단과 다윗의 이야기로.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이 차이점이 있어요. 다윗과 요나단과 요나단과의 다윗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은, 요나단 입장에서 다윗을 어떻게 보느냐를 보자 이 말이죠. 요나단 입장에서 다윗을 어떻게 보느냐. 다윗입장에서는 요나단을 어떻게 보느냐. 그것은 요나단이 다윗을 보는 데에, 여기에 같이 합세하는데 실패를 해요. 아까 실패이야기가 나왔죠. 실패해요. 요나단이 다윗에게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언약을 갖고 있었다 이 말이죠. 요나단은 언약이 없어요. 요나단은 다윗과 하나가 되고 합세하고 싶어요.

근데 실패로 끝납니다. 왜냐 하면은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다윗이 요나단을 어떻게 보느냐의 입장도 중요하고 요나단이 다윗을 어떻게 보느냐에 의해서 왜 합세되는 것이 실패로 끝나는가, 오늘 첫째 강의의 제목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제목은 작별인사에요. 작별인사. 둘이 헤어져요. 근데 사무엘상 20장 내용을 보게 되면 이 둘이는 너무 사랑해요. 사무엘상 20장 17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남자가 남자를 서로 사랑한다 했고, 그리고 사랑이라는 말이 세 번씩이나 나오죠. 사랑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동성애자인가, 이래 생각하지 마시고요. 다윗에게, 보통사람에게 없는 신적인 요소가 있음을 사랑하는 거예요. 신적인 요소가 있음을. 그 신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제가 강의 초반부터 이야기했지만, 이게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언약, 약속이 있는 거예요. 초월적인 거. 그 사람은 우리 보통 인간이 맞는데, 그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와 다른 길로 가게 하는 다른 요소가, 별개의 요소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 요나단은 다윗을 그렇게 본 겁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신을 어떻게 봅니까? 내가 세상의 일반 사람과 같다. 그런 생각을 하셔도 됩니다마는, 그런 생각하면서 뭐 그냥 보통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살지, 라고 하고 싶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이해를 하지 못하는 어떤 힘이라고 할까? 어떤 관계, 하나님이 나를 놓지 않는 것, 그런 것이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수시로 늘 느껴져야 합니다. 사실은 이게 느껴져야 해요. 그게 어떻게 느껴져야 하느냐 하면은 스스로 그걸 묻는 거예요. 물음이죠. 내가 나한테 묻는 겁니다. “너는 예수님 왜 믿으려고 하는데?” 내가 나한테 묻는 거예요. “니가 왜 예수 믿으려고 하느냐?”

이거는 예수님이 베드로한테 한 질문과 똑같죠.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할 때, 베드로가 답변을, 주체자를, “내가 질문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닌 것을 주께서 아시잖아요?” 질문 주체를 주께로 넘겨버립니다. “해답을 갖고 계신 분이 저한테 질문을 했잖아요. 주께서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주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결과로서 주를 사랑하게 되지, 주께서 나를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제가 먼저 주를 사랑하겠습니까?” 정답이에요. 딩동댕~♬ 정답입니다.

그 진리를 이제 사무엘상 20장에서 요나단과 다윗을 통해서 우리가 볼 참이에요. 볼 차례다 이 말이죠. 제목은 작별인사입니다. 작별인사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이별을 해요. 이별을 하면서 거기서 터져 나온 게 있어요. 이별을 하면서 요나단과 다윗 속에서 방출된 게 뭐냐 하면은, 그것은 바로 언약의 진수입니다. 언약의 진수. 같이 사는데서 언약의 진수가 아니라 헤어지는 데서 언약의 진수예요. 남녀가 헤어지면서 아, 사랑이었구나~! 아는 것처럼.

자, 여러분이 아시는 질문 하나 해볼게요. 여러분이 아시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하늘로 올라갈 때에, 따라 올라간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제자들 중에. 없죠. 작별이죠. 작별이에요. 작별할 때 언약의 진수가 나와요. 언약의 진수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내 쪽에서 언약을 수행할 수 없었던 내용이었었다, 라고 하는 것. 노아언약을 이야기하면, 이런 것을 생각해보세요. 이게 노아방주입니다. 노아방주. 노아방주가 있는데, 물로 하니까 방주가 물에 떴잖아요. 그럼 여기서 물에 떴으니까 전에 살던 땅에서 벗어나겠죠. 그렇죠.

살던 땅이 이미 물에 잠겼지만, 일부러 생각을 이렇게 해보는 거예요. 물에 안 잠겼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그럼 여기 이 땅에는 누가 사느냐 하면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아무 생각 없이 일상적인 자기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가득참이에요. 그런데 노아는 방주를 타고 이 땅을 떠났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과 방주 사이에, 이 간격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바로 물이 있죠. 그 물이 뭐냐 하면은 심판의 물입니다. 심판의 물. 하나님께서 이 땅에 죄가 관영하니까 물로서 심판했잖아요. 이게 언약이에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땅의 사람이 떠나는 방주에 쫓아 올라와가지고 헤엄쳐서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들어갈 수가 없어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 배는 어떤 배냐, 떠나가는 배. 어떤 노래가 생각나는데. 떠나버려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이게 항구라면 배가 떠나버려요. 떠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신기한 거예요. 이게. 이게 초월적인 요소예요. 이 방주 안에 있는 사람은. 이 방주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올라타서 노를 젓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 안에 있어요.

신약에서 예수 안, 십자가 안, 성령 안, 노아 때는 방주 안, 이 안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내가 아무리 애를 쓰고 신학을 하고 기도를 많이 해도, 니가 있는 자리에서 이 방주로 건너올 수 없다. 왜? 나는 너희를 떠나가니까. 너희를 떠나가니까. 여기서 작별, 떠나감, 같은 뜻인데. 떠나가는 것. 자, 구원은 뭐냐, 구원이란 떠나가는 거예요. 구원이라는 것은 떨어져나가는 거예요. 탈출도 가능하지만 분리되는 겁니다. 분리되는 것. 이것을 우리 인간은,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 알아서 떠나가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왜? 살아왔던 모든 생활이 그들에게 배웠기 때문에, 그들을 떠난다는 말은 이건 사회적인 죽음이기 때문에, 이거는 자살과 마찬가지에요. 떠날 수가 없어요.

그러나 떠날 수는 없지만, 언약이 왔기 때문에, 언약 때문에 안 떠나고 싶어도 주께서는 떠나게 하는 겁니다. 뭐 말이 통해야 함께 살지. 말도 안 통하는데. 이래 있어도 떠난 사람이에요. 이게 심판이라는 것을 건너갈 수가 없죠. 요한계시록 15장을 잠깐 한번 보겠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건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가 이래 보니까 떠나는 거예요.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이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절,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이게 바로 출애굽에 있었던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는 그냥 보통 물바다입니다. 근데 이건 유리바다, 왜? 불이 붙었으니까. 전에 출애굽 할 때는 홍해, 물이었잖아요. 홍해바다가 물이잖아요. 이제는 물이 아니고 불이예요. 구원이라는 것은 주님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죄인인 입장이니까 건져내는 것이고요. 건져내는 것. 건져내는 것이고, 우리가 이 세상과 비교하는 입장에서는 떠나가는 것이고. 떠나가도록 건져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과 요나단을 생각하면 다윗은 요나단을 건져내고 싶지만, 요나단 입장에서는 누구에게서 떠나가느냐 하면은 아버지 사울에게서 떠나가는 거예요. 아버지 사울에게서.

그것이 사무엘상 20장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상 20장 이야기는 이야기 그 자체가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쭉 읽어보게 되면, 다윗과 요나단은 친구사이였더라. 그래서 좋아했더라. 그래서 우리 같이 지내자고 했는데, 근데 다윗이 하는 말이 너희 아버지가 나를 굉장히 싫어하더라. 요나단이 하는 말이, 에이 그럴 리가 있겠어? 아니야. 한번 물어봐. 다윗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번 물어봐. 그래서 순진한 요나단이 물어봤죠. 물어보니까, 욕을 해요. 30절에, “사울이 요나단에게 노를 발하고 그에게 이르되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이렇게 되어 있죠.

요나단이 순진하게도 아들이 좋아하는 친구를 아버지도 좋아할 것이라고 아주 순진하게 생각하는 거죠. 순진하게 생각하니까, 여기에서는 아직까지 떠나간다는 것, 작별이라는 것을 생각도 못한 겁니다. 아니, 세상에 마음 맞는 자와 친구가 된다는 그것이 뭐가 허물이 되겠어요? 근데 사울이 등장하는 겁니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친구도 사랑할 것이다. 이렇게 삼각관계에서 사랑이 될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한 겁니다. 근데 사무엘상 20장에서 보면 사울은 뭐냐, 초월적 기능을 하고 있어요. 어떤 악한 기능. 언약을 보복하고 공격하는 그런 폭력성을 지닌 인물로 등장하는 거죠.

그럼 아버지로 인하여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는 같이 계속 사귀고 있겠습니까? 작별인사를 해야 됩니까? 마지막에 뭐냐 하면은 작별해요. 42절,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이 가라” 둘이 좋아했는데 아버지의 반대로 인해서 헤어졌다. 이게 보통 세상이야기잖아요. 근데 여기서 성경이 기록된 이유가 그들이 헤어지면서 방출된 것이 있어요. 나온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다윗언약의 핵심과 연관된 내용이 나온다는 거죠. 연관된 내용이. 실패했을 때 방출하는 거예요. 방출.

꿀벌을 잡았다. 그냥 있을 때는 안 보였는데 터트려보니까 꿀이 나왔다. 이게 꿀의 방출이잖아요. 요나단과 다윗 사이는 보통 사람들처럼 서로 친구사이고 서로 친하게 지내고 서로 좋아했다. 이게 보통 사람들이 사이인데, 둘이 끊어지고 나중에 헤어지고 보니까 거기서 초월적인 내용이 나오는 거예요. 초월적인 내용. 초월적인 내용을 다시 설명해볼까요? 노아 때 사람들이 방주 쪽으로 갈 생각도 없었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있는데, 방주이야기가 귀에 안 들어오죠. 조금 있다가 비가 온다. 방주에 들어가야 산다. 이게 기존에 사는 일상적인 논리와 이성적인 보통 원칙에는 전혀 먹힐 수 없는, 먹혀들어가지 않는 엉뚱한 내용이 언약이었습니다.

언약은 항상 그런 식이예요. 우리가 납득을 해서 내 쪽에서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용서받는다. 예수님 피는 깨끗하고 나는 더럽기 때문에 깨끗한 피가 내 더러운 내 죄를 씻는다. 언뜻 보면 인간이 이성적으로 수용할 것 같죠? 옷에 때가 묻었으면 세제를 넣어가지고 세탁기 돌리면 깨끗해진다. 그게 뭐 이상해요. 그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죠. 근데 그렇게 돼버리면 세제나 세탁기가 결국 주가 됩니까? 깨끗해지는 내가 주가 됩니까? 어느 쪽이 결과적으로 주인공 역할을 하는 겁니까? 나죠.

그러니까 그 사람은 십자가를 모르는 거죠.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서 십자가를 모르는 거예요. 나 좋아라고 십자가 믿는 거예요. 그런 십자가는 없어요. 떠나가는 것도 이해가 안 되고, 주께서 건져준다는 말도 도무지 이해가 안 돼요. 왜냐, 건져준다는 말은 같이 거기서 살지 말라는 거예요. 같이 거기서 함께 살지 말라는 뜻이거든요. 건져준다는 게 뭡니까? 갈비탕에서 갈비 건지고, 샤브샤브에서 만두 건지잖아요. 오뎅 건지고. 건져주면 너는 늘 거기에 있지 말고 니는 분리돼라 이 말입니다. 건져준다 이 말 아닙니까?

이걸 나와 너 사이에, 여기와 거기로, 나 너로 인하여 언약 안에서는, 언약의 시작점에서는 ‘나와 너는’ ‘여기와 거기로’ 이렇게 분리되는 겁니다. 나와 너는 여기와 거기로.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됩니까? 이걸, 여기와 거기를 지워버리면 이해가 되겠죠. 다윗과 요나단은 여기에 함께 있죠. 그러니까 다윗과 요나단이 함께 있을 때는 ‘여기’는 있지만, 뭐는 없는가 하면은 ‘거기’라는 게 없죠. 왜? 같은 한 장소에 있기 때문에, 친구사이로 그 동네 살았으니까, 거기가 없잖아요. 근데 작별하고 난 뒤에는 다윗이 있는 곳은 거기가 되고, 아니, 다윗의 입장에서 다윗이 있는 곳이 여기라면, 요나단이 있는 곳이 뭐냐 하면은 거기가 되는 거예요. here과 there이 되는 거예요. 여기와 거기. 차이가 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방출이라고 했습니까? 이게 언약방출이에요. 언약방출. 제목을 또 바꿔야겠어요. 작별인사도 좋지만 언약방출로. 여러분들은 성령을 받으면 꿀벌입니다. 꿀벌은 꿀을 갖고 있어도 꿀이 안 나타나요. 밟혀야 돼요. 터트려져야 해요. 이 땅에서. 이 땅과 결합하는데 실패로 끝나야 되는 겁니다. 한쪽은 복음을 아는데 한쪽은 복음을 모르는 부부다. 남편 설득하는데 실패해야 되고 아내를 설득하는데 실패해야 돼요. 그걸 성공하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내가 알아서 복음을 받아들이면 니도 알아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고, 내가 알아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복음에 관한 개념과 지식과 기호와 단어를 알아들었죠. 십자가 피로 용서받는다. 그거는 알아들었죠. 그러나 실제로 주님이 다가오는 것은 내가 아는 그 십자가, 복음, 피, 그게 다 구원하는데 아무짝도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아무짝도 소용이 없는 거예요. 소용없는 거예요. 그거. 그거 내 좋아라고, 천당 가려고 꼼수로 요령부린 거예요. 요령부린 거.

북한 김정은이 밑에 있는 그 장군들이 옷이 늘어지도록 온통 훈장을 다 달고 나오죠. 그 훈장 달고 한국에 오면 그거 효과가 있습니까? 단칼에 그냥 사형이죠. 그게 하늘나라에 무슨 소용이 있어요. 십자가 알고 복음 알고 이게 하늘나라에 아무 소용이 없다니까요. 하늘나라는 내가 실패자가 되어야 해요. 내가 구원받으려고 그토록 애썼는데, 그게 전부 뭐였다? 그게 전부 다 실패였고 실패였다. 이렇게 돼야 돼요.

그래야 꿀벌이, 원래 토한다고 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냥 밟혔다고 봅시다. 내 몸이, 벌꿀 몸이 완전히 처참하게 밟히니까 터져가지고 안에 있는 꿀이 나오는 거예요. 원래 꿀벌이 토해내서 꿀을 모으는데. 그런 식으로 곱게 하지 말고 과격하게 나갑시다. 밟혀서 가는 거예요. 밟혀서. 왜? 우리는 우리가 밟히는 것을 원하지 않는 존재기 때문에. 우리는 강제성을 싫어해요.

다시 한 번 사무엘상 20장, 사무엘상 20장 줄거리를 들어보니까 굉장히 쉽죠. 아까 이야기한대로 서로 좋아했다. 아버지는 싫어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 쉬운 이야기를 다시 하겠습니다. 자, 사울과 다윗은 왕과 신하로서 다른 신하들이 인정을 해줬고 다른 백성들이 인정을 해줬어요. 다윗은 사울의 신하요, 사울은 다윗을 신하로 인정했고, 다윗은 사울을 왕으로 인정했다. 그래서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서로서로 인정하기 때문에 서로 아는 사이, 서로 안 끊어질 그러한 관계. 어떤 관계? 돈독한 관계. 사울이 왕이 되고 다윗이 신하가 될 때, 우리나라는 태평성대를 이룬다. 사람들이 그렇게 이것을 마땅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근데 여기에 누가 끼었습니까? 여기에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끼어들었죠. 이 관계에. 끼어들어서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성경 그대로 사랑했어요. 근데 아까 이야기했지만 사랑한다는 것은 동성애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뭐라고 했습니까? 다윗에게 뭐가 있었다고 했습니까? 초월적인 요소가 있어서 그 초월적인 요소를 보고 사랑한 거예요. 근데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이렇게 인정해줬으니까, 아들인 내가, 요나단이 다윗을 할 때에, 아버지도 좋은 사람 사귀었다고 칭찬해 줄 것이라고 요나단이 아주 순진하게 생각한 거예요. 순진하게.

그러니 지금 여기 세 사람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함께 같은 장소에 있죠. 그게 바로 요기요, 여기에 있는 겁니다. 여기서 거기가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온 집안이 임영웅이 노래를 들을 때, 온 집안이 재미있게 들어요. 온 집안이. 임영웅이 노래 잘한다. 백억 수입을 가질 만하다. 광고가 열 몇 개고. 역시 노래 잘해. 트롯 때문에 코로나를 이긴다. 전부 다 생각이 같아요. 같은데, 넷째 아들이 방금 군에서 제대하고 왔어요. 나는 임영웅이 보다 김호중이 좋더라. 이래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임영웅이 노래할 때 자기는 자기 방에 들어가 버리죠. 갑자기 여기에 온 식구가 다 모였다가 뭐가 돼요? 거기가 발생되는 거예요. 거기가. 거기라는 장소가 발생된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백날 소리를 질러봐야 오지를 않아요. 구원받을 수 없어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실 때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우리와 같은 공간에 있는, 여기에 같은 인간인줄 알았죠. 목수의 아들이니까. 근데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밉상을 받고 폭력적으로, 강제로 죽임을 당했죠. 예수님이 죽어도 우리와 같은 데서 죽는, 일반사람들처럼 죽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께서 자꾸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나를 버려도 나는 아버지께로 간다. 너희는 땅에서 나서 땅에서 살지만 나는 원래 있던 장소로 간다. 나는 하늘에 올라간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자꾸 올라간다고 이야기해요. 올라간다고.

올라간다고 되어 있고, 요한복음 3장에서는 모세가 놋뱀을 든 것같이 니가 나를 쳐다볼 때가 올 것이라고 이야기해요. 쳐다볼 때가. 쳐다보려면 인간보다 키가 더 높은 다른 공간이 있어야 쳐다봄이 성립되지 않습니까? 자꾸 다른 곳에 간대요. 예수님께서 그냥 하늘에 계시면 언약이 알려지지 않을 건데, 언약을 모를 건데, 예수님께서 하늘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왔다가 올라가버리니까, 거기서 뭐가 방출이 됩니까? 언약이 방출이 되는 거예요. 아,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쉽게 생각해서 천국 가겠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망상이구나! 망상이라는 거예요.

처음부터 구원받아 천국 간다는 게, 이게 애초부터 성립이 안 되는 이야기를 했구나! 그러니까 이게 갈 수 없는 곳에 가라고 마귀가 부추긴 거예요. 마귀가. 마귀가 기독교 종교를 만들어가지고, 교회를 만들어가지고, 자꾸 갈 수 있다고, 예수 믿으면 갈 수 있다고 자꾸 부추긴 거예요. 데리려와야만 가는데, 데리려오지도 않고 내가 갈 수 있다고, 니가 예수님만 잘만 믿으면 갈 수 있다는 거예요. 결국 가는 그 화물 있잖아요. 택배화물. 그 택배화물의 주인공은 누굽니까? 내가 되는 거예요. 내가. 내가 주인공이 돼버린 거예요.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했어요. 누구 좋아라고? 본인 좋아라고. 왜? 다윗은 보통 사람이 아니니까.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니까, 골리앗을 죽였으니까, 그리고 이스라엘이 다윗 때문에 구원받았으니까. 그 구원자를 싫어할 이유가 없죠. 그러나 둘이는 나중에 어떻게 됐다? 결국은 작별인사를 했어요. 아까 작별인사를 봤죠. 20장 마지막 42절에. 빠이빠이에요. 그리고 그 뒤에 못 만났습니다. 나중에 요나단이 누구와 함께 죽느냐 하면은 자기 아버지와 함께 죽어요. 사 무엘상 제일 마지막장 31장에 보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아버지도 죽고 요나단도 죽고 다 죽어요. 그래서 다윗이 사무엘하 1장에 보면 얼마나 우는지 모르겠어요. 굉장히 울어요.

지금까지 어려운 게 하나도 없어요. 요나단과 다윗과 사울이 여기에 함께 있었는데,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해서 그것을 사울에게 이야기하는 순간, 여기가 갑자기 다윗이 따로 있는 장소, 거기가 만들어졌죠. 자, 그 원인이 뭐냐, 원인은 사울이 다윗에게 폭력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폭력적이었다는 사실. 너무 과하게 폭력적이에요. 너무 과하게.

그 점에 누가 또 놀라느냐 하면은 빌라도도 놀라요. 오늘 마태복음 하겠지만. 빌라도도 좀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납득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예수라는 인물에 대해서 너무 폭력적이에요. 빌라도는 뭐 이방인이니까. 율법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예수님이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다고 해서 그게 뭐 사형시킬 일인가? 미친 사람이 미친 말을 한 두 마디 하는데 그것가지고, 그걸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있느냐? 이걸 가볍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사울의 입장에서 다윗은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사울은 알았어요. 왜냐 하면은 사울은 본인의 능력으로 본인이 교육받은 것으로 그것을 아는 것이 아니고. 지난번에 했잖아요. 여기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은 악신이 들어가는 거예요. 악신은 영적존재에요. 레벨이 영적레벨이에요. 영적레벨에서 공격을 받으니까 다윗도 어떤 입장인가 하면은 영적 레벨에 속한 사람입니다. 다윗도 영적레벨이에요.

이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켜보자 이 말이죠. 우리에게 적용시켜버리면 우리가 본인 스스로 자기를 영적존재라고 평소에 생각하면서 대인관계에 나섭니까? 그렇지 않죠. 우리는 뭐 친구한테 헤헤거리고 잘 보이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한번 정리해봅시다. 관계, 인간관계를 생각해봅시다. 인간관계를 생각하게 되면 관계가 두 개가 있어요. 여기서 뭐 여러분들이 어렵다고 하겠는데, 어렵다고 해도 제가 밀어붙일 참이에요.

뭐냐 하면은 표현적 관계와 현상적 관계에요. 얼른 이 단어만 해가지고는 왜 이 말을 쓰는지 모를 거예요. 표현적 관계와 현상적 관계. 현상적 관계라고 하는 것은 툭툭툭툭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빈자리에, 빈공간이나 빈자리에 날파리가 이렇게 툭툭툭툭 들어오게 되면, 또는 모기가 오게 되면 이거는 현상이에요. 현상. 근데 표현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은 빙산에, 빙산을 보면 7/8은 밑에 있고, 1/8이 나타났다고 이래 하잖아요. 배가 이 튀어나온 이 빙산 꼭대기를 우습게보고 돌진하다가는 진짜 숨겨져 있는 몸통을 건드려가지고 배가 좌초하게 돼요. 이 튀어나온 이걸 표현이라고 합니다. 밑에 있는 이건 잠복된 거고. 표현한 거예요. 이건 본성을 따로 갖고 있는 거예요. 본성을 따로 갖고 있죠.

이 세상은 뭐냐 하면은 이 세상 겉을 보면, 표면적으로는 전부 다 현상적이에요. 친구들이 모여가지고 중국집에 가서, “니 뭐 시킬래?” 주인은 주문받으면서 ‘제발 좀 같은 거 시켜라. 이 열 명아.’ 열 명이 왔다고 합시다. 짜장면 열 그릇 이렇게 시키라고 이렇게 하고 있는데, 열 명이 있다가, 나 짬뽕! 나 짜장면! 나 군만두!... 열 개가 다 다르면? 짜증나죠. 중국집 주인이. 다른 손님도 받아야 되는데. 이게 현상적인 거예요. 그런데 열 명이 다 짜장면 열 그릇! 이러면 처음부터 본성이, 속성이 동일하게 되는 거죠. 동일하게.

그래서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에서는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현상적 관계가 아니고 표현적 관계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있잖아요. 우리가 남이 아니고 서로 표현은 다르지만 뿌리가 하나라는 거예요. 이게 바로 언약인 거예요. 이게 바로 요나단과 다윗이 맺은 언약입니다. 사무엘상 20장 17절을 다시 보게 되면,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함으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맹세라는 말이 나오죠. 그 다음에 이제, 요나단이 다윗을 보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너희 나라가 영원할 것이라고, 그렇게 맹세한 것이 있어요. 요나단이 다윗을 보고. 42절에 보면,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영원을 이야기하죠.

그 다음에 사무엘상 18장도 마찬가지입니다. 3절에,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더불어 언약을 맺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 표현은 서로 딴 몸이라 서로 다르지만 안에 담겨있는 것은 다 같이 같은 언약에서 나왔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현상입니까? 표현입니까? 표현이에요. 그래서 제가 성도는 예수님의 아토피라고 한 거예요. 아토피가 있으면 피부에 발진이 나타나죠. 괴롭죠.

그러니까 이 땅에서 예수님이 당했던 수난을 성도가 본의 아니게, 본인이 유도한 게 아니고, 본인이 어쩔 수 없이 다 받아내야 돼요. 그래야 이 세상에서 정을 끊을 수가 있어요. 정을. 우리 딸에게 둘째 애가 있는데 돌을 지냈거든요. 아직도 엄마 젖을 달라고 달려드는 거예요. 그래서 방법이 뭐냐 하면은 식초를 발라라. 식초를 바르면 떨어질 것이다. 다른 애들은 다 떨어졌어요. 그런데 아직도 안 떨어지고 있으니까. 근데 그 전에 여러 가지 방법을 썼겠죠. 맛있는 설탕도 했고, 외손자는 그걸 간식으로 생각해요. 주식은 엄마 젖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젖 떼려고 식초 하니까, 엄마야! 하고 떨어져요. 떨어졌는데, 밤이 되니까 다시 돌아와서 아직까지 안 떨어지고 있어요. 자식이 부모하고 떨어진다는 게 그렇게 힘들어요.

그런데 요나단과 다윗은 자식관계가 아닙니다. 자식관계가 아닌데. 혈연관계가 아니잖아요. 요나단은 누구하고 관계가 있느냐 하면은 아버지하고 관계가 있죠.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가까워야 할 텐데, 이것을 버리고 다윗에게 더 가까이 하면서 뭐가 발생됐다. 언약이 수립이 된 거예요. 언약이 성립된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왜냐 하면은 인간에게 자식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의 희망이에요. 다시 말해서 부모의 죄의 증거입니다. 죄의 증거예요. 자식하고 떨어지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거예요. 이 말은 절대로 인간은 자식하고 떨어지는 것을 상상도 못해요. 왜? 내 희망이고 내 꿈이기 때문에.

그런데 요나단은 아버지하고의 관계에서 중간에 누가 개입했다? 사울왕 입장에서는 다윗 니가 개입해가지고 우리 집안의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이간질했다고 이래 보는 거예요. 그래서 실제로 아버지가 아들한테 욕을 하는 것을 봤죠. 30절에,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아들아! 니는 내 뜻을 따라야지, 왜 내 뜻을 거역하느냐, 이 말입니다. 혈연관계 이게 사랑의 관계지만 혈연관계에 강제를 띠게 되면 거기서 초월적인 폭력이 나와요.

하나님에 대한 폭력이, 육적인 관계를 강제로 뗄 때, 그 관계가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혈육을 꽉 잡고 있던 이 악의 세력. 인간은 절대로 혈육과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고집하는 그 악마의 세력이 뭘 반대한다? 언약수립을 반대하는 거예요. 언약수립을. 니 뿌리와 니 원천이 이 혈육에 있는데, 니가 어떻게, 니하고 예수하고 언제 아는 사이라고, 나를 버리고 예수를 택해? 그게 바로 인간이 유일하게 초월적인 존재, 악마에게 속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이.

저번 주 광주강의를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들어봤죠. 남편이 복음이 좋다고 따라다니니까 아내가 하는 말이, “니는 니 취미생활해서 좋은데, 당신 취미생활 때문에 우리 사이가 지금 엉망이 된 것도 모르나?” 이런 거. 또 반대로 아내가 그러면 남편이 “니는 나하고 결혼했나? 니가 니 신앙하고 했나?” 이런 식으로. 복음 아는 사람이 일부러 부부생활이든지, 부부사이를 깨려고 그렇게 했겠어요? 아까 이야기한대로 언약이 먼저 찾아와서 남편과 아내, 복음 모르는 그쪽이 저기가 되고, 내가 복음을 안다면 여기가 되고. 갑자기 같은 여기가 안 되고 저쪽은 저기가 돼버려요.

주께서는 그걸 떠나가게 만들고,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건져내신다는 말은 뭡니까? 섞이지 말라는 거예요. 저 국물 같은 것, 더러운 국물과는 섞이면 안 된다는 겁니다. 원래 거룩이라는 뜻이 뭐냐 하면은 분리 자체가 거룩이라는 겁니다. 거룩. 좀 더 이야기를 이어나가 봅시다. 이게 관계거든요. (표현적, 현상적)관계.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에서 다윗이 요나단을 먼저 사랑한 게 아니고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했잖아요. 먼저 사랑했어요. 오히려 다윗은 인기가 많으니까 뭐. 요나단이 먼저 사랑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거는 다윗을 만나면서 요나단은 무슨 변화를 느끼느냐 하면은 다윗의 그 영적세계가 요나단에게 스며듭니다. 스며들면, 처음에 제가 이야기했듯이 순진하다고 했죠. 나하고 다윗하고 사귀면 아버지는 격려까지는 아니더라도 허용은 하겠지. 이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강력한, 다윗이라는 그 작자라는 그 이유 때문에 강력한 반발이 있을 줄을 요나단은 생각도 못한 겁니다.

그러면 다윗과 요나단의 만남에서 요나단이 뭘 아느냐 하면은 나를 아는 겁니다. 스스로 알아요. 이게 성경에서는 누가 나한테 질문을 해줘야, 먼저 다가서야 나를 알아요. 이게 뭐냐 하면은 관계예요. 관계. 이게 관계입니다. 관계에는 두 종류가 있죠. 뭐냐, 표현적 관계와 현상적 관계죠. 현상적 관계는 서로 좋게, 좋게 지내면 돼요. “아이고, 이사 왔는데 떡 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저도 떡 하면 드릴게요.” 이러면 되지. “너하고 나하고 같이 살란 말이야.” 이렇게 오버할 필요는 없잖아요. 왜? 뿌리가 다르니까. 따로 각자 살고 그냥 우연한 현상으로서 마주쳤을 뿐이니까. 그렇다 이 말이죠.

결혼 같은 게 뭡니까? 결혼 같은 것이 같이 산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이게 표현이 아니고 뭐였어요? 너는 니 취미생활, 나는 내 취미생활, 따로 현상을 보여준다는 것은, 그건 이미 같이 살아도 딴 살림하고 있는 거예요. 니는 니 방에 콕하고, TV 한대 더 사자. 니는 드라마를 보든지 뭘 보든지. 나는 유럽축구나 볼란다. 따로 있는 거예요. 이미 그런 현상이 구원된 현상입니다. 근데 그렇게 함으로서 전에는 나에게 우호적인 사람들만 모았는데, 이렇게 복음이라는, 예수님이라는 것 때문에 폭력적인 관계가 있을 때, 그것이 나한테 뭐가 되느냐 하면은 그것이 나를 알게 하는 질문이 된다는 겁니다. 내가 거기에 대해서 답변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아까 제가 베드로하고 예수님하고 한 이야기했잖아요.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질문을 해 오시는 거예요. 니 누구냐? 다윗을 통해서, 아버지가 다윗을 싫어함으로서 도달하는, 자기 자신에게 오는 어떤 처지를 결정해야 돼요. 아버지를 따를 것이냐, 아니면 다윗을 따를 것이냐, 결정해야 됩니다. 결정한 것을 20장 끝에 가보면 화살을 쏘는 것으로 보여줍니다. 내 몸 하나 던져서 다윗 너를 살려줄게. 누구로부터? 언약에 대해서 유난을 떨면서 폭력적으로 반대하는 우리 아버지로부터 내가 지켜줄게. 이게 요나단과 다윗이 보여주고 있는 언약의 방출입니다.

언약이 방출된다는 말은, 서로 좋아할 때는 좋은 관계가 유지된다고 생각을 했죠. 그러나 정말 좋은 관계라면 헤어지면서 한쪽이 한쪽을, 또는 서로가 서로를 희생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줄 때, 그런 표현을 보일 때, 그 사람은 영원한 같은 언약에 속했다고 볼 수 있어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희생을 하듯이,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그 환경을 통해서, 내가 주님에 대해서 변호하고, 희생하고, 손해 볼 각오가 돼있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예수님을 추방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세상에 머물러 있잖아요. 요나단처럼. 그런데 우리를 향하여 어떤 사람들처럼 결정을 요구한다든지, 예수를 버리라고 강제적인 조치가 왔을 때, 그것은 바로 거기에 대해서 내가 그들의 말을 들어주느냐, 안 들어주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그걸 통해서 진짜 나의 정체를 아는 거예요. 나는 진정 여기에 있는지 아니면 저기에 있는지를. 본인에게 본인의 자리를 계속 묻는 현상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우리는, 성도는요, 세상에서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그게 협박이고 겁박이고 위협적인 요소를 담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현상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죠. 표현적 관계가 아니고 현상적 관계.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주님이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허락하신 거예요. 우리 주님이. 내가 당한 것을 너도 한번 맛보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경험해보라는 거예요. 세상에서 협박과 공갈, 위협, 니 이러면 우리 관계 끊어진다. 이게 뭡니까? 협박공갈이잖아요. “내가 성경공부 참석하고 늦게 오지 말라고 했지? 늦게 집구석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 이게 뭐예요? 전부 다. 협박과 공갈과 위협이죠. 뭐, 그 정도까지는 안 나가지만. “뭐 오늘 많이 늦네.” 이 정도. “오늘 저녁은 내가 한다고 하다가 손 베인 거 봐.” 이게 뭐냐 하면은 협박과 공갈이에요. 당신 지금 당신 취미생활하고 있다는 거예요.

“당신 취미생활이 중요해? 아니면 내 자식과 혈연관계가 중요해?”라는 것은, 우리를 협박하는 협박용으로 제시하는 겁니다. “당신, 성경공부 따라다닌다고 이 집구석 꼬라지 좀 봐라.” 이게 무슨 뜻이에요? 물론 그렇게 교양 있고, 스스로 교양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교양 없는 말은 안 하겠죠. “또 늦었네.” 이런 식으로. 자기 딴에는 예의를 차리고 그 분노를 억누르면서 한다고 하지만, 그게 전부 다 협박공갈위협이에요.

당신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 이 말이죠. 당신의 임무는 혈연관계의 돈독함이라는 거예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거기에 대해서 알아듣는 이야기라 이 말이죠. 왜? 여기거든요. 여기뿐이라 이 말이죠. 뿐이고~ 여기뿐이에요. 여기뿐. 제주특강에서 요한계시록 강의 했잖아요. 여기뿐.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 그 점에 대해서 우리도 알아요. 그런데 방주에 태워, 나를 떠나가는 배로 하게 하시는데요. 뭐. 난들 어쩌라고요. 내가 나한테 묻는 거예요. “나는 혈연관계로, 이 가족들과 화목하게 추석 같이 지내는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라고 하고 싶어도, 하고 싶어도 다윗처럼 또는 요나단처럼 우리에게 주님의 관계가 더 우세한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 관계가.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어제 낮 설교처럼, 없는데서 있다가 죽을 몸으로 가는 그 간격이에요. 그 간격. 텀. 그 텀이 뭐냐 하면은 우리 인생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오해하기를, 없음에서 뭐로 끝난다? 우리는 살다가 죽으면 없어진다고 생각했죠. 이게 없어지는 게 아니고, 이게 죽을 몸인데 안 죽어서 문제예요. 안 죽거든요. 그래서 그 내막을 나도 몰랐는데, 주님이, 성령이 찾아와서 개입을 해버리니까, “아, 내가 여기서 떠나가는 배구나! 그리고 그걸 가지고 주님께서는 건져낸다고 이야기를 하는구나!”

요나단은 비록 다윗을 떠나보내도 그 언약의 관계는, 그 밑바닥에 잠복되어 있는 몸통은, 다윗언약의 몸통의 일부로서, 죽어도 다윗언약과 함께, 다윗과 함께 영원한 천국에 있을 것입니다.



 첨부파일 : 대전-62강 사무엘상20장1절(언약방출)20200928-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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