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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2 12:54:25 조회 : 57         
대전-124강 마태복음27장19절-26절(자아)20200928-이 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IP:122.43.170.138)
대전-124강 마태복음27장19절-26절(자아)20200928-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27장, 십자가이야기가 계속 일어나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그때 일입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누가 이렇게 묻거들랑 이렇게 답변하세요. 십자가 사건이 왜 일어났는가? 십자가가 왜 복음이 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천국은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못 가는 곳이다. 십자가 의미가 뭐냐, 천국은 못 가는 곳이에요. 못 가는 곳인데 무리하게 가려고 하니까, 십자가가 나서야 이게 막을 수가 있어요.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나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모든 인간들은 살아있을 때보다 죽어서 더 좋은 세계를 꿈꾸고, 그 세계를 가기를 원해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은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난 뒤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눈이 밝아졌다고 했죠. 창세기 3장 5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7절,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진짜 그들의 눈이 밝아졌죠. 눈이 밝아졌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자아를 보는 거예요. 자아. 자기 자신을 보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은 벌거벗었음을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눈이 밝아졌다는 말은, 눈이 밝음, 눈이 밝음은 바로 자아의 시작, 자아시대의 시작이에요. 나에 대해서 눈이 밝아졌어요. 나에 대해서. 그렇다면 나 같은 것은 어두워야 된다는 말이냐? 나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도록 모든 조건이 다 갖추어진 곳이 바로 에덴동산이고, 그게 또한 뭐냐 성도가 가는 나라, 천국이 그러해야 되는 거예요.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나라가 천국이에요. 내가 세세하게 내가 어느 정도인지를 볼 필요가 없다 이 말이에요.

그걸 가지고 완전함, 완전히 거룩함이에요. 우리는 내가 나를 봐서 깨끗해야 거룩함이잖아요. 정결함이죠. 나를 아예 안 보는 것이 정결함이고, 나를 아예 신경 안 쓰는 것이 거룩함이고. 그러한 조건이 구비된 나라가 무슨 나라? 하나님 나라. 왜? 예수 안에 들어있으니까. 추석 때, 명절 때 많이 보는 것이 있잖아요. 택배상자. 택배상자 안에 들어있다 이 말이죠. 밑에 상표가 뭐냐 하면은 거룩이라. 거룩한 성도. 성도 자체가 거룩한 존재, 거룩한 자, 이게 성도 아닙니까? 안에 제품 자체가 거룩이에요.

근데 우리는 컴컴한 상자 안에 들어가 가가지고, 지금 내가 깨끗한가, 내가 추잡한가, 내가 죄지은 게 없는가, 이래 생각한다고요. 그래서 이거는 반품해서 지옥가야 합니다. 이거는 지옥 가서 그런 생각해야 돼요. 지옥 가서. 거지나사로가 천국 가서, 극락에 가가지고, 내가 지금 거지냐, 깨끗한가, 그걸 생각할 필요가 없죠. 왜? 바깥환경 보기에 바빠 가지고.

제주도나 아니면 지리산이나 유명명소든지, 몇 날 며칠 자기 캠핑할 채비나 차리고, 고급 수천 만 원짜리 하는 카메라 있잖아요. 줌인이 되는 그런 카메라 갖고, 여기 두 개씩 메고 다니는 전문사진기사들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자기 찍으려고 그렇게 장비를 갖춰서 먼 데까지 갑니까? 자기 찍으려고. 자기 찍으려면 자기 집에서나 찍지. 뭣 때문에 갑니까? 나를 안 보고 뭘 찍어요? 노을 진 푸른 하늘에 강정마을 별빛들. 내가 서울바닥에서, 도시에서 아무리 해도 얻을 수 없는 그 풍경을 보기 위해서, 장비를 갖춰서 여행을 하면서, 그것도 아슬아슬하게 바위에 다리 벌려가며 파도치는 것을 찍으려고 죽을똥살똥하며 찍잖아요. 바깥을 보기 위함이잖아요.

뭘 안 본다? 바깥을 보게 되면 뭘 안 본다? 나를 안 보죠. 예수 안, 십자가 안, 성령 안, 이게 뭡니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느냐를 보려고 뽑힌 사람이, 택함 받은 사람이 성도입니다. 성도예요. 나보라고 한 게 아니고, 지금 어디까지 왔나, 지금 이거 측정하려고 하는 건 성도가 아니에요. 이미 악마와 만나가지고 이 몸을 보는데, 어디를 보느냐, 자아를 보잖아요. 이 자아를 본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몸을 보는 거예요. 자기 몸을. 눈이 밝아져서 자기 몸이 벌거벗었음을 봤다고 했잖아요. 창세기 3장 7절에.

몸은 본인이 봐서는 안 돼요. 누가 보느냐? 주님이 보면 돼요. 주님이 보면 된다고요. 결혼해가지고 30년이 지났는데, 샤워하면서, “여보! 눈 감아. 이불 속으로 들어가! 두 손으로 눈 가리고 있어! 딴 데 보고 있어!” 이건 뭐 아직도 청춘인지. 아니면 남남인지. 둘이 어디 뭐 모텔에 왔어요? 애기 놓는데 남편한테 부끄럽다고 저리가라고 하는 이런 것. 뭔가 그거는 자의식이, 내 몸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나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노출시키기 싫다는 이 말이 아닙니까? 그렇죠.

그게 하나님께서 그런 짓하라고 만들어놓지 않았다는 겁니다. 성경은. 성경의 시작은 자아있음 자체가 이게 너를 지옥 보내는 짓이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일상의 일이 너를 지옥가게 한다. 이게 성경이야기입니다. 이 복음대로 이야기하는데, 사람들이 설교듣기 어렵다, 싫다, 뭐 이래 되죠. 일상이 일이 나 어떻게 하면 돼요? 라고 할 때, 어떻게 하면 돼요, 앞에 뭘 집어넣었어요? 벌써 나를 보잖아요. 나 어떻게 하느냐? 뭘 해도 지옥 가는 거예요. 뭘 해도 지옥가요. 왜? 나를 쳐다보고 있으니까.

그래서 인간이 지옥갈 수밖에 없고, 저주받을 수밖에 없다는 증거를 보이는 것이 뭐냐, 이걸 한글자로 옷이에요. 옷. 옷을 하나님께서 안 만들었죠. 아담의 옷을, 하와의 옷을 누가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안 만들었어요. 인간이 인간을 만들었어요. 뭘 보면서? 자기를 보면서. 어떻게? 정상이 아니라고. 내가 보기에 내가 수치스럽다고 옷을 만든 거예요. 어제 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성령 받았다는 것은 통째로 그리스도로 옷 입는 거예요.

거룩한 옷은 제사장들이 입는 거잖아요. 오늘날 성도가 제사장들이에요. 거기에 있는 보석들 전부 다 거룩방지용입니다. 소방사가 불속에 들어갈 때 소방복을 입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이기고, 속됨에 속한, 더러운 것에 대한 무서운 맹렬한 하나님의 저주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옷이에요. 그냥 통째로 입는 예수그리스도의 옷입니다. 그 옷에는 피가 묻어있으니까요. 하나님의 언약을 다 이루었다고 묻어있는 옷이거든요.

그러니까 천사가 누구라도, 사탄이 와도, 성도한테는 지적질 할 게 없어요. “저 사람은 남에게 사기를 쳐가지고 벌써 열 번이나 교도소에 왔다 갔다 하는 순악질 여자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저 여자는 사기 쳐서 교도소 열 번이나 왔다 갔다 한 순 성도입니다.”라고 말을 바꿔요. 한 것은 맞아요. 사기 친 건 맞는데, 순 성도예요. 순악질 여사라고 일자눈썹해가지고 그렇더라도 순 성도, 거룩한 사람입니다. 세리와 창기가 갈 수 있는 나라는 하늘나라, 천국밖에 없어요. 세리와 창기와 강도가 갈 수 있는 나라는 천국밖에 없어요.

이 반전, 이 뒤집힘, 그거는 자아 때문에 그래요. 자아. 세리와 창기가 워낙 욕을 얻어먹었거든요. 끝까지 남한테 나설 엄두가 나질 않아요. 남들은 우리 아들 공무원 합격했다고 이래가지고, 에듀윌 때문에 했다고 이렇게 자랑질 하는데. “니 아들은 뭐하노?” “지금 해양대학 나와 가지고 논다.” 그동안 입을 다물고 자랑질을 못했어요. 왜? 자식은 나의 소원이니까. 자식이 지옥가면 엄마가 같이 따라가야 할 정도로. 그 정도로 혈연관계는 강렬하거든요.

그게 왜냐하면 남의 자식이 아니고, 나, 내 자식이에요. 나는 나를 부인해도 내 자식은 내 자식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는, 이 운명적인 결합체. 이게 뭐냐 이 말이죠. 그래서 나를 못 버리니까, 나를 천국 보내기 위해서 여기서 뭘 하느냐 하면은, 인간들은 천국 문을 만들어요. 천국 문. 성경을 이용하든지 뭘 하든지 천국 문을 만들어요. 내가 들어가기 위해서. 그리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두드리라고 했으니까 두드려요. 두드리는데 문이 열리겠어요? 안 열리겠어요? 열릴 일이 없죠.

왜냐 하면은 주님께서는 나 자신을 인정을 안 했는데. 내 말을 듣고 문을 열어줄 수가 없죠. 내 자아의 말을 안 들어요. 주님은 내 몸을 보시지, 자아를 안 보거든요. 주님이 보지도 않는 나를 가지고 원인이 되어서 천국 문을 열어달라고 하면 안 열어주죠. 그럼 안 열리는 문은 뭐냐 하면은 이걸 제목으로 하고 싶은데, 벽이에요. 벽은 문이 없어요. 그냥 내 집이라고 이렇게 그려놓아도 그냥 그림그린 것이지 벽이에요. 십자가는 뭐냐, 벽입니다. 십자가는 두드린다고 열리는 것이 아니에요. 목숨 바치면 되지 않겠습니까? 베드로가 목숨 바쳐도 안 됐어요. 니는 거기에 있고 나는 여기에 있고. 갑자기 여기와 거기가 나눠져버려요. 처소가 달라요. 처소가.

베드로가 목숨 바쳐서 가겠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벽보고 하는 이야기에요. 문이 없어요. 아예 애초에 문이 없어요. 폐쇄공간이에요. 천국은. 왜? 모든 인간은 자아가 있기 때문에 자아를 허용한 천국은 존재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제 설교에서 천국은 자아의 범주를 벗어난다. 이렇게 했어요. 적어볼까요? 천국은 자아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 이거 생각하시고 여러분들이 다녔던 모든 교회의 목사 설교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다녔던 모든 교회의 목사 설교.

그들은 설교를 뭘 겨냥해서 설교합니까? 나를 겨냥하잖아요. 이게 왜 이단인지 아시겠죠. 기존교회들이 왜 이단인지 아시겠습니까? 개혁주의 신학부터. 바로 끝까지 나를 천국 보내줬다는, 보내주겠다는 아주 고마운 제안을 하는데,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사실은 그게, 교회 가는 나의 일상조차도 나를 어디로 보낸다? 지옥으로 보내는 겁니다. 나의 모든 일상이. 포도 까먹고 하는 모든 일상은 나 좋아라고 까먹기 때문에 나를 지옥으로 보내는 거예요. 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고, 말라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나를 계속해서 의식하게 만드는 일들의 총체.

그걸 우리는 마이 웨이my way라고 하죠. 나의 한평생. 애들 앉혀놓고 “내가 너희 둘 키운다고 얼마나 애 쓴지 아나?” “엄마 고만해라” 하고 문 닫고 나갔을 때, 그 자식들은 나에게 던지는 주님의 질문이 되는 겁니다. “자식들이 하는 행동 봤지? 다 컸다고 지 맘대로 하는 것 봤지? 니는 조져놨어. 니는 희망도 없어. 자식들이 자기 갈 길로 가버렸어. 너의 한결같은 소원도 너를 배신했잖아. 이제 니 누구 믿을 거야? 니가 니 믿다가 잘 됐다.”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다가 응답이 안 되고 자식들이 그대로 안 됐을 때에. 네, 그렇죠. 알고 있을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십자가는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가 나의 발목을 잡았다는 이야기가, 바로 이게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자기 자식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자식이 있습니까? 왜 예수님이 자식이 없는가? 이거는 남한테는 안 가르쳐주고 여기에 있는 분들한테만. 농담입니다. 예수님이 왜 자식이 없느냐 하면은, 예수님은 잉태치 못한 여자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천국은 이 땅에 없는 자들만 천국에 가게 되어 있어요. 이 땅에 없는 자들. 이 땅에는 육에서부터 육으로 가는, 이런 것들은 전부 다 자아에서 자아로 가기 때문에, 전부 다 이 땅은 자아들의 모임이에요. 집합이고. 전부 다 마스크 쓰고 자아들이 있는 거예요. 마스크에 써놓아야 해요. 자아라고. 이건 내 마스크라고. 모든 게. 코로나 오니까 코로나 앞에서 누가 겁내느냐, 몸은 겁내지 않는데 자아가 겁내요.

참, 이 말이 진짜 어려운 말이에요. 몸은 겁내지 않는데 자아가 겁낸다고요. 왜? 자아의 바다고 자아의 세계에 있으니까. 여기에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그 아버지의 자아, 엄마의 자아가 자식이라는 자아를 만들고, 그 자아가 결혼해서 또 애 낳으면 자아가 되고. 전부 다 자아의 세계예요. 나의 세계. 이미 알아버린 나를 자기가 알아서 포기하려고 하는 것이, 그게 바로 불교 아닙니까? 나는 무다. 없다. 없다는 말을 본인이 하고 있어요. 뭐가 본인이 없어? 무를 추구한다는 자체가 본인이 있다는 뜻인데요.

이 자아가 어디까지 가는가, 지옥까지 따라가요. 그래서 거지나사로 맞은편에 살던 부자는 지옥에 가서라도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은, 그 나사로 불러다가 에비앙생수 한 병 달라고, 택배로 부쳐달라고 요청하고. 그거 거절하니까, 지금 내 동생 다섯 명이 안 죽고 있는데, 나도 바보지만 그들도 바보등신같이 죽으면 그만이 아니고, 죽으면 지옥에 온다는 사실도 모르고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좀 나사로를 보내가지고 복음 좀 전하면 안 되겠습니까? 그것도 니 생각이다. 그것도 니 가족이지.

이게 뭐냐 하면은 아브라함과 선지자와, 율법과 선지자에서 니가 하지 않더라도 이미 율법과 선지자에게 이야기 잘했다. 문제는 율법과 선지자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다시 말해서 자아를 어떻게 구원하는 게 아니라 자아 없던 시절의 이야기인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내 자아가 없다. 그러면 자아가 없어지려면 다른 자아가 등장하면 되겠죠.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자아들에 의해서, 좀비 같은 자아를 갖고 있는, 좀비의 자아에 죽고,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바로 천국에 합당한, 새로운 자아로서 우리한테 오는 겁니다.

그 자아에 있는 이름이 뭐냐, 그게 바로 주의, 그 다음에 뭐냐, 이름이에요. 이름. 주의 이름. 그게 주의 이름이라고요. 그래서 제가 오늘 마태복음 27장 19절을 이야기하면서 여기 등장인물들을, 자아들을 해보겠습니다. 19절 이전에 보면 바라바 나오죠. 바라바. 바라바 나오고 그 다음에 누구 나오느냐 하면은 빌라도 나오죠. 오늘 본문은 주로 빌라도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그 다음에 여기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 죽이려고 하니까, 갑자기 자기 마누라가 “여보, 여보, 재판 경솔하게 하지 마라. 어젯밤에 꿈자리가 사나웠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래”해가지고, 마누라하고 둘이 있을 때는 풀어주려고 했는데, 막상 현실에 나와 보니까 내 자아가 저 많은 유대백성들로부터, 지도자들부터 협박을 받고 있었던 거예요. “당신 똑바로 재판 안 하면 우리들이 로마황제한테 직접 고소할 거야. 그러면 당신 잘려.” 이래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자아가 있다는 말은, 자아는 더 큰 자아들에게 협박을 받고 있고 권세에 눌려있는 겁니다. 이걸 아까 관계라고 했죠. 관계. 인간의, 자아와 자아의 관계. 육과 육의 관계. 이웃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내가 나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이웃들과의 어쩔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해나가는 겁니다. 나라는 자아를 지키기 위해서. 그래서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모든 관심사는 내 자아를 지키기 위해서 우선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몸을 지켜야 되겠죠.

그리고 그 다음에 지킬 것은 자존심과 위신과 체면과 명예, 비록 먹을 것이 있더라도 자존심이 상하면 자살. 위신이 상하면 자살. 그 사람이 자살했다는데 그 사람 집에 먹을 것이 없었는가? 냉장고에 보니까 먹을 것이 가득 차있어. 안심고기하고 있어. 근데 왜 죽었는지? 기분 나빠서 죽었대. 기분 나빠서. 자아가 손상을 입어서 죽는 거예요. 그러면 자아를 잃었습니까? 아니면 자아를 지키려고 죽은 거예요? 자아를 지키기 위해서 몸을 죽이는, 자아가 그걸 지시한 거예요. 악마가 심어준 자아가, 니 몸은 죽더라도 자아는 있어야지, 라고 시켰기 때문에, 그거는 본능적으로 죽은 겁니다. 자아 지키기 위해서.

특히 자살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관계,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살을 많이 해요. 혼자 있을 때 자살 안 합니다. 타인과의 관계. 대표적인 것이 뭐냐, 부부싸움. 부부싸움 이후에 베란다 문 열고, 높은 아파트 가면 곤란하다니까요. 문 열고 그냥 충동적으로 뛰어내려버려요. 충동적으로. 혼자 뛰어내리려고 하다 보니까, 내 자아만 손해 보는 것 같으니까, 애들 있는데 아파트에 불질러버리고. 그럼 옆집은 뭐예요? 홀라당 다 타버리죠. 안 그러면 자식 목 조르고 자기도 죽고. 근데 자기 목을 너무 약하게 졸라서 자기는 살아있고. 뭐 이러죠.

전부 다 세상은 뭐냐, 악마가 심어준, 악마가 심어줬거든요. 이 자아를. 악마가 오기 전까지는 자아가 없었어요. 왜? 이 몸은 누구 거니까? 주님 거거든요. 아내도 주님 거고 나도 주님 거고. 그러니까 서로 주님으로 만난 관계기 때문에 두 사람이 한 몸이 된 겁니다. 그런데 모든 이 세상의 부부는 절대로 한 몸이 될 수가 없죠. 자아 때문에. 자아 때문에 그런 거예요.

어제 낮 설교 하면서 제가 중요한 이야기했어요. 교회 봉사하면 그게 나의 힘으로 축적이 된다고. 누적이 돼있어요. 봉사하면. 봉사하면 할 때마다 삐질 확률이 더 높아지게 돼있어요. ‘나만 등신이가? 나만 봉사하고, 내 봉사를 사람들이 지금 농락하고 있구나. 이용하고 있구나. 남한테 이용당하는 나만 바보지.’ 이게 뭐냐, 자아가 점점 더 강화되는 겁니다.

성령으로 봉사하는 게 아니고, ‘나 어때, 나 자아의 가치가 봉사 안 하는 너보다 훨씬 낫지?’자랑질 하려고 봉사하는 거예요. 헌금도 마찬가지고. 다 그런 겁니다. 심지어 복음가지고 논쟁할 때도 마찬가지고. “아이고, 초짜네. 이 정도는 알아야 복음을 알지.” 비슷하게 되는 겁니다. 갑자기 침묵이 흐르네.

자, 바나바와 빌라도. 그 다음에 예수님 빼놓고요. 20절에 대제사장. 그 다음에 장로들. 무리들. 자, 이것들이 뭘 했느냐 하면은, 자아들이 모여서 뭘 했느냐 하면은 저 자아는 우리 자아에 포함이 될 거냐, 말거냐를 결정한 자아재판을 한 거예요. 우리 자아하고 예수라는 자아하고 같이 결속이 될 수 있느냐, 아니면 우리 자아를 공격할 요소가 있느냐를 판단해서,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우리 세계에 섞일 수 없는 자아라고 판단을 내리고, 그 자아를 없애는 것이 옳다고 한 것이 십자가예요. 그게 십자가입니다. 바라바, 빌라도, 대제사장들, 장로들... 다 마찬가지입니다. 무리들도 마찬가지고.

자,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아는,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얼마나 바른 소리고, 틀린 소리가 아니겠죠. 근데 뭐가 빠졌는가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이걸 빠트리면 안 돼요. 뭘 주시느냐 하면은 우리를 공격했던 자아, 우리 자아 때문에 돌아가셨고, 따라서 우리 자아를 문제 삼으시는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성령을. 우리는 성령을 달라고 한 적이 없는데. 우리가 원하는 성령은 어떤 성령이냐 하면은 내 뜻대로 잘 되는 성령이에요.

그러니까 내 자아를 지켜주는 성령, 그 성령을 성령이라고 이해하고 받아서, 성령이 충만했다고 이래 이야기하는데,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집사는 죽었어요. 돌에 맞아 죽었어요. “주여, 돌에 맞아 죽게 하옵소서.” 그런 기도 안 했거든요. 왜냐 하면은 벽이, 벽밖에 없을 때는 문이 없어요. 그러나 저쪽에서, 저쪽 벽 밖에 있는 세계, 하늘나라에서 문을 만들어서 열 경우에만 문이 생기고, 그 문을 자아가 들어가려고 하면 다시 벽이 돼버려요. 문이 있던 자리에서 문이 없어져버려요. 진짜 도깨비 같아.

자아가 없어질 때 은혜 받았다고 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말이에요. 성령 받은 게 정답이에요. 자아가 한 순간이라도 없어질 때. 나 같은 것은 죽여 버리세요, 라고 할 정도로. 그걸 아주 기쁘게, 아이고 반갑다. 그동안 지긋지긋한 자아, 아이고, 잘 뺏어가서 감사합니다. 이게 짧은 한 2초, 3초, 5초라도, 짧은 순간에, 그런 순간이 있을 거예요. 성령 받은 사람이 있어요. 괜히 자아가 있어가지고 애 걱정, 세상걱정, 모든 걱정, 이제는 백령도 걱정까지 다 한다. 짜증난다. 이러다가 갑자기, 아, 참 걱정할 거 뭐 있어?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는데. 그런 일을 또 주께서 일으켰는데. 나는 여기서 지금 귀신으로 파견근무 왔잖아. 주여, 일 그만 시키고 데려가시죠.

이거는 자아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다 이루었다를 생각할 때는, 택배 안에 어두컴컴한 데 앉아가지고 자기가 자기를 살피고 측정하고 분석하고 숙제내고 점수매길 필요가 없다 이 말이죠. 내가 나한테 점수를 매기지 마세요. 내가 나한테. 오늘 제목을 뭐라고 할지 갑자기 생각이 안 나는데. 내가 나한테 점수 매길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이 자아라는 것은, 십자가사건은 우리가 원했던 것이 아니고, 제자들도 원했던 것이 아니고, 단독행위에요.

여러분, 이런 노래가 있어요.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니고 내가 보낸 것도 아닌데..” 그게 서른 즈음이라는 김광석 노래예요. 그 가사에 보면 이렇게 나와요. 내가 떠나왔다. 자아가 동원되죠. 내가 보냈다. 자아가 동원되죠.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해주세요, 라고 부탁한 게 아니에요. 이미 유대인들은 유월절 그걸로 충분하다고 봤지, 유월절 그것이 어떤 인물화 된다는 생각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들은 유월절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왜? 유월절은 자아가 지킬 수가 있잖아요. 아, 제사 지낸다면서요. 제주도에서. 제사 지내는 것, 뭐 얹으면 되잖아요. 좌청룡 우백호 얹으면 되잖아요. 제사 지내면서 뭐 얹을 때 다른 건 안 올리죠. 근데 죽었다고 소문 난 4대 증손 할아버지가 거기 걸터 앉아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건 기절초풍할 일이죠. 지금 제사 대상이 되는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마스크 쓰고 다리 꼬고 앉아있어 보세요. 야! 니 뭐하노? 그러면 섬뜩하죠. 귀신이라고 넘어가겠죠. 그동안 우리가 살아있는 자 보고 죽은 제사지냈죠.

예수님은 지금 살아계시잖아요. 무엇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서? 내 자아가 시도하는 구원의 모든 시도가 악마적이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살아계시다 이 말이죠. 주님은 우리가 보낸 것도 아니고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니에요. 다만 우리가 눈이 밝아져가지고 내 인생은 내가 단도리하고 내가 처리하고 내가 관리하고. 최종관리자가 내 자신이라는 이것이 예수님을 공격하는 악마의 마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것을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그걸 몰랐죠. 왜? 자아가 있는데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죠. 무책임하면 욕 얻어먹을 일이지.

내가 알아서, 나이 그만큼 됐으면 나도 취직해서 공무원 돼서 월급타고 결혼하겠다. 이게 뭐가? “아들아! 니는 이제 죽었어. 니는 끝났어.”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그래, 기특하구나. 자랑스럽다. 아들아.” 이렇게 하죠. 우리의 모든 일상이 결국은 우리 모든 자아를 지옥 보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새로운, 자아가 없는, 잉태치 않은 분이, 그 일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주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일상이 자아를 지켜주는 일상이라고 해석을 그렇게 해버리죠. 해석을. 인생을. 일기장 쓸 때 그런 이야기 쓰죠. 그렇지 않고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면 그거는 기적이라는 말도 아까워요. 신비로워요. 어떻게 그런 일이? 내가 있는데 내가 나를 왜 포기해!

그걸 가지고 십자가라고 하는, 예수님이 십자가 졌잖아요. 이 사람들, 자아들이 만든 사건이 무슨 사건? 십자가사건이죠. 주님께서 알았습니다. 십자가하면서 자기를 부인하라. 자아를 부인하라. 너를 부인하라. 그래야 십자가가 보인다. 인간은 자아를 부인할 수가 없죠. 그러니까 우리가 원치 않는 성령이 오게 되면 자기 부인이 돼요. 자기 부인이 되면서 그게 기뻐요. 그 무거운 모든 짐이 없어져요. 왜? 거룩이라는 택배상자 안에서 우리가 이 세상이 끝나고 운반되고 있는 중이니까. 주님의 능력에 의해서.

혹시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거저 건지는 그런 가스펠송이 있습니까? 지금까지의 가스펠송이 전부 다 “여러분들이 회개하면 구원해주십니다.” 이런 종교적인 가스펠송밖에 없는데, 그런 가스펠송 말고 가사 제대로 된 가스펠송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져왔어요. 한 장씩 드리겠습니다. 여기에 Living Hope [주 예수 나의 산 소망]이라는 게 영국노래거든요. 근데 이 번역을 보게 되면, 모든 가스펠송의 번역을 보게 되면, 전부 다 기도하고 찬송하고 열심히 해서 예수그리스도로 믿자. 이런 번역이었어요. 번역자체도 그렇고 원래 가사도 그럴 거예요. 그래서 이거는 복음적인 게 아니었어요.

그런데 제가 깜짝 놀랐어요. 이런 복음성가의 가사내용은 처음 접해요. 깜짝 놀랐어요. 주 예수 나의 산 소망이라는 노래가 많이 나오는데. 그런 것 듣지 마시고, 들어도 좋지만, 스캇 브래너 레위지파 찬양팀에서 번역한 가사와 다른 사람들이 번역한 가사를 보세요. 가사가 완전히 달라요. 그 가사를 제가 한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깊은 절망의 수렁 가운데/ 깊은 절망이죠. 뭐가 없는 거예요? 희망 없습니다. 무슨 희망? 자아니까. 오늘 강의 제목을 자아라고 합시다. 간단하게 자아라고. 자아자체가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자아 자체가 소용이 없으니까 기도해도 소용이 없죠. 이 찬양을 해도 소용이 없는 거예요.

주님께 닿을 수 없던 우리/ 자, 자아를 뭐로 표현했습니까? 어떤 나였다? 주님께 닿을 수 없다는 거예요. 아까 말씀드린, 문을 열어도 그 문이 아니었고 하나의 그림이었고 벽이었다고 했죠. 어둔 밤중에 하늘을 향해, 아, 그 다음 가사가요. 정말 어려운 가사가 나왔어요. 뭐냐, 보통가사에서는 주님이 나를 부를 때에요. 보통가사에서는. 근데 주님이 나를 부른 게 아니에요. 여기에는 주의 이름이 나를 부른 거예요.

주의 이름 나 부를 때/ 주의 이름이 돼버리면 나는 내 구원을 챙기는 것이 아니고 나는 주님의 기능자가 됩니다. 이름은 기능이기 때문에. 아까 뭐라고 했죠? 이름=자아 근데 나 자아는 없고 주님의 자아가 나를 대신했기 때문에 나의 일상은 주님의 자아의 기능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오늘 강의를 들었으니까 주와 주의 이름의 차이점을 아시겠죠? 주는 존재가 되고 주의 이름은 기능이 되는 거예요.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나는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나라는 자체가 날아가 버리고 주님의 기능자가 되는 거예요. 이미 닿을 수 없는 우리인데 주의 이름이 온 거예요. 구약 때부터 주의 이름은 항상 기능으로 왔어요. 주의 이름으로.

어둠을 뚫고 오신 주 사랑/나의 절망 거두셨네/주님의 공로 다 이루셨네/주 예수 나의 산 소망/ 중요한 가사번역은 좀 뒤에 나옵니다. 그 누가 주의 자비를 다 알아/ 보세요. 내가 주의 자비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자비라는 택배상자 안에 내가 놓여버린 겁니다. 놓여버리면 에베소서 3장에서 사도바울이 기도한 것처럼 주의 사랑과 자비의 높고, 깊고, 길고, 넓음을 누가 다 알 수 있느냐? 모르죠. 주의 자비에 관심이 있어버리면 어디에 관심이 없을까요? 내 집구석, 내 수입, 이런 데 관심은 없죠. 그게 자기를 부인하는 거예요. 십자가는 뭐라고 했습니까? 천국 가는 길은 없는 겁니다. 막혀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죠.

한없는 은혜 측량할까/ 이 말의 가사가 또 중요한 게 인간들은 하루도 쉬지 않고 누구를 측량하느냐 하면은 나를 측량해요. 나를 측량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되었을까? 주님은 얼마만치의 은혜를 주셨을까? 맨날 측량하는 거예요. 근데 오늘 가사에 보니까 한이 없기 때문에 세세한 것, 화장실 문 잘 안 닫히는 것도 자비라. 은혜라. 모든 것이 손만 대도 자비고, 어느 것 하나 자비 없는 것이 없는 것. 어떻게 그걸 측량을 다해요. 전부 다 자비 안에 푹 잠겨 있는, 자비의 눈사태 안에 놓여버렸는데. 사방팔방이 다 자비인데 뭐. 어떻게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실망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불평하고 불만하고 따지고 원망하고, 그게 나올 수가 없죠. 모든 게 둘러봐도 자비니까.

영광을 떠나 이 땅에 오신/ 그 다음에 결정적인 것이죠. 어느 복음송에도 나오지 않는 가사. 죄가 되신 구주 예수/ 보통 뭐냐, 죄인이 되신 예수예요. 죄인이 되신 예수. 근데 죄인이 아니고 죄예요. 죄. 제가 이 노래를, 가스펠송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너무 장사모습이 보여요. 안 보는데, 제 생전에 이런 가스펠송 가사 처음 봤습니다. 죄가 되신 예수여. 왜냐 하면은 보통 사람들은 예수님은 의롭기 때문에 죄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잠시 죄인이 됐지만 죄인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근데 가사가 ‘죄가 되신 구주예수’예요.

이 가사가요, 주 예수 나의 산 소망이라는 외국 곡을 보니까, 이 가사가 없어요. 죄가 되신 구주 예수는 이게 너무 겁나가지고 이걸 번역할 수가 없어요. 전부 다 뭐냐 하면은 달리했어요. 죄인으로 오신 주 예수님, 이런 식으로. 아니에요. 죄가 되신 거예요. 그동안 인간들은 죄인이면서도 뭘 몰랐다? 죄를 모른 거예요. 죄도 모르면서 죄 짓고 있었던 거예요. 죄라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죄를 알지, 다른 것을 통해서는 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이 되신 것이 아니고 죄가 되신 거예요. 신학적으로 도저히 용납이 안 되죠. 신학자들은 도저히 이걸 용납 못합니다.

왜, 예수님이 죄가 되셨는가 하면은, 인간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눈이 밝아서 자기를 따져가지고 학문적으로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계산해보니까, 예수님이 죄가 되면 안 되고 죄인이 되어야 맞다. 예수님이 우리같이 죄인이 되었구나, 라고 해야, 이게 은혜롭다고 판정을 누가 내리느냐 하면은 자아가 내린 거예요. 내가 내린 거예요. 주님이, 하나님이 죄가 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인간의 자아들의 세계에서는. 참 이거 겁 없는 번역이죠. 죄인이 되신 예수님이 아니에요. 죄가 되신 예수님이에요.

자, 죄가 되시면, 죄인으로 알던 사람은, 인간이 자아의 죄를 벗기 위해서 누굴 찾습니까? 예수님을 찾게 되죠. 근데 만약에 예수님이 죄가 된다면 다시 죄를 지으려고 예수님을 찾을 위인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죠. 그러니까 예수님을 안 찾게 되는 겁니다. 복음성가들이 뭐냐 하면은 우리는 죄인이라고 인정하고, 의인되신 주님의 보혈의 피, 깨끗한 피를 받으면 우리는 죄 씻음 받아서 천당 간다. 이게 그동안의 모든 가스펠송이었잖아요. 근데 그렇게 생각하는 그 자체가 아직도 우리가 내 죄를 제대로 모르고 하는 헛소리예요. 이게 얼마나 깊이 있는 복음입니까?

이 가사를 쓴 사람이 지금 이 정도까지 안다는 생각이 저는 안 드는데, 제가 지금 해석을 이렇게 했지, 제가 억지로 해석을 해서 그렇지, 번역한 사람이 거기까지 알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진짜 안다면 보통사람이 아니에요. 번역이니까, 한국 사람이 했겠죠. 원래 가사는 이게 아닐 거예요. 죄인으로 오신 예수님이라고 했겠죠. 그러니까 제가 지금 번역을 어떤 마음으로 했는지 관계없이 저는 적절하다고 해서, 오늘 강의와 관련해서 이게 옳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 다음 봅시다. 그 다음 가사가 적절한 가사가 나왔어요.

주의 십자가가 내게 말하네/영원히 난 용납됐네/ 보통 용서하는 단어를 쓰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용납이라는 단어를 썼어요. 용서라는 단어를 써버리면 니가 용서받고 난 뒤에 깨끗하게 살아야한다는 책임, 직무가 주어지잖아요. 그런데 용납이 돼버리면 앞으로 어떻게 개판으로 살아도 다 용납이 된다는 뜻을 갖고 있어요. 이것도 나의 설명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무조건 이용하면 그만이거든요. 영원히 나는 용납됐네. 앞으로 어떤 짓을 해도 용납됐네. 용서받았으니까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깨끗하게 살아라, 이게 아니라 어떤 짓을 해도 나는 용납됐네.

아름다우신 왕 나는 주의 것/ 아름다우신 왕 그 다음에 뭡니까? 멋지잖아요! 나는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주의 것’이라고 하죠. 주의 소유가 된 거예요. 그러면 나는, 내 자아는 소용이 없는 거예요. 왜? 소유권이 바뀌었으니까. 소용이 없죠. 그동안 나의 자리에 있던 것이 주님으로 바뀌었으니까. 내 몸은 나의 것이라고 잡아 땡길 그 주체가 사라져버렸죠. 주님이 내 소유가 된 겁니다. 그리스도 나의 산 소망.

할렐루야 주를 찬양하여라/할렐루야 자유케 하셨도다/죄의 저주를 끊으신 주께 구원이 있도다/주 예수 나의 산 소망/ 죄의 저주를 끊으신 주께 구원이 있도다! 이 말도 멋지지 않습니까? 구원이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계속 끝까지 자아를 없애버리면 주님께 구원이 있는 거예요. 그리고 나는 주님의 구원의 기능자일 뿐이에요. 구원이 나한테 없고 주님께 있어도 나는 좋아라는 것을 보여주는 기능자. 그게 바로 성도라 이 말이죠. 그 다음에 보세요. 멋진 표현이 나와요.

언약된 아침 장사된 몸에/ 언약을 등장시키죠.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부활의 호흡 시작 됐네/ 부활의 그 다음이 뭡니까? 호흡이죠. 지금 주님이 살아있음을 호흡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부활의 호흡이 그 다음에 뭡니까? 시작 됐네. 끊어졌던 호흡이 다시 시작된 거예요. 이것은 바로 우리 안에 주님의 호흡이 시작됐으니까, 우리가 죽은 자가 아니고 우리가 주 안에서 주님의 호흡이 뛰는 거예요. 내 호흡이 아니고, 자아의 호흡이 아니고 주님이 호흡이 계속해서 작동을 하는 기계가 우리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혈육관계라고 하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자아와 자아의 만남이거든요. 자식이고 부모고 부부고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유다의 사자 위엄찬 선포/ 사자가 뭐냐 하면 메신저라는 뜻이 아니고,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영어로 라이언이에요. Lion. 그래야 그 다음에 포효라는 말이 성립되니까. 5절,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유대지파가 맹수다 이 말입니다. 맹수. 이스라엘의 언약을 책임질 맹수. 적들을 아주 이빨로 으깨버리는 그러한 힘을 가진 유다지파가 그 힘을 드디어 발휘하기 시작했다. ‘위엄찬 선포’ 말씀 자체가 현실이 되니까.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으니까.

사망이 무너졌도다/ 영어로는 브로큰broken(부서진, 깨진, 나누어진, 부러진)으로 되어 있어요. 사망이 무너진 거예요. 무너졌으니까 보이는 것이 재가 돼버린 거죠. 제가 주일학교 아이들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폐허위에서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아이들 밖에 없다. 왜? 어른들은 자기 평생에 일군, 공들인 것을 불도저로 다 밀어버렸으니까 울고불고 난리가 났죠. 근데 애들은 뭣도 모르고 자기들끼리 호호거리면서 재미나게 노는 거예요. 놀이터 새로 생겼다고. 사망위에서 놀 수 있는 사람은 성도밖에 없습니다. 사망을 보고,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성도밖에 없어요. 나도 그랬었었었어.

이제 사망은 무덤이 더는/우리를 주장할 수 없네/유다의 사자 위엄찬 포효/사망이 무너졌도다/주 예수 승리하셨네/그리스도 나의 산 소망/당신은 나의 산 소망/ 포효는 아까 선포했으니까, 으르렁대는 소리. 시간 한 4분 남았는데 노래 한번 들어봅시다. Living Hope, 살아있는 산 소망. 한국의 어느 바닷가에서 여럿이 합창하면서 합니다. 각자 듣기로 하고 마치겠습니다.

다시 하게 되면 이 자아는요, 마귀가 심어준 것이라는 것. 자아를 보게 함으로서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누구 중심? 자아중심으로 돌이키게 하는 악마의 모습은, 모든 것이 예수님 중심이라는 것을 극구 방해하는, 악마의 집요한 방해공작에 인간이 말려든 거예요. 오늘날 모든 세계가 말려들었고.

그래서 십자가라는 것은 무슨 뜻이다? 빌라도, 바라바, 대제사장들, 장로들, 무리들, 전부 다 그들은 무슨 직책이 있지만, 모든 것은 하나의 악마에 놀아나는 자아들이고, 그 가운데 우리가 현장에 있다면 우리도 같이 놀아나는 자아의 한사람일 뿐이에요. 예수님이 백번 와도 맨날 우리는 못 알아봐요.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자아에 절망을 줘가지고, 이 자아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 자아 자체가. 내가 잘해볼까 하는 이 자체가, 내가 기도하고 예수 믿어서 천당가보자 하는 이 자체가 문제 있음을, 성령이 올 때, 아, 이거는 바로 내 자체가 죄구나. 황송하게도 주님도 죄가 되셔서 이제는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서 혈육밖에 모르고 자아밖에 모르는 이 세상에서 분리가 되도록, 주께서 오늘도 복음을 알려주시고 성령 주셨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십자가 이 비밀을 성령을 받지 않고서 어찌 알겠습니까? 만약에 성령이 오셨다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고 예수님 자아 자체가 우리에게 심겨진 그것이, 성령의 일하심이고 증거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스데반 집사가 성령 충만을 받고 난 뒤에 기쁨 속에서 죽을 수 있었던 것처럼 이미 우리가 죽은 자로 기쁨 속에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대전-124강 마태복음27장19절-26절(자아)20200928-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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