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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2 15:55:34 조회 : 131         
8강-암 4장 4-5절(헌금의 원조)201021-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06.240.236.10)
8강-암 4장 4-5절(헌금의 원조)2010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4장 4-5절까지입니다.

아모스 4:4-5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 내어 광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 벧엘이라는 지명이 나오고 길갈이라는 지명이 나오지요. 그리고 여기 4절에 “십일조를 드리며”라고 해서 율법적 행위들이 나옵니다.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광포, 낙헌제 드렸다고 광고하는 일들을 한다고 되어 있어요. 이 지명의 공간, 수은제와 낙헌제라는 제사 그리고 제사에 필요한 물자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십일조, 거기다가 아침마다 희생을 드린다는 이것은 상번제, 아침마다 드리는 제사가 있어요.

상번제, 낙헌제, 수은제, 이 제사와 지명을 하나님께서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서로 그 지명의 중요함과 제사를 드리고자 하는 지시들과 모든 것이 같은 취지로 통하고 있음을 뜻하는 겁니다. 통한다는 것은 ‘벧엘의 취지와 길갈의 지명이 갖고 있는 그 의미를 모르게 되면 너희들의 제사도 아무 소용이 없고, 반대로 수은제, 낙헌제, 상번제, 이런 제사를 제대로 드리지 않으면 너희들이 굉장히 중요한 공간, 과거에 하나님을 만났던, 하나님이 어떤 사건을 일으켰던 그 벧엘, 길갈이라는 것도 하나님께서는 중요시 하지 않고 거절한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이 본문 보면서 하나님께서 지정한 장소에 가서 하나님께서 정해준 제사와 십일조를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한 것으로 이해하시거든요? 그런데 이 율법에 나오는 제사, 희생 같은 것은,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일을 일으키고 길갈에서 일을 의미 있게, 어떤 지역을 그렇게 만든 취지를 모르게 되면 제사 같은 것도 소용없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십일조 드린다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지요.

이러한 이스라엘 역사 속에 벧엘 또는 길갈, 수은제, 낙헌제, 상번제, 십일조, 이런 율법적인 현상이 돋아나는 그 원판은 어떤 하나님의 뜻 때문에 이런 현상들이 일어났는가를 아시면 되는 거지요. 그것은 하나님과 그리고 인간들의 만남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인데, 접근이 불가하다는 점을 하나님께서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서는 접근이 가능하지 않다는 겁니다.

출애굽기 19장 18, 19절에 보면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그렇게 되어 있고 13절에 “손을 그에게 댐이 없이 그런 자는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거나 살에 쐬어 죽임을 당하리니 짐승이나 사람을 무론하고 살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계시는 이 시내산을 함부로 범하는 자는, 접근하는 자는, 쳐들어오는 자는, 그 산위에 올라오려고 하는 자들은 누구라도 짐승이라도 사람이라도 무론하고 살지 못한다. 사람이 살지 못한다. 사람이 근접할 수 없다. 접근할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밀어내는 거지요. 하나님과 인간은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인간과 만나지 않겠다. 그걸 전제로 할 때에 여기에 인간이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제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 제물이나 또는 재산, 요즘 같으면 돈,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시내산, 벌건 시내산, 연기 피어나는 시내산, 지진이 일어나고 진동하는 그 하나님이 계신 거기에 개입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 돈 가져 왔습니다.” 하면 하나님이 돈 받습니까? “하나님, 제물 가져왔습니다.” 하면 하나님이 제물 받습니까? 안 받지요. 접근을 하지 말라는데 “하나님, 선물 가져왔습니다.” 하면 하나님께서 “선물 가져왔어? 그러면 접근 금지를 풀 테니 이리 오너라.” 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히브리서 12장 20절을 봐도 방금 읽었던 출애굽기 19장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너희가 감당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 무서움을. 21절에 “그 보이는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모세만은 특별히 초청받아서 시내산까지 올라갈 때 모세가 아주 신바람 난 것이 아니고 무섭고 떨린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접근할 수 없는, 접근이 불가한 하나님을 지금 단독으로 혼자서 하나님과 접견하고 있는 거예요.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모세가 “하나님이 좋아하는 돈 가져왔어요.” 하면 하나님이 만나줍니까? 특히 여기는 하나님의 맹렬하고 무서운 불이 있는 곳이에요. 연기가 피어나고 불이 있는 곳이라는 겁니다. 불이 있다는 것은 인간이 이 지상에서 갖고 있던 모든 것들은 다 불에 태워져 버리고, 소실되고 소멸돼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이스라엘을 보고 이야기하잖아요.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이스라엘이 뭘 알고 있느냐 하면, 옛날 이스라엘은 시내산의 경험을 했던 민족이에요. 시내산 경험, 하나님과 인간은 만날 수 없다. 그 체험을 한 민족이 이스라엘입니다.

개인적으로 얼마나 성품이 곱다든지, 양심적으로 산다든지, 성실하고 이웃에게 착하게 살고, 성격이 어질다, 그리고 많은 재산이 있어서 그 재산을 이웃에게 나눠준다, 이런 것은 아무리 개인적으로 질적으로 우수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오지 마, 나 만나러 오지 못해, 라는 원칙을 뛰어넘을 수가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인품이 문제가 아니고 공간이 문제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갈 수 없는 그 공간에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는 그 접근금지당한 바깥쪽 공간에 인간이 있거든요. 이것은 공간문제고 환경문제에요. 사람이 얼마나 착하면 주님 만나겠습니까, 라는 질문 같은 것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착하고 훌륭하고, 가 아니라 하나님 계시는 곳에 근접할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모세가 만나고 나서 알게 된 후, 진짜 하나님을 알게 된 후에, 진짜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깨닫게 된 사실이에요.

물론 지금 아모스 시대에는 다 잊어버렸지만. 하나님을 만만하게 보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은 인간과 만날 수 없다. 접근금지, 접근불가가 되어 있는 겁니다. 이것은 창세기 3장 24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불을 가지고 인간의 모든 생명나무 가는 길을 하나님께서 차단시켜서 못 오게 하셨습니다.

이 말은 뭐냐? 오지 마라, 그 말이에요. 오지 마라. ‘너희 인간들은 너희들 동네에 살아야지 하나님계신 이곳에 오지 못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본적인 뜻입니다. 오늘 본문 아모스 4장 5절에도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말씀 안에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지요.

그렇다면 그 원래 이스라엘, 하나님은 인간이 갈 수 없는 곳에 계신다는 그 취지를 유일하게 경험한 것이 이스라엘이라면 본문에서 벧엘, 길갈, 상번제, 십일조, 수은제, 낙헌제, 이 모든 지명과 제사가 담고 있는 취지도 똑같아요. 하나님한테는 갈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접근금지 한다는 취지를 이 지명과 제사에 담은 겁니다. 그리고 이 지명은 원래 제사하는 곳이에요. 그래서 벧엘이나 길갈 전부 제사하는 데거든요. 길갈은 약속의 땅에서는 최초로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행한 곳이고, 벧엘은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야곱이 하나님과 만났던 그 지점이고, 나중에는 그곳이 성소가 되어서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렸던 곳이에요.

제사를 드린다는 말은, 하나님은 인간이 갈 수 없는 곳에 계신다. 개인적으로 인격이 변화되고 회개했느냐? 그것은 아무 소용없어요. 그것은 소용없는 짓이에요. 하나님은 하나님계시는 곳에 계시고 우리는 우리 있는 곳에 있는데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다, 라는 취지를 이 제사에 담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신약에 오게 되면 이러한 제사의 취지가 헌금에 담겨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헌금해서 죽은 유명한 사람이 나오지요. 부부가 한 날 한 시에 죽었습니다. 헌금했는데 죽었어요. 헌금이 뭐냐, 제사의 제물이 뭐냐, 이렇게 할 때 제사의 원조, 헌금의 원조가 뭐냐?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가 그 헌금을 받는 처지에 있다. 이게 제사나 헌금이나 제물이나 헌물의 원조, 원뜻이에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왜? 우리는 드리고자 해도 만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제물을 우리에게 준다는 것은 그 제물이라는 유일한 통로, 접견지점을 일부러 하나님 쪽에서 만들어서 그 접견지점 안에서만 하나님께서 너와 만나줄게, 라는 취지가 이 제사에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헌금, 헌물에 담겨 있고요.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라는 뜻이에요 십일조도 마찬가지고요. 아브라함이 십일조 바칠 때도,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하나님의 전쟁에서 하나님이 알아서 승리해서 그 전리품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아브라함에게 주셨습니다. 주셨다는 취지가 뭐냐? 십분의 일 맏물을 드리는 거예요.

드린다는 말은 주께서 먼저 주셨잖아요, 하는 마음표시입니다. ‘다 주님 것이잖아요. 주님이 돈을 주신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 자체를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장소 접견지점을 주께서는 친히 조성하셨잖아요.’ 그런 뜻에서 그 조성한 지점이 벧엘이 되고, 그것이 길갈이 되고, 그 지점에서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우리는 받기만 했습니다.’라는 취지가 살려지는 것이 뭐냐? 수은제, 낙헌제, 상번제, 이런 거예요.

수은제와 낙헌제 둘 다 그냥 감사의 제물이다, 이렇게 쉽게 생각하면 됩니다. 감사제. 제사 말고 따로 드리는 제사가 있어요. 소제, 번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5대제사 말고 따로 감사해서 하는 제사가 수은제, 낙헌제까지 합쳐서 감사해서 드리는 제사에요.

율법에서는 그걸 둘로 구분합니다. 예상 밖의 감사가 있을 때를 수은제라 이야기하고, 보편적인 고마운 것에 대해서 마음에 담았다가 내가 자진해서, 자원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을 때는 낙헌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아모스 4장 5절에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라고 해서 수은제를 언급하면서 수은제를 제대로 못 드리고 있다고 책망하는 대목이 오늘 본문에 나오거든요. 그러면 여기서 수은제가 뭐냐? 누룩, 이스트, 빵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 인간이 자기가 빵을 만들고 그 빵은 내 입맛에 맞도록 하기 위해서 첨가물로 주어지는 것이 이스트, 우리말로 누룩이에요. 누룩을 빼고 감사제를 드려야 그게 수은제가 된다는 거예요.

그 대목이 율법의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레위기 7장 12절에 “만일 그것을 감사하므로 드리거든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그 감사 희생과 함께 드리고”라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 감사제 수은제와 낙헌제,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이 요구하는 제사 수은제, 그리고 일반적인 감사를 자원해서 드리는 낙헌제, 이런 제사가 감사제사로 있지만 이 감사제사가 어디와 연관이 되어야 되느냐 하면, 화목제의 일부로서 포함이 되어 있어야 돼요.

자, 포함이 안 되고 그냥 감사가 되면 이것은 어느 원칙에 어긋나느냐 하면, 시내산 밑에서 하나님께서 접근불가, 너희들이 어떤 귀한 것들, 이 지상의 시공간에서 생산된 것, 시간과 공간에서 생산된 어떤 것을 들고 와도 나는 이 땅의 시간과 공간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거기서 생산해낸 어떤 것도 안 받는다는 하나님의 영토분리, 영역분리의 원칙에 어긋나거든요.

“하나님이여, 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고구마를 생산했으니까 감사해서 고구마를 하나님께 가져왔습니다.” 한다면 하나님께서 “어이, 화산의 불구덩이 잠시만 스톱해. 지금 고구마 가져왔다니까 고구마 가져오고 난 뒤에 다시 화산 불 피워서 고구마 구워먹자.” 이렇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우리가 뭘 들고 왔든지 이미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영토에서 일어나는 어떤 산물도 주께서는 추잡하고 더럽게 봐요.

하나님 쪽에서 아예 안 받아요. 받지를 않는다니까! 헌금이고 제물이고 십일조고 뭐고 안 받아요. 예배도 안 받아요. 찬양도 안 받고, 예배도 안 받고, 아무것도 안 받아요. 인간자체도 물론 안 받고요. 시간과 공간이 달라서 그래요. 하나님 계신 곳에 적합한 시간과 공간일 경우에만 받지 인간이 있는 인간이 거주하는 시간과 공간의 것은 일체 받지를 않습니다.

복음 안에는 주님의 시간과 공간이 들어 있어요. 그래서 복음에 관심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뜻이에요. 나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면서 복음에 관심이 있다는 말은 이것은 성립자체가 안돼요. 주님 계신 영토, 주님이 함께 계심을 느끼면 내가 여기 있음, 이것은 자연스레 생각 안나요.

내가 깡통을 차고 부자가 되었든 거지가 되었든 몸이 아프든 이런 것은 생각이 안 난다고요. 내가 직업이 강도다, 세리다, 창기다, 이것도 생각이 안나요. 그런데 내 직업이 세리다, 창기다, 강도다, 나는 부자다, 건강하다, 가난하다, 이걸 내가 신경을 쓴다는 말은 지금 내가 내 영토에 신경을 쓰고, 내가 지나온 과거에 신경 쓰는 것이지 주님이 계시다는 그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는 지금 생각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 관심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진짜 내가 복음에 관심이 있느냐 하는 것은, 나한테 관심이 줄어들고 없어지는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가 있어요. 복음을 어느 정도까지 깊게 생각하느냐? 나에 대해서 아예 생각이 안날 정도로 복음에 대해서 관심 둘 때 그 때는 복음에 관심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세상 적으로 비유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여자가 남자를 사랑한다. 말로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백날 이야기해도 정말 사랑할 때는 자기 자신을 아주 축소시켜 버립니다. 그 대 앞에 서면 나는 왜 그리 작아지는가. 그대 앞에서 나는 있는 둥 없는 둥 하다. 그게 세상적으로 비유하면 사랑입니다.

평소에 근엄함을 주 무기로 삼는 퇴직한 할아버지가 만약 허연 수염을, 옛날처럼 뾰족한 수염은 아니지만 모델처럼 덥수룩한 수염을 길러서 광고에 한번 나와 보겠다고 한 그것 누구도 손 못 대거든요. 그런데 만약 손자가 있다. 손자가 너무 예쁘고 귀엽다. 그럴 때 손자가 이 수염을 만지면 ‘큰일 났다. 갓 돌 된 저 손자 오늘 얻어맞는다. 내가 장담하는데 죽는 수 있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손자가 수염을 만져도 허허, 웃기만 하고 상관이 없어요. 왜냐? 손자를 너무 사랑하니까.

어떤 할아버지가 말로는 손자를 사랑한다, 하거든요. 그런데 그 손자가 집에 놀러왔는데 그 손자가 멋도 모르고 할아버지가 키우는 개를 건드렸어요. 개를 건드리면서 함부로 하니까 갑자기 할아버지가 “너 나가! 당장 네 집에 가!” 그걸 보고 며느리가 충격을 받아서 ‘내가 다시 시가에 오나 봐라. 다시는 안 온다.’

그 개 이름이 김 행국이에요. 그 할아버지는 손자보다도 뭘 더 좋아하느냐? 김 행국이라는 자기 집 개가 더 좋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재편성하고 재생산하느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 만나러 오셨습니다, 로 가득 차 있을 때 내가 하나님께 드린 것 말고 하나님께서 저한테 새로운 백성 만들기 위해서 제공된 것, 그 제공된 것을 따라서 가야만 하나님과, 두렵고 무섭고 떨리는 마음이지만 하나님과 유일하게 접근이 가능하고 만남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 때, 그 때만 그들이 참된 이스라엘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셨잖아요. 목숨, 생명, 모든 것, 현재 내 신체까지, 밤에도 뛰는 이 심장까지 모든 것은 주께서 그냥 주셨잖아요.” 그 고백을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 베드로를 만나서 주님이 묻지요.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할 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께서 사랑 주셨잖아요. 주신 분이 알잖아요, 주신분이! 제가 주제넘게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못한다는 것은 주님이 먼저 아시잖아요.”

세 번이나 배반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요.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이것은 말이지 이것은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냥 내 쪽에서 하는 헛된 말입니다. ‘어떻게 이 말이, 인간세계에서 통용되는 이 말이 어떻게 주님이 계시는 그 세계 속에 통하겠습니까? 말씀이 오셔야, 그 말씀이 여전히 살아 있어야 그 말씀과 더불어서 하늘나라에 같이 있을 수 있습니다.’그런 취지로 이야기하는 거지요.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이제 알아봐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금지 시켜놓고, 오지 말라고 해놓고 어떻게 그 무섭고 떨리는 하나님과 영원토록 함께 사는 백성을 어떤 식으로 만드느냐 그 절차에 대해서 우리가 알면 되겠지요.

신명기 12장 6절에 보게 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사를 하나로 통합시켜 놓은 대목이 나옵니다.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 보면 여러 가지 제사가 구분되어 있어도, 예물이 구분되어 있어도 여기서는 통합을 시켜 버립니다. 십일조까지 포함해서. 통합을 시켜서 어디로 데려오느냐 하면, 신명기 12장 5절에 보면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려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에 그걸 가져오라는 말이지요. 여기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이 구분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세계에 오실 수가 없어요. 안와요 아예. 그런데 하나님이면서도 인간세계에 투입이 되는 하나님이 계셔요. 그분이 뭐냐?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곧 주님이에요.

이름부터 먼저 오고 육체는 나중에 와요. 신약에 오신다고요. 구약에는 이름만 덜렁 오시고 신약에는 육체로 오신 분과 구약에 먼저 왔던 이름이 결합이 되어서 그냥 예수님이 아니고 ‘주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그 이름이 주님이거든요. ‘주 예수.’ 하나님이 약속한 것을 다 이루시는 분으로 오신 분이 주 예수가 돼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할 때 앞에 주님이 붙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일찍 오신 그 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라는 겁니다. 구약에서 약속된 그 분이, 약속대로 실행에 다 옮기시는 분이 드디어 등장했으니 그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라는 청년 그분이라는 거예요.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주님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은, 지금 몇 번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또 다시 반복할게요. 시간과 공간, 인간들이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하고 다른 시간과 공간에 사시는 분이 이 땅에 오셨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시간과 공간문제기 때문에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개인적인 자질이나 인품 이것과 아무 상관이 없어요.

아까 출애굽기 19장에서 봤듯이 시내산 분위기 보세요. 그게 무서워서 근처나 가겠어요. 돌멩이가 날아와서 짐승을 친다니까요. 접근하지 말라고, 오지 말라고. 오지 마라, 오지 마라, 가 시내산에서 받았던 그 율법, 율법이 산위에서 산 밑으로 이동하게 되면 이동된 그 지점, 곧 시내산 꼭대기의 지점에서 일어난 현상을 거기서 영원토록 유지하면서 반복하고 되풀이하고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게 되어 있어요.

그 장소가 신명기 12장에 나오는 주의 이름이 계시는 곳입니다. 겁나지요. 대단히 무섭지요. 같은 공간인데도 인간이 사는 공간속에 하늘의 공간이 들어와 버리니까 그 하늘의 공간 근처의 파수꾼 역할을 하는 것이 제사장이에요. 거룩한 제사장 거룩한 옷을 입은 제사장으로서 접근 금지를 시켜놓은 거예요.

같은 땅인데 접근할 수 없는 땅이 백성들과 더불어 동반해서 어떤 특정지점으로 가고 계십니다. 그 특정지점이 뭐냐? 약속의 땅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수직으로 있었던 그 관계가 엎어졌다고 보면 돼요. 수직이 엎어졌으니까 수평적 관계의 길이가 나타나요. 길이, 척도가 나타나요. 어디에서 어디로. 그렇게 나타나는 거지요.

어떤 엘리베이터가 있는데 무려 백층의 높이 백층의 높이니까 한 3백 5십 미터라고 봅시다. 3백 5십 미터의 건물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엘리베이터가 있다 합시다. 그 수직의 엘리베이터가 엎어져버리면 길 위에 3백 5십 미터의 버스 노선이 되는 거지요. 그런 버스 노선은 없겠지만. 그런 버스 노선이 되듯이 예수님의 가신 그 일대기가 수직엘리베이터를 땅에다 엎어놓은 거예요. 인간사는 세계에. 그걸 곧추세워버리면 휴거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땅의 일도 모르면서 어떻게 하늘 일을 알겠느냐, 그 말이에요. 하늘에 있는 것이 땅에 와버렸다는 사실을 네가 인정하느냐, 그 말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하늘로 못가는 것처럼 지상에 있어도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요.

왜? 시내산에 갈 수 있는 인간이 없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같은 옆 동네에 살아도, 같이 살면서 매일같이 예수님 만나도 인간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모르게 되어 있는 것이 당연하지요. 원래 인간은 하나님께 접근불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들 실력으로 이성과 합리적인 지식으로 철학으로 과학으로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백날 해봐야 예수 믿는 것 아니에요. 십자가를 달달 외워도 예수 믿는 것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 밖입니다. 하나님 쪽에서 밀어내기 때문에. “인간, 너는 믿을 수 없다. 너는 믿지 않아야 돼.”

기존의 너에게 관심이 있는 한 네가 너에게 관심을 두고 네가 너를 살리는 식으로 산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 믿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언급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에서 뭐가 모이느냐? 십일조를 비롯해서 모든 희생은 거기에 다 모이게 되는 거지요. 그렇게 모이게 되는데 모이게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제가 아까 낙헌제와 수은제는 5대 제사가운데 화목제의 일환으로 이루어진다고 했지요. 화목제에 대해서 레위기 3장 5절에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단 윗 불 위에 있는 나무 위 번제물 위에 사를찌니 이는 화제라” 불로 태우는 제사라. 이게 화목제에요. 불로 태운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 갖고 있던 뭐든 감사로 드리든 뭐든지 하나님의 인간의 접견지점에서는 그것이 홀라당 불로 다 태워지는 거예요.

불로 태워진다는 말은 창세기 4장 24절에, 두루 도는 화염검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인간의 그 어떤 착함도 순수함과 진실됨도 하나님의 심판의 불을 통과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거예요. 화목제물, 결국 화목제물이라 하는 것은 네가 감사의 제물을 드리면서 그 제물 안에 나를 어떻게 넣느냐 하면, 감사제물 갖고 온 참 착하고 대견한 사람이라는 자기를 계속 살아 있는 존재로 감사제물과 결합되는 것이 아니고, 감사 제물로 갖고 오는 것이 불로 태워질 때에 거기에 같이 뛰어들어야 돼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내가 너를 내 백성 만들어줄게. 조건이 있다. 내가 지시한 대로 가서 죽어라.” 그겁니다. 내가 지시한대로. 내가 살아 있을 때 우리는 구원받고 싶어요. 살아 있을 때는 내가 드린 찬양과 예물로 하나님께 칭찬받고 싶어요. 그리고 하나님께 사랑받고 싶어요. 남에게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랑스런 존재가 되고 싶어요.

“바로 그 자랑, 칭찬받고 싶은 것, 사랑받고 싶은 것, 그것 다 하나님의 심판의 불에 섞어 넣어라. 그리고 없애버려라.” 그런 생각이 유지되게 되면 결코 너는 불에 들어갈 자격조차, 하나님의 심판의 불에 들어갈 자격조차 안 됩니다. 마지막 때 지옥 불에 들어가야 되지요. 율법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사시는 공간, 그냥 공간이 아니고 질서가 있고 질서의 어떤 구조가 잡혀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 사는 공간에.

시내산 꼭대기 위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 세계가 어떤 질서정연한 구조 가 되어 있었고 그 구조가 율법을 들고 온 모세를 따라서 지상까지 펼쳐진 겁니다. 그 구조는 인간이 살고 있는 질서의 구조와 달라요. 그 구조를 미리 말씀 드릴까요? 미리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나중에 모든 것이 재편되면 한쪽은 천국구조, 한쪽은 지옥구조입니다.

천국과 지옥으로 구분되는 구조, 이게 웅장하고 장엄한 이 우주세계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우주의 마지막 모습은 천국과 지옥으로 둘로 구분되는 겁니다. 그러면 지옥은 바로 하나님의 불에 의해서, 심판에 의해서 계속해서 영원토록 심판받는 지옥 불, 그러면 천국은 그 불자체가 소실되었는데 소실될 때 그냥 소실되는 것이 아니고 율법과 결합되어서 소실되었기 때문에 수은제물과 낙헌제물과 화목제물과 더불어 소실된 거예요.

그러면 그 율법과 더불어 소실되었다면 그 율법의 주인공이 누구냐? 나중에 인물이에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죽은 자만이 예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다는 그 내용이 율법 안에 들어 있었던 거예요. 이것이 벧엘, 다시 말해서 야곱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했던 그 지점의 취지고 길갈, 할례 받고 유월절을 행한 그 지점, 그 지역의 특징이에요.

아모스에서 지적하는 것은, 율법은 우리를 죽이는 거예요. 저주아래 있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길갈, 벧엘, 전부다 뭐냐? 이방민족의 제사를 그대로 도입한 거예요. 이방민족의 제사는 뭐냐 하면, 안 죽고 이대로 행복하고 영원히 잘 되는 그런 수가 없을까를 계산하는 것, 심판받지 않고 심판이 비켜갈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없는가?

그게 이방민족의 신을 이스라엘에 그대로 도입한 거예요. 요령을 부리는 겁니다. 심판을 안 받고 천당 가는 방법이 없을까, 요령을 부리는 거예요.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네가 이 땅에서 갖고 있던 모든 것, 시공간에서 누리고 있던 모든 것, 그 모든 재산, 재물, 돈, 모든 것은 하늘나라에서 안 받는다는 것을 네가 율법과 더불어서 증명하라는 그 말입니다.

네 몸부터 받지를 않아요. 받지를 않는다는 말은, 불에 태워진다는 것을 네가 인정하라, 그 말이에요. 우리의 가진 모든 것들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은 불에 태워진다는 이 화목제물의 원칙에 의해서 수은제고 낙헌제고 다 어떤 명분으로 가져온다 해도 다 십일조도 마찬가지고 불속에서 사라집니다.

사라지면서 겸하여 등장한 것이 율법의 완성이 그 불속에서 살아나지요. 그렇게 제사할 때 주님의 이름이 제사장소가 되고 그 것이 반석이 되는 겁니다. 신명기 32장 15절에 보면 “그러한데 여수룬이(여수룬은 이스라엘입니다)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반석은 제사지낸 곳이지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제사 드린 그곳이 반석이에요. 그 반석, 제사지내는 제단이지요. 그곳을 그들은 가볍게, 만만하게, 우습게 여긴 겁니다. 자기가 죽어야 될 자리를 자기는 안 죽고 관람하고 관광하고 있는 거예요. “사진 찍자. 여기 십자가에 예수님 죽으신 곳이니 사진 찍어라.” 이런 식으로. 멀쩡하게 살아 있어요, 자기가.

아까 했잖아요. 복음을 안다는 것은 자기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 복음을 아는 건데 자기 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은 뭐냐? 복음을 경홀히 만만하게 보는 거예요. 17절에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여기서 마귀에게 제사하는 것과 하나님께 제사하는 차이점이 뭐냐? 나를 살리는 제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것은 마귀가 시킨 제사에요.

예배든, 찬양이 되었든, 기도가 되었든, 헌금이 되었든, 교회가 되었든, 오전 예배가 되었든, 오후 예배가 되었든 관계없이 그것은 마귀에게 드리는 제사, 그게 자기를 살리는 제사에요. 주님 주시는 것으로 살아야 되는데 내가 힘들여서 애써서 가진 그것으로 사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 인정해 달라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나를 인정해주시고, 나를 칭찬해주시고, 나를 대견하게 여겨달라는 겁니다. 죽기 싫다는 거예요.

이방신들에게 마귀 짓 하는 사람에게는 뭐가 없느냐 하면, 십자가 반석이 없어요. 십자가에다가 스마트 폰 찍어서 결재하지 말고 스마트 폰 자체를 십자가에 풍덩 집어던져 버려야 돼요. 십자가덕분에 내가 살겠다는 그런 꼼수 쓰지 말고 십자가 앞에서 나는 없어진다고 생각해야 돼요. 그걸 가지고 18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너를 낳은 반석” 너를 생산한 너를 새롭게 생산하는 반석 그렇게 나를 낳게 되면 거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나 구원 받았다, 를 보는 것이 아니고 천국과 지옥이 어떻게 형성되는가가 보이지요. 이것은 숨겨진 우주의 질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마감이 되는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어요. 내가 어떻게 훌륭하냐, 착하냐, 가 아니라 이 예수님이 만든 새로운 시공간은 천국과 지옥이라는 질서, 구조, 그게 등장하지요.

제가 자꾸 구조, 질서, 그 이야기 하는 것은 그 가운데 아무것도 아닌 나를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어떤 환경을 생각해야 되지 나 어때요, 라고 묻지 말고 이게 주님주신 환경입니까? 환경, 거대한, 장엄한 환경 속에 우리는 놓임으로 말미암아 그곳이 천국이 되는 것이고 지옥 가는 사람은 개인적으로 착했다, 안 착했다, 예수는 안 믿어도, 복음은 안 믿어도 얼마나 성품이 고운지……. 그런 것 따지지 말고 그가 모여 있는 환경이 어떤 환경이냐? 하나님의 불 심판을 통과하지 못한 환경이지요. 통과 못한 환경입니다.

그 반석에서 누굴 낳았다? 자기백성을 낳는 것. 그 반석에 누가 있느냐? 주의 이름이 있어요. 주의 이름이 자기백성을 새롭게 만드시는 겁니다. 그래서 신약에 오게 되면, 사도행전 5장에 헌금할 때 네가 헌금을 네 돈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셨다는 말은, 헌금하는 너 자체가 주님이 생산품이냐, 아니면 주님의 생산품이 아니냐를 네가 헌금을 통해서 스스로 보여 봐라, 하는 말이지요.

그런데 아나니아 삽비라는 속였지요. 속이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이것은 나를 속임이 아니고, 같은 인간을 속임이 아니고 성령을 속임이라. 사탄에 속해서 사탄 말을 듣고, 악마 말을 듣고 교회에 있는 성령을 속임이라.” 이것은 이 환경에 안 맞는 사람이라는 그 말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여기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길갈 그리고 벧엘, 낙헌제, 수은제, 상번제, 아침마다 양 드리고 저녁마다 드리는 상번제, 모든 것은 결국 뭐냐? 하나님 쪽에서 먼저 이런 것을, 이런 바구니를, 율법이라는 바구니를 우리에게 주셔서 같이 죽자, 매일 죽고 매일 살자, 라는 이 일을 벌이신 거예요.

지금은 우리 몸이 고린도후서 6장에 보면, 그 몸이 하나님의 숨겨진 질서가 발휘되는 성전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15, 16절에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움직이는 하나님의 접견장소, 성령이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접견장소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가더라도 하나님이 만나는 장소, 거기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늘 흡족하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몸을 날마다 드림으로서, 주님께서 주시는 그 헌물에 죽음으로서, 소실됨으로서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의 이름 앞에 나의 이름이 늘 없어지기를 원합니다. 내 것 챙기는 순간 사랑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고, 나는 내 것을 지키고 싶어 하는, 이런 하나님께 접근이 불가할 수밖에 없는 요소가 마구마구 튀어나오니 주여, 저희들로 하여금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산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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