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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9 23:38:05 조회 : 93         
광주강의20201023b 마가복음15장 33-39절(십자가 위치)-이 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IP:122.43.170.138)
광주강의20201023b 마가복음15장 33-39절(십자가 위치)-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천국은 어떻게 위치하느냐, 그것은 주님이 주신 시간과 주님이 주신 공간이 적용이 됩니다. 주님의 시간과 주님의 공간이 적용이 되는데, 이거는 뭐냐 하면은 그때의 십자가가 지금의 십자가로 전환이 돼요. 그때의 십자가가 지금의 십자가로 전환이 됩니다. 그러면 전환될 때, 그때의 십자가, 지금의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여기 위치를 대표하는 게 뭐냐 하면은 십자가로 대표했죠. 그럼 위치에서 무엇은 빠져야 하느냐 하면은 나라는 것, 나의 위치는 주님한테 양보해야 됩니다. 넘겨줘야 해요. 내가 여기에 있다가 아니라 십자가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돼야 돼요. 그게 천국의 위치예요.

내가 여기에 있어버리면, 나라는 고유의 것이 그대로 유지가 돼요. 내가 옛날에 어느 학교 나오고 뭐 어떻게 하고... 계속 살아나요. 이게 바로 천국을 훼방하는 겁니다. 내가 이만큼 애썼고 이만큼 기도했고... 계속 내가 있으면 안 되거든요. 이미 우리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사다리가, 매개가 사라졌죠. 우리의 사다리가 없는 거예요. 갈 수 없다 이 말이죠. 내가 열심히 가고자 해도 그거는 팔로 철봉에 매달리는 거랑 똑같은 거라서 언젠가는 손을 놔버려요. 인간은. 나의 위치가 나보다 더 셉니다. 내가 있던 위치.

왜 자꾸 아까부터 위치라는 말을 하냐 하면은 내가 있고 위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위치가 내 허락도 없이 위치가 나를 선택해버린 거예요. 이 지옥이라는 위치가 나를 선택해버린 거예요. 아담이 나를 일방적으로 선택해버린 거예요. 이 천국은 반대로 주님이 일방적으로 나를 선택해버린 거예요. 근데 악마는 우리를 선택해놓고, 악마 자기는 쏙 빼버리고, “니가 니를 보면 될 게 아니냐. 니한테 선악을 볼 수 있는 지식이 있으니까, 니한테 판단력이 있으니까, 니가 너를 판단하면 되지 않겠느냐.”

자꾸 악마는 우리가 최종판단자인 것처럼 그렇게 조작을 해가지고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고 내 인생을 내가 꾸려나가도록 뒤에서 자꾸 부추기는 거예요. 선과 악을 니가 결정해라. 니가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얻었으니까, 그거 뭐 써먹어야 될 게 아니냐. 이거는 선이고 이거는 악이고 판단해서 오른쪽을 선택해서, 바르게 선택해서 그걸 모아서 천국에 갈 때 어떻게 좀 천국에 넣어주세요, 라고 들이밀어라. 자꾸 악마가 선악구조 안에서 우리를 묶이도록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선악구조 안에서 나온 것이, 아까 이야기한 대로 여러 번 하는데, 말이 어렵기 때문에. 말 그 다음에 뭡니까? 행동. 이 말과 행동에서 뭐가 만들어졌다? 이게 법칙이 되죠. 법이 된다고요. 이 법에서 나오는 의미가 뭡니까? 진실이고 진리. 예수님은 누구에 의해서 죽었다? 인간들이 하는 이 진리와 진실의 법에 의해서 예수님은 살해당한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다시 왔다는 말은, 이제는 사냥 대상이 되었던 그 짐승이, 총 맞은 짐승이 “누가 나에게 총을 쏘았어?”하고 다시 찾아오는 거예요.

니가 나를 봤기 때문에 주님이 죽었잖아요. 이제는 죽은 분이 다시 살아나셔서 죽게 된 그 모든 환경을 그대로 가지고 우리에게 되돌려주는 겁니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 누가 이런 짓을 했어? 하고, 우리에게 퍼질러놓을 때, 그 위치가 주님이 방문한 위치거든요. 방문한 거예요. 여러분, 방문교사 알죠? 주님이 친히 찾아온 거예요. 그러면 거기는 내가 있는 겁니까? 누가 있는 겁니까? 주님이 계시고 구체적으로 십자가가 있는 거예요.

그 십자가 위치한 게 뭐냐, 뭐가 위치한다? 주님이 위치에 있으면 그거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거는 뭐가 돼요? 천국인 겁니다. 천국은 어디에 있다가 아니라 니 안에 있다는 겁니다. 내가 있는 곳,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국이에요. 지옥 속에 천국이 찾아온 거예요. 지옥 속에. 주님이 찾아올 때 그렇게 찾아왔잖아요. 천국은~~ 하고 설명할 때 전부 다 뭐냐, 이 지옥 속에다가 주님이 일어나서 벌어진 사태를 가지고 천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이와 같으니라, 포도원비유로 아침 열시에 오고... 할 때, 천국은 열 달란트 받은 거라고 할 때, 천국은 열 처녀 비유로 기름을 준비하고 할 때, 이 모든 이야기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을 보고자하는 그 안목이 새로운 시간과 공간으로서 적용되는 거예요. 이게 천국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천국이란 내가 나를 본다든지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보시는 것의 안목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미 시작된 천국생활입니다. 참, 말로는 정말 쉽다. 말로는 정말 쉬워요. 이왕 나왔으니까 더 쉽게 해봅시다. 나의 선택이 아니고 주님의 선택. 나의 선택이라는 말을 집어넣은 것은 나조차도 누굴 위하여 선택당해서 세상을 그따위 식으로 본 거예요. 내가 마음이 나빠서 본 게 아니고 우리도 뭔가 악한 질서에 의해서 선택 당했기 때문에 그거밖에 못 보는 거예요. 내가 나 위주로 밖에 볼 수 없도록 안목을, 악마가 그렇게 짜서 나한테 선택을 하게 한 거예요. 악마의 증인으로서.

근데 우리는 이제는 뭐에 증인입니까? 주님의 증인이 되려면 주님한테 선택 당해야죠. 선택 당해서, 이래되면 이 위치는 내가 자리 잡은 위치가 아니고 누가 지정해준 위치냐 하면은, 주님에 의해서 천국 되도록 지정된 위치에 우리가 놓여있으면, 나는 무엇이다, 라는 게 의미가 없고 지금 주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재현하는데 우리를 사용하고 계시다. 그렇게 되겠죠. 그러면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방금 한 이 전체를 이 문장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위치는 성도에 의해서 표시된다.

지금은 십자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성도가 있는 그곳이 바로 십자가가 있는 곳이에요. 인간들의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죠. 한때 있었던 십자가, 그때 그 자리에만 있었던 십자가, 갈보리 언덕에만 있던 십자가가 이제는 우발적으로 계속 일어나는 십자가, 군데군데 일어나는 십자가예요. 그래서 제가 지난 낮 설교였습니까? 돌들로도 부르짖는다고 했죠. 전에 설교했잖아요. 뻐꾹! 뻐꾸기가 울 때. 이 산에 가면 뻐꾹 저 산에 가면 뻐뻐꾹, 화답을 하는 거예요. 복음을 전했더니만, 앞에 있는 식구들은 무슨 소리인가 하는데, 저쪽에서 뻐꾹! 하고 있다 이 말이죠. 전부 다 하나가 되어 있었던 거예요. 이미. 각각 동일한 십자가의 본질들이 거기에 위치해있었던 거예요. 구석구석에.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국가와 민족에 상관이 없이.

주의 성령이 찾아간 그곳에서는 전부 다 십자가의 위치가 반짝반짝하게 표시등이 들어오는 거예요. 표시등이. 하늘에서 천사가 보기에는 숫자가 되게 많은 거예요. 굉장히 많은 숫자가 있는 거예요. 우리 입장에서 보면 외롭죠. 왜? 사방을 둘러봐도 나같이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없어보여서 굉장히 외롭고 쓸쓸함을 느끼지만, 위에서 보게 되면 없다고 생각했는데 굉장히 많아요. 물론 서울의 남산에서 보는 서울의 밤풍경에 십자가가 많은 것하고는 관련이 없습니다. 요새는 십자가 조명을 밤새 켜놓으면 잠 안 온다고 민원이 들어와서 잘 안 하거든요.

그 다음에 봅시다. 이 십자가가 위치해있으면 여기서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은 똑같은 현상이 들어와요. 여기서 보복이 들어와요. 보복이 들어오고 핍박이 또 쏟아집니다. 이 점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왜 성도에게 핍박과 미움과 보복이 들어오느냐, 그것은 인간들이 기대하는 성인상, 이미지, 내가 성숙한 성인이 되었을 때 나는 이런 인간이고 싶다, 하는 이미지가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 시큰둥하게 안 듣는 이유가, 거부하는 이유가 따로 마련된 나의 나됨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의 성숙한 여자 또는 성숙한 남자로서, 나이가 서른 되었을 때 나는 이정도의 인품을 갖추고 있겠다는 게 따로 마련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인간들 말고 성도가 보여주는 성인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때그때마다 그림을 새로 그려야 합니다. 우리가. 어제 내가 생각했던 자아상은 오늘 되면 폐기하고 오늘치 다시 그려야 돼요. 내일 되면 또 그려야 돼요. 내가 누군지를 모르겠어. 또 내가 누군지를 알 필요도 없어요. 왜? 선택은 주님이 하시니까. 주님께서 나는 이렇다고 이미지를 해봐도 그건 오늘까지의 선택이고, 내일이 되면 또 어떤 사태가 일어나서 이 그림이 바뀔지 몰라요. 고정된 뭐가 없느냐 하면은 ‘고정된 나’가 없어요. 고정된 나. 고정된 나가 없는 겁니다.

여기서 세상 사람들은 어떠냐 하면은 세상 사람들도 고정된 자아가 없습니다. 없는데, 문제는 악마가 고집스럽게 니가 되고 싶은 이상형 있잖아요. 아까 그 이상형. 그 이상적인 이상형과 현재 자아를 미치도록 결합시키려고 애를 쓰게 만들어버려요. 악마가. 인간은 늘 본인이 누군지를 모르게 되어 있는데, 악마가 자꾸 격려를 해주고 힘을 실어주는 거예요. “니 이런 인간 되려고 애썼잖아? 이제 와서 왜 그걸 포기하려고 하느냐? 노력해라!” 세상 사람들은 뭐냐 하면은 정신병 환자들입니다. 환자들. 본인의 이상형을 본인이라고 자꾸 우기도록 위에서 악마가 우쌰우쌰 힘을 자꾸 실어준다는 거예요.

자아가 되고 싶은 그 주체상하고 이게 떨어져야 하는데, 이게 안 되면 억지를 부리면서, 고집을 부리면서 내가 이렇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정신병환자인데, 여자는 뭐냐 하면은 이걸 가지고 공주병이라고 하고 남자는 왕자병이라고 하는 겁니다. 어릴 때 보았던 백설 공주나 동화책이야기를 보면서 아직도 그 환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성도는 그날 주님의 선택에 의해서 그날치, 그날치의 모델로 그냥 등장하면 돼요. 왜냐 하면 어차피 나를 어떻게 다루고 나를 어떻게 재조립한다는 것은, 이거는 내 소관이 아니고 주님의 소관이거든요.

그러면 이 두 가지 이야기, 성도인 자와 성도 아닌 자를 결합해버리면 이상형을 고집하는 그들에 의해서 성도는 늘 핍박을 받고 정신적 학대, 육체적 학대를 당하게 되어 있어요. 미움을 받게 되어 있어요. 미움을 받고 있으면서, 세상 사람들은 확정된 자기에 대한 미련, 환상을 못 버립니다. 적어도 괜찮아 보이는 그 자아상 있잖아요. 자아상을 늘 그리워하게 되어 있어요. 실제로 TV프로에서 그런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데, ‘참 오래 살고 볼일이다.’라는 프로에 보면 나이 전부 다 오십이 넘어서 모델이 되겠다고, 무려 2089대1로, 한명 뽑는데 2089명이 달려들었어요. 나이 오십 넘어서 모델이 되겠다고. 살 빼고 똥배 다 들어가고 스타일 좋은 사람들이 다 온다고요.

특히 이거뿐만 아니고 트롯 가수, 개나 소나, 진짜 임영웅이가 한 백억 버니까, 자기도 덩달아 나이 오십 넘어서 늦게, 사업 망하고 난 뒤에 트롯 가수나 해볼까, 청춘의 꿈을 그때는 돈 번다고 못했는데 이제는 꿈을 이루어보겠다고, 꿈은 이루어진다고 해가지고 얼마나 많은, 수천 명이 트롯 가수에 지원하고 있는지 몰라요. 자기 본업이 있으면서도 트롯 가수 한다고 작곡가한테 노래 배우고. 이게 뭡니까? 내가 그리워하는 나의 이상형과 내가 합치되지 않으면 이게 살아도 산 게 아니다. 힘들어서 못 살겠다는 거예요. 자기 이상형에 꽂혀버린 거예요.

여러분들이 여러분 강의에서 들었겠지만, 이것을 네자로 뭐냐 하면은 자기연민입니다. 자기연민. 주 예수 나의 산 소망이라는 가스펠송 혹시 들어본 적이 있어요? 끝에 보면 할렐루야! 하고 노래 부른 사람이 있죠. 누구한테 이야기할 때 안경 낀 그분이 서경수 목사님 사모님 닮았다고 이야기했는데. 메인보컬 다시 한 번 봐보세요. 그 가사에 보면 사망이 무너졌다고 해요. 사망이 무너졌다. 이 가사 내용은 사실은 옳지 않아요. 자아가 무너져서 할렐루야 되어야 해요. 자아가 무너진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북한 인민군한테 체포가 되었습니다. 20명이 체포가 되었는데, 인민군들이 후퇴하면서 패배가 확실하니까 다 학살을 하고 가는 거예요. 우선 열 명을 가지고 교실 같은데 모아놓고 일단 열 명을 총을 쏴서 다 죽이는 거예요. 총소리가 들리고, 남아있는 열 명은 그 총소리를 다 듣는 거예요. 그 열 명이 죽었다는 사실을 다 아는 거예요. 그때 남아있을 때, 본인이 남아있다면 어떤 심정이겠습니까? 그냥 죽었겠구나. 이거죠. 죽어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다음 열 명을 쏘려고 하는데, 그때 유엔군이 쳐들어와서 열 명이 살아남게 됐다고 했을 때에, 그 사람들이 살아남은 거예요? 죽은 거예요? 이미 죽은 거예요. 이미 죽었다고요. 그 심정이 뭐냐, 십자가 위치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떠났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이미 죽은 거예요. 인민군 총에 맞든 누구 총에 맞든 어떻게 하든, 차에 치어죽든 이미 우리는 죽은 거예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내 주장, 내 희망 이런 게 있으면 안 돼요. 나는 모델이 되겠다. 뭐가 되겠다. 이런 기대가 있으면 안 돼요. 이미 죽은 거예요.

죽었는데 주님께서 찾아왔을 때, 무엇이 가장 시험거리가 되겠습니까? 자기연민, 자기애, 이게 가장 시험거리가 되는 거예요. 이미 죽었는데, 죽은 자가 무슨 자기에게 애정을 보이고 집착을 보일 수 있습니까? 이미 죽어버렸는데. 사망이 무너져버리면 죽을 뻔한 경우에요. 사망이 무너졌으면. 죽으려고 했는데, 야! 사망이 무너졌구나! 할렐루야! 이건 죽을 뻔 한 것이고. 성경에서 말한 것은 뭐냐 하면은 사망이 무너진 게 아니고, 영어로 브로큰 broken이라고 되어 있거든요. 죽음이 무너진 게 아니고 자아가 무너진 거예요. 자아가.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가 더 살게 된 이유도 없게 된데서 오는 그 무거운 짐이 날아가 버린 거예요.

주께서 보시는 대로, 하시고자 하시는 대로 우리를 사용하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나의 그림을 그릴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나의 이상형을 그릴 필요가 없어요. 그렇다고 기초화장도 하지 말라는 그런 뜻은 아니고. 남을 위해 좀 찍어 바르고. 자기 이상형에 근접해서 충실하게 일치시키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나를 선택한 게 돼요. 안돼요. 주님의 선택이 있는 한, 내가 나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아까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찾아왔을 때, 이제 마리아 마르다가 주님한테 큰 실례를 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이제 아시겠죠.

주님이 일찍 오셨으면 오빠가 죽지 아니하였겠다고 하는 그게 자기의 본모습인 것은 맞는데, 이게 왜 신앙이 아닌지. 오빠가 같이 세 식구가 사는 것이 그 가정의 이상적인 모델이 되고 말았던 거예요. 진짜 인민군이 쳐들어와봐야 돼. 인민군이 총으로 오빠 한번 죽여 봐야, 아, 우리가 오빠가 살아있어서 행복했다는 그 자체도, 그거는 우리가 요구할 사항이 아니구나, 라는 사실. 그냥 이미 죽어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미 죽어있는 것을 주께서는 어떻게 사용하시는가, 이제 그걸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기 출애굽기 33장 22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여기 반석이 나오죠. 반석. 반석에서 이스라엘이 나옵니다. 반석위에서 이스라엘 중심이 나온다고 보면 됩니다. 이게 누구냐 하면은 모세거든요. 모세가 경험한 것, 모세가 경험한 것은 반석 위에 있을 때에, 영광이 지나갈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로 덮어주니까, 비로소 모세는 살아서 온 거예요.

거기서 듣는 말씀은 19절에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그럼 은혜와 긍휼이 뭐냐, 반석 위에 앉아라. 내가 너를 덮어줌으로서, 그냥 니가 죽어야 되는데 내가 너를 다루기 위해서, 은혜와 긍휼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세를 살려서 땅 끝까지 내보낸 거예요. 그 반석. 그런데 이스라엘이, 지난 수요일에 했지만, 그 반석을 잊어버렸죠. 그 반석의 의미, 긍휼과 은혜를 잊어버렸죠.

거기에 대해서 이사야 33장 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보라 그들의 용사가 밖에서 부르짖으며 평화의 사신들이 슬퍼 곡하며” 8절, “대로가 황폐하여 행인이 끊치며 대적이 조약을 파하고 성읍들을 멸시하며 사람을 생각지 아니하며” 9절,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이걸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은, 이게 바로 보복이에요. 보복. 이사야 59장 18절에도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대적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 보복이라는 말씀이 나오죠. 하나님께서는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에요.

자, 하나님께서 보복하신다고 한다면, 그 보복하신다는 단어는 복수죠. 복수의 이미지는 공격입니다. 공격. 공격성향을 띠죠. 누가 누구를 공격한다? 하나님이 인간들을 공격하는 거죠. 그리고 오늘 마가복음 15장 38절을 봅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둘이 되었죠. 성소휘장이 찢어졌잖아요. 성소휘장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성막이 이래 있는데, 있으면 입구가 이래 있고, 여기가 동쪽이고, 50미터, 25미터쯤 되는 성소가 있다 이 말이죠. 내부에 들어가게 되면 여기 휘장이 있고, 휘장 안에 지성소고. 성소 동쪽에 제단이 있고. 이 지성소를 가리는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 이 말이죠.

그러면 지성소는 일 년에 대제사장이라도 7월 10일 날에만 들어갈 수 있어요. 양력으로 9월 14일쯤 되는데. 7월 10일 날에만 들어갈 때에 방울을 달고 들어가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방울이 움직이거든 살아있다고 느끼면 된다. 그 정도로 무서운 곳이에요. 지성소는 뭐다? 무서운 곳이에요. 무서운 곳. 이 무서운 곳을 뭐로 차단했습니까? 휘장으로 차단했죠. 휘장이 찢어졌다는 말은 인간이 하나님 나라에, 천국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말도 되지만, 반대로 뭐가 됩니까?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은 들어갈 자가 되고,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여기 지성소에서 무서움이, 안에 있는 무서움이 바깥으로 쏟아지는 그런 통로가 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은 보복이다 이 말이죠. 보복. 휘장 찢어져서 천당 가는 것만 자꾸 생각하지 마시고. 이사야에 나오는 그 말씀. 그리고 이사야에만 나오겠어요. 예레미야나 모든 선지서들, 그리고 요엘서는 제가 안 찾아보겠지만, 거기에는 온통 자체가 이 세상에 대한 처절한 복수로 완전히 뒤덮어버려요. 저주로서.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고. 특히 요한계시록에 보면 얼마나 심하게 밟았던지, 포도주 틀에 밟히면서 터져야 벌건 포도즙이 나오듯이. 내가 너희들을 하나의 개체로 그냥 멀쩡하게 남겨두지 않고 발로 밟아서 다 터져버리게 한 거예요. 다 터져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을 때릴 때 뺨 한 대 때린 정도가 아니고, 지근지근 밟아놓고, 불도저가 한 열댓 번 왔다 갔다 해서 그 몸체가 다 터져야 족할 정도로, 다 터트리는 겁니다. 여러분,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에스겔 5장 13절은 더 잔인합니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이와 같이 내 노가 다한즉 그들에게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시원하리라 내 분이 그들에게 다한즉 나 여호와가 열심으로 말한 줄을 그들이 알리라” 사이다에요. 사이다. 탄산음료. 시원하게 탁 터지는 거예요. 주님께서 맹렬한 심판을 다 해놓고 그 감상문을 쓰시는데, “아이고, 이제 좀 속이 내려간다. 시원하다.”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풀리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에스겔 5장 14절을 보시면서, “하나님이여, 이 더러운 세상 뭐합니까? 지켜보십니까?” 이러지 마세요. 지금 하나님 바쁘세요. 지금. 주님이 마실 사이다를 주님께서 양보한 적이 없습니다. 시원하게 마시기 위해서, 그걸 제대로 저주하고 밟아버리기 위해서, 분이 풀릴 때까지 저주한 데 또 저주하고, 저주하고, 심판하고, 그 저주가 맹렬하게 지금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맨날 우리만 쳐다보면 조용한 것 같죠. 주님 위에서 보면 모든 게 저주예요.

예를 들면 어떤 여성이 있는데, 그 여성이 교회 잘 다니고 봉사하는데, 그 여성이 선을 봤는데, 그 여성이 예뻤는지 어떤 검사하고 잘 맞게 되어서 결혼했는데, 그 검사 집안이 불교집안이 돼가지고 검사하고 결혼한 뒤에는, “제가 교회 안 다니겠습니다.”라고 자진해서 교회 안 다녀서 땡 잡았을 때, 똑똑한 애 둘 낳아서 미국으로 유학 보낼 때, 이게 뭐냐 하면은 위치가 뭐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위치가 없잖아요. 이게 보복이 아닙니까? 굉장히 행복하게, 지옥은 어떻게 간다고요? 그냥 행복하게 가는 거예요. 이 땅에서 그냥 사는 대로 살면 지옥 가는 거예요. 사는 대로 살게 되면.

그래서 지옥 가는 사람들 보고 애가 닳아서 어떻게 해서든지 천국 가라고 하면, 그 사람은 또 안면이 있어가지고 시키는 대로 교회도 나와 주고 뭐 봉사도 하는 척하고 성경공부 하는 척하죠. 하지만 나중에는 자기가 자진해서 나와 버립니다. 힘이 들어서. 억지로 해보지만 그게 오래 못가요. 오래 못갑니다. “아이고, 그만 내가 하던 대로 할게.” 이래가지고. 형부가 사업하다가 갑자기 때려치우고 개척교회 한다. 형부가 하면 처제가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있는데, 언니 안면 받쳐준다고 또 나와 주죠.

그것도 또 처제가 돈 되는 직업. 간호사, 약사, 교사. 오게 되면 형부가 얼마나 또 좋습니까? 왜? 십일조가 나오거든요. 형부가 처제한테 잘 보여서 붙들라고 하는데, 처제도 언니 안면 봐서, 또 엄마가 “야야, 언니 개척교회 한다고 힘든데 너라도 보태줘야지.” 또 이래가지고, “그 대신 애들은 내가 봐줄게.” 이래가지고 품앗이하잖아요. 친정엄마 품앗이 해가지고, 어쨌든 간에 교회 안정될 때까지 니가 도와주라고 하지만. 그 처제가 언제까지 다닐 건데요? 나중에는 아이고, 더는 못하겠다고 하면서 옛날 교회에 가게 되죠.

그러니까 뭐냐 하면은 억지로 뭘 한다는 게 그야말로 억지예요. 억지가 되면 뭐가 없다? 감사도 없고 고마움도 없는 거예요. 나는 교회 목사라는, 아까 공부한 거 다 잊어버렸습니까? 교회 목사라는 이상형에 본인을 일치시키려고 애를 쓰는 거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이거는 내 인생을 내가 선택한 거예요. 자기연민이에요. 자기 선택이라고. 나는 이렇게 대외적으로 사업 망했어도 목회 성공했다는 이 이상형을 남한테 보이고 싶은 겁니다. 주님의 보복이고 십자가고 하나도 생각이 안 나요. 내가 되고 싶은 나에 대해서 나는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

보통 새벽에 할 때는 예배라고 하지 않고 새벽제단이라고 합니다. 새벽제단을 땀을 흘려가면서, 콧물 질질 흘려가면서, “주여, 이 교회가 있어줘야 하늘나라가 확장됩니다.” 기적을 베풀어주시고 하면서 온갖 것을 다 했겠죠. 이거 왜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내가 되고 싶은, 내 이상형에 일치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거 누구 위치입니까? 십자가위치입니까? 자기위치입니까? 이건 자기위치죠. 자기위치는 뭐다? 두자로 하면 뭐라고 했습니까? 지옥이죠. 자기만 있는 게 지옥이에요. 자기만 있는 게.

어떤 교육자는 자기애하고 선교한다고 돌아다니면서 공부 못시키니까 둘을 노래를 시켜요. 아들놈은 작곡시키고 딸놈은 노래시켜가지고, 어떤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으면, 이게 나중에 누구처럼 된다? 악동뮤지션처럼 된다. 악동뮤지션 알죠? 몽골선교사 아들딸. 그거 하려고 선교사들이 해외에 놀러 다니는 거예요. 너무 잘돼가지고. 십일조만 해도 이거는 수천만 원이 나오니까. 그걸 동료 목사들이 얼마나 부러워하겠어요. 공부 못해도 주의 은사를 받아가지고 됐구나. 그래서 뭐만 계산하느냐 하면 십일조만 계산해요.

여러분, 이 세상의 이상형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은, 평균치 여기서 나왔습니다. 평균치에서. 이 세상의 모든 개념은 평균치에서 나와요. 평균. 평균치가 뭐냐 하면은 기준이 되는 겁니다. 통계표 분포에 보면 분포도가 제일 많고 높은 데. 이걸 사람들이 진리라고 여겨요. 진리. 그러니까 이 평균치로 누굴 죽였느냐,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찾아오게 되면 세상에 드러나게 되는 것은, 너희들은 평균치에 준해서 살아갔다는 그 지옥성이 십자가위치에서만 그게 보이는 거예요.

내가 주님을 보는 것하고 주님이 볼 때하고는, 우리는 내가 볼 때 “이쯤하면 평균치 정도는 되잖아요. 주님이여, 저의 성의를 받아주세요. 내가 그다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는, 평균치는 되잖아요. 보통 사람이 아닙니까?”라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러한 기준을 인정을 안 한다니까요. 주께서 인정하는 것은 이 자체가 나를 버렸다는 사실. 나에게 총을 쏘았다는 거예요. 나는 총을 맞은 게 사실이고. 니가 어떠한 변명을 해도 나에게 총 맞은 상처가 있는 한, 너는, 너의 위치는 내가 없는 위치라는 게 분명하다는 거예요. 그걸 누가 이야기했어요? 이미 천국 속에 있는 성도만이 그런 고백을 내놓을 수 있는 겁니다. 성도만이.

그런데 성도도 인간인지라 날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자기가 되고 싶은 것이 있죠. 있지만, 주님께서는 주위에 불신자들의 조종을 받게 하면서 오늘은 오늘치의 자아가 형성되고, 내일은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또 다시 두드려 맞춰가지고 자아상이 생기고, 또 모레 되면 무슨 위치에 있고. 항상 이렇게 하되, 늘 자아상은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는 그 용도에 의해서 늘 인간이 달라지는 거예요.

다시 오늘 마가복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제 제일 어려운 부분에 왔어요. 제일 어려운 부분이 뭐냐 하면은 여깁니다. 성소가 찢어졌죠. 이제 세상은 죽었어요. 39절에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이 본문이 너무 어려워서 어떤 유명한 신학자는 이걸 가지고 박사학위 논문을 쓴 사람도 있어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유일한 인간이다. 유일한 인간이에요. 유일한 인간이라는 말은 다른 인간과 비교대상이 안 된다.

근데 유대사회에서는요, 인간치고 인간보다 더 나은 인간들이 있어요. 상급에 있는 인간이 있어요. 위대한 인간. 그러나 인간은 유대신학에서는 쇠퇴함입니다. 후패함이에요. 인간=쇠퇴함, 후패함. 유대신학에서는. 구약에서 인간 자체가 어떤 인간이든 인간이면 이거는 그냥 죽어야 될 허무한 존재가 인간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이거는 인간이란 말입니까? 하나님이라는 말입니까? 이거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근데 문제는 백부장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보고 하나님이라고 하면 별 문제가 없는데, 지금 누굴 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십자가에 형편없이, 푸줏간의 하나의 고기처럼 축 늘어져가지고 죽어가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저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점에 대해서 다른 옆에 사람이 있다면 설명이 필요한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후패하고 초라하게 되고, 결국 인간의 말로는 인간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이게 구약성경에 나오니까. 인간으로 태어난 모든 것은 다 뭐가 된다? 흙이 된다는 거죠. 후패하고 쇠약하고. 인간이 신이 되는 경우가 있다, 없다? 없다. 인간이 신이 되는 경우는 유대신학에서 있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염연히 하나님이 따로 계시기 때문에 굳이 하나님이 될 이유가 없어요. 굳이.

만약에 하나님이 있는데 인간이 하나님이 돼버리면 하나님은 몇 분이 됩니까? 두 분이 되기 때문에, 어느 하나님을 믿어야 될지, 그 경중이 어느 쪽에 있는지, 그 비중을 어디에 둘지, 새로운 문제가 발생돼요. 그냥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면 그걸로 모든 하나님의 뜻은 차이가 없다. 하나님의 뜻은 온전하다, 라고 분명히 그들은 믿었던 겁니다.

믿는다는 것은, 이게 아까 이야기한 평균인데요. 대부분의 유대인의 평균의 분포도는 하나님을 믿는 걸로, 여호와를 믿는 걸로, 믿음에 대해서는 하자가 없는 걸로 이미 굳어진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받은데 있어서, 천국 가는데 있어서 아무 지장이 없다. 안심해라.” 이거다 이 말이죠. 그게 지금 굳어졌다 이 말이죠. 하나님을 믿는 데 있어서 모자란다든지 이런 게 있어버리면 그 체제자체가 다 무너져요. 이런 것은 있을 수 없는 거니까.

그런데 여기에 보면 백부장이 하는 말이, 백부장은 이방인이죠. 저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이게 소속이 하나님께 소속이 되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무엇의 반대말이냐 하면은 사람의 아들이 아니다. 사람에게 소속된 분이 아니다.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본 거예요. 근데 지금 부활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지금 부활이 안 됐어요. 하나님께 밉상 받아서 하나의 사형수로, 하나의 죄수로, 그냥 마지막 몰골로 사라지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 논문을 읽어보면서, 유대사회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나중에 하나님께서, 선재하신 하나님, 다니엘에 나오는 그 메시야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아들이라는 말은 하늘에 속한 분입니다. 하늘에 속한 분이라는 뜻이에요.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데 사람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데.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는 사람을, 지금 부활된 것도 아니고, 위대하게 뭐 빛이 난 것도 아닌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이유가 뭐냐, 거기에 대해서 그 사람은 모르겠다는 거예요. 도저히 그런 소리를 했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 논문 쓴 사람의 결론이 뭐냐 하면은 믿음이 좋다는 거예요. 믿음이 좋다고 한 그것이 내가 보기에는 불신앙이에요.

백부장의 믿음이 좋다, 인간에게 믿음이 좋다고 가버리면 그거는 복음의 내용에 포함이 안 되는 이야기예요. 저 사람 믿음이 좋다고 해버리면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누굴 바라봐요? 사람을 바라보게 돼요. 그럼 인간 대 인간의 관계밖에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점을 어떻게 설명해야 되는가, 그것은 바로 여기 34절에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했죠.

아까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버림받았다는 것은 백부장이, 여기 있는 변화들, 온 땅이 어두워지고 할 때, 백부장의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하나님께 버림받을 때, 그 버림받은 것 중에서 백부장 본인도 마땅히 포함이 되어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나 나올 믿음이에요. 이건 마치 십자가 옆에 강도 있잖아요. 강도와 같은 심정이에요. “주님, 같이 버림받읍시다.”라는 고백. “당신의 운명과 팔자가 곧 나의 운명과 팔자입니다.”라고 할 때, 이것은 주님의 선택이죠. 이거는 악마의 선택이 아니고 주님의 선택을 받았을 때는, 백부장 같은 믿음이 지금도 십자가 위치에 있는 성도에게 매일같이 그런 식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당신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다.”

자, 이걸 얼마 전에 설명했는데, 이런 순간 백부장은 어떤 생각을 했느냐 하면은, “내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어떤 일을 당해도 저는 일체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예상도 못한 분을 만났잖아요. 오늘 강의한 것을 정리하면서 다시 한 번 결론을 내려 봅시다. 아까 이야기할 때 여러분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자, 보통 인간이라면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면은 자기의 이상형이 있고, 이상형에 대해서 매일같이 맞추어가는 식으로 하루하루 살아간다고 제가 아까 이야기했죠.

자기 이상형이 없는 인간은 없어요. 왜냐하면 자아는 반드시, 이상형을 주체라고 하는데, 자아와 주체와 일치시키려고 애를 쓰면서 매일매일 살아가요. 모든 행동하는 것이나 모든 그것이. 내가 생각한 나다움에 근접하기 위해서 아주 분투노력을 다한다고요. 그럼 이 사람은 어디에 매여 있는 거예요? 자기가 이상형에 매여 있죠. 그러면 이상형은 어디에서 나온 겁니까? 이상형은 어디를 참조해서 얻은 겁니까? 이상형을 구성할 때. 현재 있는 이 세상에서 얻은 거죠. 오늘 강의를 하나도 안 들었다고 치고요. 오늘 강의 지금 새로 시작한다고 치고. 여러분 어떻게 사십니까? 하면, 나는 세상에 나가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나는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요. 나도 어떤 TV를 봤는데 멋진 사람이 있어서 나도 말년이 저렇게 멋졌으면 좋겠어요.

이게 뭡니까? 제가 방금 이야기한 이상형이잖아요. 그러면 좋겠습니다, 멋져 보입니다, 이게 뭐예요? 갑자기 그 사람이 자기노력을 한다고요. 노력을. 어떤 사람이 말년이 돼가지고 부부끼리 사이좋게 빌딩을 하나 사가지고 거기서 세 받아 먹고 평안하게 취미생활이나 해외여행이나 등산 다니고 낚시 다니는 거 보고, 야, 나도 이제 우리 부부는, 그동안 너무 헛짓하는데 돈을 썼는데 이제 돈 모으자. 돈 모아서 뭐 할 건데? 빌딩 사서 4층에 우리 집하고 123층은 세놓고 합시다, 라고 의논을 할 때, 지금 이 부부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봤던 멋들어진 사람을 보고 자기의 이상형으로 하겠죠.

그걸 현재 자아를 뭐로 인식시킨다? 장차 주체로 인식시키죠. 이걸 보통 정신분석학에서는 욕망이라고 하는데, 성경에서 이걸 욕심이라고 하죠. 근데 이게 귀에 들어오지 않아요. 이게 없이는 사는 낙이 없다 이 말이죠. 사람이 왜 삽니까? 집사님 왜 사십니까? 나중에 식당 하시려고 삽니까? 무슨 목표가 있을 게 아닙니까? 그게 이상형이에요. 이상형. 내가 나를 선택하는 거예요. 자기연민이에요. 나 안 죽었다 이 말이죠. 생생하게 살아있다 이 말이죠. 보란 듯이 살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이 백부장이 봤을 때는 자기는 중대장이나 대대장이 되고 싶겠죠. 대위니까, 중령, 대령, 별을 따고 싶죠. 근데 여기에 누가 개입했어요? 여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죠. 죽었을 때에 백부장이 갑자기 뭐라고 합니까? 저분은 바로 메시야다. 저분은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나님이다. 죽지 말아야 될 분이 죽었다 이 말이거든요. 그럼 이 백부장하고 예수님하고 뭐가 됩니까? 한통속이 되겠죠. 그럼 이 백부장은 본인이 갖고 있던 이상형이 어떻게 돼요? 이상형은 생각 안 하겠죠. 이상형을 생각 안 한다는 것은 지금 내가 바로 주님에 의해서 조립된 거예요. 예수님에 의해서. 십자가에 의해서.

십자가만 감사하고 주님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그 희열과 감사와 기쁨에 매료된 새롭게 조립된 인간이에요. 이건 주님에 의해서 선택된 거예요. 내가 주님을 바라보는 게 아니고. 주님에 의해서 바라본 인생. 나를 위한 인생이 아니고 주님이 누군가를 보여주는 인생으로 설정된 겁니다. 이게 뭐냐, 바로 십자가의 위치죠. 오늘 제목은 십자가의 위치라고 하겠습니다. 이게 십자가의 위치예요. 십자가의 위치가 오늘날 누구라고요? 성도가 살고 있는 그 위치. 거기서 성도 자기는 죽은 자로 인정하고, 내가 보는 이상형, 내 모습, 이상형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조립해나가시겠죠. 뭘 하라는 지시가 있겠죠. 뭐로 기뻐하고 뭐로 감사하는 게 있겠죠.

마치 옛날 악마가 우리한테 헛된 야망에 정신팔려가지고, 내가 저 사람처럼 되려고 분투노력했던 그 모든 헛짓을, 헛짓 한 그건 악마의 선택이고. 지금은 주님의 선택이기 때문에 주께서 천국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활용하시는 그 일에 우리가 지금 성령을 통해서 주의 일을, 주의 십자가 표시의 용도로서 지금 여기에 있는 겁니다. 이러면 이게 십자가의 반복, 십자가의 재현, 십자가의 현재 지금 나타남. 이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보복하고 심판하는 근거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사건을 내가 천국 가기 위해서 그냥 이용하면 되는 사건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친히 주께서 십자가의 위치를, 십자가의 자리를 우리를 통해서 만들어내심을 감사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어떤 일이 있어도 상관없음을, 어떤 일이 있어도 괜찮음을, 감사와 고마움으로 표시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광주강의20201023b 마가복음15장 33-39절(십자가 위치)-이 근호 목사.hwp (68.0K), Down: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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