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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5 09:51:14 조회 : 116         
10강-암 4장 9-11절(메스꺼운 마음)201104-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06.240.236.10)
10강-암 4장 9-11절(메스꺼운 마음)2011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4장 8-11절까지입니다.

아모스 4:9-11

“내가 풍재와 깜부기 재앙으로 너희를 쳤으며 팟종이로 너희의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다 먹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희 중에 염병이 임하게 하기를 애굽에서 한것처럼 하였으며 칼로 너희 청년들을 죽였으며 너희 말들을 노략하게 하며 너희 진의 악취로 코를 찌르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희 중의 성읍 무너뜨리기를 하나님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 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 같이 되었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 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은 하나의 시범이 되는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의 주인, 하나님 자체가 이스라엘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은 곧 이 세상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치신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것을 공격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면역체계를 자기가 스스로 붕괴시키는 것이 되지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스라엘을 스스로 치심으로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하는 것이 뭐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만든 이 세상가운데서 하나님이 손대지 아니하면 도저히 밝혀내지 못하는 어떤 괴물이 여기에 박혀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고자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이 만드신 나라인 동시에 이 세상의 사정을 말해주는 하나의 시범되는 나라기 때문에 그 나라가 망함으로서 이 우주의 불길한 괴물이 얼마나 강력하게 세력을 장악하고 있는지를 밝혀주고 있는 겁니다. 인간이 악마의 부추김을 받아서 천국 가겠다고, 하나님나라 들어가겠다고 열심히 각종 종교를 통해서 시도하지만 그것은 다 실패로 끝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시범나라기 때문에 그 나라의 운명이 나머지 모든 나라의 운명을 대변해주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오늘본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뭘 보내느냐? 9절에 보니까 ‘풍재’가 나옵니다. 풍재라는 것은 곡식이 말라죽는 것을 말합니다. 또 ‘깜부기’재앙이 나오는데, 깐풍기가 아니고 깜부기인데 깜부기는 곡식이 썩는 병입니다. 찬비가 오고 난 뒤에 갑자기 강렬한 햇빛이 비추면 곡식이 감당을 못해서 썩어버리는 병이에요.

그 다음에 ‘팟종이’라 하는 것은 종이로 접은 비행기 그런 것이 아니고 메뚜기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팟종이가 메뚜기에요. 메뚜기가 와서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다 먹게 하였”다고 합니다. 메뚜기가 덮쳐버리고, 풍재가 일어나고, 깜부기재앙이 떨어진 그 장소가 하나님이 약속한, 약속대로 살면 젖과 꿀이 흐른다는 그 지역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파괴, 자기세계에 대한 파괴를 시도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대자연에 있는 모든 것을 소모하고 동원해도 인간의 마음이, 강퍅이 더 세다는 겁니다. 자기백성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의 축복마저 그것을 다 마다하고 그냥 압박을 가해도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마음 열기는 실패로 끝나는 말이지요.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

온 대자연을 다 공격을 해도 인간의 마음은 끄떡도 없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도, 그들이 온갖 기적을 맛봐도, 그 대자연을 총동원해도 이스라엘의 마음열기에 실패한다 그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16장 10-11절에 보면 “또 다섯째가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

하나님께서 아프게 하고 종기가 나게 하고 온갖 극한의 고통을 줘도 인간들은 하나님께 굴복하거나 복종할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괴물이 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퍼부어도 끄떡도 없고 오히려 반항기만 더 늘어나서, 심지어 얼마나 아픈지 혀를 깨물어 가면서도 ‘내가 하나님 믿나 봐라’ 그런 식이에요. 내가 하나님께 돌아오는가 봐라, 이런 식이다 그 말이지요.

참 못돼먹었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자기백성, 이방민족은 놔두고 약속의 땅 자기백성한테 이렇게 공격을 해도 그들은, 인간은, 우리들끼리 사이좋게 정답게 착한 일 많이 하면서 서로 살면 되잖아, 서로 소통하면서 화합하면서 평화롭게 살면 되잖아, 굳이 예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께 돌아올 필요가 뭐가 있느냐 하는 식에요. 인간의 마음이.

그래서 이런 말씀을 통해서 내가 누구냐를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아무리 압박을 가해도, 그리고 아무리 회유를 하고 아무리 축복을 주고, 반대로 저주를 퍼부어도 인간은 하나님께 돌아올 의사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내가 너희 중에 염병이 임하게 하기를” 그 다음에 나라 이름이 나오지요. “애굽에서 한 것처럼 하였”다고.

“애굽나라에 열 가지 재앙을 퍼부어서 거기서 너희들을 건져낼 때에 애굽사람이 너희보다 더 악하고 못됐다고 생각했느냐? 그것은 오해다. 너희들은 애굽에 내린 재앙이 지연되었을 뿐이지 그런 재앙을 하나님께서 안 당하도록 그런 재앙이 주어지지 않도록 봐줬다고 해서 너희들 마음이 하나님이 받아주는 마음 하나님 쪽으로 열린 마음이라고는 할 수 없다.”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지금 북 이스라엘에 이런 혹독한, 애굽에 내렸던 열 가지 재앙 못지않은 재앙을 퍼붓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렇게 혹독하고 다루셔서 도대체 얻겠다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을 얻겠다고 하시는가? 이스라엘 백성을 거기서 고생시키고 멸망시킴으로서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그 뜻은 무엇인가?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심판을 함으로서 자기가 만든 이 세상 또는 자기가 만든 이스라엘의 어떤 메스꺼움을 가질만한 요소는 하나님께서 그냥 방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토하여 내고 싶은 요소가 있을 때는 그냥 방치하는 것이 아니고 그걸 기어이 파내시는 분, 끄집어내시는 분이에요.

왜냐하면 이 세상은 사람 것이 아니고 하나님 본인의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대해서 그냥 지켜보기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뜻을 시범되는 나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너희들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냥 가만있을 내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한 경우가 오늘 본문에 애굽이라는 나라가 나왔기 때문에 전에 애굽나라에서 이스라엘 만들 때 그 때 하나님께서 어떤 심정, 어떤 자기 뜻을 제대로 나타내셨는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에, 출애굽기 7장 3-4절 보게 되면 우리 인간이 입장에서는 상당히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을 모세에게 하셨습니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나의 표징과 나의 이적을 애굽 땅에 많이 행하리라마는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더하여 여러 큰 재앙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찌라.”

이미 하나님께서는 아셔요. 애굽의 바로 왕이 아무리 압박을 가해도, 아무리 재앙을 내린다 할지라도 곱게 하나님의 뜻을 따를 위인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안 되도록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강퍅하게 조정해 올리기 때문에. 강퍅한 것을 점점 더 도가 넘치도록 내가 그 마음을 그렇게 다룰 거야, 그렇게 만들어낼 거야, 라고 주께서 예언하십니다. 바로와 모세한테.

하나님이 이미 다 알고 계시는 거예요. 갈수록 바로의 마음이 강퍅해진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 겁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하고 협상하거나 타협하거나 인간의 협조를 구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그러한 우리들 평소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이에요.

사람하고 하나님하고 서로 의사가 통하고 뜻이 통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과는 전혀 매치가 되지 않고 논리적인 연결도 되지 않는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그 뜻대로 살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그 것은 터무니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논리에 협조 안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우리가 설정한,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고,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하고, 그 논리에 하나님께서는 장단 맞춰 주지 않습니다. 거기에 동조하지 않으셔요. 그 논리와 안 맞는 생소한 일을 일으키고 말지요. 그러면 바로에게 왜 자꾸 하나님께서……, 바로만 어떤 의미에서는 억울한 거지요. 본인이 마음씨를 나쁘게 먹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마음씨를 나쁜 마음으로 유도해내시는 겁니다.

인간 마음을 그렇게 다루시는 것에 대해서 제가 설교초반에 언질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인간 속에 본인도 어찌할 수 없는 괴물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괴물에 인간이 사로잡혔기 때문에 인간이 손을 쓸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 내면서 그게 하나의 구원의 정형되는 모델로 삼으십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다, 하는 모델로 삼으시는데 그 전체적인 해설은 로마서 9장 16-18절에 나와 있습니다.

상당히 중요한 말씀이고 성경전체를 요약했다고 볼 수 있는 말씀이 로마서 9장 16, 17, 18절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구원받고자 애쓴다고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에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애쓴다고, 용쓴다고 구원에 유리한 것도 아니요. 그럼 뭐냐?

“가만 있거라. 나대지 말고, 설치지 말라.”는 겁니다.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으로 구원이 되는 겁니다. 긍휼. 그러면 긍휼로 드러날 때는 그냥 긍휼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긍휼과 정반대가 되는 상황을 동반시키지요. 그게 뭐냐 하면 강퍅이라는 겁니다. 강퍅 되는 상황을 만들어서 그 강퍅 된 상황의 한계를 다 보여주시면서 그 강퍅을 자위적으로, 스스로 강퍅에서 돌아설 위인이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거예요.

여기 17, 18절에,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강퍅한 자의 대표자로서 바로가 선택되었고, 채택되었고, 그 다음에 그 강퍅에 꼼짝마라, 사로잡힌 자, 구원이라는 것은 전혀 희망도 보이지 않고 구원의 여명이 전혀 보이지 않는 자의 부류에 해당되는 자가 바로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에게 준 하나님의 조치는 바로에게는 강퍅하게 했다면 이스라엘에게는 그냥 멍청하게 쳐다본 것이 아니고 긍휼함을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긍휼함을 여러분이 아시려면 반드시 강퍅함이 여러분 내부에 같이 긍휼과 동반해서 여러분 내부에 같이 일어나 줘야 돼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의 역할은 강퍅이었고 긍휼의 역할은 이스라엘이었다면 이미 애굽에서 빠져나와서 단독국가가 된 이스라엘 내부에서 강퍅이 발생되게 하셨고, 긍휼이 동반해서 같이 발생되게 하시고 그리고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에는 그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대변자로서 메시아가 오시고, 그 메시아를 통해서 메시아 빼놓고 나머지는 강퍅하고 메시아만 아버지의 긍휼하심을 얻고,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승천하고 난 뒤에는 그 다음에 성도에게 강퍅한 마음과 긍휼의 마음 둘 다를 다 집어넣는 겁니다.

그래야 자기 구원을 통해서 주님의 하신 일이 확인되기 때문에,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뭐는 아니고 뭐다. 강퍅함은 아니고 긍휼함이다, 라고 말할 때는 그냥 긍휼이 되면 긍휼을 이해 못해요. 강퍅을 소름끼치도록 느껴야 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메스꺼운 그러한 행동과 성격이 우리 안에서 발생되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자기 면역체계를 붕괴시키고 내가 나를 공격하도록 하게 하시는 이 작업을, 주님 자신이 주님자신을 공격한,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 자신을 공격한 그 바깥 작업이 우리의 내부 상황으로 들어오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하루하루 생활을 보니 강퍅스럽지 않습니까? 본인이 생각해도 메스껍지 않습니까?

분명히 성경에서 디모데전서 6장 7절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이렇게 말씀 했건만 8절에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했건만 우리의 메스꺼운 욕심이 자꾸 나오는 것 보세요.

그럴 때 우리는 인간이니까 봐주세요, 하지 말고 구토함을 느껴야 돼요.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미워져야 됩니다. 요한복음 12장 25절 말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자기를 미워하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나를 따라올 수 없다. 마태복음 16장 24절의 말씀이지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음을 열지 않았다.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그 마음이 얼마나 강퍅한지를 그것을 주께서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가 만든 대자연이지만 그것을 자기 것인 이스라엘을 향하여 거기다 소모시키는 거예요. 공격하게 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내부에 자리 잡은 이 강퍅은 우주에 있는 어떤 대자연의 공격에도 끄떡도 없이 주께 돌아오지 않습니다. 홍해가 갈라졌다고 해서 그들이 구원받은 게 아니에요. 대자연이 어떤 변동, 눈앞에 놀라운 어떤 기적을 베풀어도 인간의 마음은 그것보다 더 완악하고 더 강렬합니다. 그 정도로 악마는 우리가 손쓸 대상이 아니에요.

이 말은, 어떤 인간도 자력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애초부터 이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 말이지요. 창세기 3장 24절입니까? 하나님께서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생명나무에 가지 못하게 하셨던 그 강력한 조치, 그 강력한 조치가 여전히 아직도 유효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기 시범나라를 스스로 치신다는 것은, 인간과 하나님사이의 그 장벽, 인간은 괴물의 지배를 받는 한, 악마의 지배를 받는 한 결코 하나님께로 갈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인간은 도저히 못 받아들이는 요소가 인간의 괴물과 함께 우리 안에 들어 있다는 겁니다. 나를 심판하고,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고,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 자신을 저주하고,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저주하시는 그 하나님 상은 인간이 악마에 붙잡혀 있는 한 그런 메시아, 그런 하나님은 가짜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그것이 인간의 본질로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벌써 하나님 자체가 가짜고, 세상 자체가 가짜고, 우리 자신이 가짜인데 어떻게 천국을 넘봅니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불가능한 거예요. 옛날에 mbc에서 했던 프로그램이 있어요. <우정의 무대>라는 것이 있습니다. 군 장병의 어머니를 무대 커튼 뒤에 모셔놓고 어머니의 음성을 들려줍니다. “우리 아들은 이런 아들입니다.” “자, 이 어머니가 나의 어머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대 위로 뛰어 나오세요.”

그 맨트가 나가면서 나오는 노래는 “엄마가 보고플 때~” 그런 노래 나오면서 병사들 울게 만들고 군기 다 빠지게 만들어놓지요. 그런데 다섯 명이 자기 엄마라고 올라오는데 거기서 가장 성경적으로 오늘 상황과 합당한 사태가 벌어져요. 어떤 병장이 무대로 올라오는 거예요.

사회 보는 뽀빠이 이 상용이 “여기 계신 분이 김 병장 어머니 맞습니까?” “저기 계신 분은 우리 어머니가 아닙니다!” 야, 저게 바로 교회다. 심판의 하나님은 아예 인정을 안해. 나를 지옥 보내는 하나님은 하나님이라고 간주를 안 한다고요. 교회가! “저기 있는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가 아닙니다.” “그러면 김 병장 어머니는 어디 계십니까?” “내 어머니는 저기 따로 있습니다.” 하거든요.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안 믿어요. 안 믿고 사람들에게 인기 끌만한, 교회에 사람들이 운집할만한, 우리를 긍정할만한, 우리 존재를 인정할만한 가짜 신, 가짜 예수, 가짜 삼위일체, 가짜 하나님을 만들어놓고 무대에서 하는 말이 “저기 계신분이 우리 어머니는 아닌데 우리 어머니는 따로 계십니다.” 그 어머니에게 한소리 하고 싶어서 무대 위에 올라왔다는 거예요.

진짜 무대 위에 실루엣처럼 있는 하나님은 세상을 부숴버리는 하나님,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그 세상을 스스로 박살내버리고 모든 것을 다 불태워버리는 하나님이에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는 하나님, 그렇게 만들어놓고, 보기 심히 좋았더라고 해놓고, 그 좋았던 하나님을 없애버리는 하나님, 뭉개버리는 하나님, 그것도 메스껍다고, 구역질난다, 더럽다고, 토하고 싶다고, 너 같은 인간은 나는 인간이라고 간주한 적 없다고 그렇게 외치시는 하나님.

자기백성에게 풍재 보내지요. 깐풍기 아니고 깜부기 재앙 보내지요. 메뚜기 보내지요. 옛날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 내릴 때의 그 재앙을 그대로 지금 자기백성에게, 그렇게 귀하던 자기백성에게 다 보내시잖아요. 이거 어떻게 납득이 됩니까? 어떻게 우리가 이해해야 돼요? 어떻게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기 나라를 저렇게 박살내십니까?

뿐만 아닙니다. 출애굽기 4장 2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하시는지라.” 자기 동업자인 모세를 보고 죽이려고 합니다. 애굽의 열 재앙 때 메뚜기재앙이 있었는데 그 메뚜기 재앙이 출애굽기 10장 13절에서 15절에 나옵니다. “모세가 애굽 땅 위에 그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동풍을 일으켜 온 낮과 온 밤에 불게 하시니 아침에 미쳐 동풍이 메뚜기를 불어 들인지라.”

그런데 그 메뚜기를 들인 이유가 제가 아까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14, 15절에, “메뚜기가 애굽 온 땅에 이르러 그 사방에 내리매 그 해가 심하니 이런 메뚜기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러라 메뚜기가 온 지면에 덮여 날으매 땅이 어둡게 되었고 메뚜기가 우박에 상하지 아니한 밭의 채소와 나무 열매를 다 먹었으므로 애굽 전경에 나무나 밭의 채소나 푸른것은 남지 아니하였더라.”

이렇게 되었어도 20절에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이것이 애굽의 바로왕의 마음에게만 국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마음이에요. 우리 마음이 그런 거예요. 우리 마음이 강퍅한 마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긍휼이라는 것은 그냥 헛소리에요.

하나님의 사랑, 긍휼, 다 개소리입니다. 멍멍, 다 개소리고 이것은 헛소리에요. 이것은 아무 의미 없는 무의미한 말입니다. 내가 구원을 받아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강퍅한 마음을 절실히 못 느끼기 때문에 구원을 넌지시 생각하는 거예요. 정말 내 마음이 강퍅하다는 것을 안다면 구원은 아예 생각도 못할 거예요.

내 마음이 강퍅한지 아닌지 간단한 실험이 있습니다. “제가 이제부터 설교할 테니 이 설교하고 여러분 목숨하고 바꾸시겠습니까? 시~작!” 해보세요. 절대로 귀 막고 어어어어~, 이럴 거예요. 왜냐하면 아무리 설교 내용이 귀해도 내 목숨보다 귀한 것은 없기 때문에. 그게 강퍅이에요. 절대로 이 목숨만큼은 내가 하나님이 오더라도, 예수님이 오더라도 빼앗기기 싫다는게 강퍅이에요. 그런 자들이 가는 곳이 지옥입니다.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왔을 때 예수님을 존경한다고 하고 높였지요. 다 그거 구라입니다. 실은 자기 목숨이 더 귀해요. 자기 목숨을 잃기 싫은 거예요. 자기목숨의 가치를 대변하는 것이 바로 자기재산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걸 간파하시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네가 모든 재산을 다 팔고 나를 따라 오지?” 한 거예요.

부자청년이, 턱도 없는 소리, 그냥 왔던 자기방향으로 가버리지요. 예수님의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갔습니다. 예수님은 천국 가는 방향인데 이건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는 겁니다. 꼴 보기 싫다는 겁니다. 왜? 자기 마음이 강퍅하니까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4절에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그래서 주님께서 이 땅에서 하시는 일은 뭐냐?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묘기를 보이시는 거예요. 이건 불가능이라는 말이지요.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는 일은 없어요. 제자들은 말했어요.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사람이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 거예요. 제자들은 사람이 할 수 없다는 이유를 자세히 몰라요.

그러나 오늘 본문에 의하면 사람이 할 수 없는 이유는, 대자연의 모든 것을 선물로 줘도 그들이 마음을 열어놓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애초부터 강퍅했기 때문입니다. 강퍅하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내 마음 안다고 우기지 마세요. 그냥 강퍅이라고 하세요. 지옥에 적합한 마음이라고 그냥 인정하세요. 긍휼은 단독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에요. 강퍅이라는 상황 속에서 긍휼이 나와요. 강퍅과 동반해서 긍휼이 나온다고요.

자기 마음이 강퍅하면 할수록 거저 주시는 구원의 능력은 긍휼로서만 예, 할 수밖에 없어요. 긍휼이라는 것은 불쌍히 여기는 거예요. ‘아, 불쌍히 여김이구나. 내가 애써서 천당 가는 게 아니구나.’ 이것은 불가능한 거예요.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그 비법, 알려 드려요?

삼손이 그걸 보여줬습니다. 사사기 16장에 삼손이야기가 나오는데 1-3절에 보면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혹이 가사 사람에게 고하여 가로되 삼손이 여기 왔다 하매 곧 그를 에워싸고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밤새도록 종용히 하며 이르기를 새벽이 되거든 그를 죽이리라 하였더라

삼손이 마치 덫에 빠진 것처럼 성안의 기생집, 가사니까 그 지역이 블레셋 땅이지요, 블레셋 기생집에 들어갔다는 거지요. 그 소식을 듣고 삼손이 독립투사거든요 삼손 잡기 위해서 경찰이 아예 그 집에 빙 둘러서 매복해서 드디어 지명수배된 삼손을 잡았다 한 거지요. 이제 삼손이 문에서 나오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삼손이 어떻게 대처했는가? “삼손이 여기 왔다 하매 곧 그를 에워싸고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성문에 매복했다는 말에 여러분이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밤새도록 종용히 하며 이르기를 새벽이 되거든 그를 죽이리라 하였더라삼손이 밤중까지 누웠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성 문짝들과 두 설주와 빗장을 빼어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니라.”

문을 지키고 있는데 문이 없어졌어요. 문을 통째로 뜯어버렸다는 말이지요. 주님께서,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처럼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그게 불가능하리라고 이해했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가능함을 먼저 언급해요. 불가능함을 먼저 언급해서 나중에 자기가 천국에 도달했을 때 이것은 내가 얼추 가능했다는 이야기가 입밖에 나오지 못하게 만들어버려요.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했는가? 아예 인간들이 천국 가는 그 자체를 없애버리는 겁니다. 인간들이 얼추 자꾸 천국 문, 천국에 가는 길, 이렇게 생각한다면 길이 있다는 말은 내가 우리가 갈 수 있다는 것으로 논리상 연결시키거든요. 그러나 주님의 모든 일은요, 인간의 논리와 연접이 되지 않아요. 이게 연결이 안돼요. 할 수 있다, 의 일말의 희망도 인간에게는 없어요. 인간에게 그런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생뚱맞아요. 삼손이 뜯어내서 성문자체가 없으니까 이것은 성이 훤해요 그냥 모조리 다 문이 되어버렸어요. 그런데 매복했던 블레셋 군사들이 그걸 예상했겠습니까? 삼손이 문짝 자체를 없앨 거라고 상상도 못했듯이 우리가 들어가고자 하는 그 천국 문 자체가 주님 앞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예수를 보면서 그걸 알았겠어요?

주님 이용해서 나 그걸로 들어간다는 것, 자꾸 그런 계산을 하잖아요. 그러나 우리가 들어갈 천국문은 아예 우리에게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누가 알겠어요? 우리는 천국 문이 없습니다. 설교 여기까지 들으면 막 화내고 싶지요 그러나 요한복음 5장 21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천국 올 생각하지 말고 그만 그냥 살아라. 강퍅한대로 그냥 살아라.” 이게 주의 뜻이에요. 아버지께서 자기 백성을 선택한 것처럼 이제는 아들에게도 그 권한이 이양되어서, 이제는 아들이 심판주니까, 자기백성 누구는 구원되고 누구는 구원 안 시키고 하는 권한은 일방적으로 주님의 자기선택입니다. 자기선택으로서 구원하니 예수님자체가 길이요, 예수님 자체가, 선택행위 자체가 생명이고 선택행위 자체가 진리지요.

예수님의 선택행위 자체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기 때문에 인간세계에는 길도 없고 진리도 없고 생명도 없는 것이 마땅하지요. 당연한 겁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지신 것은 이 세상을 전부 다 심판 아래 두기 위함이에요. 심판아래 두었다는 말은 심판이 최종적인 상태라는 뜻이에요. 다시 말해서 심판이후에 뭐가 구원이 있을 것이라는 어떤 낌새도 인간의 자기착각이고 가짜생각이에요.

그런 것은 현실적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현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메스꺼움 때문에 이 세상 자체를 폭파시켜 버린 거예요. 이 세상은 내가 원하는 세상이 아니라고 결정내리시고 이 세상을 불로 싸질러 버리는 겁니다. 그 안에 인간도 들었고 다 들었어요. 그 안에 심지어 자기 아들까지 들었어요. 모든 이 세상을 저주의 대상으로 삼으시고 저주해 버리신 거예요.

심판주 자체가, 나중에 심판주 되시는 분이 심판을 받아버렸으니까 할 말이 없지요. 메시아가, 구원시키는 분이 심판을 받고 저주를 받았으니까 우리로서는 모든 여망과 희망은 끝난 겁니다. 예수님마저 저주받았으니까 무슨 구원이 남아 있을 리가 있어요? 없지요.

그런데 그 심판주, 억울하게 심판당한 그분을 아버지께서 사흘 만에 부활시킴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심판주가 되게 하심으로 그 다음부터는 누구를 구원할지 누구를 구원 안할지를 예수님에게 일임을 하신 거예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를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린다는 요한복음 6장 39절의 말씀이 그 말씀이에요.

그래서 인간을 둘로 분류했습니다. 심판받은 그들을 그냥 심판받음으로 가게 하는 것으로 되어버리면 그것은 심판받은 자들이 분류고, 심판 속에 있는 자를 예수님께서 선택해서 그 사람을 구원할 때 비로소 그것이 구원이고, 그 과정에 드러나는 것이 뭐냐 강퍅할 수밖에 없고 강퍅해서 마땅히 지옥가야 되는데 거기에 비로소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김이라는 그러한 것이 드디어 구원된 자의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아, 내가 애써서, 용 써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긍휼하심으로 구원되는구나.’ 그러면 왜 내 힘으로 안 되는가? 그것은 앞서 여러 번 이야기했지요. 사람이 온 천하를 얻어도 인간의 마음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온 천하보다 더 우세하고 더 강해요. 온 천하보다 강한 악마가 들어 있으니까.

우리의 마음이요, 몇 푼 하나님께서 도와준다고 해서 인간의 마음이 열리고 그런 것 없습니다. 기도 몇 번 응답되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마음자체가 열려야 되는데 그 마음이 열려야 바로 구원할 자만 구원한다는 예수님의 일방적 선택이 열린 마음속에 쏙 들어오는 거예요. 그게 긍휼로서 들어오는 거예요. 강퍅밖에 없는, 강퍅만 있는 그 마음에 긍휼이 들어오는 겁니다.

마태복음 14장 29-31절에 보면, 이러한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여러분 주께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베드로가 어떤 상태에서 구원을 느껴야 되느냐 하면, 주께서 요구하는 것은 물위를 걸으라, 인데 베드로는 물위를 걷는데 실패했어요. 실패했다는 그것 내가 구원에 실패했다는 그것이 구원의 시작이 되는 겁니다. 왜냐? 그럴 경우에만 주의 붙잡은 손이 내 구원의 열망보다 더 실제적이고, 더 사실적이고, 제대로 현실이기 때문에 주께서 붙들어주는 거예요.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천국 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늘 붙들어주는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천국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성도는 어떻게 삽니까? 메뚜기한테 뜯겨야지요. 메뚜기한테 뜯겨야 돼요. 중국집에서 깐풍기만 먹지 말고 깐풍기 먹을 때마다 깐풍기한테 뜯겨야 돼요. 풍재를 만나야 돼요. 풍재뿐만 아니고 이 풍진 세상, 이 세상 모든 세파를 다 맞아야 돼요.

그래서 오, 저 귀한 것, 오, 내 돈, 오, 내 건강, 내 체면 다 날라 가고 다 뜯겨야 돼요. 다 뜯기고 그 다음에 고백하세요. “주님의 긍휼하심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일방적 선택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 고백이 하나님께 찬미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열심히 뭘 한다고 생각하기에 주께서 열심히 하는 것을 보지를 못했습니다. 느끼지를 못했습니다. 주여 우리는 강퍅한 채로 매일 부지런히 설치지만 어떤 경우에도 강퍅한 마음으로 일관되고 정말 긍휼이 들어올 여지도 없었습니다. 주여,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이 얼마나 주님 보시기에 메스꺼운 존재인지 깨닫게 하셔서, 구역질나는 존재인지 깨닫게 하셔서 비로소 긍휼을 체험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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