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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05 22:49:18 조회 : 73         
강남-누가복음 11장 2절 (주기도문) 220419a-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59.12.122.247)
강남-누가복음 11장 2절 (주기도문) 220419a-이근호 목사



오늘은 11장 1절부터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이렇게 되지요. 주님 가르친 기도, 주기도문으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그 취지를 알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무엇하시는 분인지 왜 오셨는지를 아시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0장 1절에 보면 70명의 제자들을 각처에 보냈지요. 누가복음 9장 1절에 보게 되면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이렇게 되어있지요. 예수님의 그 취지는 그 제자들을 통해서 보다 확대가 됩니다.


예수님이 보내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다 이 말은 예수님의 자신의 하실 일이 그 일과 제자들의 활동과 관련성이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제자들은 어떤 역할이 있는 거죠. 제자들의 역할. 이 역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하나의 공식 하나 이렇게 한번 만들어보겠습니다.


지금 누가 살아있는가? 이 점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지금 2022년 지금 누가 살아있는가? 둘 중에 예수님이 살아있는가 인간이냐? 둘 중에 누가 살아있는가. 사람들은 본인들이 살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숨 쉬고 거울 앞에 자기 모습이 보이니까.


내가 살아있다고 하니까 누가 안 살아있는 분이 되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지금 안 살아있는 분이 되어버려요. 살아있다에 대해서 나도 살아있고 예수님이 살아있고 둘 다 살아있어 버리면 뭐가 죽어 버리냐 뭐가 사라지느냐 하면은 사람에 의해서 인간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 그 사실이 이게 도중에 날라가 버려요.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폭력을 가했다든지 이렇게 욕설을 했다든지 이렇게 되게 되면 폭력 뭐 한 대 맞는다고 죽지는 않잖아요. 때렸다든지 욕설을 해버리면 때린 자도 살아있고 맞은 자도 아프지만 살아있고 욕을 한 사람도 살아있고 욕을 얻어먹은 사람도 살아있고 둘 다 살아있다가 돼요.


그런데 인간 쪽이 예수님을 죽여 버리면 인간들이 그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던 이유는 우리는 살아있고 예수라는 자는 우리 앞에서 죽어 없어졌고. 그 목적을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살해한 거에요. 십자가의 뭐 전시하라고 십자가에 올라간 게 아니고 죽여! 죽여! 죽여! 제발 죽어다오 해서 죽이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린 겁니다. 어디 연극한 거 아니에요. 한 5분 동안 매달렸다 내려줄게 이런 거 아니거든요. 죽이기 위해서 한 거에요.


예수님을 죽였을 때 죽은 자는 죽였으니까 죽은 자는 엄연히 누가 봐도 거울 봐도 죽은 자는 살아있고 예수님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살아있는 우리가 예수님을 죽였으니까. 이로서 인간 세계는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이고 죽는 것은 무슨 뜻인가를 인간들은 이거는 전부 다 동의하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은 살아있고 얼마 전에 죽었던 예수님은 그거는 죽었다 라고 인간들은 확실하게 규정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죽은 예수님을 사흘 만에 살려냈어요. 그러면 어느 쪽이 살았느냐 어느 쪽이 죽었느냐 판정을 인간 쪽에서 내린 판정 자체가, 살고 죽고의 판정 자체가 이게 오류가 되는 겁니다. 죽었다가 살아야 산 것이 되고 죽은 적도 없이 있는 것은 이것은 죽어가고 있는 곧 죽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 쪽은 죽은 자가 되고 예수님은 산 자가 되는 거에요.


숨 쉬어도 죽은 자고 100m 달리기 해도 죽은 자고 다음 차기 대통령 후보자 되도 죽은 자고요. 검사들도 죽은 자고. 이 세상에 있는 인간 중에 안 죽은 자는 단 한명도 없이 다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게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옵니다. ‘한 분이 죽음으로서 모든 인간은 죽었다.’ 죽었다. 그래서 이런 질문할 수 있어요.


집사님 교회는 몇 명 나옵니까? 이 질문과 같은 질문이 집사님 교회 지난 주 죽은 자가 몇 명 모였습니까? 같은 질문이에요. 한 500명 나오면 시체 500명 모인 거에요. 목사까지 합쳐서 501명 모인 거에요. 집에 아이가 몇 명입니까? 혹시 손자 손녀 합쳐서 몇 명입니까? 두 명입니다. 그럼 집에 죽은 자가 두 명 더 추가요. 중국집 가면 “아줌마 여기 단무지 하나 추가요” 하는 것처럼.


죽은 자가 있는데 그 죽은 자 속에 죽은 자가 계속 새끼를 까고 자식을 놓게 되면 결혼해서 자식을 낳게 되면 결혼한 당사자가 죽은 자고 그 죽은 자가 자식 낳으면 죽은 자가 두 명 세 명 늘어나는 거에요. 어떤 집은 죽은 자가 6명 낳았어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육’이라고 합니다. 영의 입장에서 육은 죽은 거에요.


왜 죽었느냐? 창세기 6장에서 육은 하나님의 신이 함께 있지 않기 때문에 죽은 자 되는 거에요. 이 개념, 이 개념을 뚜렷하게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주기도문 해석 못합니다. 할 수가 없습니다. 주기도문 할 수가 없습니다. 그 근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은 누가복음 13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그 다음에 뭘 주신다고 했습니까? “성령”을 주시죠. 영을 주시죠.


여기에 영을 주시는 것을 하나님 입장에서는 뭐냐? 그걸 좋은 것이라고 해요. “좋은 것 줄게.” “뭐요?” “성령 줄게.” 이렇게 되거든요. 그러면 성령 말고 주는 것은 전부 다 좋은 것입니까? 악한 겁니까? 악한 것이에요. 성령이 와야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성령이 와야 내가 육체가 되가지고 이 육체는 하나님 앞에 안 받는다는 것을 아는데 성령 말고 다른 걸 줘 버리면 본인의 하자, 본인의 문제점 있음이 들추어지지 않아요.


기도는 열심히 했는데 그 기도가 뭐냐 하면은 세상 기도는 이겁니다. 불신자 성령 받지 않은 불신자의 기도는 목표가 이거에요. 나의 나 됨. 나의 나 다움. 목표는 이거 하나 밖에 없어요. 나의 나 다움이라고 할 때에 앞에 나, 뒤에 나 다움 여기서 인간들은 뭘 추구하느냐 하면은 일관성을 추구하는 거에요. ‘일관성’. 일관성을 뭐라고 하느냐 이걸 동질성이라고 합니다. ‘동질성’.


과거에 내가 알던 내가 쭈욱 지속적으로 그대로 밀어붙여서 ‘과거의 내가 이렇게 되면 참 좋겠네’ 하는 자기 이상형. 자기 이상형을 그냥 밀어 붙이는 거에요. 미래까지, 훗날까지. 밀어 붙일 때 나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내 이상대로 잘되는 것은 인간적 입장에서는 뭐냐? 그게 자기한테 좋은 것이라는 거에요.


세상에 나쁜 목적을 나쁜 이상을 세울 인간이 있습니까? “나 맞아 죽을래.” 이걸 목표로 삼아요? “너 커서 뭐할래?” “맞아 죽을래.” “너 장래 소원이 뭐야?” “돌에 맞아 죽을래.” 뭐 이런 거 있습니까? 없지요. “대통령 될래.” 이런 거 있잖아요. 그걸 사람들은 뭐로 보느냐 하면은 나한테 좋은 것이라고 보는 거에요.


누가? 육이. 누가? 죽은 시체가 좋은 것은 바로 나의 나 다움이에요. 나의 나 다움, 나의 나 됨. 나의 나 다움. 여기 나에다가 나를 확장시켜 봅시다. 여기에다가 뭘 대입하느냐.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우리 국가. 여기에 구체적으로 하나 더 박항서 축구팀 이런 거.


박항서 감독의 팬들은 박항서가 감독한 그 축구팀은 어떤 팀이라도 박항서 감독의 스타일대로 늘 승리하기를 바라지요. 그래서 승리하게 되면 박항서가 박항서 했다 뭐 이런 것을 끄집어 내는 거에요. 방탄소년단이 히트를 치면 방탄소년단이 방탄소년단 했다 이런 이야기해요. ‘답다’ 이런 말이거든요. 제대로 했다.


그럼 우리 가정은 우리 가정 다움이고 우리 교회는 우리 교회 이상다움이고 우리 사회, 우리 직장, 우리 기업, 우리 가문은 우리 가문답게 모든 것이 나의 나답게 이게 기반이 되고 토대가 되고 바탕이 되는 거에요. 여기에다가 뭘 하느냐 하면은 기도를 거기에다가 몰빵을 해버려요. 몰빵을. 기도를 몰빵을 해버립니다.


제가 언제 그런 이야기했지요. 교회는 말씀다워야 하고 기복신앙은 없어야 됩니다 라고 아주 유식하고 그 당시의 강해설교로 히트치고 야 이게 복음이구나 하나님의 열심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인간의 열심보다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해서 저게 기독교야 저게 복음이라고 존경 받던 사람이. 복음도 아닙니다, 복음도 아닌데 일단 복음이라고 이해하는, 다른 목사들은 제목 설교하는데 그 사람은 강해설교해서 아주 존경받는다.


그렇게 하던 사람이 나이 많아 80 되서 그 교회를 은퇴를 했답니다. 그 후임자가 그대로 강해설교 할 실력이 됩니까? 안되잖아요. 안되니까 그 교회에서 뭐하느냐 하면은 기도회로 모이는 거에요. 그럼 이 기도회라는 게 뭡니까? 옛날처럼 말씀을 전했던 사람이 없으니까 교인들이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을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그들이 할 수 있는 게 뭡니까? 기도 몰빵하는 거에요. 기도 몰빵하면서 뭐라고 핑계 대느냐 하면은 성도의 자랑은 말씀과 기도 두 개의 바퀴가 균형 맞추어가야 한다. 기도란 말씀에 입각하지 않으면 그거는 살기 위한 기도에요. 말씀에 입각하지 않으면. 인간의 모든 영광은 불에 꽃같이 사그라들지만 영원히 남는 것은 영원히 지속되고 일관성 있는 것은 말씀입니다. 인간의 기도가 아니고 주님의 기도에요.


어떤 분이 기도가 궁금해가지고 멀리서까지 왔는데 내가 생각해도 참 야박하게 이야기했다 싶은 생각이 들지만 어쩔 수 없이 멀리 계시지 만날 수도 없고 오신 김에 해답은 줘야 되지 않느냐. 그래서 제가 성경구절 제가 직접 찾아드리면서 그 분 보고 읽어보라고 했어요. 성경에서 기도가 뭐라고 되어 있는가. 히브리서 7장 25절입니다.


여러분들은 기도에 대해 궁금한 점 하나도 없지요? 뭐 기도를 해야 궁금하지. 그렇지만 다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자! 여기서 ‘자기’가 누굽니까? 교인이에요? 아니면 성도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입니까? 예수님이죠. 그러므로 ‘예수님을 힘입어’,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그’가 누구지요?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항상 살아서’, 여기 “살아서” 나오지요.


인간은 왜 기도가 안 됩니까? 인간은 죽어있기 때문에 기도가 안돼요. 인간은 죽어있으니까. 몸부림치는 건 있는데 몸부림치는 거 아니에요. 기도에요. 제대로 살아서 저희를 위해 뭐한다고 했습니까? 노십니까? “간구하심이라”. 기도하심이라. 간절히 기도하심이라. 누가요? 예수님이. 누굴 위해서? 자기 기도 접어버리고 자기 기도 빼버리고 누구 기도만 의지하는 사람? 주님의 기도만 바라보는 사람을 위하여 구원하는 거에요. 그 외에 다른 구원받을 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칫하면 내가 기도해서 구원받았다는 엉뚱한 소리 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빡시게 금요철야 기도 빡시게 나와서 새벽기도 나와서 구원받았다 이런 소리 한다 이 말이죠. 성경에 그런 것은 없어요. 모든 구원은 예수님의 기도만 구원돼요. 왜 그러느하면은 로마서 8장에 보면 인간들의 기도는 문제가 뭐냐 하면은 죽어 있는 인간들이 뭘 알겠어요.


8장 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해요. 무엇을 위해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는지 우리는 몰라요. 왜냐 하면은 우리가 고장 났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고장 났거든요. 꽃봉우리는 처음부터 꽃봉우리가 활짝 피지 않아요. 시간이 가면서 한꺼풀 두꺼풀 차근차근 조심스럽게 꽃잎이 하나씩 펴지지요.


죄인으로 태어날 때 인간은 자기가 죄인인줄 몰라요. 그런데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꺼풀 두꺼풀 내가 모르는 죄가 중첩된 겹쳐진 죄가 현실화로 나타나요. 살아가면서. 그래서 나이 많은 사람은 죄를 많이 졌고 일찍 죽은 사람은 죄를 그만큼 죄 지을 시간이 없어서 죄인이 아닌 게 아니고 시간이 없어서 죄를 적게 지은 거에요.


특히 갓난 아이는 죄 지을 시간이 별로 되지 않아서 그냥 죄인 태어난 채로 그냥 죽어요. 그렇다고 아이가 죄가 없는 게 아닙니다. 왜? 뭉쳐져 있지요. 죄 덩어리로 태어났기 때문에. 뭐 펼쳐지나 뭉쳐지나 덩어리는 덩어리거든요. 제가 어느 날 그런 이야기했지요. 모든 금은 한 개라고. 왜? 자르나 덩어리나 금은 융합이 잘돼요. 덩어리가 잘돼요.


금이 두 개 세 개가 해도 붙여 버리면 붙여지거든요. 잘라버리면 조금이라도 금이에요. 금은 양으로 다루는 것이지 개수로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처럼 우리 인간의 존재도 아담 안에 있다는 전체 단일양으로 설명해야지 너 다르고 나 다르고 그런 거 없어요.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똑같습니다. 다 육입니다. 다 죄로 말미암아 죽어 마땅합니다.


예수님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말은 인간 치고 죄 없는 인간은 없다는 뜻이에요. 로마서 8장 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이라”


아까 히브리서 7장 주님의 기도하고 이번에 로마서 8장 26절의 성령의 기도하고 또 뭐가 필요해요? 뭐가 그렇게 필요해요. 주님의 기도도 뭐 시원찮다 뭐 성령 기도도 못 믿겠다. 그럼 결국 믿을 것은 뭐냐? 내 기도만 내가 믿겠다 이거는 자기를 믿는 신자지요. “당신 누구 믿어요?” “주님 믿습니다.” “거짓말하지 말고.” “성령님 믿습니다.” “거짓말하지 말고. 누구 믿어요?” “내가 믿는 것은 내 기도 내 철야기도 내 새벽기도 나만 믿습니다.” 그게 정답이에요.


당신은 평생 동안 당신의 동질성을 믿는 거에요. 자신의 한결같음을 믿는 거에요. 자신의 변덕 없음을 믿는 거에요. 그것도 죄 지은 것도 자랑이라고 쓰레기잖아요. 쓰레기. 주기도문은 네가 필요치 않다는 기도 내용이에요. 주기도문은. 너는 전혀 필요치 않아. 네 기도를 주님이 해주실 거야 그 내용이 주기도문입니다.


그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자기 고난 받은 것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내가 굶기도 하고” 이렇게 했어요. “도적의 위협과”도 나오는데 “내가 여러 날 굶기도 했다” 했거든요. 주기도문에 의하면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 했거든요. 그러면 사도 바울은 주기도문도 못 외우는 신앙인인가요? 왜 굶어요? 일용할 양식을 준다는데.


왜 굶어요? 주여 제가 굶을 대상이 안 되잖아요. 일용할 양식 주신다면서요. 주시옵소서. 베드로가 사도 바울이 주기도문 그런 거 모를 리가 있겠어요. 베드로가 다 가르쳐줬을 거 아닙니까.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일용할 양식도 못 챙기는데 뭐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기본은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기본도 안 되는 거에요.


그게 왜냐 하면은 모든 인간은 예수님 앞에서 필요치 않습니다. 추가적 존재에요. ‘추가적 존재’. 생수 하나 사먹을려고 신용카드 했는데 기계작동이 잘 안되는가 해서 한 번 더 했더니 생수 두 병이 나왔어요. 한 개 필요 없는 게 나온 거에요. 주님이 오시면서 인간은 필요치 않습니다. 인간은 필요에 의해서 살아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뭐냐? 지금 누가 살아있는가? 다시 봅시다. 예수님이 살아있습니까? 인간이 살아있습니까? 아까 누가 살아있다고 했어요? 죽고 난 뒤에 살아있지 않으면 그건 살아있는 게 아니에요. 그건 죽어가고 있는 거에요. 분명히 해야 됩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는 살았다 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러면 예수님만 살아있는데 여기 12제자와 70인 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있는가? 주님의 역할이 있어요. 주님의 역할. 맡은 일이, 사명이 있다고요. 그 사명은 자기가 만들어낸 사명이 아니고 주님이 집어넣어준 사명이에요. 예수님의 활동의 일관성을 위해서 거기에다가 집어 넣은 거에요. 집어넣었다 이 말이죠. 여러분 국화빵 구워봤어요? 저는 구워봤어요. 밀가루 한번 확 돌리고 그 다음에 앙꼬 돌리고. 그 앙꼬. 그게 역할이에요.


그러니까 성도가 살아있는 것은 그 인간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역할을 살리기 위해서 그 인간과 인간을 사용하신 거에요. 그 주님의 역할, 주님의 역할이 살아있어야 돼. 왜? 주님이 살아있기 때문에 주님의 역할이 살아있는 거에요. 그걸 아까 누가복음 11장13절에서는 뭡니까? 너희에게 뭘 주신다? 좋은 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성령’.


성령이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주님의 영이 살아있기 때문에 주님 살아있죠. 주의 영이 살아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 영이 있는 한 우리는 살아있어야 되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있는 것을 성도는 아주 이상하게 생각해야 돼요. 이상하다 왜 안 죽지? 죄인 같으면 벌 받아 죽어야 되는데 왜 아직 안 죽지? 아하! 역할이 있구나. 내가 살아있을 만한 가치가 아니라 나한테 어떤 가치도 없어요. 역할. 어떤 역할? 주님이 주신 역할.


그러니까 주님이 가치 있고 나는 가치 없고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분명히 해야 예수님을 증거 하기 때문에. 분명히 하기 위해서. 가치 없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살아있는 겁니다. 필요 없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필요한 거에요. 이 세상에서는 인간은 필요 없습니다. 주기도문 내용에도 바로 그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면 주기도문 내용 중에 3절에 한번 봅시다. 뭐라고 되어있지요?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되어있지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한번 적어볼게요. ‘오늘의 삶은 과거를 제거한 대가다.’ 오늘의 삶은 오늘의 선물로 받은 이 삶은 주님께서 나의 과거를 친절하게 또는 부드럽게 제거해주신 대가로 오늘날 살아있는 거에요.


그러면 그게 일용할 양식이에요. 왜 밥 안 주시느냐 양식 안 주시느냐 사도 바울이 왜 굶느냐 이게 문제가 아니고 내가 여기 있다는 그 자체가 주님의 역할과 주님의 증인되기 위해서 필요에 의해서 주님은 오늘을 주시는데 인간들이 자꾸 과거하고 지금하고 연결을 시키는 거거든요.


그래서 연결시켜버리면 자기 자신이 마치 어제도 있고 오늘도 있으니까 마치 자기가 살아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니까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주님이 살아있어야 되거든요. 주님이 살려줘야 돼요. 어제 살았으니까 이제부터 내 힘대로 오늘까지 버틸께요. 내 힘으로 살아가면 안돼요. 그러면 과거에 있던 나와 오늘의 나와 연관성을 주께서 끊어줘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은 부드러운 폭력입니다. 부드러운 파괴. 파괴 없이는 창조 없습니다. 부드러운 파괴. 이렇게 보게 되면 주기도문 전체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세상을 공격할 무기가 장착된 기도. 그냥 세상을 공격할 무기 해도 괜찮아요. 세상을 공격할 무기가 장착된 기도입니다. 세상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는 거에요. 그러면 이러한 그러한 취지가 이 사실이 하나의 무기가 되는 거에요. 어떤 무기? 세상을 공격할 무기.


그러한 근거는 누가복음 9장 1절에 예수께서 12제자를 불러 모으시죠. 12제자. 12지파를 뜻합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이에요. 새로운 이스라엘이고 일용할 양식 같은 경우에는 이거는 성경 좀 본 사람은 누구나 아는 거에요. 일용할 양식은 구약에 어디 나오지요? 어디 나옵니까? 광야 나오지요. 출애굽하고 난 뒤의 광야 생활이죠. 광야 생활.


만나 이틀 치를 허락합니까? 허락하지 않습니까? 허락하지 않아요. 그 이유는 인간들이 백성이 살아있으면 안돼요. 먼저 하나님의 이름이 살아있는 조건을 할당 받는 조건하에 이스라엘이 살아있어야 돼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자립으로 나온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 주의 이름으로 나왔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 누가복음 11장 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렇게 되어있지요. 자, 이름이 뭐냐? 이름부터 알아야겠죠. 이름이란? 이 땅에 존재의 일부로 개입했다는 증거입니다. 이 땅에서는 이름을 가져요 이 땅에서는. 이 땅은 피조 세계입니다. 피조 세계는 각자 이름이 있어요.


우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시고 그냥 이름 없습니까? 이름을 지어줬지요. 뭐라고 이름 지었습니까? 아담이라고 네 출처가 흙에 속했다고 아담, 이 흙아 라는 이름을 지어줬지요. 너는 살아있지만 너는 흙에서 나왔다 그 출처를 포함시켜서 흙에서 이름을 지었죠. 이름을 지었다는 말은 그 주도권이 누구한테? 이름 지어주신 분에게 있지요.


그분이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은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어요. 이 땅은 피조세계들만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부터 해가지고 하나님께서 이름을 가지시고 나타났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지 않고 어디까지 내려오느냐 하면은 이름들로 충만한 이 세상에 본인도 하나의 이름으로 이 땅에 출현, 등장하는 거에요. 이름.


등장해버리면 이 땅의 인물로 실존, 실제로 계신 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인간들 속에 계신 거에요. 그 시작을 이방인부터 한 게 아니고 바로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하면서 그 사실을 드러낸 겁니다.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죠.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 주의 이름 빼놓고 자기들끼리 백날 단결하고 백날 왕을 뽑아서 번영하고자 해도 주의 이름이 허락하지 않고 용납하지 않고 그들을 제거해버리지요.


왜냐 하면은 그들의 모든 이름은 주의 이름에 복속돼야 되고 종속돼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각자의 이름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일종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개라고 보고 주의 이름이 아침마다 사료를 준다고 보세요. 그러면 그 개는 주인이 주는 사료 없이는 못 살지요. 한번 적어볼게요. ‘사료 없이는 못산다’. 누가 못 살아요? 개가. 결국 개는 사료 빼면 개는 못산다.


이 말은 이 백성은 원래 살 필요 없는 존재다 가 만나를 주면서 더 확실하게 규정이 되는 거에요. 확실하게. 그래서 이 양식은 소유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소유 당하고 있음을 증거하는 그게 양식이에요. 그걸 광야에서는 그걸 가지고 뭐냐 하면은 만나를 주고 그걸 양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말씀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말씀’.


그게 신명기 8장에 나오는데 한번 봅시다. 신명기 8장 3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자, 떡인데 알지 못하는 떡. 해태제과에서 생산되지 않는 파리바게트에서 만들어진 빵이 아니에요. 생판 모르는 양식입니다.


이거는 인간의 방식으로 인간이 산다는 것은 누가 포용하지 않는다? 같이 동행하는 같은 이름을 가진 주의 이름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이름이 있거든요. 엄연히 존재하는 그 분이 같은 존재자인 인간들 이스라엘 백성 존재자를 자기들 스스로 양식을 일체 허용하지 않고 주의 이름으로 주는 사료로서 먹임으로 말미암아 그들로 하여금 철저하게 오직 주의 이름의 증언, 주의 이름의 역할, 주의 이름의 증인이 되기 위한 그 목적을 달성할려고 하는 거에요.


그럼 거기에 대해서 싫으면 탈락이지. 싫으면 탈락이죠. 탈락됐다고 억울해할 필요 없어요. 왜? 원래부터 죽은 자이기 때문에 지옥 보내는 것은 죽은 자 입장에서는 별로 손해되는 거 아닐걸요. 원래 처지가 죽어있기 때문에. 죽어있다는 말을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4절에 나오지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 같이”. 나오지요? 우리를 뭐로 봅니까? 죄인으로 보지요.


여러분 죄의 값은 뭡니까? 죄가 어떤 처벌이 있지요. 그 처벌은 뭐지요? 사망이죠. 사망한 자. 사망한다는 말은 죄가 있다는 말이고 사망해야 된다는 말이고 이것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필요치 않는 존재지요. 필요 없이 생겨버린 존재. 너 자신은 필요치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는 기도, 주기도문입니다.


“너는 필요 없단 말이야 분명히 해. 너 필요 없는 걸 인정해? 인정 안 해?” “인정합니다.” 그게 주기도문이에요. 아 내가 필요 없는 존재구나. 이걸 분명히 하는 거에요. 여러분 쓰레기가 진지할 필요 있어요? 없어요? 쓰레기가. 음식쓰레기가 고민합니까? 쓰레기통에 앉아가지고 냄새나면서 어떻게 주인님을 기쁘게 해드릴까? 저 4층에 있는 아파트 주인님이 그거 듣고 이야기합니다. 너는 내가 버렸어! 내가 버렸다면 나한테 네가 진지하지 않다면 너도 너 스스로 인생에 대해서 진지할 어떤 권한도 어떤 기대도 갖지 마라 이 말이죠.


우리 인간은 진지하거나 고민하거나 할 자격 조차가 안돼요. 심각하거나. 그럴 필요 없다고요. 로뎅의 유명한 조각이 있어요. 어떤 문인데 그 입구의 조각한 거에요. 그 입구의 문 이름이 뭐냐? 지옥. 지옥문에 있던 조각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단독 작품이 아닙니다. 문에 부착된 거에요.


이거 무슨 생각해요? 아 내가 지옥가면 안되는데. 이게 얼마나 시건방진 생각인지. 네가 무슨 자격으로 네가 지옥가면 안 된다는 그 자체가 너 지옥가게 만들거야. 그 시건방진 생각 자체가. 도대체 본인을 뭘 보고. 주님이 인간 속에 끼어든 이상은 내가 나를 판정하고 평가하고 규정하는 모든 것은 죄가 됩니다. 주님한테 물어야지요. 내가 나 스스로 내가 누구냐. 이렇게 턱 괴고 앉아가지고 고민할 권한도 자격도 없어요.


요한복음 18장 38절 한번 보겠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진리가 무엇이냐고 빌라도가, 쓰레기가 주님에게 물어요. 진리가 무엇이냐. 주님께서 네가 쓰레기면서 진리를 궁금해? 네가 그걸 왜 궁금해? 그거 나한테 맡겨놔. 네가 궁금할 자격 조차 안돼 너는. 궁금해도 내가 궁금해 주님이 알아서 할 거지 네가 개입할 게 아니에요.


빌라도가 얼마나 모르는지 이렇게 해요. 아까 나의 나 다움에 국가도 포함된다 했지요. 빌라도가 이런 소리 합니다. 35절에 보면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자기가 왕이다 이 말이죠 이 나라의.


그러니까 36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절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왕은 왕인데 이 땅의 왕은 아니고 왕으로서 이 땅에 온 거죠. 왜? 공격하기 위해서 이 세상을 공격하기 위해서 오신 거에요. 예수님께서. 주기도문 자체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담은 거에요. 그리고 12제자에게 그 기도를 가르쳤고요. 왜? 12제자가 새로운 이스라엘 12지파를 대표하니까요. 그들은 나중에 12고을을 통치할 거에요. 누가복음에 보면 나옵니다. 므나 비유에서 나와요. 다섯 고을 열 고을 이렇게 12지파가 나와함께 12세상을 통치하리라. 잘 나서가 아니라 역할을 맡은 거죠.


다시 신명기 8장을 돌아가봅시다. 그러니까 신명기 8장에서 짜장면이나 짬뽕, 탕수육 그런 거 찾지 마세요. 광야에서. 그러면 왜 주님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에 광야를 경유하게 하셨는가? 좋은 길 있거든요. 지중해로 가는 길 있어요. 그 길 말고 사람이 살 수 없는 길로 이끌었어요. 그것도 몇 년 동안? 40년 동안 이끌었어요.


그것은 바로 약속의 땅은 너희의 땅이 아니다 이 말이죠. 네가 산다는데 의미 있는 게 아니고 내가 너희들을 데리고 주의 이름이 살 땅이 약속의 땅이에요. 우리가 사는 것은 주의 이름에 종속된 조건 하에 사는 거에요. 그걸 언약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주의 이름이 하실 일은 출애굽기 6장에도 나오고 3장에도 나오지만 나는 나 스스로 있는 하나님이라고 소개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내가 그들에게 언약을 주었다” 그 약속을 주님께서 주신 약속을 다른 인간들이 손을 댈 수가 없어요. 그냥 역할은 있지만 본인이 이루는 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 언약을 이루실 때에 어떻게 이루느냐 하면은 바로 죄인 된 아브라함 죄인 된 이삭 죄인 된 야곱을 가지고 하시는 이유는 바꿔치기 하기 위해서 하는 거에요. ‘바꿔치기’. 주기도문은 바꿔치기를 이미 해버린 상태 그 이후의 할 기도가 주기도문이에요. 이미 바꿔치기가 완료되었어요. 주님의 나라로 완료되었을 때에 우리의 존재, 우리라는 것은 성도입니다.


양식이 있는 사람. 만나라는 양식 또는 누가복음 11장 18절에서는 뭘 받은 자? 좋은 것 뭘? ‘성령을 받은 자’. 성령을 받은 자에 있어서의 이 세상은 진지하지 않아요. 우리가 고민하거나 심각하거나 진지할 필요 없습니다. 모든 진지와 심각은 나의 나 됨, 되도 않는 자기 주제 파악도 못하고 괜히 심각한 거. 지옥 갈 인간인데 심각하면 무슨 소용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joke. 세상의 모든 것은 뭐냐? 농담이 되는 겁니다. 주께서 승리하고 난 뒤에는 죄에서 승리하고 난 뒤에는 악마의 세계는 네 자로 하면 그냥 ‘웃음거리’에요. 이걸 세 자로 하면 ‘코미디’. 개그콘서트. 왜 개그콘서트가 그 프로가 종영됐느냐 하면은 정치판이 더 개그적이기 때문에. 재미가 없어서. 실제가 더 개그인데 뭘.


그래서 성도는 뭐냐 하면은 농담으로 보면서 세상을 떠나면 돼요. 이 세상을 히죽히죽 웃으면서 또 너무 웃으면 미친 사람 되니까 세상에 일어난 모든 일은 웃고 넘길 일이에요. 전혀 진지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이 기도대로 우리에게 응답이 되어버리면 우리 자신은 해체가 되면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조크만 나오는 거에요. 코미디만 나오는 거에요. 그냥 호호 웃지요 뭐.


“너 성도로서 한 평생 어떻게 살았어?” “그냥 웃었어요.” 뭐 진지할거 있어. 나의 꿈과 희망과 이상이 없는데 무슨 진지할 게 있어요. 내가 달성할 목표가 없는데 뭐가 진지할 게 있어요. 이미 죽은 자인데 죽은 시체가 자기를 격려해가지고 무슨 하늘의 별을 따겠다는 겁니까 뭡니까.


어떤 중풍병자 친구 네 명과 중풍병자가 아주 심각하게 병 낫겠다고 본인 딴에는 너무나 심각하게 순서표 안 지키고 지붕 뚫고 막 내려왔어요. 중풍병자 낫게 해달라고. 주님께서 그 인간 죽여버렸습니다. 그리고 살려주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죄, 그 낫겠다는 병을 낫는 것이 너한테 진지하게 여기는 그 인식, 사고방식. 그것을 죄라고 규정해서 죽여버리고 그리고 그 죄를 살려줬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죄 사하는 것은 하나님만 하실 건데 왜 네가 하느냐. 일어나 걷는 것보다 죄 사함이 어느 것이 더 최종적이냐? 더 어려우냐? 더 놀라운 사실인가. 그까짓 거 중풍병 낫는 것보다. 첫째 시간 마치면서 이거 하나 기억하세요. 단순한 반복은 나를 배신한다.


기도 응답 받고 기도 또 하고 기도하고 본인의 기도가 배신당했어. 단순한 반복은 나를 배신한다. 남편이 뭐 한 짓이 있는지 아내 사랑한다고 뭐 선물 사줘도 다시는 이런 짓 안 할게 하면서 선물했다. 그것도 반복해요 안 해요? 또 배신하는데. 단순한 반복은 결국 우리를 배신합니다. 여러분들이 스스로 얼마나 배신했는지 10분 동안 한번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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