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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11 21:07:12 조회 : 78         
안양20220519b슥12장8절(보증자)-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175.212.135.128)
안양20220519b슥12장8절(보증자)-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이사야44장26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그의 종의 말을 세워 주며 그의 사자들의 계획을 성취하게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거기에 사람이 살리라 하며 유다 성읍들에 대하여는 중건될 것이라 내가 그 황폐한 곳들을 복구시키리라 하며” 그렇게 되어있지요. 황폐한 곳이 되게 해놓고 그 다음에 복구시킨다. 예루살렘이 황폐했다는 말은, 크게 쓰겠습니다. 예루살렘은 패배했다. 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이 패배했다는 것은 더 크게 쓰겠어요. 악은 꼭 이 세상에서 승리해야 됩니다. 악이. 악은 끝내 이기리라. 되어야 돼요. 악이. 죄가. 이걸 모르면 우리는 현실을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은 악이 승리하게 되어있고 전체를 다 접수하고 점령하게 되어있어요. 광주사태 일어났을 때 그 신부들이 막 노래를 부르는 중에서 하나님은 뭐하십니까? 하나님은 벙어리 하나님, 혀 잘린 하나님, 이렇게 악이 횡령한데 하나님은 왜 그냥 방치하십니까? 그런 노래가 나왔어요. 그 사람들은 지금 예루살렘을 몰라서 그래요. 악은 반드시 승리해야 돼요. 꼭. 반드시. 어디 뭐 기쁘지 않습니까.

자기가 구원받았다 해놓고 자기가 승리하겠다 하는 것은 지금 두 개를 같이 쥘 수 없는 것을 두 개를 같이 쥐려고 하는 욕심쟁이 우후후! 욕심쟁이에요. 욕심쟁이. 이건 서로 안 맞는 걸 다 쥐려고 하는 거예요. 구원을 받겠다고 하면서도 자존감은 자존감대로 챙기겠다. 무슨 그런 구원이 있어요. 세상에 그런 구원 없어요. 한 쪽을 내놔야 돼요. 자존감이 뭉개지던지 아니면 악의 편에 서서 끝내 이기던지 그래야 됩니다. 그러니 우리의 인식에 문제가 있지요. 나는 내가 속한 집단, 내가 속한 소속은 반드시 이겨야 돼! 내가 응원하는 단체는 반드시 이겨야 돼! 그 자체가 예루살렘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공한 게 돼요. 이래서 주님이 우리를 떠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승리한다. 내가 승리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 속에 주님의 아픔이 들어오면 안 돼! 라는 뜻이에요. 철통수비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이 나한테 그저 좋은 것만 줘야 되지 주님이 나를 아프게 하는 거라면 주님이라도 나는 사양하겠습니다. 거부하겠습니다. 이리 되는 거예요. 수요일날 그렇게 설교하고 복음 이렇게 해도 막상 이 이야기 딱하니까 음찔하지요. 그러니까 쓸데없는 내부의 끙끙이는 용납 안 됩니다. 이게 12장의 제목을 단다면 예루살렘의 구원이에요.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이렇게 내가 아는 예루살렘은 파멸되고 내가 모르는 예루살렘은 그 파멸위에 등장한다. 이 이야기입니다. 이게 바로 구원이에요. 왜 우리가 구원받아야 되느냐 하면 이미 내가 챙기고 싶고 내 탐심이고 내 욕망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내가 아는 예루살렘이 반드시 유지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내가 알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알기 때문에 내가 익숙하기 때문에 내가 원한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기 때문에.

제가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쓸 테니까 여러분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를 보세요.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 두 번째 문장은 방울을 고양이 목에 다는 것. 시작을 모르고 결과만 본 사람 같으면 이것이 똑같은 결과라고 생각들 거예요. 고양이에 방울이 없다가 뭐가 딸랑하고 쫓아다니니까 저건 고양이 목에다가 방울을 달아줬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이게 방울이 아니고 이게 다이아몬드라면 주인이 고양이 목에 다이아몬드를 달아준다면 다이아몬드를 그 주변사람들에게 돌아다니면서 자랑질하려고 고양이 목에 다이아몬드를 딱 달아가지고 가는 곳마다 다이아몬드가 고양이에 따라서 이동하는 거예요.

그러면 고양이가 빛나겠어요? 다이아몬드가 빛납니까? 다이아몬드가 빛나지요. 누가 그것을 다이아몬드에다가 고양이 목에 단다고 누가 이야기하겠어요. 이게 바로 예상 밖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예루살렘은 내가 너를 위해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그 성전이 있는 곳이에요. 그걸 누가 부숩니까. 하나님 본인이 부셔요. 그건 인간이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갈수록 점점 더 잘 되는 것이라는 인식이 우리 인간에게 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 자신이 점점 더 나아지고 발전되기를 원하는 그러한 마음으로 장착되어있기 때문에 중무장되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제가 옛날에 취직이란 걸 해봤어요. 지금부터 197십 몇 년도에 취직을 해봤거든요. 79년도인가 취직을 해봤는데 42년전에 취직을 해봤는데 월급이 십칠만원이었어요. 약간은 당황스러웠어요. 내가 뭔데 이리 많이 주느냐는 거예요. 십칠만원을 30으로 나눠보니까 하루에 오천원이에요. 엄청난 돈이에요. 자장면이 오백원쯤 되니까. 엄청난 돈을 주는 거예요. 그 때 교사 월급이 그만큼 됐었어요. 너무 많이 준다는 생각이 몇 개월 갔겠습니까. 십칠만원에서 이십만원 그 다음에 점점 오십만원 나중에 세월가면 점점 더 많아지는 거예요. 절대로 만족함 못합니다. 남들은? 이 나이에? 남들은? 이 나이에? 내 동창생은 얼마에? 다른 친구들은 얼마 버는데? 계속 올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한달에 천만원 벌다가 한달에 한 구백오십만원 벌면 이건 뭐 비상 걸렸어요. 망했다. 망했다. 망했어. 끝났어. 나는 끝났다. 세상에 오십만원. 물가가 4%증가했는데 이게 뭐야? 마이너스가 뭐야? 이건 내가 나를 용서 못해. 내가 그것밖에 안 되는 거야. 그런 식으로 막. 나 왜 이렇게 비참하게 살아가는 거야. 이런 식으로.

남편이 처음 월급 받아줄 때는 아내가 이렇게 합니다. “당신은 월급 생각하지 마. 내가 당신 몸 건강하게만 있어주면 나는 당신한테 더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중에 취직하고 난 뒤에 돈 벌어와! 돈 안 벌어오면 집구석 들어오지 마! 우리 마음이 왜 그런 거예요? 우리는 이미 우리 내부가 디벨롭 자꾸 열리는 거예요. 나도 모르는 욕심과 탐욕이 시간이 진행되면 될수록 이게 계속해서 뚜껑 열리듯이 계속해서 이게 샘물 터지듯이 터져 나오는 겁니다. 수습이 안돼요. 내가 감당을 못한다고요. 뒤로 돌아갈 재간도 없고 방법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요. 우리의 욕망이 그렇게 가만히 방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가랴12장에서 주께서 원하는 건 이겁니다. “너가 쫄딱 망해봤나?” 이걸 묻는 거예요. 니가 쫄딱 망해봤나? 망함의 망함이 뭔 줄 경험해 봤어? 못했지? 내가 해줄게. 내 백성들아. 이러는 거예요. 내가 해줄게. 하~~. 그러니까 이건 예루살렘 불타버리고요. 나머지 전부 다 하여튼 성읍에 있는 거 다 불타버려요. 에스겔에 나오는데. 수련회 때 할 이야기고요. 모든 예루살렘의 것은 전부다 다 무너집니다.

이사야44장26절 아까 보셨잖아요. 하나님께서 거기 누가 있었나, 아무도 없어요. 예루살렘을 텅텅 비게 만들었어요. 비게 만들고, 황폐하게 만들고, 예루살렘은 살 곳이 못 된다는 것을 누구도 다 분명하게 해놓고 그 다음에 그곳에 살아라. 누가 살겠습니까? 아무도 안 살지요. 살게 해주시는 거예요. 마음이 낮은 사람들이 살게 해주시는 거예요. 자신의 죄를 아는 사람만 살게 하시는 거예요. 이곳이라도 우리한테는 과분합니다. 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게 하시는 거예요. 이게 구원받은 자의 태도입니다. 마음자세입니다.

그 때 내가 알던 예루살렘이 아니에요. 새로 마련해준 예루살렘. 그 예루살렘에 들어가려면 우리 자체가 예루살렘하고 똑 닮아야 돼요. 뭐냐, 우리 마음이 황폐해져야합니다. 내 욕심에 스스로 실망해야 돼요. 내 욕심에 실망해야 돼요. 그러면 그걸 인간적으로 하라 하세요. 인간적으로 못합니다. 자, 이 못하는 이유를 열왕기상18장 가지고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제 수요설교 때 설명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되어가지고 이걸 오늘 안양강의로 이렇게 이야기하도록 제가 생각해 봤습니다. 열왕기상18장19절,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 450명 그 다음에 아세라 선지자 400명 바알과 아세라는 부부관계라 했지요. 이러한 제사장들이 이렇게 많은 것은 그게 전부 다 민간 신앙을 아합왕이 인정했기 때문에 그래요. 민간신앙을 그들은 다 포섭을 하고 인정해줬기 때문에 너도 나도 여기에 다 더한 거예요. 고객들이 있으니까 장사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나와 있는 겁니다.

850명되니까 여호와 선지자는 몇 명입니까? 달랑 한 명이에요. 850:1입니다. 한 운동장에 모아보세요. 한 명은 찾을 수도 없어요. 850명이 얼마나 많은 숫자입니까. 150명 있으면 천명이잖아요. 천명되는 사람 앞에 한 사람 족집게로 못 뽑아내요. 통계상으로 무시해도 되는 겁니다. 평균값에 들어갈 영향도 못 미쳐요. 주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엘리야도 이걸 알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만 남았습니다. 이런 고백을 하게 만들었어요. 나만 남았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나만 남았다는 이 말은 쉽게 말하면 없음이에요. 없음. 없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하나를 남겨둔 거예요. 없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흔적은 없다. 없다를 강조하기 위해서 하나만 있다가 아예 없다 보다도 하나만 있네가 더더구나 강조가 되는 거예요. 우리 외손녀가 외국에 있다가 한국에 초등학교에 한달 동안 입학했거든요. 입학했는데 입학하자마자 시험을 치는데 얼마나 공부를 시켰는지 시험을 치는데 시험 치는 문제를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원기둥을 딱 그려놓고 다음 물건 중에 원기둥과 같은 도형의 이름을 쓰세요. 이렇게 하니까 무슨 뜻인지 몰라가지고 아는 것은 이름을 쓰세요. 알아가지고 변아민 지 이름을 쓴 거예요. 담임선생님이 뭘 묻는 줄을 모르니까 다 그어버린 거예요. 옛날 같으면 죽죽 그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아요. 맞는 것만 하고 나머지는 세모로 해가지고 마음에 상처 안주려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오 은영 박사한테 배웠는지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틀렸다 맞다가 뭔지를 몰라요. 자기 인생 자기가 살면 되니까요. 와가지고 제 아내가 하는 말이 “아이고, 어머나 맞는 게 없네. 세상에 맞는 게 있네. 세상에.” 이게 얼마나 긍정적 마인드입니까. 맞는 게 다 있느냐. 이건 아주 강조하라고 있는 거예요. 지금. 다 틀렸다는 것은 강조하는 거예요. 어떻게 맞는 게 있지? 이상한 일이네. 어떻게 오늘날 성도가 있지? 이건 신기한 일이네. 그 신기함을 스가랴가 예언하고 있는 거예요. 이건 없어야 합당해요. 성도가 없어야 되는데 이게 왜 있지. 그게 놀라라는 이야기에요. 성도가 있다는 점에 놀라라는 이야기입니다.

엘리야 하나가 남아서 엘리야가 하는 이 없음을 뭐로 이어지느냐 하면 심판으로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있음을 심판하는 분이 너희들 보기에 없는 여호와께서 그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제단을 쌓아요. 제단을 쌓았는데 돌 제단을 쌓아놓고 여기다가 송아지를 놓았잖아요. 송아지를 놓고 난 뒤에 먼저, 열왕기상18장26절부터 제단 죽 나옵니다. 제단을 쌓아놓고 여기다가 송아지를 얹어놨어요. 그러면 지금 850명의 우상 숭배자들있잖아요. 그럼 여호와는 있어요? 없어요? 그들에게는 여호와는 없어요. 그러면 그들은 바알신이 있지요. 그럼 여호와가 없다가 뭐냐 하면 여기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바알신은 여기에는 없습니다. 왜 없느냐 바알신은 있잖아요. 850명 있잖아요. 여기는 없잖아요. 그러면 이걸 없애는 방법은 뭐냐 여기서 뭐가 나와야 이게 다 없어집니까? 뭐가 나와야 없어집니까? 불이 나와야 되지요. 불이 나와야 없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엘리야가 이들을 불사르는가, 아니에요. 엘리야 본인도 없음이 나와야 돼요. 뭐 없음? 엘리야는 심판권이 없음. 그럼 엘리야에다가 거기다 뭘 넣는가? 물을 3통을 집어넣어버려요. 물이 철철 흘러요. 그러니까 심판할 수 있는 어떤 재료도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물이 흐른다. 지금 이 제단에서 일어나는 물 붓는 행위, 송아지 걸치고 물 붓는 행위, 이 모든 행위는 여호와께서 이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행하는가 여호와 자신의 행함을 제단을 통해서 보여주고 계시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 고기해놓고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없어지는가 한 번 보자. 라고 문제를 던져놨잖아요. 문제를 던져놨는데 거기에다가 엘리야가 뭐라고 합니까? 불과 상극이 되는 물을 부어버려요. 그것도 조금, 폼으로 부었습니까? 도랑이 넘치도록 부었습니까? 도랑이 넘치도록 부었지요. 나중에 불이 나타나는데 도랑에 넘쳤던 물을 무엇이 다 빨아 당겨 버려요. 불이 다 핥아 없애버려요. 그리고 이들을 다 죽여 버립니다.

있음과 없음을 바꾸는 거예요. 바알과 아세라가 있다는 말은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계시는데 하나님이 없는 게 아니고 심판의 하나님으로서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바알과 아세라가 승리하게 해야 되는 거예요. 그들이 이겨야 되는 거예요. 엘리야 눈에도. 자기도 없음이 되어야 되니까. 만약에 엘리야가 “야, 나만 남았고 다른 사람은 없네.” 이리 되면 엘리야는 본인이 없음이 아니고 뭐가 돼요? 있음이 되어 숫자로 850:1이 된다니까요. 주님께서는 850:1이 되는 게 아니고 주의 뜻은 850:1이 아니고 850:0이 되어야 돼요.

그래야 엘리야 본인의 일이 아니고 이 일이 무슨 일이다?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해서 엘리야는 1이라는 숫자로 겨우 등장했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악이 이 세상에 필히 이겨야 된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에요. 결국은 세상은 하나로 통째로 한 통속으로 세상이 이겼습니다.

그게 요한계시록12장11절에 나옵니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이겼다 해놓고는 그 이긴 모습이 뭡니까?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거예요. 죽은 거예요. 죽음이 이긴 거예요. 이게 세상 사람들이 보면 어처구니없는 어떻게 보면 자기 위로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너무나 내세울 게 없었으면 어떻게 지 죽는 것을 이겼다고 표현하느냐, 아이고 안타깝다. 측은하다. 이리 나올 거예요. 그리고 가차 없이 죽음 속으로 내보냈던 것은 세상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 물어봅니다. 죽이는 자가 이겼습니까? 죽는 자가 이겼습니까? 그 이야기에요. 세상에서는 죽이는 자가 이기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 세상 사람들한테 죽임을 당함으로서 이긴 거예요. 죽지 아니하면 부활의 이김이 없으니까. 아이고, 여러분, 퍽이나 위로가 되지요. 사업하다가 망했잖아요. 주여, 이기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얼마나 망가졌으면 그런 식이라도 위로하려고 우리가 보는 우리가 애처럽다 할 거예요. 그러니 제가 이렇게 하는 말은요, 어느 누구도 이 스가랴 예언대로 지키고 말씀을 지키는 위인은 없다는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가만히 있어보세요. 여러분들을 바꿔 줄 거예요. 여러분들이 바꿀 수가 없어요.

마지막 남은 게 남한테 안 지려고 하는 오기만 남았는데. 이제 오기라는 말을 바꿔야겠어요. 가오만 남아요. 가오만. 강수연 때문에 바꿔. 마지막 가오만 남았는데 돈이 없지 우리가 가오가 없습니까. 우리는 돈도 없고 가오도 없어요. 돈도 없다는 강수연이가 180억이 있다고 하는데 많지요. 어떻든간에 사람들은 뭐든지 없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뭔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자기 성도를 기어이 없음으로 발로차가지고 없음으로 자꾸 집어넣어버리는 거예요.

거의 20년전인가 와룡산에 놀러갔던 일곱애들이 개구리소년애들이 집에를 오지를 않아요. 다음에 보니까 다 죽었어요. 애가 죽었다 말이죠. 왜 죽었는가 해서 범인을 찾아도 범인이 없어요. 저체온증으로 죽을 가능성이 있다. 또 그 소리해가지고 애 부모들한테 욕 되게 얻어먹고. 수사했던 사람이 이건 추워서 죽었다. 이리 이야기하는데. 어쨌든 애들이 갔는데 돌아올 시간에 애가 안 들어오지요. 그러면 부모입장에서는 뭐냐 어제까지 있더라도 그건 어제 이야기고 오늘의 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럴 때 부모들은 안타까워도 어쩔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지금 예루살렘가지고 그렇게 다루시는 거예요.

얼마 전까지 예루살렘이 건재하다 지금은 예루살렘이 텅텅 비어있는 거예요. 없어요. 거기 살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살게 하겠다. 회복하겠다. 내가 거기다 주민을 두겠다. 하는데 여기 주민들을 살게 하고 회복하겠다. 하면서 어떤 사람도 예루살렘을 떠난 자가 자력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은 여기서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돌아오느냐, 돌아오는 건 누구 몫이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어떻게 하시느냐 하면, 악이 승리하게 만들어요. 악이 승리하게 만듭니다. 악이 승리하게 만들어버리면 그들은 예루살렘에서는 뭐하게 하느냐 하면 실망감이 대단하겠지요. “아휴! 하나님만 믿어도 아무짝도 소용없구나!” 그렇게 하겠지요. “정말 하나님 믿는 내가 바보지. 믿을 걸 믿어야지. 세상처럼 돈과 힘을 믿어야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 아무 실효도 없는 내용도 없는 그걸 왜 허풍선이 같은 걸 내가 왜 믿었지. 참 후회된다. 그래 이 참에 그만 떠나버리자.” 이러면 여기서 주께서 증명하는 것은 아무도 예루살렘을 채울 수 없다가 되지요. 주께서 의도적으로 그걸 노렸던 거예요. 아무도 없어요. 세상은 역시 강한 자, 불신 자 이방인이 강해요.

그런데 여기에 누가 오시는가 누가복음13장 32, 33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스가랴와 관련되어있습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여기에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한다 할 때에, 중요하니까 잘 들으세요. 집중해서. 예수님 본인이 쫓겨가는 원주민 역할을 본인이 몽땅 다 짊어지십니다. 그러니까 사람 탓을 하지 않아요. 인간은 원래 돌아갈 재주도 없고 구원받을 권한도 없어요.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하나님 백성 역할을 본인이 담당해요. 33절,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누가 원하지 않는가? 예루살렘을 지키고자 하는 자가 예루살렘이 완성되는 것을 그들은 원하지 않는 걸로 그렇게 주님께서는 그들을 일방적으로 해석해버린 겁니다.

왜 예루살렘 주민들은 예수님을 싫어하느냐 하면 내 식대로, 내 방식대로, 나에게 어떤 아픔이 없는 상태로 예루살렘 주민으로 계속 꾸준하게 가고 싶은 거예요. 쫓겨남이 없이 철저하게 망함이 없이 그냥 가고 싶은 거예요. 따라서 그 예루살렘 주민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해요. 둘 다 아담의 자손이니까. 니 마음이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니 마음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비난하거나 왜 믿음이 없느냐고 다구칠 쨉이 못 됩니다.

문제는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주민을 채우는 일은 인간 선에서는 끝났어요. 어느 인간도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주님께서는 확정해 보여주는 방법입니다. 그 방법이 뭐냐, 예루살렘 주민들아, 나를 떠밀어라. 나를 밀어보라. 예수님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확정짓고 나를 밀어버려.

33절에,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오늘과 내일과 모레, 바로 모레라고 하면 되는데 내일 모레는, 서서히 하루, 하루, 하루가 가는 방향을 보라는 거죠. 여기 3일이잖아요. 3일이니까 예루살렘에서 3일동안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너희가 목격하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 자체가 갖고 있던 그 의미가 하나는 내 탓이고 초월하는 식으로 또 하나는 세상 식으로 둘을 구분지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은 내가 살던 고향이에요.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내가 살았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 의미가 듬뿍 담겨있기 때문에 그 의미에서 자기가 발을 못 빼는 거예요. 자기의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자기를 뺄 수가 없습니다. 너무 아까워요. 예루살렘 재개발하는 게 싫어요. 왜? 내 동네 골목이 다 없어지니까. 그래서 예루살렘이 무너진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 주민들이 싫어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합니다. 이게 예루살렘이 아니고 이게 성전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거 알아들을 사람 아무도 없어요. 인간은 고집이 있어가지고 자기가 살았다는 그것 때문에 내 것이 삭제된다는 것은 본인의 자존감 때문에 용서할 수가 없는 거예요.

어떤16세쯤 됐는가 어떤 소녀가 밤에 잠을 자면 자꾸 아버지가 떠오른다는 거예요. 잠만 자만 아버지가 자꾸 떠올라가지고 상담 받으러 누구한테 가느냐 하면 서장훈한테 갔어요. 무엇이든 물어보살한테 갔어요. 아버지가 자꾸 떠오르는데 어쩜 좋습니까? 오기 전에 무당한테 갔답니다. 무당한테 가니까 아버지가 지금 저승에 가지 못하고 구천에 떠돌면서 너가 있으니까 이건 돈 좀 수백만원 들여가지고 굿을 해야 아버지를 편히 모신다. 그 이야기하는데 그 이야기가 맞습니까? 순진하기도 되게 순진해요.

그러니까 그걸 듣고 서장훈이가 “내가 아버지다. 너를 만나고 싶다.” 이렇게 하니까 그 소녀가 “에이~ 서장훈이면서.” 이러지 않고 막 우는 거예요. 아버지! 아버지! 이러면서 그러니까 정신 차려라! 그러니까 지금 그 소녀는 자기의 자아성을 아버지의 추억과 더불어서 자기가 이렇게 구성을 해놓은 거예요. 아버지가 개인택시 했는데 개인택시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말이죠. 죽어버렸으니까 이 마지막 대목을 다 메우지 않으면 본인이 내가 아닌 거예요. 내가. 아버지가 있어야 그게 나에요. 아버지가 없는 나는 그 전에 상상도 없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나는 나의 추억으로 채워지는 게 아니에요. 외부의 타인의 추억으로 뚝배기 비빔밥 안에 섞어져 있는 거예요. 따로 이거 재끼고 이거 뽑아낼 수 없어요. 부부라는 게 세월가면 그리 돼요. <임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백날 우는 이유가 좋으나 미우니 같이 섞여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심지어 강아지 죽어도 그렇게 우는데.

그러니까 이 소녀는 아버지를 찾는 게 아닙니다. 잃어버린 나를 찾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는 그냥 텅텅 비어있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 전체의 반 토막 난 것부터 새로 이것을 메워나가야 돼요. 공부를 하던지, 다른 취미를 하든지. 어제는 어제부로 끝났잖아요. 다시 과거로 못 돌아갑니다. 지워졌어요. 중요한 것은 현재. 현재 내가 반 토막 났다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하고 싶은데 자꾸 잠을 자니까 그래서 물었어요. 잠을 몇 시간 자느냐? 하루에 11시간 잔다는 거예요. 잠 좀 줄이라. 그게 해결책이었어요. 잠을 줄이면 아버지가 떠오를 수가 없지요. 잠을 줄이면. 하여튼 11시간 자가지고 뚱뚱해.

모든 인간은 과거가 발목을 잡습니다. 과거에 내가 이렇게 잘 나갔는데. 이렇게 뛰어났고, 과거에 이렇게 희망이 있었는데, 왜 앞일은 암담하냐 이런 식으로. 자꾸 사라진 과거가 자꾸 발목을 잡는 거예요. 그건 누구 탓이 아닙니다. 본인이 이 없어진 부분을 마치 지금의 환상처럼 본인이 이걸 놓지를 못하는 거예요. 예루살렘을 망하되, 아무리 예루살렘이 망해보고 불타버렸어요. 예루살렘은 어떻게 됩니까? 예루살렘을 도로 회복하려해요. 스가랴에 말씀하셨잖아요. 사람 산다고 했잖아요. 이방인들을 쳐부수고...,

예루살렘을 망할 때, 예루살렘은 바벨론 제국에 포위되어서 망했잖아요. 아주 버려둔 거예요. 그럼 바벨론 다음에 헬라가 오지요. 로마오지요. 계속 예루살렘이 방치되어 있는 겁니다. 예루살렘 자체가 계속 이방 힘의 권력이 거기서 상주하고 있으니까 예루살렘 이것이 다시 회복될 수가 없는 거예요.

스가랴 내용이 이래요. 진동이 일어나가지고 예루살렘 자체가 외계인 UFO도 아니고 사람들이 UFO를 사진을 팍팍 찍었는데 갑자기 UFO가 자동적으로 엔진 걸려가지고 비비빅 하늘로 가는 식으로 그렇게 된 거예요. 진짜 요한복음2장에 나오는. 이 46년간 지은 성전을 헐어버려라. 내가 사흘만에 짓겠다. 사흘만에 짓겠다는 말이 뭐냐, 해설도 붙여있어요. 이는 부활하신 예수의 육체를 위함이라. 이리 되어있다고요.

아까 디벨롭 다시 해봅시다. 성전 자체가 이게 인화지인데, 아직까지 그 이미지가 몽땅 다 나타나지를 않았어요. 성전 건물은 건물로 보이지 그 안에 예수님의 부활하신 육신이 성전이라는 게 안 들어있어요. 예수님은 이제 그걸 서서히 보여주려 하는 거예요. 보여주는데 뭐가 필요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몸만 필요해요. 예수님의 몸만 필요하다. 이제 여러분이 알기 쉬울 거예요. 예루살렘은 없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주민도 없다. 이게 먼저 성립되어야 돼요. 예루살렘 자체가 없어요.

예루살렘이 없으니까 회복도 복구도 없는 겁니다. 스가랴를 그렇게 해석해야 돼요. 지금 이 스가랴12장 보고 예루살렘이 벌벌 떨게 되면 그 예루살렘을 지배했던 그 여러 가지 이방민족이 그걸 다 떨쳐버려요. 다 떨어져 나가고 그 예루살렘을 얻고자 하는 유다백성들이 12장 이야기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이방인들을 쳐부수고 이게 우리나라의 성지야. 라고 그걸 다시 빼돌리는 그날이 와서 그게 6절에 나와요. “그 날에 내가 유다 지도자들을 나무 가운데에 화로 같게 하며 곡식단 사이에 횃불 같게 하리니 그들이 그 좌우에 에워싼 모든 민족들을 불사를 것이요” 12장 6절에 나오지요. 보고 계시지요.

예루살렘을 이렇게 “이건 우리거야.” 쥐고 있으니까 예루살렘을 쥐고 있으니까 그 근처가 유다 땅이잖아요. 유다에 있는 백성들이 유다지도자들이 일어나가지고 “어디에 우리 건데 감히 너희들이?” 쳐버렸잖아요. 불지르듯이. 불질러버리고 “아이고, 귀한 거 예루살렘.” 그걸 회복하는 식으로 예루살렘을 그 다음에 17절에 보면, 예루살렘의 영광을 얻게 하는 거예요.

그게 유대장막으로서의 다윗의 영광과 예루살렘 주민의 영광이 유다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날에 먼저 유다장막을 예루살렘을 건지고 그 예루살렘에서 그 다음에 그걸 다시 다윗의 영광으로 일을 진행시키는 겁니다. 옛날의 구약 때처럼 그렇게 하는 거예요. 9절에 보세요.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이방 나라들을 그 날에 내가 뭐한다? 멸하기를 원한다.

그러니까 이 일을 유다뿌리에서 난 유다지파가 영광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너희들이 회복하고자 하는 유다장막과 예루살렘의 영광도 진짜 나타나는 유다지파의 영광 다윗지파의 영광보다는 못하다 하는 거예요.

그러나 어쨌든 간에 이 이야기는 누가 봐도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게 전부 다 파괴됐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스가랴를 통해서 위로하는 것처럼 들리지요. “조금 있어 봐! 하나님께서 너희들 유다지도자들 동원시켜가지고 그들 이방인을 부셔가지고 오게 되면 유다지파의 영광을 회복할 날이 올 거야.” 누가 그렇게 봐도 그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아까 보았던 누가복음13장 보세요. 그 이방민족이 누구에요? 예루살렘을 죽이고자 하는 그들이 뭡니까? 예루살렘을 방해하는 자들이 되지요. 왜? 예수님이 누구한테 돌아가셨는데요? 그 스가랴12장 있는 사람들한테 돌아가셨잖아요. 유다지파한테 돌아가셨잖아요. 유대인들에게. 유다지파가 유대민족입니다. 유대민족이 결의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로 확정지었잖아요.

그렇게 되면 드디어 성전하고 유대민족의 기다림하고는 관계 있다? 없다? 완전히 관계 끊어졌지요. 그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예요. 주께서 일을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구원받고자 하는 자와 성도와 관계있다? 없다? 완전히 의도적으로 끊어놔요. 끊어놔야 구원 안 받은 내가 예수의 덕분으로 구원받은 그 영광보다 구원시킨 예수님의 영광이 더 크다는 것을 나중에는 알게 되기 때문에 그래요.

복음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꼼수를 발휘 안할 수가 없어요. 예수 십자가 믿으면 구원받습니까? 예. 내가 그동안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했는데 이제는 믿음으로 구원받겠습니다. 이거 다 쓰잘데 없는 꼼수입니다. 지금 뭐가 빠졌어요? 주님의 아픔이 빠졌어요. 주님의 아픔은 뭡니까? 예루살렘의 회복을 기다리는 그 백성들로부터 주님이 추방당하고 주님이 미움을 받아서 죽게 되는 그 아픔. 그 아픔이 삽입되지 아니하면 예루살렘 주민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의 회복을 기다리는 자들이 유대민족이고 헤롯이라는 사람이 있거든요. 유대민족의 통치자. 예수님이 오실 때 통치자인데 이 사람이 뭐냐 하면 에돔사람이에요. 에돔사람. 유대인이 아니에요. 왕이 되고 난 뒤에는 유대인들에게 인심을 얻기 위해서 거대한 성전을 세웠는데 그 성전이 뭐냐, 헤롯성전이고 그 헤롯성전이 지금 예루살렘의 서쪽 성전 벽이 남아있습니다. 그게 통곡의 벽이에요.

인간들이 끄집어낼 수 있는 한계를 예수님 당시에 유대민족이 다 보여준 거예요. 우리가 원하는 설계도, 우리가 기대하는 원하는 과거의 영광을 예수 당신이 우리에게 들어주지 아니하면 나는 당신을 예수 당신을 쓸데없는 자로 죽여버리겠다. 그래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거예요. 이것은 오늘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오늘날 예수님이 우리가 우리를 구원해주면 예수님 믿어줄게요. 잘 섬기겠습니다.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자, 마지막으로 이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12장4절,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모든 말을 쳐서 놀라게 하며 그 탄 자를 쳐서 미치게 하되 유다 족속은 내가 돌보고 모든 민족의 말을 쳐서 눈이 멀게 하리니” 이렇게 되어있지요. 이방민족들이 유대민족한테 공격을 받는데 그들이 공격받을 때 눈이 멀다 했지요. 말이 눈이 멀고, 그들이 눈이 멀어지게 돼요. 지금 이 예루살렘은 없다고 이야기했지요. 예루살렘 주민도 없고 예루살렘도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그러면 지금 없는 이 유다민족 예루살렘 회복을 기다리는 유다민족이 있잖아요. 이 있음과 없음 사이에 누가 들어왔습니까? 예수님 자신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는 유다족속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맹세에 의해서 주어지거든요. 맹세 그 자체고, 약속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이 딱 들어와 보니까 유다민족들이 이스라엘 회복하는 것을 원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살해당한 거예요. 그들이 구원을 원했기 때문에 구원자가 죽은 겁니다.

이게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에요. 건축을 잘하기 위해서 그 돌을 버린 겁니다. 예수님이란 돌을 버린 거예요. 인간이 우리들이 성전을 조작하고, 인간들이 메시아를 조작하고, 구세주를 조작하고, 중보자를 조작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간들이 조작한 겁니다. 그 일이 지금 교인들 교회들이 하고 있어요.

그러나 막상 성도된 자는 우리가 바로 주께서 십자가에 죽게 한 그 짓을 했습니다. 하고 그걸 그냥 받아들이면 되잖아요. 참 쉽죠잉. “지금 세상들이 하고 있는 그 짓을 우리가 그 아이디어를 우리도 똑같이 갖고 있습니다.” 하고 이걸 인정해버리면 되잖아요. 그걸 인정한다는 것은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죄를 알기 때문에, 죄를 알고 그 죄에서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흔쾌히 그것이 주의 뜻이 아닌 것을 흔쾌히 받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럴 때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주께서 십자가 능력으로 구원받았습니다.” 하고 똑똑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쪽에서 “십자가 그건 맞는 말인데, 그 십자가 능력을 어떻게 해서 알게 되었습니까?” 하면, 어떻게 그렇게 인식했습니까? 물으면 “그건 제 소관이 아니지요.” 왜? 나는 나만 생각하는데, 내가 뭘 끄집어낼 것만 생각하는데, 일방적으로 구원하는 것은 나의 예상 밖에 있었지요. 그 때부터는 이제 대화가 끝났습니다. 거기까지 가는데 26초 걸립니다. 대화가 안 되지요.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지요. 많이 들었어요. “한국교회 다 썩었느냐? 니만 구원받고 니만 이단이냐” 그럴 때 이렇게 답변하세요. “나도 이단이다.” 그러면 되지 우리는 복음알고 니는 복음 모른다. 이러지 마시고. “나도 이단이거든. 내가 이단의 괴수거든.” 그때부터 이야기가 통합니다. 밥먹으러가자. 그러면 될 걸.

나는 안다. 나는 성령 받았다. 나는 성령 받았다 하면 저쪽에서는 나는 성령 안 받았나? 그 다음부터 소유 개념으로 다투고 있어요. “나도 이단이었었어. 나도 니하고 똑같은 생각이었었어. 나 다 알아. 그런데 주께서 구원하시는데 어떻게.” 강의에도 선거운동 마이크 소리 들리는데 어쩌란 말인가. 우리 식으로 안 되는 걸. 다시 한 번 찍어달라는 거예요. 지금. 회복해달라는 겁니다. 다 이루었습니다. 회복할 거 다 끝났어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주께서 다 이룬 전리품인 것을 한시도 잊지 말게 하옵소서. 내가 계획 잡아서 요령 부려서 구원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담긴 그 뜻과 능력을 우리 죄인을 통해서 비로소 발견케 하시니 이 모든 주께 은혜요, 주께 감사할 것밖에 없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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