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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15 07:57:29 조회 : 100         
20220613a 부산강의 : [시편]49(33:17)-상다리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96)
20220613a 부산강의 : [시편]49(33:17)-상다리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33편. 1절에, “즐거워하라” 2절에, “새 노래로 노래하라, 연주하라” 그 이유가 4절에, 말씀을 실천에 옮기시는 하나님의 모든 것이 말씀대로 빈틈이 없다는 그런 이야기에요. 그 이야기가 6절에도 계속 됩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만들었다. 9절에,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탄탄하다, 견고하다.

그다음에 10절부터 18절까지는, 인간의 모든 생각은 말씀에 비해서 맞지 않다. 부합되지 않는다, 합치되지 않는다. 인간은 기원에 닿지 아니한다. 기원, 다른 말로 하면 바탕, 또는 원판, 원래 판, 원천 전부 다 같은 뜻입니다. 또는 시작점. 인간은 시작점에 닿지 아니한다. 거기에 닿지 않으니까 인간세계는 어떤 세계냐 하면 붕 떠있는 세계. 이거는 뭐냐 하면 허상이고 허망이고 허구고 달리 하면, 이거는 인간세계는 환상입니다.

환상에서 인간들이 추구하는 것은 스타일, 자기 나름대로의 스타일이에요. 스타일과 스타일로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너는 왜 내 식대로 안 사느냐?” 그걸 좀 정직하게 이야기해야지요. “너는 왜 내 스타일이 아니야.” 사람이 스타일이 다른 이유는, 살아온 머릿속에 저장된 기억이 다르다. 기억이 다르기 때문에 스타일이 다른 거예요.

그런데 내 스타일이 옳다고 하면 안 되지요. 왜냐하면 이 스타일은 기원에 닿지 않는 허망하고 허상이고 허구고 환상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스타일에서는 옳다, 그르다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너는 네 인생 스타일, 나는 내 스타일. 어떤 스타일이든 그거는 옳다고 할 수가 없어요, 내가 기준이라고. 내가 신앙의 기준이라고 삶의 기준이라고 우길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스타일이고 그 스타일은 자기가 살아온 기억, 이걸 과거라 하지요. 과거에서 살아오면서 체험한 그것이 인간의 두뇌 안에 기억으로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기억을 흔히 아는 유명한 말로 이걸 ‘나’ self, 영어로 subject, 또는 moi. 나는 기억이 만들어내고 이 기억은 허망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나는 허망한 거예요.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왜? 기원의 바탕에 원천에 원판에 시작점에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동안 우리 인생 도대체 뭘 보고 살아왔습니까? 무엇 때문에 살아온 거예요? 허망과 허구와 허상 때문에 살아왔는데 그 허망과 허상, 허구 중에 하나가 나거든요. 나를 위해 산다는 자체가 다 헛되고 헛되며 헛된 짓으로 평생 동안 살아온 거예요. 그래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 나를 도와달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허망한 걸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 허망한데 하나님이 왜 도와줍니까? 나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먼지 같은 존재고 그걸 하나님이 왜 나를 도와줘야 됩니까?

그래서 교회에서 금요일에 철야 기도하고 난리도 아니지요. 그 철야 기도하는 분위기 형상은 뭐냐 하면 그냥 허망한 것을 굳히기에 들어가는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살아간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게 과연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그걸 실감하는 그 세월이 인생사라 하는 거예요.

허망한 것을 붙잡으려고 사니까 여기서 뭐가 안 나오느냐 하면, 감사 안 나오지요. 감사 안 나오니까 시편 33편 3절에 나오는 새 노래 안 나오지요. 새 노래 안 나오고 맨날 부르는 것이 헌 노래 나오지요. 흘러간 옛 노래. 자기 자신의 과거의 기억에 대한 회상, 아쉬움, 미련, 그때가 좋았었는데, 라는 회귀본능 이런 것들을 노래에 담으니까 새 노래가 아니고 헌 노래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 자체가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과거에 속했거든요. 과거에 다 지나간 것에 내가 속해 있습니다. 더 살아봐야 지나간 것, 지나간 것, 지나간 것에. 그러면 시편 33편의 새 노래가 3절에 나오지요.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들 알게 될 거예요. 그러면 새 노래가 어디서 나오느냐는 거예요. 인간이 불러봐야 옛 노래거든요. 인간이 찬송을 해봐야 옛날 교회 때 불렀던 과거 은혜 받았던 그런 건 다 헌 노래에요.

새 노래는 어디서 나오는가? 새 노래는 여기서 나오지요. 기원, 바탕, 원판, 원천, 시작점. 여기에 닿게 되면 여기에 접선이 될 경우에만 새 노래 나와요. 그럼 접선 됐는지, 안 됐는지 어떻게 아느냐? 방금 이야기한 것을 볼 때 새 노래에 딱 접선되는 순간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은 붕 떠있는 세계, 아무것도 아닌 세계,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고, 몇 십 년을 더 살아도 그거는 다 허망한 것이고 그저 내 기억이 나를 속인 거예요. 내가 나를 속이면서 살아온 겁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데 존재하지 않는 것이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무엇을 가려버리는가? 기원과 바탕, 원판, 원천, 시작점을 다 가려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시편 33편에서 기원, 바탕, 원판, 원천, 시작점이 어디서 나오는가? 이것을 시편 33편 6절에서는 이걸 말씀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거예요. 말씀으로부터.

말씀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게 어려운 것 같지만 굉장히 쉬워요. 창세기 1장을 여러분들이 보신 적이 있을 거예요. 창세기 1장에 보면, 빛이 있으라, 할 때 그때 빛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지요. 그럼 뭐만 있었어요? 말씀만 있지요. 빛이 있으라하는 명령만 있지요. 빛은 없어요. 말씀이 먼저 있고 그 말씀이 실제로 빛이 나타난 겁니다. 그러할 재주와 능력은 오직 우리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나라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이 될 때 우리는 몰랐던 새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새 노래는 부르기는 내가 부르지만 이 새 노래의 모든 내용은 어디서 나와야 되는가? 말씀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도에게는 주께서 매일같이 말씀을 주입시킵니다. 말씀을 주입시키면 붕 떠있는 내 존재가 바탕, 원판, 원천, 시작점 이것과 연결이 되면서 말씀이 나라는 껍데기를 통해서 나오게 되는 거예요.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더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 하는 순간 백성이 되었더라. 천국이 있으라 하며 천국의 백성이 되었더라. 네가 의인이라 하는 순간 의가 내 안에서 생겨났더라. 전부 다 이건 뭐냐 하면 주의 말씀에서 나온 거예요. 그러면 이 나라는 것은 나 자체는 허망하니까 기억에 불과하니까 말씀이 나를 그냥 두지 않고 새로운 나로 매일같이 교체하게 됩니다.

정수기 설치해놓고 정기적으로 정수기 필터 교체하러 오잖아요. 주께서는 성도 하나 꽂아놓고 그 속에 매일 말씀으로 이렇게 교체를 시킵니다. 교체를 시킬 때 무엇은 떨어져나가야 된다? 어제까지의 나는 환상으로 떨어져나가야 돼요. 어제까지 내가 아무리 믿음 좋고 신앙 좋아도 그거는 어제 분량이에요. 과거 믿음 좋다 어떻게 해도 그건 몇 달 전의 이야기에요. 오늘 건 아니다 이 말이에요. 오늘은 오늘의 말씀이 계시매 그것이 오늘치의 말씀의 현장을 드러내야 되지요.

그래야 내가 나를 붙드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이끄는 대로 그때그때 새롭게 생산되는 내가 될 수 있거든요. 이렇게 돼야 시편 33편이 옛날 구닥다리 말씀이 아니고 날마다 지금 작동하는 지금 여기에 적용되는 시편 33편이 되는 겁니다. 시편 33편 옛날 이스라엘이 시 지은 거고, 이렇데 돼버리면 그 말씀이 옛날 신화가 돼버리죠. 옛날 지나간 일이 되잖아요. 그럼 시편 33편을 찢어버릴까요? 우리와 상관도 없는데 다 지나간 것들인데. 그럴 순 없지 않습니까.

시편 33편 내용은 주님께서 그걸 가지고 지금 오늘날 그대로 우리에게 시편 33편의 사람이 되라고 계속해서 생산해내고 있는 겁니다. 시편 32편도 마찬가지고. 시편 1편도 마찬가지고. 모든 창세기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성경을 공부한다고 해서 이거는 됐고, 넘길 수 없어요. 성경공부 해봐야 우리 기억 속에 들어가고 이 기억은 환상과 허상과 허구에 불과합니다.

환상과 허구는 바탕, 원판과 닿지 않기 때문에 붕 떠있는 상태지요. 붕 떠있는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아까 어떻게 이야기했지요? 어제까지 나, 셀프는 말씀으로 이걸 파괴시키지요. 만약에 어제 나가 파괴 안 되면 사람은 자존심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자아가 자기의 자존심을 만들어내요. 나 이 정도야, 라고 살아가는 거예요. 나 건드리지 마, 나 과거에 이렇게 잘 나갔어, 이렇게 되잖아요. 이거는 바로 허망한 겁니다.

그런 걸 뭐라고 한다고 했습니까? 스타일. 그게 바로 스타일인 거예요. “너만 잘났어. 나도 과거에 잘 나갔어. 애들 셋 다 키웠어, 내가.” 그게 바로 스타일이에요. 애들 셋 키웠다고 자랑질하니까 옆에 여섯 명 키운 사람이, “까불지 마. 나 여섯 명 다 키웠어. 대학 다 보냈어.” 이러면 세 명 키운 사람은 음매 기죽어, 하고 쑥 들어가지요.

어느 게 진리입니까? 진리가 어디 있어요? 하나의 스타일인데요. 진리란 게 인간에겐 없어요. 내가 살아 있는 한 진리가 없습니다. 왜? 내가 진리를 방해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이 말씀을 방해하기 때문에 나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어제까지 축적된 나에요.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듯이 오늘의 나는 네가 여기 있으라 하는 말씀에 의해서 여기 있는 거예요. 어제까지 악착같이 살았다고 그 여력으로 밀어붙여서 오늘까지 사는 게 아닙니다. 어제까지 심장이 뛰더라도 오늘 심장 뛰고, 안 뛰고는 누구 소관이냐 하면 내 소관은 아니에요.

그래서 어느 강의 때 그런 말을 썼는데 강남강의에서 쓴 문장인데 여러분을 위해서 다시 한 번 쓰겠습니다. 이 문장이에요. 비슷한 말인데 [왜 내가 여기 있지?] 이걸 본인한테 물어볼 수 있겠지요. 왜 내가 여기 없지 않고 아직도 여기 있느냐 하는 거예요. 답변은 이렇게 해요. 미친 것 아니야? 너무 말이 험하잖아요. 고상하게 바꿔야지요. 신비롭다. 이게 무슨 노래의 내용이냐? 새 노래의 가사입니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어제부로 인생 끝나야 되는데 왜 여기 있지? 이게 새 노래에요.

이유가 뭐냐 하면 빛이 없을 때 빛이 있으라 했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말씀은 모든 것을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고 없는 것에 말씀만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너는 오늘도 살아, 라는 그 말씀이 오늘 우리가 여기에 살게 하는 겁니다. 나의 존재보다 말씀이 우선되는 겁니다. 이거는 하나님의 창조주의 고집이에요. 피조물에게 밀리지 않습니다.

피조물들은 어제까지 살았으니까 오늘도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은 피조물의 고집이거든요. 창조주는 그런 인간들의 요구사항을 일절 거부합니다. 기도할 때도 살게 해달라가 아니라 오늘 치 제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가 돼야지요. 뭐긴 뭐겠어요? 말씀대로 살면 되지. 말씀이 새롭게 주어지니까 오늘 치 받은 말씀이 뭡니까? 말씀이 내 존재나 내 목숨 줄이나 내 생존보다 늘 우선된다니까요.

왜 우리가 이런 생각을 못하느냐 하면 인간에 신체가 있습니다. 신체를 무엇이 꽁꽁 둘러치느냐 하면, 신체를 뭐가 꽁꽁 묶느냐 하면 나가 이게 둘러쳐요. 그렇게 되면 이 신체는 누구 것이냐? 나의 것이 됩니다. 이 몸이 이 신체가 나의 것이란 것은 성경말씀 어느 구절에 나옵니까? 성경에 이 구절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내 몸이 내 것이란 게 성경에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진리가 아니지요.

다시 묻겠습니다. 이 세상 가운데 78억의 인구 가운데 내 몸이 내 몸 아니라고 한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이 세상 전체가 비 진리지요. 전부 다 허구지요.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살아간다고요. 말씀은 생각 안 하고 남들 보면서 흉내 내면서 모방하면서 평생을 살아가는 거예요. “저 사람 잘 사니 따라 붙여야 되겠다.”

맨날 남 모방하면서 살아가면서 거기서 무엇을 만드느냐 하면 자기 나름대로의 스타일을 만들고 이걸 붙들고 살아가요. 이게 진리인 양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이 스타일은 자기의 자아를 대표합니다. 간섭하지 마라, 이게 내 스타일이다. 이건 진리가 아닙니다. “간섭하지 마세요. 이거는 주께서 주신 말씀의 선물입니다.” 이러면 돼요.

“간섭하지 마세요, 잔소리하지 마세요. 이건 내 스타일입니다.” 그때 뭐가 잘못이냐? 내가 들어갔잖아요. “간섭하지 마세요. 이건 오늘 치 주께서 주신 분량입니다.” 여기서 뭐가 빠지고 뭐가 들어갔습니까? 나가 빠지고 말씀이 들어왔잖아요. 하여튼 생각하는 건 참 쉽지요. 이해하면 굉장히 쉽지요.

이게 실천은 불가능한 거예요. 왜 불가능하냐? 인간은 자기를 포기할 줄 모르는 존재에요.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강제조치가 들어갑니다. 인간은 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강제조치가 들어가요. 그러면 주님의 강제조치는 오늘 강의에 의하면 어떤 조치냐? 뻔하지요. 주의 말씀이 뭘 공격한다? 주의 말씀이 나, 또는 자아를 공격하는 거죠.

다른 말로 하면 진리가 또는 실제가 또는 진실이 허구를 공격한다. 왜? 내 자신이 나밖에 모르는 내 스타일만 고집하는 그 자체가 허망한 짓이기 때문에. “난 평생 내 고집대로 했다.” 그게 뭐 자랑이라고……. 그게 자랑입니까? “건드리지 마라. 난 내 고집으로 산다.” 그게 무슨, 나 지옥 가, 이게 자랑이에요, 그래?

“주님의 말씀이 나를 건드린 적이 없어. 꼴좋다.” 그래서 버림받아라. 그걸 자랑이라고. 어떤 사람은, 나 담배 피운다, 그걸 자랑이라고. 그것이 나는 내 고집으로 산다는 것이 왜 잘못인지 모르느냐 하면 얼굴에 박힌 게 눈이라고 남 살아가는 그걸 따라 하기 때문에 그래요. 대충 같이 휩쓸리면 얼추 중간은 하겠다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시편 33편 6절에 보면 이렇게 돼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뭘 만들었느냐? 하늘을 만들었다. 둘째 날 이야기에요. 하늘은 그냥 하나님이 만들었다, 그 정도가 아니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드신 거예요. 그 말씀이 돌 판 된 게 십계명이에요. 그러니까 이 말은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천지를 만드신 거예요. 율법에서 ‘율’자 빼버리면 하나님의 법으로 만드신 거예요.

하나님의 법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법에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법에 위반되면 하나님께선 자기의 법대로 피조물이 만들어지지 아니하면 언제든지 그걸 파괴시킵니다. 그걸 저주라고 이야기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가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를 저주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우리는 짝짝짝 박수로서 주님의 권한을 찬양해야 됩니다. 그게 바로 새 노래에요.

새 노래 안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파괴하심에 대해서 찬양하는 내용이 새 노래로 담겨야 돼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인으로 죽이시는 일을 하심에 찬송해야 되고 찬양해야 돼요. 뭐 지 사업 잘되고 몸 건강하고 이것만 자꾸 찬양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이 땅의 내 목숨을 앗아가는 그 일에 대해서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 짐에 대해서 찬양하라 이 말입니다. 그래야 내 몸이 말씀의 것이지 내 몸이 내가 만든 내 것이 아님을 우린 분명히 알지요.

그리고 7절에 보면 하늘만 만든 게 아니고 물, 그 뒤에 땅도 나오지요. 8절에 보면 누구도 만드는가? 거민, 사람도 만들어요. 다 만들었습니다. 자, 시편 33편에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하늘과 땅과 사람 만들었다, 이 말은 한 마디로 이겁니다. 이 세상은 전쟁터다. 그걸 전제로 하는 겁니다. 전쟁터입니다. 자, 방금 제가 강의를 했기 때문에 무엇과 무엇의 전쟁이라 하는 것은 여러분은 이제는 알게 되실 거예요.

말씀과 누구와 전쟁해요? 인간세계, 본문 8절에서는,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의 모든” 거민, 사람이죠. 인간세계, 사람의 세계와 여기서 전쟁을 하는 겁니다. 전쟁을 벌일 때 인간세계의 무기가 있을 게 아닙니까? 그 무기가 몇 절에 나오느냐 하면 14절에 보면, “곧 그 거하신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시도다” 내려다본다.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 16절에,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그렇게 돼 있지요. 여기 말 나오잖아요. 영어로 하면 horse, 타고 다니는 말을 말하는 거예요.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전쟁터에서 인간들이 내세우는, 전쟁에는 무기가 있어야 되니까 이 무기가 인간들에서 나오는 무기들이에요. 인간들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는 무기. 그런데 인간의 무기를, 잘 들으셔야 돼요. 중요한 겁니다. 인간의 무기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지었습니까, 안 지었습니까?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에요.

인간이 갖고 있는 컴퓨터를 하나님이 지었습니까, 안 지었습니까? 컴퓨터, AI, 자동차, 기계.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었다고요? 다시 할게요. 말씀으로 짓지 않은 것은 파괴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천국에 컴퓨터 있습니까? 없지요. 그럼 안 지은 거죠. (인간에게 지혜를 줘서 지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에게 지혜를 줘서 그 지혜가 말씀에 위배되는 어떤 다른 영에 의해서 인간의 지혜가 생긴 거예요.

인간의 지혜는 방향성을 가집니다. 이 방향성은 순환구조를 갖고 있어요. 나로부터 나갔던 지혜가 그 결과가 어디로 돌아오느냐 하면 나의 영광으로 돌아와요. 이게 인간의 모든 지혜입니다. 예를 들까요?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이거 죄에요, 죄 아닙니까? 죄지요. 왜냐하면 ‘나’가 들어가거든요.

내가 시작한 일은 어디로 돌아옵니까? 나에게로 돌아와요. 믿습니다, 라는 말을 집어넣었든, 예수를 집어넣었든, 십자가를 집어넣었든 나로부터 출발한 것은 전부 다 죄가 되어 나한테 되돌아와요. 그러니까 기독교나 종교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아시겠지요. 교회도 허망한 거예요.

자동차 천국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동차, 오토바이 천국에 타고 돌아다니면 돼요, 안 돼요? 안 되지요. 왜냐하면 그거는 인간이 자기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무기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 솜씨, 내 지혜가 다 나온 겁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지시한 언약궤 천국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상자로 만든 것 없습니다. 모조리 다 부셔져요.

그래서 지금 제가 그 이야기를 안 해서 그런데 하늘과 땅을 말씀으로 지었잖아요. 말씀으로 지은 하늘과 땅이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게 없어지는 거예요. 옛 하늘과 옛 땅은 다 없어져요. 인간은 거하는 사람은 물론 없어지고요. 노아 홍수 때 사람들 어디 갔습니까? 물속에 빠져죽었지요. 노아 방주 어떻게 됐어요? 아직도 박물관에 있습니까? 없어졌지요.

이걸 한꺼번에 이해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인류의 모든 역사, 시대를 구분하는데 뭐로 구분하는가? 범죄로 구분해요. 범죄 할 때마다 여기서 역사가 끊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인간에게 범죄 하도록 유도하는 거죠. 첫 번째 범죄가 뭐였습니까?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 따먹었지요. 범죄 하는 순간 여기서 뭐가 내려오느냐? 영원의 요소가 와요. 그걸 영적 요소라 하는데 여기에 뭐가 침범하느냐? 악마의 영적 능력이 인간세계에 침범하지요.

그리고 가인이 아벨을 죽이지요. 범죄지요. 범죄 하면서 악마의 영적 요소가 인간세계에 침투하게 되는 겁니다. 시간이 흐르다가 끊어지면서 인간세계만 눈에 보이는 그게 다라고 하는 그게 다가 아니었구나, 배후에 악한 영적 세계가 있다는 것이 그게 시간의 틈이 갈라지면서 그 틈 사이에 영적 요소와 수직적으로 접합이 되는 계기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면 앞의 역사와 뒤의 역사가 끊어지면서 영적 요소가 개입된 채 다시 이어져서 그다음 시대로 흘러가는 거예요. 지나온 모든 역사의 최후의 마지막 범죄 역사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렇지요. 십자가지요. 십자가에서 주님께선 다 이루었다 했단 말이에요. 다 이루었다 하면서 십자가를 통해서 지금에 있는 하늘과 땅과 세상의 모든 것은 어떻게 됩니까? 전부 다 모조리 다 파괴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거는 헨델의 메시아도 마찬가지고 음악, 예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사라집니다. 전에는 물로서 사라지게 했는데 마지막 땐 뭐로 사라지게 합니까? 불로 태워서 사라집니다.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크게 쓰겠어요. 그걸 세례라 하는 거예요. 세례의 특징은 개인 대 개인의 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게 기본이에요. 세례에서는 개인 대 개인의 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동창회 됩니까, 안 됩니까? 동창회 안 됩니다. 강원도 놀러가는 것 소용없어요. 동창회 성립 안 됩니다. 자, 부부 성립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됩니다. 부모자식 관계 성립됩니까, 안 됩니까? 그런 관계없어요.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들이냐. 세례 관계에서는 기존의 인간 대 인간의 인위적인 모든 관계는 다 헛방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타인과 하나 된 적이 없어요. 인간은 자아의 기억 중심이기 때문에 아무리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해서 백날 붙어서 평생 부부해도 따로 놀아요. 모든 생각과 심지어 잠자리를 같이 해도 꿈은 따로 꿉니다. 부부가 하나 된 적이 없어요. 친구와 하나 된 적도 없고.

왜 그러냐 하면 하나 되고 싶지요. 하지만 자아가 범죄로 인하여 위에서 뭐가 왔습니까? 영적 요소가 개입되어 이 자아가 신체라는 자아를 악마의 지혜로 인하여 감아버리니까 인간은 끝까지 혼자 갑니다. 생각이나 자존심과 가치, 의미 끝까지 혼자 그걸 그냥 쥐는 게 아니고 꽈악 쥐고 갑니다. 요양병원에 가도 꽉 쥐고 입니다. 안 놔요. 요양병원에 들어갈 때 노인들이 얼마나 발악하는 줄 알아요? 내가 집 놔두고 뭐하려고 미쳤다고 여기 들어왔느냐.

인간은 영원히 홀로입니다. 그 홀로를 주께선 죽여 버리죠. 지옥 가서나 혼자놀이 많이 해라. 그래서 비유지만 그 비유로 하신 주께서 하신 나오는 등장인물이 뭐냐? 나사로 앞집에 살던 부자. 부자가 지옥 가서 내뱉는 모든 대화가 전부 다 뭐냐? 자기밖에 몰라요. 가서 지는 끝났으니까 동생 걱정 다섯 명 하고. 그 동생이 남의 동생 아니고 자기 동생이에요. 인간은 자신의 확장이에요. 모든 인간들의 친하게 지내는 것은 나와 확장입니다. 나한테 잘해줬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내가 일방적으로 판단해서 받아들인 거예요.

같은 동향이냐? 전라도 사람, 경상도 사람. 우리 아는 같은 집안이냐? 같은 교인이냐? 거기에 따라서 진리가 그때그때 달라요. 옳고 그름의 판단력이 다 달라집니다. 나와 얼마나 좋은 관계로 엮이느냐, 아니면 남들이 아무리 좋다 해도 내 돈 떼어먹은 사람은 철천지원수 지옥이나 가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식이라 할지라도 내 돈 건드리고 내 자존심 건드리면 너는 내 자식 아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여러분 그걸 알아야 돼요. 악마가 왜 하나님께 대들었습니까? 악마가 하나님을 대든 이유를 아시게 되면 인간이 왜 이렇게 망가졌는가? 같은 한 통속이기 때문에 딱 통해요. 악마가 왜 하나님께 대들었느냐 하면 악마가 예수님에 대해서 주가 되게 하신 것에 대해서 반대해서 악마가 된 거예요. 악마가 하나님께 대든 게 아니에요. 악마가 하나님의 아들 주에게 대든 거예요.

그래서 악마의 종교의 특징이 뭐냐? 하나님을 숭배하는 거예요. 신을 숭배하는 거예요. 이게 악마의 종교에요.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 이게 악마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특수한 이스라엘에서는 뭐냐? 하나님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이름, 이걸 줄이면 주가 됩니다. 주의 특징은 뭐냐? 언약을 갖고 있어요. 이쪽은 이 세상의 종교는 언약이 없어요. 나는 인간이고 신은 신이니까 신을 경배하는 이게 좋은 관계로 여기고 있는 겁니다. 모든 종교가. 특히 천주교 같은 경우에 그렇지요.

예수님 중심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의 핵심은 하나님을 뭐로 바꾼다? 하나님은 우상이었다. 여호와가 우상이었다. 사울이란 사람이 여호와 잘 섬기려고 예수 믿는 사람 죽였을 때에 사울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나타났습니까, 주님이 나타났습니까? 부활하신 주님 나타났지요. 부활했다는 말은 언약을 완성했다는 뜻이에요. 언약을 완성하신 분이 아까 바탕이 되고 시작점이 되는 거예요. 오셔서 하는 말이, “사울아 네가 나를 핍박하고 있는 중이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악마는 신을 부정하지 않아요. 악마가 신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욥기 1장에 나오고 스가랴에 나오고 심지어 야고보서 2장에 나옵니다. 악마도 귀신도 하나님이 한 분인 줄 알고 믿고 떤다. 부들부들 떤다는 거예요. 악마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시비 걸지 않아요.

다만 하나님과 나 사이에 중간에 심판주가 따로 끼어들 이유 있음에 대해서 악마는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에요. 내가 하나님 섬기는데 왜 십자가 지신 나사렛 예수가 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중간에 끼어드느냐, 죽여 버리자. 그래서 나온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유대인에 의해서 누가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죽었어요. 죽은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와 구원자, 심판주로 만든 거예요.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 섬기는 게 복음이 아니에요. 그건 개나 소나 다 아는 거예요.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절에 가는 사람도 아이고 하나님, 이럽니다. 신은 모든 인간이 신을 알고 있어요. 그거 안다고 성도가 아니고 천국 가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왜 끼어드느냐를 알아야 돼요. 내 인생에 대해서 왜 끼어드느냐? 네가 악마와 한 통속이니까 끼어들었지요. 네가 하는 품새가 네가 모든 스타일이 내 고집이 자아가 누구 작품이에요? 악마의 작품이에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게 악마의 작품이라고요.

“오늘 치의 인생은 주께서 말씀으로 허락한 겁니다.” 이게 아니고 “평생 나는 자아를 이렇게 구축했으니까 건들지 마세요.” 이게 인간의 기억 아닙니까, 이게 자아고. 어떤 사람이 내 차를 툭 치고 갔다. 이 정도면 좀 성질나더라도 그래도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지. 그것 뭐 흠집 난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니까 용서해준다.

그 정도는 용서되는데 내 말에 토 단다든지 나한테 약간 인상 그리면서 할 때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 차는 용서하고 돈 오만 원 사기 당한 건 용서가 되고 내 자존심 건드리면 이거는 용서가 안 됩니다. 나는 남편 바람피운 건 용서가 되도 친정 건드리면 용서가 안 돼요. 존재 자체를 건드리면 안 돼요. 인간의 존재 자체는 역사입니다.

그런데 아까 뭐라 했습니까? 역사에 영원히 파악되려면 역사에 금이 가야 되지요. 역사에 홈이 패어야 됩니다. 홈 패이려면 나의 역사가 주님 앞에 뭐로 등장해야 돼요? 범죄자로 등장해야 되지요. 범죄자로 등장할 때 나의 바탕, 근원도 등장하고 그다음에 내가 허망한 허구적인 자아를 붙들고 있었다는 것도 같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 세계가 언약의 세계고, 언약의 세계가 율법의 세계입니다. 율법의 세계는 저주도 있어요. 저주, 그리고 축복 두 가지 요소가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무조건 기도할 테니까 내 기도 들어 달라, 하는 이런 것은 너무나 무지막지한 일방적인 자기의 요구에요. 언약대로 되게 하옵소서. 주께서 저를 버리신다면 버리시는 것도 찬양합니다. 주께서 저를 그리스도에게 끊어지게 한다면 그것마저도 찬양합니다.

그게 바로 로마서 9장 3절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잖아요. 주께서 저를 끊어지게 한다면 그것마저 주께서 하셨기 때문에 오케이. 그것조차 주께서 하셨기 때문에 저는 흔쾌히 그걸 받아들이겠습니다.

이게 왜 그러냐 하면 나라는 자아 자체가 이미 범죄자로 인하여 이게 내가 쥐고 있을 나의 대상이 아니라 이게 어디로 넘어가느냐 하면 예수님의 심판과 재판에 피고로서 용의자로 이미 넘어가 있는 상태를 내가 받아들이는 거예요. 무슨 사건에 의해서 그걸 발견한 거예요? 십자가 사건에 의하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지요? 로마서 3장 10절에 나오지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 말씀의 세계에 우리를 거기다가 던져 넣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가 이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을 일체 못하지요. 이미 자아의 고난에서 넘어가버렸으니까. 언약의 세계 안으로 넘어가버렸어요. 다 이루었다는 말씀 안에 넘어가버린 거예요. 다 이루었다는 내용이 뭐냐 하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만족스런 상태다. 오케이? 오케이.

그럼 그걸 그대로 그러한 오케이 상태가 우리가 근원과 닿아있으면 그 말씀의 세계가 우리 입을 통해서 튀어나오면 그게 바로 새 노래지요. 뭐 가락을 붙여야 노래가 아니라 그냥 삶이란 자체가 새 노래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주님 앞에 저주하면 아무리 그래도 그게 진리인 줄 알지만 그래도 내가 지옥 가면 나만 손해인데 그럴 순 없나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어디까지나 어제까지 구축된 나에요. 아까워 죽지요. 평생 천당 가려고 교회 오십 년 다녔는데 이제 와서 파토 나버렸으니까 아까운 거예요.

자, 아깝다. 누가 아깝단 말이에요? 내가. 아깝다, 그다음에 나온 게 뭐냐 하면 은근히 반항하기. 반항하면 무엇이 날아가 버립니까? 감사 날아가지요. 새 노래 날아가지요. 이건 항의거든요. 항의, 또는 항변. 그럼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 상태가 인간의 흔한 모습이에요. 이 세상의 흔한 모습이에요. 이건 표준말이지만 안 좋은 말인데 경상도 말로 주둥이라고 하는 거예요. 늘 평소에 사는 자체가 주둥이가 튀어나온, 앵그리버드라 하는데 늘 화난 상태가 돼요. 주님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그걸 차마 말은 못하고 안으로 삭이면서 화난 상태로 나가는 겁니다.

이것을 설명하면서 첫째 마쳐볼게요. 이게 무대입니다. 말씀을 작동하는 무대에요. 그러니까 인간세계가 죄 짓는 것은 하나님 앞에 꼭 필요했던 겁니다. 그게 무대가 돼요. 브레히트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극작가가 있는데 이 사람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는지 잘 모르겠는데, 브레히트란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연극배우는 반드시 연기임을 드러내면서 연기해야 한다.”

상당히 의미 있는 이야기에요. 연기임을, 이거는 실제가 아니고 연기임을 드러내면서 연기를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현실과 똑같이 해버리면 이거는 무엇에 혼동이 일어나느냐 하면 이것이 연극무대란 사실을 관객들에게 잊게 만든다는 겁니다. 실재세계와의 차이를 드러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날 성도에게 이 말씀이 꼭 필요한 거예요. 우리가 성도가 이 땅에 살아갈 때에 나에게 하는 모든 일은 내 이익을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익을 위해서 하면서 이게 뭐다? 내가 육신이 있는 한 더러운 육신, 욕망이 살아 있는 한 내가 이 세상 무대에서 나는 뭐다? 죄인이라는 가면 뒤집어쓰고 하는 나는 연극배우임을 그 차이를 드러내는 것, 그 차이가 성도입니다. 차이가 성도되게 해요. “주여, 내가 이런 주장했는데 이것 죄인 것 아시지요.”

왜? 세상을 이렇게 연극무대 만든 연출자는 주님이란 걸 알기 때문에 나에서 어떤 진실감과 순수함조차도 그게 주님 보시기에 뭐가 된다? 그냥 연기 피우는 거예요. 아주 야무지게 남들 보기에 그럴싸하게 보이는 연기, 그것을 너무나 성도가 알기에 주께서 그걸 지적할 때에 그걸 흔쾌히 감사함으로 지적해주셔서 감사함으로 우리가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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