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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6 15:57:08 조회 : 133         
안양20191010a야5장17절(밭이랑)-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119.207.152.148)
안양20191010a야5장17절(밭이랑)-이 근호 목사

야고보서5장17절부터 하겠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자, 여기서요, 지금 이 본문에서 앞뒤가 안 맞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우리하고 성정이 같다. 우리하고 일반적으로 똑같다, 이 말이죠. 사는 게. 똑같은데 그 분이 기도한즉 삼년 육 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가 나중에 기도하니까 비가 왔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들 가운데 어느 누가 취미로, 재미로 “아휴, 나 삼년 육 개월 비 안 왔으면 좋겠다.” 이렇게 기도할 그러한 보통 사람이 있습니까? 일반화된 사람 있어요? 없지요. 그러니 여기서 엘리야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엘리야가 평소에 하는 그 기도를 그걸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기도라는 것은 인간으로서 일반화된 것이다. 보통 일반인들은 다 기도하잖아요. 일반인들은 답답하면 기도한다고요. 일반인들은. 기도하잖아요. 그런데 지금 엘리야의 기도가 과연 일반인들이 할 수 있는 기도냐, 이 말입니다. 무슨 심술이 나가지고 삼년 육 개월 동안 비 오지 말라는 하는 그게 어디 있어요. 물론 엘리야가 요즘 같으면 북한에 태풍 불어라. 할 수 있지만 그건 사적인 원한과 보복, 복수, 분노, 이게 표출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엘리야는 그런 게 없어요. 엘리야의 기도가 성정이 같다는 말은 엘리야의 기도는 바로 성정이 같은 일반인의 기도하고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보통 기도라고 하는 것은 사적인 기도거든요. 이걸 사적인 기도라 하는 것은 이것을 가지고 뭐냐 하면 이걸 고상한 말로 이야기하면 ‘개별 사실’이에요. 개별적인 사실이에요. 인간은. 보통 인간은 개별적인 사실이에요. 세상에 자기 이웃이 뭐하고 백 미터 뒤에 뭐하는지 몰라요. 아니 아예 알고 싶지도 않고. 개별적인 것만 집중해 살아가는 것이 일반인들의 삶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렇지 않았잖아요. 엘리야가 삼년 동안 비 안 와가지고 자기한테 어디 혜택 얻는 거 있습니까, 개별적으로 이익 얻는 거 있어요? 없잖아요. 그러니 엘리야의 기도가 개별적인 사실이 아니고 이건 어렵게 이야기해서 뭐냐 하면 개별적인 사실이 아니고, 이건 나중에 뭐가 되느냐 하면 ‘보편 명제’가 되는 겁니다. 보편 명제.

보편 명제는 흔히 말해서 뭐냐 하면 보편적 진리를 이야기하는 거죠. 하나의 인간을 통해서 그 사람에게만 아니고 그리고 엘리야가 모르고 있는 많은 사람들, 모든 인간에게 공히 다 적용되는 보편적인 어떤 규칙, 원리, 사실, 그것을 엘리야에게 개별적으로 엘리야에게 기도하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엘리야는 분명히 이건 개인적입니다. 개인입니다. 분명히 개인인데, 이 개인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뭐냐 하면 그는 우리와 성정이, 우리와 모든 요소가 동일한, 특별한 인간이 아니고 성정이 같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은 밥 안 잡숴도 되는 사람이 아니고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밥을 먹어야 되고 잠을 자야 되고 하는 점에 대해서는 우리하고 성정이 똑같지요.

하지만, 그 예수님에 일어나는 것은 그 누가 예수님에 일은 사적인 문제고, 개인적인 문제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성령을 받지 않는 예수님을 주라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그런 견해잖아요. 예수님에 대해서. 이 세상에는 4대 성자가 있다. 예수, 소크라테스, 공자, 부처, 4대 성자라 하잖아요. 그럼 4대 성자라 하는 것은 굉장히 높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니나 내나 똑같은 인간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고린도전서12장에 보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시라고 하지 않고서는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니다. 이 말이죠. 성령을 받게 되면 그 말을 바꿔서 말하면 성령을 받게 되면 예수님을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을 주시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고백이 어떤 어린애가 고백하던 아주머니가 고백하던 노인네가 고백하던 그 고백은 남들 보기에 개별적인 사실이지요. 그런데 그 입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주되심이라 하는 것은 개별적인 겁니까? 보편적인 겁니까? 보편명제지요. 예수님 주 맞잖아요. 천지를 창조하신 분 맞잖아요.

그래서 그 예수님을 주된다고 해서 그 안 믿는 사람들에게 안 믿는 식구들, 식구 구성원, 또는 일가 친척들, 안 믿는 친구들에게 기죽을 필요 있어요, 없어요? 기죽으면 안 되지요. 내 안에 보편이 들어있는데 왜 감이 개별이 까불고 있어요. 왜? 개별이. 나는 지금 보편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주되심이다. 이건 내가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서 하는 겁니까? 성령이 임해서 되는 거예요. 일자무식이라도.

성령이 임하게 되면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이건 미친 거예요. 그러면서도 “니가 뭐 잘나서 예수님을 주라고 하느냐? 나는 안 믿는데, 나는 좋은 대학 나와서도 안 믿는데 니는 중학교 밖에 안 나온 게 예수님을 니가 어떻게 안다고 주라고 하느냐?” 라고 한다면 “나? 나, 니하고 성정이 똑같아.”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 니하고 다를 바 없어. 똑같아. 나도 니하고 그렇게 그런 인간이야.” 그런데 예수님이 주가 되신다 하는 것을 알았다는 말은 결국은 주께서 다루신다는 뜻이잖아요. 다루신다는 뜻이에요.

신약에는 성도를 통해서 성령의 일이 나옵니다. 그것이 구약에서는 성신에 의해서 일한다. 라고 할 수 있는데. 로마서5장에서는 성령에 의해서 일한다고 하는 것도 되고, 야고보서5장에서는 그걸 달리 이야기해서 우리가 성정이 같으나 엘리야의 기도가 응답됐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얼마나 오래했는가는 묻는 게 아니지요. 엘리야가 기도할 때 꿇어 앉아 했는가, 양반다리 했는가, 그걸 묻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개별적인 어떤 조건을 극복하고 그 조건과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보편적인 것이 그냥 나와 버린 거예요. 어떤 개별적인 상황이 몸이 아프다든지 상당히 건강할 때는 이게 “컨디션이 좋아가지고 기도가 되는데 아플 때는 기도가 안 돼.” 그 사람은 뭔가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안 아프다는 조건하에 기도가 잘된다 하는 것은 그것은 주께서 유발한 현상이 아니다, 말이죠. 다시 말해서 보편적인 것이 아니고 개별에서 개별로 그냥 추락하는 거죠. “당신 취미가 뭡니까?” “기도 하는 거.” “몇 분 동안 합니까?” “몇 분이라니? 나는 한 번 하면 두 시간 반입니다.” 그 사람 취미지요. 새벽제단 쌓는 거 취미죠. 새벽에 살 빼려고 운동하는데 그게 취미지요. 살 빼는 거나, 새벽기도 가는 거나 차이점이 뭐가 있습니까? 내가 새벽기도 가야 새벽이 깨어집니까. 내 안 가면 새벽이 안 깨어져요? 어떤 목사의 책이 있지요. 새벽을 깨우리로다. 새벽에 깨워서 뭐할 건데? 데모할 건데 또. 전부다 개별적이에요. 개별적. 보편적인 것이 나오지 않으면 전부다 아무리해도 하나의 오락이고 자기 나름대로의 취미 활동이에요.

취미활동의 특징이 뭐냐, 그냥 즐겁고 시간 잘 보내는 그런 거죠. 그러나 이 보편적인 것은 어떤 현상이 이러나는가 적어볼게요. 물어뜯기에요. 어떤 사람이 보편적인 것을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나오면 주위에서 왁! 달려들어서 물어뜯깁니다. 이건 본인이 말릴 수도 없어요. 내가 내 의도에 의해서 어디 뭐 보편적이 나올 거 같으면 내가 그걸 금지하거나 내가 중지하면 되는데 내게서 나오는 이 법은 금지할 법이 없네. 주님에 대한 사랑을 금지할 법이 없다 했잖아요. 말릴 수가 없어요.

그 누가 사도바울보고 미쳤다 하니까 “그래, 나 미쳤다.” 미쳤다는 이야기는 사도행전에도 나오고 이게 고린도후서5장에도 나와요. “그래, 나 미쳤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 “그래, 나 미쳤다. 미쳤지만, 미쳤다 현상을 보지 말고 입에서 뭐가 나오는지를 보라.” 말이죠. 그게 예수님의 살아계심이에요. 예수님이 살아계시는 거예요.

인간이 살아있을 때는 2가지 의미가 있지요. 살아있다. 남들이 나를 한 인간으로 대우할 때 인간은 살아있다고 느끼는 겁니다. 살아있네! 하잖아요. 살아있네. 남들이 나를 알아줄 때, 살아있네! 그런데 남들은 모르는데 주님이 나를 알아줄 때, 사람들은 살아있다고 봐주는 게 아니고 이건 미쳤다고 보는 거예요. 남들이.

성도는 보편적을 이야기했는데, 사람들은 보편적이 아니라는 거예요. 왜, 모든 사람이 다 동의해야지 모두다 동의 안하는데 왜 니만 고집하고 있느냐, 이 말이지요. 우리 쪽수로 시합하자. 대결하자는 거예요. 느 교회 몇 명이냐? 이리 나오는 거예요. 진짜 하늘의 진리 같으면 숫자가 많이 모여야지 무슨 진리인데, 가정이 달랑 두 가정이라. 교회가. 무슨 쪽수가 그런 쪽수가 있어요.

진리를 전했으면 전에 교회보다 더 많아야 되지요. 달랑 두 가정. 세 사람밖에 안돼요. 이게 무슨 진리일까요. 그런데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이야기했지요. 크라운 프라자 호텔 밤중에 강의한 거. 거기에 나오잖아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기도하는 곳에 내가 너희와 함께 한다. 주께서 돔처럼 덮어 씌워버린 겁니다. 왜냐하면 개별 쪽수를 계산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두 세 사람을. 뭐냐, 그들은 개인이 몇 명이 모이느냐 아니라 누구를 바라보느냐, 에요. 누구를.

주와 주님이 함께 있으면 그걸 천국이라고 이야기해요. 여러분 처음 들었지요. 내가 여기 있는 게 천국이 아니고 주님이 주도적으로 계시는 곳을 그런 상태를 가지고 천국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영토는 지상의 영토에 흡수, 통합이 안돼요. 다른 영토에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뭐냐 하면 하늘나라의 밑바닥이라고 표현합니다. 작용은 하는데 이 세상 영토에 어느 곳에도 포함되지 않는 것. 그걸 대구강의에서는 이걸 뭐라고 했느냐 하면 현장이라고 했고, 그 현장이 뭐냐, 사건의 현장이라고 했지요. 거기가면 범인들 다 나가고 없어요. 하지만, 범인이 남기고 간 자국이 발자국이, 핏자국이 있잖아요. 그래서 경찰에서 현장보존하지요. 살인의 추억 그 영화에 송 강호 영화 있잖아요. 화성연쇄 살인범 영화. 거기에 보면 경찰이 흔적 찾기 위해서 애를 쓴다고요. 뭔가 남긴 게 있을 것이라고 찾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놀랍게도 주님이 살아있다는 흔적을 지상에 어떤 것도 남기지 않았어요.

그러니 인간 쪽에서 천국가려고 하는 모든 시도가 단절되어있는 겁니다. 그 단절되어있다는 것. 단절되었음이 흔적으로 내려오는 게 뭐냐 하면 바로 아까 한 하나님 나라의 뭐라고 했습니까? 바닥이죠. 바닥 이게 기도에요. 하나님 나라 바닥의 문양, 모습. 이 모습은 하나님 나라가 지금 무빙,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엘리야의 기도입니다.

이건 일반인들이 하는 기도가 아니고, 이건 이상하게 그런 기도가 나올 리가 없어요. 그런 기도가 나올 리가 없다 이 말이죠. 엘리야가. 삼년 육 개월 동안 비오지 않기를 기도하는 게 엘리야가 평소에 노림수였던가요? 너그 한 번 죽어봐라. 그런 억하심정이 있어가지고 그걸 한꺼번에 모아서, “주여, 이거 조절합시다. 한 4년 때릴까요, 3년 반으로 할까요?”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둘이 상의한 적 있어요? 없지요. 다른 사람하고 엘리야하고 무슨 관계있다고 그 삼년 육 개월 동안 비가 안와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하고 사전에 상의한 적도 없어요. 더 쉽게 말씀드릴까요. 먹구름이 왔을 때, 먹구름이 오고, 지면 사이에 여기 폭우가 형성되지요. 폭우가 뭐냐 하면 기도다. 이 말입니다. 폭우가. 위에서 쏟아지는 거예요. 말릴 수가 없지요. 말릴 수가 없어요. 하나의 계시니까. 영적 세계와 육적 세계의 만남이다. 이것을 주일 낮에 ‘경계의 미학’이라고 한 겁니다. 경계선이 갖고 있던 아름다움이에요. 아름다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께서 철수하고 난 뒤에는 인간 쪽에서 하늘나라 갈 수 있는 모든 통로는 다 좌절돼 있잖아요. 이건 창세기3장에서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추방되고 난 뒤에 도로 생명나무 있는 곳으로 기어들어갈 그런 구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없다는 말은 나는 너를 인간으로 안 봐주겠다는 겁니다. 그 만약에 다시 생명나무로 들어올 수 있다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원래 그 인간다움, 그걸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원래 하나님의 형상 지닌 사람만 통과되고 나머지는 닫아버리지요.

그 통과하신 분이 최초로 하늘나라 통과하신 분이 누구죠? 바로 예수님이잖아요. 방금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최초 했지요. 최초. 초반부터 슬슬 어렵기 시작합니다. 어차피 들을 귀 있는 자만 듣겠지만. 쉽게 한다고 알아듣는 게 아니니까.

최초. 다른 말로 하면 시작이지요. 뭐가 어려우냐 하면 과거가 시작이 아니고 시작은 미래에 있다는 겁니다. 미래. 미래에 시작이 있어요. 미래에 시작이 있다면 현재 엘리야의 모든 것은 펼쳐지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펼침의 반대가 뭐냐 하면 응축입니다. 응축. 모아지는 거예요. 수렴되는 거예요. 엘리야의 기도가 점점 어디에 수렴되느냐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기도로 모아지는 거예요.

그러면 시작은 어디에 있느냐, 시작점은 과거의 시작점이 아니고 미래에 시작점이 있는 거예요. 최후의 것. 우리의 시간적 상식은 뭐냐 하면 시작은 과거에 있었고 천지창조가 있었고 천지창조가 악어가 아가리 벌리듯이 펼쳐지게 된다, 이리 보거든요. 이걸 과학에서는 진화론이라 하는 겁니다. 계속해서 이 우주는 창발적으로 돌발적으로 스스로 자기 전개를 한다 이 말이에요. 자기 전개.

그래서 자기 전개해가지고 계속 무한대로 자체 내에서 어떤 혼돈과 조직을 자체적으로 구성을 하면서 퍼져나간다는 거죠. 예를 들면 어떤 방에 가스를 연결하면 연기가 처음에는 일직선으로 올라가다가 나중에는 지 마음대로 카오스, 혼돈속에 빠지면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식으로 우주는 펼쳐간다. 그 혼돈 속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면 거기서 질서가 생기는데 코스모스 질서가 생기는데 그 질서가 우주고 그게 빅뱅이 되고 그래서 지금부터 137억년전에 우주가 탄생을 했는데 그것은 여러 가지 질서체중에 하나가 이 우주고 다시 이 우주 바깥에 다른 병행되는 다른 우주가 또 자연의 우발성으로서 생겨날 수 있다는 거예요.

그 우주와 이 우주 사이에 있는 잼처럼 있는 게 뭐냐 그게 중력이라는 겁니다. 현대 물리학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그게 중력이라고. 중력은 어디서 오는지는 모르지만 샌드위치처럼 옆 동네에서 아마 올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 그것이 현대 물리학에서 최첨단 이야기하는 끈이론(string theory), 무려11차원의 이야기. 수학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인간이라 하는 건 우연한 거고, 근본적인 원리는 뭐냐 하면 진화론이지요. 그냥 펼치는 거예요. 계속해서 뭔가 진화한다. 변화한다. 이 변화 되는 것을 보다 더 살기 좋은 쪽으로 펼쳐 나가자. 과학이란 것이 인간의 여러 가지 이성과 실험을 통해서 계속, 계속 확인해 주는 겁니다.

그것을 여러분 자녀가 학교에서 배우고 있고 여러분이 본의 아니게 이미 그러한 영향력을 충분히 부여받고 있어요. 영향력을 다 입고 있다고요. 그런 진화적 관점에 있어서 어떤 관점의 영향을 받느냐 하면 일단 기도를 했으면, 기도를 했다 합시다. 기도했으면 현재지만 약간만 시간 지나면 기도는 현재가 아니고 뭐가 되지요? 과거가 되지요. 시작점이 기도를 했으면 거기에 내가 원하는 내가 예견한 결과를 얻어내야 된다 하지요.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 자체가 무슨 론입니까? 이게 자체가 진화론이지요. 말은 진화론이지만 사실은 내막은 뭐냐 진보론이지요. 진보론. 날이 가면 날이 갈수록 더 나아져야 된다는 거예요. 나아진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인간에게 나아진다는 게. 인간은 죽어가고 있잖아요. 죽어가고 있는데 나아진다. 죽을 때 예쁘게 피부 고아지면서 죽는 걸 그게 나아지는 걸까요.

도대체 기도할 때 뭐를 염두에 기도하느냐, 말은 진화지만 사실은 진보를 염두에 두고 기도하잖아요. 진보. 지금보다 향상되도록. 그 향상된다는 내용을 깨어보자 말이죠. 어떤 걸 가지고 더 향상되었다고 할 수 있는 그 증거물은 뭐가 되느냐. 일단 숫자 늘어나기. 교회가. 그게 진보거든요.

그러면 한 가정에 애가 둘이 있는데 애 하나 더 본의 아니게 그저 하다보니까 맨날 하다보니까, 하다 보니까, 애가 더 생겼다. 뭐 하다보니까요, 수술 안 해서 그렇지. 수술 하면 하다보니까 그런 거 없는데. 하다 보니까 생겼다는 거예요. 그럼 애 넷이면 진보입니까? 이게. 골치 아픈 겁니까? 그런데 다른 사람은 애 지가 안 키우니까 “아이고~ 복도 많지유.” 충청도 말하면서 복도 많지유~~, 요새 전라도 같으면 가인이어라~ 뭐 이런 거. “아이고~ 복도 많지. 아이가 넷이나 되네.” 당신이 한 번 키워보세요. 얼마나 힘든지. 애 넷 키우면 여자가 자기 구현됩니까?

여자는 50대에 바다를 봐야 되는데 바다는커녕 학고방 들어가 키우기 바쁜데. 무슨 바다를 봐요. 자기 취미생활, 자아실현 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다 빼먹는데. 빨래를 꼽아 가지고. 첫째, 둘째, 셋째, 넷째 다 빼먹고. 나중에 노인네 돼가지고는 완전히 탁구공처럼 이집에 갔다, 저 집에 갔다, 저 집에서 튕기고, 손녀만 낳아라. 애 봐준다. 월급 받고 돌아다니는 배가 본드, 방랑자 생활하고. 뒤늦게 방랑자 신세 돼가지고. 자식 집에도 못 살고 손자 집에서 살고 이런 경우 많잖아요.

최초가 과거가 있는 게 아니고 최초가 미래에 있는 거예요. 최초가.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 개별에서 뭐를 찾아가는 거다? 개별사실을 통해서 결국 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 보편명제로 가는 거예요. 보편명제. 개별사실로 가면서 보편명제로 가면서 개인은 죽고 집단이 등장하지요. 그 집단이 바로 이스라엘 집단. 하나님 나라 되는 거예요.

그럼 그 가정에 성도는 변신이 되는데 무슨 변신이 됩니까? 개별을 지우고, 개별이 개별의식을 가지고 지우고 집단에 예속되었다. 포함되었다. 라는 그런 소속감을 갖게 되는 겁니다. 소속감. 소속감의 특징은 그 자체가 뭐냐 하면 개인적이 아니고 보편적이에요.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군인들의 특징이 뭐냐, 머리 모양도 똑같고, 복장도 똑같고, 먹는 음식 똑같지요. 그걸 가지고 보편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군인들이.

그러면 성도는 뭐냐, 성도는 가난한 자나, 부자나,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전부 다 그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오직 누구만 내세운다? 누구만 자랑한다? 예수 그리스도만 구주됨을 고백하는 분명히 개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입에서 뭐가 나옵니까? 보편적 명제가 튀어나오는 거예요. 세상에. 이런 기적이.

세상에서는 개별적이기 때문에 니는 한 달 수입이 얼마야? 니 그 집 애는 몇이야? 요번에 고3인데 어느 학교에 갈 거야? 전부 다 개별적인 것과 비교하고 대결하는 겁니다. 아, 그건 제가 설교시간에 여러 번 이야기했듯이 왜 경쟁하고 비교합니까? 그것은 인정받기 위해서.

타인이 나를 뭐라 하지 않으면 나는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타인이. 옛날 여자들 시집갈 때 새댁이 할 때 제일 먼저 의식되는 것이 뭐냐, 시집식구들, 특히 시어머니나, 시아버지, 시집식구들이 나를 어떤 여자로 봐주느냐에 따라서 그 집에서 내가 행복하냐, 불행하냐 결정되는 거예요.

그럼 그 집에서 인정받는다는 것은 그 집의 룰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걸 관습이라 하는데. 내가 아가씨로 살 때는 우리 친정집하고 다른 룰이 있다 말이죠. 그 룰을 따라주는 분량만큼 나는 인정을 받게 되고 그 룰에 어긋나게 되면 나는 밉상 받는 고달픈 매일 아침의 눈을 뜨게 되어있어요. 고달픈 인생을 뜨게 되어있어요. 한 번 밉보이면 아무리 예쁘게 하고 아무리 아침 일찍 밥을 해줘도 밥 꼬라지하고는 너그 집에서 이렇게 배웠나? 신발 벗는 꼬라지하고는 너희 집에서 이리 하지? 우리 집에서는 양반집이라서 우리 집에서는 절대 신발 그렇게 벗어서는 안 돼! 똑바로 배워! 양반집은요, 김 상표입니다. 김. 그냥 김 부스러기에요.

그 말이 다 뭐로 이루어지느냐 하면 언어로 이루어진다 했지요. 언어. 언어로 이루어지거든요. 언어로 이루어지니까 그 시가집의 모든 단어가 언어로 이루어지고 언어는 뭐로 하느냐, 안에 뭐가 담겨있다? 개념이 담겨있고, 그 개념은 의미가 담겨있고, 그 의미의 방향은 뭐냐, 시가집 충성이라는 것으로 전부 다 응축이 되어있거든요. 그러니 이것이 하나의 스크린처럼 막을 형성한다고요.

그럼 어느 아가씨가 결혼했다. 아가씨가 그냥 빈 몸으로 온 게 아닙니다. 자기가 지금껏 30살까지 살아온 시공간이 정신적 시공간이 있을 거예요. 그것이 또 나름대로 자기 언어가 있고, 개념이 있고, 의미가 있고, 그것은 누굴 위하여 그동안 평소에 날 위해 살아왔다 말이죠. 이게 둘이 시집이란 이름으로 같이 사는 거예요. 그저 될 수 있는 대로 시어머니와 시아버지와 같이 살지 마세요. 방 한 칸 나가던지 해야지, 모신다는 그런 되지도 않는 구차한 핑계대고 자기 종자돈 모으려고 그런 쪽으로 하지 마세요.

왜 아가씨들이 애를 낳으면 시가집 안 맡기고 친정 왜 갑니까? 거기에 내가 살아온 언어 개념 틀이 거기서 구성되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둘이 산다면 여기 맞혀야 되는 거예요. 자, 보자. 공통점이 몇 프로 있는가, 이렇게 겹치는 부분이 있으면 겹치는 부분만큼은 숨이 쉴 만 한 거예요.

모든 인간의 만남은 다 그래요. 이 아가씨가 처음에 남자를 만날 때 남자는 자기 집 구석에서 나온 하나의 돌출된 부분이거든요. 나는 내가 있던 살던 여자로서 돌출된 부분이 있다고요. 둘만의 공통점이 많으면 “우리 같이 살까?” 이리 되고, 공통점이 없으면요, “사람은 좋은데 안 맞는 거 같아. 당신 같은 사람은 나보다 더 좋은 여자를 만날 거라는 되지도 않는 말도 없는 소리를 해가면서 튕겨버리지요. 튕기기 전에 먼저 튕기잖아요. 자존심 때문에.

공통부분을 모으면 새로운 가정을 하겠다는 기대갖고 하는데 이 공통부분에 세상에 숨어있던 개념이 있을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살아보니까. 숨어있는 부분. 그러니까 이건 남자가 속였는지, 아니면 내가 딴 것을 이야기했음에도 못 알아들었는지. 그걸 놓쳐버렸는지. 막상 살아보니까 다른 요소가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은 육신의 만남이 아니고 의미장의 만남이라 하는 거예요. 언어장의 만남. 그 언어장은 반드시 단어, 언어로 튀어나오거든요. 언어로. 이건 하나님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일을 하실 때 말씀으로 일을 한다고요. 그 말씀에는 하나님만 해석할 수 있는 의미가 있고, 그 의미의 핵심은 과거에 있었던 게 아니고 미래에 있는 거예요. 구약 적 입장에서. 구약 적 입장에서 최초가 신약에 있습니다. 그 최초가 누구게요? 요한복음1장.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게 태초 아닙니까? 이게 시작이거든요. 이 시작으로. 그러니까 오히려 구약이 과거가 되는 겁니다. 구약이 과거가 되고, 구약이 시작으로 보면 오히려 미래로 펼쳐진 양상이에요. 구약이.

우리의 시간관념하고 완전히 반대가 되지요. 안 믿는 사람이 믿는 사람보고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보고 묻는 것은 “니 죽으면 어디 가는데?” “처음으로 돌아가지요.” “태초 어딘데? 니가 흙이 된 거.” “아니. 나의 최초는 흙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하나님의 형상이 누구지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요. “그게 언제인데?” 태초에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선택된 그 자리로 가는 겁니다.

그러한 현상이 바로 아까 이야기한 개별사례를 통해서 우발적으로 주어진 게 엘리야의 오늘 본문 야고보서 5장17절에 나오는 엘리야의 기도가 되는 거예요. 엘리야가 삼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한 것이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어요. 최초가 신약이니까 신약의 예수님으로부터 거꾸로 엘리야를 화살 방향을 엘리야 쪽으로 가게 되면 엘리야는 예수님 오시기 전에 엘리야의 마음과 성정, 그러니까 예수님의 신을 받은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엘리야는 끌릴 수밖에 없지요. 엘리야는 본인의 일을 하는 게 아니고 그 본인 안에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겁니다. 야고보서5장을 펼쳤잖아요. 그렇다면 그 바로 옆에 있어요. 베드로전서1장에요. 들출 필요 없어요. 같이 펼쳐있으니까. 1장10절에 보면,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절에 자기 속에 계신 그 다음에 누구의 영이라고 되어있어요? 그리스도의 영이에요.

우리가 아는 그리스도는 신약에 와서 나타나는데 여기 베드로전서는 이걸 이제는 완성된 상태에서 이미 모든 게 밝혀진 비밀이 밝혀진 입장에서 구약을 다시 해석하는 거예요. 그들 속에 그리스도가 우리가 받은 성령이 있는 것처럼 그들도 이미 성령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러면 시초는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시간 위에 따로 계시는 거죠. 최초가.

여러분, 서커스 천막이 어떻게 되어있습니까? 서커스 안에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서커스 천막 꼭대기는 유난히도 높이 하늘로 솟구치지요. 서커스에 온갖 깃발 달고 꽹과리 치고 이렇게 하잖아요. 천막 꼭대기가 이게 십자가라면 이것이 시초라면 이것이 뭐냐 하면 밑에는 신약 전개고 구약전개지요. 신약과 구약이 바로 시간의 마지막이 아니고 예수님의 초월이 이게 바로 종말이 되고 이게 마지막이에요. 마지막은 시간 속에서 나타나는 게 아니고 시간과 따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면 이 구약에 있는 성도나 신약의 성도는 이 예수님이 있는 완성된 현실이 있고, 또 밑에 땅에 미완성이 있는 현실이 있지요. 그러니까 이 현실은 무슨 현실이냐 하면 중복현실이 되는 겁니다. 중복현실 또는 중첩현실. 층으로 포개져 있는 현실이에요. 그러면 그 현실 속에서 엘리야가 기도한 것처럼 우리의 기도가 나오는데 그 엘리야의 기도나 우리의 기도나 모든 지향하는 바는 기도에 나오는 그 말, 단어, 개념, 의미는 지향하는 바는 서커스 꼭대기로 가는 거죠. 모든 게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서 하셨습니다. 내 인생은 없고 주께서 개별적인 개별사실로서 내 인생은 존재하지 않고 보편명제를 드러내기 위한 용도로서 안개 같은 이 세상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왜냐하면 이 꼭대기에서 이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등짝으로 고무줄을 놨다고 칩시다. 어떤 사람은 40년 살다 죽고, 어떤 사람은 90살까지 살다 죽고, 어떤 사람은 97살 살고 있더라도 어차피 몇 살 사느냐는 의미 없어요. 그 고무줄이 중요하거든요. 이 고무줄을 가지고 뭐냐 하면 관계라고 하고,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걸 언약관계라고 이야기합니다. 언약관계. 하나님의 언약관계로서 노란 고무줄이 딱 있는 거예요. 그 고무줄로 줬다, 폈다, 줬다, 폈다, 하는 겁니다.

일어나는 모든 사태는 어떤 사태냐, 이 고무줄이 있다는 말은 언약이 있다는 말은 이런 그리스도에 현실에 참여할 수 없는 자들이 있어요. 그 사람이 지옥 가는 사람인데, 지옥을 더욱 더 지옥 되게 하기 위해서 엘리야 선지자 기도가 툭 튀어나오는 내용은 삼년 육 개월 동안 비오지 말아라. 이것들아! 한 번 고생해봐라. 이리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왜 엘리야 이전 시대는 왜 삼년 육 개월 동안 비오지 않고 왜 엘리야 시대에 비가 삼년 육 개월 와야 되는가, 오늘 첫 번째 강의의 핵심은 이제 시작됩니다.

그건 뭐냐 하면 죄가 관영해야 할 때까지 대기해야 돼요. 타이밍이 중요하다고요. 왜 엘리야가 삼년 육 개월 동안 비오지 않도록 기도해야 되는가, 그 시대에 합당한 조치가 윗선에서 지시가 내려와야 되는 거예요. 그것을 개별사실에 불과한 엘리야를 통해서 툭 튀어나온 거죠. 엘리야는 성정이 우리와 같다고 해서 이 말은 뭐냐, “우리가 그래야 될 거 같아.” “우리는 그런 생각을 주께서 가진 걸 알았어.” 하는 어떤 예언이나 예견에 대해서 엘리야는 거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하고 성정이 같으니까. 우리가 내일을 몰라요. 내일은 모른다 말이죠. 그 점에 대해서는 엘리야나 우리하고 성정이 같은 사람이에요.

모르는데,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엘리야에게 삼년 육 개월 비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이 떨어진 것은 그걸 가지고 엘리야의 우수함, 훌륭함, 경건함, 기도함, 그걸로 돌리지 말라 이 말이에요. 기도는 뭐냐 하면 하늘나라의 밑바닥 문양이니까. 뭔가 거대한 하늘의 군함이 움직인다고 보세요. SF에 그런 영화 많잖아요. 외계인 우주선이 예상보다 그게 수키로 크게 된다 이 말이죠. 이게 이제 건물이 많은 뉴욕 시내에 이게 덮쳤을 때, 이 UFO가 너무 크기 때문에 여기 검은 그림자부터 쫙 있겠지요. 그래서 여기서 뭐 방사능 무기해가지고 대서양에 홍수 나가지고 뉴욕이 잠기고 하는 그런 영화 많이 나왔잖아요. 옛날부터. 이것이 하늘나라의 거대한 군함이 왔다면 여기에 뿌직 뿌직 여기서 뭔가 빛이 비추는 거예요. 이게 바로 엘리야다 말이죠.

삼년 육 개월 동안 하는 것은 이쪽 인간이 죄가 어느 정도 관영되어 있다는 것은 이 UFO 본 사람 관점에서 이미 파악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북한보고 삼년 육 개월 비오지 말라고 이렇게 아무리 속상하더라도 김정은 죽으라고 기도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어? 엘리야 기도는 응답됐는데, 성정이 같은 우리의 기도 김정은 죽으라고 기도하는 것은 안 되고 갈수록 살이 찌는데 그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우리가 미리 예견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우리의 속에 있는 분노와 한 맺힘이 이런 것들을 통해가지고 “아이고~ 내 남편 죽어버려라.” 또는 “우리 집 돈 빼먹은 도망친 놈 죽어버려라.” 이렇게. “거짓 복음 가르친 목사 가다가 사기 당해라.” 이런 식으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원한과 자기 한풀이에 지나지 않지 이것은 엘리야 기도와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면 돼요. “목사님, 어떻게 사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까?” 복음 나오면 돼요. 복음이 나오면 그 하는 일에 대해서 그 잘잘못을 따지지 마세요. 복음이 나오면. 복음은 모든 것이 예스가 되기 때문에 내 아니오, 가 예스됨을 훼방될 수 없음을 아는 게 복음적 믿음입니다. 쉽게 말씀드릴까요. 내가 나쁘다 하기 전까지는 나쁜 게 없었는데 내가 나쁘다 하는 순간 비로소 내가 나쁜 인간이 되는 거예요. 말장난하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UFO세계에서는 중첩현실에서는 나쁘다, 선악적으로 선악과 따먹는 차원에서 나쁘다, 옳다가 이미 거기서 극복된 상태잖아요. 우리가 그 속에 속하는 것은 잘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불쌍히 여겨주심으로 이미 거기에 합류되어있는데 그럼 우리가 그 티를 내야지. “잘잘못을 따지지 않아주시니 감사합니다.” 가 나와야 되는데 갑자기 그걸 깜빡 잊어버리고 “아이구, 기도 벌써 1주일째 기도를 안 해서 너무 죄송합니다. 신부님! 1주일째 기도를 못했습니다.” 신부 삐딱하게 앉아가지고 처방전내리는 거예요.

“주기도문 5번 외우세요.” 이리 삐딱하게 해가지고. 왜 삐딱하냐 하면 바라보게 되면 또 다른 음욕이 생길까 싶어서 지가 지 방어한다고 삐딱이 앉아요. 아이구, 삐딱이 앉는다고 음욕 안 생기나. 삐딱이 앉아도 저기 앞에 정윤희 사진 붙인 것도 모르고. 전부 다 이미테이션, 페이퍼 로즈 가짜 장미들, 전부 다 모방에 지나지 않은 거예요.

왜 그런 짓 하느냐 하면 악을 피하겠다는 거예요. 악을 피하겠다는 것은 어느 세계에 속합니까? UFO에 속하는 게 아니고 아직도 구원 못 받은 상태에요. 그건. 보편명제로 가지를 못하고 개별사실에 그저 머물러 있는 거예요. 못 빠져 나오고 있는 거예요.

악마가 도둑놈 돼가지고 우리를 보쌈을 했잖아요. 보자기로 묶었잖아요. 그럼 묶고 났으면 우리는 답답해가지고 주먹질해봐야 그냥 바깥 보자기만 그냥 불쑥 불쑥 튀어나올 뿐이지 보자기 풀고 헤치고 거기서 빠져나와서 아이고, 이 동네에 있었구나! 하는 것은 그건 우리 소관 아니고, 선악과 세계에서 저주의 세계에서 생명나무, 영생의 나라로 나가려고 하면 그건 예수 그리스도 같은 형상을 받은 자만 통과할 수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만 통과할 수 있다고요. 그래야 숨이 트이고 산소가 들어오거든요.

그런데 자기가 기껏 아는 게 선과 악이란 말이죠. 기껏 아는 선해봐야 뭐만 넓혀져요? 선악세계에 갇히기만 더욱 더 그 질곡에 그 늪에 몸부림치면 칠수록 점점 질곡에 빠지는 거예요. 악마가 좋다고 놀립니다. “더 열심히 해야지.” “더 바르게 살아야 돼!” “헌금 천원이 뭐냐, 적어도 십만원은 해야지.”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발버둥 치게 만들어요. “하루에 성경 두 장이 뭐고? 이게 배부르구나! 열장은 읽어야지.” “니가 성경 안 읽어서 니가 기도 안 해서 자식 성적 내려갔잖아.” 끊임없이 우리에게 완벽과 완벽에 완벽+완벽, 완벽 제곱에 완벽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거예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것을 무한이라 하는 거예요. 무한.

무한의 특징은 기하학으로 하면 원이 돼요. 원. 원에는 뺑뺑이 도는 거예요. 뺑뺑이 도는 것을 이걸 무한이에요. 고정되어 있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고정된 것을 도는 것. 고정된 것을 선으로 표시한 것. 이게 뭐냐 하면 선으로 표시하고, 이걸 함수로 한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게 삼각함수에요. 수학에서 이렇게 나온 거예요. 무한을 표현한 거예요. 무한을. 사인, 코사인의 곡선을 무한대로 해요.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인간들이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모든 파동이 말하는 파부터 해가지고 심지어 빛의 입자까지 이걸 하니까 우리는 무엇을 풀었다? 무한을 풀었다. 왜? 그래서 우리는 무한한 존재다. 과학이여! 승리하자. 이렇게 돼요. 과학이여! 승리하라. 인간의 음을 디지털화시켜가지고 이제는 이게 함수가 되니까 함수를 숫자로 대응해버리면 숫자로 해버리면 디지털 숫자화 되는 거예요. 0과 1로 다 모든 게 묘사가 돼요. 0과 1로.

DNA구조를 0과 1로 대입시켜 가지고 그 DNA를 똑같은 대조로 복제가 가능하지요. 인공지능에다가 맡겨가지고. 아주 양자컴퓨터까지 동원해가지고. 최신의 컴퓨터가 빅 데이터를 처리해버리면 똑같은 DNA 복제가 되면 자식은 나중에 병원에서 얻는 게 아니고 자식은 공장에서 만들지요. 내 DNA 피 좀 주고, 그 DNA와 똑같은 DNA를 다수 계속해서 필요한대로 만들고, 그 DNA에다가 뭘 집어넣는가, 부모한테 순종하라,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집어넣으면 되지요. 거기다가 더 집어넣을까요. 예수가 주시다. 믿음을 집어넣으면 되지요.

두뇌에 흐르는 호르몬을 시냅스 사이에 흐르는 신경전달물질을 뽑아내서 그걸 공장에서 복제를 하는 거예요. 복제를 할 때, 뭘 하느냐 하면 우울증 있다, 괴롭다, 그거 다 제거해 버리고 나는 항상 하하하 웃어! 기쁘고, 행복하고, 즐겁고, 이런 것만 해가지고 다시 주사기로 해서 넣어버리면 그 애 태어날 때마다 응애 응애 우는 게 아니고 하하하 웃으면서 행복한 인간되는데요. 그런 게 예견되는데 무슨 기도가 뭐 필요하며, 그거 연구하면 되는 거잖아요.

나중에 돈 되니까. 이게 금융자본주의와 만남에서 투자를 많이 받으면 얼마든지 그런 연구할 가치가 있어가지고 자기 인생의 보람을 얻고 내 존재 가치를 거기다 걸고 히트치는 거죠. 그게 인간들이 말하는 뭡니까. 보다 더 나은 진화, 진보된 세계. 그게 오늘날 이 세계 아닙니까. 이게 지옥이거든요. 가봤자 갇혀있는 거예요. 이 지옥에다가 성도에게 성령을 해가지고 엘리야 같은 기도를 하게 하실 때, 그 기도는 뭡니까? 이 세상이 왜 지옥일 수밖에 없고 왜 불바다 받아야 되는가를 증명하는 식의 기도가 나오는 거예요. 개별사실을 통해서 보편명제가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기 때문에 그들은 지옥가야 마땅해! 라는 사실을 예수님의 서커스 그 꼭대기에 있는 그 선에 의해서 아래쪽에 눈에 보이는 세상에다가 자기 백성에다가 집어넣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성령에 의한 성도의 기도가 되는 거죠. 이 세상이 죄가 이렇도록 관영되어 있다는 것. 성숙돼 있다는 것. 그래서 필연적으로 망해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성도의 기도를 통해서 나올 때 성도는 바로 주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기도하나, 헌금하나, 전도하나 모든 것이 바로 복음을 증거 한 증인이 되는 거예요. 시장에 물건 사러 가가지고 지 몸은 도저히 안 맞는데 뭐 요새 유행하는 동백에 나오는 공효진 옷하고 똑같이 나왔으니까, 물건 파는 사람은 속으로 지 꼬라지는 생각 안하고 이런 식으로. 지옥가려고. 그러면서도 물건은 파라 먹지요. 이 세상에 성도가 존재하는 이유는? 답변 뭡니까? 복음을 위해서 성도가 있는 거예요. 복음을 위해서. 보편명제를 위해서 있기에 개별사실이 살아있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은 내 선에서 하면 안 되고 옳고, 그르고 모든 것이 예스 패스 통과가 되는 그쪽에서 나에게 지금 이 땅에 살게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걸 누가 눈치 챌까요? 악마가 눈치 채지요. 이 세상 권력이 고린도후서4장4절에 보면 이 세상신이 눈치 채요. 인간은 눈치 못 채는데 악마는 눈치 채가지고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그 엘리야에게 또는 우리에게 뭐 합니까? 아까 했지요. 물어뜯기 시작하는 거예요.

왜 너는 너의 삶의 의미는 왜 내가 수용이 안 되고 해석이 안 되느냐. 니 미쳤구나! 이리 되거든요. 아까 처음에 강의했지요. 내가 사는 의미로 구성된 언어체계 속에 왜 니는 온전히 나한테 포섭되지 아니하냐. 여기서 분노가 일어나는 거예요.

어제 수요일날 어떤 분이 오셨는데요. 그 분의 역할이 뭐냐 하면 교회에서 하는 역할이 월급 받는 이유가 목사님 설교를 그대로 올리는 것. 올리는 일을 했는데 그 분이 어쩌다 보니까 복음을 알게 되었어요. 그러니 목사님이 월급주고 올리라고 했는데 그 사람은 못 올리겠다고 나온 거예요. 이건 복음이 아니기 때문에 못 올리겠다. 파업이죠. 그러면 그 주위에서 목사님하고 그쪽 장로님이 찾아와가지고 “아이고, 집사님, 사찰집사님 왜 그러십니까?” 이야기했을 거 아닙니까. 사찰 집사님이 복음을 이야기하려고 하면 할라치면 말을 막 막아요. 말 못하도록. 아이~ 교회가 이만큼 부흥된 건 다 주의 은혜고...., 죽 나온다 말이에요.

그러면 사찰집사님이 그건 아니고요. 그게 복음이 아니에요. 설명하려하면 못하게 만들어요. 이게 물어뜯는 거예요. 10분 쉬고, 여러분 한 번 또 뭐에 뜯겼는지를 얼마나 많이 뜯겨왔는지를 모기에게만 뜯기는 거 아닙니다. 왜 시건방지게 내가 아는 의미에 니가 왜 내 안에서 빠져나가느냐 말이에요. 왜 내가 다 너를 해석 못하게 만드느냐 말이에요. 뭐가. 뭐가 건방져가지고. 니는 내 밥이 되어야 되는데 왜 밥이 안 되느냐고 화를 내는 거예요. 세상에서. 갑자기 내가 왜 흥분하지.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안양20191010a야5장17절(밭이랑)-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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