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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7 11:43:59 조회 : 183         
11강-호 3장 4-5절(다윗을 찾으라)191016-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11.59.116)
11강-호 3장 4-5절(다윗을 찾으라)1910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3장 4-5절입니다. 구약성경 1259페이지입니다.

호세아 3:4-5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군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이 본문이 있는 곳이 바로 선지서 호세아입니다. 호세아를 보면서 우리가 호세아라는 이분이 다른 사람과 달리 하나님의 계시를 듬뿍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러면 계시를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걸 늘 생각해야 돼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추구하는 것, 그것이 굉장히 당연해 보이고 지당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이라는 것은 우리가 필요한 것을 주시려고 계시기에 달라고 하면 주신다. 교회에서는 너무나 당연해 보이지만 그런데 선지자의 삶과 비교해 보자는 말이지요.

선지자는 과연 자기가 달라고 해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서 움직였던 사람인가? 그것을 생각해 볼 때 오늘날 교회교인들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우리는 아쉬운 것을 하나님께 달라고 하지만 선지서의 호세아뿐만 아니고 선지자는 그런 자들이 아니에요. 주께서 다루시고 쓰신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내 것이 선지자에게는 용납이 되지를 않는 겁니다. 그러면 ‘선지자는 참 불쌍하다.’라고 생각하겠지요. 우리는 좀 자율적이고 선지자는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선지자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모습의 풍성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쉬울 때나 찾고 필요할 때나 찾아버리면 평소의 우리모습은 우리 것으로 가득 차 있어서 뭘 남에게 이야기하더라도 자기증거 자기 잘남을 뽐내는 것밖에 되지 않아요. 그런데 선지자는 하나님께 온전히 붙잡혀서 일하기 때문에 툭 건드리면 하나님의 계시가 나오지요.

우리가 호세아를 하면서 호세아가 본인의 의사대로 움직이거나, 본인의 의사대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어지간한 사람은 다 알겁니다. 자기가 원하는 여자와 결혼한 것이 아니고 음녀와 결혼해야 되고, 그 음녀가 다시 바람났고, 나중에 바람난 그 음녀를 찾아가서 그 남자에게 오히려 값을 치르면서 바람기 있는 여자를 다시 데려와서 살아야 한다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호세아의 자율적인 것, 개인의 생각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터무니없이 용납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호세아가 안됐다. 선지자가 불쌍하다.’고 그렇게 측은해 하면 안돼요. 누가 하나님을 많이 보여주고 많이 증거하느냐? 우리입니까, 아니면 호세아입니까? 그런 것을 대조해볼 때, 제가 이 말씀을 왜 드리느냐 하면, 이렇게 할 때 ‘이것 달라 저것 달라’ 하고 요구하는 것이 하나님이 되게 기뻐하는 것인 줄로 알지만 실은 우리가 하나님께 달라 하기 전에 주의 사명이 먼저 도달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지요.

그러면 선지자는 그렇다 치고 오늘날 우리에게는 무슨 사명이 부여되었습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오늘 5절이 그 해답을 제시합니다.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여기서 ‘다윗을 구하고’라고 되어 있어요. 다윗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죽은 사람을 마치 살아 있다 하든지, 혹은 그 사람이 다시 온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온다니요? 다윗의 그 인생은 이미 끝났어요. 다윗은 한 번 자기 인생 살다가 사라져버렸습니다. 구태여 다윗이 다시 올 이유가 없거든요. 그런데 이 다윗을 구해야만 여호와께 돌아온다는 방식이 된다는 겁니다.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다윗을 구하는 그것이 유일하게 여호와께 나아가는 길이고 그것이 또 하나님께 은혜, 은총을 받는 방식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 본문을 딱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당황하게 만들지요. 없는 다윗을 어디서 찾습니까? 다윗동상 같은 것 찾을 까요? 다윗을 어디서 찾는다는 말입니까?

호세아의 이 내용에 대해서 건성건성 볼 것이 아니고 이 대목에 올 때까지의 구약성경의 깊이를 가지고 오늘 본문까지 도달되어야 되는 겁니다. 여기서 다윗을 구한다는 말은, 지금 음녀라고 규정할 수 있는 이스라엘, 호세아에 나타난 음녀라고 규정할 수 있는 이스라엘이, 다윗은 죽어도 다윗이 남긴 후예들이고 파편들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이 왕이었어요. 다윗이 왕인데 그 왕이 통치하는 나라가 이스라엘이 아니고 실은 다윗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이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이 구체적 인물로 등장한 것이 다윗이었고 그 다윗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덮어씌워버리면 그 다윗이 죽어도 다윗의 후손들이 있을 것이고, 그 후손들에게 내내 하나님이 주신 다윗의 언약이 실제적으로 그 증거들을 보여주는 역사를 펼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다윗의 정신으로 살아야 되고 다윗에게 주신 약속으로 살아야 될 그 후손들이 호세아의 예언의 지적에 의하면 그들은 음녀가 된 겁니다. 그리고 그 음녀가 되었다는 대표자가 바로 호세아의 부인, 음행한 여인으로 표상으로 등장한 거예요.

호세아가 하나님 쪽에 서 있다면 음녀, 음행한 여인 고멜은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두 대표자가 만나서 한 가정을 이루는 겁니다. 간음했다, 음행했다, 음녀다, 라는 것에 대해서 호세아는 말합니다. 네가 여호와 외에 바알신을 섬겼기 때문에 그러하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 이 말은 뭐냐? 바알신을 섬기면 왜 잘못되었는가? 왜 바알신을 섬기면 안 되느냐 하면, 여호와에게는 언약이 있고, 그 언약은 인간이 지키나 안지키나 상관없이 줄곧 언약은 세상 끝 날까지 효과를 발휘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바알신은 인간이 채택한 신이에요. 바알신이 어떤 내용, 어떤 본질을 갖고 있다는 것은 바알신을 찾는 인간 자신이 그 신에다 내용을 담아놓은 거예요.

연초, 1월 1일이 되면 포항 가는 고속도로가 비좁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손바닥조각이 있는 구룡포, 거기서 떡국 먹고 가족의 건강과 안녕과 사업 잘되도록 대구시민들이 거기 가서 빈다는 말이지요. 간절곶? 거기는 울산인가, 하여간 울산이나 포항, 우리나라 반도의 호랑이 꼬리에 해당되는 거기 호미곶, 거기에 가서 새해 첫날 제일 먼저 떠오르는 축복의 햇살을 받으면서 비는 거예요.

그게 바알신이거든요. 그런데 고속도로가 너무 비좁잖아요. 비좁으니까 어디로 가느냐 하면,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가는 거예요. 그러니 교회가 뭐냐? 바알의 산당이 되는 겁니다. 바알의 신전이 되는 거예요. 여호와가 누구냐? 그런 것은 알고 싶지도 않아요. ‘내 소원을 그냥 담아서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부탁하는 대로 축복만 해주면 내가 십일조 줄게.’ 이러한 거래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교회마다

수능 며칠 안 남았거든요. 요새 새벽에 난리도 아니에요. 조계사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계사 절만 하는 것이 아니고 조계교회들이 있어요. 온천지가 조계교회라니까요. 절인지 교회인지 분간도 안 됩니다. 내 것 지키는 거예요. 내 것. 호세아처럼 사명을 받은 것이 아니에요. 신의 존재 의미는 뭐냐? ‘내 것 잘 지켜주면 섭섭지 않게 해주겠다. 그리고 예수까지 믿어서 천국도 가 줄게.’ 이것 때문에 교회 나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음녀의 음행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여호와께서는, 인간들이 그런 짓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삐져서 ‘나 언약대로 안 해.’ 이게 아니라 이스라엘이 벌써 그런 줄 아시고 이스라엘은 망해도 언약은 유효하게 주께서 이끄시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선지자가 음행한 이스라엘에게 찾아오신 거예요.

그냥 지옥 가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고, 인간은 못나도 그 못난 인간을 건지시는 하나님의 은총은 유효하고 계속 지속되어야 되거든요. 물건 산 주인은 성질이 엉망이라서 물건을 깨뜨리더라도 삼성서비스는 유효하게 계속되는 거예요. 서비스는 계속 해주겠다는 거예요. 그 서비스가 3장 5절에 ‘은총’, 하나님의 은혜에요. 은혜가 언약에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다윗이 후손들이 파편이 되면 그들은 유령처럼 떠도는 자가 돼요. 어렵게 이야기해드리면 이렇습니다. 다윗의 이름하에 그들은 이스라엘로 살았는데 그들이 다른 신을 섬겨버리면 다윗이라는 이름이 날라 가버려요. 이름이 없으면 인간은 파편이 되고 떠도는 유령처럼 되어버리는 거예요. 이름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군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이렇게 여섯 가지의 ‘없다’가 줄줄이 나열되어 있지요. 거기에 뭐도 포함되느냐? ‘다윗이 없다’가 없음의 연합체를 이루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그들은 다윗을 잃었어요. 다윗이 없습니다. 본연의 정체성이 없는 거예요. 자기가 누군지 진짜 자기의 알갱이가 없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에게 언약이 없이 된 거예요. 언약이 없는데 언약은 그들을 떠나지 않아요. 그들이 원하는 언약은 없어지고, 그런 그들은 각자 자기 이름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이름 가지고는 천국에 넣어주지 않습니다.

반드시 대표자 이름이 있어야 돼요. 사도행전 4장 12절에 보면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했어요.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우리 이름은 소용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신들은 언약이 없기 때문에 각자의 이름으로 바알신을 섬기고 있는 거예요.

실은 그 하나님의 다윗에게 주신 언약이 인간을 통해서 성취된다는 것은 애초에 하나님께서 기대한 적이 없어요. 우리는 신약에 속한 성도기 때문에, 이미 신구약을 알고 있어요. 뭐냐하면, 언약을 이루신 분이 따로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언약을 이루신 분이 우리를 구원할 때는 무슨 조건을 내세우냐 하면, ‘네가 잘했다, 못했다.’를 일체 우리에게 묻지를 않아요. 그게 은총입니다.

그러나 개인적 이름과 체면과 위신을 갖고 있으면 항상 무엇을 내가 나에게 닦달 내느냐 하면, ‘너 똑바로 행동했는가, 잘했는가?’ 내가 나를 그냥 두지 않고 계속 책잡고, 나를 구박하고 공격해야 돼요.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분발을 느끼면서 잘해보려고 반성하면서 회개하고, 참회라는 말을 하면서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다른 신을 섬기는 티를 다 내는 거예요.

주님의 언약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뭐가 나오느냐? 나는 이렇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자기 잘남과 자기 증인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은 호세아선지서에 의하면 이것이 언약이 없는, 언약이 있는 여호와를 버린 대가에요. 언약을 잃어버리면, ‘나는 이 땅에서 부자될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하는 것을 바알신을 섬김으로서 증명해보고자 하는 거예요.

다윗의 은총으로만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내 이름은 그 앞에서 없어지거든요. 그런데 그게 우리인간의 본성으로는 용납이 되지 않는 겁니다. 왜? 나는 내 잘난 맛에 살고 싶거든요. 상당히 개인주의적이에요. 언약이 없이 내 잘난 맛에 복을 따로 챙길 수밖에 없는 다른 신, 바알신을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를 거예요. 호세아에서 이스라엘을 규정할 때 음행한, 간음한 내 백성이라고 규정을 하는데, 음행이라는 것은 어디서 등장하느냐? 결혼하기 전까지는 음행이 없어요. 결혼을 해야 음행이 생기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음행이나 간음이라는 것, 음행하지 말라는 것을 인간이 지킬 수 없는 이유가, 인간이 남성여성이라는 젠더, 어떤 성차적인 의식을 낳는 순간부터 이미 음행은 시작이 된 거예요. 결혼을 안 한 상태에서 간음이란 성립이 안 되거든요.

그러면 결혼은 뭐냐? 음행을 본격적으로 하는 겁니다. 결혼할 때 사랑으로 한다 했거든요. 사랑인데 사랑은 호세아나 성경에 보면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에요. 이미 범죄한 인간으로서 남성이나 여성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는 이상은 그 의식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자동적으로 음행이 시작되는 거예요.

음행을 해도 음행이지만 음행을 안 해도 이미 음행을 하고 있는 거예요. 궤변처럼 들리지만 아니에요. 우리가 천국에 가면 남성 여성이 없습니다. 그 천국이 부활의 세계 온전한 사랑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는 온전한 사랑은 없어요. 그러면 온전한 사랑은 어디서 나오느냐? 음행을 경유해야, 음행이라는 코스를 접어들어야 비로소 진짜 예상 못한 사랑이 음행 속에서만 나와요.

음행을 비켜가게 되면 온전한 사랑은 없어요. ‘음행 없이 결혼하겠다.’ 누구나 그러고 싶어요. ‘나는 당신과 결혼하는 것이 온전한 사랑이다.’ 마음은 그런 마음이지만, 이미 당신은 나에게 남자요, 나에게 여자요. 나는 여자요, 당신은 남자라고 할 때 이미 그것부터 남성 여성이 구별된 의식 자체가 간음과 음행은 시작이 된 겁니다.

그리고 결혼하는 이유는 과연 인간이, 남자 여자가 합쳐서 온전한 사랑을 성사시킬 수 있는가 확인해보는 겁니다. 실패합니다. 어떤 결혼도 음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혼인은 없습니다. 내 님아, 강을 건너지 마오. 백날 해도 소용없고 남편을 위해서, 아내를 위해서 서로를 희생해도 그것은 다 음행입니다. 왜냐 남성, 여성, 구분 그 자체가.

온전한 사랑에서는 남성 여성이 없어요. 그냥 하나의 가족이에요. 아가에 나옵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하나의 패밀리라는 거예요. 가족끼리는 남성 여성이 없잖아요. 그러면 뭐냐? 여자는 사랑의 여성형이고, 남자는 사랑의 남성형이에요.

보통 장모가 사위를 부를 때 사위라고 부르지 않고 이 서방, 박 서방, 최 서방, 이렇게 하지요. 성경에서, 천국에서는 뭐냐? 사랑 박, 사랑 이, 사랑 최, 이래요. 사랑의 표현형이에요. 천국의 사랑의 표현형. 그게 솔로몬 아가에 나오는데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입니다. 다윗의 언약이 완성될 그 때는 남성형, 여성형으로 있기 때문에 이미 간음이나 음행이라는 것을 넘어선 저쪽편의 세계에요.

그러나 인간은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여자 아니면 남자로 규정되고 확정되었기 때문에 여자가 남자를 안다, 남자가 여자를 안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여자는 여자를 위해서 남자가 존재하고, 남자는 남자를 위해서 여자가 존재하는 음행의 바다에 빠지는 거예요. 간음의 바다에 출생해서 거기서 평생을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음속으로 음란한 생각을 하면 이미 간음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네가 노력해서 벗어나라.’가 아닙니다. 다윗이 간음죄를 범한 것이 아니고, 다윗이라는 존재 자체가 속해있는 그 죄가 다윗을 통해서 간음죄를 드러낸 거예요. 다윗언약이 간음죄만 있는 것이 아니고 살인죄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

물론 다윗은 둘 다 저질렀지만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자체 모두가 호세아에 의하면 음녀의 세계 간음의 세계가 되는 겁니다. 사랑의 세계는 아니라는 뜻이에요.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서, 언약이 없는 세계가 음행의 세계에요. 예를 들면 아프리카 돼지열병 때문에 나라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그 원인이 북한에서 넘어온 돼지를 통해서 왔다.

북한에서 아프리카 돼지 열병이 먼저 돌았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북한에서 아프리카 돼지열병이 남쪽으로 전염이 되었는가? 보니까 휴전선을 통해서 멧돼지들이 하나의 매개체가 되어서 남쪽으로 넘어왔다고 밝혀졌거든요. 양성반응이 나왔어요. 그래서 멧돼지를 다 죽이려고 하니까 동물보호단체에서 못 죽이게 하는 거예요.

그 발상. 동물의 생명도 생명이라는 것. 개 같은 반려동물도 생명이고 인간생명도 같은 생명이기 때문에 함부로 쏘면 안 된다는 것, 그냥 죽이면 안 된다는 겁니다. 아프리카 열병이든 뭐든 그것들 때문에 온 천하 돼지 다 죽이게 만들고, 농민들 자살하게 만들고, 그래도 그것들 죽이면 안 된다는 겁니다.

자, 그렇게 되면 좋은 나라 되고 좋은 세상 된다는 겁니다. 여기 뭐가 빠졌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빠졌어요. 하나님의 언약의 빠지니까 어떤 사고방식이 있느냐 하면, 인간이 이성적으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게 되면 필히 좋은 세상이 온다는 사고방식, 이것이 바알생각이에요. 모든 것은 인간이 하기 나름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언약이 투입되게 되면 인간은 날 때부터 간음자요 음행자에요. 인간은 죄 외에는 내놓을 것이 없어요. 온전한 결혼 그런 것 없어요. ‘나는 음행 안한다.’ 그것도 음행이에요. 남성, 여성, 그 의식 자체로 음행이 잠복되어 있다니까요. 그 의식하는 자체가. 여성의 자의식, 남성의 자의식 자체가 그것이 음행이에요.

어떤 사람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온전한 사랑이라 하는 것은, 내가 바로 간음자, 음행을 하나 안하나 내가 바로 간음자라는 것을 인식할 때 비로소 거기서 십자가만이 사랑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왕도 없고 군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다고 하는데, 군은 신하가 없다는 소리입니다.

이렇게 계속 없다고 하는데 여기 드라빔이라 하는 것은 가정마다 있는 잡신들, 우상신들이거든요. 주상이라 하는 것은 동네에 세운 비석같은 것, 역시 우상이지요. 에봇이라는 것은 제사장이 점칠 때 입는 옷을 에봇이라 해요. 이것은 인간들이 국가라는 자체가 언약이 없을 때는 이해가 안 되는데 언약이 있어버리면 국가라는 그 자체가 음행의 집단체에요.

왜냐하면 국가라는 것이 어디서 나오는가? 인간의 개인적인, 집단적인 권력의지에서 나온 것이 국가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의 후예 그 개인적인 권력의지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나는 할 수 있다’에서 나왔어요. 가인의 레벨이 다 그래요.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이 자연을 극복하고 생존할 수 있다. 그리고 미래의 모든 발달은 우리하기 나름이다. 우리가 생각만 모으면 얼마든지 발달할 수 있다. I can do it.

나는 그것을 할 수 있다는 정신, 내가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힘으로 작용하고, 그 힘이 약한 자를 나에게 포섭해서 힘을 더 키우는 행동으로 나서게 되어 있어요. 그 힘의 최종적인 힘이 뭐냐? 그게 정치적 조직인 국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왕도 없고 군도 없다는 말은, 이미 인간은 국가라는 거대한 권력지배체제 안의 하나의 부속품, 권력망의 주고받는 하나의 그물코의 일부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국가라는 것을 굉장히 자연스럽게 여기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요. 그게 성경에 보면 짐승인데. 악마의 가현체거든요. 보이지 않는 영적존재, 악마의 가현체가 국가라는 겁니다. 그러면 국가는 누가 만드는가? 개인이 만들어요. 개인이 만든 드라빔부터 시작해서, 거꾸로 드라빔, 에봇, 주상, 그 다음에 신하, 왕,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권력망 체제를 형성하는 겁니다.

힘이 모자랄 때 국가의 권력을 더 원하는 거예요. 권력이라는 것은 힘의 촘촘한 구조입니다. 사람들이 혼자 집에 있을 때는 힘을 못 느끼지요. 그런데 밖에서 어떤 경찰이 “실례합니다. 동부경찰서에서 나왔습니다.” 하면 갑자기 뭘 느낍니까? 힘의 현실성을 느낀다고요. “댁의 아들이 있는데 논산훈련소에서 통지받았는데 왜 안갑니까?” 하게 되면 뭔가 압박감을 느끼면서 밥맛이 떨어져 버리는 거예요.

권력이라는 것이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눈에 안 보이는 것은 맞는데 안 보인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없는 게 아니구나.’ 여러분, 인천공항 검색대나 해외에 나가서 검색대를 통과해 보세요. 혼자서 뭘 룰룰라라, 백두산 올라갔다 해도 검색대 앞에 딱 오게 도면 무조건 줄서야 됩니다. 그게 권력이에요.

그래서 알튀세르라는 철학자는 말하기를, 보이지 않는 권력이 언제 오느냐? 호명할 때, 권력기관이 나를 호명할 때 비로소 인간은 하나의 주체가 되는 겁니다. 그 나라가 이름을 부를 때, 누가 내 이름을 호명할 때, 나는 그 이름 부르기 전부터 처음부터 엮여 있는 그런 권력망 속의 일부가 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뒤늦게 발견한다는 거예요.

그걸 주체라고 해요. 현대인의 주체는 권력 안에 존재하는 주체지 혼자 단독자로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꼼짝 마라, 에요.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국가가 대신해주고, 국가가 할 수 없는 것은 내가 하고. 국가로부터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것, 이게 현실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죽고 난 뒤에 그 이스라엘이 다윗의 자손, 후손들이 제대로 하나님이 원하는 언약의 국가를 이루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없다’가 연속돼요. 없다, 없다, 왕도 없고, 군도 없고, 없으니까 떠도는 다윗의 후손들은 파편이고 조각들이지요. 조각인데 그들은 각자 이름이 있을지 모르지만 진짜 그들의 이름은 없어요.

없는데 나중에 마지막 때 그들이 진짜 자기 이름을 찾아오는 거예요. 다윗의 이름을 부르는 겁니다. 각자의 자기 이름은 이름도 아니에요. 자기 운명과 미래와 관련 없어요. 언약과 관련 없거든요. 언약과 관련된 이름을 부르는 것, 다윗의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언약 따라서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 흩어져 있는 백성들을 찾아가서 불러내는 겁니다. 뭐라고 불러내는가? “이 음녀야. 이 음행한 자야. 네가 사랑을 알아? 모르지? 넌 사랑을 몰라.” 부를 때 왜 음녀라고 부르는가? 그 다윗언약의 내막을 깨보면 그 안에는 딱 두 개가 들어 있어요. 하나는 죄가 들어 있고 하나는 의가 들어 있습니다.

시편 51편에 다윗의 인생을 통해서 그걸 대표로 보여줬어요. 다윗은 간음죄를 범했고, 살인죄를 범했는데 시편 51편에, 나단 선지자가 등장해서 바로 당신이 죽어야 될 죄인의 대표자라고 지적합니다. 그럴 때 다윗은 기뻐해요. 왜냐하면 선지자가, 하나님 쪽에 있는 분이 비로소나에게 찾아와서 ‘당신은 ( )다.’를 분명해 이야기해줘요.

“당신은 죄인이다.” 죄를 짓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언약은 ‘네가 잘했나, 못했나?’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고 ‘네가 누구냐’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는 죄인이라고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석고상 만들 때 ‘알지네이트’라는 재료를 사용해요. 알지네이트는 치과에서 이를 본뜰 때 사용하는 재질입니다. 굉장히 물렁해서 내 손가락의 석고상을 만들고 싶으면 알지네이트에 손가락을 집어넣어요.

물렁한 재질 속에 손가락을 넣었다가 쏙 빼버리면 그 형상이 그대로 남아 있어요. 손가락이 들어갔던 그 공간만큼은 비어 있는 채로 손가락을 뺄 수가 있어요. 거기에 석회물을 부어버려요. 붓고 그게 굳으면 겉에 있는 알지네이트를 뜯어내면 손가락과 똑 닮은 석고상이 나오는 겁니다. 이게 바로 형상 만들기에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형상을 만들 때 언약으로 만들거든요. 먼저 알지네이트라는 그 죄를 집어넣는데 그 죄가 호세아에서는 음행이고 음녀에요. 네가 음행을 해서 음녀가 아니라, 음행을 하나 안하나 관계없이 권력망, 언약의 권력망 속에서, 죄의 권력망 속에서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음행자가 되는 겁니다.

남성, 여성, 젠더의식, 성의식이 있다는 자체가 항상 음행의 잠재성을 지니고 있는 거예요. 다만 다윗은 돌출되었다 뿐이지 음행을 안했다고 해서 음행자 아닌 것이 아닙니다. 항상 다윗은 대표자가 되니까요. 살인도 마찬가지고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이라고 예수님이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방법은 먼저 죄를 유발시켜야 돼요. 그 죄를 유발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누굴 사용하느냐 하면, 악마를 사용합니다. 악마를 사용해서 이스라엘에게 바알신이라는 악마의 종교에 훅 가게 만들어요. 유혹 당하게 만들어요. 그런데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유혹을 절대로 못 이기게 되어 있어요. 자기 욕심을 못 이기게 되어 있다고요. 인간자체가.

이미 거기에 대한 면역성이 다 떨어져 버렸어요. 50년을 바르게 살아도 51년째 무슨 일이 일어나면 거기에 빠지게 되어 있어요.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고 아담의 dan 때문에 그런 것이니까 자책할 필요 없어요. 언약에서는 잘잘못을 안 따지니까. 다만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구원이 아니고 자기 형상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언약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의 모델이 되는 거지요.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 속에, 음행 속에 전부 다 집합시킵니다. 집합시켜 놓고 거기에 다윗을 집어넣어버려요. 오실 다윗을. 로마서 1장 3절에서 그것을 복음이라 합니다. 복음이라 하는 것은……, 이해를 잘 해야 돼요.

복음이라 하는 것은, 우리를 건지러 누가 왔다는 것이 복음이에요. 내가 노력하는 것이 복음이 아니고, 내가 노력해봤자 소용없는 우리를 주께서 노력과 관계없이 그냥 왔다는 거예요. 그냥 건져주러 오는 거예요. 뒷덜미 목잡고 끄집어내기 위해서 오는 거예요.

로마서 1장 3절에 보면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다윗의 혈통을 통해서 복음, 하나님의 아들이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오시고, 그냥 오셔서 그냥 그 죄 속에 같이 있으면 안 되잖아요. 대표적으로 사흘 만에 부활한 거예요. 복음이 뭐냐 하고 물으면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에요.

사적인 혜택을 받는 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나 이거 아쉬운데 이거 주세요.” 그게 복음이 아니에요. 개인적으로 가져가는 것은 없어요. 오히려 가져감을 당해야 돼요. 주님의 것이 되어야 돼요. 주님이 새로 만든 그 손가락 석고상 안에 포함이 되어야 된다고요. 예수님의 형상을 만들 때 주께서 죄 속에 들어왔다가 십자가에 저주받고 삼일 만에 의로서 부활되는 죄와 의, 그 두 가지 내용이 언약에 담긴 내용입니다.

그 내용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요. 골로새서 1장 14, 15, 16절에 계속 나와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주신 이유는, 언약이라는 무형체를, 이스라엘이라는 유형체로 만들고 그 이스라엘을 다시 무형체로 만드는 겁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으니까요.

눈에 보이는 인간을 통해서 그들에게 속하지 않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로 만들기 위해서 다윗을 보내시고, 다윗의 자손을 보내셔서 그분이 왕으로 오셨고,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죄 속에서 의를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뭐냐? 반드시 그 절차를 인식해야 됩니다. ‘내가 간음자고 내가 음행자구나.’ 그러면 결국은 뭐냐?

‘내가 음행자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함이구나. 내가 사랑을 원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욕심에 해당되는구나.’ 사랑을 원한다고 사랑을 주는 것이 아니에요. 주께서 음행에서 사랑이 보이도록 하고 사랑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김 서방, 이 서방, 최 서방처럼 사랑 김, 사랑 박, 사랑 최, 사랑 이, 가 되게 하시는 거예요.

제가 어떤 분과 이야기를 하는데 문득 제 자신에게 새로움을 느꼈어요. 교회 오면 목사님, 목사님, 하거든요. 그런데 그분이 뭐라고 하느냐? 이 목사님이라고 했어요. 아, ‘이 목사님’ 정말 오랜만에 들어봐요. 이 목사라는 것이 어떤 경우냐 하면, 성이 다른 목사가 있을 경우에는 구분해서 앞에 이 씨라고 붙이는 거거든요.

그러나 차라리 이를 뗐으면 좋겠어요. 그냥 목사님이라고 했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여러분들도 사랑 박, 사랑 김, 사랑 이, 보다 그냥 그 자체가 사랑이어라. 구분 안했으면 좋겠어요. 너도 주께 사랑, 나도 주께 사랑. 이미 사랑이라는 석고상 안에 놓여 있는 삶이 될 때 그게 신약의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이야기하지요. 이게 주님이 작품이고 주님의 결과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은 뭐냐? 알지네이트지요. 톡톡 망치를 가지고 칩니다. 망치로 치는데 어떤 사람은 한 90년 걸리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백년 걸리는 사람이 있는데 톡톡 쳐내요. 떨어질 때마다 간음죄 떨어지고, 살인죄 떨어지고, 욕심 떨어지고, 떨어지면서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주님의 의만 자랑하는, 내 모든 것이 죄 덩어리지만 그 죄가 떨어지게 되면 떨어진 그 틈새사이에 주님의 의가 비칠 때 이제는 더 이상 우리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내 사랑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 사랑만 자랑하는 주님의 패밀리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호세아에게 주신 복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순수하고 싶어 합니다. 참 착하게 살고 싶지만 국가라는 짐승 속에서, 밥 먹고 살아야 된다는 이 현실 속에서 우리는 변명과 핑계 외에는 내놓을 것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주여, 죄 속에서 스스로 빠져나갈 수 없었는데 주의 이름을 부릅니다. 주의 이름이 오셔서 주의 형상 만들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1강-호 3장 4-5절(다윗을 찾으라)191016-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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