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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0 14:57:14 조회 : 128         
안양20191107b야5장19절(부정성)-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119.207.152.148)
안양20191107b야5장19절(부정성)-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율법 앞에서 율법을 지킬 생각하지 마시고요, 율법에서 내가 누구냐를 다시 한 번 파악하는 기회가 되어야 돼요. 나는 나 때문에 살지, 너 때문에 사는 게 아니거든요.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당연한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어떤 상대를 고를 때는, 보통 나에 필요한 상대를 내가 고르는 입장인데, 엄마 같은 경우에는 고루는 게 아니고, 지가 내 몸에서 이렇게 하나가 둘로 분리되어서 나왔기 때문에 처분이 곤란한 거예요. 내치고 싶어도 내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인간의 자식사랑을 동물들의 자식 사랑하는 것과 자꾸 연관을 시키는 거예요. 자식 버리면 짐승보다 못하다는 이유가 짐승도 지 새끼 챙기는데 인간이 되어서 뭐 그러느냐, 그런 이야기하거든요. 그 배경의 문화는 인간이 특히 엄마가 신을 찾는 것은 자식 때문입니다. 신을 찾을 때 그냥 안 찾는다는 이야기에요.

신을 찾을 때, 아무 이유 없이 찾지 않습니다. 정말 내 힘이 부딪힐 때에 내가 정말 지키고 싶은 어떤 목적이 있을 때에 그게 비겁하지만, 신까지 내 일에 좀 관여하라고 신의 손목을 잡고 잡아당기는 거예요. 내 일을 먼저 도와 달라고 신을 찾는 거예요.

이 종교라는 것이 얼마나 나의 투사에요. 나를 이렇게 허구에다가 비치는 게 신이라니까요. 신의 자체가 허구에요. 교회들이 성경을 안 보는 이유가 신을 아는데 왜 보느냐 말이죠. 성경 봐서 이성적으로 아는 신보다 나는 자식 보면서 절로 신에게 기도된다. 지금 자기가 갖고 있는 그 신은 이질성이 아닙니다. 동질성이에요. 나를 닮았어요. 어느 신에게 자식 망하라고 비는 그런 엄마가 어디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자식을 망하게 하거든요.

이 돋아난 이 국립공원의 돌판 위에 이스라엘이 있다면 나머지 이방민족의 얼마나 많은 자식이 있고 부모가 있고, 얼마나 많겠어요. 여기는 전부 다 불바다입니다. 불의 심판이에요. 이스라엘이 없는 민족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잘났다고 여기고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이것이 얼마나 경건하고 거룩하고 이거는 하늘의 사랑이라 하면서 자기들끼리 그렇게 포장을 하는데 모든 윤리, 도덕의 포장에는 뭐냐 하면, 나는 폼 나게 존재해야 된다. 영원히. 그 사고방식이 깔려있다 말이죠.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종교를 만들어 열심히 빌지요.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이스라엘도 이들하고 똑 닮았어요. 오직 이스라엘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나님이 둘 다 다 없애버렸습니다. 이스라엘도 없애고, 이방나라도 없애버렸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는 죄에서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가 의가 되는 과정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심어버립니다. 심어버릴 때 우리는 우리가 잘났다. 우리가 의라고 여기거든요. 의라고 여기는데다가 하나님의 언약을 심어보니까 이질성이잖아요. 그럼 의의 이질성이 뭐지요? 악이고 죄가 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인간들은 뭐냐, 악하게 보는 겁니다.

왜 이렇게 멀쩡한 나를 왜 힘들게 합니까? 자기가 멀쩡하데. 자기가. 멀쩡한 인생을 왜 이렇게 망쳐놓습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거기다가 징을 박는데, 율법을 박거든요. 이건 지킬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니가 의롭다고? 그럼 율법을 다 지켰느냐?” “다 지켰는데 한 개 남겨뒀습니다.” “그렇다면 니는 내 적이야.” 이게 야고보서2장10절의 말씀이에요. 쉽게 말해서 율법을 지킬 사람은 있다, 없다? 아무도 없는 거예요.

아무도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일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 과정을 믿어야 돼요. 그 과정이 중요한 거예요. 오늘 본문 봅시다. 야고보서5장19절, 너희 형제들아, 여러분들이 이제 여기까지 제가 요구할 수 없지만, 형제라 하는 개념은 기존에 있는 예수 믿는다고 우기는 사람의 집합이 아니에요. 형제는 없어요. 형제는 없고 주께서 그 때 그 때 만들어내실 거예요.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내는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누구 때문에 삽니까? 나 때문에 살아요. 그래서 나와 너 사이에 뭐가 발생하느냐 하면 차이가 발생되고, 이 차이가 내게 완전히 복속이 되지 않는 한 동질성이 위배되기 때문에 그 사람은 타자가 되는 거예요. 남이 된다 말이죠. 부부가 있다면 아내는 아내 본인을 위해 살고, 남편은 본인을 위해 살아요. 다만 정치적 협상으로서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협상했을 뿐이지 어디까지나 남남이다 말이죠. 그래서 이건 결국 하나가 될 수 없는 겁니다.

하나가 될 수 없는데 주님께서는 지금 뭘 시도하느냐 하면 하나 될 수 없는 자기 백성과 공존을 시도하고 있는 거예요. 엄청난 계획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건 엄청난 작업이기 때문에 여기는 시공자가 나타나요. 시공. 시공을 할 때 주님께서 언약가지고 징 들고 와서 박아버리는 거예요. 일방적으로 박아버리는 거예요. 제가 이스라엘 안에 비워두라 했지요. 우리는 우리 안에 비워두는 게 없어요. 항상 내 귀한 것으로 그걸 빈곳이 없게 만들어요. 가장 중심에서는. 모든 걸 양보해도 마지막 양보할 수 없는 게 있어요. 자기의 가치, 자기의 의미입니다. 존재하는 의미.

사람이 아무리 성격 좋아도 결국 화나게 되어있는 이유가 마지막 걸 아직 들 건드렸기 때문에 화를 안 내고 있을 뿐이에요. 피아니스트 조성진이는 지금껏 24살까지 화내 본적이 없다는 거예요. 쇼팽 대회에서 우승한 그 사람은. 항상 그렇게 화난 적이 없다는 겁니다.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제일 중심자리를 마치 성막 안에 아무도 없듯이 성 중심자리를 비워놓게 되게 되면 그 인간은 졸지에 뭐가 돼요? 이스라엘의 법대로 졸지에 제사장이 되는 겁니다.

자, 제사장의 특징은 자기를 믿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제사장의 특징은 나보다 더 귀한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내 안에 들어있다는 것. 같이 산다는 것. 공존. 어디에서? 주님이 법을 통해서 같이 동반해서 왔던 시. 공간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같이 공존하는 겁니다.

주님이 시간과 공간에서 시간적으로 공존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난해하지만 너의 과거는 너의 과거가 아니고 나의 과거였고 너의 미래는 너의 미래가 아니고 나의 미래고, 너의 현재는 너의 현재가 아니고, 나의 현재라는 겁니다. 그걸로 다 바꿔버려요. 그래서 가을 돼가지고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 옛날에 참 여고시절이 좋았었지. 에이, 설거지나 해라. 너의 과거에 그렇게 음악 듣고 그렇게 빠져가지고 있을, 지금 상황이 이 현실 상황이 주님의 법에 의해서 유지되는 상황인데 인간은 자기가 괜찮았던 추억 속에 조작해 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허구지요. 허상이라니까요.

공사장에 어떤 사람이 교통 방해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교통 모자를 썼다면, “아휴, 그 노랑모자는 노랑은 은행잎을 닮았어...,” 이렇게 하게 되면 “당신이 한 번 공사해 볼래. 지금 뭐 낭만적인 것에.” 지금 공사하고 있는 중에 이 모자 쓰는 거 빨리 벗고 집에 가서 쉬고 싶은데. 공사한다고 지금 먼지 덮어 쓰고 있는데. 이걸 또 제 삼자가 보면 그것도 아름다워. 당사자는 죽을 지경인데요. 점심은 기사식당에서 허술하게 먹고 지금 일하고 있는데. 그 사람은 자기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걸 아우라라고 하는데. 벤야민이란 사람이 지어낸 아우라. 이 아우라가 문제라. 자꾸 뭐 주위에 천주교 마리아나 예수님 사진보면 그려놨지요. 부처에 있는 반영된 빛 같은 거. 광채를 그려놨지요. 그게 아우라에요. 아우라.

어느 집에 가보세요. 갑자기 전시장 아우라가 확 오잖아요. 어떤 집에 가면 옷을 지 멋대로 던져놔 가지고 아우라가 다 죽었어. 어떤 집은 깨끗이 치운 아우라가 확 오고. 그 아우라는 주께서 다 그게 무의미하게 진작 개무시하게 다 치워버려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의라고 여기기 때문에 오히려 이질적으로 반대로 율법을 줘버립니다. 그러면 졸지에 우리가 의가 뭐가 됩니까? 죄인 되는 거죠. 이게 바로 구원이에요. 놀랍게도. 이게.

우리가 아는 상식은 의인에서 구원되는 게 상식인데 이게 아니고, 실제 시공 작업에서는, “의인인 내가 자기 의로 똑바른 내가 천하에 없는 당장 불 심판 지옥 불에 넣어도 잘하셨습니다.” 할 수밖에 없는. 율법을 위반했다는 그 죄 때문에. 율법을 앞세우지 않고 내가 있고, 하나님이 있다고 여겼던 그 주님을 모독한 그 죄로 인하여 나는 주님께 대항하는 악마와 같은 존재로 인식하는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그게 바로 이미 우리는 그 과정 속에 말려들어갔습니다. 말려들었어요. 자기 지키는 게 되지를 않는 거예요.

19절, 형제들아, 형제는 없어요. 주께서 작업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율법이니까. 법이니까요.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겠습니까? 인간은 자기만을 위해 사는데. 안되지요. 될 수가 없어요. 좀 설명이 필요하겠지요. 형제를 이야기 쉽게 하기 위해서 이웃으로 개념을 바꾸겠습니다. 이웃으로.

이웃은 한 명이 아니지요. 두 명이 돼야 이웃이 성립됩니다. 나는 나의 동질성밖에 없는데 저쪽을 사랑한다고 할 때는 아무리 사랑해주고 사랑해줘도 이건 사랑이 성립이 안 됩니다. 언제 강남에서 그런 이야기했는가. 인간의 용서도 의미가 없다고 했어요. 인간이 인간을 용서하는 거 의미 없어요. 용서 받은 것도 의미 없고요.

우리는 현찰이 좋지, 용서는. “돈 빌려줬으면 돈 갚아라.” 이게 좋지. “그래, 갚지 마! 아, 나는 뿌듯해.” 뿌듯함도 얼마 가지 못해. 뿌듯함도 싫어. 뿌듯함 보다 빠닷 빠닷이 낫지. 이게 사람을 착각하게 만든다니까요. 그래서 제가 용서하지 마세요. 자꾸 시험에 드는데. 우리는 뭘 찾아야 되는가, 시험을 시험해봐야 돼요.

내가 지금 마귀한테 시험 들려고 하는데 지금 우리가 마귀한테 시험 들었는지, 주님한테 시험 들었는지, 한 번 생각을 해보자 말이죠. 마귀 배후는 주님이 계시니까. 주님은 마귀를 왜 보냈겠어요. 마귀하고 나하고 전부 다 똑같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똑같은데 불구하고 사탄아, 물러가라! 하는 거 보니까 우리가 수상해. 뭔가 우리가 문제 있어요. 동질성 그 방어하고 수비하는데 너무 급급하고 있다 말이죠.

자, 주의 방법은 뭐냐, 바로 동질성 속에 이질성이 들어와요. 이질성. 자기 면역체계 붕괴. 이걸 가지고 가을되면 기침하는 거. 알레르기 반응이지요. 알레르기가 뭡니까? 적이 날아오는 세균을 쳐야 되는데 이 충성심이 너무 심해가지고 세균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병 들지 않았는데, 죽어라! 이놈아! 해가지고 내가 나를 치는 것이 바로 알레르기거든요. 켈룩(짧게)! 하면 되는데, 켈~룩! 켈~룩! 얼굴이 벌게 가지고 머리 아프고 해가지고. 적도 아군도 구분 못해. 너무 심한 충성이에요. 면역체계가 붕괴 되어버리지요.

어떤 인간도 자기가 자기를 안칩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질성이 들어오면 이게 치게 만들어요. 자기를 부인하게 만들어버립니다. 내가 나를 치게 해버린다고요. 나밖에 없는 곳에 법을 심어버려요. 구멍을 내가지고 거기다가 법을 심어버린다고요. 폭약을 장착하는 거예요. 우리 안에다가.

요 심어놓은 율법의 한도가, 여러분, 한도라는 말 알지요. 대출 한도 하는 한도 있잖아요. 율법이 자기 고유의 시간이 있어요. 율법의 시간은 뭘 반복하느냐 하면 율법이 있었다. 십자가로 완성했다. 율법이 있었다. 십자가로 완성했다. 율법이 십자가로 갔다면 십자가에서 완성됐기 때문에 계속해서 오고, 오는 모든 자기 백성에다가 거꾸로 율법화 시키겠지요. 십자가를 위해서. 이걸 되풀이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안에 째깍! 째깍! 시간폭탄이 있단 말이죠. 우리 안에 법이 들어옵니다. 법이라 하니 오해성이 있는데, 언약이 들어옵니다. 언약이 들어오면 째깍! 째깍! 오지요. 째깍 째깍이 뭐냐, 율법이 십자가 되잖아요. 그럼 율법의 한도가 끝나면 십자가로 폭발해버리는 거예요. 십자가는 뭐냐 하면, 너는 되졌어! 이거거든요. 너는 이미 죽었어! 이게 십자가란 말이죠. 왜? 율법을 어겼으니까. 그래도 열 개중에 아홉 개는? 아, 그 소용없어요. 하나 어기면 다 어긴 거니까.

하나님은 완전한 걸 원해요. 최선을 다하는 걸 원하는 게 아니에요. 전에 했지요. 진리를 원하지 진심을 원하지 않는다고요. 솔직하니 말해서. 하는데 솔직한 것은 진심이지 진리가 아니에요. 그 놈의 솔직은 사람마다 다 달라요. 세상 인구가 78억인데 솔직한 것이 78억개 있어요. 전부 다 솔직해. 취중진담. 맞지요. 취중진담 맞지요. 하지만, 취중진담은 맞는데 진리는 아닌 거예요.

“예수님! 제가 목숨을 바쳐서 주님을 지키겠습니다. 예수님 가시는데 목숨 바치고 가겠습니다.” 베드로의 진심이었지요. 그러나 진심과 진리가 왜 그리 먼지.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이에요.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하나가 안돼요. 하나는 베드로의 동질성이고, 하나는 주님의 법의 완성이고. 베드로는 아직 공존이 되지 못했습니다. 함께 삶이 되지 못했어요. 성령이 오지 않았어요. 베드로 안에 이질성이 꽂히지 않았어요. 꽂히게 되게 되면 째깍! 째깍! 시한폭탄이 되어가지고 법은 자기 한도를 말릴 수 없어. 계속 이 법은 뭐로 바꾸느냐, 십자가로 우리를 데려가게 됩니다. 이 방법을 주께서는 시공하신 거예요. 시공업자 멋지지요. 성령이 시공업자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어요. 디모데후서 3장1~5절, 제가 아직 이웃사랑까지는 이야기 안했어요. 여기까지 하고 그 다음에 이웃사랑 하겠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말세에 고통 하는 때에 고통 하는 건 벌 받아서 고통 하는 거고요. 벌 받는 이유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자기체면 차린다는 거고요.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감사치 않은 게 거룩하지 않은 거예요.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게 뭐 13가지나 좀 돼요. 또 세려보는 사람이 있어요.

이거 보세요. 이게 우리 안에 들어온다고요. 이 법이. 사도바울의 법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법이에요. 사도바울은 하나의 매개체고. 이 법이 들어온다고요. 이게 안 들어오면 우리는 잘난 사람 돼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자식 공부 다 시키고 대학 다 시키고 집하나 마련하고 아침에 청소 깨끗이 해놓고 나름대로 직장 안 다니지만 남한테 논다는 소리는 안 들으려고 열심히 다 이런 거 한다고요. 하는데 자기 나름대로 보기에는 다른 동질성과 내 동질성을 볼 때 내 동질성이 더 윤기가 나고 누가 봐도 이건 진짜 사람답게 산다는 소리를 듣는데 이게 디모데후서3장 1절부터 5,6절 꽉 들어오니까 이게 뭐냐 하면 자기 면역체계 붕괴돼버리는 거예요. 기침이 일어나서 골치 아프고.

동질성이라 하는 것은 타인과의 배제입니다. 차이를 계속 만들어줘야 돼요. 내가 나다움에. 내가 그 사람에 동일해 버리면 나다움이 상실해 버리면 사람은 살 수가 없게 되어있어요. 얼추 차이나는 게 있어야 돼요. 여러분, 혹시 길에 가다가 기분 나쁜 일 없었어요?

나하고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발견하지요. 기분 더럽지요. 그거 왜냐, 홈쇼핑에서 세일할 때 같이 사서 그래요. 그것도 세트로. 여러분 가운데 가방 똑같은 가방 봤지요. 그것도 특가로 팔 때 산거예요. 대번 집에 가서 옷 바꾸고 나옵니다.

왜 기분 나쁘게 똑같으냐 말이죠. 여러분들 고등학교 때 교복 시절 아닙니까. 교복시절 때 희망이 뭐였어요? 나도 내 옷 입고 싶다 이 말이지요. 교복은 편하긴 편하지만, 개성이 살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 동일성, 나는 나를 위해 산다는 그 원칙과 자꾸 틀어져요. 빨리 고3졸업해가지고 입술에 빨갛게 칠해보고 이렇게 해보는 소원이 있었지 나만을 갖고 싶듯이. 이처럼 이질성이 와 버려요. 그러면 우리의 반응은 뭐냐 하면, 갑자기 내가 잘난 내가, 훌륭한 내가 변명을 늘어놓는데 이건 시도 때도 없이 변명을 늘어놓아요.

“예, 주의 말씀은 거룩한 거 내가 알아 모시겠는데, 자식 크다 보면 돈 좀 모아야 됩니다.” 주님이 “누가 뭐라 했어?” “주식 하나 누구 헛소리 듣고 해가지고 1억 날렸는데 그거 빨리 남편 모르는데 빨리 만회하려고 딴 거 독일 국채 했다가 또 2억 날아갔고, 독일 연방은행 넣어가지고 20% 까이고, 이번 베트남 해볼까하는데 지금 주저하고 있습니다. 이리 사는 거 내 주님 십자가 은혜는 감사한데요, 그건 고마운데, 사람은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십자가가 밥 먹여주는 거 아니고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라는 변명을 그 다음부터 늘어놔요. 그것은 뭐냐 하면, 구원을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구원 과정에 니가 돌입했다는 거예요. 과정이니까. 그 과정이에요. 약발이 먹여지는 거예요. 약발이.

서서히 구차한 변명이 나올 때, 드디어 구원이 개시되는 거예요. 기차 처음부터 빨리 안가잖아요. 기차 발동이 움직여가는 거예요. 발동이 움직여가듯이 변명들을 창안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내가 스스로 이 말씀에 위배됨을 알고 그걸 행여나 하나님께서 심술내가지고 현재 있는 펀드마저 작살낼까 싶어가지고, 그 때 펀드 넣고 십일조 2번쯤 빠져먹었거든요. 그래서 펀드 다 날아갔다고. 그걸 만회하기 위해서 갑자기 새벽기도 안 나오던 걸 새벽기도 나온다던지 갑자기 안 보던 성경을 봐도 뭐합니까. 잠만 오는데. 억지로 성경 석장 읽고 해가지고 제발 좀 손대지 말라고 이제 나 힘들어죽겠다고 지금 이 정도 버티는 것도 힘든데 더 버티면 나는 물러설 거 없으니까 좀 봐주소. 믿음 좋은 사람한테 하고 나는 욥 안 될 랍니다. 나는 거지 나사로 안 될 테니까 다른 후보감 제가 제시해 드릴까요. 이런 식으로 변명들을 하는데 그게 바로 말씀이 살아있는 거예요. 말씀이 제대로 꽂힌 거예요.

나의 나다움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제거되는 것. 다시 말해서 뭐를 증거 하느냐 하면 나의 나다움이 깨졌다는 것을 증거 하게 만들어요. 그게 주님의 실적이에요. 나의 일에서 뭐로 전환되느냐, 주님의 일로 전환되는 그 과정 속에 우리가 들어가게 하는 겁니다. 이게 아까 이야기한 광야에서의 이동시키는 이스라엘 이동의 원칙, 광야의 원칙입니다. 광야의 원칙.

기어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자기의 안목으로 들어갔습니까, 주님의 일이었습니까? 주님의 일로 들어갔지요. 그 주님의 일하면서 40년간 뱅뱅이 돌면서 홍해를 건너온 사람들은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는 다 죽여 버렸습니다. 다 죽여 버렸어요. 이게 뭐냐 하면 교체에요. 요걸 아주 어렵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방금 이야기를 아주 어렵게. ‘부정성이 끝까지 살아있게 함.’

정반합이 아니고 반이 정을 물리치고 그 정을 반대했던 그 이질성이 끝까지 살아남게 하는 거예요. 끝까지 돋보이게 하시는 거예요. 요 부정성이 뭐냐 하면, 바로 십자가입니다. 성도는 뭐만 자랑합니까?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사태가 벌어지고,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십자가가 이겼습니다. 나는 지고.”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의 하신 일이 내가 꾸역 꾸역하는 나의 일을 기어이 이겨주시니 세상에 이렇게 감사할 수가!”

때로는 환난주시고, 곤고 주시고, 핍박주시고, 때로는 가난하게 하시고, 그러면서도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법의 완성에, 이건 법의 도중 아닙니다. 법의 완료에요. 사랑의 완료고, 의의 완료를 꽂아 놓고 우리로 하여금 그 과정 벨트에 톱니바퀴 벨트에 우리를 집어넣어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깨지지요. 깨지면서 뭐가 나오는가, 주님의 감사가 나오고 고마움이 나오는 거예요.

결국 뭐냐, 제가 울산에서 했던 공식. 기계+언약=성도. 언약이 있으니까 성도가 되는 거예요. 우리는 뭐다? 기계지요. 기계의 특징은 무정함. 아무 감정이 없어요. 기계니까. 다른 말로 하면 바보등신. 아무 감정이 없어.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지? “주여, 저 무슨 짓을 합니까?”하면,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기계가 그걸 왜 알아야 되는데?” 자, 그러면 우리가 늘 상 이리 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시. 공간이 있어요. 우리의 시. 공간이 있으니까 과거 나의 과거는 어떻고, 나의 미래는 어떻고, 나의 현재는 이렇다, 있지요.

나의 과거, 나의 미래, 나의 현재, 나의 미래상을 나의 시간이니까. 나의 시간과 공간, 나는 어느 동네 살았다. 나의 공간과 시간 이것이 계속 있는데, 이걸 가지고 언약 기계 속에 이걸 집어넣으니까 와자작 거리면서 이게 깨지면서 과거에도 무심함, 누구나 미래에 대해서도 무심함, 그리 되는 거죠.

“엄마, 나 일주일 되면 수능 치는데.” “왜? 쳐라. 왜?” “엄마가 와서 찹쌀 모지하고 엿 줘야지.” “야가 미쳤나. 내가 왜 하는데?” “니가 치는데 내가 왜 찹쌀 모지 하는데?” “엄마는 엄마 안 같애~” “아니지. 나는 터미네이터지. 엄마 아니야. 나 기계야.” “세상에 다른 집 엄마는 난리도 아니고. 밤에 공부한다고 차도 끓여주고 하는데.” “나한테 그런 거 기대하지 마라. 나는 니 간이나 빼려고 온 엄마다.” 동백꽃 나오는. 드라마 이야기하면 안 되는데 드라마 이야기 왜 또 했지. 엄마가 딸 찾아온 이유가 뭐냐 하면 지 간 나쁘니까 간 떼어가려고 온 거거든요. 잘 맞을 거 같아서.

결국 전에는 나를 위해서 무정했는데 옛날에 무정함은 나에게 손실되니까 무정하고 이익 되면 헤헤거리다가 이제는 나 자체가 나를 자기면역체계가 붕괴됐다니까요. 지킬 필요도 없어요. 지킬 힘도 없어. 그래서 이런 대사도 있지요. ‘속없는 것이 장사를 이긴다.’ 속이 비어있는 것. 고두심이 어떻게 이 언약을 알았을까. 속없는 것이 속이 없으니까 이놈이 뭐라고 해도, 저놈이 뭐라고 해도, “나는 힘세다!” 하니까 “그래라.” 끝나버려요.

대결할 수 있는 어떠한 변명이라든지 내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어떤 수완을 하나님의 더 큰 지옥 불을 가져다주는 법이 와버리니까. 지옥은 저주거든요. 저주라고 칭하는 이 하나를 어기면 저주받는다고 하는 그게 와 버리니까 그 지옥 불 앞에 내가 살아있는 것도 감사할 뿐이지 다른 군소리가 안 나오지요. 나올 수가 없지요.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누가 죄인을 구원한다는 이 작업은요, 우리가 하려고 나서면 안 되지요. 할 수가 없어요. 왜냐, 전도해봐야 나의 동질성으로 다 업적으로 실적으로 “나, 두 명 전도했다.” 다 돌아오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나만 구원 안 돼요. 다른 사람 다 구원하고 구원시킨다는 본인은 구원이 안 되어버려요. 왜? 자기는 속이 없는 게 아니라 속이 꽉 차있으니까.

그리고 과거라 하는 것은 인간의 뭘 만드는가, 과거는 우리에게 낭만적인 감정을 자꾸 유발시켜요. 과거.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울고. 아프리카에 굶어가는 애들을 보고 울고. 왜 우느냐 하면 내가 그 처지였다면 나도 울 거야. 라고 자기를 잠시 과거 상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혹시 길가에 보면 이런 제과점이 있을 거예요. 마들렌. 이런 제과점이 있는데 이건 글 좀 읽었다 이 말이거든요.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에 보면 마들렌이란 과자가 나와요. 프랑스 과자. 저도 파리를 가서 과자를 봤는데요, 별로 먹고 싶은 마음 없어요. 역시 한국과자가 최고에요. 한국의 주전부리가 최고에요. 별로 맛없어요.

이 마들렌은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어른이 되어가지고 그 과자를 파티 장에서 먹는 순간 갑자기 어릴 때 이 과자 맛을 통해서 과자 맛을 처음 느꼈던 그 때 그 시절에 광경이 확 다가온 거예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내가 이미 없는 시간인데 내 몸둥아리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나의 시간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던 거예요. 그래서 과거는 현재가 되면 과거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현재 밑에 과거가 층층이 누적되어있다는 겁니다. 층층이 누적되어 있어요. 현재는 점이거든요. 현재 지금이니까. 1초지나면 과거되니까. 점 밑에 뭐가 있느냐 하면, 층층이 과거가 되어가지고 이 과거의 모든 요소들이 계속 흘러오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의 과거는, 야~ 여러분 어려운 거 듣습니다. 이해 안 되면 할 수 없고. 나의 과거는 주변에 있던 변화나 사건이나 사태가 나의 과거라고, 과거의 기억으로, 응축을 시켰다 말이죠. 그러면 내가 마들렌이라는 과자 맛을 드는 순간에 그 때 60년대, 70년도에 서울에 시청 앞에 광경부터 해가지고 그 때 있던 버스 오라이~ 하는 그것까지 다 기억나겠지요. 내가 몸이 살아있으니까 이 몸이 나의 환경에 모든 에너지가 응축된 게 내 몸이니까 이 몸을 분해해보면 거기에 수천가지의 수만 가지의 사태와 과거 층들이 아직 내 몸에 살아있는 거예요. 이런 몸이 어딜 가요? 천당 가요? 말이 안 되지요.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아까 엄마가 신을 믿는 이유가 뭡니까? 자식 때문에 믿지요. 자식 때문에. 내 힘으로 부치니까 신이 좀 도와달라고 하잖아요. 목표가 있다는 말은 자연적으로 신을 필요로 한다 말이죠. 목표가 있는 이상, 이 말은 목표가 뭐냐 하면 나의 확장이에요. 내가 죽는 게 아니고 내가 더 잘되길 원해요. 내 잘되기 위해서 예수든 삼위일체든 교회를 찾고 부르는 거예요.

그러니 성령께서 뭐냐, 거기다가 뭘 꽂아버립니까? 사울아, 너 때문에 이 예수가 핍박받았다고 핍박이란 피 흘린 징을 박아버린다고요. 징을. 율법이 지향하는 것은 어디다? 십자가잖아요. 지금 십자가는 이미 완료된 거예요. 십자가 법이 완성됨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법을 위반자가 되고, 모든 인간은 지옥 불, 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에는 물로 심판 받았지만, 지금은 불로 심판 받아요.

송흥민이가 어제 두 골을 넣었는데, 지옥 갔지요. 두 골 넣고 지옥 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골 찰 때 두 골 넣어라는 법은 인간이 만든 법이지, 하나님의 창세전에 하나님이 계획한 언약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언약이 아니면 안 받아줍니다. 그 말은 언약의 완성된 것이 속에 있지 않으면 안 받아줍니다. 제가 어제 강남강의를 포대기를 했잖아요. 포대기를 딱하니까. 제 아내가 “당신, 그 포대기란 아이디어 어디서 얻었는지 내가 안다.” 이렇게 했거든요. 어디서 알았느냐 하면 제 딸이 사진을 보냈는데, 옛날 60년대에 있던 포대기를 부산에 있는 시어머니가 선물로 준 모양입니다. 요새도 파는지 생각도 못했어요. 요새는 그거 없는데. 포대기를 딱 들고 와가지고 보여줘요. 포대기를.

그 포대기를 보고 와! 저거다. 포대기를 보고 와! 이것이다. 얼마나 오래간만에 봤는지 마들렌까지는 없지만. 포대기 가지고, 한 몸인데 포대기로 묶어놓은 거잖아요. 그런데 엄마는 애가 예뻐서 묶었지만, 우리는 주님이 안 예쁜데 변명조로 나오는데, 주님이 이쁘다고 일방적으로 내 기뻐하는 자라, 해가지고 일방적으로 포대기에다가 피 발린 포대기를 가지고 둘둘 쌓아버렸다 말이죠.

뭘 믿어요. 뭘 행해요. 도대체 구원 받는데. 할 게 뭐가 있는데요. 이미 포대기에 쌓였으니 나올 것은 구차한 내가 들어도 지저분한 변명과 핑계이외에는 평생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안 나와요. 주님 가만히 있는데, “이래서 그 때 참석 못했습니다. 이래서...” 누가 뭐래. 왜 그래? 왜. 아직도 육신 속에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주신 법 말고, 우리끼리 법 있잖아요. 우리끼리. 애굽사람 우리끼리 잘났다, 못났다, 를 결정짓는 그 법을 많이 습득해 있기 때문에 그게 과거로 누적돼 있거든요. 이 몸 안에 누적이 되어있으니까 얼추 퍼낸다고 퍼냈는데 또 어떤 새로운 사건이 닥치게 되면 갑자기 또 생각도 못한 나의 사수와 나 변명과 나 옹호와 또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걸 아까 디모데후서6장에 뭐라고 합니까? 자기를 사랑하고 이렇거든요. “아, 목사님 저는 돈 같은 건 초월했습니다.” 라는. 이만원 주면 초월했겠지요. 20억 줘봐 봐요. 빌딩 하나 줘보세요. 초월했는가. 이 액수가 적다 그 말이거든요. 이 정도로 내가 어디 거지인 줄 아느냐. 이런 말이잖아요. 20억 줘버리면 초월 못합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돈을 사랑하고, 16가지인가, 인간이 하지 못하는 걸 하는 이유가 주의 시공방법대로 해요. 시공방법.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기는 식으로 율법을 줘놓고 그걸 캐내는 거예요.

자, 그러면 캐내는 방법에 있어서의 방법은 뭐냐, 전쟁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한테 올 때는 뭐냐, 올 때는 전쟁이에요. 이건 임 재범이가 충분히 이야기했어요. 전쟁 같은 사랑~ 전쟁 같은 사랑이에요. 사랑은 전쟁이에요. 전쟁의 이유는 저쪽을 내게 완전히 복속시키는 거예요. 복속. 복속시키니까 이건 노예에요. 노예 만들기. 이게 고대 모든 민족들의 전쟁이에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요. 전쟁하려하니까 적이 기드온 사람이 속여가지고 “아이고, 먼데서 왔어요.” 이래가지고 했지요. 그럴 때 그걸 알고부터는 그들을 노예로 삼았잖아요. 물기는 자로. 물기는 자로 삼아버렸습니다. 옛날에 물이 귀했으니까. 삼았어요.

노예의 특징은 뭐냐 하면 본인의 자리가 용납, 허락하지 않습니다. 본인의 자리가 없어요. 본인의 자리가 없어버리면 본인의 신체 포기 각서거든요. 본인의 모든 권한과 의미는 주님이 갖고 있으니까. 이건 본인의 시. 공간이 있더라도 의미가 없어요. 본인의 시. 공간은. 주님의 허락이 있어야 되니까. 그래서 사랑은 결국 뭘 만드는가, 사랑의 종을 만들어요. 사랑의 종.

자, 아직까지 이웃사랑이 너무 어려워서 지금 얘기를 주저하고 있는데. 이웃 사랑을 이야기할 때가 된 거 같아요. 이웃사랑하기 전에 공존부터 먼저 합니다. 인간이 있을 때, 주님의 시. 공간, 주님의 추억, 주님의 기억, 기억 속에 우리가 합류가 되어버립니다. 주님의 기억 속에 합류가 되어버리면 나의 과거마저 주님의 과거였고, 심지어 내가 태어날 때 그냥 태어난 게 아니고 주님이 예정한 자, 사랑 받기로 작정해서 태어났다는 주님만이 아는 과거 속에 우리를 합류해 버립니다.

합류해버리면 나의 시. 공간은 무의미하게 돼버려요. 그냥 가을날의 추억, 낭만, 그 정도로 뿐이지 실제로 이 몸은 가을을 느낀다고 해서 더 오래 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이건 빨리 벗겨져야 되고 빨리 흙으로 해체되어야 돼요. 물질화 되어야 돼요. 물질화.

물질이라 하는 것은 이게 경제거든요. 에코노믹 경제인데. 경제라는 이 말은 이게 원래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나온 오이코스라는 단어가 나와요. 이 경제라는 말과 대비되는 말이 정치입니다.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이야기 안하겠어요. 경제라는 말이 뭐냐 하면, 정치는 인간을 재료로 사용하잖아요. 재료 또는 질료라 하는데. 경제는 뭐냐 하면 물질을 사용합니다. 경제학자는 물질을 다루고, 교환하고, 소통하고, 생산하고, 소비하고 그게 연구에요. 인간이 놀랍게도 경제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인간이 흙이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에요.

인간은 내가 물질을 구입하는 돈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과 이 물질을, 돈을, 재물을 항상 이게 라이벌 관계에 있기 때문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했어요. 그리고 말하기를 참새를 봐라. 물질을 의지하지 않아요. 참새가 먹을 거, 입을 거 염려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염려하는 걸 보니까 너희들은 내가 만든 창조물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만든 창조물은 예수님처럼 그 나라 의를 구해야 돼요.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 하는 것은 아까 한 국립공원의 돋아난 돌판 밑에 있는 불바다 될 이방인들이 하는 짓거리에요.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 하는 것은. 솔로몬이 입은 옷도 물질에서 나오거든요. 주님께서 인간은 물질로 되어있다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에요.

이렇게 물질로 될 것 같으면 진짜 물질의 한도. 한도하면 대출한도 생각하면 됩니다. 한도가 뭐냐 하면 기계에요. 기계. 그냥 10년 후에 흙이 되더라도 일찍이 나는 너를 흙으로 간주하여 사용하겠다는 거예요. 니 감정 내가 안 넘어가고. 니 우는 소리에 내가 넘어가지 않고. 니 사랑했다고 까불락대는 것에 넘어가지 않고.

그냥 기계로 이미 죽었다고 치고 죽은 걸 치고, 너를 언약을 담아내겠다는 것이 주의 뜻이거든요. 이게 뭐냐 철저하게 사랑의 종이 되는 겁니다. 사랑의 종. 그런데 이웃사랑은 무슨 뜻이냐, 분명히 너나 나나 다 기계에요. 기계인데, 이웃에게 언약이 붙어있고, 언약이 붙어있는 것을 그렇게 반갑고 놀랍고, 신기해할 때, 늘 신기하게 본다는 것은, 이게 신기하지 않을 수밖에 없지요. 이게 신기하게 본다는 것이 참 중요한데.

자, 거울이 있다 합시다. 강남강의에서도 거울이야기 했는데요. 거울이 있는데 거울을 봤을 때, 모습이 그대로 비취는 게 정상이죠. 만약에 여기서 모자를 하나 쓰고 있다면 이건 기절초풍할 이야기입니다. 없는데 거울에는 모자가 있잖아요. 기계인데 비춰보니까 언약이 있어요. 언약이. 십자가가 있더란 말이죠. 어떤 이웃에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개뿔도 돈도 없어. 집에 놀고 있다고. 몸도 아파 암도 4기라. 그러면 이건 하나님 원망하고 죽어야 되는데. 왜? 자기가 희망이 있어야 신이 있는데, 죽어 마땅한데, 아~ 복음을 이야기하고 십자가로 감사한다고 이렇게 하니까 구라가 아니고 진짜인데. 그런 이야기한다면 놀랍지요.

그 놀라운 모습이 나는 내 모습을 못 고치니까 그쪽에서 볼 때 너도 만만치 않아. 너도 모자 있어. 언약의 십자가 있어. 이 십자가로 매개로 해서 하나가 될 때 이것이 바로 이웃사랑입니다. 이게 바로 같은 동족, 형제에요. 오늘 본문 내용은 형제로 다시 돌아오게 하라. 그건 뭐냐 하면 그냥 살아라, 는 이야기에요. 우리보고. 뭘? “나 기계인데 나도 예상 못한 뭐 있어. 그런데 그건 내가 뒤집어쓴 게 아니야. 그냥 주께서 다루고 있어.” 라고 했을 때, 그 모습을 보고서 ‘나도 그런가’ 나도 내 생각한 그 이상의 여분의 잉여의 것. 잉여, 내가 생산하지 않은 다른, 내가 예측하지 않은 다른 요소가 나를 종으로 삼는 것, 사랑의 종이지요. 그런 게 있을 때, 그것이 이웃사랑이 구현되고, 이웃사랑이 되면 뭡니까? 율법을 온전히 지킨 게 돼요.

십자가의 포대기 안에서 온전히 지킨 게 된다고요. 이것을 바로 구약에 아가에 보면 나옵니다. 솔로몬의 아가서에 보면. 서로가 물질일 수밖에 없는데 이상하게 아가서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아요. 그 벗은 몸이 십년 전에도 아름답고 이십년 전에도 아름답고, 백년이 돼도 아름다워요. 왜 시간이 흐르지 않느냐 하면, 주님의 언약 안에서는 주님의 시. 공간이 적용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의 시. 공간이 아니고.

아무리 아름다워도 자주 보게 되면 식상하고 이렇게 짜증스럽고 별로 신선하게 더 없어야 되는데. 아가는 그게 없어요. 그냥 보기만 해도 향기가 막 살아나는 것 같아요. 그 비슷한 이야기가 고린도후서 2장에 나오지요. 성도한테 복음을 전하면 성도는 이상하게 가정형편이라든지 사는 게 꼬라지가 창피하게 엉망이라도 이 복음이야기 하니까 눈이 퍼득 퍼득 뛴다 말이죠. 성경공부 두 달 안 나와도 퍼특 퍼특.

이상하게 이건 그 사람이 어떤 성경공부를 지식으로 축적한 게 아니고 그런 거 축적해봐야 자기 의 밖에 안 되니 소용없고, 뭔가 생명이라는 것이 하는 거예요. 이게 고흐 작품이죠. 이것도 고흐 작품인데. 인상주의 화가인데. 인상주의 화가가 뭐냐 하면 보이지 않는 걸 그리겠다는 거예요. 하도 보이는 걸 똑같이 베껴가지고. 화가들이 그림 그릴 때 거울보고 그리거든요. 그대로 베끼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잘 그린 거예요. 우리도 옛날 초등학교 때 습자지 위에 놓고 그대로 베껴요. 잘 안 그릴 수가 없지요. 그대로 그렸으니까. 이게 이제 그 인상주의 화가들이 화가 난 거예요. 그래서 그림대회에 나가서 이렇게 그리니까 다 입상도 예선도 통과 못했어요. 저희끼리 나와 가지고 너희들은 뭐 그리느냐, 인상만 그린다. 인상 그리는 거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의 튀는 반사를 그린다.

그러니까 같은 성당을 그려도 같이 그려도 오전의 빛과 오후에 그린 것과 저녁에 그린 것이 다 다르지요.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려 한 거예요. 나중에 그림이 더 발달하게 되면 인간에 있는 무의식을 그린다 해서 나온 게 피카소고, 이런 거는 피카소 모방한 거죠. 이중섭이 그린 것은 피카소 모방한 거예요. 저게 뭐야? 그렇게 되지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림을 봐도 사진으로 보는 게 아니고 사진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고 보면 볼수록 다시 뭔가 보는 그 청중이 자기를 되돌아보게 하는 자기의 심리를 다시 발취해 내는 그러한 매개가 되는 그림들을 새롭게 피카소부터 나중에는 모든 걸 다 해체해 버리고 다 허구다 하고, 초사실주의로 나오는 거예요.

그러나 백날 해봐야 그건 있는 이미 물질가지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영을 상상할 수 없어요. 상상이 안되는 게 아무리 신은 아우라가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나 위주로 산다면 그건 성령 안 받은 사람이에요. 나는 몰라요. 주께서 나로 하여금 나를 텅텅 비게 한다는 것. 전에는 뭔가 채웠는데 채운 것이 재미가 없어. 채워도 재미가 없고. 채워봤자 주께서 또 구멍을 뚫게 만들어요. 십자가가 가지고 박게 만들어요. 그리고 너는 죽었고, 너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다는 것을 이건 누구한테 이야기 할 수도 없네.

했다 하면, “니 또 상상하는구나! 야가 또 성경 보더니만 또 니 도 닦았네. 나 두 번 다시 안 속는다. 뻔하니까.” 예, 그리 말을 하면 그런 오해 받는 거 충분해요. 그런 가짜들이 한 둘이 아니니까. 많은데. 본인은 뭐냐 하면 여기서 나로 하여금 의가 들어오게 되면, 주님의 십자가가 들어오게 되면, 나가 죄인 되면서 그냥 죄인이다가 아니라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모든 변동사항이 내가 유발한 게 아니고 주님의 작업이란 사실을 알고, 미래도 마찬가지일 거고. 구원은 주님의 자기 숙제지, 나의 과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그래서 미래를 잘라버리고요, 과거도 생각하지 말고, 지금 광야생활처럼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광야도 딱 일용할 만나만 주고 내일은 죽어버려라, 이거거든요. 너희들이 죽는 연습을 안 해서 문제라는 거예요. 광야에 왔으면 죽을 줄 알아야지. 광야에 왔는데 내년에 보자. 광야는 이런 게 없잖아요. 우리에게는 내일도 없고, 내년도 없고, 수능도 없습니다. 치게 되면 또 치지요. 내일 또 시험 치면 주께서 또 십자가 증거 하라고 하셨구나! 이것이 바로 이웃사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망가진 입장에서 감사가 나올 수 있는 그 원리가 하나님의 법에 완성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도바울처럼 오직 십자가만 감사하고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안양20191107b야5장19절(부정성)-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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