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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30 12:48:37 조회 : 100         
26강-호 7장 1-3절(하나님의 치료)200129-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61.84.208.92)
26강-호 7장 1-3절(하나님의 치료)2001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7장 1절에서 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61페이지입니다.

호세아 7:1-3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 저희는 궤사를 행하며 안으로 들어가 도적질하고 밖으로 떼 지어 노략질하며 내가 그 여러 악을 기억하였음을 저희가 마음에 생각지 아니하거니와 이제 그 행위가 저희를 에워싸고 내 목전에 있도다 저희가 그 악으로 왕을, 그 거짓말로 방백들을 기쁘게 하도다.”

치료하면서 덩달아 알 수 있는 것은 그 당시의 이스라엘의 죄를 두 가지 점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죄가 편만하다, 하는 것입니다. 죄가 전체로 퍼져버리면 치료도 굉장히 보편화가 되어버립니다. 치료하는 방법은 죄가 있는 끝까지 가야 되기 때문에 죄가 넓게 퍼져버리면 치료방법도 끝까지 마감을 해야 된다는 이유 때문에 확장됩니다.

첫째는, 죄가 온 나라에 다 퍼졌다는 사실이에요. 그것이 호세아 6장에 보면 나옵니다. 길르앗 나오지요. 8절에 “길르앗은 행악자의 고을이라 피발자취가 편만하도다.” ‘편만’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퍼졌다는 거예요. 9절에 “강도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저희가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길르앗, 세겜이 다들 하나님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지역인데 하나님 보시기에 더럽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뭐냐? 본문에 보면, 왕이 나오고 방백이 나와요. “저희가 그 악으로 왕을, 그 거짓말로 방백들을 기쁘게 하도다.”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것은 넓다는 것에 더해서 깊다는 겁니다. 넓고 깊고, 수평적으로 처처에 모든 곳이 죄고 그 다음에 한 곳을 파 봐도, 개인 가정사부터 파보면 거기에 죄가 표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깊숙이, 깊숙이 계속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죄라는 것이 이스라엘에서 보편화되고 편만해 있고 편재되어 있고, 그리고 왕부터 썩었다는 겁니다. 왕이라는 것은 그냥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백성들에게 명령하는 자거든요. 죄를 품고 있는 죄의 인식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명령을 했다는 말은, 그 백성들은 그 죄악된 왕과 방백, 지도자의 명을 어길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같이 죄지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합세했다, 동조했다, 어쩔 수 없이 추종했다, 거기에 장단 맞춰 주었다. 호세아 당시에 하나님 보시기에 이스라엘의 죄가 그런 겁니다.

첫째는, 죄가 넓게 퍼졌고, 두 번째는 깊게 박혀 있다는 말은 치료할 때도 그 점을 감안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니까 관절이나 당뇨, 이런 것을 ……, 제가 웃음이 다 나네요. 하나님이 그거 치료하는 줄 알고 있어요. 제가 웃는 이유가 신천동에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이 계신데 병원대신에 교회의 하나님이 능력으로 치유한다고 해서 교회 이름을 “광선교회”라 했어요.

‘광선’은 말라기 4장 2절에도 나오는데 거기 보면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이 말씀을 사람들한테 믿게 해서 치료하는 광선, ‘치료하는’ 빼버리고 ‘광선’ 이름이 “광선교회” 하여튼 “병든 사람들은 우리교회 와서 주님께 기도하면 병 낫습니다.” 그것을 상품으로 걸고 목회하려는 사람이 있었어요.

지하철 신천역 사거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지요. 문 닫았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이 그렇다는 것뿐만이 아니고 일반교인들도 성경에서 치료한다고 하니까, 몸이 아프면 답답하잖아요, “치료하는 하나님이라면서요? 이름이 치료하는 하나님이라면 하나님 값을 하세요. 내 병 낫게 해주세요.”라고 시위하듯이 달려드는 겁니다.

그걸 제가 감안해서 미리 말씀드립니다. 그 치료해야 될 죄는 사적인 건강문제가 아니고 편만 되어 있다니까요. 편만 되어 있고 이게 깊이가 자기가 자기를 끄집어낼 수 없을 정도로 이미 거기에 깊숙하게 깊이 있는 거예요. 성경에서 치료하는 방법은 쉬워요. 사람이 죽고 난 뒤에 사람 없는 사이에 하나님이 나타나면 됩니다.

하나님이 언제 나타나느냐 하면, 사람들을 다 죽이고서 나타나요. 치료해야 된다는 말은 죄가 있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면 죄값은 사망이잖아요. 하나님의 치료방법은 굉장히 간편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고, 그 죄를 더욱더 죄 되게 하는 방법과 더불어서 그 죄에 대해서 그 사람을 죽여버려요. 그러면 모든 사람은 다 죽었지요? 산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그 다음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치료하십니다. “너, 너, 너 다시 살아나와. 천국가자.” 그런 식이에요. 우리의 예상과는 너무나 다른 겁니다. “살아 있는 나 어떻게 치료해주세요.”가 아니에요. 살아 있는 나. 왜 하나님께서 그런 방법을 쓰느냐? 지금 중국에서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가 유행인데 이게 아주 적절한 예가 됩니다.

신종코로나 바이러스의 모양을 뉴스에서 보여줬어요. 그 모양이 귤 같은데 사방에 선인장 가시 같은 가시가 사방에 숭숭 나 있는 모양, 공인데 사방에 선인장처럼 가시가 나와 있는 모습이에요. 그게 신종코로나바이러스에요. 전자현미경으로 본 겁니다. 희미하지만 이미지로 그렇게 그릴 수가 있어요.

그러면 그 신종코로나 바이러스를 한 번 깨보자는 말이지요.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바이러스가 가득 들어 있겠지요. 병균이 가득 들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 모습을 보면서 제가 생각한 것은, 인간이라 하는 것은 창세기 3장 이후에 인간이 하나의 바이러스에요. 무슨 바이러스냐 하면, 선악바이러스에요.

고슴도치처럼 가시가 나와 있는 귤 모양인데 그걸 쪼개보면 거기에 완전히 선악사고방식이 가득 들어 있는 거예요. 이걸 치료해야 되는 겁니다. 따먹지 말아야 될 것을 따먹었으니까. 이 선악체제 자체를 바꿔야 돼요. 선악체제를 유지한 채로는 치료가 안됩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한 것이 가득 들어 있어요.

먹지 말라 하는 독소가 가득 들어 있는데 그걸 그냥 놔두고 어떻게 치료해요? 하나님께서는 정말 뛰어난 전략으로 그 선악바이러스가 든 것을 따먹게 함으로서 자기백성을 치료할 뿐만 아니라 악마까지 더불어 저주하고 영원히 멸망하는 빌미를 만들어버립니다. 이참에 악마까지 싸그리 지옥 보내버리는 거예요. 선악체계를 따먹게 허락하심으로서.

어떤 인간도 선악체제를 갖고 있는 한 죽음이지요. 왜?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한 그 원칙은 그대로 유지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선악적인 원칙을 완전히 없애고 교체한다는 그 의미는 설명해도 잘 모르니까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날 때 왜 사람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는지. 두려움중 하나가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려워요.

특히 그 중에 최고의 두려움이 상견례. 벌벌벌, 떨면서 밥도 제대로 못먹어요. 사돈 만나는 것. 왜 사람만나는 것이 두려운가?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내가 모르는 사람을 만날 때 두려워하는 이유는, 내가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던 이 선악체제가 제대로 가동이 되고 발동이 돼요. 발작을 일으켜요. ‘내가 저 사람을 만나서 실례하면 안되잖아. 저 사람을 만나서 내가 혹시 죄 지으면 안되잖아. 저 사람을 만나서 내가 착하다는 소리를 듣고 참 존경스럽다는 소리를 들어야지.’

이렇게 하는 순간 이미 두려움이 개시되었어요. 이 선악체제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일을 해도, 사람 만나는 것뿐만 아니고 평소에 어떤 새로운 일이 들이닥치면 두려워하는 이유가 딱 한가지에요. 그 사태와 사건을 통해서 내가 의인이고자 하는 것, 내가 죄인이 되지 않고 복받는 의인이고자 하는 심보가 항상 여기에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만 들통이 나는 겁니다.

‘나는 어떤 경우라도 남에게 벌 받으면 안 돼. 나는 항상 복 받아야 돼.’라는 자기위주의 사고방식이 노출되는 겁니다. 그러면 누굴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이 있느냐? 비법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남에게 한 수 배우려는 자세로 가면 돼요.

내가 누구와 만난다. 만나게 되면,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보고 인간말종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내가 또 실수해서 그 사람에게 실례를 하게 되면 두고두고 나를 씹을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그 소문을 낼 것이고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지?’ 이런 복잡한 것, 그리고 ‘그 사람을 만날 때는 행동에 조심을 해서 티를 안 잡혀야 해. 당신은 개만도 못해, 라는 소리를 절대로 들어서는 안돼. 나는 침착해야 돼. 나는 성도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되니까.’

이러한 모든 사고방식이 말로는 말씀으로, 성화가 어떠니, 그리스도의 영광이 어떠니, 하지만 전부다 그것은 악마에게 그대로 시험 든 모습이에요. 성경에도 있거든요. 로마서 12장에 “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16)라고. 이 말은 뭐냐 하면, ‘남을 심판할 생각하지 말고 한 수 배울 생각을 해라. 오늘도 하나님께서 저 사람을 만나게 하시는데 또 이 무식한 나에게 뭘 한수 가르쳐 주려고 저 사람을 만나게 하는가?’ 하는 자세로 만나면 상견례가 아니라 누굴 만나도 뭘 만나도 두려움이 없어져요.

선악체계를 없애는 방법에 며칠 걸리느냐, 몇 달 걸리느냐? 하나님께서는 선악체계를 없애는데 있어서 몇 달이나 몇 년이 아니라 딱 한 분만 오시면 된다는 것이 하나님 생각입니다. 마지막 날, 심판의 날을 보내서 심판주가 오셔서 싹쓸이 다 죽여 버리면 되지요. 모조리 다 죽이면 돼요. 선악을 안다는 이유 때문이에요. 일부러 나쁜 짓 한 사람은 물론이고 점잖게 살려고 하는 그 모든 것도 전부 일괄적으로 다 죽여 버리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분이 오시면 돼요.

새로운 기준, 기존의 인간들의 기준은 선악에서 나온 기준이기 때문에 치료가 안돼요. 기준 자체를 바꿔야 되는데 기준 자체를 바꾸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시야가 바꿨다. 또는 인식체계가 바뀌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전에 있던 선악체계에서는……, 좀 어렵더라도 참으세요. 선악체계에서의 인식, 시야는 뭐냐? 남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시야에요. 이게 인식체제에요. 남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런데 새로운 체계에서는 뭐냐? 하나님께서는 말씀 자체를 치료하려는 거예요. 나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이 말이 어려우면 바꿀게요. 약속, 하나님의 약속, 이스라엘 다운 이스라엘,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건전하게 온전하게 보전하려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지금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이 엉망이잖아요. 개판이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된 이스라엘을 온전하게 새롭게 창출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이스라엘을 멸망시켜야 되겠지요. 이스라엘 자체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니니까, 그것을 저는 말씀이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대상, 또는 약속이다. 그렇게 보는 거예요.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해보겠습니다. 성경에 치료 이야기 나오면 사람들은 뭐부터 생각하느냐? 내 치료부터, 내 건강, 약 먹어도 안되고, 병원가도 안되고, 어지러운데 약 없나, 맨 날 개인치료 생각하는데 주님은 개인치료가 없습니다. 주님이 치료하려 하는 것은 뭐냐? 바이러스에요. 우한폐렴바이러스. 우리가 신종코로나바이러스 덩어리에요. 선악체제에요. 이 자체가 죽음이라 이 말이지요.

선악체제 자체가 죽음인데 사람은 선악체제를 안다는 자체를 죽음이라 생각 안하고 ‘나는 선을 아니까 선하잖아.’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이 자체가 환자에요. 이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도 아닌데 이 세상을 선한 세상으로 만들자고 자꾸 구호를 외치고 노력을 하는 거예요. 거기에 악마가 편승해서 모든 인간을 그 선악체제에 물들이고 말았어요.

그래서 인간은 어떤 가능성과 희망과 보람, 그것만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는 선이 뭔지 악이 뭔지를 아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선한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이런 식으로 병든 인간이 자기가 병든 것도 모르고 그 속도를 유지하면서 계속 확장시켜 나가려고 하는 거예요. 바르게 살자, 정의롭게 살자,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자, 이런 식으로 나가는 거예요.

‘교회는 바른 교회 하면 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영광을 돌리세.’ 이런 식으로 죽 가면서 그 자체가 치료대상이고 그게 정신병환자인 것을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기준을 모른다 이 말이지요. 자기기준에서 살아생전에 건전한 내가 되어서 죽어서 천국가려고 그런 시도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이 선으로 해서 이 세상이 얼마나 좋아졌습니까? 사람이 선으로 하면 충분하게 사람에게 설득이 되고 납득이 돼요. 왜? 둘 다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하게 삽시다. 하면 오케이. 그렇게 돼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고.

“우리 바르게 삽시다. 바르게 살면 복받습니다.” “오케이.” 그거 동의합니다. 진리입니다.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둘 다 엉터리인줄 모르고 둘 다 맞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치료대상인데. 꿈에도 생각 못하는 거예요. 그게 치료대상인줄을. 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그 발상자체가 그게 치료대상이고, 이게 멸망의 대상이고 죽음의 징후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인간이 인간한테 교육을 시키고 설득을 하면 아주 개차반 같은 인간도 인간된다고 하는데 제가 알기로는 사람이 잔소리해서는 인간이 안돼요. 인간이 교육을 한다고 해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이 땅에서 인간 만드는 것은 돈입니다. 돈만주면 독한 인간도 순한 양처럼 돼버려요. 딸랑딸랑, 돈의 종이에요.

인간은 돈에게만 설득이 돼요. 인간이 인간에게 설득이 되지 않습니다. 설득되는 것은 돈 줄까봐서 기대하면서 설득당하는 척을 하는 것뿐이지요. <영자의 전성시대>라는 1975년도의 유명한 영화가 있어요. 염복순이라는 사람이 주인공인데 유명한 대사가 나옵니다. 아가씨가 식모살이 하는데 그 집에 들락거리는 남자가 아가씨에게 반했어요. 자꾸 애정표현을 하니까 아가씨가 한 그 말이 유명한 말이에요. “나는 서울에 연애하러 온 것이 아니고 돈을 벌러 왔어요.” 나는 서울에 연애하러 온 것이 아니고 돈 벌러 왔다고.

정곡을 찌르는 말, 현실에 대해서 너무나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성경을 잠시 모른다 치고 세상 사람들은 왜 치료를 인간이 인간을 통해서 한다는 생각을 왜 갖느냐? 그것은 고대인의 신에서는 이 세상이 진리를 어떻게 만드는가? 서로 떨어진 인간과 사물사이에 또는 사물과 사물사이에 공감을 가짐으로서 거기서 하나님의 법칙이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달의 운동에 의해서 조수간만의 차이가 나는 것을 봐서 이 우주에는 서로가 통한다고 본 거예요. 별들의 변화를 가지고 지상의 사건을 미리 예견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을 점성술이라고 하는 겁니다. 누가복음 2장에도 그런 것이 있지요. 동방박사가 별 따라 오잖아요. 별의 변화를 통해서 자기의 운명을 미리 점칠 수 있다는 거예요.

지금도 돈 만원만 주면 할 수 있는 타로점을 비롯해서 점성술 비슷한 것들이 길거리에서 뾰족한 텐트치고 앉아서 사람들 꾀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타인의 마음을 괴롭히고 싶다. 그러면 원격조종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흑마술, 짚으로 인형을 만들어서 “미워 죽겠어.” 하면서 바늘로 그 인형을 콕콕 찌르면 그 거리가 뚝 떨어진 사람이, 인현왕후든 누구든 시름시름 죽어가는 것.

유사성, 유사한 것은 유사한 것끼리 통한다는 그것이 이 세상의 자연종교입니다. 자연종교라는 것이 딴 것이 아니고 이 모든 돌아가는 것이 나의 행복이 최우선과제에요. 우주가 문제가 아니고 우주의 진리를 위해서 진리가 아니고 나를 위해서 우주의 진리를 확보하려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 졌잖아요. 그러면 나도 십자가 지게 되면 유사성은 유사성끼리 통한다고 주님이 십자가 져서 하나님한테 인정받았다면 나도 십자가고난의 길로 감으로서 같은 주님의 백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딱 떠오른다고요.

지금도 필리핀에서 그 이벤트를 매년 해요. 웃통 벗고 중량계산해서 같은 무게로 나무 십자가 만들어서 들춰 매고 채찍 담당자 있어서 한 번씩 때려주면서 하나의 이벤트를 벌이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기자들이 물으면, 1년 액운이 그렇게 해서 다 떨어진다는 거예요. 필리핀이 천주교나라니까 유사성, 공감의식을 갖고 있는 거예요. 남 욕할 것 없어요.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기도할 때 피가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흘렀다고 하니까 본인의 기도목표도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물론 핏줄이 터질 때까지는 안하겠지요. 아프니까. 다만 그 근처까지라도 가게 되면 이러한 수고를 주께서는 대견하게 여기지 않겠느냐,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이 교회고, 말이 말씀을 전하는 거지 교회 뚜껑만 날려버리면 모든 것이 자연종교입니다.

그 당시 우상을 섬겼던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버려두고 그들은 자연종교, 이방신을 섬기느냐? 인간본성이 환자기 때문에 그래요. 다시 말해서 장차오실 예수님 쪽이 말씀의 해답을 갖고 있는데 인간은 말씀의 해답을 안갖고 있는 처지에서 말씀을 봐버린 거예요. 자기가 자연종교에 친숙해 있는데 그 자연종교의 핵심은 뭐냐? 선악에 의해서 나는 항상 선한 쪽이야, 라는 것을 목표로 잡고 양심 바르게 모든 선한 행동을 하는 거예요.

선해놓고 자기에게 무슨 이득도 없으면 말짱 소용이 없잖아요. 선하면 선한만큼 나에게 이득으로 돌아온다는 그 자연종교에 기초해서 성경말씀이든 불교경전이든 뭐든지 관계없어요. 그런 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과 인간사이에 잘 통해요. 왜? 똑같은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기 때문에. 선악체계에 감염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너무나 설득이 잘돼요.

목사들이 이렇게 설교하면 교인들이 교회 문 나설 때 막 “은혜 받았습니다.” 하고 난리라. 은혜 받았지요. 개인적으로 정신적인 치료가 된 줄은 모르지만 이 논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상상으로 그림을 그려보세요. 동그라미 해놓고 여기에 x라고 하고 다른 쪽 동그라미는 y라고 하고 이 세상은 이쪽 동그라미 x와 이쪽 동그라미 y가 모양이 같다면 서로 공감한다는 것, 서로 통한다는 것이 이 세상 종교입니다.

하나님 여기 계시고 여기 인간이 있다면 하나님과 인간이 닮은 요소가 있다는 거예요. 의와 진리, 정의, 이런 것은 서로 닮았다는 거예요. 그것을 공유적인, 서로 통하는 속성이라 해서 공유적속성이라고 해요. 그것을 신학교에서 배워요. 서로 통하기 때문에 공감한다는 거예요. 지성이면, 인간이 정성을 다하면 저쪽 세계의 하나님이 감동하는 거예요. 지성이면 감천이 되는 거예요.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고 그 다음에 맡기면 하나님께서 최선을 다한 그것을 알아준다는 거예요. 인간이 할 도리는 다 하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결과는 하나님께서 채워준다는 동양교훈이 있어요. 서양교훈에도 그런 것이 있지요. 하나님은 누구를 돕는가? 스스로 자기를 돕는 사람에게만 하나님께서 “아이고 착하다. 부지런하구나.” 하고 도와준다는 거예요.

그런 말이 왜 있느냐 하면, 그러고 싶어요. 그것 아니면 다른 희망이 없기 때문에.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이 있어요.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하고 기다리면 신께서 그 결과에 대해서는 해준다. 그러니까 놀지 말고 할 것은 하고, 도리를 다 하면 하나님께서 주신다.’ 공감의 원칙, 유사성의 원칙입니다. 여러분이 이 이야기를 듣게 되면 결국은 모든 교회는 사기다, 가짜다, 그 말이에요. 모든 교회는 다 사기고 가짜라고 보면 됩니다.

“그래도 어떤 교회는 십자가 이야기하잖아요.” 십자가 이야기는요. 인간 대 인간으로 설명해가지고는 십자가를 가지고도 제대로 복음에 도달되지 못해요. 왜 그러냐? 십자가가 뭐냐 하면 고난 받았다, 하는 거예요. 인간이 하나님을 채찍으로 때리고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된 하나님은 억울하잖아요. 억울하니까 복수에 나선다는 겁니다.

“이 괘씸한 인간들, 하나님도 모르고 너희는 이제 당했어.” 이렇게 보면 이것은 하나님이 쩨쩨하신 분이 돼요. 유치원 애 멱살을 쥐고 “너 이제 한 번 죽어봐라. 네가 감히!” 하면서 꿀밤 주는 것밖에 안돼요. 십자가는 성령, 영의 일이에요. 이것이 인간의 일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인간이 정치적으로 때리고, 정치적으로 보복하고, 그런 식으로 설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쪽이 동그라미 하고 이쪽의 동그라미하고 단절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로 인하여 끊어졌어요. 공감이 아닙니다. 통하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끊어졌어요. 어떻게 끊어졌는가? 모든 인간을 다 죽여 버렸습니다. 모든 인간을 다 죽여 버리면 조용하겠지요. 에스겔 37장에서 에스겔이 해골들의 골짜기에 갔어요. 해골들의 특징이 뭐냐? 조용합니다.

해골들이 “야, 누가 온다. 장난치자.” 그런 것 없어요. 그냥 해골들은 조용해요. 공동묘지 자체가 조용해요. 거기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님하고 인자 에스겔하고 두 분이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조용한 해골골짜기, 마치 의성에 있는 폐기물처리장처럼 아무도 없고 쓰레기밖에 없는 거기에 두 분이 서지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폐품이고 인생이 죽는 것은 폐품수거입니다.

3천원, 5천원, 딱지 붙으면 수거해 갑니다. 이불이든 무엇이든 인간은 이미 이게 다 붙었어요. 선악체계가 있는 한 주께서 여기에 노란딱지를, 5천 원짜리 딱지, 이것은 폐기처분해야 돼요. 이것은 죽은자에요. 에스겔 37장에서 해골로 되어 있지만 이것은 이미 죽은자입니다. 삐거덕 거려봐야 해골입니다.

이미 죽어버린 상태, 선악체계로 인해 이미 죽었다가 돼요. 죽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는 다 죽었으니까 “구원해주세요.” 손들고 그런 것 없어요. 죽은 인간이 무슨 손을 들어요. 그 다음에 다 죽이고 난 뒤에, 심판이 끝나고 난 뒤에 주님께서 오셔서 “이 사람, 이 사람, 이 사람은 내가 선택한다.” 해서 선택한 사람만 뽑아서 천국에 데려갑니다.

뽑을 때 내 이름으로 죽은 인간이 뽑게 되면 이제는 주의 이름으로 살거든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어요. 성령이 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 특징이 주의 이름을 찾게 되어 있어요. 내 이름을 찾는 것이 아니고, 내 실력을 찾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 다시 말해서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주의 이름 때문에 구원되어야 했습니다, 라는 고백을 해요.

나를 위해서 주님이 필요하다는 말이 아니고, “주의 이름이 하는 그 일의 연장 때문에, 연속성 때문에 저는 주님이 하는 일에 지남철에 쇠붙이가 달라붙는 것처럼 주의 이름의 능력으로 저를 살렸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부활의 능력이 임해서 죽은 나를 성령의 힘으로 살려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죽었고 그 다음에 홀로 외로이 예수님 오셔서 활동해야 되는데 성경에서는 이것을 두 층으로 만들어버렸어요.

이 세대 끝나고 난 뒤에, 이 세상 끝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다 죽었지. 내가 살려줄게.” 원리는 그렇게 되는데 시간상으로는 죽었는데 사람들은 아직 안 죽었다고 여기거든요. 선악체계가 있어서. 안 죽었다고 여기지만 주님보시기에는 이미 죽은 거예요. 공동묘지에요. 그러나 인간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안 죽었다고 여기는 그 위층으로 이미 성령으로 데려가실자를 데려갈 새로운 나라가 중층, 중복되어서 나타나요.

그게 성령의 임함입니다. 내 나라는 이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빌립보서 3장 20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아직 우리는 이 땅에 있는데 이미 하늘에 속해버렸어요. 나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산다. 항상 우리 자신에게 성령이 임해버리면 복합층이 돼요. 한 층이 아니고, 단층이 아니고, 이세상은 두 층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는 것이 뭐냐? 하나님방식의 치료에요. 모든 선악체계에 대해서는 죽음을 선언해버리고 선악체계에 있는 자에게 생명나무의 내용으로서 그 사람에게 죽은데서 살아나게 되면 그 인간의 선악체계는 그 안에 들어있지 않고 생명나무의 원리가 그 안에 담겨 있는 방식으로 그 사람을 구원하는 겁니다.

그 방법에 대해서 성경에 많은 구절이 있지만 딱 세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의 치료방법. 또 하나는 신약에서는 어떻게 치료하는가? 세 번째는 구약과 신약사이에 어떤 변화의 과정이 있는가? 첫 번째는 출애굽기 15장 26절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여기서 하나님께서 치료하는 여호와라는 말은, 너희들은 바로 애굽사람이라는 뜻이에요. 너희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맛보지 못한 애굽사람들과 동일하게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애굽사람들은 죽고 그들은 구경하다 나온 것이 아니고, 애굽사람이 죽을 때 너희들도 같이 죽은자여야 한다는 뜻으로 여기서 폐품수거의 딱지를 붙였는데 그 딱지가 3천원, 5천원딱지가 아니고 어린양의 피를 발라버렸어요.

이미 죽은자로 간주하는 거예요. 애굽에서 살았던 모든 것은 선악체계에서 나온 사고체계기 때문에, 신종코로나 바이러스기 때문에 하늘나라에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죽여 버려요. 죽이는데 그냥 죽이지 않고 그 딱지, 스티커와 같이 죽여 버리지요. 어린양과 함께 죽여 버리는 겁니다.

어린양과 함께 죽여 버리면 치료한다는 것이 뭐냐? 우리를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우리 안에 어린양의 요소, 어린양의 대신 죽으심의 요소를 끄집어내면 그게 치료가 돼요. 그걸 가지고 언약의 모습이라고 해요. 말씀의 모습, 약속의 현실화라고 합니다. 광야, 모든 인간은 사막에서 죽게 되어 있어요. 죽어 있는데 그들이 왜 사느냐? 그들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 그 안에 어린양의 희생물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5번째 제목이 ‘희생물’이었지요. 주님께서는 어린양의 희생물의 가치와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죽음의 사막길에서도 계속해서 살려주는 겁니다. 그게 치료하는 하나님이에요. 그러면 살려줄 때 그들은 뭘 아느냐? 주신 그 규례와 율례 안에 어린양이 죽었다는 그 원칙이 담겨 있어요. 그게 모세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전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이기도 하고요.

어린양의 요소가 들어 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자기가 그 말씀을 지켜서 구원받는 줄로 알았어요. 주의 동행하는 은혜는 알지 못하고,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것을 모르고 자기이름으로 하려고 하다가 결국 이스라엘은 멸망하지요. 그 말씀이 하나님의 어린양의 가치, 어린양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그 의미가 담긴, 함축되어 있는 어린양의 의미를 알려주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멸망의 길로 가게 하고요.

두 번째 이사야 43장 8절.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백성을 이끌어 내라.” 눈이 있어도 소경이고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에요. 다시 말해서 철저하게 이스라엘백성들은 완전히 죽음의 세계의 인식과 시야, 그것에 그냥 눌려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면서 어느 것 하나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열심히 하는데 힘이 모자랐다든지 재주가 없다든지 그걸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을 보는 인식자체가 소경이라는 말이지요. 완전한 소경이에요.

소경이라는 말은, 여러분이 신종코로나바이러스에 걸렸다 해봅시다. 중국의 의사도 죽었잖아요. 그 사람이 의사냐, 인품이 어떠냐, 얼마나 고귀한 성품을 갖고 있느냐, 얼마나 열심을 냈느냐를 묻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인간이든, 남자든 여자든, 어린애든 어른이든 관계없이 신종코로나 바이러스가 들었다는 그 이유 때문에 죽어버리거든요.

선악과 따먹은 것, 선악지식을 안다는 그것 때문에 죽을 대상이 돼요. 그래서 이사야 43장에서는 너희들은 눈이 있어도 소경이고,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다. 소경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었으니 무슨 대책도 없지요. 그러면 신약을 봅시다. 누가복음 6장 3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딴 말이 아니에요. 세상을 보는 시야가 달라졌다는 겁니다. 그냥 단순히 넓어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달라져요. 나를 보고 세상을 보고 주님을 보는 시야가 선악체계가 아니에요. “나 어때요 하나님? 나 잘났지요? 나 믿음생활 잘하지요?” 이런 식으로 자기를 보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예상도 못한 새로운 세계가 덮쳤다는 그걸 볼 수 있는 안목과 시야가 필요한 겁니다. 분명히 끊어졌는데 이미 하늘나라에 소속되어 있음을, 주님과 우리가 하나님의 십자가의 용서하심으로 끊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가 되었음을 아는 유일한 사람들, 그 사람이 바로 새로운 치료된 사람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니까 성경을 좀 본 사람들은 대번에 알거예요.

요한복음 9장에서, ‘네가 본다고 하니까 소경이다. 네가 소경이라 하니까 네가 제대로 보는구나.’ 우리는 예수님을 경유해야 되고 특히 십자가를 경유해야 돼요. 십자가를 경유하면서 무엇을 알아야 되느냐? 우리가 어떤 성경지식을 알고 선행을 해도 끊어져 있는, 십자가와 부활사이에 끊어져 있는 그 간격을 우리 노력으로, 우리 지식으로는 이을 수도 없고 덮을 수도 없다는, 끊어져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

아무리 교회 다니고 봉사해도 내 노력으로 천국갈 수 없음을 기쁨으로 아는 거예요. 끊어져 있음을 아는 이 안목, 이것은 뭐냐? 이미 이어졌다는 거예요. 이미 이어졌기 때문에 하늘나라소속,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에 지금 내 몸이 속해 있는 이 세상이 형편을 제대로 파악하는 겁니다. ‘아, 내 힘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구나. 내 노력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구나. 내 안목자체가 썩어빠졌고 내 안목자체가 지옥으로 갈 수 있는 안목밖에 없는데 아무리 성경말씀 지키고 봉사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효과가 있으리오.’

그걸 아주 기쁨으로, 감격하면서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럴 때 누굴 만나도,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도 선악에 대해서 주눅 들거나 벌벌벌, 떨거나 ‘나 이래서 지옥가지.’ 이렇게 겁나거나 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끊어짐이 이어졌기 때문에 그 이어지게 하신 부활의 영, 성령을 보내신 주님의 은혜에 너무 감사해서 오히려 하나님 앞에 고마움만 표시할 뿐이지요.

그러한 새로운 인물, 새로운 인간성, 그것이 희생물 되신 예수님의 보람이 되는 겁니다. 그게 이미 신약에 와서 성령 받으면 치료 된 참된 약속이 구현된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우리 자신에게 협박받거나 내가 스스로 공갈치거나 하지 않게 하옵소서. 눈이 열려서, 십자가를 경유해서 다시 세상 볼 수 있는 안목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 어떤 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편만해있고 깊이 있다는 것, 인간 손으로 처리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십자가 피를 받은 사람만 구원된다는 이 기쁨이 늘 유지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6강-호 7장 1-3절(하나님의 치료)200129-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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