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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4 16:49:05 조회 : 164         
20190301a 울산강의-레위기 22장 : 거룩한 사물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33)
20190301a 울산강의-레위기 22장 : 거룩한 사물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2장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그들로 이스라엘 자손이 내게 드리는 성물에 대하여 스스로 구별하여 내 성호를 욕되게 함이 없게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들에게 이르라 무릇 나의 대대 자손 중에 그 몸이 부정하고도 이스라엘 자손이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성물에 가까이 하는 자는 내 앞에서 끊어지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두 가지를 먼저 생각해야 될 겁니다. 하나는 단일성입니다. 단일성 안에 뭘 품고 있느냐 하면, 최종성을 품고 있는데, 단일성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 백 사람이면 백 사람, 천 사람이면 천 사람의 생각들이 다 다르지요. 부부라도 생각이 다르지요. 자식들도 생각들이 다 달라요. 그런데 딱 하나를 바라본다면 자기 생각이 차이가 나더라도 하나를 쳐다본다는 말은, 그 하나가 품고 있는 그 내용이 각 사람 속에 분배가 되겠지요.

예를 들면 태극기를 바라본다 할 때 남녀노소 관계없이 태극기를 바라보면서 나라 생각할 때 나라 생각이 태극기를 통해서 상상 속에 다 분배되지 않습니까. 그럴 때 그 순간만큼은 천이면 천, 만이면 만이 하나의 마음이 되겠지요. 그게 바로 단일성이라 하는 거예요. 단일성을 최종성이라 했지요.

인간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내 마음이다, 내 생각이다, 내 해석이다, 라는 것이 용납될 수가 없어요. 성령이 와야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다면 너의 예수가 있고, 나의 예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단일성이기 때문에. 네가 아는 예수, 내가 아는 예수가 동일해야 돼요. 이게 인간의 능력으로 인간의 힘으론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 레위기도 율법인데 율법은, 인간이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아무리 하나님 쪽에서 단일성을 내세워도 인간은 각각의 마음을 따로 갖고 있다는 겁니다. 따로 갖고 있기 때문에 단일성이 각각의 마음을 용납하지 않고 용서하지 않고 그냥 징벌해버리는 겁니다. 이걸 율법이 모든 인간을 저주받게 한다는 뜻이에요.

다시 설명하면 단일성이란 사람마다 생각이 다 다르다 이 말이죠. 각자 나름대로 하나님 섬기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단일성에선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너는 네 식대로 믿고 나는 내 식대로 믿으면 될 것 아닙니까? 그게 안 된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단일성이 성물로 나와요. 거룩한 물건 또는 물체, 사물로 나와 있지요. 단일성을 하나님께서 먼저 제시하고 난 뒤에 단일성의 취지에 어긋나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개인이 성의를 표하는 것은 구원받는 데 전혀 보탬이 되질 못해요.

사람이 성의를 표한다든지 내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지 생각이 뭐냐 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머리에 남은 자기의 기억입니다. 자기 체험이란 말이죠. 그것으로 성의를 다하여 열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면 되겠지, 하는 것은 너무 개인구원 입장이에요. 출제자가 문제를 내야지 지가 문제 내놓고 지가 문제를 풀면 말이 안 되잖아요.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을 하는데 그런 핑계 없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다 그렇잖아요. 교회 나오려고 했는데 형편이 그래서 못 나왔습니다, 라고 이야기할 때 그런 사람은 교회 나와 봤자 무엇을 기억하느냐 하면, “나, 오늘 교회 나왔다”를 기억해요. 그거는 단일성에 해당이 안 됩니다.

“나는 이십 년 동안 교회 나왔다.” 이것은 하나님이 구원의 근거로 제시한 적이 없어요. 하나님은 최종적인 단일성을 제시한 거예요. 오늘 본문에선 그걸 뭐라고 했던가요? 성물. 다른 말로 하면 거룩한 물건이에요. 거룩한 물체라고요. 거룩한 사물.

그래서 정말 구원받은 교회라면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집사님, 십자가 생각했어요?” “나를 부인하라는 십자가 생각하지.” 최 집사님도 십자가, 김 집사도 십자가, 목사인 나도 십자가. 열 명의 교인들이 모여서 뭘 보여준 거예요? 십자가란 단일성을 보여주잖아요. 그 십자가는 뭐냐 하면, 기존의 내 성의와 열심을 다 부정하죠. 왜냐하면 십자가에서는 죽음이니까.

오늘 강의가 또 복잡하고 길어지겠는데. 자, 죽음이 뭔지 생각해보세요. 죽음이 뭐냐 하면, 사라지는 걸 의미합니다. 제 말 틀렸습니까? 맞지요. 그러면 여러분이 지금껏 살아있으면서 장례식에서 관 속에 여러분 말고 다른 사람이 누워있는 걸 많이 보셨잖아요. 그런데 내가 그 관 속에 누워있다고 생각해봅시다.

곧 어디로 가느냐 하면, 화장터로 가잖아요. 화장터 갈 때까지는 나는 지금 관 속에 누워있다. 편안하다. 이 냄새, 하다가 불 속에 들어갑니다. 뭐 타는 냄새나는데? 누가 사라집니까? 내가 사라지지요. 십자가 의미가 뭐냐 하면, 너는 없다는 거예요.

없는 인간이 믿는다? 내가 없는데 내 믿음이 무슨 소용 있으며 내가 없는데 내 헌금이, 내 기도와 충성과 내 소망과 내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내 믿음 소망 사랑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로 구원받는 거예요. 내 성의로 구원받는 게 아니란 말이죠.

강의 다시 해봅시다. 인간 속에 뭐가 남아있다 했습니까? 기억이 남아있지요. 그러면 나는 나름대로 성의를 표했다는 말은 작년보다 올해가 낫잖아요, 라는 비교의식이 생기겠지요. 작년에는 교회 농땡이 쳤지만 올해부터는 정신 바짝 차리고 교회 나옵니다. 이게 남아있겠지요. 그건 기억이란 말이죠.

작년보다 내가 열심히 한다고 그것으로 구원됩니까? 그건 단일성이 아니고 다양성이에요. 니 경험 다르고 내 경험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한 거예요. 교회 없이 세상에 시장바닥에 나가 보세요. 사람들은 단일성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다양성을 이야기해요.

우리 가정 얼마나 행복하다고? 이렇게 하거든요. 내가 행복하면 다른 사람도 행복합니까? 어림도 없는 소리지요. 자랑질하고 있는 거예요. 이번에 우리 아들 취직 잘 돼서 다음 주에 결혼합니다. 아, 행복해. 이건 누굴 약 올리는 거잖아요. 나의 행복과 다른 사람의 행복이 단일적입니까? 내가 행복하면 저절로 행복해집니까? 그러면 그 행복은 단일성이에요.

지금 김정은과 트럼프 회담이 결렬됐지요. 경상도 쪽에선 지금 좋아서 난리입니다. 고소하다고. 이젠 돈 덜 퍼주겠지, 이러면서. 그런데 서울 쪽에 가면 아쉬워하는 사람들 있을 수 있을 거예요. 이건 다양성이지 단일성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보는 정치적 해석이 다르고 역사적 견해가 다릅니다. 5.18 이렇게 보던 저렇게 보던 다르다는 건 뭔 뜻이에요? 이건 다양성이라고요.

성경해석 이렇게 할 수 있고, 저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건 뭡니까? 다양성이에요, 다양성. 잘 들으세요. 다양성은 보복이 있을 수 없어요. 여기에 징벌이나 저주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왜? 나름대로 나름 성의를 표했으니까. 앞으로 좀 더 잘해. 이렇게 돼요.

시험을 쳤는데 아이큐가 50 안 되는 사람이 수학시험 40점 맞았다. 그런데 아이큐 155 되는 인간이 80점 맞았다. 누가 잘한 거예요? 머리 좋으면서도 농땡이 부렸다는 뜻이고 머리 나빠도 열심히 했다는 뜻이잖아요. 선생님이 이걸 볼 때 농땡이 부린 놈은 두 대 때리지만 얘는 안 때려요. 잘했으니까. 이게 뭐냐 하면, 성의를 감안해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간을 감안해주십니까? 이것은 너 하는 것 보고 내가 평가하겠다는 게 되잖아요. 그런데 주님의 성물은 다양성을 고려하는 게 아니고 단일성으로 묶어버렸어요. 누구든지 이 성물을 건드리면 지옥 가는 거예요. 이건 인간들이 협의해서 된 게 아니에요.

제가 강의하는 걸 보니까 목 쉰 이유를 아시겠지요. 지난번에 목 쉬서 죄송스럽게 생각해요. 어떤 사람이 그래요. 목사님, 목 쉰 강의 들어보니까 도저히 못 듣겠다고 해요. 내가 얼마나 미안한지요.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성물이란 율법입니다. 율법을 준 것을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너는 아무리 해도 단일성에 대해서 합하지 못한다. 네가 거기에 합치되어 살 수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성물을 제시한 겁니다. 이 성물을 함부로 만지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고 할 때 그러면 함부로 안 만지면 되지, 조심스럽게 만지면 되지, 성의 있게 만지면 되지, 라고 하는 것은 단일성의 취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거예요.

왜냐하면 단일성은 결국 최종성을 이야기하는데 최종성은 최종적인 심판의 기준을 말합니다. 내가 심판의 기준을 말할 때 성물의 가치를 모르고 만진 인간들은 그 기준에 의해서 전부 다 작살낸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취지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완벽한 거룩이 아니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어요. 뭐 성의를 다했습니다. 열심히 했잖아요. 어설픈 그러한 핑계를 대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물에 대해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3절에 보면, “무릇 나의 대대 자손 중에 그 몸이 부정하고도” 부정이란 말이 나오지요. 더럽다 이거에요. 부정하니까 고상하게 여기는데 쉽게 가겠습니다. 네가 더러움에도 불구하고 성물에 가까이 하는 자는 내 앞에서 끊어진다. 하늘나라 백성으로 천국에 안 넣어준다 이 말입니다. 더러운 몸으로 감히 어디를 만져. 내가 그 자를 천국 넣어주나 봐라. 그런 뜻이에요. 이게 최종성이란 말이죠.

그러면 최종적인 판단기준을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이 만든 게 아니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제시한 거죠. 그러면 이스라엘은 이걸 주의 깊게 잘 지켰습니까, 못 지켰습니까? 율법대로 완벽하게 지켰습니까, 못 지켰습니까? 지키면 복 받고 못 지키면 저주받아요. 그들이 저주받았어요, 복 받았어요?

거기에 대한 해답은 다니엘 9장 11절에 나옵니다. “온 이스라엘이 주의 율법을 범하고 치우쳐 가서 주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이 저주가 우리에게 내렸으되” 해답이 나와 있잖아요. 성경에 해답이 나와 있다고요. 괜히 오늘날 성경을 모르고 자기의 가능성, 성의를 봐주세요. 이런 구차한 소리하면 안 돼요. 성경 자체가 문제를 제시하고 해답은 성경 안에 있어요.

어떤 인간도 아무리 철저에 철저를 기하고 완벽에 완벽을 기해도 인간은 자기가 모르는 자기의 내부가 있어요. 그걸 누가 아느냐? 주님이 알고 있어요. 주님이 알기 때문에 우리 내부의 더러운 것들을 바깥으로 끄집어내어서 기어이 우리를 족치기 위해서 저주받도록 율법을 주신 겁니다. 율법은 우리로 저주받게 하기 위해서 주신 거예요.

로마서 3장에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너무나 단출하게 깔끔한 결론이에요. 구구한 변명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 현재 저주받고 있다는 저주받을 만하고 마땅히 저주받아야 될 사실을 우리가 도통 멍청한 인간이 돼서 그걸 모르고 있어요.

그걸 제가 주일 설교에서 미개한 사람이라 하는데, 우리가 얼마나 미개한지 자기가 어느 정도 멍청한지를 몰라요. 멍청함의 특징은 뭐냐? 시건방졌어요. 하루 밥 세끼 먹지요. 법 지켜서 먹는 게 아닙니다. 저주받을 만한데도 은혜 주신 거예요. 우리가 잘나서 하루 세끼 먹는 것 아닙니다. 어젯밤에 잠 잘 주무셨지요? 훌륭해서 잘 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린 그것도 모르고 저녁에 조깅해서 잠 잘 잔줄 알고 너무 시건방져서 시건방짐이 한도 끝도 없어요. 전부 다 내가 열심히 해서 이만큼 살아왔다는 겁니다. 말씀? 보지도 않아요. 듣지도 않아요. 말씀공부해도 나오지도 않지만. 안 들어요. 나 혼자 열심히 해서 살았는데 뭘 다른 소릴 들을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성물?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인데? 단일성? 그건 성경에 없는 이야기인데? 이런 식으로. 최종성? 그것도 성경에 없는 이야기인데? 단일성, 최종성, 이런 것은 우리 일상생활에 전혀 모르고 살아갑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뭐냐? 이 세상은 다양하다. 다양하니까 자기 팔 자기가 흔들자. 내 팔 흔드는데 간섭이나 하지 말라.

마태복음 11장입니까 예수님이 그런 말씀했어요. 내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고 내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아니한다. 이게 뭔 뜻이겠어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세상 풍경이 그런 모습이었어요.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세상 자알 돌아간다. 혀를 끌끌 차시는 거예요.

마태복음 11장 15절에,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세대입니다. 이 세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 했어요. 이 울산바닥 보고. 그러니까 단일성이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다양성은 그 말이 뭔 뜻인지 몰라요. 각자 자기만의 성장해온 기억이 있기 때문에. 기억에 준해서 예수님도 해석하고 성경말씀도 해석하려 하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잘못됐는지 제가 계속 설명하려고 합니다.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뭘 춤춰요? 미쳤나, 하지요. 오히려 욕합니다. 넌 현실을 모른다. 현실이 얼마나 다양한데 각자 자기 해석이 따로 있다. 얼마나 그런 주장하겠어요.

성경을 해석하겠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나 아직 멀쩡하단 뜻이에요. 자, 강의를 잘 들었는지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제가 분명히 했습니다. 하나님이 성물을 제공할 때 성물은 단일성인데 성물을 만질 때는 단일적인 원리가 있어요. 성물이란 최종적으로 이것은 조심해서 만지라 할 때는 그 성물을 제시할 때 이렇게 만지라고 하나의 기준만 딱 제시한다고요.

그 뒤에 아까 강의 전에 읽어보셨잖아요. 무슨 규칙이 왜 그렇게 복잡한지 이것도 하지 말라, 저것도 하지 말라고 나오지요. 그 기준은 단일성을 더욱 더 단일하게 붙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인간적인 다양한 해석이 끼어들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린 이런 질문해야 돼요. 왜 내 해석은 안 통합니까? 너는 네 자신을 몰라. 너는 저주받은 인간이 저주받은 해석을 내게 되면 그걸 받아주겠느냐는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성경해석을 왜 하려고 합니까? 지가 개인적으로 구원받으려 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구원받겠다는 것이 우리가 저주받아 합당한 티를 내고 있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그런 식으로 하면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주님께서 합니다. “오지 마.” 답답한 쪽은 내가 아니고 니가 답답해. 누가 구원받고 누가 지옥 가는지는 인간들은 몰라요. 여러분 제가 질문할 테니까 답변해보세요. 성경에 누굴 꼭 집어서 구원한다는 대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내가 너만 구원해줄게. 예레미야나 에스겔에 그런 대목이 없단 말이죠. 예수 믿는 자는 구원받는다. 예수 믿는다는 조건은 단일성에서 나온 조건이에요. 다양성을 고려한 게 아니고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단일, 단일, 단일. 내가 준 것, 내가 준 것, 내가 준 것, 그것만 밀어붙여요.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우리 교회 교인은 오천 명이다, 우리 교회는 삼천 명으로 부흥됐다고 하거든요. 여러분 쓰레기처리장 보세요. 쓰레기 많이 모아놨잖아요. 쓰레기를 모아놓으면 그걸 뭐라고 합니까? 그걸 쓰레기장이라 해요. 불쏘시개밖에 안 돼요. 쓰레기 모아놓고 다양성 모아놨다고 다양성 되는 게 아닙니다.

쓰레기 모아봐야 없던 장미 하나 피질 않아요. 단일한 장미꽃이 피질 않는다고요. 그냥 쓰레기 냄새만 날 뿐이에요. 쓰레기 냄새 맡으려면 그런 교회 가시든지. 여러분 입맛대로 여러분 느낌대로 성경해석하세요, 라고 다양성을 허락하는 교회는 쓰레기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쓰레기고, 교인들도 쓰레기고. 쓰레기는 쓰레기만 알아봐서 모이게 돼있어요.

나라는 가치, 내가 살아온 경험, 체험, 나라는 의미를 완전히 개무시하는 교회에 가야 돼요. 천주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인간을 존중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인간을 존중해요. 불교의 특징은 뭐냐 하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하지만, 니가 부처라는 겁니다. 네가 신이라는 거예요. 둘 다 인간을 존중해줘요.

그러나 개신교는 루터가 말하기를, 인간은 십자가 앞에 죄인이라 했습니다. 나쁜 짓해서 죄인이 아니에요. 어떤 분이 그런 질문했어요. 살인했는데도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까? 오랜만에 들었어요. ‘예’라 하고 답변해줬어요. 이 세상에서 아무리 악한 죄를 지어도 예수님을 못 알아보는 죄보다 더 큰 죄는 없습니다.

기준이 살인했나, 간음했나, 묻는 게 아니에요. 내가 준 단일성에 대해서 네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그게 기준입니다. 성물 하나만 아니고 기준도 단일 기준으로 나오는 거예요. 이게 어렵습니까? 제가 지금 어려운 말을 하는 거예요? 교인수 많으면 진리답습니까? 숫자 많으면 그만큼 진리에 가까운 거예요?

예배당, 큰 부동산은 그만큼 천국 가기 쉬운 겁니까? 그만큼 많이 봐준 거예요. 어중이떠중이 다 오라는 거예요. 어중이떠중이들만 온 거예요, 결국. 내 가치 알아달라고, 중보기도 해달라고 이런 인간만 온 거예요. 나의 가치를 포기 못하겠다는 사람들만 모인 거예요. 교회가 나를 위로해달라는 거예요. 위로 못 받아서 환장을 했어.

위로의 하나님이 계시니 위로해달라는 거예요. 뭐 했다고 위로할까요? 여러분을 위로해드릴까요? 여러분 위로하는 방법은 굉장히 쉽습니다. 새순교회 안 나오는 사람들 다 망했습니다. 저절로 위로되지요. 사람은 남이 못 돼야 위로돼요. 연예인 가운데 내가 꼴 보기 싫은 연예인, 그런데 그 연예인 얼마 전에 이혼했단다.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요.

뚱땡이 둘이 하노이에서 만나서 뭘 한단다. 그런데 결렬 될 때 갑자기 엔돌핀이 확 돌면서 주님 축복인지 경상도 아니야, 갱상도 사람들 업 되는 거예요. 이젠 돈 안 퍼주겠지, 세금 안 올리겠지, 금강산 한다고 돈 퍼주지 않겠지. 이런 것. 남이 못 돼야 돼요.

제가 오후 설교에서 했잖아요.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다 했지요. 사촌이 논을 산 건 참을 수 없어요. 지가 왜 논을 사, 내가 논을 사야지. 인간은 이미 자기가 단일성 됐어요. 나만 잘 돼야 돼. 국민소득 3만 불이요? 자기만 3만 불 돼도 남은 만 오천 돼야 돼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이미 우리가 신이 돼있다는 걸 몰라요. 그러면 종교는 뭡니까? 내가 신 돼있다는 것을 하나님이라도 나를 좀 부추겨주고 긍정해주고 인정해주고 위로해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요즘의 기독교는 천주교와 불교와 똑같이 됐어요. 고객이 위로해달라니까 이제는 단일성 다 때려치우고 다양성으로 가버린 거예요. 전부 다 완전히 쓰레기장이 다 돼버린 거예요.

진짜 하나님은, 너는 진노 받아 마땅하기 때문에 하루 두 끼, 한 끼 먹는 것도 고마운 줄 알아라, 이게 진짜 하나님이에요. 어젯밤 잘 잤나? 내가 밤새도록 눈 탱탱 붓게 해도 넌 할 말 없어. 네가 욥처럼 온 몸에 종기가 나서 기왓장으로 긁어도 너는 왜 이러십니까, 할 쨉이 못 돼. 그 정도 율법을 어기면 저주에요.

우리가 성경을 안 듣고 복음을 안 듣고 그런 말씀 듣지도 않고 그냥 눌러놓고 집에 먼지 나게 쌓아놓고 세상사람 만나니까 이런 소리 안 들리지요. 그게 우리가 사는 방법입니까? 그냥 안 듣고 안 보면 그만인 거예요? 그게 바로 눈 감고 아옹하는 것 아닙니까. 뒤에서 사자가 오니까 타조가 달려가다가 힘 빠지니까 모레 뒤집어쓰고 사자가 보는 눈알 둘을 모레 속에 집어넣고 이쯤이면 사자가 갔겠지,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우리는 말씀은 안 듣고 안 보면 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말씀을 안 주는 교회만 찾아가는 거예요. 위로해주는 곳. 날 안 건드려주는 곳, 날 질책 안 하고 안 나무라고 나를 사람 대우해주고.

여러분 그러실 거예요. 목사님도 아시다시피 인간은 원래 그런 것 아닙니까? 지가 돛대고 지 잘났다 그뿐인데 그런 사람에게 복음 전하면 교회에 교인 한 명도 안 남는데 어떻게 합니까? 교인 한 명도 없어도 주의 택한 백성은 한 명도 빠진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됐잖아요? 교회 교인수 한두 명이라도 있어야 됩니까? 없어도 주께서 택한 자 되면 되잖아요. 창세전에. 그게 모여서 교회 아닙니까.

이미 교회 됐는데 무슨 교인수가 필요합니까? 숫자는 주님이 알고 있으면 되지 우리가 구태여 숫자를 헤아릴 필요 없는 그런 교회 돼야지요. 헌금 계산 안 하는 그런 교회 돼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에겐 단일성만 있으면 되잖아요. 여러 교인 중에 하나, 그것 필요 없어요. 단일적인 내용만 있으면 되잖아요. 그 단일성은 최종성입니다.

따라서 오늘 내용을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봐야 돼요. 첫째는 뭐냐 하면, 이 율법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는 거예요. 두 번째는 이 율법에 적용했을 때 마지막에 이스라엘에게 일어났던 여파는 결국 이스라엘을 어떤 식으로 멸망케 했는가? 왜냐하면 레위기가 틈 사이에 끼어있으니까, 중간에 있으니까?

창세기 9장 5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면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자, 여기서 묻습니다. 사람이 먼저입니까, 피가 먼저입니까? 창세기 9장에서 사람을 중요시여깁니까, 피를 중요시여깁니까? 피를 중요시해요. 피를 살리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겁니다. 피 살린다면 주께서는 사람이 죽이는 걸 개의치 않습니다. 피만 살 수 있다면. 이 말이 뭐냐 하면, 예수님만 살 수 있다면 사람들 지옥 보내는 것도 주께서 개의치 않습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내 생각합니까? 우리가 내 생각한다는 것은 예수님 위주에요, 내 위주에요? 내 위주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평소에 사고방식이 얼마나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됩니다.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었거든요. 제가 물어봅니다. 이게 하나의 해석입니까? 에베소서 1장 7절에 나오는 이 말씀이 기껏 어떤 해석 중에 하나일 뿐입니까, 아니면 전부입니까? 전부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것도 당신들의 사적인 견해라고 할 때 우리가 무슨 말을 해야 돼요?

사적인 견해라는 말은 그 말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고 사적인 견해가 되면 이게 단일성 될까요, 다양성 될까요? 다양성 되지요. 다양성 해석은 이 땅에 아무 소용없습니다. 오직 하나입니다.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피로 죄 사함 얻는가? 논리는 성립될 수 있어요? 그건 논리가 성립 안 됩니다. 논리가 성립 안 되는 걸 약속이라 합니다. 약속인데 앞에 뭐 하나 붙이세요. ‘일방적’ 약속. 일방적 약속 앞에 붙이세요. ‘주님의’ 일방적 약속. 왜냐하면 자기 나라기 때문에. 지 나라에 지가 데려가겠다는데 마귀가 쟤 죄 많이 졌습니다, 강도 짓했어요. 내 나라 내가 가는데 니가 왜?

마귀가 저 사람 강도 짓했습니다, 간음, 살인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악마의 세계에 나름대로 원리가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선해야 천국 가고 악하면 지옥 간다가 악마가 꼭 쥐고 있는 본인이 사람들을 낚아채기 위한 유일한 책략이요 무기거든요. 그 악마가 여러분의 양심을 매일같이 아침 눈만 뜨면 여러분을 쑤셔댑니다.

어제 나쁜 짓했지 오늘 복 받을 생각하지 마라. 이게 인과응보라는 거예요. 사람은 착한 일하면 복 받고 나쁜 짓하면 벌 받는다. 이게 인과응보. 그걸로 계속 아담부터 내리 오늘날까지 모든 속속 태어나는 아이들까지 전부 다 영혼을 장악하고 있어요. 정신적으로.

맹탕으로 나오는 게 아니에요. 인간은 벌써 악마의 사고방식을 부여받고 그걸 깔고 그걸 갖고 태어난 거예요. 악마 친화적입니다. 악마의 생각이 곧 인간의 생각, 인간의 생각이 뭐냐? 악마의 생각입니다. 착한 일하면 복 받고 나쁜 일하면 벌 받는다. 그게 옳다는 걸 우기기 위해서 평생토록 거기에 합당한 사례들을 다 모아요. 그렇게 해서 이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줄 그런 예들을 모은다고요.

그게 우리 기억 속에 남습니다. 내가 이만큼 사는 것도 내가 어지간히 착해야지, 그러거든요. 내가 얼마나 착했으면 이 정도로 산다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지금보다 더 착했으면 복을 더 받았을 거고 그러면 내가 이렇게 지지리 궁상처럼 안 살 거란 말이죠.

그런 식으로 그런 마음 자세로 회개를 하던 반성을 하던 아무짝에도 소용없습니다. 회개, 반성해봐야 뭐 합니까. 주여, 제가 어릴 때 나쁜 짓만 안 했으면 일찍 예수 믿었으면 복을 받았을 텐데. 백날 회개해도 나온 결과는 악마가 펼치는 악마의 원리만 줄줄 쏟아내고 있어요.

인간의 선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고 인간은 선하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인간이 선하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아주 교묘하게 아주 정교하게 설명해요. 인간이 행함으로 따라갈 수 없는 그 영역의 것은 인간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예요. 이건 제가 사도 바울의 생각(사도 바울의 생각이 주님 생각이에요)을 풀어서 하는 거예요.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걸 따라잡아요. 인간이 행할 수 없는 영역으로 넘어가버리면 그때 인간의 행함은 뭡니까?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돼서 무용지물이 돼요. 이것을 로마서, 갈라디아서에서, 잘 들어보세요. 네가 성령 받은 것이 율법의 행함이냐, 아니면 성령의 선물이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말이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율법대로 하면 지키면 복을 받아요. 그러면 복을 따니기 위해서 뭘 동원한다? 율법은 자동적으로 행함을 유도하게 돼있지요. 십계명이 그거잖아요. 성물, 내가 성물 정신 차려서 만질게요. 행함이 동원. 그 행함을 할 때 결국 구원문제는 행함이 따라잡아도, 따라잡아도 구원이나 사랑은 어느 범주란 말이죠? 인간이 따라잡을 수 있는 범주가 아니고 훌쩍 그걸 넘어선 거예요. 그 넘어선 증거가 뭐냐?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시고 아무도 갈 수 없는 곳에 혼자서 가셨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성경을 해석하겠단 의도가 뭐예요? 해석할 때 그냥 해석합니까? 해석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내 행함으로 해석한 내가 어쭙잖게 지키면 될 게 아니냐는 거예요. 혹시 이중에서 18급이라도 바둑을 조금이라도 두시는 분 계십니까? 바둑에 흉내 바둑이라는 게 있어요. 하수가 지기는 싫고 고수한테 판판이 깨지니까 비겁한 수를 쓰는 게 뭐냐 하면, 상대방이 두는 수를 고대로 하는 거예요.

인공지능과 바둑 둘 때 요새는 프로기사가 석 점 깔고 둬도 져요. 그런데 얼마 전에 인간이 인공지능한테 이겼습니다. 어떻게 이겼느냐 하면, 비겁하게 진짜 비겁하게 흉내 바둑으로 이겼어요. 이건 바둑이 아니고 기계지요. 너만 기계냐, 나도 기계다. 고대로 하는 거예요, 고대로.

충남 어느 마을에 체험하는 게 있는데 추사 김정희 있잖아요. 서예 체험하는 데가 있어요. 어떤 초등학생이 글씨를 썼는데 추사체처럼 멋지게 썼어요. 놀랍지 않습니까? 초등학생이 어려운 추사체를 정말 잘 썼는데 나중에 보니까 이유가 있었어요. 추사체에 습자지를 깔아놨어요. 체험학습으로 추사체 본대로 따라하니까 멋진 글씨가 된 거예요.

여러분, 성경말씀 그대로 예수님 흉내 내면 구원받습니까? 제가 몇 년 전에 설교에 대해서 그런 강의를 했어요. 설교 잘하는 설교할 것 없다. 만약에 설교시간이 15분이라면, 예를 들어서 오늘 본문 레위기라면, 여러분 제가 레위기 22장 1절부터 설교를 하겠습니다. 그래서 시작하고 15분 동안 24장까지 읽지 않겠습니까? 읽었습니다. 그리고 설교 끝, 했습니다.

자, 설교 잘했습니까, 못했습니까? 뭐 최고의 설교는 성경말씀에 더 보태지 않는 것이라면서요? 빼지도 않고 안 보탰다면 신학교 뭐가 필요 있어요. 목사 뭐 필요 있어요. 낭랑한 목소리로 성경 읽으면 은혜 받고 눈물 흘리고 그럴 건데, 최고의 설교 아닙니까? 그러면 설교할 필요 없지요. 그것 들으려고 교회 뭐 하러 옵니까? 지가 집에서 성경 보면 되지. 성경 읽으면 지가 설교한 게 돼요?

성경말씀 그대로,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을 그대로 본받으면 거기에 뭐가 개입되느냐? 자기 해석이 들어가겠지요. 이래야 본받는 거다. 이래야 주님을 모방하는 거다, 라고 누가 그렇게 결정한 거예요? 본인이 결정한 거죠. 본인이 마귀 들려서 절대자니까. 내 구원,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해석해서. 그러면 낭랑한 목소리로 성경 읽고 예수님 행동하면 되잖아요.

그러면 예수님 피로 용서받는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인간의 행함이 따라잡았다, 못 따라잡았다? 못 따라잡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그동안 십자가 달려서, 필리핀에서 하고 있어요. 십자가 만들어서. 웃겨요. 그 나라는. 필리핀이 천주교 믿는 나라거든요. 민다나오는 이슬람교, 반란군 있지만.

십자가 고난 체험하는 거예요. RH+ A형, B형 안 받습니다. 주께서 내 피 안 받습니다. 채찍으로 부족하다고 때려봐야 구원 안 돼요. 예수님의 피만 돼요. 어린양의 피만 된다고요. 이게 해석문제에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십자가는 우릴 저주하는 거예요. 율법의 완성이니까.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니가 나쁜 짓해서 나쁜 사람 되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우리는 나쁜 사람이었어, 태어날 때부터 악마의 마음을 가지고 저주받기로 태어났어, 라고 그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이 율법이고 그게 십자가에요.

그럼 거기에 대해서 옳소이다, 하고 예수님의 단일성에 대해서, 첫째 시간 결론입니다. 예수님이 제시한 단일성에 대해서 우리가 뭐라고 합니까? 방금 옳소이다,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지금 자기 다양성을 주장한 거예요, 아니면 포기한 거예요?

너, 나, 난 너와 다르니까 특별나. 난 너보다 우수해. 사람과 비교한 게 아니고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 앞에서 홀로 자기가 비교하지요. 그 순간 남과 비교한 다양성은 본인한테 의미 있어요, 없어요? 의미 없지요. 그게 바로 성도 아닙니까. 왜냐하면 말씀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 스스로 살아서 움직이니까.

해석을 하겠다는 말은, 죽은 말씀인데 내가 정신 차려서 지킬 때만 이 말씀은 열매와 성과를 얻는다. 이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거짓말하지 말라는 그 말, 십계명에 나오잖아요. 이 말은 백 사람에게 해석해보라고 하세요. 다 다르지요. 그건 거짓말 아니지. 화이트 거짓말이지. 사람마다 뉘앙스가 다 달라요. 단일성이 아니지요.

그러면 거짓말하지 말라는 제대로 율법적으로 지킨 경우는 어떤 경우냐? ①평생 한 번도 거짓말 안 했다. ②선의로 거짓말 한 적은 있지만 나쁜 의도로는 거짓말 안 했다. 첫 번째는 이러나저러나 거짓말 안 했다. 두 번째는 선한 의도에서는 거짓말했지만 나쁜 의도로는 거짓말 안 했다. ③거짓말 한 적이 있는지 모르지만 정신 차리고서는 거짓말 안 했다. 내가 무심코 무식해서 몰라서 어릴 때 나중에 철이 들고 보니까 거짓말인지 알았지만 내가 그 순간에는 의도적으로 거짓말 안 했다. ④번은 뭐냐? 제가 죄인입니다. 몇 번입니까?

거짓말하지 말라고 율법을 준 이유가 뭐라고요? 저는 제 주장, 악마적인 마음을 갖고 태어나서 나는 내 주장을 감히 시건방지게 십자가 앞에서 떠벌였습니다. 내가 이만큼 인생사는 것도 내가 열심히 살았습니다. 내가 주의하고 바르게 살았기 때문에 이만큼 살았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어요. 이것이 얼마나 시건방진 것을 십자가 피 앞에서 저는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피가 살아 있는 거예요. 그 사람에게 주의 의가 살아 있고 율법의 완성이 살아 있어요. 이걸 의인이라 하는 겁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는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지요. 죄인이라고 고백한 사람이 아닙니다. 주께서 죄를 만들어내요. 우리가 죄를 고백해도 그 죄 개념이 사람마다 다 달라요. 또 다양성이에요. 그때는 틀렸고 지금이 옳다. 홍상수 감독 영화 제목처럼 이렇게 핑계 댈 수 있어요, 인간은.

따라서 옛날에는 복음 몰랐는데 지금은 복음 안다고 하지 마세요. 복음 아는 이것도 주님 보시기에 어설프고 복음 몰라도 어설프고 내가 아는 것은 예수님의 피가 내 안에서 자동적으로 저절로 주님의 손에 의해서 활동성에 의해서 저절로 피를 증거하는 운반체로 만들어낸 이걸로 이미 구원의 관계에 돌입된 거예요.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고 더 할 게 뭐가 있어요. 무슨 해석을 하고 행함을 추구합니까? 이것도 개인적인 사견이에요?

다시 창세기 9장으로 돌아갑시다. 제가 물었던 게 있지요. 인간이 우선이 아니고 뭐가 우선입니까? 피가 우선이에요. 그 피가 뭔지 이 피를 마시는 자는 죽여 버린다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은 짐승의 피나 사람의 피를 안 마시면 되겠네. 이러지요. 안 마신다고 구원받습니까? 이 피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노아가 방주에서 나올 때 정결한 짐승의 제물에 근거해서 그 피 안에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물이 담긴 피에요. 그냥 피가 아니라니까요.

뭔 뜻인지 여러분 이해 안 되지요. 뭐냐 하면, 학교 마치고 노래 부르면서 집에 오는데 집에 경찰관들이 들끓고 엄마 우는 소리 들릴 때 갑자기 멀리 살던 삼촌들도 있단 말이죠. 그리고 삼촌이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말리는 거예요. 알고 보니까 동생이 홍역으로 죽었단 말이죠. 홍역은 어른들한테는 저항력이 있지만 아이들은 취약하지요. 예방주사 맞아도 취약해요.

동생이 홍역으로 죽었을 때 엄마는 아직도 학교에서 안 돌아온 형이 생각나겠지요. 그러면 형은 격리돼야 되겠지요. 들어오지 마. 멀리 가있어, 라고 하잖아요. 창세기 9장에서 짐승의 피를 먹지 말라, 사람의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은 그걸로 율법의 내용이 종결된 게 아니고 종결은 나중에 이 말씀대로 오실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본 내용의 전부에요.

왜? 단일성은 어디로 향한다? 최종성이니까. 그래서 그전부터 이스라엘, 노아한테 피 먹지 말라고 격리시켜 놓은 거예요. 네가 행함으로 터치하고 관여할 사항이 아니라고. 율법이란 것은 오실 분의 표상이에요. 구약성경이 일찍 온 것은 그리스도가 멀었고 차츰차츰 점점 가까이 가면서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은 누구에 대해서 증거 한다고요?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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