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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1 22:24:13 조회 : 80         
서울의존강의20190308a 베드로전서2장 21-23절(마땅함)-이 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IP:122.43.170.138)

서울의존강의20190308a 베드로전서2장 21-23절(마땅함)-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2장 21-23절

 

21절,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절,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절,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베드로전서 2장 21절,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여기서 예수님이 가게 되면 그 뒤를 누가 따라간다고 했습니까? 그 뒤를 성도가 따라가는 걸로 되어 있죠. 그런데 누가 불러주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따라올 성도를 먼저 불렀죠. 예수님이 먼저 불렀다 이 말이죠.

 

그렇게 따라갈 때에 따라가기를 시작했던 그 지점, 예수님이 여기 계시고 우리가 여기에 있다면 주님이 우리를 불러주십니다. 주님이 불러주세요. 오늘 강의가 좀 난해하니까 잘 들으셔야 해요. 주님이 우리 성도를 부르신다 이 말이죠. 불러주신다. 그렇게 할 때, 이 ‘불러주신다’가 우리가 부름을 받고 반응을 나타나게 되면 이 ‘불러주신다’가 사라질까요? 아니면 우리 안에 흡수통합 이 될까요? 어느 쪽이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줄 때에 그 불러줌에 응답해서 우리가 따라간다면 이 불러주심이 도중에 사라져버립니까? 아니면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이 불러주심에 의해서 우리가 움직였으니까, 이 불러주심이 우리 안에 내장되어 흡수통합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겠죠. 이 불러주심이.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내린 결론이 뭐냐 하면 “나는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가 되겠죠. 근데 “나는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라는 이것이 옳은가 하는 겁니다. 이것이 성경일까요? 이것이 성경이고, 계시고, 바른 고백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봐야 하는 겁니다. 내가 부르심을 입었다, 이게 계시냐 이 말입니다. 내가 부르심을 입었다는 이것이.

 

문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모르면서 일방적으로 나는 나라고 우기는 데에 문제의 시발점이 시작이 됩니다. 쉽게 말해서 주께서 불러줄 때는 달라야 된다 이 말입니다. 달라야 된다. 부르심을 입기 전의 나와 부르시고 난 뒤에 내가 달라져야 한다. 그러면 여기 예수님에서 여기 우리까지가 한 100미터라고 봅시다. 그럼 100미터 이전에 부르심을 입었잖아요. 부르심이 있으니까 주님을 따라갑니다. 좁혀갑니다. 100미터 전에서 한 20미터를 왔을 때에 20미터의 내가 여기에 있죠. 20미터의 나. 그렇겠죠? 부르심이니까 우리가 주님께 가잖아요.

 

그럼 여기 100미터이전을 A라고 하고 20미터를 B라고 한다면 A와 B사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느냐를 생각해봐야 한다 이 말입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첫째는 똑같다. 두 번째는 달라졌다. 어느 쪽일까요? 나를 불렀으니까, 부르심이 중요하니까, 나는 별반 달라질 것이 없이 그냥 따라가면 된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에는 변화가 없는 부르심은 없습니다.

 

변화가 없는 부르심이 없다면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왔을 때에 우리는 달라져야 하잖아요. 그 달라졌던 그것을 우리 자신이 인식하고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그것을 알고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럼 한 50미터를 더 갔다고 봅시다. 20미터에 30미터를 보태서 50미터 갔다고 봅시다. 그럼 50미터 왔을 때에, 20미터 다르고 100미터 전까지는 다르고 다 다르다 이 말이죠.

 

그러면 나는 부르심을 입었다고 할 때에 우리가 어디에 치중하느냐 하면은 도대체 나는 어떤 점에서 부르심을 입고 난 뒤에 변화되었는가를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을 다시 정리하게 되면 부르심을 입고 난 뒤에 인간은 그냥 고정된 나를 주장할 수 없고 달라져야 된다는 것. 달라져야 되는데, 근데 그 달라져야 되는 그것이 나는 달라졌다고 이야기 할 때 그게 과연 정답일까? 하는 그것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나는 달라졌다고 할 때 제대로 뭘 알고 달라졌다고 하는지, 아니면 달라졌을껄! 해가지고 일방적으로 달라졌다고 우겨서 달라진 것인지, 그것의 원리를 생각해봐야 된다 이 말입니다. 어떤 점에서 우리가 잘못된 생각을 하는지, 먼저 잘못된 생각부터 말씀드릴게요. 잘못된 생각은 내가 달라졌다는 것이 잘못된 생각이에요. 그러면 안 달라지는가? 달라지죠. 달라지는데, 달라진 것도 모르고 무조건 내가 달라진 거 맞습니다, 라고 자꾸 우기는 버릇이 있다 이 말이죠. 주님 앞에 책망 안 들으려고. 뭐가 달라진지 몰라요. 모르고, 하여튼 달라졌습니다. 주여! 이런다 이 말이죠.

 

주님의 강조점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은 부르심을 더 구체화시키는 쪽으로 달라졌느냐를 묻는 겁니다. 나는 부르심을 입어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할 때에, 이 관심사는 뭐냐 하면 부르심에 관심사가 있어요? 아니면 자기 구원 받는 데에 관심이 있습니까? 나 이런 식으로 구원받았구나! 기분 좋다! 자기 구원받았다는 데에 관심이 있잖아요. 그렇게 돼버리면 부르심 자체가 도중에 소실돼버려요. 그리고 부르심을 입어서 구원됐다고 하면 한 번 부르심으로 모든 것은 그 다음부터는 안 불러주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불러주셨다. 그래서 내가 달라졌다. 뭐 더 이상 불러줄 게 뭐가 있어요? 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몇 번 부르심이어야 하느냐? 두 번. 그럼 까짓것 두 번 달라져보지. 그럼 두 번 달라지면 부르심이 없습니까? 에이, 그러면 세 번. 그럼 세 번 불러주고 달라지면 그걸로 종치는 거예요? 1학년, 2학년, 3학년, 어디 중학생입니까? 3학년만 하고 졸업하게? 에이, 모르겠다. 490번. 490번하고 끝나는 겁니까? 용서하되 490번만 용서하면 그 다음부터는 용서할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490번만 용서하고. 일흔 번에 일곱 번을 용서하면 490번인데, 그 490번만 용서하고 491번째는 용서 안 해도 되는 거예요? 그런 겁니까?

 

자, 어떤 사람이, 하린이 네가 490번 용서했다고 치자. 그러면 용서를 되게 많이 했잖아요. 490번이니까. 그럼 491번은 그전에 용서한 것이 많아가지고 491번째는 이제는 느긋하게 용서 안 해도 천국 가는데 할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490번이나 용서했는데. 됩니까? 안 됩니까? 주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마태복음 18장에서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잖아요. 그럼 490번 했다 이 말이죠.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대단하지. 그중에 몇 개 빠질 수가 있는데, 야무지게 딱딱 장부에 적어서 드디어 26년 만에 490번! 이래 된 거예요.

 

여러분들 중에서 나이가 한 50넘게 되면, “목사님, 저도 어릴 때부터 계산하면 490번이 넘습니다.”라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닐 거예요. 인간성이 너무 좋아서 걸핏하면 뭐든지 용서해주는 거예요. 한 사람에게 490번이 아니고 여러 사람까지 계산해보면 그 정도 된다 이 말입니다. 490번. 용서는 처벌이 뒤따라오고 난 뒤에 되는 거예요. 한 대 맞아야 용서가 되지 그냥은 용서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490번을 용서를 한다면 그다음부터는 용서를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해야 되겠죠.

 

그러면 용서를 해야 된다는 말은 490번 가지고는 미흡하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뭐가 추가가 되어야 해요? 계속해서 부르심이 추가가 되어야 되겠죠. 결국은 제가 하는 이야기는 여기서 부르심을 입었다고 할 때에, 지금 이 말씀이 너 이렇게 부르심을 받고 따라오면 구원받는다고, 구원을 챙기라는 구원의 위주가 아니라 예수님의 지속적인, 멈추지 않는 그러한 주님의 하신 일을 드러내는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초점과 강조점을 나 이런 식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에 두면 안 된다는 이 말입니다.

 

한 번 정리해봅시다. 주께서 불러줄 때 우리에게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 변화가 뭐냐 하면 차츰 나아지기, 차츰 착해지기, 차츰 경건하기, 지금 이런 문제가 아니고 무슨 문제냐 하면은 내가 얼추 주님을 알고 주님의 부르심을 안다고 하는 것이, 여기 100미터에서 20미터 땡겼으니까 한 80미터 왔죠. 그 80미터의 상태가 나는 이제 부르심도 알고, 주님도 알고, 주께서 인도 하는구나, 라고 한다면 그것이 50미터에 왔을 때는 어떻게 된다? 그것마저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마저. 그것마저 달라져야 해요. 그래야 계속 예수님의 부르심만 살아남죠.

 

하나의 예를 들게 되면 이런 겁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짓는 경우가 왔었는데 정신 바짝 차려서 죄를 안 짓고,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죄를 안 짓고 버텼습니다. 그래서 죄짓는 상황이 지나가버렸습니다. 유야무야 사라졌습니다. 그럴 때, “주님! 죄 지을만한, 시험들만한 경우가 있었는데 저는 거기서 이겨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부르심의 효과입니다.”라고 이렇게 했을 때에, 주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너의 가치보다 말씀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니가 왜 모르느냐?” 우리는 말씀을 생각할 때, 결국 궁극적으로 자기 가치가 어떠냐에 대해서 치중을 하면서 말씀을 본 거예요. 나의 가치에다가.

 

반대로 생각을 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짓는 상황이 되었는데 그만 죄를 지었어요. 참지 못해서 시험에 들어 죄를 지었다 합시다. 그러면 “주님이여,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참으로 주님 앞에 회개를 합니다. 제가 나쁜 짓을 했습니다. 인정합니다.”라고 했을 때에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그래, 인정해라. 회개하라.”라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뭐냐 하면 “너의 가치보다 말씀의 가치가 더 낫다는 것을 니가 왜 모르고 또 다시 너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느냐?” 다시 말해서 부르심의 효과를 니가 지금 곡해하고 있다고 하시는 겁니다.

 

주님께서 불러주게 되면 나는 지금보다 더 변화가 되되,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월등한, 월등하게 나아진 존재로서, 가치가 있는 존재로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부터가 달라져야 한다는 이 말이죠. 그게 부르심의 효과거든요. 이렇게 고함질러서 천식 회복됐는데 다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닌지. 본문 베드로전서 2장 21절을 봅시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 자취는 인간이 연구하고 탐구해서 따라가는 것이 아니에요. 이미 자취는 누가 본을 끼쳤으니까, 모델이 되었으니까, 모델, 갑자기 모델이라고 하니까 전현무가 한혜진하고 헤어진 게 생각이 나네. 모델이 되었으니까, 주님께서 패션쇼에서 옷 입고 런웨이runway하는 거예요. 모델이 되었으니까 갔다 이 말이죠. 그러면 부르심을 입었다는 그 말은 뭐예요? 주님 가신 그 길만 용납이 되고 다른 길은 용납이 된다? 안 된다? 용납이 안 된다는 말이죠. 만약에 주님께서 자취를 벌여놓지 아니하면 우리 나름대로의 예수님을 재해석해가지고 “주님, 이렇게 가면 주님 가신 길이 맞죠?”라고, 결정을 누가하느냐 하면 본인이 결정을 해요.

 

근데 본인이 결정해서 가게 되면 그 사람은 조금도 달라질 게 없습니다. 자기가 알아서 잘 가고 있는데 뭐가 달라? 뭘 또 여기서 달라질 게 뭐가 있어요? 달라질 게 없죠. 결국 주께서 불러준다는 말은 뭘 잊으라는 말입니까? 나 조금만 더 하면 나 천국 간다는 생각, 그 생각을 잊어버려야 돼요. 그러면 자꾸 내 쪽에서 기대를 하게 되는데, 그 기대를 하게 되면 뭣이 뭉개지느냐 하면은 주님께서 먼저 선도해서 길을 냈고 자취를 갔던 그 의미가 자꾸 배척이 돼요. 그 가치가 밀어진다고요. 사라진다고요.

 

오늘 베드로전서 2장 21절을 보면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고난의 길을 갔기 때문에 나도 이제는 주님을 믿었으니까 고난의 길로 가자, 라고 나선다면 백발백중 지옥 갑니다. 이거는 제가 장담하는데 지옥 갑니다. 고난의 길이라고 하는 게 예수님이 가신 길인데, 자기가 뭘 안다고, 예수님이 아마 이쪽으로 갔을 걸? 하고, 자기가 생판 천국으로 통하는 길도 애초부터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모르면서 왜 자기가 고난의 길이라고 우기면서 개척하듯이 그렇게 가냐 이 말이죠.

 

지금 제가 말을 짧게 하지만 이것가지고 온 교회, 한국교회 역사 속에 다 들어가 가지고 적용을 해보세요. 전부 다 이런 쪽이에요. 주님 가신 길, 고난의 길 해가지고 자기 딴에 개척교회하고 선교사하고 또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고난이 있다고 하고 또 권사님들 집사님들 장로님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고난의 길을 안 간 사람이 없어요. 안 간 사람이. 전부 다 나름 고난이에요. 나름 고난. 오늘 제목을 ‘나름 고난’이라고 할까요? 전부 다 나름대로 고난이에요. 애 키운다고, 둘이나 낳고 키운다고 고난을 받죠. 세상에 고난이 아닌 게 어디에 있어요? 고난 아닌 게. 전부 다 고난인데.

 

그러나 고난에 가면 갈수록 누가 빛나요? 본인의 가치는 더욱더 강화가 돼요. 갈수록 못 놓아요. “이만큼 올라온다고 얼마나 공들였는데 이걸 놔! 미쳤나? 이걸 내가 왜 포기해! 지금까지 고생, 고생해서 왔는데.” 어디까지 갔는데? 지옥가려고 고생, 고생한 모양이에요. 고생, 고생해서 이렇게 교회를 번듯하게 부흥시켜놨는데 그 가치를 왜 무시해? 이래 나오더라 이 말이죠. 주님의 고난이에요? 자기 고난이에요? 자기 고난이죠. 자기 고난은 변화가 됩니까? 변화 안 됩니까? 변화가 안 되죠. 그걸 더욱더 간직하죠.

 

금요철야기도에 가서 방금 이야기한 것을 다 적용해보세요. 전부 다 적용이 다 됩니다. 금요철야기도 때 고생 얼마나 합니까? 커피 서너 잔 먹어가면서 그것도 고생이죠. 그리고 가족과 교회를 위해서, 우리나라 대한민국 기독교 국가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합니까? 남북통일부터 시작해서. 자기 딴에 그게 주님 가신 길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예루살렘에 가보세요. 거기에 겟세마네가 있거든요. 동영상 올려놨죠. 그 나무가 최근에 심은 뽕나무 아니에요. 전설이 아니고 실제에 의하면 그때 그 나무랍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그 나무가. 한 그루가 아니고 제가 보기에는 한 오십 그루는 넘는 것 같아요. 한 그루였다면 벌써 우상시되었을 거예요. 오십 그루 정도 되니까, 많으니까 어느 쪽이 주님이 하셨는지를 모르니까 아직까지는 멀쩡한 것 같아요. 그 옆에 주님 기도한 겟세마네 이름으로 교회가 또 세워져있어요.

 

주님이 이 나무 밑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했다. 그래서? 그게 고난의 길이다. 그래서? 나도 철야하면서 땀방울이 핏방울까지는 안 되지만, 뭔가 삐질삐질 땟물이라도 안 나오겠어요? 열심히 기도하면 땀이 쏟아지고, 땀 찌꺼기가 나오면 그거는 주님처럼 완전하지는 않지만 주님의 고난의 길이 맞다, 라는 거예요. 누구 맘대로 맞아요? 누구 맘대로. 그게 자기의 변화를 유도합니까?

 

지금 제가 강의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시종일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기도하는 이것이 주님의 고난의 길이라는 생각을, 그게 바뀌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고생스러운 철야기도를 내가 한 이상은, 사람이 자기가 한 이상은 자기가 바꿀 마음이 없어요. 그 얼마나 큰 마음먹고 기도했는데. ‘나 오늘 실컷 장난치다가, 아무 의미도 없는 것 하다가 왔어.’라고, 이렇게 자기 자신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그 사람은 변화된 사람이에요. 변화된 사람입니다. ‘아무 부질없는 짓 하고 왔다. 다음 주 금요일에 또 부질없는 짓 해야지.’

 

보통 부질없는 짓은 안 하잖아요. 그런데 진짜 변화된 사람은 안 해도 부질없는 짓이고 해도 부질없는 짓이고 도대체 내속에서 무슨 부질없는 짓거리가 이렇게도 많이 쏟아져 나오는가를 확인하는 입장에서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가족과 우리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러니 주님 마귀를 이기고 주님을 본받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근데 주여, 오늘도 부질없는 짓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부질없는 짓을 제가 또 할 겁니다.” 왜? 나는 뭘 해도 부질없는 존재기 때문에. 이게 부르심을 입은 거예요. 이게 부르심을 입었다고요.

 

주님이 고난 받은 길을 고생이라고 생각하니까, 나도 이제는 달라졌으니까, 이제는 달라진 내가 뭔가 힘든 일을 하는 고생을 해서는 안 돼, 라는 그게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다 이 말이죠. 표정들을 보니까 제가 지금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취지를 못 알아듣는 얼굴인데, 가정에 보면 실이 감겨있는 실타래(실패)가 있죠. 실타래에서 끝이 조금 풀어져 있잖아요. 그래서 집에서 누구 옷이나 기워주고 바지 단 떨어진 것을 할 때 이만큼 나와 있는 실을 땡겨 버립니다. 땡겨 버리면 실타래가 한 바퀴 돌겠죠.

 

여러분 등대 알아요? 등대. 등대를 보면 등대의 불빛이 돌 때마다 번뜩번뜩 빛이 나오죠. 늘 비추는 것이 아니고 동서남북으로 계속 돌아가기 때문에 내 쪽에 왔을 때 번뜩하고 저쪽은 꺼지고 하잖아요. 실타래가 한 바퀴 돌 때마다 풀려있는 끝이 점점 길어지겠죠. 또 한 바퀴 돌리면 길어지겠죠. 십자가를 등대라고 봅시다. 십자가가 한 바퀴 회전할 때마다 거기서 실타래처럼 새로운 십자가의 고난의 길이 허락이 되고 허용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자취를 본받게 하는 이 말씀의 주체자가 누굽니까? 인간입니까? 주님이십니까? 이 말씀을 성취하시는 것은 주님이죠. 주님이라면 누구는 아니다 라는 말입니까? 누구는? 누구는 아니다? 나는 아니다. 나는 그냥 당하기만 하는 입장인 거예요. 주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그 난의 길을 따라오게 하는 그 주체가 내가 아니고, 내 구원받겠다고 설쳐대는 나의 욕구, 욕심이 아니고, 이거는 내 욕구욕심하고 관계가 없어요. 이거는 일방적인 주님의 말씀이 더 가치 있게 드러내기 위해서 부질없는 우리가 이 길로 가는 거예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짜장면을 맛있게 하는 그러한 짜장면 주방장이 짜장면을 내는 것하고, 저 큰애 몇 살이에요? 네 살. 네 살이 집에서 “나는 오늘의 요리사!”라고 하면서 짜파게티 라면 끓여내는 것하고, 이게 어느 것이 맛있겠습니까? 이거 말할 것도 없죠. 예수님이 제시하는, 제공하는 것과 내 몸에서 내가 제공하는 것과 어느 것이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겠어요? 주님이 제시한 것이 합당하겠죠.

 

근데 이상하게 우리는 안 달라져요. 뭐냐 하면 자꾸 “오늘은 내가 짜파게티 요리사!” 지가 자꾸 아무것도 모르면서 계속 “주여 드시옵소서” 하면서 지가 자꾸 짜파게티를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가 짜파게티를 만들면 만들수록 누구 가치가 자꾸 안 죽고 계속해서 살아나게 돼요? 누구 가치가? 자기가치가 계속 살아나죠. 오늘 제목을 실타래로 할까? 예수님의 실타래에서 방금 나왔던 것이 뭐냐, 십자가의 고난이 나오죠.

 

그런데 이 실타래가 우리 자신의 실타래로 봅시다.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온갖 종교적인 것을 하는, 한 바퀴가 돌 때마다 실타래가 풀려나와서 주님께 드리겠다고 나온다면, 이게 짜파게티인 거예요. 주님의 실타래는 짜장면이고. 이렇게 낸다면, 이렇게 낼 때마다 자기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있어요? 없어요? 변화 없습니다. 꿈쩍도 안 합니다. 꿈쩍도 안 해요. 그러면 여기 우리 실타래를 풀리게 하면서 힘들어하죠. 힘드니까 그들은 자기를 보고 뭐라고 합니까? 자기가 뭐했다?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았다고 우기는 거예요. 고난 받았다고.

 

이거 뭐 어떤 교회이야기를 하지 말고 우리 자신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 자신을.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에 어느 누구도 고생 없이 편안하게 산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연세 많으신 분, 평생 나는 아무 고생이 없었다고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니죠. 곡하나 내놓고 이게 될까 말까, 될까 말까 지금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습니까?

 

주님이 최초로 고난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고난이야기를 하기 전에 본인이 자기 고난에 굉장히 민감해요. 세상에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편히 잘만 살더라만, 도대체 내 인생은 전생에 약을 많이 잘못 먹었나, 전생에 죄가 많았나, 왜 이렇게 사는 것이 힘들고 구닥다리같이 이렇게 왜 내 인생이 지저분하냐 이 말이죠. 아스팔트가 아니고 한 고비 돌아가면 괜찮을 줄 알았더니만 이만한 자갈돌이 나오고, 자갈돌이 나오고 난 뒤에 진흙이 나오고, 진흙이 나오고 난 뒤에 비포장도로가 나오고, 왜 내 인생은 하나도 조용하게 넘어가는 날이 왜 없느냐?

 

그래서 하죠. “주님, 저 좀 위로할 말씀 같은 거 없습니까?”라고 자기가 질문해놓고 자기가 답변을 해요.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이다. ‘아, 그렇구나! 지금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 받으라고 내 인생이 이렇게 힘들게 사는구나!’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는 잘못된 이유가 뭐가 없다고 했습니까? 자기 변화가 없죠. 자기변화가 없는 거예요. 자기변화. 내가 달라짐이 없어요. 아니, 우리는 발광을 합니다. 세상을 살기위해서. 발광을 칠 때마다 나라는 실타래가 조금씩 풀리죠. 노력을 하니까 조금씩 풀린다고요.

 

오늘은 이 가게 때려치우고 다른 곳 부천에 가서 딴 거 낼까? 그거 때려치우고 노래방을 할까? 서민들이 가게 문 닫고 딴 거 할 생각을 하잖아요. 그럴 때마다 자기 실타래가 조금씩 풀리는 거예요. 힘들게. 그렇게 할수록 무슨 실타래는 완전히 잊어버립니까? 주님의 십자가에서 조금씩, 조금씩 풀어져 나오는 실타래는 까마득히 잊어버립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말씀의 가치가 너보다 훨씬 더 낫다. 말씀의 가치가. 니가 좌절해서 주저앉는 것도 내가 보기에는 교만이고, 잘했다고 우기는 것도 교만이지만 못했다고 주저앉는 것도 교만이에요.

 

왜냐하면 달라진 게 없어요. 나는 온전히 자기위주에요. 조금도 안 달라졌어요. 끝까지 자기를 안 놓고 계속 자기한테 신경 쓰고 자기를 붙들고 자기방어하고 자기사수하고 그런 식으로 해가지고 성경말씀 보면서 뭐 위로받을 게 없는가, 희망 같은 게 없는가, 자꾸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거예요. 제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천국 가는 좁은 길은 인간 앞에는 없어요.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길이 있어서 그 길을 가면 좋겠는데, 문제는 그 길이 인간에게는 없어요.

 

좁은 길은 어디를 경유해야 하느냐 하면은 등대를 경유해야 해요. 나의 실타래를 떠나서 주님의 실타래를 경유해야, 십자가를 경유해야 비로소 좁은 길이 사건으로 주어지는 거예요. 사건. 이제부터 오늘 강의가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는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말씀은 우리에게 뭘 준다? 변화를 주는데, 우리는 변화는 생각 안 하고 말씀을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주여, 우리에게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하거든요. “우리 집안에, 나에게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는 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주님 보시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문제가 있어? 아이고, 내 새끼 문제가 있으면 안 되지.” 허겁지겁 오셔서, 삐용삐용~~ 구급차가 와서 “뭘 도와줄까?” 지금 이런 생각, 이런 관계를 가지고 하면 안 돼요. 문제 있다는 그 자체가 문제에요. 따라서 문제가 있어요. 왜? 우리가 문제가 있다고 하는 순간 문제가 있는 거예요. 갑자기 누구 사람이름이 자꾸 생각이 나네.

 

뭐가 문제냐 하면은 우리가 회전목마에서 못 내리고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날마다 조금 좋으면 헤헤거리고, 조금 절망하면 주께 도와달라고 하고. 그러니까 이거는 원래 회전목마가 그냥 돕니까? 약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돕니까? 네 살 먹은 애들이 회전목마 손잡이 손에 잡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뱅뱅 돌죠. 만약에 그 기계를 관리하는 사람이 퇴근해버리고 기계는 고장이 났다. 그럼 그 애는 높으니까 못 내리고 그래가지고 15년 동안 계속 있다가 그때 내려왔다면, 19살이 되어서 내려오겠네요.

 

그러나 문제는 19살에 내려온다는 희망이라도 있죠. 이 세상은 지옥을 닮았어요. 인간은 못 내립니다. 좋았다, 나빴다, 나빴다, 좋았다가, 나쁘면 고난이고 좋으면 주께 영광이고 계속해서 그 자리에서, 그 자리의 자체에서 내려와야 되는데 우리는 나 잘되기 위해서 주의 말씀을 이용하는 거예요. 이 말씀을. 성경공부해서 이 회전목마를 이왕이면 양탄자를 깔고 타려고 하고, 이왕이면 더 신나게 회전목마 타려고 하고. 회전목마 백날 타봐야 그 자리에서 그 자리에요. 순환구조라고 하죠. 그냥 뺑뺑이 도는 거예요. 뺑뺑이 도는 거.

 

적어도 회전목마에서 내려가지고 지옥 가는 사람을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회전목마에서 내려가지고, 애가 말 타고 빙빙 돈다면 그 바깥에서, 애가 가까이 오면 웃어라! 웃어라! 웃으라고 해서 사진 찍는 이 자리. 회전목마가 도는 이걸 지켜보는 이 자리. 주께서 회전목마를 타는 우리를 불러내시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변화가 있어야 돼요. 그 어떤 변화인데, 1번 나의 변화다. 2번 나의 환경의 변화다. 몇 번이겠습니까? 나의 환경의 변화죠. 인간은 못 달라지니까. 조금 어려우면 죽겠다고 난리고 뭐 좀 좋으면 살만하다고 하니까.

 

인간이 속해있는 회전목마 자체에서 내려야 돼요. 그 순화구조에서 내려야 된다고요. 그 순환구조에 처음에 누가 탔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본이 되셨어요. 본이 되셔서 주님께서 순환구조에 탔거든요. 탔는데, 주님도 마찬가지로 삶 자체, 살아있다는 삶 자체, 인간이 육신을 입고 산다는 것 자체가 자기가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 없는 회전목마에, 악마가 태워준 회전목마에 뭐가 붙었는지 철썩 같이 붙어가지고, 본드도 그런 본드가 없어요. 죽어도 못 내려요. 자살해도 안 돼요. 이게 안 내려가요.

 

거지나사로 앞집에 살던 부자가 지옥에 가도 그 행세를 그대로 하죠. 이 세상에서 살던 행세를. 그게 뭐냐 하면은 나 잘났다 이거거든요. 나 부자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거지나사로보고 물 가져오라고, 에비앙 같은 생수 좀 가져오라고 심부름시키잖아요. 그 부자는 안 달라졌어요. 변화가 뭔지도 몰라요. 변화가. 내가 다음을 계속 줄곧 밀어붙이면 되지, 왜 내가 이런 나와 전혀 다른 내가 되어야 될 그런 건덕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니까요. 그 부자는.

 

근데 거지나사로 같은 경우에는 내가 훌륭해서 달라진 게 아니고, 거지나사로를 일종의 예수님이라고 보면 돼요. 이 땅에 살면서 거지였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영광스럽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언약에 둘러싸였거든요. 그러면 이 환경이라는 것이 나왔네요. 나의 환경, 나의 배경, 나의 소속, 이게 결국 두자로 하면 이게 뭡니까? 하나님의 언약에 둘러싸였던 이스라엘이, 마지막 새 언약이 의하게 되면, 환경이 의하게 되면 달라지지 말래도 그 소속자체가 이미 달라진 상태로 소속되는 거죠.

 

새 언약에 그만한 위력과 그만한 효과가 있어요? 없어요? 있는 거예요. 새 언약은 우리에게 효과를 줍니다. 옛 언약은 뭡니까? 율법이잖아요. 율법에 올라탔을 때 그 이스라엘은 죽었죠. 율법을 못 지키면 뭡니까? 저주를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회전목마는 어떤 것이냐, 뿅 망치가 늘 정기적으로 때리는 그러한 회전목마에요. 뿅 망치가 뭐냐 하면은 바로 아람, 암몬, 모압, 그리고 나중에 앗수르, 바벨론. 하나님이 준비한 몽둥이. 몽둥이가지고 계속 이스라엘을 패는 겁니다. 팰 때 이유가 있죠. 니가 율법에 올라 타놓고 율법을 안 지키니까 맞는 것이 주의 법에 합당하다. 마땅하다.

 

언약이라는 환경. 언약환경 속에 있을 때는 어떤 단어가 나오느냐 하면은 마땅함이 나옵니다. 마땅함. 마땅함은 누구 탓을 할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둘러 싼 환경자체가 마땅하기 때문에. 잘못했으면 매 맞는 것이 뭐합니까? 마땅하죠. 율법 어겼으면 저주받는 것이 마땅한 거예요. 이게 무슨 성질이냐 하면 언약의 성질이에요.

 

자, 그러면 회전목마에서 내리게 할 때, 이게 우리가 알아서 율법에서 내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오늘 정신 좀 차리세요. 어렵습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율법의 회전목마에서 내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내리죠. 왜 못 내립니까? 뭣 때문에? 마땅하기 때문에. 못 내리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스라엘은 자기가 홀로 생각하기에는 내가 누군지 몰라요. 뭐와 결부시켜야 돼요? 율법아래에서의 우리. 오늘날 신약에서 십자가 앞에서의 우리와 똑같이. 구약에서는 율법아래에서의 우리. 우리는 뭐다? 마땅함인 거예요.

 

율법에 위반되면 저주받는 것이 마땅함이에요. 그 안목이 우리에게 새로운 율법관을 확고히 심어줄 수 있는 겁니다. 그 안목이. 오늘 강의 안 들었다고 칩시다. 지금까지 하나도 안 들었다고 치고,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안 들었다고 치고 우리가 하루 일과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하루 일과를 생각하게 되면 항상 뭐냐, 마땅함이라는 게 없어요. 내가 잘하면 좋은 결과를 낳고 내가 게으르고 불성실해서 안 되면 나쁜 결과를 얻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 마땅함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내가 하나 안 하나 마땅히 주어진다는 그런 개념은 없어요. 그게 달라져야 한다는 거예요. 그게. 오늘 목 다 쉬겠다. 한 달 쉬면서 공들여놨는데. 아껴가면서. 오늘 본문이 의외로 어렵습니다. 이것 제키고 저것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저건 엉터리라고 하고 이것 쫓아내고 저것 분리시키고 다 하면 뭐 건더기가 남는 것이 있어야 되는데, 오늘 본문을 보면서 건더기 남는다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달라지고 싶어도 달라질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이 건더기로 나와야 돼요.

 

그리고 변화는 언약이 알아서 그 다음 언약으로 스스로 셀프self에요. 스스로 자발적으로 그렇게 옮겨가는 것이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 말이죠. 더 나가볼까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지킬 게 없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스라엘의 마땅함이죠. 이스라엘이 마땅하듯이 우리도 마땅한 거예요.

 

우리교회 어떤 분이 기도를 하는데, 그 마땅함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썼어요. 근데 여러 번 쓸 때, 그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까 정말 정확한 단어를 쓰고 있는 거예요. 지금. 주여, 마땅합니다, 마땅합니다, 마땅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뜻이에요. 왜? 내가 새삼스럽게 내 행위로 치고 들어갈 여지를 없애주시니 감사합니다. 내가 치고 들어갈 여지가 없으니.

 

내가 내 팔자를 고치겠다. 팔자를 고치겠다고 하니까 또 시집 두 번 간다고 보통 그러는데, 옛날 사람들이 왜, 시집 두 번 가는 것을 팔자 고쳤다고 하는지 아직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그건 팔자 고친 것이 아니고 남자를 두 번 이용한 건데. 그렇잖아요. 한 남자 조지고, 또 남자 조지고. 지는 팔자 고쳤다고 하지만 남자는 죽을 똥 살 똥인데. 이왕 나온 김에 팔자 고쳤다는 말이 주로 어쩔 때 쓰이느냐 하면 아무 직업도 없이 노는 자들에게 쓰이는 것 같아요. 약사나 의사나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팔자 고쳤다는 말을 잘 안하는데, 비리비리 할 일도 없이 놀다가 남자 하나 물었다. 셰퍼드처럼 물었다. 팔자 고친 거예요.

 

우리하기 나름에서 어떤 결과가 주어진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그 생각을 이상하게 떨쳐버릴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아침에 출근하면서 은근히 세상은 그런 식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을 확답을 받고 그 희망을 가지고 뭔가, 내가 오늘도 열심히 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손님이 오면 하나라도 고개 숙이고 친절하게 대하게 되면 더 효과를 볼 거라고 그렇게 생각을 해요.

 

어떤 사업하는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과도한 친절은 하지 마라. 나중에 그 스트레스가 너한테 다 돌아온다. 너무 오버해서 손님에게 웃음 띠면서 해 줄대로 다 해주지 마라. 그게 사라지지 않고 니 화병으로 다 돌아온다.” 누가 이야기한지 다 알겠다. 백종원이가 이야기한 거예요. “사업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니가 할 수 있는 능력만큼 해야지, 너무 과도하게 친절한 것도 욕심이다.”

 

어쨌거나 우리의 일상은 마땅함을 별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루하루 살면서 안 달라질 거예요. 지 고집이 있어요. 어떤 고집이냐 하면은 내 미래는 내 손으로 한번 달라지게 해봐! 지는 달라질 생각 안 하고. 지 바깥 환경을 달라지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뭡니까? 바깥 환경은 요지부동이에요. 누가 달라져야 해요? 안 달라지려고 고집부리는 니가 달라져야 해요. 그게 마땅함이에요. 오늘 제목을 ‘마땅함’이라고 해야 되겠네요. 뭐가 마땅함이냐 라고 물으면 그냥 마땅함. 물을 자격도 없어. 모든 것이 당연함으로 니한테 뒤집어씌웠다고 봐. 모든 게.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율법의 마땅함 때문에 이스라엘은 필히 망해야 되는 거예요. 아무리 그들이 거기서 잘해보려고 몸부림치고 해도, 율법의 강력함, 율법의 요구조건이 계속해서 증가하거든요. 한 두 개가 아닙니다. 십계명만 지키면 되는 게 아니고 계속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이것을 무슨 수로 감당합니까?

 

혼자서 하는 어떤 방송을 뭐라고 합니까? 팟캐스트, 1인 방송. 그 방송을 보니까 한 5인분을 책상에 깔아놓아요. 한 20대 후반쯤 됐는데 바짝 애리한 남자가 쥐가 음식을 먹듯이 그 5인분을 현장에서, “아이고, 맛있다!” 천천히 다 먹어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돈 많이 버는 사람이에요. 밴쯔 먹방인가. 5인분을. 하여튼 5인분이 넘어요. 너무 많아요. 질리기는 질리는데 그걸 혼자 다 먹어요. 풍선 쏘고 좋아요! 누르고. 돈 막 버는 거예요. 그렇게 돈 버니까 이번에는 어떤 프로가 나오는가 하면은 여자가 한 4인분을 갖다놓고 먹는 게 있어요. 그것도 유행인 모양이라. 남자한테도 엄두가 안 나는데, 그것도 일종의 능력인데 5인분을 그 자리에서, 바짝 애리해요. 위의 기능이 뭔가 특수한 사람이 있어요. 세계 햄버거대회 이런 거 보면 특수한 사람이 있어요.

 

그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추가적인 율법, 한 5인분 먹으면, 그러니까 베드로가 용서를 몇 번 요구했습니까? 일곱 번 하면 배터지는 거예요. “아이고, 질렸다. 더는 용서 못한다.” 근데 주님께서 팟캐스트하면서 몇 개를 요구하는 하면 490번을 요구한 거예요. 그러면 억지로 꾸역꾸역 490번을 용서하게 되면 끝이에요? 아니죠. 결국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요구한 것은 뭐냐 하면 달라져야 한다는 겁니다. 달라져야 해요.

 

용서를 일곱 번 하면 됩니까? 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현재의 내 모습은 나는 절대로 고집스럽게 안 달라지겠다는 거예요. 이대로 가겠다는 겁니다. 그대로 가게 되면 자기 딴에는 착해도, 아무리 착한 지점에 왔을 때에도 그것을 죄로 만들기 위해서 율법이 추가적으로 계속 주어지는 거예요. 율법만 있는 겁니까? 사도바울의 명령까지 다 추가되게 되면, 이거는 예수님의 산상설교까지 추가돼버리면, 누가 그 마땅함을 이기고 저주의 회전목마에서 내려올 수가 있겠습니까? 못 내려옵니다. 내려올 수가 없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가 율법을 못 지킨다는 생각은 못하고, 얼추 근처는 갔잖아요, 라는 것으로 버티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은 상당히 고집이 센 거죠. 마치 엄마가 애가 나쁘다고 등짝을 때리는데, 애가 뭐 산상설교를 잘못 봤는지 왼쪽 등짝을 때렸는데 오른쪽 등짝을 돌려대면 이거는 이제는 매로 맞는 거예요. 이게 개기니까. 일종의 반항심이거든요. 인간에게는 그런 요소가 있어요. 안 되면 될 때까지.

 

이거는 내가 속한 율법의 마땅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의 마땅함이 아니고, 누구의 마땅함을 고집스럽게 우기고 있는 거예요? 나 자신의 절대성, 나 자신의 고귀함, 천상천하유아독존같이 나 자신의 최우선, 마지막 가치의 자아성, 독보적인 나 자신, 이 마땅함을 가지고 지금 주님 앞에 달려드는 겁니다. 뭐 이거 해결 나야 되겠죠. 해결은 10분 후에 합시다.

 

 

 첨부파일 : 서울의존강의20190308a 베드로전서2장 21-23절(마땅함)-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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