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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31 08:58:17 조회 : 136         
버림받은 자 (삼상 16:10-12) 대전-48강 이름 : 주향(IP:124.5.122.56)
버림받은 자 (삼상 16:10-12) 
대전-48강  

이근호  

2019년 4월 30일 

본문말씀: 사무엘상 16장 10-12 절


(삼상 16:10) 이새가 그의 아들 일곱을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삼상 16:11 )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삼상 16:12)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사무엘 상 16장 10절부터 봅시다. 이새의 아들 일곱을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했는데 그 아들이 다가 아니였지요. 아버지 이새의 입장이 개입됩니다. 인간의 뜻이 개입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과 대치되는 사항을 하나님이 뽑아내시는 거에요. 인간의 생각이 곧 마귀의 생각, 인간의 생각이 하나님과 반대되는 생각. 이 사실을 인간들은 모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을 벌이시며 뭐를 꼭 들춰내나 하면 인간의 생각을 동반시킵니다.


거기에는 목적이 있어요. 그래서 니가 엉터리잖아! 니들이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생각과 틀어지잖아! 인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아님이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 되지요. 반대되는 생각이 내 안에 잠복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해요. 눈에 보이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반대되는 뜻이 함유되어 있는 겁니다. 이게 기쁜 소식이지요. 그래서 성경 전체의 원리가 뭐냐하면 지옥을 통과하지 아니하면 천국이 안 보이게 되어 있어요. 본인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모르게 되면 지옥이라는 생각을 안 하고 가는 천국은 전부 지옥의 한 골목이에요. 지옥의 한 부분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이 기대하고 희망한다는 것은 문젯거리에요.


인간은 보람을 느낀다, 기대한다, 희망한다 이러한 인간의 속성의 그 취지가 나는 이기리라! 끝내 이기리라! 끝내 이겼다는 말은, 인간은 이길 필요가 없는데 주면 그냥 받아 처먹으면 되지 왜 지가 이겨야 됩니까? 이긴다는 것이 기대하고 희망하는 거에요. 나는 교회에서 이기라라! 옆의 교회를, 옆의 교회는 교인 수가 7명인데 자기네는 3명이거든요. 옆의 교회가 7천명이라면 자기네는 8천명이 되겠다는 겁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간단해요. 이기리라가 기대이고 희망이에요. 내 딸같이 괜찮은 딸이 없다라는 드라마처럼 모든 것은 보람인데 그것을 행복이라고 하는 거에요.


정월 초하루나 연초에 사람들이 비는 것이 뭡니까? 절에서 비나 교회에서 비나 마찬가지이지요. 금요 철야하며 비는 게 뭡니까? 나는 이기리라! 나는 안 질래! 나는 지기 싫어! 앞에 ‘나’가 붙는단 말이에요. 성경을 동원해서 아무리 해석하려 해도 인간의 본성이 바뀌지 않음을 성경은 이야기해요. 너 때문에 내가 치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 전체가 선지자들이 고난 받는 길입니다. 본성이란 본능이거든요. 본능적으로 나오는 것이 주님을 힘들게 하는 것만 있어요. 주님이고 뭐고 나를 이기게 해 준다면 까짓것 헌금으로 다이아몬드가 문제겠습니까? 이런 식이에요.


특히 구약과 신약에서의 차이점은 뭐냐하면 구약에 나오는 경우들이 인간들은 너무 감정적이고 인간들의 평범한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거든요. 그것을 흉내내는 거에요. 쉽게 말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그냥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되요. 그런데 하나님이 사랑한다고 인정하는 사람과 인간이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과 별 차이점을 못 느낍니다. 성경대로 흉내를 내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할 때 어떻게 사랑할까? 주님이 날 사랑한다고 이야기해줬으면 좋겠어요. 이런 것.

인간들이 사랑할 때 난 그대 없이는 못 살아요. 메마른 가슴에 단비 내리듯이 한 줄기 빛이 어두움을 밝히는 그대를 너무나 사랑해 난 그대 없이 못 살아요. 대중가요 가사거든요. 나의 모든 것들은 다 그대 꺼에요. 죽는 날 까지 같이 살아요. 김용임이 불렀던 내 사랑 그대여 가사에 평생을 같이 살아요.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드리겠어요 라고 되어 있어요. 무슨 신앙심인지 애착인지 2절에는 그대의 모든 것들은 다 내꺼에요 라고 나와요. 세상 노래 가사와 성경을 사람들이 해석하는 것과 같으냐 하면 ‘나“에요. 기여히 나를 포기 못하겠다는 거에요.


나를 포기 못하니까 평소에 건전해 보이는 사랑이나 소망도 사실 나 좋으라는 사랑, 믿음, 소망인데 특히 믿음 같은 경우는 더 그러한데 믿음의 속성을 그대로 신에게 바치면 신도 나의 건전함을 수용하지 않겠냐는 거에요. 인간이 갖고 있는 품성을 경건해 보이기 위해서 활용하는 그런 시간들을 예배나 집회를 통해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냥은 안 끄집어내지니까 드럼이나 기타 등을 동원하는 거에요. 박수치고 감정을 고취시키고 그 감정 속에서 평소 살면서 내가 이런 경지에 이르면 참 훌륭한 것이라는 것을 그 현장에서 도출해내고 목사들은 그것을 은혜 받았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해 버리지요.


사실은 하나님 뜻에 대치되는 짓을 계속 해왔는데, 교회에서는 그렇게 감정에 몰입시키고 건전함을 그렇게 끄집어내는 목적은 돈을 끌어 모으기 위함이지요. 이 수법으로 헌금하고 헌신하고 아까 노래 가사에서처럼 내 모든 것은 그대의 것이에요. 보세요! 얼마나 좋은지 여기서 그대를 주님으로 바꾸면 되잖아요. 내 모든 돈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계시는 곳은 교회 그러니까 내 모든 돈은 교회 것입니다. 이런 지경까지 끄집어내는 하나의 수완이에요. 오늘 다윗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없는 인간으로부터 출발하십니다.


인간은 '나'가 있음으로 문제가 되요. 그러면 하나님 보시기에 사무엘을 이새에게 보내서 아들 일곱을 보고 그 아버지에게 사무엘이 그 외에 아들이 더 있느냐고 묻지요. 이새의 입장에서는 사무엘이 와서 이스라엘의 차기 왕을 뽑는다 하니까 그 아버지는 괜찮은 자식은 다 깔아 놨어요. 그리고 그 아버지가 보기에 막내는 철도 없고 그 눈엔 없는 존재가 겁니다. 애초에 하나님이 사무엘을 보낼 때 지위를 줘서 제가 하면 일 처리가 간편해 집니다. 사무엘도 모르게 만들었어요. 사무엘은 이새의 일곱 아들 가운데서 분명히 차기 왕을 뽑으려 왔기는 와서 후보감을 제시 할 때 인간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다 동원시켜 보죠.


적어도 이 일곱 중에 있겠지! 후보감을 넉넉하게 정한 거에요. 그런데 후보감 전체가 거부당한다는 말은 무엇을 거부당하는 거에요? 인간이 끄집어 낸 모든 생각과 뜻은 일단 하나님께서 거부하고 가시는 거에요. 대수롭지 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거부하고 가는 거에요. 그렇다면 다윗은 존재하지 않는 인간입니다. 다윗을 누가 가로 막고 있다는 말이죠. 인간의 뜻이 가로막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가로막힌 것을 피해 다윗에게 가면 되는데 사무엘도 모른다니까요. 사무엘 조차도 가로막혀 있는 것에 막히도록 하신 거에요. 하나님께서 왜냐하면 왕이 되는 것은 심지어 선지자의 마음까지라도 보탬이 되지 않고 참여되지 못하도록 막아버리는 겁니다.


우리가 보통 교회에 올 때 자기네 형제는 천국에 갔다, 누구네는 지옥에 갔다라고 판정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 판정이 지금까지 자기가 알던 사람의 판정이에요. 예를 들어서 흉악한 인간인데 전혀 예수도 안 믿는데 교회에 나왔다. 누가 봐도 저 사람은 가롯 유다 같아서 지옥에 갔다라고 한 것이 4월 30일인데 5월 1일에 은혜 받았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하필 4월 29일에 은혜를 받았으면 4월 30일 날 그런 평가를 안 하는데 모든 인간의 평가는 결론지어져서 재는 안돼! 그런데 그 사람을 5월 1일 날 새 사람으로 만들었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냐하면


한 개인을 구원하겠다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뜻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소유화 시킬 수 없다라는 거에요.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거에요. 그것을 분명히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줄곧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다는 건방진 생각은 못하게 만듭니다. 그때 그때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있는 이상은 내가 하나님의 뜻을 소유화 시킬 수 없는 거에요. 그래서 구원파가 이단인 것입니다. 언제 구원받았다는 그 생각, 그건 본인의 일방적 생각이에요.

하나님과 거래한 거라니까요. 하나님! 구원 주세요. 감사합니다. 죽을 때 내가 가져가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 다음부터 그다지 하나님이 필요치 안잖아요. 그 다음은 자기가 알아서 하면 되거든요. 구원파뿐만 아니라 침례교, 정통 장로교 합동 측 감리교나 개혁 주의 신학도 마찬가지에요.당신이 일단 성령 받아 구원받았으면 이제부턴 알아서 성령 받은 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 버려요. 그게 성화론이란 말이죠. 누구 마음대로 지켜요. 누구 마음대로! 내 마음도 모르는데 뭘 지켜요. 억지 부리는 거에요. 지켰다고 우기는 겁니다.


복음 이야기 하니까 다 안다는 거에요. 뭘 알아요? 어제의 나도 믿지 말아야 되는데 어제의 나는 오늘 나에게 스크린 역할을 해요. 오늘 주신 은혜를 어제의 내가 훼방하고 있다는 말이죠. 늘 버림 받아야 되는데 새로움은 오는 데 버리지 안으니까 새로움이 튕겨져 나간다니까요. 그래서 오늘 첫째 시간의 핵심은 뭡니까? 버림받은 자입니다. 버림받은 다윗처럼. 공식은 지옥을 거치지 않으면 천국은 보이지 않는다. 버림받은 자 지옥을 먼저 이 세상에서 다윗이 경험케 하시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실 까? 그게 인간 구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원되기 때문인데 버림받은 자는 어디로 갑니까? 제가 내 밷어 버리면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창세기 8장20절을 한번 봅시다. 노아가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았지요. 여기에서 잘 보셔야 돼요. 노아는 누가 봐도 살아났어요. 사람들이 볼때 어디를 보냐하면 노아는 살았데 라고 좋겠다 하잖아요. 노아도 인간이고 우리도 인간이니까 우리도 노아처럼 구원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니까 뭐를 놓치냐 하면 제단을 쌓은 것을 놓치는 거에요. 이미 성경을 보는 방식에 은근히 노리는 것이 있어요. 자기 이익과 자기 행복과 운명을 확보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인데요. 욕심인줄 몰라요. 인간이 구원받겠다는 것이 욕심이에요. 누가 마귀의 일이 뭡니까?라고 물으면 답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창 8:20)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나를 위해 하는 것은 다 마귀의 일이에요. 그것이 나의 구원이든 천국행이든 하나님의 관심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왜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으니까 그래서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에요. 십자가를 안다 해놓고 십자가를 이용해서 자기가 구원받겠다는 것은 십자가 근처도 안간 사람이에요. 자기를 위해 하는 것이 악마의 일이에요. 자기를 위해 하는 것으로 만든 종교적 단체가 뭐냐 하면 교회잖아요. 교회가 마귀 일을 하는 이유가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 온 것이기 때문이에요.


목사부터 해서, 시험에 들 문제에요. 노아를 통해, 성경을 본 사람들이 한 두명이 아닙니다. 본 모든 사람, 심지어 주석에서까지 노아는 살았대! 왜 살았지? 은혜 받아서, 그것도 그냥 은혜받은 게 아니라 착해서 은혜받아 하나님이 노아만 살리고 나머진 다 죽였데. 그래서 노아를 닮으면 구원받는데 이미 시작부터가 마귀적 의도에요. 하나님 일의 반대는 어디서 나온다고요? 잠복된 나에게서 나오지요. 배후에서 악마는 그 인간을 사주하고 있고 주님의 모든 성경 말씀은 그 인간을 향해 들어갑니다. 들어가면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나름 반응을 나타내지요.


하나님 뜻과 반대되는 반응들이 나오는 겁니다. 노아 같은 경우에는 (창 8:20)에서 노아가 깨달은 게 뭡니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가져야 될 입장이 아니고 반대로 내가 하나님의 작업에 말려든 거에요.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노아는 종으로 들어간 겁니다. 마치 모세가 하나님의 사환이 된 것처럼, 종의 특징은 자기 일이 없어요. 그것을 무정한 사람, 다른 말로 냉혈안, 피가 차가운 사람. 종의 특징이지요. 인간들의 감정이라는 것은 자기의 욕망이 현실적으로 성취되지 않으니까 악마적 분노를 토해내는 것입니다.

(창 8:20)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나는 이기리라’고 했지요. 이기고 오면서 행복한 미소를 띠고 지게 되면 악마적 얼굴을 하게 되지요. 일 없이 놀던 사람이 취직 되었을 때 나는 취직이 됐다며 굉장히 기뻐해요. (어떤 사람이) 놀다가 포도원에 취직 되었을 때 드디어 포도원 일꾼이 되었다고 좋아했지요. 하루가 지나지도 않아 오후 5시가 되었을 쯤 일당을 받는데 그렇게 좋아하던 사람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돌변을 하지요. “이건 불공평합니다”라고 나오는 거에요. 자기 아들이 취직 돼서 월급을 250만원 받는다고 신나게 이야기 하는데 같이 있던 동창이 말하기를 우리 아들은 월급 700만원 받았는데 하면 집에 가서 자기 아들을 닦달해요.


기껏 공부시켜 놨더니 겨우 250만원이야? 얼마나 상대적이에요. 환경에 인간은 놀아나는 거에요. 단을 쌓을 때 그 주체가 어디 있어요? 방주는 노아를 실어 나르기 위함이 아니라 주인공은 따로 있습니다. 정결한 쌍으로 된 짐승들, 그 짐승들이 7장에 보면 정결한 짐승 암수 7씩이지요. 그 정결한 짐승이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주변에 정결함을 드러내기 위해 필연적으로 벌어져야 할 상황들이 있다는 겁니다. 싹쓸이에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언, 정결함을 보여주기 위해 싹쓸이해버리는 겁니다.


지옥에 가는 자가 왜 있어야 되냐 하면 천국가는 사람이 얼마나 복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전에 마태복음 25장 34절에 보면 뭐가 더 부러운 것이 있겠습니까? 아버지로부터 복 받은 자들이라 인정받고 평을 받는다면 더 바랄 게 뭐가 있어요? 뭐가 더 필요합니까? 우리 집에 아들이 꼭 필요하다는 것? 필요 없지요. 내 감기가 꼭 나아야 한다? 필요 없지요.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복 받은 것을 온몸으로 느끼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지요.


(마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그 사람은 세상을 볼 때 어떻게 티가 나냐하면 아이고! 세상의 군상들아! 이 불쌍한 인간들아! 똑같은 감정을 가져야 되요. 하나님께 복 받지 못한 세상의 모든 군상들, 국회의원이던 목사이던 관계없이 주께 복 받는 것에 관심 없는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없지요. 지금 그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중입니까? 지옥으로 가고 있는 중이지요. 그런데 왜 그렇게 지옥 가는 사람들을 못 닮아 환장들 하고 있어요? 그들과 안 닮은 것을 안타까워하십니까? 그들과 닮을 필요가 있어요? 삶의 방식을 없지요?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다 알아요. 그렇게 들었지만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그렇게 많이 들었습니다만은 교회 밖에 나와 하는 것을 보면 아이구! 부러워라~ 아파트 당첨 됐네! 좋겠다! 이러고 있다는 말이죠. 닮을 수 없는 존재에요. 버림받은 자입니다.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존재로부터, 없는 존재라니까요. 하나님은 다윗을 예정했으면서도 그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필히 노출시키고 드러내고자하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예정된 자는 숨어있다는 겁니다. 어디 숨어 있냐하면 하나님을 하나님이 예정한 자는 인간들이 자기 딴에는 하나님을 잘 안다는 인간의 기대치에 포위되어 있는 거에요. 심지어 다윗 본인도 몰랐어요. 사전에 몰랐어요. 하나님이 자기를 왕으로 삼을 거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미리 들떴겠지요. 알아서 좀 씻고 왔겠지요. 그런 건 필요 없어요. 안 씻는다고 지옥갑니까? 복 받았는데, 주님이 알아서 찾아오는데. 제가 주일 날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니 그따구로 살래? 그따구가 뭐 어때서? 천국 가는 것과 아무 상관없잖아요.


성경을 참 많이 봤지요. 볼때마다 내 뜻이 주의 뜻을 차단시켰습니다. 내 의도가 주님의 의도를 가렸습니다. 다윗이 없는 존재라면 하나님은 기어이 다윗을 없는 존재로 만들어요. 내가 왕이 되었다! 형들, 아버지 저 왕이 되었어요. 사무엘에게 기름부음 받고 왕이 되었어요. 이렇게 말한다면 다윗은 아직 멀었어요. 남에게 자랑하려고 “내가 왕이 되었다.” 한다면 마찬가지가 되고 끝내 이기리라가 되버려요. 처음부터 없는 자였잖아요. 없는 자 였는데 누군가 왔을 때 다윗의 의미가 드러났으니까 하나님의 계시가, 말씀이 왔을 때 의미가 드러났지요.


기어이 그 말씀이 다윗으로 하여금 말씀만 남고 다윗은 없애버립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게 기름 부었다는 말은 신약에선 성령의 기름부음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왔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내 구원은 날라가 버리고 내 안에 말씀이 말씀답게 현실화되고 발견되는데 이용 될 뿐이에요. 말씀 구원이지 내 구원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내 안에서 계속 말씀만 일어나는 거에요. 말씀의 완성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드러나기 위해서 없는 존재인 나에게 하나님이 사용하신 거에요.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살게 한다? 그리스도가 살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수시로 인간은 육을 입고 있는 이상 이 공식을 누가 방해한다? 내가 방해에 나선다고요. 주께서 열심히 일했는데 내게 돌아오는 몫은 무엇입니까?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말이죠. 다윗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게 의도적으로 경과를 통해서 알려주는 식으로 찾아오는 이유는 인간의 뜻과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더라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윗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에도 같은 내용이 벌써 예고되어 있지요.


아브라함 언약에 의해서 소돔과 소모라라 심판받습니다. 그것은 다윗 언약에 의해서만 구원될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 19장 29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내어보냈더라 는 말은 롯을 생각하사 롯을 구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구원하므로 말미암아 롯을 아브라함에 종속되게 해요. 롯이 ‘나 구원 받았다. 나 이겼다.’고 이런 식으로 할 수 없어요. 아브라함을 생각하는 거에요. 복 받은 자여~ 할 때도 예수님 때문에 복을 준 거지요.


내가 예수님 갖고 있는 괜찮은 것을 내 것으로 전환 시켰다고 구원 받은 게 아닙니다. 구원파? 안돼요. 주님의 구원이 내 구원으로 되었다? 신난다! 이건 안돼요. 구원은 주님의 구원뿐이에요. 내 구원은 없어요. 그래서 그것을 어디 안에서의 구원이라고 합니까? 예수 안에서, 예수 이름으로 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구원된 겁니다. 나를 위한 구원은 애시당초 성경 자체에도 없어요. 그래서 구원받기 원하십니까? 교회에 나오세요. 이건 자체가 악마의 뜻이에요. 그런 건 없어요.


(창 19: 29)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이렇게 말하면 교회에 나올 사람 아무도 없고 운영도 안되지 않느냐 교회가 교회를 가로막고 있으니까 교회가 망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고 당연한 일이지요. 베드로 전서에 나오잖아요.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성령이 심판에 이르리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있다는 본부를 치는 겁니다. 좀 진지하게 생각해야 되요. 흔해빠진 카페 생각하듯 교회가 존재한다고 해서 좋게 보면 안돼요. 기독교인 숫자가 몇 명이냐는 둥 쓸데없는데 신경쓰고 생각할 필요 없어요. 숫자 세다가 다윗처럼 당합니다.


미리 이야기 하는데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고 성령을 받았거든요. 성신을 받은 마지막 결론은 시편 51편에 잘 나와 있습니다. 내가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다는 것, 내가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 하나님께선 이런 죄인이 드리는 제사는 안 받는다는 겁니다. 죄인이 드린 제사를 받으실리가 있겠습니까? 더러운데. 더러워서 안 받아요. 우리의 헌금, 예배, 찬송 다 안 받습니다. 더러운 것을 왜 받아요? 받는 것은 예수님 밖에 안 받아요. 히브리서 7장, 8장에 나오는 원리에요.

내 것은 더러워서 안 받으시고 주님께서 드림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입었습니다라고 하는 자가 성도에요. 이럴 때 비로소 내 사랑 그대여~라는 가사가 확 다가오는 거에요. 내 사랑 그대여~ 그대 없이 난 못 살아요. 그대 자리에 주님을 넣으면 되요. 메마른 이 가슴에 단비가 내리듯이, 마치 가스펠 송 같지 않습니까? 빛이 어두움을 비취듯, 무슨 요한복음 같아요. 나중에 이 노래 한번 들어 보세요. 세상 끝 날까지~사랑 앞에서 모든 율법을 다 이루는 겁니다. 얼마나 사랑이 없으면 우리가 착해지려 하겠습니까?


사랑이 없다는 것을 마귀가 잘 알아요. 내 잘남을 계속 갖고 있으니까 마귀가 약을 올리는 거에요. 더! 더! 더! 더 하라는 거에요. 전에는 2시간 기도하던 것을 이젠 꿇어앉아서 해야 더 정성이 있지, 전에 헌금 천 만원 했는데 이천 만원은 왜 안내냐는 거에요. 주님게선 목숨까지 바쳤는데 너는 그까짓 천 만원 내고 입 닦을래? 하는 거에요. 주께선 모든 것을 주셨는데 너는 선교사가 안돼냐 이렇게 나와요. 태국의 어떤 선교사를 2주 전에 만났는데 제 책을 봤는데 동의하며 그 분이 하는 말이 “선교는 없다.” 라는 말에 자기가 15년 동안 선교를 했는데 그것도 오지로 가서 선교를 지금도 하고 있어요.


선교하려고 후원금 손 내밀고 거기서 선교 센터 짓는 것 다 헛짓이다라고 선교사 입으로 저에게 이야기를 했어요. 무려 4시간 동안이나 그 분이 한 말을 그대로 하자면 “그들은 다 무지해서 그렇습니다.”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노아는 제단을 쌓는 거에요. 그러면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것은 다윗이 아브라함 언약에 준해서 뭐 하냐하면 제단 쌓기가 되겠지요. 구약에서는 사람이 돌로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소나 양으로 제물을 얹지요. 사람도,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잖아요. 그런데 제단 쌓기의 목적이,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준 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제단을 쌓기 위함이고 제단을 쌓기 위해 인정받았기 때문에 신약으로 오면 돌과 불쏘시개와 동물의 제물, 제단의 확대를 한 거에요.


내가 제단위에 눕는다고 제물이 될수 있을까요? 안 될까요? 안 되지요.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제물이 되시고 제사장 되시고 제단을 확대시켜 버리면 아까 아브라함 언약에 의해서 롯을 구원하기 위한 환경은 어떤 환경이었습니까? (지옥을 통과해야 천국이 보인다고) 소돔과 고모라는 아주 멸망시켜 버리지요. 그러면 멸망, 다른 말로 심판이 ~~요소 안에서만 구원이 발생되는 거에요. 롯 안에 무슨 요소가 있습니까? 심판의 요소가 있지요.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롯의 처가 있었는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롯의 처를 애초부터 안 믿으면 소돔과 고모라를 떠날 때 데려오지 말았어야 되요. 그런데 일단 데리고 나왔다는 말이죠. 애초에 구원되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그 동네 사람들과 같이 타 죽게 놔둬야 했는데 일단 데리고 나왔거든요. 그 심판과 멸망에 미련을 두고 그 쪽에 관심사를 돌리지 말아야 했거든요. 과연 멸망하는지, 심판 하는지를 그의 처가 뒤돌아보았는지를 질문하면 안되요. 롯이 왜 안돌아 보았는가를 질문해야 되요. 왜 롯은 소돔과 고모라를 뒤돌아보지 않았습니까? 약속을 믿었으니까 그래요.


구원은 어차피 뒤돌아보나 안돌아 보나 작살났을 거니까. 혹시 대전엔 유명한 축제가 있습니까? 온천 축제가 있다면 여러분은 거기에 관심이 있습니까? 없지요. 거기서 행복을 찾고 보람을 찾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절에서는 연등을 달아 올리는 축제를 벌여요. 절이 아닌 시에서도 여러 형태의 축제를 만들어 내요.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하거든요. 심지어 교회에는 예배라는 이름의 축제가 있어요. 부흥회도 그렇고 일반 예배도 의미가 없거든요. 밴드가 있고 해도 의미가 없어요.

롯의 처가 왜 뒤돌아 봤냐고 접근하지 마시고요. 롯은 처는 뒤돌아 봤는데 우리는 안 그랬다 하지 말고 왜 롯은 안 뒤돌았는가를 봐야 되요. 잘 먹고 살든 말든 의미없고 이미 망하도록 된 대사가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 과연 그리 보고 있느냐 말입니다. 남북 대화를 하든 말든 의미 없다는 말이죠. 김정은이 오든 가든 핵 폭탄 열 개, 천개를 만들든 관계없다는 거에요. 니! 저 이런 여자와 결혼하겠습니다. 의미 없어요. 꼭 참석해 주세요,~참석하긴 할 텐데 의미 두지 않는다.


둘이 실컷 만나든 헤어지든 상관없으니까 어차피 주님 재림하시면 끝인데 “그래 사돈은 무슨 옷을 입고 나온다는데?” 난리에요, 손님은 몇 명이나 올지! 온 정신을 거기에 두는 거에요.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시잡가고 장가가고, 아까 이야기 했듯이 기름 부은다는 것은 뭐가 들어온다고요? 하나님의 말씀, 약속이 들어오는 거에요. 약속이 들어오면 약속 외에는 의미가 없어요. 드라마가 어떻게 끝나든 의미 없어요. 세상 유행가가 어떻든 롯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어버립니다. 유황불 맞는 게 아니고 이것은 뭐냐하면 롯의 가정 안에 롯의 처는 하나의 기념물이 되는 겁니다.


내 아내는 심판 받았다. 다시말해 우린 심판 안에서 살아남았다. 그 심판의 흔적을 두 딸에게 전달됩니다. 그래서 모압과 암몬이라는 조상이 되면서 그때 심판 받아야 될 환경이 구약내내 따라오게 되어 있지요. 이게 다윗이 말했던 내가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는 ~·내 속에 하나님의 약속에 반대되는 요소가 잠복된 암 세포처럼 때가 되면 발작을 일으키고 와락 쏟아지게 되어 있어요. 주님 가신 길을 내가 가겠다고 나서지 마세요. 주님 가신 길을 주께서 만드시는 것이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서게 되면 나의 일이 되고 나의 구원이 되고 주의 구원이 되는 게 아니에요. 제가 일이 있어 동네에 있는 절에 가게 되었는데 비오는 날 법회 한다고 시끄러워요. 지직~ 지직~무슨 타는 냄새가 나서 보니까 대목이 돼서 연등을 서로 복잡하게 놓아 놨는데 비가 와서 줄줄 물기 때문에 나무는 타고 합선이 되고 불타서 다 날아갈 뻔 했어요. 법회 한다고 정신없는데 차단기를 내려서 불타는 건 모면 했는데 법회에 가보니까 하긴 교회도 법회이지만 전부 자기를 위해서 에요.


본문 16장을 다시 봅시다. 이새는 사무엘에게 왜 다윗을 소개하지 않았을까요? 언약에 보면 항상 혈육을 비켜나게 되어 있는데 여러분들도 다 아시지만 이삭이 누구를 더 좋아했어요? 에서를 좋아했지요. 하나님께서 맏 아들 에서를 이삭이 좋아하게 만들어 놓고 하나님은 누구를 좋아합니까? 야곱을 좋아하지요. 이 상황을 대비해 보세요. 언약적 이삭이 누구를 사랑해요? 에서를 사랑하지요. 그래놓고 하나님은 복 주는 이삭의 뜻과는 정 반대로 싫어하던 야곱을 복 주게 만들었어요. 결과가 야곱에게 복이 가게 만드셨지요.


다윗의 아버지 이새가 혈육적으로 존재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에 그렀습니다. 인간이 믿고 좋아하는 것을 뒤짚어 버리는 거에요. 그러면 다윗은 누구를 좋아합니까? 다윗 역시 압살롬을 좋아하지요. 그런데 다윗의 인생에서 압살롬 계열이 솔로몬의 계열로 뒤짚어 지지요. 다 제거해 버리니까 주님께선 부단히 누구를 제거해요? 나 자신이 뿜어내고 있는 스스로 처리 못하는 본심을 성령을 통해 매일 같이 쳐 내시는 거에요. 16장에서 다윗이 뭐라고 했냐하면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라고 했지요.


그런데 왜 이새는 다윗을 그렇게 안 봤느냐는 말이에요. 7절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방금 에서와 야곱 이야기가 똑같이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좋아해버리면 그 사람은 용모가 뛰어난 사람이 되고 빛이 나는 사람이 되어버려요. 너무나 주관적이지요. 이번 수련회에서 아가서 할 때 그랬잖아요. 도대체 여자가 얼마나 아름답고 남자가 얼마나 멋있는지 우리는 상상이 안 간다는 말이죠. 그런 사람을 한번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아가에 나오는 솔로몬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래봐야 어떤 사람은 술람미 그것도 인물이냐?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이런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너무 과장되어 있어요. 그 묘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아름답게 보일 뿐이에요. 이게 하나님의 뜻이라니까요. 그런데 그것이 사람들 눈에는 별로 보인다는 말이에요. 이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우리가 주의 뜻을 날마다 훼방하고 있음을 주께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내 뜻대로 안 되게 해 주신 주께 감사하는 자가 복 받은 자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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