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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2 19:57:03 조회 : 75         
광주강의20190531b 마가복음13장 28-37절(상호주관성)-이 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IP:122.43.170.138)
광주강의20190531b 마가복음13장 28-37절(상호주관성)-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여름나기, 여름에 대해서 너희들이 책임 있는 정보를 제시할 수 있느냐고 주님이 제자들에게 묻는 투죠. 여름에 대해서. 이거는 시공간에 대해서 묻는 겁니다. 시공간의 근원에 대해서. 그래서 오늘 제목을 이래 했어요. ‘근거에 대한 책임.’ 근거에 대한 책임을 제자들에게 묻는 겁니다.

제자들로서는 상당히 생뚱맞죠.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제자들은 나름대로 주관이 있는데, 주관이 아니고 뭐로 바뀌었습니까? 상호주관. 진리는 그 두 사이의 다툼과 충돌과 차이의 그 틈바구니에서 나오는 거예요. 진리가. 언약이. 그 틈바구니에서 나오는 거예요. 근거에 의한 책임, 또는 추궁이죠. 근거에 대한 책임. 인간에 의해서 선악과 따먹어서 세상이 저주받았잖아요. 창세기 3장에.

거기에 대해서 인간이 책임을 져야 되지 않습니까? 책임질 수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그렇다면 인간의 답변은 뭐냐, 시공간,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대해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이 되죠. 그러면 시간+공간을 주님은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은, 이걸 무대세트로 생각하는 거예요. 무대세트. 뮤지컬이나 오페라 할 때 막이 바뀌면 무대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무대가 서서히 바뀌어나가잖아요. 바뀌어져나가죠.

호두까기 인형, 혹시 기억나십니까?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의 인형이라는 오페라가 있는데, 그 오페라, 파리의 오페라 좌(자리座)가 있어요. 제가 생전처음으로 파리 오페라에 처음 들어가 봤고, 그건 오페라 없이 구경만 해도 15,000원 내야 돼요. 거기에서 시작하기 직전에 파는 것이 있어요. 직전에 10유로만 주면 제일 꼭대기 층에, 영화에서 보면 위층에 뱅 둘러진 곳에 신사숙녀가 방 칸칸에서 보는 것 있잖아요. 진짜 방 칸칸이 있는 곳에 처음 가봤어요. 밑을 내려다보는. 근데 그게 사실은 비싼 석(자리席)이 아니고 제일 헐은 석이에요. 로얄석은 제일 안쪽에 있는 거죠.

그 무대장치가, 파리에서 제일 유명한 곳에서 하는 장치가 막이 바뀔 때마다 세트 자체가 바뀌어요. 지금 주님께서 시공간을 바뀌게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만이 범죄로 인하여 저주받은 시공간을, 지금 세트가 바뀔 때마다 서서히 바뀌거든요. 물론 여기서는 조명 다 꺼버립니다. 깜깜하게 다 끄고, 끈 사이에 후딱 세트를 이렇게, 무대가 움직이니까 바꿔치기 하겠죠.

주님이 지금 세트자체를, 무대세트 자체를 바뀌게 하는 거예요. 그럼 바뀌려면, 그 무대세트에 바뀌려 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공통점이 있어야 하느냐 하면은 예수님과 동일한 사고방식으로 시공간을 아는 사람만 거기에 참여하게 되고 그 사람들이 바로 약속의 나라, 천국에 가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무대가 바뀔 그 조짐에 대한 그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 노을이 지잖아요. 노을이 지게 되면, 노을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습니까? “아이고, 내 등이 왜 이렇게 벌게. 내가 뭘 깔고 앉았나.” 이래 책임질 수 있어요? 없어요? 안 되죠. 노을은 뭐냐 하면은, 노을은 일종의 징후입니다. 무엇의 징후냐 하면은 사라짐의 징후죠. 무엇의 사라짐이냐, 낮 동안 뜨거운 태양의 사라짐의 징후가 노을입니다.

예수님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언급할 때에 앞에 날씨이야기를 했죠. 너희는 천기의 징후를 알면서 진짜 알아야 될 이 세대 자체의 징후는 왜 모르느냐, 쉽게 제가 이 무대세트 바뀌는 식대로 이야기하면, 너희들은 고정된 세트에, 계속 이 세트로 갈 것이라고 여기고 사는데, 나는 너희에게 이야기한다. 아침에 날씨가 좋고 저녁에 해가 어떻게 한다는 그것도 지금 있는 무대세트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이 세트를 있게 한 세트, 이 무대를 있게 한 무대, 무대가 뭡니까? 이중무대죠. 이중껍질. 시공간이라는 이중껍질.

하나는 창조된 아담중심의 시공간이라면, 아담이 납득이 되고 이해되는 시공간이라면, 새로운 시공간은 누구만 납득이 돼요?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의 새로운 시공간, 새 하늘 새 땅이 있다 이 말이죠. 이 무대세트와 이 무대세트를 갈아치기 하는 그 조짐의 순간에 누가 왔다?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곧 뭘 지셔야 됩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지시고 죽으셔야 하기 때문에. 십자가지시고 죽으셔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이 한패 먹고 같이 세상을 영원히 살려면, 왜 이 멀쩡한 세상이 사라져야 되는가를 알아야 되겠죠.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이 아는 것은 뭐냐 하면은 잠자는 징조밖에 몰라요. 주님보시기에는 잠자고 있는데, 본인은 뭐냐 하면은 본인한테 절실하게 지금 깨어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깨어있으니까,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은 나한테 어떤 이익을 주느냐, 나한테 어떻게 손해를 주느냐, 그 점에 굉장히 예민하게 구는 겁니다.

그걸 보통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정신 차려!”라고 하죠. “정신 차려라!” 맞지요? 지금 빨리 진도 나가야 되는 것이 아니고, 이해되십니까? 제가 수요일에 한 것을 제가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수요일에 제가 어려운 단어 하나 언급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직접성’이죠. 감 잡으셨습니까? 직접성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선택할 만큼 세상을 내가 정돈시킬 수 있는 그런 권한이 나한테 있다고 보는 겁니다.

내가 뭘 선택하고 어떤 운명을 택하고 할 때, 그럴 때 나는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나 나름대로의 구조화시켜놓고, 정돈시켜놓고, 나 이 길로 갈래. 나 문과갈래. 나 이과 갈래. 이렇게 정돈시키는 거예요. 이게 직접성이었어요. 직접성. 대표적인 직접성이 뭐냐 하면 바로 나 당신 사랑해. 나 당신 좋아해, 입니다. 이 예가 제가생각하기에는 적절한데요.

어떤 사람이 얼굴이 예쁘다고 합시다. 예쁘다. 또 어떤 남자가 너무 잘생기고, 성격 좋고, 키 크고, 돈 되고. 돈을 앞에다가 놓으면 돈 되고, 잘생기고, 성격 좋고, 키 크고, 여자 배려할 줄 알고, 건강하고. 어느 여자도 이 남자를 선호할 거예요.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갑니까? 기혼인지 미혼인지 그거는 아무 문제될 게 없고. 어쨌든 간에 잘생겼다 이 말이죠. 근데 이게 뭐냐 하면은, 직접성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 내가 체계를 잡고, 내 체계, 내 내부의 체계를 내 선택에 의해서, 공작에 의해서 확장시키는 겁니다.

이걸 직접성보다 더 어려운 말이 있어요. 방금 한 것을, 직접성보다 더 어려운 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행위입니다. 행위. 이게 행함이라는 겁니다. 행함. 그게 뭐가 어렵냐고 하시겠죠? 행함이 굉장히 어려워요. 행함이 왜 어렵냐 하면은 반드시 뭘 내놓느냐 하면은, 행함은 반복성을 갖고 있습니다. 한 타임 좀 쉬고 갑시다. 너무 어려우니까.

인간이 자기 행함으로 자기가 “나 믿습니다. 장담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솔직히 말해서, 솔직히...” 그 ‘솔직히’가 다 엉터리인 이유는 인간의 반복성을 본인이 어떻게 절제하거나 정지시킬 재주가 없어요. 방법이 없습니다. “다시는 안 할게요.” 이게 될 수가 없어요. 인간의 행함은 자기 체계의 자연적인 발산이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파수꾼 세워서 정신 차려도, 이 체계 자체의 자연스러운 발산으로 인하여 이게 반복적 행함으로 나온다니까요. 내가 뭔가 되고 싶은 것이 있잖아요.

내가 되고 싶은 것을 좀 더 이야기할까요? 이게 어려운 이유가, 이 체계 잡을 때 어째서 체계를 잡는가가 또 있어요. 수련회해야 하는데 미리 참고로 교재보고 서론부분만 아세요. 이 체계를 잡을 때 자기를 우수한 존재로 보는 거예요. 우수한 존재. 왜냐하면 선악과기 때문에. 선악을 안다는 말은 선을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선악을 안다는 자체가 자기가 우수한 존재라고 인정하는 근거로서 선악을 아는 것으로 보는 거예요. 악마 같아요. 인간이.

봉준호 감독 영화 평할 때 했잖아요. 인간은 기생충이 아니고 뭐하고 했습니까? 환자라고. 인간은 기생충이 아니고 전부 다 환자에요. 인간은 다 정신병자에요. 그래야 자기 탓을 남 탓으로 다 돌려질 게 아닙니까? 계급화 시켜서. 대통령 잘못 뽑아서 나라 망했다. 이런 식으로. 니 때문에 내가 불행하다. 이런 식이잖아요. 그게. 대통령이야기를 왜 합니까? 니 때문에 내가 살림살이가 못해졌다. 이 말 아닙니까? 노조, 전부 다 마찬가지잖아요. 전부 다 남 탓하잖아요. 남 탓. 부부싸움 할 때 “내 탓이요.”하면 부부싸움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아이고, 당신 만나서 내 인생 조져 놨다.” 몰아도 이런 식으로.

인생요, 도화지 못 바꿔줍니다. 도화지 못 바꿔줘요. 사모님, 아직도 도화지 안 바꿔주죠? 호작질(손장난) 하나 안 하나 그거는 그대로 가는 겁니다. 주님방식이에요. 이 직접성이라고 하는 것은, 체계가 자기만큼은 못 속이고, 직접성을 가지고 행위로 등장하게 되어 있고, 이 체계에 부합되기를 남에게 강요하게 되어 있습니다. 일종의 압력이죠. 누구한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지금 상대에게 강요하고 있는 중입니다. “내 말에 동의한다고 해! 아멘 해!” “아멘.” “아멘이라고 해!” 계속 강요하는 거예요. 아니라고 하면 변명 막 해대는 거예요. 이게 바로 직접성이에요.

어떤 여자가 어떤 남자한테는 이뻤다. 그럼 이뻤다는 말은 평소에 내 마음속에 뭐가 있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선악과 자체는 주일날 설교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매력이라고 했죠. 매력이 뭐예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까지 하죠. 그러면 이것이 자기 얼굴 모습은 70이 넘었는데,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나이는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이쁜 것을 찾는 거예요.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그 매력에 끌리는 그 본성이 그대로 우리 속에 체계를 이룬다니까요. 장로님 보고 제가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나이는 생각 안 하고 무조건 이쁜 것 찾는다고요. 이쁜 것. 소지섭이 결혼하는데 17세 연하랑 하잖아요. 소지섭이. 이건 몰라도 되지만. 하여튼 분명히 이건 직접성이에요. 이쁘다. 잘빠졌다. 참, 하룻밤 잤으면 좋겠다. 온갖 생각을 하죠.

그런데 그 여자를 사귀고 난 뒤에, 그 여자가 남한테 함부로 하고, 거친 말하고, 상스러운 말하고, 얼굴하고는 달리 교양 없는 행동을 할 때, 갑자기 뭐가 됩니까? 싫어지는 거예요. ‘아, 이거 똥 밟았구나!’ 이런 식으로. ‘내가 저런 여자인줄 몰랐네. 저렇게 싸가지 없는 여자인줄 몰랐다. 성질 저렇게 더러운 여자인줄 몰랐지. 이쁜 것만 끌려가지고 내가 독사에게 물렸는가.’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직접성 때문에, 잘 들으셔야 돼요. 직접성이 노린 게 아니고, 직접성 말고가 아니라, 직접성 때문에 가려진 거예요. 직접성 때문에. 주님께서는 일을 어떻게 하겠어요? 선악을 따먹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겠어요? 당장, 막상 내 악마적 본성에 부합되는 것을 덥석 무는 것을 주께서는 충분히 이용하시는 거예요. 하늘나라에 가면 누가 높은가, 이런 식으로.

얼굴 이뻐서 같이 자고 싶었는데, 사귀면서 가만히 하는 행동을 보니까, 아이고, 이거 뭐 자기보다 못난 사람을 개같이 취급하고, 엉망진창이고, 태도, 남에 대한 배려심도 하나도 없고, 자기 탐욕과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고. ‘아, 얼굴 예쁜 것이 다가 아니구나! 역시 여자는 마음씨가 착하고 이뻐야지. 얼굴 예쁜 것은 소용이 없다.’라고 하겠죠. 자기 직접성에 대해서 반성하겠죠. 그런데 이 직접성이 여기에 들어가면, 아까 행위는 뭐가 나온다? 반복이죠.

다음에는 얼굴 이쁜데 행위도 착한 사람. 그렇게 교묘하게 자기 욕심이 욕심 아닌 것처럼,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더 많은 정보를 통해서 나는 이 세상에 대해서 오류를 줄이고 실수를 줄이는 방향으로 철저하게 하는데 나는 성공했기 때문에, 결국 나는 뭐다? 우수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새로운 선택, 새로운 행위에 나서게 되어 있어요.

자, 이 행위가 이 정도로 엄청난 문제가 있는 것을 이제 아시겠죠. 왜 로마서에서 인간의 행함으로는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를 알겠죠. 인간의 본성과 관련되어 있어요. 이미 인간의 본성이 나한테 매력이 있는 것은 놓치지 않겠다는 자기 이기적이 탐욕을 정당화하는 쪽으로, 그렇게 해서 나는 절대적인 존재고 우수한 존재고 최고의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인간은 행동하게 되어 있어요. 그걸 확인할 때 항상 직접성을 가지고 행동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직접성이란 내가 선택한다. 내가. 내가 선택해서 원하는 결과를 도출해낸다. 이게 직접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근데 직접성을 하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딱 하고나서 현장에서 뭐가 나왔습니까? 내 직접성 때문에 내가 놓쳐버리고 내가 무지했던 그 사태가 일어나도록 누가 조치하신다? 주님이 조치해주신다 이 말이죠. 얼마나 주님께 감사합니까? 우리의 성질은 성질대로 다하고, 막살도록 다해놓고 우리로 하여금 회개의 기회를 제공해주시는 것, 그게 상호주관성이에요. 제목을 바꿔야겠습니다. ‘상호주관성’으로.

왜 주님이 우리와 더불어 사시는지를 이유를 아시겠죠. 우리가 주님한테 정보를 얻어서 혼자 살면 안 되는 이유를 아시겠죠. 회개가 없으면 이거는 설교가 아닙니다. 설교는 두 종류가 있죠. 회개하는 설교와 해석해주는 설교가 있어요. 해석해줄 때는 자기 회개가 필요 없어요. 그러나 회개하는 설교는 뭐 어쩔 줄을 몰라. 아이고, 죽어야지. 내가 왜 사나. 내가 왜 사나. 내가 사는 것이 민폐다. 오늘 제목을 민폐 할까요? 내가 사는 게 민폐다.

내 체제에 있는, 나는 우수한 설교자라면, 나는 반복적인 직접성이 나오겠죠. 저 사람을 잘 가르치면 나는 내 팬이 될 수 있다는 매혹을 느끼겠죠. 본인이. 본인이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내 팬이 몇 명이나 될지, 좋아요! 막 올라오고 이런 거요. 그걸 기대하겠죠. 나를 찾는 사람이 많아질 거고. 뭡니까? 뭐,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 그런 뜻인가요?

제가 첫째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충분하게 우리의 본색을 드러내게 하는 이유는, 니 근성 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에, 결국 “니 나하고 살기 싫잖아? 그치? 그러나 내가 떠나가 줄게.” 해서 주님이 떠나가는 거예요. “니 나하고 살기 싫잖아. 아니, 분명히 이야기해봐. 니가 그런 태도기 때문에 나하고 있기 싫지? 날 이용하고 싶지? 살기는 싫고. 그렇잖아? 그렇지?” 이걸 베드로 가슴에다가 손가락으로 쑤시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니는 나 있는 곳에 올 수 있다? 올 수 없다? 올 수 없다.

지금 아직 성령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구약적 구조라고 했어요. 구약적 분위기라고 했습니다. 제자로 열심히 붙어있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얼마나 철저하게 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습니다.”라는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무대장치가 바뀝니다. 호두까기 인형 1막 끝나고 2막이 넘어가요. 호두까기 인형 백날 봐도 전부다 각색을 해놓아 가지고 전에 했던 인터넷에 나온 전혀 그 스토리가 아니라서 또 새로운 스토리를 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참고로 그 로얄석이 30만원이 넘어요. 우리는 15,000원 주고 들어갔어요.

우리는 우리의 사안과 생존에 대한 노력을 쉬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잠자지 않습니다. 그래서 잠자는 존재에요. 그래서 잠자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어있지를 못하는 거예요. 2000년 교회역사가 이걸 주석하는데, 34절에 봅시다.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35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아까 봤죠.

이걸 구약적 상황으로 본다면, 결국 이건 뭐냐 하면 아무도, 예수님 십자가에 갈 때 아무도 같이 있어줄 제자는 아무도 없는 겁니다. 유일한 인간의 힘으로 깨어있을 수가 없어요. 인간의 본성은 잠자고 있다고 하지 마시고 나에 대해서 한시도 쉬지 않고 깨어있어요. 내게 깨어있기 때문에 주님한테 관심 둘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내가 얼마나 챙길 것이냐, 예수님 말씀 들어서 얼마나 복을 받을 것이냐, 항상 자기가 자신에게 깨어있어요. 기존 무대세트를 자기는 고수하고 있는 겁니다. 기존의 세상을.

눈에 보이니까 직접성이 나한테 매력이 되고, 내가 요구하고 싶은, 내 욕망을 자극하는 그런 것들로 둘러싸인 세상이기 때문에 그걸 놓치면 나는 인생 실패한 것 같아요. 따라서 그걸 놓치기 싫기 때문에 우리는 애를 쓰고 노력합니다. 그 노력이 누굴 위한 노력입니까? 나를 위한 노력이기 때문에, 그것이 뭐냐 나한테 깨어있는 거예요. 잠도 못자요. 얼마나 깨어있는지. 2시간, 3시간 자고 지금 돈 번다고 난리입니다. 얼마나 깨어있는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영화에 보게 되면, 비가 철철 오는데, 아랫동네에 비가 많이 와요. 계단을 내려가요. 의도적으로 화면을 계단, 계단 또 계단 내려가고, 그만 내려갈 것 같은데 또 계단보이고 또 계단 내려가고, 내려간 후 물이 찬 지하가 나오는데, 수재민수용소에 있으면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진지하게 물어요. “아버지 계획이 뭡니까?”

영화 첫 장면에도 아내가 “여보! 우리가 이렇게 백수로 사는데 계획이 뭐예요?”라고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 물난리가 나고 난 뒤에 그때 송강호가 해답을 해줘요. 수재민수용소에서. “계획? 나한테 좋은 계획이 있지. 그거는 무계획이다. 왜? 계획이 없으니까. 계획이 있어도 지금까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었고, 계획을 아예 안 하면 실망을 안 하게 되니까, 무계획만큼 좋은 계획이 없지 않느냐?”

이거는 바로 서민들의, 오늘날 없는 사람들의 자괴감을 표현하겠죠. 그 원인이 바로 윗동네에 사람들 때문에 그렇다고, 그렇게 시사하려고 작가가 그렇게 했겠죠. 무계획이든 유계획이든, 노자가 말한 무사상이든, 중국의 법대로 살자는 사마천이든, 공자든, 맹자든, 관심은 누구한테 관심이 있어요? 얼마나 내가 행복 하냐, 자기한테 관심이 있죠. 그게 바로 무대세트를 착각하는, 기존의 무대세트가 계속 가는 줄로 알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옛날부터 나오는 유명한 질문 가운데 그런 게 있잖아요. “착한 세종대왕은 천당 갔습니까? 지옥 갔습니까?” 이거는 자기 교회 목사한테 교인들이 진짜 진지하게 물어요. 그럼 목사들은 더듬거리죠. 더듬거리면서 답변 못해요. 세종대왕이 지옥 갔다고 하면 그 교인은 안 나올 수가 있어요. 삐져가지고. “그렇게 착한 사람을 지옥 보내면 나는 그런 하나님을 안 믿습니다.” 이래 나와서 안 나올 수가 있으니까 말을 아끼고 조심합니다. “에이, 우리는 예수님한테만 관심두면 되지...,” 말 꼬리를 흐리죠.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면 결국 뭡니까? 세종대왕은 잠자고 있는 사람이에요. 잠자고 있는 사람을 제가 봉준호 감독 영화를 평을 하면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이 이야기를 썼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무엇을 하고 있다? 지금 환상 속에 있다. 꿈속에 있는 거예요. 꿈속에. 환영 속에. 꿈속에 있어요. 꿈을 꾸고 있어요. 세상이라는 꿈을. 근데 그 봉준호 감독만 그런 게 아니고 누구도 그렇습니까? 이 제자들도 마찬가지에요.

여기 31절을 봅시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되어 있죠.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나는 지금 이 무화과나무, 봄여름가을겨울, 여기에 대해서 그 근거를, 나는 이렇게 망가진 이유를 알고 근거를 안다는 거예요. 이 무화과나무가 어떤 무화과나무였습니까? 얼마 전에 예수님께서 저주한 무화과나무잖아요.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은 이유가 뭐예요? 무화과나무가 나쁜 짓 했습니까? 무화과나무가 가만히 있다가 예수님이 오시니까 “못 따먹지.”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놀리고 그랬습니까? 무화과나무는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여기서 오늘 본문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가만히 있는 게 바로 잠자고 있는 것이라 말이죠. 가만히 있는 게. 무계획이 잠자고 있는 것이고, 이게 죄짓고, 가만히 있는 게 음란이에요. 가만히 있는 게.

우리는 주의 뜻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없다고 해서 지옥 갈 책임이 면제되는 것이 아니에요. 한통속이니까. 여기 31절에, 천지는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천지는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장로님!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평소에 이거 생각하면서 우리가 아주 신나합니까? “여보! 돈 벌어 와요.” “괜찮아. 천지는 없어진대.” 막 자기 혼자 좋아가지고. 아이나 개가 첫눈 올 때 어떻게 합니까? 좋다고 뛰어들죠. 그러면 밥 줍니까? 아니, 눈이 돈을 줘요? 밥을 줘요? 뭘 줍니까? 안 주죠.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밥 줘요? 돈 줘요? 아무것도 안 주죠. 애들이나 좀 모아줄지 몰라요. 아무것도 안 주죠. 아무것도 안 줘도 우리가 괜찮은 이유는 우리가 죽을 때 감사함으로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걸로 된 겁니다. 우리가 사는데 전혀 보탬이 안 돼요. 근데 죽을 때 어떻게 죽는다고요? “참, 그동안 저지른 일을 많이 했어도 인내해주셔 가지고 감사합니다.” 감사하면서 죽을 수 있다는 이것만해도 더는 소원이 없어요. 더는 소원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밥을 주나? 떡을 주나? 이거는 살고자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해요. 여기서 살고자 한다는 것은 누굴 계속 유지해야 된다는 우김이 있습니까? 내가, 남은 죽더라도 나 혼자는 행복해져야 되고 나 혼자는 살아남아야 된다는 것을 근거 없이 지금 우기고 있어요. 우기고 있으니까 주님께서 지금 말하고 있는 거예요. 니가 이 무화과나무와 여름과 천지의 없어짐에 대해서 니가 책임질래? 라고 지금 묻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모르죠. 그거 책임 못 지죠. 갑자기 붕 떴죠. 그게 뭐가 되느냐 하면은 사라짐의 징조가 되는 겁니다. 이 세상이. 제목이 열 번도 더 바뀌겠다. 오늘 제목은 ‘징조’라고. 주님께서는 지금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에요. 제자들의 이 무지함을 뭐로 보느냐 하면은, 지금 구약적 환경이라고 했죠. 무지함을 예수님 자신의 언약을 미리 보여주는 징조로 보는 겁니다.

모세를 따라왔던 남자만 40만의 그 이스라엘이 거짓된 애굽신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는 것이 그대로 노출되는 그걸 뭐로 보느냐,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는 징조로 보는 거예요. 징후로 보는 거예요. 언약이 왔을 때에 비로소 그들은 노출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아는 여호와는 여호와가 아니다. 지금 말로 하면 우리가 아는 예수는 예수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 예수님! 하면서도 예수님과 같은 움직임에 대해서 아무런 감각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변화, 예수님의 그 조짐, 그것이 말씀으로 오거든요. 그 말씀에 대해서 전혀 감각이 없다는 말은, 우리가 그냥 말로는 아무렇게 산다고 하지만 어디에 정신이 팔려있다는 거예요? 내 단도리에 정신이 팔려있어요. 내 단도리에. 아침에 눈만 뜨면 내 단도리에요. 저 위에 가 있는 애들은 잘 있는지. 지금 병원에는 잘 다니고 있는지. 월급은 엄마 생활비하라고 맡길지, 아니면 지가 알아서 적금을 넣을지. 지가 알아서 지가 모아서 장가가겠죠.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책임은 전혀 지지 않고, 누구에게만 책임을 지려고합니까? 자기 자신이 구원받기에 합당한 존재가 되는데 충성을 다합니다. 그러면 주인이 누굽니까? 본인이 주인이에요. 종은 누구의 종입니까? 그 주인의 종이 누굽니까? 나죠. 내가 주인이고 내가 종이고. 내가 나한테 굴복하고. 나는 나 때문에 울고. 나 때문에 웃고. 그래서 사랑에 속고 돈에 울잖아요.

얼굴 이쁜 것 보고 사귀려고 하다가 성질 더러운 것 보고 후회하고. 그 다음에 얼굴 이쁘고 성질 좋은 사람을 찾아다니고. 근데 얼굴 이쁘고 성격 좋은데 돈이 하나도 없네. 돈이 하나도 없어가지고 계속 사주고 먹여줘야 돼. 그 다음부터는 돈 되고 얼굴 이쁘고 성격 좋고. 여자라면 키는 별로 필요가 없어요. 그래 되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한다? 반복적으로. 왜? 행함은 반복이라고 했으니까.

진짜 어려운 거예요. 행함은 단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반복성을 나타낸다는 말은, 반복되지 않은 덩어리가, 암 조직이 내 안에 턱하니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티내고 있는 거예요. 티내고 있는 겁니다. 우리 안에 어떤 노끈 덩어리가 있다면 그게 솔솔 풀리잖아요. 풀려봐야 같은 노끈, 노란색 노끈이라면, 노란색 노끈이 계속 풀려봐야 노란색 노끈밖에 안 나와요. 이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이 광산 김씨인데. 김언중씨라고 지금 서울우유 선전까지 나와요. 시청률이 14퍼센트가 넘었어요. 대통령도 만나고. 아주 유명한 사람이에요. 서울 김포에서. 지난번에는 노래자랑에 나간다고 해서 예선 떨어지고. 그런 제목이 나와요.

노란 덩어리를 갖고 있으니까, 휠wheel을, 움직이는 것을 갖고 있으니까, 나와 봤자 노란 것 밖에는 안 나오죠. 인간이 이 게 다예요. 이게 다. 제목 또 바뀌겠다. ‘다’로. 이게 다라니까요. 다. 관심사가 온통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끝나는. 내가 알파요 오메가에요. 내가. 나로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고 나로 돌아와요. 이게 구약적 상황에서는 어떤 식으로도 못 바뀝니다. 왜냐하면 구약적 상황자체가 천지 안에 갇혀있으니까. 나무, 무화과나무, 여름, 가을, 그 안에 갇혀있어요. 지금 그걸 주께서는 전부 다 뭐한다? 없애겠다는 겁니다.

그 없애는 정보, 왜 없애야 되는지, 거기에 대해서 니가 아는 게 있느냐? 모르죠. 모르니까 니가 무지하고 깨어있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정상적인 것 같으면, 주님 보시기에 정상적인 것 같은데 모르면, 누구한테 기대를 해야 돼요? 주님한테 기대를 해야 되겠죠.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여호수아가 누구를 기대했습니까? 많은 다수의 백성들한테 속하지 않고, 지금 죽었는지 살았는지 분간도 안 되는, 진짜 헛된 짓 아닙니까? 39일째 내려오지 않는, 39일째 똑같은 일을 벌여보세요. 그러면 40일도 마찬가지고 41일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안 들겠어요? 들죠. 무작정 기다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여기 35절에 나오는 이 종은 그냥 깨어있으라고 해놓고 그 다음에 언제 온다는 말입니까? 날짜 안 가르쳐주고. 나도 몰라. 이래 끝나버려요. 그러면 뭐냐, 모르고 있는 것을 가지고 어떻게 인내성을 가지고 기다립니까? 이게 말이 돼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그 모름이 갖고 있는 진리의 징조가, 징후가 모르면서도 기다리는 나 자신. 이것이 징조가 되는 겁니다.

이게 하나의 노을이 되는 거죠. 주님이 사라졌듯이 나도 사라진다. 사라질 때는 사라질만한 이유가 있다. 왜,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관심사는 온통 누구한테 있다? 나한테 있는, 이런 존재밖에 안 되니까. 나는 이제 나를 버리고 오실 분을 기다려야 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는, 구약적 분위기에서는 이렇게 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누가 와야 돼요. 성령이 오시게 되면 기다림은 끝났어요. 재림마저도 기다림이 아니에요. 오신 분의 그 다음의 할 일이에요. 오신 분의 그 다음의 할 일.

이 말이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루브르 박물과 입구에 크리스탈로 되어 있는 삼각형이 있잖아요. 입구에 인상 험한 흑인이 있어가지고 “줄서서 가세요!”라고 해요. 한 시간 반 동안 있어도 줄이 줄지도 않아요. 그런데 그 다음에 보면 “임산부는 들어가세요!” 왜? 줄서다가 쓰러지면 자기들이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근데 제 딸이 또 임산부가 아닙니까? 제 딸이 또 영어되거든요. 나는 안 되지만. 어떻게 또 했더니만, 본인은 통과돼도 식구들이 같이 못 들어갔는데, 나 지금 쓰러지려고 했는지 어떻게 해가지고 같이 들어가게 됐어요.

자, 한 시간 반 동안 기다렸습니다. 지루했어요. 근데 들어갔어요. 들어갔을 때의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 하면은, ‘빨리 모나리자를 봐야지.’라는 그런 마음이 든 게 아니고, 됐다. 끝났어. 거기서은 두 번 다시 쫓아다닐 필요가 없기 때문에. 완료죠. 성령 받은 성도라면 무슨 이야기해야 됩니까? 아이고, 재림 안 됐으니까 우리는 초조하게.., 이게 아니고 편안한 마음으로 예수 안에 있거든요.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뭡니까? 니 내 안에 넣어줬다는 거예요.

그럼 내 안에 들어가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은, 전에 밖에 있을 때는 우리가 말씀을 지켜야하는데, 예수 안에 들어오면 이미 다 완성된 말씀이, 우리에게 징조니까. 우리가 말씀의 징조니까, 말씀이 말씀대로 움직이도록 주께서 조치를 해주는 겁니다. 내가 10미터, 20미터, 다가가서 그 말씀을 지켜야 될 것을, 말씀이 마치 안개처럼 와가지고, 나는 가만히 있는데 와서 덮쳤어요. 덮치니까, 아침에 눈떠보니까 돌아가는 모양새가 전부 다 무엇대로 됩니까? 말씀대로 돼요. 주님의 뜻대로 돼요. 내 뜻대로 말고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 이 말이죠. 모든 게.

그러면 우리가 지킬 것이 있어요? 없어요? 지킬 게 없죠.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우선 구약적 분위기에서는 우리는 뭘 생각하느냐 하면은 죄를 생각해야 되고 선과 악을 생각해야 돼요. 죄를 생각해서 죄 짓지 않아야 되고, 선을 취하고 악은 멀리해야 됩니다. 그런데 성령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죄를 생각하면 안 돼요. 죄를 생각하는 그것이 죄가 돼요.

왜냐하면 우리가 구약에서 성령 안에 들어오잖아요. 구약 때 죄를 생각하는 그 심보, 의도가 뭐예요? 우리 장로님이 한 번 이야기해보세요. 제가 잘 안 하는데, 속이 좀 안 같아서 제가 물어보는 거예요. 우리가 왜 평소에 구약적 입장에서 생각하고 왜 죄를 생각합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죄를 안 지어야 존재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 누구의 영광이 가려져요? 주님의 영광이 가려지기 때문에 죄를 안 지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죠. 그렇죠. 그럼 이건 계속 미완료가 되죠. 그렇잖아요.

좀 더 구체적으로 나가볼까요? 내가 복음을 알되, 제대로 확실히 알아야 내가 구원받는다는 생각, 그럼 이 관심사가 누구한테 있습니까? 나한테 있죠. 그럼 나는 뭘 알고 있다? 나는 선과 악을 알고 있죠. 선은 복음을 제대로 하는 것. 악은 그거보다 미흡한 것. 그 간격만큼 내가 선에 못 미치니까. 분량적으로, 양적으로 선에 못 미치니까, 그만큼 우리는 선이 되지만, 그만큼 악이 되겠죠. 악이라고 해서 복음 모르는 사람보다는 낫고, 이게 분량적으로, 측량이 가능한 쪽으로 보게 되면, 스펙트럼으로 보게 되면, 빨주노초파남보, ‘빨’이 복음이라면 우리는 ‘주’정도. ‘주’도 대단하다. ‘파’정도. 그걸 바로미터로 왔다 갔다 하겠죠.

이 생각이 바로, 이 생각이 뭐냐 바로 성령 밖에 있는 사람들의 행세라 이 말입니다. 중요한 거 해봅시다. 이제부터 진짜 중요해요. ‘이미’가 ‘완료’가 되었기 때문에, 잘 들으셔야 돼요. ‘미완료’를 소급해서 반복시키는 겁니다. 잘 들으셔야 돼요. 완료가 되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미완료를 체험해야 돼요. 그래야 십자가의 공로만 높아지는 거예요.

예수 믿고 난 뒤에 당장 안 죽는 이유는 나 자신을 그동안 너무나 몰라도 너무 모른 거예요. 예수 믿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나를 아는 작업에 나서는 거예요. 도대체 내가 얼마나 엉터리였으면 십자가에 주께서 피 흘리셨는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미완료를 반복하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복음 알고 난 뒤에 맨날 양심에 가책이라. 맨날 말씀 생각하면서 ‘내가 미쳤어. 내가 말씀도 못 지켜.’ 맨날 회개라.

그게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미 구원받은 징조가 돼요. 벌써 이거 들으면 헷갈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말씀 잘 지켜야 하는 것이 징조기 때문에 구원받았다. 이건 아니에요. 이렇게 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런 징조가 나오는 겁니다. 차이점이 뭐냐 하면은, 이쪽 가짜는 초조하고. 진짜는 느긋하고. 느긋한 게 뭐냐 하면 결국은 성령의 응답을 받고, 바보같이 죄에 대해서 또 생각했네. 죄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아야 되는데. 왜냐하면 선악 따먹은 차원이 아니고 창조한 차원이기 때문에. 그때는 선악 따먹기 전이잖아요.

그러면 거기에는 뭐도 없어요? 거기는 선도 없고 악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 상태에 놓인 신분이 우리라 이 말이죠. 근데 우리는 그것이 십자가 공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그냥 알면 안 되고 반드시 경유를 해야 돼요. 제가 대전강의 했는데, 혹시 들으셨습니까? 대전강의에서 첫 번째 시간인지 두 번째 시간인지 잘 모르겠는데, 요르단 수단 암만에서 모래병 예술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두 번째 강의에서 예로 했죠.

병이 있는데, 말이 예술가죠. 그냥 기능인이죠. 모래를 색깔로 해놓고, 모래를 차곡차곡 쌓는 거예요. 검은 색깔 중간에 딱 해놓고 이래 하면 낙타모양이 나오는 거예요. 투명한 병이니까, 낙타가 나오니까, 노란색 색깔모래가 들어가서 노란색위에 낙타가 보이니까 돈 주고 파는 겁니다. 그럼 이건 뭐냐 하면 들어간 경과가 그대로 노출되는 거죠. 우리는 선악을 노출하는 것을 느긋하게 만끽하면서 보는 그 즐거움이 성도의 즐거움이에요. 성도의 즐거움입니다.

더 이상 선과 악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음을, 주의 성령의 응답으로서, 기도의 응답으로서 만끽하는 거예요. 그러나 만끽하기까지의 그 경과는 어떻습니까? 아유, 내가 성경을 안 봐가지고 서울에 있는 애 일이 다 꼬이겠다. 애 시험 치는데 내가 너무 말씀에 관심이 없어가지고 또 벌줘가지고 내 애가 아는 것도 또 틀리면 안 되는데. 이런 생각이 들 수가 있어요. 들 수가 있다고요. 인수인계한다고 참석도 못하고. 들 수 있어요. 누구나 들 수 있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아담의 뭘 주시합니까? 아까 했잖아요. 뭐가 나와요? 행위가 나오죠. 행함은 특징이 뭐다? 반복적이다. 은혜 받고 돌아서서 또 그 생각. 또.. 또.. 그 반복 자체가 반복될 때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도록 징후로서 작용한다 이 말입니다. 제가 문제 하나 낼게요. 시간도 다 돼 가는데, 더 해봐야 감당도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내일 일을 알 필요가 없다. 보통 기독교 계통에서, 노래도 이런 노래가 있죠.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이런 노래도 있죠. 하루하루 살아요. 그런 것 있죠.

내일 일을 알 필요가 없다. 이 말과 내일 일도 알 필요가 없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1.내일 일을 알 필요가 없다. 2.내일 일도 알 필요가 없다. 어느 쪽입니까? 1번이에요? 2번이에요? 2번입니다. 내일 일도 알 필요도 없어요. ‘~도’라는 말은 뭐냐, 내일이든 모레든 이미 합류해서 이미 나는 누구 안에 있다? 이미 예수 안에 있는 거예요. 세트가, 무대세트가 첫 번째 세트가 아니고 이미 두 번째 세트.

내 시공간이 아니고, 주님 위주로 짜여있는 시공간에, 예수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겁니다. 그럼 그걸 어떻게 아느냐, 반복적인 실패를 해줘야 하는 거예요. 매일같이 실패하는 거예요. 실패할 때 슬퍼서 우리는 웁니다. 하지만 슬퍼서 울면 안 돼요. 응답은 뭐로 끝나야 돼요? 흑흑흑흐히힉힉... 하다가 울면서 자기 머리를 쥐어박아야 돼요. 도대체 내가 왜 울지? 운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살고 싶다는 표현이거든요. 그냥 살고 싶은 게 아니라 잘 살고 싶다.

그러나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성도의 기쁨은 뭡니까? 죽을 때, 그동안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로 죽을 수 있는, 아휴! 이제 종을 놓아주시는군요! 라고 하는 것처럼. 감사로, 죽을 때 시원하게 죽을 수 있는 게 성도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왜? 이런 반복성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이거 윤횐가? 해탈인가요? 그것은 성령의 몫입니다. 성령의 몫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했던 시공간에 부합된 일들의 결과물 속에, 결과 상태 안에 우리를 이미 성령께서 초청한 겁니다. 초대한 거죠.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도가 출생의 근원이 있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세상 무대가 아니고 그 무대 뒤로 초대받았다고 했죠. 그러면 그 뒤에 보면 연극배우들의 분장실이죠. 아, 분장을 이렇게 해가지고, 이렇게 해가지고 무대에 섰구나! 인생을 다 끝내고, 인생을 다 끝내게 되면 우리는 이 땅에 내가 살 이유는 애초부터 성사되지 않았다. 애초부터 우리는 죽은 자니까.

아까 언약 앞에서 우리는 죽은 자라고 했죠. 진즉에 죽은 자인데 왜 죽은 자를 버렸는가? 왜 갖고 노셨는가? 그것은 우리의 구원이 아니고, 누굴 위해서? 언약의 주가 되시는, 주께서 언약을 다 이루어내셨다는 것을, 제가 징조라고 했지만, 그걸 증거 하기 위해서, 성령이 임하면 주를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살게 하시는 겁니다.

자, 다시 한 번 35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깨어있으라” 자, 깨어있으라는 말은 정리하게 되면 주님의 변화에 감각이 있는 사람. 주인의 변화에 감각이 있는 사람. 주님은 지금 철수하고 있어요. 그 철수에 같이 감각을 가지고, “주님이여, 저도 철수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갖고 가는 사람. 물론 그게 성령에 의해서 되는 거예요. 예수 안에는 성령이 몽땅 하기 때문에, 같이 움직이면 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그 무대에서 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는 무대를 못 벗어나요. 성령 안, 십자가 안, 예수 안이라는 무대를 못 벗어나기 때문에. 주께서 조치하고, 주께서 이렇게 배정한, 그리고 설정한 상황이 지금 이 상황이에요.

대전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우리가 보는 지금 모습이 마지막 모습이라고. 우리 인생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일종의 노을..., 제가 여기서 이렇게 보니까 지금 꼭 증명사진 같아요. 한번 찍어볼까요? 찰칵! 독립투사마치고 난 뒤에 찍어놓으면 나중에 암살이라는 영화에 흑백으로 안 나오겠습니까? 암살이라는 영화에 보면 상하이에서 독립투사들이 포즈잡고 찍은 거 있잖아요. 그거 같아요. 의자에 따로 앉아서.

지금 매일 매일의 이 순간은 내일 일도 알 필요가 없어요. 왜? 내가 나에 대해서 알 필요도 없습니다. 아는 순간 내 판단이 나서기 때문에 안 돼요. 이미 판단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이미 주께서 구원했어요. 구원했으면 내가 나를 판단하지 마세요. 하지만 판단하지 마세요, 라는 명령어를 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울면서 판단하는 그 고된 것을 경유해야 해요. 유리병처럼. 경유해놓고, 성령의 깨우침이 있으면, 또 마귀한테 속아 넘어갔구나! 내가 나를 평가할 가치도 없고, 결국 내가 평가한다는 것은 항상 그 배경이 뭡니까? 이런 식으로 복 받아서 나는 살아야지. ‘살아야지’가 항상 배경에 있어요. ‘살아야지’가.

누구하고 이렇게 이야기할 때, 주관적으로 그냥 이야기할 때, 항상 ‘살아야지’가 나와요. 온갖 소리를 해도, 은혜 받았다고 해도 나는 살아야지. 이게 딱 나와요. 그러나 내가 말해서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하시게 되면 오늘도 누구한테 복음 자랑하다가, 복음 자랑하는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한 거예요.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우리는 모든 일에 허무하죠.

따라서 결론은 뭐냐, 내 하는 행동에 의미를 두지마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 주께서 성령 받은 자에게 주를 증거 하게 해서, 주께서 설치해놓은 환경 속에 우리가 또 사로잡혔습니다. 그 가운데서 세상 죄 짓는 모습을, 또 다시 보여주는 우리의 자신을 발견합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지, 라고 하는 이 본능, 반복적으로 터져 나오는 이 죄, 그러나 이미 그 죄를 처리했다는 그 사실을 이제는 느긋하게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광주강의20190531b 마가복음13장 28-37절(상호주관성)-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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