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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1 11:53:15 조회 : 100         
195강-창 50장 1-3절(야곱의 장례)190710-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61.37.238.179)
195강-창 50장 1-3절(야곱의 장례)1907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50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79페이지입니다.

창세기 50:1-3

“요셉이 아비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그 수종 의사에게 명하여 향 재료로 아비의 몸에 넣게 하매 의사가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사십일이 걸렸으니 향 재료를 넣는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창세기 50장 1절부터 14절까지는 죽은 야곱의 장례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보통 이 세상에서 장례라 하는 것은 한 인간의 끝이라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장례에 들어가는 비용이라든지 그 화려함은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인물에 대해서 최소한의 성의를 표시하는 것으로 보통은 그렇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50장에 나오는, 방금 읽었던 본문에 보면 요셉이 아버지를 애굽식 장례, 곧 미이라를 만들도록 지시를 하는 겁니다. 미이라라고 하는 것은 인간사회에서 죽은 자에 대해서 가장 크게 예우를 한 사례입니다. 그것이 애굽의 미이라 만들기지요. 죽은 사람을 산 사람처럼 간주해서 나중에 미래까지 연결되도록 하는 것, 애굽나라의 그러한 이론에 의해서 시체를 처리합니다.

뇌는 콧구멍을 통해서 다 긁어내고 그 빈곳에 방부제에 해당되는 몰약과 향을 거기에 채웁니다. 옆구리를 찔러서 내장을 다 끄집어내고 향 재료를 집어넣고 천연적인 탄산소다를 처리합니다. 그 다음에 그것이 끝나고 난 뒤에 진액으로 온 몸을 바르고 세마포로 싸고 입관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며칠 걸리느냐? 40일 걸린다고 되어 있어요.

뜨거운 사막에서 시체를 잘 보관해 놓는 겁니다. 뜨거운 사막에서 시신이 부패되지 않도록 잘 보관해 놓았다가 나중에 영혼이 다시 그 육신을 찾으러 올 때 가뿐하게 그 형태, 형상을 다시 한 번 재활용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 애굽나라의 풍습이었지요.

그런데 요셉의 아버지 야곱에게 국장에 해당되는, 나라의 임금이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주 성대한 장례를 치르는 이유가 야곱 때문일까요, 아니면 요셉의 권세 때문일까요? 이것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것은, 야곱이 잘나서가 아니라 요셉의 그 당시의 위상을 말해주는 겁니다. 실질적인 통치자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서 애굽의 모든 백성들도 자기에게 큰 혜택을 입힌 현재의 지혜로운 통치자 요셉에 대한 극진한 대우로서 요셉의 아버지에게 그러한 호사스러운 장례를 치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장례를 치른 야곱의 묘지가 어디 있느냐? 그 묘지가 애굽나라에는 없습니다. 13절에 보면, 장례를 치르는데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소유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약 500킬로미터쯤 됩니다. 500킬로미터의 장례행렬을 보이면서 요셉의 아버지를 막벨라굴에 묻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에 보내면서 마지막 대목이, 야곱이 자기 조상 아브라함이 산 매장지에 묻히는 것으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마무리되는가? 이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시편 105편 17절부터 보게 되면,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여기 한 사람은 요셉을 말하고, 18절에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이렇게 요셉이 애굽나라에서 종으로 팔리면서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가 19절에 나옵니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필히 그런 코스를 밟아야 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여호와의 말씀이 응했다는 그 지점이 어디냐? 그 지점이 아버지 야곱을 조상 아브라함의 막벨라굴에 들어가게 하는 데까지 필요한 모든 권세와 여력을 요셉을 통해서 실시하도록 하는 그 힘, 그 작용이 요셉을 애굽에 앞서 보내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입니다. 말씀의 적용이기도 하고요.

시편 105편에서는 말씀으로 되어 있는데 창세기에서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약속이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약속의 그 성취성은 뭐냐 하면, 이 땅에서의 지정된 자리에 묻는 것,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완성으로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특수한 죽음, 그냥 죽음이 아니고 특수한 죽음, 언약이 아니면 그 코스를 밟을 수 없는 죽음, 말씀대로 응했다는 코스가 좍 깔리고 그래서 그것이 과연 말씀대로 되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죽음, 그 죽음이 언약적 죽음입니다.

야곱언약을 받았던 야곱은 그 언약적 죽음을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그냥 죽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제대로 잘 시행되었다는 점을 최종적으로 잘 보여주는 죽음입니다. 이것은, 애굽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으면 잘 먹고 잘사는 것으로 그것을 최종성이라고 보는데 야곱에게 준 하나님의 언약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특이한, 특수한 무덤에 집결되고 집합하는 것으로 모든 말씀이 완성을 보인다는 거예요.

살고자 하는 그러한 분위기로 넘실대는 이 세상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죽는 그 자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의 최종상태를 말합니다. 그게 말씀이 응할 때에요. 요셉이 아닙니다. 아버지 야곱이 받은 언약은 결국 아버지의 몫으로 최종적인 모습이 드러나야 돼요.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 과정에 있어서는 아들 요셉이 많은 고난, 고생을 했지만 그 고난과 고생의 결과로서 마지막 최종을 자기 몸에 담는 것은 죽은 야곱입니다. 죽은 야곱이 죽은 채로 움직인다는 것은, 말씀이 이 땅에서 적용하는 방식은 죽음이라는 형식으로 작용하고 활동하고 있다는 거예요.

모든 사람이 살고 싶어서 환장했거든요. 모든 사람이 아침에 눈 뜨면서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살까, 에 전부 다 몰두하고 있습니다. 애굽사람들이 요셉에 대해서 그렇게 칭송하고 존경하는 이유는, 미리 7년 흉년을 대비해서 큰 창고 지어놓고, 곡식 쟁이고, 주변 나라의 모든 돈까지 다 끌어 모아서 국가재정이 넉넉하게 되어서, 죽을 뻔한 그들을 갑자기 선진국, 최고국가로 올려 세운 것에 대해서 고마워서 지금 요셉을 높이고, 덩달아 그 권세에 의해서 요셉의 아버지 야곱의 장례도 국장으로 지낸 거예요. 다 요셉이 고마워서 된 일입니다.

애굽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잘 먹고 잘 사는 이것이 보이지 않는 신의 우리에게 대한 축복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그게 끝입니까? 창세기 50장에서 야곱의 이 장례이야기는, 바로 거기서 탈출하라는 겁니다. 요셉의 혜택에서 탈출하여 죽은 야곱을 따라가야 된다는 거지요.

성도가 성도답게 신앙생활 한다는 것, 지금 요셉의 형제들, 야곱의 식구들은 죽은 야곱을 운구하는 그것이 바로 영생의 길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완성에 참여 한 바 된 모양새입니다. 그것이 오늘날도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오늘날도 유효하게 적용돼요. 신약성경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편지 한 구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로마서 6장 3, 4절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문제는 이 말씀을 보는 사람들이 전부 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살 수 있는가? 우리가 무슨 짓을 해야 이 본문말씀에 합치되고 부합되는 삶이 되느냐?’에 대해서 사람들이 굉장히 난감해해요. 난감해 하고, 곤란해 하고, 황당해 하는 겁니다. 방금 읽은 로마서 6장 3절에서 4절까지를 보게 되면, 분명히 성도란 어떤 존재냐에 대해서 규정되어 있거든요.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문제는 이거예요. 어떻게? how? 어떻게? 무슨 수로? 교회 나와서 열심히 한다고, 봉사한다고 될 문제입니까? 기도한다고 될 문제에요? 먼 나라에 선교사로 나간다고 될 문제입니까? 신학교 간다고 이게 가능한 문제에요? 철야한다고 될 문제 아니거든요. 난감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성경은 표준적인 성도의 모델에 대해서 언급을 했고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 동떨어져요. 남의 이야기 같아요. 우리의 삶과 너무 괴리되어 있어요. 정답은 나와 있지만 정답을 찾아갈 수 있는 방도가 없네. 곤란한 거예요 지금. 그래서 2천년동안 교회가 전부 다 이 본문에 대해서 쉬쉬하고 있는 겁니다. 쉬쉬! 질문도 하지 말라. 답변도 못하니까 아예 질문도 하지 말라. 질문할까봐 굉장히 조바심을 내고 있어요. 성경 좀 안다는 사람들이.

“목사님, 로마서 6장에요. 성도라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새 생명으로 사는 것인데 그렇게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주세요.”라고 교인들은 친절하고 겸손하게 목사한테 이야기하지만 목사는 “바쁩니다.” 모른다는 소리는 안하고, 자신이 불신자라는 상황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인 것을 들킬까봐 벌벌 떨면서.

불신자니까 목사를 하는 거예요. 신자 같으면 목사를 안 합니다. 왜? 목사를 해서 실익이 없기 때문에. 예수 믿어 용서 얻으면 되었지 목사를 왜 해야 돼요? 믿음이 없으니까 목사라도 해야 신자라고 티가 나서 남들이 알아주지 않겠느냐 하는 그런 심보로 신학교 간 간 거예요. 믿음이 없으니까, 믿음이 워낙 없으니까 안 들키기 위해서 간 거예요.

목사 엄마는 아들 신학교에 바쳤다고 복이라도 올 것처럼 감사하지만 신학생과 목사들은 자기 불신자인 것을 감추는 노하우로 40년, 50년 목회하고 있는 거예요. 전부 다 구라입니다. 거짓말이에요. 왜? 자기는 성경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이 없거든요. 이유가 뭐냐? 요셉을 포기하고 야곱쪽 을 따라가야 되는데 요셉을 포기할 수가 없는 겁니다.

요셉은 지금 애굽에서 인기가 대단해요. 요셉이 된다는 것은 사는데 유리하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야곱이 된다는 것은 사람에게 잊혀진 바 되는 겁니다. 끝나버린 거예요. 죽었으니까. 그러나 주의 일은 뭐냐? 로마서 6장의 일은 뭐냐 하면, 죽어야 본격적으로 주의 일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로마서 6장에 사람들이 접근 못하는 이유는 뭐냐?

지금 내가 살아 있는데 로마서 6장에서는, 네가 죽어야 된다고 이야기하니까 무슨 수로 살아 있는 내가 죽을 수 있습니까? 누구처럼 자살할까요? 자살할 문제가 아니거든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죽음이라는 것은 언약적완성에 의해서 죽어야 되지 자기가 알아서 자기 목을 매 죽는 이것은 언약적이 아니고 자기 뜻이기 때문에 이것은 해 봐야, 자살해도 소용없어요.

야곱의 이름을 보세요. 야곱의 이름이 야곱으로서는 죽은 것이 맞아요. 하지만 야곱으로는 죽었다는 사실은 지금 죽은 것이 아니에요. 야곱은 언제 죽었느냐 하면, 하나님이 야곱을 만날 때 창세기 32장,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만날 때 이미 야곱은 죽었어요. 애굽사람들은 야곱의 장례를 치르면서 그날에 야곱이 죽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성경에 이렇게 어려운 데가 또 있어요. 네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거든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는 그 날 저녁에 안 죽었습니다. 아침에 멀쩡하게 살아났어요. 계속 살아서 애까지 낳았다니까요. 가인과 아벨을. 안 죽었다는 이야기에요. 하나님이 구라인가요? 하나님께서 실없는 소리 하신 겁니까?

‘에이, 하나님 말씀에 너무 쫄지 말자.’ 하나님 말씀을 어기기 전까지는 진짜 말씀 그대로 되는지 알고 쫄았지요. 벌벌 떨었지요. 어겨보니 어? 아무 일도 안 일어나거든요. 목사들이 십일조 안하면 망한다고 그렇게 친구 목사 불러다가 강대상에서, 십일조 안 해서 저주받은 사례를 죽 들면서 십일조를 강조했으니 사람들은 쫄아서 십일조 계산한다고 바쁘지요.

사람들이 다 세무서직원처럼 되었어요. 내 수입이 얼마인지, 전세 떼고 십일조인지, 온통 정신이 바빠요. 그런데 한 두 사람이 십일조를 안 해보니 으음? 아무 일이 없네. 오히려 수입이 늘어나요. 그리고 십일조 꼬박꼬박 하는 사람, 아프기만 잘하고, 사업은 사업대로 안 되고. 십일조 하면 창고에 넘치게 복 준다고 말라기에 약속했는데 십일조 안 해서 오히려 더 잘되었어요. 십일조 안한 그 돈 가지고 투기해서 30배, 100백 남겼거든요.

십일조 해서 부자 된 사람보다 십일조 안 해서 부자 된 사람이 더 많아요. 금지한다는 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소망을 유발합니다. ‘나는 소망한다. 금지된 것을.’ 어느 여류작가의 소설 제목이기도하지만. ‘나는 소망한다. 금지된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 있다고 한다는 것, 사실은 하나님 말씀을 어길 수 없어요.

그런데 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했기 때문에 자기가 잘못 생각해서 선을 그은 거예요. 이것 지키면 지킨 것, 이것 어기면 어긴 것, 자기가 자기 맘대로 생각한 겁니다. 자기가 자기 맘대로. 하나님은 말씀을 주면서 우리하고, 인간하고 상대 안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을 주면서 우리하고 상대한다고 여기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볼까? 어겨볼까?’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가 없는 입장에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하고 상대 안하기 때문에. 학교 선생님이 중학교 학생하고 같이 놀겠어요? 학교 선생님 꿀밤주면 2만원 준다. 실제 그런 사건도 있었던 모양인데, 그런다고 2만원 내기 하면서 선생님이 일부러 맞아주고 그런 식으로 합니까? 노는 레벨이 아니잖아요. 노는 상대자가 아니잖아요.

말씀을 주신 것은 인간이 쫄았든 안 쫄았든간에 마음껏 위반해도 그 위반자체가 하나님의 성취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그것이 하나님의 성취의 과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선악과가 완성이 돼요.

하나님의 일은 인간을 산 사람으로 여길 때 절대로 그 말씀을 지킬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산 사람들이 더 애굽사람처럼 행복하고 풍족하게 살기 위해서 하나님 말씀을 이용한다면 그 인간은 그런 생각, 발상자체가 그 말씀을 이미 위반한 것이 되어버려요.

하나님의 언약은 살아서는 못 지킵니다. 죽어서 지켜요.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 만날 때 이미 죽었습니다. 죽고 난 뒤에 이스라엘이 되었거든요. 이름이 바뀌었다는 말은, 이미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거예요. 전에 있던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미 죽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이미 죽고, 죽은 자에 대해서 하나님의 일이 새롭게 출발하고 개시되었다는 증거가 뭐냐?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서 제일 흔한 이름이 무슨 이름이냐? 여러분이 혹시 들어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도 동사무소나 구청에 가면 흔하디흔한 이름이 많이 나와요. 그 한국 이름이 세자인데 홍길동입니다. 홍길동. 지나 개나 홍길동이 모델이에요. 홍길동은 이미 죽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나라에서는 그 홍길동을 모델화시켜서 홍길동이라 써놓고, 여권이나 서류에 적을 때 그렇게 적으라고 안내하는 거예요.

언약이 살아 있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 만나기 전에 인간들이 살아 있다는 식으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 안에서 살아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언약은 산 사람한테는 도저히 자기 행함으로 어떻게 접근할 수 없는 다른 포지션, 다른 언약적포지션을 가지고 살아 있어요. 그게 뭐냐? 죽은 자로서 살아 있을 때 그게 언약완성상태입니다. 죽은 자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 죽은 자가 뭐냐? 이스라엘이거든요. 야곱이 죽었다 하지만 야곱이 죽어서 뭐가 되느냐? 야곱은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탈출이 된 거예요. 야곱은 죽은 것이 맞지만 이스라엘로 살아 있는 거예요. 그러면 야곱의 열 두 아들이 이스라엘로 국가가 된다면 그리고 되기 전이라도 이미 죽은 야곱과 더불어 함께 있으면 그 이스라엘 속에 야곱의 언약완성, 다시 말해서 말씀 완성, 죽은 야곱이 그들 안에 살아 있는 겁니다. 마치 문신처럼.

문신이 지워집니까? 목욕 한 번 갖다 왔다가 문신이 지워지면 그것은 제대로 된 문신이 아니고 매직으로 그린 거지요. 문신은 안 지워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각자의 마음속에 죽은 야곱을 다 집어넣어버려요. 제가 죽은 야곱이라 했지만 그것을 달리 이야기하면 이스라엘을 집어넣는 거예요.

그 방식이 뭐냐 하면, 그들은 애굽을 버려야 되고 그리고 야곱의 시신을 함께 운구해야 되는 겁니다. 따라가야 돼요. 야곱의 죽음과 함께. 마음이 살아 있는 나에게 있지 않고 우리가 있게 된 그 원인, 나의 본래의 자리죠, ‘현재 내가 살아 있다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내가 살아야 돼?’라는 것에 결부된 것, 연관성 있는 그 자리, 그 자리는 이 눈에 보이는 애굽 땅, 이 세상에는 빈 무덤이 되는 겁니다.

죽었는데 죽은 시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지금 야곱이 그것을 언약의 완성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로 보여주는 겁니다. 애굽나라의 야곱의 무덤은 어디 있습니까? 물으면 정답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셨는데 예수님의 시신은 어디 있습니까? 이 땅에 없습니다. 바로 그 없는 쪽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완성의 힘이 그 없는 쪽에서 나오는 거예요.

어떤 힘이냐? 애굽을 포기하고, 애굽을 좋아하지 않고, 애굽에 미련두지 않고 다른 쪽으로 끌려가는 영혼, 마음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거예요. 허락하시면서 왜 우리는 애굽에 미련이 없느냐 하면, 야곱이 애굽 땅에 무덤을 두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자동적으로 애굽나라에 속한 전부가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언약 밖, 다른 말로 하면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로마서 6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3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완성의 모습이 뭐냐? 죽음이었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이 죽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은, 이 땅의 어떤 인간도 죽음에서 다시 살 수 없다. 더 간단히 말해서 이 세상 어떤 인간도, 예수님 빼놓고 어떤 인간도 살 수 없다. 살 수 없는 인간들이에요. 살 수 없다는 것을 세자로 줄이면, ‘죽었다’가 돼요. 이 세상 모든 인간, 걸어 다니고, 뛰어다니고, 축구하고, 야구해도 그것은 죽은 거예요. 죽은 겁니다.

미국 야구 올스타전, 죽은 자의 올스타전이에요. 선발투수 류 현진. 죽은 다음에 선발투수로 나서는 거예요. 그리고 공 하나 던질 때마다 그게 죽어야 될 이유를 담아서 공을 던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2장에서 선악을 알게 되면 죽는다 했어요. 하나님은 그 말씀을, 인간은 못 지켜도 하나님은 지켜내는 거예요. 선악을 안다는 이유 때문에 죽이는 겁니다. 아니 선악을 안다는 그 자체가 이미 죽은 거예요.

내가, 왜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서 포기해야 되느냐 하면, 이 세상은 선과 악에 대해서 예민하고 민감해요. 행동을 하나 해놓고 항상 되돌아오면서, 내가 잘했는가, 못했는가를 평가합니다. 그게 우리가 죽었다는 증거예요. 하나님 약속에 의하면. 하나님 약속은 약속대로 양보가 없잖아요. 하나님 약속대로 선악을 아는 것이 우리의 죽음이라면 우리는 그 죽은 티를 유감없이 매일 같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남에게 욕 얻어먹지 않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 자체가 죽은 거예요. 이 세상에서는 내가 착하면 착한 만큼 하늘의 신이 나에게 보상을 해 준다 여깁니다. 착한 만큼. 그게 바로 죽은 거예요. 우리 청소년들 앞으로 결혼하고 싶어 할 것인데 결혼할 상대자가 누구였으면 좋겠느냐고 물으면 입 다물고 있겠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정해져 있어요.

좀 착했으면 좋겠습니다. 자기는 안착해도. 여자는 착한 남자. 교회 오빠 같은 것. 그리고 남자는 착한 여자. 내가 하는 말대로 순종 잘 하는 착한 여자 원할 겁니다. 그런데 <교회 오빠> 영화에 보면 교회에서 사귄 오빠 39세에 죽어버렸는데요? 그런 영화가 있어요. 착한 사람을 찾는다는 자체가, 그런 것을 갈구하고 기대하고 소망한다는 자체가, 이미 내가 이 땅에 미련 두고 있고 이 땅에서 애굽사람처럼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 있는, 이미 죽은 자에요.

사는 것이 목적이 되어 있기 때문에 로마서 6장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림도 없습니다. 어떤 짓거리를 해도 사는 인간 더 살아보자는 식으로 나가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로마서 6장에 규정되어 있는 성도의 삶에 참여될 수 없고 합치될 수 없어요. 살겠다는 것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방식은 어떤 방식이냐 하면, 죽은 자로 하여금 일하게 하는 방식에요. 하나님과 함께 있는 특징이 뭐냐 하면, 네가 일하는 것이 아니고, 문신처럼 네 안에 이미 계시고 이 땅으로부터 쫓겨나서 죽어버린 그분이 우리 안에서 일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 일은 뭐냐? 두자로 해서 ‘탈출’이에요. 이 땅에서의 탈출. 애굽에서의 탈출입니다. 벗어나는 것, 그게 아까 말한 말씀이 응하는 거예요.

벗어날 때 그냥 생생하게 못 벗어나요. 이 땅의 사람들 입장에서 죽은 자가 되어야 벗어나는 겁니다. 가인에게 있어서 아벨이 영생 얻은 사람처럼. 그러면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영, 성령이지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를 꾀더냐, 하셨는데요. 갈라디아서 3장 1절입니다.

그 십자가의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뭘 하게 되느냐 하면, 완성이라는 것이 우리 속에 쏙 들어와요. 우리 내부에 완성, 언약완성이 들어와 버린다고요. 언약완성이 들어오는 순간, 성령 받은 그 순간 이미 우리는 이 땅의 사람에게는 죽은 자가 되고 주님한테는 산자가 되는 겁니다. 이 땅에 있으면 죽은 자기 때문에 살아 있는 이 몸으로 못할 것이 아무것도 없지요.

왜? 더 이상 이 세상 사람들 죽게 만든 선과 악이라는 그 기준에 저촉을 받지 않기 때문에, 그 기준으로서 평가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안목에, 나 자신의 선악이라는 안목에서 구애받을 필요가 없어요. 주님 죽은 십자가를 모신다는 것은,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십자가를 붙들고 간다는 것은 예수님을 운구하는 중이에요.

성령이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십자가를 줘버리면 예수님의 죽으심을 우리가 짊어지게 되는 겁니다.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니고요.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운구지요, 운구. 아직 운구 안 해봤지요? 아버지 어머니가 아직 젊으시니 운구 안 해봤겠지요.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이미 죽으신 분의 운구꾼으로, 주님의 장례를 기념하기 위해서 주님 죽으심에, 십자가에 들어붙어 있는 것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게 내 일이 아니고 누구 일이다? 문신처럼 박혀 있는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자기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우리의 몸을 죽은 몸으로 간주하시면서 드러내는 거예요.

우리 몸을 살아 있는 몸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고. 남들 보기에는 분명히 살아 있어요. 살아 있으니까 설교하는 것 아닙니까? 설교하고, 강의하고, 하잖아요. 하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살아 있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계시는 주님이 내 몸을 죽은 몸으로 간주하는 조건하에 내미는 거예요. 그러면 내 몸이 죽은 것을 어떻게 아느냐?

그것은 제가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설교해놓고, ‘설교한 그것이 착한 것이더냐? 아니면 악했느냐?’ 그걸 내가 따질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다니까요? 부모가 되어서 애 둘을 키우는데 부모가 맨 날 생각하는 것이 ‘우리 둘이 애를 잘 키웠을까, 못 키웠을까?’ 그런 생각은 하시면 안 됩니다. 죽은 자가 무슨 애를 키웁니까?

5월 7일 저녁 때 쯤 카네이션 하나 사서 5월 8일 아침에 “아버지, 어머니! 저 키우신다고 애 쓰셨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얘야, 나는 너를 키운 적이 없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주님이시라. 내가 너를 키운 적이 없다.” “에이, 말로는 뭐 들은 구석이 있어서 교회 나갔다고 지금 티내십니까? 진심은 우리 키운다고 신경 썼잖아요.”

“아니. 정말 너희를 키우면 키울수록, 너희를 대하면 대할수록, ‘내가 잘했을까, 못했을까, 그 생각이 든다는 것 자체가 내가 죽은 자 맞구나.’ 너희들이 없었으면 내가 죽은 자인 것을 몰랐는데 너희들 키우면서 ‘내가 선악과 따먹고 죽은 족속이 맞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죽었는데 왜 우리가 이렇게 컸어요?” “그것은 내가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일을 하신 것이다.”

죽은 자가 살아 있다고 우기는, 오해한 우리 몸을 통해서 진정, 진짜로 제대로 주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줄 때 이것이 바로 로마서 6장에서 말하는 성도의 모델입니다. 성도의 기준이에요. 어떻게, 인간의 행함으로서 그 기준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오시게 되면 이제는 선과 악에 구애받지 말고 벗어나라.

선과 악, 악하기 때문에 벌 받고, 선하기 때문에 복 받는다는 그 악마의 소리에 더 이상 긴장하거나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잘 먹고 살사는 이것이 올무기 때문에, 이 땅에서 떠날 생각을 전혀 못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악마의 유혹이고 악마가 준 족쇄입니다. 뭐든지 잘 되고, 잘 먹고, 부자 되는 것.

그런데, 착하고 바르게 살았는데 모든 일이 안 된다. 미련 둔 내가, 세상에 대서 뭔가 착하게 해서 복 받는다고 미련 둔 내가 미련곰탱이가 되는 거예요. 내가 큰 실수를 한 거예요. 뭔가 세상을 잘못 본 거예요. 언약적으로 보지 않았어요. 언약완성적으로 보지 않았어요. 꼭 내 일을 내가 하려고 설치는 거예요.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려고 하는 거예요.

좋은 대학 가니 뭐합니까? 좋은 대학 가서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뭐. 그리고 장가가니 뭐합니까? 좋은 여자 만나서 장가갔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한우 값 비싼데. 이 땅의 애굽 사람들에게는 아주 거창한 장례식, 대단한 장례식으로 성의를 표했지만 그 성의는 발목 잡는 성의에요. 가야 될 곳은 애굽 땅에서 무덤 마련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가야 될 곳은 이 땅이 아니고 따로 있다.

내 무덤은 이 곳에 두지 않겠다. 죽은 내 몸이 묻힐 무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죽는데 그 죽음이 예수 안에서 생명이라는 거예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이유 때문에 네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게 바로 로마서 6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 대해서 너무 많은 애착과 미련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 원인이 우리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남들 보기에 내가 인정받는 사람인지 존경받는 사람인지 너무 예민했습니다. 주여,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응하여서 오직 그리스도만 드러내는, 예수님의 생명만 드러내는 종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95강-창 50장 1-3절(야곱의 장례)190710-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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