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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1 17:57:45 조회 : 61         
강남-요한복음 총정리(2)-요한복음 8장부터 (인간공간 하나님공간)191001a-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175.195.96.96)
강남-요한복음 총정리(2)-요한복음 8장부터 (인간공간 하나님공간)191001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을 다하고 다시 요한복음이 길기 때문에 계속 요약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시간에 요한복음 1장에서 6장까지 또는 7장 중간까지 했는가 제 기억으로는 그런데요. 오늘 7장 후반부부터 하겠습니다.


7장에 보게 되면 인간의 공간과 예수님의 공간이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간. 인간의 공간. 인간의 공간은 대표적으로 누가 보여주느냐 하면 바리새인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거는 바리새인들이 대표로 보여주죠. 그런 점에서 바리새인들이 고맙지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생각의 범위를 그들이 미리 앞서서 다 보여주니까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했지요. 바리새인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의 한계에, 한계선에 서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바리새인들이 7장 49절에서 이런 이야기해요.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들은 저주받은 자로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저주 받았다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을 그들은 지키지 않는다고 그렇게 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바리새인들의 그들의 극한, 그들의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하여 할 수 있는 그 목표는 뭐냐 하면 바로 ‘모세율법을 지키자’.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바운더리에요. 모세의 율법을 지키자. 모세의 율법을 지키자라는 그러한 의도 이게 인간이 만든 정신적인 공간이 되겠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지키자하는 것.


그러면 이 인간의 공간에는 누가 필히 생생하게 있어야 되느냐 하면은 인간이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뭐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인간+율법이 모세의 율법이 이렇게 이 두개가 인간의 공간을 형성하는 겁니다. 인간이 율법을 지키자라고 했을 때 이것은 율법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율법이 인간을 보고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지키면 복을 받고 안 지키면 저주 받는다 이렇게 되어있지요? 그러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 복 받은 상태에요? 저주 받은 상태 입니까? 아니면 중립적인 상태 입니까? 중립적인 상태겠지요.


지키면 복 오니까 안 지키면 저주받고. 저주에도 해당 안 되고 복에도 해당 안 되고. 지키기만 하면 복이 오게 되고 안 지키면 저주 받으니까 안 지켰다 하는 경우에는 회개 반성해가지고 다시 죄를 용서받고 복 쪽으로 가면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그러면 이것은 한마디로 뭐냐 하면 ‘조율’이라는 것. 본인의 운명에 대해서 누가 조율한다는 겁니까? 본인이 조율하는 거에요. 본인이. 징계받을지 또는 안 그러면 복을 받을지 자기 자신이 이렇게 조정을 하게 되기 때문에 조정을 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 실력을 발휘하는데 집중합니다. 자기 실력을 발휘하는데.


지금 내가 잘못되고 있다 싶으면 대번에 착한 일을 해가지고 다시 원위치로 돌아오면 되고 그렇게 해서 뭘 유지하느냐 하면은 조율해서 뭘 유지하느냐 하면은 자기 건전함을 도모하는 거에요. 자기 건전함을 도모하는 것.


율법을 지키는 이유는 최종적인 목표가 뭡니까? ‘나 건전하다. 나 괜찮다.’ 이렇게 되게 되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누가 누구를 조율해서? 내가 나를 조율해서 구원받지요? 그러면 내가 조율하는데 남이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지요.


내 운명 내 팔자는 누구 손에 달린 겁니까? 자기가 자기 실력 발휘에 어떻게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느냐에 따라 달린 거에요. 혹시 자기가 실수했으면 금방 반성하고 회개하면 되니까. 이걸 제가 오늘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던가요?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바운더리. 범위라고 했지요. 이걸 제가 인간의 공간이라고 한거에요. ‘인간의 공간’.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히 고맙지요?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가 이런 식으로 살거든요. 자기 조종하는거에요. 그런데 이렇게 하다 보니까 자기가 건전하단 말이에요. 이렇게 하다보니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 요한복음 7장 33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있다가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그다음에 7장 34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찾아도” 그 다음에 뭐에요? 나를 찾아도 그 다음에 뭡니까?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러니까 인간이 만든 공간은 어떤 노력을 해도 주님의 공간, 천국이죠. 하늘나라와 만납니까? 못 만납니까? 만날 수가 없는 거에요. 만날 수가 없어요. 만날 수가 없으니까 이것은 헛짓한 거에요. 전부다. 뭔가 건전하게 하긴 했는데 거룩하고 경건의 경건을 향하여 열심히 애를 썼는데 결과는 뭐냐 하면 만날 수가 없는 거에요.


왜냐 하면 주님이 만약에 저 호남선 대전에서 광주 쪽으로 호남선 열차를 타고 간다면 그들은 계속해서 노선이 뭐냐 하면 경부선 부산 가는 쪽인 거에요. 제가 여러번 하지만 갈 길이 달라요. 갈 길이 달라요. 가는 길이 달라요. 방향이 달랐어요. 바리새인하고 예수님 가는 길. 인간들이 가는 길하고 예수님 가는 길이 달라요.


그걸 제가 주일 낮 설교에서는 뭐냐 하면 천국의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다 했어요. 모성애??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착하고 성실하고 건강하고 이쁘고 굉장히 조심스럽고 그렇게 사는데 주님께서는 그런 조건을 일체 인정을 하지 않는다. 열심히 고3때 공부는 했는데 대학시험에 한 문제도 안 나왔어요. 공부한거는 한 문제도 안 나왔어요.


안 나온 것을 계속 30년 40년 교회 다니면서 열심히 한 거에요. 천국에서 요구하지도 않는데. 천국에서 요구하지도 않는 것을 인간들은 왜 하느냐? 인간들이 자기가 문제를 낸 거에요. 자기가. 자기가 어떻게 하면 좀 더 건전할까. 어떻게 하면 내가 좀 더 경건한 모습으로 내가 달라질까. 그렇게 되는 것은 무슨 여기에 뭐가 동원됐습니까?


자기 실력으로 할 수 있는 발휘할 수 있는 그 문제를 주께서 주셨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하늘나라에서 요구하는 것은 "보자 네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가 한번 보자." 이런 내용을 출제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의 실력을 한번 보자는 거에요. 네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살았고 정신 바짝 차리면서 살았느냐. 이렇게 본다는데 정신 차려도 안돼요. 정신 차려도 못 만나요. 만날 수가 없는데요.


두 친구가 대전에서 차를 탔는데 대전에 있을 때는 둘이 같이 가는 줄 알았죠. 기차가 동시에 들어와가지고 한쪽은 경부선 부산가는 기차타고 한쪽에는 광주 가는 노선을 탔으니까 이게 대전역에 보면 노선이 달라요. 철도. 다르다고요. 부산 가는 것은 12번이라고요. 제가 하도 많이 타서. 11번 12번 둘 중에 가거든요. 광주 가는 건 몇 번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간다 이 말이죠.


처음에는 친구하고 이렇게 있을 때는 기차가 처음 출발할 때는 그 기차도 와 있고 있으니까 눈보고 이야기가 되는데 이게 시간이 5분 10분 지나면 이미 갈 길이 다르기 때문에 안보여 서로가 서로가 보이지를 않아요. 길이 다르기 때문에. 가는 길이.


경부선 탄 사람은 지옥 가는 사람들은 열심히 기차 안에서 열심히 성경공부하고 뭐 기도도 하고 헌금도 하고 열심히 하고 있는데 여기 광주 천국 가는 사람은 내가 원한게 아닌데. 열차가 이상한 방향으로 가네. 자꾸 이상하데. 뭔가 낯설다는 거에요. 풍경이. 내가 예상하지 않은 풍경으로 가버려요. 낯선 풍경 즐기기에 바빠가지고 내가 지금 수준이 어디 있느냐 하면 돌볼 필요조차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님의 공간과 인간의 공간에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서 33절에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오지도 못한다라고 잠시 살짝 보여주고 떠나는 거지요. 살짝 보여주고 가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 예수님의 공간이 따로 있다라고 이야기 할 때 이 바리새인들이 인간의 공간에 속한 인간들은 뭐라고 이해를 했느냐? 이렇게 이해를 해요. 36절부터 유대인들이 서로 이야기하는데 저 사람이 우리가 만나지 못한다는데 ‘아 이방인들, 헬라인들 가는 곳에 가는 모양이다’.


유대인이지만 유대인 사회를 공동체를 떠나서 저 헬라인한테 가니까 우리 유대인들이 안가는 곳이니까 가서 못 만난다. 그렇게 그런 이야기하는구나 라고 이렇게 이해를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바리새인 공간, 인간의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보면 수직이 아니고 수평적이라고 볼 수 있지요.


여기 유대인 사회인데 유대인 사회를 떠나서 헬라인 사회로 예수님이 자기들 떠나서 갈 모양이다 이렇게 하니까 유대인 사회나 헬라인 사회나 사실 따지고 보면 같은 육지, 땅 아닙니까. 땅이니까 이거는 단절입니까? 아니면 연속성입니까?


단절이 아니고 연속성으로 보는 거에요. 자기도 조금 멀리 외곽으로 나오면 만날 수 있다 헬라인 사람들 만날 수 있으니까 멀리서 안 보인다 뿐이지 가기만 하면 만난다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수평적을 말하는게 아니고 못 만난다는 것은 뭘 의미하냐 하면 수평이 아니고 수직적이죠. 수직적.


이 수직적을 뭐라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초월이라고 하는거에요. ‘초월’. 주 예수님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초월된 존재죠. 그 초월된 존재에서 또 하나의 공간이 있으니까 이걸 초월로 가서 뭐냐 하면 일반화시켜요.


일반화 시킨 것을 더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또 초월이 되고 또 그것이 일반화가 되고 또 초월이 되고 일반화되고 이게 바로 성도의 가는 삶입니다. 성도가 처음에 성령 받아서 예수님을 알 때는 조금 알아놓고 나는 초월했다고 주장하거든요. 그런데 그 초월한 것을 일반화 딱 시켜버리니까 그 일반화된 그 보편화된 그것을 마치 다 알은 것처럼 여긴 거에요.


또 다시 새로운 예수 믿고 한 5년 뒤에 또 다른 비약 또 다른 초월을 줘버려요. “아 그런 뜻이었었어?! 야 이제야 나는 알았다.” 하고 다시 개마고원처럼 일반화되버리는 거에요. 초월해놓고 다시 평평하게 되고 또 초월해놓고 평평하게 되고. 에베소서 사도 바울이 방금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에베소서 3장에 보면 3장에 사도 바울이 기도를 해요.


기도하는 내용이 뭐냐 하면은 3장 17절에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방금 배웠으니까 바꾸겠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초월자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고. 초월자가 우리 마음에 계시니 우리는 누구의 공간입니까?


인간의 공간이 아니고 누구 공간이에요? 예수님의 공간이죠. 왜? 초월이니까. 우리가 만든게 아니고 주님이 와요. 우리 안에 들어와버렸으니까. 초월의 공간이죠. 초월의 공간이니까 끝이에요? 아니죠.


“너희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넓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쳐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다음에 19절에 “그 넓이와” 넓이, “길이와” 길이, “높이와” 벌써 3차원이죠. 깊이, 높이 위쪽과 아래쪽에 깊이. 이러한 그야말로 아까 제가 이야기한 공간이죠 ‘공간’.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기를 구하노라”. 기도한다 이 말이죠.


그럼 기도한다는 말은 공간에 구석구석 돌아보게 하옵소서에요. 구석구석 돌아보게 하옵소서. 나 구원받았다고 주장하지 말고 도대체 하나님께서 뭘 준비했는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구석구석 보는게 전부다 인간의 공간에 예상도 못한 것이기 때문에 낯선 풍경들이기 때문에 날이 가면 날이 갈수록 그 낯섦이 주는 기쁨같은 거에요. 아 이런 것이었었어?


그런 것을 늘 새롭게 깨달으면 뭐가 나오겠어요? 감사와 기쁨이 계속 나오겠지요. 아 공간이 이렇게 깊었어? 이렇게 넓었어? 이렇게 높았어? 이렇게 충만했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해가지고 여러분이 감을 못 느낄 거에요.


이게 어느 정도 좋은지 감을 못 느낄 거에요. 그걸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바로 우리의 인간의 공간과 대비를 시켜서 그걸 확 절감하도록 확 깊이 깨닫게 하는 건데 아까 인간의 공간에서는 제가 아까 강의의 초반에 벌써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의 공간은 뭐든지 자기의 건전함으로 돌아온다고 했지요? 자기 건전함을 도모하지요. 건전하기 위해서는 가만히 있으면 안되고 자기 실력을 발휘해야 되겠지요. 실력을 발휘할 때 자기 행동을 조율하는 겁니다.


이거 하면 나쁜 일, 이거 하면 좋은 일. 나쁘게 하면 저주 오고 아까 바리새인들 했지요. 좋은 일 하면 복 오고 나쁜 짓하면 징계 받을 각오하고 있고 이게 바로 인간의 공간이거든요. 인간의 공간이 우리 몸 자체가 인간에서 나온 육체로써 있는 이상은 거기에다가 주님의 공간이 같이 겹쳐졌으니까 이게 대비가 되는 거에요.


대비가 되면서 이 몸은 경부선 지옥 가는게 이 몸은 지옥 갈 몸을 가지고 지금 어디 가고 있다? 천국 가고 있으니까 왜 천국 가는 것이 내 아이디어에서는 예상하지 못할 것들만 주어지는지를 깨닫는거에요. 왜? 우리는 항상 나쁜 짓하면 벌 받는다는 것에 익숙해졌으니까.


그래서 벌 안 받기 위해서 내게 행운이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 굉장히 행동에 조심하겠지요? 스스로 자기를 늘 테스트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 테스트가 쓸모없는 거에요. 초월을 하고 나서 초월을 해놓고 이것을 일반화시키기 위해서는 여기에 인간의 공간에서 습득한 그게 그런 내용들이 여기에 포함이 되면서 주께서 이걸 충분히 이용하면서 초월을 일반화로 전환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쓰레기같은 우리 육체가 필요없는게 아니에요. 죽을 때까지 계속 질질 끌고 가야 되는 겁니다. 옛날에 유명한 서부극에 보면 장고라는 사람이 나타나요. 완전히 거지인지. 진짜 모자 다 떨어진 것 쓰고 수염 기르고 망토 이렇게 모자 탁 쓰니까 눈도 안보여. 코만 삐쭉 보이고 망토 이렇게 쓰고 멕시코 망토 쓰고 뒤에 뭘 끌고 가느냐 하면은요. 항상 특징이 뒤에 어떤 관을 끌고 와요 관을. 관을 질질 끌고 와요.


관이 우리의 육신입니다. 주께서는 이렇게 빰빰빠바밤~ 서부의 무법자 노래, 장고의 노래 이거 아니지만.. 이렇게 가면서 관을 끌고 온다고요. 이 관에 뭐가 있느냐 하면 기관총이 있어가지고 다 죽이는데. 이 관을 죽은 우리의 육신으로 봅시다. 이 육신에서 뭐가 나오겠어요?


아까 바리새인들이 하는 그 짓거리가 계속 나오겠지요? 바리새인들의 그 짓거리. 그런데 이것은 항상 뭐를 유발하느냐 하면 내가 벌 받으면 안되지. 우리 애도 있고 우리 가정도 있는데 잘 되야지. 이게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조종하면서 계속 조종함을 계속 유발시켜요. 불안불안한 거에요.


다시 말해서 뭐가 없느냐 하면 기쁨도 없고 그 다음에 감사도 없고 고마움도 없는 거에요. 어떤 내가 행동을 내 착한 행동을 발휘해서 어떤 결과, 실적 같은 것 그런 것들을 은근히 기대하면서 이걸 끌고 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초월을 일반화할 때 이걸 집어넣어버려요. 초월에다가 이걸 집어넣게 되게 되면 바로 이러한 의식 때문에 우리가 뭐가 되느냐 하면 아까 자기 건전함 쉽게 말해서 ‘자기 의’라고 할 수 있지요.


자기 건전함, 자기 의가 결국 뭘 하느냐 하면 기쁨과 감사를 이걸 훼손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건전함은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예상되는 결과를 원한다. 내가 이만큼 착하기 때문에 우리 가정에서 우리 집안에서 이 정도는 해야 되지 않습니까라고 예상되는 결과를 자꾸 추구하게 되지요.


예상되는 결과를 추구하니까 여기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초조함이 발생되지요. 그거 안 해주면 어떡하지. 그거 때문에 기도 벌써 한달째 빡씨게 기도하고 있는데. 수능은 50일 남았는데 50일 안 남았구나 내가 빡씨게 새벽 기도하는데 수능점수 많이 나와야 하는데 벌써 초조함이 나오겠지요.


초조함이 나온다는 것은 뭘 잃어 버렸어요? 기쁨과 감사 이것이 훼손되는 겁니다. 이게 가짜 기쁨 가짜 감사로 자꾸 가리워지는 거에요.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하겠어요? 바로 이것 자체에서 뭐가 일어납니까? 이것 자체에서 수직적인 초월을 가미해버리는 겁니다.


초월을 가미할 때 어떻게 하느냐? 초조함, 불안 이것을 주님께서 일부러 심화시킵니다. 그러면 이게 나중에 낭패가 되고 좌절이 되겠지요.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주님께서 초월을 해줄 때는 우리가 어떤 상태가 되야 기쁨과 감사냐 하면 우리가 바닥을 쳐야 돼요 바닥을.


주식 폭락하는걸 뭐라 합니까? 바닥 쳤다 하지요. 바닥 쳤다 하잖아요. 오늘 주식이 2073인가 그래요. 관심 없는 사람은 몰라도 돼요. 그런데 어디까지 내려갔느냐 1900얼마까지 내려갔다고요. 사람들은 바닥을 쳤다 해요. 인간은 바닥을 쳐야 돼요.


바닥을 치게 되면 뭘 느끼느냐 하면 하나님 나라하고 나하고 별개, 전혀 접촉이 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겁니다. 이게 초월이에요. 내가 아는 초월은 내가 위대하게 뛰어넘는 높이뛰기 해가지고 2m20을 넘겠다. 이게 초월이 아니고 오히려 초월을 보여주기 위해서 가리웠던 우리의 의와 자기 잘남을 우리가 바닥을 쳐버립니다.


바닥을 쳐버리면 비로소 이미 우리가 아무 나의 행함과 성실함과 관계없이 주께서 구원해주심이 새록새록 새삼스럽게 팍 뒷배경에 팍 등장하는 거에요. 뒷배경에. 여러분들이 김정은 있는 궁이 무슨 궁인지 모르겠지만 김일성 주석관. TV에 있는 것 보셨지요? 보셨어요? 김일성 주석관.


저는 기억에 남는게 뭐냐 하면 백두산 그림하고 금강산 그림만 보여요. 얼마나 그 풍경화를 크게 그려놨는지. 북조선 최고의 화가들이 그렸을거 아닙니까. 그 최고의 화가들이 그린 그것이 그게 보인다 이 말이죠. 그럼 그 공간은 누구 공간입니까? 김일성 주석 공간이죠.


그럼 지금 우리는 어디 와 있어요? 성령 받은 사람은 어디 와 있습니까? 예수님 공간이잖아요. 예수님 공간에서 왜 우리가 초조하고 불안하고 벌벌 떨고 걱정과 근심은 사서 다 하는 겁니까?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육신, 우리 육신이 자기 관리해서 그런 거에요.


내가 나의 건전함을 자체적으로 도모, 내가 나를 조율하는 겁니다. 조율 한번 해주세요. 한경애가 부른 노래가 있어요. 조율 한번 해주세요. 자꾸 자기 자신을 하늘보고 조율 해 달라고 조율하는 거에요. 하나님 이렇게요? 저렇게요? 이렇게 하면 되는 겁니까? 저렇게 하면 되는 겁니까? 조율을 왜 해요? 왜? 조율을.


뭐가 그렇게 초조해서 조율하는 거에요? 뭐가 불안해서 조율하는 거에요.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주여 이러면 건전한 겁니까? 이러면 바른길을 가고 있는 것이죠?" 천국에서 출제하지도 않은 문제를 자기가 출제해가지고 자기가 푼다고 끙끙대고 있는 거에요.


3번이 맞습니까? 2번이 맞습니까? 어느 쪽이 맞으면 복 받습니까? 이런 식이에요. 꿇어앉아서 기도할까요? 아니면 손 모으고 기도할까요 손 펴고 기도할까요? 자기가 문제를 내. 자기가. 인간의 공간에서 하는 그 짓거리 있잖아요.


요한복음 7장의 주제를 뽑으라 하면 두자로 이야기 할 수 있어요. ‘폭로’. 성도가 왜 그러냐. 성도가 구원할려고 성도로 살려주는게 아니고 폭로시키는 겁니다. 네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 아니고 네가 살던 곳은 지옥이라고. 이 세상이 지옥인 것을 폭로를 시킵니다.


폭로를 시키면서 폭로 시키는 방법은 뭐냐 하면 뱀, 악마와 싸우는게 아니고 다윗은 골리앗하고 싸웠잖아요. 우리는 그건 구약식이고 신약식은 그게 아니에요. 아니고 우리가 뱀의 목안에 들어가요. 우리가 폭탄이다. 자살테러 있잖아요.


우리가 폭탄이어가지고 뱀 안에 들어가면 우리가 뱀 안에 들어가면 그걸로 마귀를 이긴 거에요. 마귀하고 한판 붙을 생각하지 마세요. 뭐 태권도 해가지고 하지 말고 아예 뱀의 몸 안에 폭탄을 집어넣듯이 우리가 마귀 안에 들어가는 겁니다.


요나가 마치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들어와 버리면 그 폭탄이 무슨 폭탄이냐 하면은 그 악마한테 일부러 삼킨게 되지요. 일부러 우리는 악마한테 삼킴을 당할 때 우리는 폭탄으로 삼킨거에요. 악마가 잘못 삼킨거죠. 그게 폭탄의 내용이 뭐냐 하면 나는 이미 죽었다. 나는 이미 죽었다.


지금까지는 굉장히 쉽게 이야기했는데 지금부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뭐 어렵다 해도 설명하면 쉽던데 쉬운거 아니에요. 진짜 어려워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요 제가 예를 한번 들께요. 예를 들테니까 여러분들이 상상해보세요.


어떤 사람이 자동차 공장에 보면 조립하게 되어있어요. 부속품들을 하청업자가 가져 와가지고 그걸 조립라인에 집어넣어서 처음부터 없는데서부터 하나하나 조립해가지고 나중에 완성품이 저 조립라인 저 끝에 차가 완성되게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걸 카메라로 찍는다고 봅시다. 처음부터 조립할 때부터. 처음에는 차체에다가 새것이죠. 새 차체에다가 핸들 집어넣고 하는 걸 카메라로 다 찍는 거에요. 쭉 찍어놨습니다. 하나하나 조립해놨습니다. 그래서 긴 조립안을 다 끝내놓고 보니까 완성품이 되었지요?


완성품이 되어가지고 차 한번 타볼까 싶어서 차문을 스윽 여는 순간 거기서 시체 하나가 뚝 떨어졌다. 그걸 상상할 수 있지요? 시체 하나 떨어졌다고 상상할 수 있지요? 자, 그럼 묻습니다. 그 시체 어떻게 들어 있을 수가 있을까요? 불가능하지요.


이것이 히치콕이라는 유명한 미국의 감독이 이걸 구상을 했어요. 포드 시스템 다시 말해서 포드 자동차에 자동차 라인을 카메라로 다 찍되 마지막 장면은 다 찍었고 다 없는데서 다 하나하나 조립했는데 차 문을 여니까 죽은 남자의 시체가 나왔다까지 촬영을 할 때 그 히치콕이라는 감독이 그걸 촬영을 하고 구상을 다 해봤는데 본인의 능력으로서는 뭐가 안 되느냐 하면 본인이 그걸 구성해놓고도 시체가 들어가는 논리를 구성할 방법을 모르겠는거에요.


제가 그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인간은 흙으로 만들었지요? 흙으로 만들었는데 왜 인간이 왜 죽습니까? 흙으로 만들었으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잖아요. 없는데서 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면 되는데 왜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지 않고 왜 인간에게 자아가 있느냐 이 말이죠. 그거 어디서 조립된 겁니까?


히치콕이 (나 너무 떠든다고 하는가?) 히치콕이요 그걸 자신감이 없어요. 그걸 찍을 자신감이 없는 거에요. 인간은 흙으로 되서 흙으로 돌아가면 간단한데 왜 인간 속에 물질요소 말고 다른 요소가 어느 조립라인에서 그게 들어왔느냐 하는 겁니다.


참 진짜 보통 어려운게 아니지요. 아니 죽음이 언제 들어왔어요? 죽음이라는게 언제 들어왔습니까? 답변해보세요. 정답을 알고 있는 듯한 권사님이 알고 있는 듯한. 하나님이 뭐라고 했어요? 네가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이 들어온 거에요. 말씀이.


흙 + 물질 + 뭐? 말씀의 조립체에요. 말씀의 조립체. 그러니까 우리가 흙이 흙 주제에 뭘 한다 안한다가 의미가 없어요. 말씀이 말씀대로 드러날 뿐이에요. 에서가 착한다고 해서 에서가 구원받습니까? 야곱이 거짓말 한다고 해서 지옥갑니까? 사람이 사람으로 말미암지 않고 뭐로 말미암는다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죠.


그러면 인간은 뭐냐 하면 인간은 참 듣는 인간 기분 나쁘지만 인간은 그냥 말씀의 표피에 지나지 않는다. 말씀의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거에요. 안에 사랑이 들어 있으면 사랑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얇은 막 그게 성도고 또 불신자들은 안에 저주, 지옥, 심판을 보여주는 얇은 막이 불신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도가 천국가고 불신자가 지옥가는 것은 이것은 지옥가는 사람이 자기 운명을 못 말리고 천국 가는 사람도 천국 가는 자기 노선을 자기가 브레이크 걸거나 어떻게 반하고 죄 짓는다고 해가지고 그 방향을 운명을 바꿀 수가 없는 그런 처지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말씀의 담지체라고 하는데 어려운 말로 말씀을 담는 그런 것 밖에 안돼요.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최초에 말씀을 주면서 말씀을 주실 때 창세기 2장에서 하라 했습니까? 하지 마라 했습니까? 주안점이 어디에요? 이미 주안점이 ‘하면 영생을 얻고..’ 영생이란 말을 안 하지요?


다만 모든 것을 먹되 무엇에 강조점이 있습니까? 하지 말라에 강조점이 있지요. 하지 말라에. 이미 인간 자체 속에 주님께서 뭘 집어넣는다? 부정적인 의미의 말씀을 이미 인간 속에 담아둔 거에요. 인간은 뭐가 아니다? 인간은 영생이 아니다에요. 인간은 영생이 아니다. 인간은 생명이 아니다.


그걸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용도로써 인간이 있는 거에요. 예수님을 말미암아, 예수님을 위하여. 그런데 아까 제가 이야기한 인간 공간에서는 무엇이 강조되었습니까?

자기의 건전함, 자기의 실력, 윤리적 도덕적 실력을 발휘해가지고 자기 자신을 뭐를 도모한다고 했지요? 자기의 건전함을 늘 염두해 도모하는거에요. 그래서 건전하면 복 받고 불건전하면 벌 받는다.


이것을 계속해서 시도한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시도하는 자체가 창세기 2장과 3장에 보면 이 자체가 뭐다? 이게 바로 부정적인 것이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모습을 지금 우리가 인간의 육신을 보여주는 거에요.


그런 것은 그런 식으로는 안 받아준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들로 하여금 그런 식으로 살게 하시는 겁니다. 그것도 교회에서. 없는 것이 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부정적인 요소, 따먹지 마라. 그 다음에 어떻게 됐다? 그러면 죽으리라 했잖아요.


그러면 인간에게 실린 것은 뭐냐 하면은 죽음이 들어와서 실린거에요. 그래서 아까 뭐라고 했어요? 새 차 문 열고 타려고 가보니까 뭐가 나왔다? 어떤 남자의 시체가 나왔다고 했지요. 그에 히치콕 감독은 멋지기는 멋진데 이건 논리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조립라인에서 시체를 넣을 타이밍을 찾지를 못한 거에요.


어느 타이밍에서? 핸들 타이밍에서 시체를 넣을까요? 카메라가 그대로 찍는다는데. 히치콕 계획은 카메라 그대로 찍어가는 거에요. 들어간 적이 없는데 나오는게 있다.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안되지요. 그런데 요한복음 7장에서 나옵니다. 7장 34절 봅시다. 7장 3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이제 이 말씀이 이해되십니까? 주님께서 갔다가 빠져도 인간들이 모르는 이유는 인간들이 죽음이 찾아오고 죽음이라는 모습으로 빠져나가요 주님이. 왜? 주님이 죽는 것은 생생하게 살아서 나가는게 아니잖아요. 뭐로 나갔습니까? 죽어서 나갔잖아요. 죽어서.


아 참 강의할 때 이렇게 하면 여러분 기분 나쁠지 알지만 복음을 위해서 할 수밖에 없어요. 이런건 잘 안하는데. 여러분들은 비위 좀 참으시기 바랍니다. 감기들 때 처음에는 기침이 나와요. 나중에 목에서 뭐가 나오죠? 아이고 내가 말하기도 미안하다. 가래 나오지요?


인간이 백날 살아봐야 죽는게 아니고 죽음을 만들어내요. 인간이 살다 죽는게 아닙니다. 죽음 자체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인간이 있는 거에요. 예수님이 왜 죽었습니까? 인간의 죄 때문이죠. 그러니까 인간은 죄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이 땅에 생일축하합니다 하고 태어난 거에요. 죄를 만들기 위해서.


그 죄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그 죄와 합류해서 죄가 빠져 나갔습니다. 죄와 더불어 죽음이 왔다가 빠져나간 거에요.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시기에는 모든 인간은 죄 속에 죽어야 마땅한 겁니다. 실력발휘하고 수능치고 자기가 열심히 공부하고 해봐야 그 자체가 죄 짓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이 살아서 걷는 것도 교만이에요. 숨 쉬는 것도 교만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숨 쉬는 것도 죄인데 죄 아닌게 없지요. 여자들 거울 보면서 머리카락 이렇게 하지요? 이것도 죄입니다. 아이고 왜 따갑지 이거 죄에요. 죄 아닌게 없어요. 전부다 죄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봐야 돼요. 그래서 7장의 주제는 폭로입니다. ‘폭로’.


자, 그렇다면 아까 인간의 공간은 폭로 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이 하는 짓이 곧 악마가 하는 짓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공간에서는 이게 인간 세계에서는 있어요? 없어요? 없는 공간이죠. 주님도 없다고 했잖아요. 주님도 없다고 했으니까 인간들은 이것만 있어요. 예수님의 공간은 없습니다.


자꾸 교회 와서 교인들이 예수님을 찾는데 그것은 자기가 상상해서 성경을 참고로 해서 상상해서 하는거고. 인간의 공간에다가 예수님의 공간 망상을 해가지고 자꾸 이걸 억지로 덧붙이는데 예수님의 공간은 그런 식으로 생겨나는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간은 인간의 공간에 없어요. 그래서 예수 믿는 것도 죄라니까요. 그렇잖아요? 있지도 않는 예수 안 계신 예수를 찾고 있다 이 말이죠.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느냐? 그럼 예수의 공간이 언제 나타나는가? 언제 나타느냐 하면 바로 37절부터 나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그 다음에 뭡니까?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여기서 성령 이야기하시죠 성령. 성령 이야기하는데 그 때가 있어요.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계시지 아니했다 했어요. 그렇게 되어있지요? 그럼 예수님이 영광받으신게 언제입니까?


완전히 인간의 공간과 주님의 공간이 완전히 끊어졌을 때 완전히 끊어졌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아무리 용을 쓰고 애를 쓰고 예수를 부르고 예수를 불러도 인간에게는 전혀 영생도 없고 천국도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을 그때, 그때 성령이 와버리면 이거는 내가 기도해서 성령 받았다느니 뭐 노력해서 했다는 소리를 못하겠지요? 왜냐? 끊어졌기 때문에.


주님이 영광을 받는다는 말은 예수님과 함께 있다가 예수님의 공간과 인간 공간이 완전 떨어져나갔어요. 떨어져나갔다는 말은 어떤 연결점이 없는 거에요. 연결점이 없는 상태에서만 성령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 받았다는 말은 뭐냐 하면 새삼스럽게 우리 쪽에서 추가적인 착함이 필요합니까? 안 필요합니까? 죽은 놈한테 뭘 받아요. 죽은 사람한테 뭘 받겠습니까. 이미 죽었는데. 죽기는 죽었는데 용돈 좀 내라 뭐 이런거 없지요? 죽었는데요. 좀 착해라. 회개해라. 이런 거 안 받지요.


그럼 인간이 성도가 살아가는 모든 것은 뭐냐 하면 성령의 일이 되어야 돼요. 성령의 일이 되고 성령이 일이 된다는 말은 그 성령의 일을 통해서 우리가 뭐냐 하면 죽은 자로 새롭게 확인되는 겁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하는 일이 뭐냐? 이 세상이란 거대한 공룡, 거대한 악마의 세계에다가 폭탄이 되가지고 의도적으로 마귀한테 삼킴을 당하는거에요.


마귀하고 한판 붙자 이러지 말고 아예 마귀 배 속에 들어가요. 목 속에 들어가라고요. 꿀떡하고 마귀가 삼키면 이미 죽었다가 이미 죽었기에 악마가 율법지켜야 돼. 십계명 해야 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 모든걸 쏘아대도 이미 죽은 놈 뭐 죽은 인간을 찔러본들 “아야~” 하겠습니까? 해당사항이 없어요 이게 율법이. 죽었잖아요.


율법에 이미 죽은 자가 무슨 죄를 더 지으리요? 로마서 6장에. 로마서 7장에도 나오고. 로마서 6장 7장 다 나와요. 죽은 인간이 더 이상 죽었는데 어이~임마 어이~. 죽었는데 뭘 죽은 자에게 죽음이 모든걸 다 긁어갔는데 뭘 요구하고 있겠어요. 요구할 수가 없는 거에요. 이게 바로 성령이 하시는 목적입니다.


그래서 아까 성령의 높이와 깊이와 성령은 뭐냐? 우리로 하여금 그 깊이를 알게 하죠. 그러면 그 감사와 기쁨은 뭐냐 하면 그냥 지식으로 하려고 하면 지식으로 감사 기쁨이 안 나와요. 무엇과 대비시키느냐 하면은 우리가 죽은 우리 육신을 성령이 건드립니다.


육신을 건드리면 구원받은 자가 뭐하냐 하면 옛날에 내 식대로 천국갈라고 애썼던 신경 쓰고 막 근심, 걱정하는 그거 있잖아요. 그걸 이렇게 촉발해요. 촉발 왜 해야되느냐? 초월을 뭐로 바꾼다고 했습니까? 초월을 일반화로 바꾸기 위해서는 할 수밖에 없어요.


뾰족한 것을 평평하게 일반화시키기 위해서 초월했는데 이 초월이 여기 뭘 집어넣느냐 하면 바로 인간의 공간에서 놀던 가락, 놀던 버릇을 집어넣어버리면 아 이 모든 것이 내가 또다시 죽은 자에 불과하다. 내가 죽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함으로서 주님의 일반적인 그 세계에 들어왔음을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 들어갈 때 누굴 이용하느냐 하면, 우리 인간의 공간 할 때에, 악마도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우리가 잘난 체하니까 악마의 밥이죠. 그러니까 악마가 뭡니까? 더 열심히 기도해야지. 회개 안하고 뭐해? 회개해야지. 이번에 애 성적 내려간거 너 회개 안해서 그렇다고. 약을 자꾸 올리는 거에요.


우리는 얼굴 새파랗게 되가지고 그래 내가 헌금을 안했구나. 기도를 안했구나. 전도를 안했구나. 내가 신앙생활을 게으르게 했구나 이래가지고 벌벌 떨고 하지요. 그럼 악마가 또 약을 올리지요. 그런데 악마 배후에 누가 그렇게 하십니까?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 거에요. 악마가 천사거든요. 쓸모 없는게 다 쓸모 있어요.


그럼 우리는 벌벌 떨면서 시험들지 말아야지 시험들지 말아야지. 그 자체가 시험든건데. 시험들지 말아야지. 감사 나온지가 옛날이다. 기뻐한 것도 기억도 안 나고. 벌벌 떨 때 성령께서 모든걸 알게 했을 때 내막을 다 알게 했을때 야~ 다시 한번 초월의 일반화에 아 내가 또 내가 바닥을 쳐야 되는데 또 높았구나. 바닥을 치면 되는데 높아진 거에요.


겸손을 빙자한 교만이 되는거에요. 바닥 치면 되는데 이미 죽은 자인데 이제 살았으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야지. 본 건 있어가지고 또 깝죽대다가 주께서는 벌벌 떨게 만들어서 바닥을 치게 만들어요.


"내가 아무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집중하고 초점을 맞췄는가." 어떤 일을 할 때 나의 건전함과 내가 이정도로 괜찮은 존재라는 것으로 돌아왔잖아요. 나에게. 성경에는 주를 위한다는데 주를 위한게 아니고 나를 위해. 이것은 나의 잘남의 증인이지 주의 증인이 아니거든요.


실컷 성령 받았다 해놓고 전부다 자기 잘남 남한테 과시하는 용도로 활용된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처음에 구원받았을 때 바닥을 쳤을 때 모습이에요. 다시 바닥의 모습으로 우리를 우리 진 모습을 보이기 위한. 나머지 모든 초월은 오직 그 풍성함과 그 높이와 넓이에 대해서 감사 외에는 할 말이 없는 거에요. 고마움과 감사와 기쁨의.


다시 제가 야곱이 거짓말해도 구원받는다 이야기해 드렸지요? 야곱이 분명히 거짓말 했고 에서는 거짓말 안했어요. 거짓말 안한 자가 어디 간다? 지옥. 거짓말 한 자가 어디 갑니까? 천국. 왜 그렇게 뒤집어놓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뻔히 뭘 생각하는가 알거든요.


우리는 무에서 유로 조립하면서 중간에 뭐가 들어왔어요. 물론 말씀에 의해서 들어갔어요.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면서 악마가 같이 들어가버린 거에요. 그리고 계속 죽으리라 했으면 계속 죽으면서 죽는 이유를 모르면서 죽으니까 답답해서 뭐라고 합니까? 살려고 애쓰는 거에요.


그 사는 방법은 악마가 몸부림치는 그 몸부림에 같이 동조가 되어 버린 거에요. 악마가 뭐하면 같이 뭐하고 악마가 뒤에서 격려하면 같이 격려하고 우리가 설치는 모든 것이 배후에서 악마가 조종하는대로 움직여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적을게요. 말씀의 공간에서 나의 공간을 잊어버린다. 내 공간. "나는 그럼 어떻게 되는데?" 아예 이것을 납작하게 만들어 버리죠. 납작하게. 이걸 가지고 저는 주일날 설교를 이걸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대패 삼겹살’.


대패 삼겹살이라고 했는데 오목사님은 대패 삼겹살을 잘 모르는 모양이라. 그래서 대표 삼겹살이라고. 고쳐놨습니다. 대패 삼겹살. 삼겹살인데 대패로 막. 그냥 인간은 마귀의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얼룩덜룩한 얼룩무늬에 지나지 않아요.


자기 폭이 있으면 그걸 키울려고 하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밀고 또 밀고 또 밀어서 그걸 바닥에 딱 붙어 있는 바닥에 있는 죄에 불과한 그 껍데기를 가지고 얇은 투명한 그 만두피 불과한걸 가지고 주께서 일방적인 사랑으로 완전히 만두속을 다 채우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강남-요한복음 총정리2 (인간공간 하나님공간)191001a-이근호 목사.hwp (164.5K), Down: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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