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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3 16:49:26 조회 : 83         
대전-115강 마태복음26장 36-46절(겟세마네기도)20191029-이 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IP:122.43.170.138)

대전-115강 마태복음26장 36-46절(겟세마네기도)20191029-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을 해봅시다. 마태복음 26장 36절부터 보겠습니다.

 

36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네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겟세마네,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필수코스죠. 거기 옆에 큰 예배당이 있고 겟세마네에 뽕나무가 있는 그 동영상을 제가 우리교회에 올려놨으니까 여러분들이 보시면 될 거예요. 겟세마네 거기에 술객들이, 관광객들이 얼마나 많은지. 북적북적, 하도 많이 와서. 그 예배당도 아주 굉장히 복잡한데, 진짜 거기에 많이 와요. 다 오니까. 실제로 거기에서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서 기도했다는 그러한 사실을 접하니까, 그야말로 타인이 보이지 않아요.

 

수백 명, 수천 명이 오든 무슨 생각만 나는가 하면은 주님이 거기에 계신 것만 생각나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주님의 기도가 필수코스에요. 주님의 코스가 오늘날 죄인이 가는 코스를 미리 보여준 거예요. 내 인생이 어떻게 되는가는 우리가 그렇게 궁금해 할 필요가 없어요. 주님의 코스가 바로 성도가 가는 인생입니다. 주님이 가는 코스와 우리 코스의 차이점이 있다면 주님은 의인이시기 때문에, 의인은 반드시 뭘 추구하게 되느냐 하면은 죄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죄의 모습을.

 

홍해라는 것이 갈라지기 위한 바다라는 것은 모세가 통과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상상도 못했죠. 홍해의 의미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있고, 더 나아가서 그 홍해의 의미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모세가 코스를 잡을 때 홍해가 없는 코스로 간 것이 아니고 일부러 홍해로 간 것은 홍해를 갈라지게 함으로서 세상 모든 만사가 하나님의 뜻을 막을 재주는 없다. 세상의 모든 게. 어떤 결정 난 코스대로 그때그때 닥쳐오는 거죠. 우리의 뜻이 아니고 주의 뜻에 의해서 닥쳐오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세상 모든 길이 예수님이 가신 길을 보여주기 위해서 들이닥치는데, 만약에 예수님 자리에 우리 개인을 집어넣어버리면 우리는 오해하고 곡해하는 거예요. “이 잘난 나에게 어려움을 왜 주십니까?” 이래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두 번째 강의의 제목은 ‘불가능한 시련’입니다. ‘불가능한 시련’ 시련이 오는데 우리로서는 극복이 가능한 것이 오는 게 아니고 불가능한 시련이 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뭘 보여주느냐 하면은 우리가 헤쳐서 구원으로 갈 수 있는 그 모든 길은 차단되어 있다. 없다는 거예요. 아무리 박태환이가 헤엄을 잘 쳐도 홍해를 건너갈 수 없듯이, 이 세상 자체가 너무나 빡빡해가지고 우리의 가는 길을 계속 거부합니다. 우리가 천국 가는 길을. 내가 나의 종교적인 열심과 테크닉을 발휘해서 세상의 순전함과 순결함을 가지고 세상을 헤쳐 나가려고 해보세요. 이거는 불가능한 시련이에요. 고생만 댔다하고 구원받지도 못하고 헛고생만 하고 있는 거예요. 헛고생만.

 

왜 하나님은 내가 하는 일이 이렇게 건전하고 순수하고 순결한데 안 도와주시냐? 이래 되는 거예요. 내 하는 일을 왜 안 도와주시냐? 그것은 이미 주께서 내놓은 길로 안 가고 내 잘났다는 길을 증명해줄 길로, 자꾸 길이 아닌 곳에 들어섰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오는 겁니다. 일부러 못 가게 하는 것을 오히려 감사히 여겨야 돼요.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을 오히려 고맙게 여겨야 됩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끝에 반드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고마움과 감사가 나온다는 거죠.

 

고마움과 감사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시련에 부딪혀야 가능해요. 시련이 있어야 고마움과 감사가 나오지, 시련이 없는 고마움과 감사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가신 코스를 세 사람 정도를 대표로 뽑아서 여기 겟세마네 동산에서 같이 잠시 맛보게 했죠. 맛보게 하면 뭐합니까? 탈락인데요. 자고 있었거든요. 겟세마네 기도할 때 그들은 잠자고 있었어요. 제자들이 잠을 잤다는 말은 그 코스를 인간의 힘으로는 뚫을 코스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 말은 곧 주님과 함께 동행 했다는 그러한 생각은 착오에 불과했다는 겁니다. 동행할 수도 없는데, 옆에 같이 자고 합숙을 같이하니까 우리 가는 길이 주의 길이라고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서서히 이것은 결별할 시점에 온 거예요. 갈라설 시점에 온 겁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내다보는 것과 인간이 내다보는 것과 너무 엉뚱하게 다르다는, 차이가 나는 거예요. 예수님의 기도에 제자들이 합세함으로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뭐냐 하면은 인간은 무엇을 요구하느냐, 이것을 따져봐야 해요.

 

자, 제가 묻겠습니다. 인간은 무엇을 요구하느냐? 1번, 죄를 요구한다. 2번, 의를 요구한다. 몇 번 이겠습니까? 2번이죠. 그래서 틀린 거예요. 인간의 제대로 된 기도는 “내게 합당한 것을 주시옵소서.” 이게 되어야 돼요. “내게 합당한 것을 주시옵소서.” 그럼 내게, 인간은 죄인이잖아요. 죄인에게 합당한 것은 저주고 지옥입니다. “지옥가게 해주옵소서. 그게 내게 딱 맞는 곳입니다. 내게 딱 맞는 결과입니다. 내게 맞는 것을 허락해주옵소서.”

 

이게 제가 이야기하니까 터무니없어 보이죠. 주님이 그 이야기했거든요. 이 잔은 예수님한테 안 맞아요. 그냥 지나가도 괜찮아요.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하지만 아버지의 뜻은 뭐냐 하면은 너는 너만 구원되게 한 코스가 아니고, 죄인을 구원한 코스기 때문에, 너가 구원한 죄인의 코스를 예수님께서 그 길을 가셔야 되는 거예요. 대신 가셔야 되는 거예요. 대신 가시다보니까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원하지 않는 뜻, 죄인에게 합당한 조치가 주어지는 그 뜻을 전부 다 주님이 감당하셔야 되는 거예요. 우리 인간은 감당 못합니다. 내빼기 바쁘죠. 원망하기 바쁘고.

 

그러면 이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기도를 할 때에, 요새는 관광객들이 많지만, 그때는 제자들과 멀찍이 떨어져서 기도했죠. 그럼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할 때 몇 명 있었습니까? 제로죠. 아무도 없었죠. 세 명 불러다가 그들은 따로 있었고 예수님은 따로 떨어져서 기도했으니까, 없죠. 홀로 기도하신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기도자체가 뭐냐 하면은 이게 언약이 되는 겁니다. ‘기도=언약’ 예수님이 언약을 이루어서 기도한 것도 되지만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것 자체도 하나님의 언약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제가 무슨 취지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은 어떤 인간도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기도가 아닙니다. 뭐, 가족을 위해서 중보기도 한다? 그거 기도가 아니에요. 성령으로 하시는 기도는 우리 기도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기도를 우리기도 속에 집어넣는 일을 하시죠. 성령이 오게 되면 기도를 우리만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도 하셨잖아요. 우리기도 개판이고 주님기도 옳다. 이거 아닙니까? 주님의 기도를 여기다가 집어넣는 거예요.

 

로마서 8장을 한번 봅시다. 26절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아까 일반화된 타자라고 했죠. 첫째 시간에 배웠잖아요. 일반화된 타자. 대표성이 아니고 일반화된 타자 속에 우리가 하나의 개인이 아닙니까? 아주 일괄적으로 처리해버려요. 우리는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 그러면 누가 기도할 바를 아느냐, 그 뒤에 나오죠.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 성령께서.

 

27절,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도가 뜻을 아는 것이 아니에요. 성도는 뜻을 몰라요. 뜻은 누구만 아십니까? 성령이 아시죠. 성령기도 덕분에 우리가 신앙생활 잘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성령의 기도가 응답이 될까요? 안 될까요? 될 수밖에 없죠. 아버지의 뜻대로 하니까. 짜고 치는 고스톱이니까. 서로가 잘 아니까. 아버지의 뜻을 알죠. 아버지 뜻의 응답의 결과가 뭐냐,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모든 인생이 우리가 애쓰고 노력하고 결정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오늘 강의의 핵심적인 내용이 뭐냐 하면은, 우리의 기도는 필히 난관에 봉착되어야 한다는 사실. 우리의 기도는 필히 난관에 봉착되어야 해요. 절망으로 나가야 돼요. 우리의 기도가. 역에 가면 철도가 많이 있잖아요. 근데 지금 다니는 철도는 뚫려있어서 역을 벗어나 계속 가고 있지만, 그냥 공사용 철도는 역이 막혀있죠. 둔덕(턱)으로 해서 막혀 있잖아요. 우리의 기도는 막혀있어야 돼요. 그러면 우리의 기도가 막혀있을 때,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인생이 막혀 있을 때, 뭐가 우리 자신으로서 가장 괴롭고 실망스럽고 견디기 힘드냐 하면은 이거에요. 나의 선택이 좌절되었다. 나의 선택이.

 

자, 우리가 선택을 할 때에 그냥 아무거나 선택합니까? 아니면 온 심혈을 기울여서 선택합니까? 내 경험과 체험, 내가 아는 성경지식, 이런 모든 것을 총집합해서 가장 확률이 높은, 가장 응답적인 확률이 높은 그것을 위해서 기도했는데, 그 기도가 좌절되었다는 것은 뭔 말이냐 하면은, 나의 평소의 생각과 의지와 이성과 모든 것이 이게 하나님께 응답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나의 선택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일은, 우리를 좌절시키는 성령의 일은 뭘 묻느냐 하면은 내가 과연 인간일까? 내가 인간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건들을 문제 삼는 거예요. 이래서 너는 안 되는 거야, 라는 식으로 전부 다 거기다가 자외선을 쏘아대듯이 성령께서 낱낱이 다 쏘아댑니다. 성령이 주신 기도 안에는. 성령이 주시는 기도는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딱 대상으로 놓고, 실험대에 딱 눕히고 CT촬영하듯이 방사능을 우리의 구석구석 다 쏘아대면서, “이래서 너는 인간이라고 할 수가 없는 거야. 이래서 너는 더 살 수 있는 권리가 없는 거야.”라고, 다 낱낱이 이야기해줘요.

 

성령께서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은 끊임없이 우리의 잘남이 복음의 일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우리는 죽고 우리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만 사는 이 원리 안에는 겟세마네의 기도도 포함이 되어 있거든요.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예수님은 홀로 기도했다, 라고 했을 때에 그 제자들 세 명의 무리에 누굴 포함시킵니까? 우리의 자리가 어디입니까? 잠자고 있던 제자들 자리가 우리의 자리거든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어떤 사건이 있으면 언약사건을 그대로 가져다가 우리에게 붙여버리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배치물로 가입이 돼요. 배치물로 거기에 들어가게 된다고요. 우리의 자리가 어디냐 하면은 아까 다윗을 반대했던 이스라엘 자리가 우리 자리고, 골리앗의 자리가 우리 자리고. 또 오늘 본문 같으면 뭐냐 하면은 잠자고 있었던 제자들의 자리다 이 말이죠. 제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 쉽게 말해서 다 약하다 이 말입니다.

 

영혼은 강하다는 뜻이 아니고 그냥 이건 약한 거예요. 약함은 목표에 도달할 수가 없는 겁니다. 주의 뜻을 달성할 수가 없는 겁니다. 주님의 뜻을 달성하지 못하면 주님의 영광이 안돼요. 주님의 영광이 안 되면 우리는 천국갈 수 없습니다. 이거는 주께서 버릴 패에요. 영광이 안 되는데 받아들일 필요가 없죠.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다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아버지 입장에서. 주님은 그 원칙을 계속 고수하는 겁니다. 주님은 예수님을 선택하신 거예요.

 

근데 예수님을 선택하고 나서 보니까 예수님 안에 누가 들어있다? 예수님이 원하는 자들이 들어있는 거예요. 예수님을 선택하다보니까 예수님이 뭐가 되었다? 대표자. 대표성을 갖고 있죠. 대표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다수를 뒤에 데리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대표를 끌어당기니까 다수가 다 끌려오는 거예요. 그 대표자의 이름이 주의 이름이니까 우리는 누구의 이름을 불러요? 내 이름이 아닌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만약에 문재인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잘 살게 해줄 수 있다면, 서초동에 가서 뭘 합니까? “문재인! 문재인!” 이러죠. “나! 나!” 나를 안 부르죠. 문재인이 대표성을 갖고 있으니까. 지금 예가 적절한 예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대표성을 갖고 있으니까 문재인 이름을 부르잖아요. 근데 성도는 무슨 이름을 불러야 돼요? 성조기 흔들고 태극기 흔들어야 되겠어요? 뭘 흔들어야 돼요? 주의 이름을 불러야 되는데. 십자가인데. 이게 갑자기 성조기, 태극기가 왜 나오고 트럼프가 왜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하여튼 이상해요. 그것은 기독교가 십자가를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라는 그 권력을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교회를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기독교라는 것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교회 없으면 주의 일이 안 되는 줄로 여기고 있습니다.

 

제가 아까 불가능한 시련이라고 했습니다. 불가능한 시련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런 뜻이에요. 예를 하나 들면 창세기 9장에 보면 하늘에 무지개가 떠있어요.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무지개가 있어요? 무지개가 없어요? 무지개는 있음과 없음을 둘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무지개가 떴다고 애들이 그 앞에 가보세요. 무지개가 있습니까? 없죠. 어! 무지개가 분명히 이 자리에 있었는데? 어디 갔지? 무지개가 없어요. 근데 멀리 다시 돌아오게 되면 무지개가 떠있죠. 분명히 있는데 실제로는 없는 것. 그래서 없다고 돌아섰는데 있고.

 

이게 뭐냐 하면은 바로 성령이에요. 이 성령을 가지고 존재의 초과분이라고 해요. 존재의 초과분. 내가 여기 있다. 우리는 평소에 나만 생각하잖아요. 나만 생각했는데 내가 하는 일이 좌절되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성도 같으면 뭘 생각하겠습니까? 누가 좌절시켰겠어? 아하! 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없다고 여긴 분이 없는 것이 아니고 계시는구나! 주님은 살아계신 분. 주님은 나보다 더 살아계신 분. 내가 죽더라도 살아계신 분. 이걸 초과분이라고 합니다. 초과분.

 

내가 살아있을 때는 내가 내 인생을 주관합니다. 왜? 내가 내게 살아있기 때문에. 근데 그때는 초과분이 안 나타나요. 없어요. 근데 내가 열심히 살라고 했는데 일이 안 돼. 좌절돼요. 자빠지고 엎어져요. 그 말은 뭐냐 하면은 니가 살아있다는 것이 아니고 누가 살아있다는 증거에요? “거봐. 니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야. 내가 살아 있잖아.” 그런데 왜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못 느끼죠? 내가 너무나 강렬하게 살아있다는 의식을 하다보니까, 눈에 보이는 내가 너무 강렬하다보니까 주님은 이 강렬한 나 살아있음에 없어진 거예요.

 

어떤 아이가 무지개를 봤습니다. 무지개를 봤을 때, 여기 한 백 명의 아이가 산과 산 사이에 걸쳐있는 무지개를 봤다고 합시다. 기분 좋으면 쌍무지개가 떴다고 합시다. 백 명의 아이가, 백 명의 아이는 뭐냐 무지개가 있다고 했습니다. 무지개가 있다. 그런데 그 백 명 중에 한명의 아이가 진짜 무지개가 있는지 가봤어요. 가보니까 없는 거예요. 단 한명의 아이가. 나머지기 아이들은 뭐냐, 내가 있다와 무지개 있다가 동시에 가능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내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무지개 떠있다는 그 지점에 가보니까, 점점 나는 분명히 있는데 나 있음과 비례해서 무지개가 날아가 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 아이가 그 무지개를 연구해서 물리학자가 됐다면, 이 중에서 계속 무지개에 꽂혀있는 아이는 몇 명이에요? 달랑 한명이겠죠. 한명. 이 애는 무지개가 있음이 나의 있음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밥 먹고 사는 것보다 무지개가 어떤 것인지 깨닫는 그거 아니면 나는 밥도 안 먹겠다고 설치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 예수님의 살아계심, 성령의 활동, 다 이런 거예요. 무지개 같은 거예요. 창세기 9장에서 무지개를 왜 하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피워놓고 언약은 이와 같다고 했거든요. 언약은. 내가 너희에게 언약을 세우리니 무지개를 쫙 펴놓은 거예요.

 

언약은 분명히 있는데 살아보면 없어져요. 언약이 없다니까요. 그 이유가 뭘까요? 언약은 관심이 없고 내가 내 위주로 살아요. 내가 죽어서는 천당 가고 내가 밥 먹고 사는 것. 살아서는 밥 먹고 살고 죽어서는 천당 가는 것. 여기에 관심이 있는 거예요. 내가 언약이 아닌데 자꾸만 내가 언약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은 날 위해서 있는 게 아닌데, 언약을 위해서 있는데, 우리는 자꾸 날 위해서 있다 보니까 주님의 살아계심, 주님을 위해서 하나님이 일한다는 사실을 내가 자꾸 훼방질하고 있는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꾸 훼방질 놓는다 이 말이죠.

 

성령이 가만둘 리가 있습니까? 성령께서 그 조치를 취하겠죠. 그래서 어떻게 조치를 취하겠습니까? 왜 언약이 우리에게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처럼 하느냐? 보통 은혜 받았다고 하지요. 그 은혜가 며칠가든가요? 그거 없어지죠.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거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걸 반대로 가져갑니다. 우리 자신이 주님보시기에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을, 관점을 잘못가지고 있어요. 주님의 은혜가 어쩔 때는 있고 어쩔 때는 없네, 라고 하는 것은 순전히 내 관점에서 보니까 그렇게 되는데, 주님의 관점으로 보시기에는 은혜는 원래 계속 있는데, 저 인간이 은혜에 얼굴을 돌렸다 안 돌렸다 하는 거예요. 주님이 이 땅을 내려다보면. “주여, 감사합니다.”라고 해놓고, 헤헤거리다가 딴 데 세상에 빠지고. 주님에게 얼굴을 돌려야 될 그 인간이 세상유혹에 빠져가지고 계속 그쪽에 있다가 또 한 대 얻어맞으면 다시 “천부여 의지 없어 손들고 옵니다.” 하고 또 돌아오고. 주님보기에 누가 있다가 없다가 합니까? 인간들이 있다가 없다가 해요. 주님은 한결같은데.

 

그래서 그 작업을 누가 하느냐 하면은, 같은 있다 없다에 해당되는 게 성령이라고 했죠. 성령, 주님이라고 했죠. 세상에서는 누가 그래요? 악마가 그래요. 악마는 자신이 없는 존재인 것을 알리면서 나타납니다. 희한하죠. 자기가 없는 존재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나타나는 거예요. 나타났으면 없는 게 아니고 있는 게 되잖아요. 그런데 악마라는 것은 나타내요. 악마가 나타내면 인간들은 이걸 도망치든지 피하든지 숨든지 하겠죠. 인간이 악마가 나타났다고 여기는 순간 진짜 악마는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가 있는 겁니다. 너희들이 무서워하는 그게 습기 찬 집, 집값 떨어지는 이런 거. 수맥 흐르는 것 있잖아요.

 

인간은 기분 나쁜 곳에 가면 악마가 있다고 생각하고, 홀로 있으면 악마랑 같이 붙어있다고 생각하고, 밤중에 또는 원한관계에 있다든지, 공동묘지라든지, 비올 때 공동묘지는 개인택시가 안 갑니다. 이런 것. 그리고 자기 몸이 아플 때는 악마가 들어있다고 이야기하고, 집안 꼴이 말이 안 될 때, 갑자기 애가 교통사고 나면 내가 평소에 남한테 들키지 않은 죄가 많은데 주께서 이 죄에 합당한, 상응하는 벌을 내리셨다고 갑자기 깨달을 때, 인간은 거기에서 악마를 느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모든 악마의 일은 가짜입니다. 그건 악마가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 악마를 생각하게 되면 인간은 계속 무엇을 추스르겠어요? 자기 근사함을 추스르겠죠. 그게 악마가 원했던 바입니다. 끝까지. 끝까지 무의미하고, 의미 없고 가치가 없는데, 내가 악마를 퇴치하고 악마의 저주가 미치지 않으면 나는 괜찮은 존재가 되지 않겠는가, 이게 바로 곧 인간에게 잘못된 선택이에요. 인간의 선택은 미래에 괜찮은 자아상을 수립하기 위해서 지금 선택에 나서는 겁니다. 지금 내가 선을 찾아 나설 것인가, 악을 택할 것인가, 원래 선악은 언약 안에서 이미 없는 거예요.

 

없어졌는데, 악마가 작용하니까 없는 선악을 다시 도입한 거예요. 내가 나쁜 짓을 해서 집안 꼴이 이래됐다. 내가 이참에 기도원에 가서 회개를 많이 해야 된다. 회개하면 할수록 자기의가 더 높아지는데? 본인이 대견스러워서 미쳐요. “세상에! 이렇게 회개할 줄 알다니! 나 진짜 신자 같아.” 스스로 회개하면 선이 되고 회개 안 하면 악이 되겠죠. 그게 말려든 거예요. 그게. 그게 악마에게 말려들었다고요. 말려들고 하는 말이, 내가 악을 행해서 악마가 나한테 찾아왔기 때문에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면 악마가 우리 집안에서 퇴치가 되어서 떨어져나갈 것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보세요. 무당집이에요. 제일교회는 제일무당집. 대전교회는 대전무당집. 대전중앙교회는 대전중앙교회무당집. 무당집인 이유가 거기에 오는 전부다가 악마를 퇴치하려고 온 사람들이거든요. 지가 귀신이면서 귀신아! 물러가라고 하고 있어요. 지가 귀신을 부르거든요. 귀신을 부른다는 말은 선악의 체제 자체를 불러오는 거예요. 선악의 체제 자체를.

 

내가 내 나이되어서 이렇게 아픈 것은 과거에 지은 죄가 많아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요? 무슨 죄를 많이 지었습니까? 목사 욕을 해서 그렇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을 안 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그 자체가 완전히, 그런 사람 엑스레이 찍어보세요. 악마가 가득 들어있어요. 엑스레이 찍으면 전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다 악마가 도배를 해놨어요. 악마가. 악마를 강단에 세워서 목사 만들고, 악마가 거기서 아멘하고, 악마의 수하들이 은혜 받았다고 난리고.

 

한마디 말씀드릴까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아니요’가 아니고 ‘예’에요. 예+ 예+ 예+ 예예예예~~~ 전부다 예스에요. 전부 다 옳은 일만이에요. 아프든지 내가 죽거나 다치거나 관계없어요. 전부 다 필히 그래야만 되는 일이에요. 그래야만. 선악체제가 아닙니다. 마땅함이에요. 마땅함. 그래야 돼요. 도대체 얼마나 더 속아야 됩니까? 얼마나 더 속아 넘어가야 돼요? 남한테 속았다고 하지 마세요. 내가 그런 사기꾼들만 요청한 거예요. 그런 사기꾼들만. 안수해서 병 낫게 해달라고.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박사교회에 있을 때 어떤 교인이 와서 새 차 샀는데 기도한번 해달라고. 1톤 트럭 머리에다가, 꼬리 말고 머리에다가 기도해서 사고 나지 않도록 해달라고.

 

인간이 태어날 때 그 광경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보통 요양병원에서 그런 일이 많은데, 요양병원에서 노인네들이 죽을 때 의사들이 심장 체크하는 모니터에서 선이 뚝뚝 끊어지게 되면 “어느 어르신 몇 월 며 칠 날로 사망하셨습니다.”라고 고지를 하게 되어있어요. 고지를 딱 하는 거예요. 이게 병원에서 하는데, 병원에서 하지 말고 태어날 때 해야 돼요. 우리가 태어난 것이 아니고 사망이 태어난 거예요. 사망이. 사망이 태어나고 악마의 종이 태어난 거예요. 생일축하가 아니고 사망축하에요. 사망이 출몰한 거예요. 엄마의 뱃속에서 사망이 나와서 사망으로 갔다가 사망으로 죽는 거예요.

 

이게 정상이에요. 오히려 여기에서 벗어나서 천국 가는 것이 이상한 현상이라니까요. 이게 누구의 관점이냐 하면 주님의 관점이에요. 주님 관점. 사망으로 태어나니까 결국 없어져서 죽죠. 죽으면 없어지죠. 그러니까 언약이 소개하는 이 세상은 뭐냐, 있다가도 없는 거고, 놀라운 것은 없는데도 나온다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뭐냐, 세자로 창조성이라고 해요. 창조성. 창조성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지난 오전예배를 다 이야기해야 되는데, 창세기 1장에서 2절을 설명하면서 처음에 창조 전에 흑암이 있다고 했죠. 그 다음에 처음으로 만든 것이 뭡니까? 빛을 만들죠.

 

그러면 흑암은 뭡니까? 창조성이 없는 게, 빛이 없는 게 어두움이에요. 빛이 없는 게. 그러면 하나님의 관심은 뭐냐 하면은 자기가 만든 자기 창조성을 계속 되가져오는 게, 소환시키는 게 그게 주 업무거든요. 그래서 악마가 와서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인간은 죽죠. 그러면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형상이 빠진 것. 하나님의 창조성이 빠진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그다음의 작업은 뭐예요? 언약 작업은 뭡니까? 이 없음을, 하나님의 형상이 없음을 기정사실로, 전제로 깔고 하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있다가도 없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새로운 형상을 집어넣으면 없는 데서 뭐가 있습니까? 있음이 생기겠죠. 여기서 하는 작업이 뭐냐 하면은 언약작업이고, 언약작업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지금 겟세마네 동산에서 지금 기도하는 겁니다. 언약을 위해서. 없는 것을 있게 하고 죽을 것을 살리시고.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없다가도 나타나고 부활하고 난 뒤에, 이 땅에서 죽으시고 죽었는데 사흘 만에 다시 나타나시고. 결국 있는 것도 없어지고 없는 것도 있다는 그것이 예수님의 존재나 우리 성도의 존재나 공통점입니다.

 

다만 계속 살아있는 것은 뭐가 살아있다? 언약이 계속 살아있죠. 언약이. 언약이 계속 살아있고 예수님은 언약대로 이 땅에서 잠시 없어졌다가 그 다음에 다시 살아나야 될 그러한 절차가 필요하겠죠. 그리고 그 절차의 노선에 뛰어든, 거기에 초청된 사람이 누굽니까? 우리 성도죠. 성도도 바로 이 언약을 위해서, 우리가 아니라 언약을 위해서 그러한 절차를 지금 밟고 있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 점을 여러분들이 일단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나의 기도가 뭐냐? 나의 기도의 내용은? 이것의 정답을 아는데 이걸 왜 이야기합니까? 라고 하는데, 예수님도 여기에 대해서 언급을 한 적이 있어요. 마태복음 6장에서. 마태복음 6장을 여러분들이 아시겠죠? 금식과 그저 구제와, 구제할 때는 어떻게 구제하라고 했습니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금식을 할 때는 금식을 언제 했나? 할 정도로 티가 안 나게 금식을 하라. 그 다음에 그 중간에 뭘 이야기했느냐 하면은 기도이야기 했어요.

 

기도할 때 먼저 누구의 기도를 언급을 했는가 하면은 이방인들의 기도를 언급을 했어요. 주님이 이렇게 기도를 언급한 거예요. 주님이. 있는 것을 없애버려야 있음이 나오기 때문에 있는 것을 먼저 언급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오늘날 성도지만 이 땅에 살아야 될 이유가 있음으로 살거든요. 있음인데 죽으면 없어지잖아요. 없어지고 난 뒤에 우리가 천국 가잖아요.

 

근데 이 절차를 고집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힘들더라도 이 땅에서 우리가 힘들게 있어야 돼요. 그냥 사는 게 아니고 악마로부터 시련 받고 이렇게 고생고생하면서 살죠. 이 땅에서 아무리 편하게 산다고 해도 산다는 자체가 고생입니다. 뭐 단풍이 좋고 어디 놀러 가면 좋다고 하지만 갔다 오면 또 피곤해요. 박카스 먹어야 되고 차타는 것 멀미나고. 그때뿐이에요. 그때 그 인상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피곤함은 누적이 되지만 그때 아름다운 광경은 뭐 사진 몇 장으로 동영상 몇 장으로, 아픈 몸으로 그거 봐야 기분이 나겠어요? 안 나죠.

 

인간이 있다는 것은 병든 몸만 있는 거예요. 그냥 죽어가는 몸만 있을 뿐이에요. 너무 자조적으로 느끼지 마시고 이게 사실이에요. 젊은 사람들은 철딱서니가 없지만. 그러면 있을 때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있느냐, 이 있음을 없음으로 가기 싫어서 자꾸 있음을 유지하는 기도를 누가 하느냐, 이게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에요.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 그럼 이방인들의 기도 말고, 그럼 예수님이 이방인들의 기도라고 했으니까, 예수님의 염두에 뭡니까? 유대인들의 기도는 이방인들의 기도와 달라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시겠죠.

 

자, 유대인들의 기도는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언약완성을 위해서 기도해야 돼요. 아예 다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게 있다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뭐냐 언약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언약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죠. 언약 없이는. 언약의 완성이 메시야니까. 메시야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 비어있는 자리에 “메시야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 기도를 유대인들이 꾸준히 해왔고 마땅히 이스라엘이 해야 된다는 거예요. 마지막 때에. 물론 사람들이 와도 못 알아봤지만. 세례 요한이 그렇게 이야기해도 온 메시야를 못 알아봤잖아요.

 

그러나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기 때문에 메시야고 뭐고 없어요. 독자적인 잘난 자기만 있으면 족하다는 겁니다. 이게 이방인들의 특징이에요. 아까도 했지만 나 위주 아닙니까? 나 위주. 나만 있으면 그만이에요. 나만 있으면. 자,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야기를 해보세요. 이방인들의 기도가 어떤 기도라고 알고 있습니까? 중언부언하죠.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너희는 이방인처럼 기도하지 말라. 중언부언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니까 그 뒤에 주께서 설명을 해놨습니다. “내게 필요한 것을 신께서 주시옵소서.” 이게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라는 거예요.

 

한번 예를 들어볼까요? 교회에서 하는 기도는 뭐겠어요? “이 교회에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을 주시옵소서.” 이게 뭐냐, 주께서 책망하시는 이방인들의 기도에요. 자, 가정이 있다고 합시다. 우리 가정이 행복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 어느 기도입니까? 이방인들의 기도죠. 자, 내가 있다고 합시다. 내가 오래살고 행복하고 잘 되는 기도는 전부 무슨 기도입니까? 이방인의 기도죠. 그럼 좀 더 심화학습, 약간 수준을 높여서 해봅시다. 내 자식을 위해서 내가 기도하는 것은 무슨 기도입니까? 이방인의 기도죠. 왜? 남의 자식을 위해서 기도 안 했기 때문에. 그렇잖아요. 내 국가와 내 민족과 내 나라, 앞에 내가 다 들어가죠.

 

축구할 때 우리나라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 이방인의 기도입니다. 일본하고 축구하는데 일본이 한골 넣었다. “주여,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특히 요즘 시대에 큰일 나겠죠. 니는 매국노다. 일본에 가라고 돌 던지고 하겠죠. 지금 이 시대에 말입니다. 지금 전부 다 일본 안 간다고 하는데 지 혼자 대마도에 간다고 나발을 불면 그거 욕 얻어먹겠죠. 보세요. 나라는 것이 홀로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어디 집단화되어 있죠. 집단화되어 있습니다. 자아의 확장입니다. 나라는 범주가 큰 범주에요.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죠. 다섯 살 애한테 사탕을 주면 애는 더 이상 행복할 수가 없어요. 최고의 행복이에요. 근데 그 애가 나중에 50년이 지나서 한 55살이 되면, 그 애한테 사탕을 주면 이빨 상한다고 화를 냅니까? 뭐가 확장된 거예요. 자아가 확장된 거예요. 자아가. 자기 욕심이 점점 더 확장 된 겁니다. 보통 남자들이 아내한테 불만이 그거에요. 처음에는 작은 거 하나에도 만족하고 웃고 남편에게 고맙다고 했는데, 이제는 살면 살수록 요구하는 바가 점점 늘어나가지고 나중에는 남편의 능력으로서는 다 수용할 수 없는 요구조건이 나왔을 때, 차라리 집에 들어가지 말고 직장에서 잔업이나 계속 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돈이라도 생기니까.

 

직장에서 집에 들어가면 그 다음부터는 아내 마음을 달래줘야 하니까. 요구조건은 심하지, 너무 턱없이 요구조건이 많으니까 집구석 들어가기가 싫은 거예요. 빙빙 돌다가 새벽에 들어가서 “아는? 밥 먹었나? 자자!” 이 세 가지로 끝나버리죠. 그런 남편에 대해서 아내가 하는 말은 “당신은 결혼 한지 몇 십 년이 흘렀는데 하나 되기를 자꾸 거부하고, 당신은 당신 일을 왜 자꾸 고수하는 데만 관심이 있느냐? 나는 당신을 도와주려고 했는데 당신은 왜 나를 발로 차버리느냐?” 이렇게 이야기하죠. 그럼 남편이 하는 말이 “니가 나에 대해서 알아? 니가 해봐야 잔소리밖에 안 돼. 나를 믿어.” 이렇게 하거든요. 그럼 여자가 하는 말이 “믿을 만해야 믿지. 믿으라는 것만 수 백 번 되풀이 하는 멘트만 또 하고 하는데.”

 

이방인들의 기도라고 하는 것은 이게 유대인이 할 기도하고 비교해보세요. 여기는 빈자리가 있다는 거예요. 빈자리가. 그런데 이방인들의 기도는 뭐냐, 나에게 있는 그 빈자리를 채워달라는 거예요. 나를 위한 빈자리. 내 욕망을 위한 빈자리. 욕망의 결핍에서 오는 아쉬움. 뭔가 알 수 없는데, 뭔가 계속 추구하는 게 있는데, 그 추구하는 욕망을 미흡하니까 그걸 채워달라는 거죠. 예를 들어서 자식이, 딸이 좋은 대학 가기를 기도했는데 좋은 대학 갔습니다. 그러면 이방인의 기도를 멈춥니까? 또 합니까? 또 하죠. ‘이왕 좋은 대학 들어간 것, 얼굴도 못생겼는데 취직이나 잘 돼서 끗발로 중매해서 빨리 결혼시켜야 되겠다.’라는, 얼굴 못 생긴 게 자식 탓인가, 지 탓이지. 이런 의도를 가지고 계속 기도할 것을 찾는 거예요. 기도할 꺼리를.

 

그래서 교회에서 목사가 기도하라고 하면 그 다음부터 교인들이 바빠요. 기도 할 꺼리를 계속 찾아내는 거예요. 그다음부터 욕심 부리는 시합에 나서는 거예요. 세상에, 금요일 밤에 7시부터 11시까지, 전에는 12시까지 했는데 코피 나서 안 되고. 7시부터 9시까지 하는데 커피 두 잔 마셔가며. 이 시간을 채우려고 하면 계속 욕심을 개발해야 돼요. “우리 애들 둘 군에 갔는데 제발 이제는 영창가지 말고 곱게 있으면서 칭찬받게 해주시고 어떻게 제대하고 나오자마자 취직자리 알아봐주시고..,” 이거 개발하는 것은 인간의 주특기인데 못할 일이 있어요? 이러다보면 방언도 가끔 터지고요. 기도 응답받은 것처럼 착각하잖아요.

 

모든 이방인의 기도는 인간의 욕망에서 나온 거고요. 메시야는 인간의 욕망을 죽여 버립니다. 부정해버려요. 이 이방인의 기도로 인하여 내가 죽었다는 겁니다. 니가 하는 기도 때문에 내가 죽은 거예요.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멈출 수가 없어요. 왜? 우리는 지금도 육신의 기도를 할 수밖에 없어요. 기도라고 하는 것은 육신의 기도밖에 없어요. 내 욕망이, 내 욕심이 나를 가만두지를 않아요. 지금은 뭐 딸을 위해서 기도 안하죠. 딸에게 무슨 일이 있어보세요. 대박에 딸을 위해서 기도하죠. 이거 뭐 금방 나오죠.

 

인간의 존재는 자극하면 그다음에 반응을 나타나게 되어 있거든요. 존재라고 하는 것은 내 육체만 존재가 아니에요. 내 딸과 아들이 내 존재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러면 아들이 아프다는 소식이 들리게 되면 교회 예배드리다가도 뛰쳐나갑니다. 예배시간에 설교 안 들어와요. “어떻게 됐는데? 그래, 내가 가볼게.” “엄마! 교회 아니가?” “지금 교회고 뭐고, 뭐가 중요해? 우리 아들 아픈 게 중요하지.” 이미 아들이 남이라도, 다른 육체라도 내 자아의 확장이기 때문에 자극받으면 바로 나타나고 그 반응은 이방인의 반응이죠. 가면서 그냥 가지 않아요. 운전하면서도 ‘주여, 주여, 내가 회개하오니, 주님도 쫀쫀하지. 그때 십일조 반만 냈더니만 그걸 문제 삼고 주님도 뒤끝이 세다. 그걸 문제 삼아서 내 아들을 조집니까? 이제 회개하라고. 알겠습니다. 회개할 거니까 아들하고 어떻게 빅딜 합시다. 십일조마저 채울 테니까, 작정한 것 마저 채울 테니까 아들 살려주세요.’

 

이게 지금 누구하고 거래하는 거예요? 악마하고 거래한 거잖아요. 모든 게 ‘예’인데, 오늘 제목을 ‘예’라고 할까? 모든 게 ‘예’거든요. ‘아니요’는 누구만 하라 이 말이에요? 예수님만 ‘아니요’라고 하게 하세요. “할 수 있거든 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옵소서.” ‘아니요’는 예수님만 알고 있는 ‘아니요’고 우리는 ‘아니요’가 뭔지도 몰라요. 예수님만 ‘아니요’한 것이 ‘아니요’고, 그 예수님이 그 ‘아니요’를 처리했다면 우리 성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예수님의 일방적인 합력하여 선이 되는 겁니다. 선이 되는 거예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져야 돼요. 달라져야 됩니다. 우리 힘으로는 못 고쳐요. 주께서 박살을 내야 돼요.

 

기도해놓고 그 기도가 왜 응답이 안 되고 좌절이 되는지, 더구나 내 선택이, 내가 공들인 선택이 한꺼번에 응답이 되지 않고 무의미하게 날아가 버릴 때, 다시 한 번 나라는 것이 무가치하다는 것. 실없는 농담으로 살아온, 내 일에 대해서 고민한다는 자체가 시건방진 일이에요. 내 일에 대해서 고민한다는 것은 반드시 선과 악의 체제가 동원됐기 때문에 고민하거든요. ‘그때 내가 좀 착했으면. 내가 너무 악했나.’ 선과 악이 이미 거기에 말려들었다는 말은 악마의 꼬임에 말려들은 거예요. 주께서는 발목 확 잡아당기죠.

 

선이 어디 있고 악이 어디에 있느냐? 내가 일한 것이 선이고 바로 내가 일하지 않은 것이 악이죠. 새 언약에 있어서는. 이미 십자가로서 저주가 없는데 왜 자꾸 저주를, 저주를 의식한다는 자체가 그동안 엉뚱한 기도를 해왔다는 그 증거잖아요. 결국 주님의 기도의 응답은 뭐냐 하면은 우리가 엉뚱한 기도만 한다는 것을 노출시키는 그 자체가 주님의 기도의 응답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주께 감사해야 돼요. ‘아, 내가 수준이 이거밖에 안 되는구나! 주님은 고민거리도 아닌데, 내가 알아서 내 문제에 대해서 지레짐작 벌벌 떨면서 고민하고 있구나! 이것 때문에 주께서는 그 잔을 마셔야 되는구나!’

 

우리를 구원 안 하려면요, 그 잔을 안 마셔도 돼요. 주님께서 쓴 잔을 마셨다는 말은 주님 홀로 구원받으려고 한 게 아니고, 바로 내 문제 때문에 벌벌 떨고 있는 나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께서 쓴 잔, 십자가를 졌잖아요. 십자가를 지신 게 쓴 잔을 마신 거잖아요. 이미 마셨어요? 안 마셨어요? 마셨으면 이미 끝났네. 모든 게 예스네요. 제가 주일 낮에 이야기했죠. 분쟁의 소지는 이미 끝났다고요. 내 인생에 대해서 왈가불가할 그걸 자꾸 문제 삼지 마세요. 이 분쟁은 이미 끝났어요. 이미 구원받았는데, 다 이루었는데요. 뭘. 근데 왜 자꾸 분쟁을 내가 일으킵니까?

 

우리가 정신을 어디다 팔고 있어요? 십자가에서 눈 돌려버리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남은 잘 사는데 나는 못 산다. 남은 만사가 형통한데 나는 왜 이래되느냐, 타인과 비교하고 눈을 돌려버리니까, 십자가에서 눈이 돌아가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안과에 가든지, 뭐 교정을 받든지. 똑바로 십자가만 증거 하는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만. 그 십자가는 믿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다 이루었다는 뜻이고 십자가의 효과로서 내가 어설프게 산다는 것, 없어져야 될 것이 맞구나! 늙어죽는 것이 맞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람이 젊을 때는 화장을 해도 살아요. 그러나 늙어버리면 어디부터가 뺨인지 어디부터가 눈인지 몰라요. 왜? 이게 주저앉아버렸으니까. 무너졌으니까. 무너져버렸으니까 이걸 억지로 눈썹을 그려줘야 이게 옛날에 눈썹이 있던 자리인가가 그때 드러나요. 입술을 빨갛게 그려줘야 여기까지는 입술이고 여기는 입술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고요. 전부 다 근육이 하나로 무너져 내린다니까요. 석고 물에 녹듯이. 지금은 그렇지만 나중에는 정신도 무너져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 때부터 비참하라고 태어난 인생, 엉뚱한데 마음 두지 말고,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는 것이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기쁨으로 날마다 새롭게 솟아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대전-115강 마태복음26장 36-46절(겟세마네 기도)20191029-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9
 임청일(IP:125.♡.161.29) 19-11-03 17:37 
믿고 보는 이미아표 녹취록. 감사.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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