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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9 14:32:23 조회 : 221         
23강-호 6장 3-5절(온통저주)200108-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61.84.208.92)
23강-호 6장 3-5절(온통저주)2001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6장 3-5절입니다. 구약성경 1260페이지입니다.

호세아 6:3-5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여호와를 알려주마.’ 하는 뜻이지요. 그런데 ‘알려주마’ 하는 거기에 담겨 있는 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사나 인간의 기대에 절대로 부응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요청한다고 계획을 변경하거나 하는 일은 없다는 겁니다.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적절한 때에, 새벽에 해가 뜨는 것처럼, 그리고 계절 따라서 비가 올 때 비가 오는 것처럼 항상 요지부동, 하나님의 계획에 차질이 없고 흔들림이 없다, 한결같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흔들림이 없고 한결같은 분이다. 자신의 계획을 초지일관, 일관성있게 밀어붙이는 분이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는데 그것은 그만큼 인간들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하신 겁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어떤 혜택을 입고자 해서 다급하고 아쉬운 일이 있으면 다급하고 간곡하게 사정사정 하면서 하늘을 향하여 호소하고 있는데 그러한 호소가 하나님 보시기에 본문 5절의 말씀처럼 “심판을 너희들이 받아 마땅한 것 맞지? 너희가 필요할 때 하나님을 찾는 것을 보니까 너희라는 작자는 하나님한테 저주받아 합당한 것 맞잖아. 하나님의 뜻을 변경시켜보려고 애쓰는 것 보니 너희는 진짜 내가 소개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너희들이 아쉬워서 상상한 거짓하나님인 티를 내는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철야기도하고 새벽기도하면서, 주여, 하면서 간절히 하는 그것은 지옥에서 부르짖는 지옥의 아우성에 지나지 않아요. 지옥이라는 티를 다 내는 호소밖에는 안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 생각은 전혀 없어요. ‘내 속 타는 것 왜 안 알아줍니까? 내가 이렇게 다급하고 어려운 일을 당했는데 왜 외면하십니까?’ 지금 시위하고 있는 거예요 .

하나님을 알 생각은 없어요. 다만 하나님이 날 안 알아준다고 분노하고 있는 겁니다. 그게 갈구, 간구라는 티로 막 나오고 있는 거고요. 분명히 하나님은 인간이 떼쓴다고 해서 계획에 어떤 차질이 있고 그런 것은 없어요. 일관되게 밀어붙이는 하나님의 그 계획을 평소에도 관심 있게 봐야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이렇게 예언만 하시는 것이 아니고 예언대로 이 땅에 오신답니다. 3절에 보니까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라고 해서 하나님의 그 일관된 계획의 마지막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직접 인간을 만나러 오신다는 거예요. 인간의 허접함과 그 엉터리는 다 들통나게 되어 있습니다.

원래 구약에는 하나님이 인간하고 만나면 인간이 죽게 되어있어요.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만날 수가 없어요. 그런데 만날 수 없는 분이 만나겠다고 직접 왔다는 것은 인간에게 어떤 대책도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오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안오실 분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오신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인간아, 너 자신에 대해서 너는 어떤 대책도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애를 쓰고 아무리 바르게 살아도 그것은 하나님 만날 수 있는 조건이 되지를 못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말은 인생 백날 살아봐야 헛살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면 그것은 5절의 말씀대로 그냥 심판이에요. 그냥 저주입니다. 온통 다 저주에요. everything, everybody, everyone, all, 모든 것이 저주에요. 이 땅에 저주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오시게 되면 저주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확 다가오지요.

마치 노아가 방주를 타가지고 주변에 자기가 살던 환경을 볼 때 전체가 물바다잖아요. 저주의 바다잖아요. 하나님이 오시면 전체가 화염의 바다, 불바다가 되는 겁니다. 어느 인간도 하나님 앞에서 그 저주에서 벗어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아신다면 간단하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복음을 아신다면, ‘이 세상 어느 것 하나 어떤 사태 하나 저주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이것 아시면 복음 아신다고 할 수 있어요.

모든 것이, 모든 것이 저주입니다. 교회는 불 안탑니까? 모든 것이 저주라는 인상, 느낌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저주의 반대말은 시상식이라고 보면 돼요. 화려한 드레스입고 하는 그것. 또는 디너쇼, 파티. 안그러면 손흥민이 뛰는 축구경기장. 이런 것들이 저주의 반대말입니다. 나이트클럽 같은 것. 열광적인 예배시간, 이런 것이 저주현상과 딱 반대되는 현상을 보여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오지만 저주를 받았으면 사람이 그냥 차분해져야 돼요.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해가 뜨기 전 새벽에 온 세상이 차분하고 고요하잖아요. 새소리도 새벽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닭울음소리가 먼저 새벽을 깨우지만 그 닭울음소리가 들리기 전의 그 정적, 적적한 상태. 특히 오늘 본문 3절에 새벽빛으로 온다 하니까 쉽게 생각하면, 저주받은 상태가 어떤 상태냐? 대규모정전상태에요.

갑자기 온 아파트고 어디고 새까맣게 전기가 다 나갔어요. 정전사태에요. 거기서 인간이 대단하다, 금메달을 땄다, 나라와 나라간 전쟁을 한다, 그거 뭐 별 의미없는 거예요. 깜깜한 저주의 세상에서 약간의 움직거림, 약간의 변화가 있더라도 그것은 저주라는 이 무게를 벗어날 수가 없지요. 성경을 보고 사람들을 만나면 제일 답답한 게 뭐냐 하면, 성령을 안 받아놓고 성령을 받았다고 티를 내는 사람, 참, 답답해요.

또 하나 답답한 것은 뭐냐? 성령 받았는데 받은 줄도 모르는 사람, 이 두 종류의 사람이 굉장히 답답한데요. 성령을 안받아놓고 성령을 받은 티를 낼 때는, 제가 보기에는 한 여름에 모피를 뒤집어 쓴 것 같아요. 굉장히 답답해 보이는 거예요. 차라리 성령을 안 받았으면 그 옷을, 가식적인 옷을 벗어내면 되잖아요.

성령 안 받은 사람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성령 안 받은 사람의 특징이 있어요. 뭐냐? 개인적인 캐리어를 끌고 다닙니다. 교회 올 때, 개인수레가 있어요. 그 수레에는 뭐가 담겨 있느냐 하면, 자기가 교회 다니면서 바르게 했던 것, 헌금했던 것, 착한 일 한 것, 기도한 것, 자기가 과거에 뭔가 봉사한 것, 그런 것이 자기 수레에 가득 담겨 있어요.

자기에게 중요한 그것을 다 담고 질질 끌고 갑니다. 이게 개인적사고지요. 개인적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뭐라고 하면 자기수레에 담긴 과거에 잘난 그것 후딱 보여주는 거예요. ‘나 이 정도로 봉사하고, 이정도로 헌금하고, 충성하고, 이정도로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하고 개인의 캐리어, 그것도 너덜너덜하고 다 닳아빠져서 별 볼 것도 없는데, 타이어 펑크도 다 난 그것 별 볼 것도 없는데, 그 개인수레를 계속 쥐고 있는 거예요. 그게 저주를 이길 수 있습니까?

멀리서 파도를 바라보면 피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파도가 일어나는 그 현장에서는 그 파도에 휘말리게 되는 겁니다. 저기서 산불이 났다. 그게 보이면 도망치면 되거든요. 그러나 산불 난 그 현장에 서 있는 사람은 그냥 온 몸에 무서운 화상을 입은 채로 그냥 돌아다니겠지요. 성도라는 것은 뭐냐 하면, 마치 호주산불에 화상 입은 코알라 같아요. 온 몸이 화상투성이가 되어서 돌아다닙니다.

성령받은 사람은 파도를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 한복판에서 된 통으로 파도에 당한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저주를 온 몸으로 다 받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어요. 어차피 저주인데요 뭐. 다 저주인데 무슨 의의를 두고 의미를 두겠어요? 자기인생에 대해서. 그게 바로 선지자에요.

거룩한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인간은 어떤 대책도 없고 어떤 대안도 없어요. 끝. 그 점을 먼저 알았다는 자체, 성령을 받아야 이걸 알 수 있습니다. ‘인간들끼리 백날 숙의하고 머리 맞대고 대책을 세워도 이것은 다 헛짓이구나. 저주를 뚫고 나갈 수 있는 역량은 인간에게는 없구나.’ 하나님의 성령을 받고, 온 천지가 하나님의 저주, 마치 노아방주 때 온 천지가 물천지인 것처럼 온천지가 저주의 불천지인 것을 발견할 때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요? 차분해지고. 그냥 웃지요. 그냥 웃어요.

‘북한에서 핵개발했다.’ 그냥 웃지요. 그냥 웃습니다. ‘너 나이 찼으니 논산훈련소에 입대해라.’ 그냥 웃지요. 그냥 싱긋이 웃어요. 내가 간다고 해도 저주가 안걷히고, 내가 안간다고 해서 저주가 더 짙어지는 것도 아니고. 이사야 6장 5절에 보면 이사야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뭐라고 하느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 이사야가 호주산불의 코알라라니까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처럼 하나님과 만난다는 자체가 인간은 대책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시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디에 오시는가? 마중을 나가야 되는가? 언제 오시는가? 시간계산을 해야 되는가? 언제 오시는가 하는 것은 호세아 6장 2절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제 3일에. 제 3일에 일으키시니까 제 3일이라는 그 시간을 하나님께서 만남의 계기로 삼으시는 거예요. 첫째, 둘째날이 아니고 제 3일에 하나님께서 인간과 만나십니다. 그러면 제 3일이라는 것은 어느 지점이 아니에요. 어느 공간도 아니고 ‘언제’도 아니에요. 제 3일은 하나님이 혼자 만드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 죄인이지요, 인간의 만남을 통해서 예언된 그 날, 세 번째 때, 그 3일이 발생되는 거예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

이렇게 하면 잘 이해가 안되시면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 미리 뛰어들어요. 그러면 이스라엘역사가 하나의 열차가 됩니다. ktx 보면 긴 차량을 두 대 합치는 것이 있어요. 복합열차라 하는데 마주보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열차에 미리 탑승해서 이스라엘시간을 끌고 오시는 거예요. 끌고 오시고 또 주님이 오시는 시간을 끌고 와서 그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 인간의 시간은 이스라엘의 시간이 대표하니까, 인간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을 꽈당, 마주치게 되면 거기서 없던 3일이 새롭게 발생되는 거예요.

안동에 가면 차전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새끼줄로 칭칭 엮은 바늘코 같은 것을 양팀이 똑같이 만들어서 거기에 사람 하나 태운채로 내달려서 세게 꽈당, 충돌시키는 전통놀이가 있거든요. 그처럼 인간이 인간의 역사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에요. 세상의 모든 역사, 이방민족의 역사는 그냥 내버려두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친히 언약으로, 약속으로, 선지자로 해서 미리 이스라엘 역사에 탑승을 했고 이스라엘본인은 이스라엘역사가 어디로 가는지를 몰라요.

그러나 같이 이스라엘역사와 동승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스라엘역사는 그 목표점, 완성을 향하여 질주하고, 또 다른 쪽에서 하나님이 생각한 시간이 마중을 나오는 그 틈 사이에서 제 3이라는 만남의 시간이 형성되는 겁니다. 제가 아까 이 세상은 하나님의 저주의 바다라고 이야기했잖아요.

요한계시록 14장 19-20절에 보면,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뭘 깔아놓았느냐 하면, 지뢰를 깔아놔요.

그 지뢰가 뭐냐? 하나님의 말씀, 율법, 예언된 것, 이것을 쫙 깔아놓게 되면 인간은 마치 숯불위를 걷는 것처럼 뭔가 데었다 하면 뻥, 뻥, 하고 거기서 말씀이 주는 지뢰가 폭발합니다. 그러면 거기서 저주가 나와요. 이 인간세상 자체가 말씀이 깔려 있고 말씀이 깔려 있다는 이것은 인간이 저주받지 않을 수가 없는, 모든 것이 저주가 될 수밖에 없는 환경을 하나님께서 미리 다 조치를 하신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갈라디아서 3장에서 율법의 시간이라고 해요.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여러분이 학교에서 역사를 배울 때 역사를 자꾸 측정하려고 하거든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어요.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예언을 가지고 자기 이스라엘이 잘해보려고, 버텨보려고, 될 수 있는대로 행복한 나라 만들기 위해서 말씀을 연구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역사는 희한하게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저주받은 인간의 지성과 이성과 예측, 예상한대로 가게 되지를 않아요. 그걸 결정불가능이라, 또는 계산 불가능하다.

이스라엘역사는요, 이스라엘사람들이 기대하는 만큼 그렇게 예상대로 결정한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한대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결정 불가능한 것이 계속 출몰하는데 그게 이스라엘예언이고요, 출몰하고 그것이 또 빠져나와버리고. 이스라엘사람들은 이스라엘내부의 그 율법을 가지고 뭘 해보려고 해도 항상 혼선이고 혼돈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인간들은 집단적시간이라는 것이 없고 개인적시간만 인간에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개인적시간이란 뭐냐? 인간이 각자 자기가 신처럼 행세하기 때문에 외부에서 뭔가 나에게 요구를 하게 되면 그 요구에 대해서 나름대로 자기의 답변을 준비해요. 그런데 그 내놓는 답변이 무슨 답변이냐 하면, 도덕률입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별로 나는 나쁜 짓 안했습니다, 이런 것이 계속해서 나오는 거예요. 사적인 자기규정을 계속 자기가 쥐고 있는 겁니다. 뭔가 가정에 일어 어렵다 싶고 우울증 걸린다 싶으면 이것은 우리 가정, 사적인 거지요, 우리 가정이 주의 말씀을 안지켜서 그렇다, 해가지고 교회 가서 철야하면서 “주여, 잘못되었습니다. 어서 우리가정이 건강한 가정, 화목한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할 때 그 규정자체가, 나를 보는 규정, 우리가정을 보는 규정, 그리고 하나님을 보는 규정이 전부 다 개인적인 도덕률에 바탕을 두고 하나님과 거래에 나서는 거예요.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십일조 한번 떼먹었다고 그런 난리를 치다니 이것은 너무합니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떼먹은 것 다 곱빼기로 토해놓을 테니 다시 원상복구해달라.’는 이것은 전부 다 ‘나는 그다지 저주받을 인간 아니고, 지옥 갈 인간 아니고, 그다지 나쁜 인간 아닙니다.’ 하는 뜻이에요. 사람이 개인적인 규정을 하게 될 때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항상 자기는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자기는 항상 좋은 사람 편에 속해요.

다른 사람을 보고 저 사람 어떠냐고 할 때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이 둘로 규정을 한다고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그런데 그 좋은 사람편에 항상 자기를 포함시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특징이 뭐냐? 이스라엘 사람중에 좋은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요? 참 많겠지요. 점잖고, 예의바르고, 착하고, 자기 인생에 책임질 줄 알고, 질높은 인간과 질낮은 인간을 구분할 줄 알고요.

철난 인간과 철없는 인간을 가려낼 수 있을 정도의 안목과 윤리적인 이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스라엘사람들인 거지요. 그런데 이스라엘나라의 운명은 집단적인 멸망입니다. 집단적인 파멸이에요. 개인적인 착함과 의로움, 정의로움이 수량적으로 많아지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 많은 정의로움이 아까워서라도 우리나라를 하나님께서 멸망치 않을 것이라는 양적인 계산, 그것이 이스라엘에는 통하지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망했느냐? 이유는 딱 한 가지, 왕이 없어서 망했어요. 다윗계통이 없어서 망했어요. 이것은 너의 사적이고 개인적인 자기 기준가지고 아무리 해명해도 해명이 되지가 않습니다. 반면에 세상 사람들은 ‘착하면 하늘에서 착하다고 감격해서 우리의 소원대로 적절한 때에 비를 내리고 가뭄과 풍해와 전염병이나 산불도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어쨌든간에 윤리도덕으로 나라를 정의로운 나라가 되고자 애썼던 것이 이방나라에요.

이스라엘을 제외한 이방민족입니다. 조선시대가 그랬고, 고려시대가 그랬고, 삼국시대가 그랬어요. 그 모든 역사라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미래는 결정된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면 앞으로 좋은 역사가 될 것이고 지금 만약에 우리가 나쁜 일을 하게 되면 우리 역사는 신의 노함을 받아서 망가진다는 생각이 이방민족들이 갖고 있던 공통점이에요.

역사를, 인간의 시간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겁니다. 짐작할 수 있다는 거예요. 조선시대 때는 점치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가뭄이 드니까 임금님이 그 주역하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왜 이렇게 오랫동안 가뭄이 드느냐?” 어떤 사람은 “이것은 임금님이나 왕자가 직접 나서서 기우제를 드려야 됩니다.” 그런 방법도 있고 여러 가지를 해보는데 기우제 드려도 비가 안와요. 아, 이것은 이 시대가 너무 악해서 총각이 남아돌고 처녀가 남아돌아서 비가 안왔기 때문에 나라에서 명을 내려서 나라에 있는 모든 처녀총각에 대해서 선을 보게 하는 거예요.

관가에서, 동사무소나 시청에서 그걸 주관하는 겁니다. 대구종합운동장, 혹은 축구장에서 대구 시내에 아직도 남아 있는 총각, 요새는 30부터 총각인데, 30부터 40까지 총각 26805명, 처녀는 더 많은데 36500명, 이래서 합동선을 보게 하면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실제로 조선시대 때 그렇게 했어요. 가만 생각해 보니 요즘도 그렇게 했으면 싶은데 대통령 뭐합니까?

강제로 눈에 안대로 가리고, 보면 뭐하겠어요, 그냥 작대기 내밀어서 잡으면 그걸로 그만 부부의 연을 맺게 하면 참 좋겠다, 인구문제는 절로 해결되겠다 싶어요. 돈도 별로 안들어요. 작대기만 있으면 되니까. 바로 그 방법이 우리나라, 이 나라, 사적인 이 나라, 개인적인 이 나라 잘되기 위해서 신에 대해서 그런 거래를 한 거예요. 협상과 흥정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일체 그런데 넘어가지 않는다는 거예요. 일관성 있고, 차질 없이 요지부동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요지부동이에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면 그것은 저주다. 그리고 이 세상은 저주 외에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저주밖에 없다.’라는 이 계획에는 하등 빈틈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자기 나라를 살리고자 해도 결국 완전히 망가졌어요. 그렇다면 망가졌다고 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민족과는 달리 다른 생각을 해야 됩니다. 왜 망했는가? 나름대로 도덕률을 발휘해서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그렇게 열심히 살려고 해도 왜 이 나라는 망했는가? 그 망한 이유가 있어요.

마태복음 3장 2절에, 이스라엘을 위한 개인적인 규정이나 기준은 소용이 없어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탑승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에 준한 유일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나타나서 하는 말, 하나님이 오신다는 말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천국이 가까이 온 거예요. 개인적인 착함의 기준을 내세웠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나오니까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이 독사의 새끼들아 니들이 구원을 받아? 개인적인 자기잘남의 기준을 자기에게 적용시키면서? ‘나는 천국가도 니는 천국가면 안돼.’라는 의식에 네 안에 가득 들어 있으면서?” 너희는 마귀자식이라는 거예요. 오늘 교회도 마찬가지잖아요.

복음, 복음, 해도 마음속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내가 천국가면 남들이 좀 안가주면 좋겠는데 이게 시건방지게 감히 내가 천국 가는데 자기도 천국간대.’ 이걸 밟아야 돼요, 어떻게 해야 돼요?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문제가 뭐냐 하면, 개인적인 자기를 천국가는 사람, 좋은 사람으로 집어넣는 그런 규정이나 기준 말고 완전히 나를 ‘저주받은 사람 맞습니다.’ 하게 만드는 집단적인 기준과 규정을 세례요한이 와서 전달하게 됩니다.

물속에 풍덩 뛰어드는 그것이 물세례입니다. 이것은 고관대작이고, 얼마나 착하고,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지 그런 것은 따지지도 않아요. 무조건 하나님의 계시에 같이 그냥 수장해야 돼요. 물에 잠겨서 죽었다가 다시 끄집어 나와야 되지요.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는 말, 주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주신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이 말은 곧 심판이 가까이 왔다는 거예요. 저주의 날이 가까이 왔다.

이 기준에 의하면 인간이 ‘나만 천당 넣어주세요’라는 개인적인 욕망과 구원욕심은 전부 다 주께서 없애버립니다. 구원받을 권리도 없는게 뭘 구원을 받아요? 마태복음 11장 12절에 보면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기존의 엉터리천국은 다 침략을 받는 거예요. 하나님의 오심은 곧 침략하러 오시는 겁니다. 박살내러 오시는 겁니다.

저주에 합당한 진노의 포도주틀에 집어넣어서, 하나님이 얼마나 이 땅을 향하여 분노하고 있음을 이 땅의 일을 통해서 다 들춰내기 위해서 오시는 거예요. 저주 그 자체를 드러내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이 생각하는 집단적규정이에요. 이 세상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저주에서 빠져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세 가지를 이야기하는데 첫째는 뭐냐? 세례요한이 말한대로 그냥 하나님이 다가오시는 것, 두 번째 하나님이 다가오시는 대목이 사도행전 2장 1절에 나옵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이것은 심판을 말합니다. 심판이 각 사람에게 미리 임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역사에 주님께서 미리 탑승하는 것처럼 오순절 성령받은 사람은, 오늘날 성령받은 사람은 주님의 저주와 그 진노를 미리 받은 사람이에요. 성령의 사역이라는 것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우리를 책망하는 겁니다.

‘이래도 너는 망할 인간이 아니야?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너 그런 소리 안할래 정말?’ 이것이 오순절 성령이에요. 아, 눈이 번쩍 뜨이지요. 호주에 산불 난 것처럼 온 천지가 벌건 하늘이에요. 호주에서 1600킬로 떨어졌다는 뉴질랜드의 하늘은 노랗다. 그냥 노란 것도 아니고 뇌래요. 정신이 없어요. 하늘이 노래요. 저주로 노랗다는 말입니다. 정전사태라니까요. 교회가 몇 개 있느냐, 우리나라에 기독교신자가 몇 명이냐, 그 숫자는 아무의미 없어요.

그냥 저주에요. 종교가 무슨 도움이 돼요? 기독교라는 종교가 무슨 도움이 됩니까? 하나님은 교회하고 일 안하는데요. 무슨 교회하고 일을 해요? 교회는 측정대상이 되고 계산대상이 돼요. 교인수가 몇 명이냐? 셀 수 있잖아요. 그게 저주를 벗어나는데 무슨 도움이 됩니까? 도움 안돼요. 네 교회에 의자 몇 개냐? 그게 무슨 도움이 됩니까? 네 교회 역사가 몇 년이냐? 그게 무슨 도움이 됩니까?

세 번째 찾아오심은 정말 어려운 찾아오심인데 갈라디아서 3장 23절입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믿음이 오기 전에! 믿음이 오기 전에! 믿음의 시간이 온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시간이. 믿음의 시간이 오게 되면 그 믿음의 시간과 짝을 이루는 시간이 뭐냐? 율법의 시간이에요.

그러면 율법의 시간이 와야 될 이유가 그 전에 뭐가 있었느냐? 율법의 시간 이전에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겁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이 이미 하나님의 요지부동, 인간이 어떻게 흔들어댈 수 없는, 변치 않는, 철저한 하나님의 천국요건입니다.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그 바탕, 전제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인간이 행함으로, 얼마나 착하게 혹은 악하게 살았냐를 일체 묻지 않는다는 거예요.

아까 했던 말 다시 해 봅시다. 중요한데요. 인간이 평소에 살아갈 때 “목사님, 내 본성은 어떻습니까? 내 마음가짐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으면 답변은 간단해요. 당신의 마음가짐은, 당신이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살았는지와 관계없이 딱 튀어나오는 것이 뭐냐? 도덕률입니다. ‘나는 이렇게 나름 성실하게 착한 사람 되려고 애쓰면서 살았습니다.’ 이게 톡 튀어나온다니까요.

평소에 내가 나를 볼 때, 나를 생각하고 측정하고 평가할 때 도덕률에 근거해서 측정하고 평가했고 다른 사람이 날 건드린다든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시비를 걸게 되면 반격하고 답변하는 그 내용 속에 ‘나는 이정도로 착한 사람인데 네가 날 왜 건드려.’라는 것이 항상 마음에 준비되어 있어요. 이게 평소에 꿈꿀 때나, 잠잘 때나, 밤이나, 낮이나, 행동할 때나 항상 이것이 울렁울렁, 꿀렁꿀렁, 우리 몸속에서 계속 자리잡고 활동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한평생 사는 것이 자기 잘난맛에 살아온 거예요. 그 잘난맛에 플러스, 예수까지 믿고, 십자가 피 믿고, 좋은 것 다 믿으라고 하니까 좋은 것은 다 믿는 거예요. 파운데이션 바르고, 화장품 또 바르고, 계속 덧발라봐야 저주인데요? 예수 믿고 지옥가고, 십자가피 믿고 지옥가고, 교회 다니고 산불 나고, 목사하고 지옥가고. 왜? 그 마음속에는 사적인 기준을 계속 자기가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내가 나를 볼 때 이렇게 본다는 개인적인 도덕적인 기준, ‘여전히 나는 착한 사람일거야. 남은 지옥가도 설마 내가 지옥 갈 리가 없어.’라는 기준을 갖고 있는 이상 그 사람은 성령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개인적인 수레를 끌고 있고 캐리어 끌고 가는 사람이에요. ‘아무리 나를 욕해라. 나는 착하다.’ 이 발상, 이것은 자기를 포함해서 보편적인 집단저주기준에 부합되지 않아요.

자기를 포함해서 ‘집단적으로 저주받아 합당하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나는 망하는 백성중의 하나다.’라는 그 기준과 이질적입니다. 완전히 달라요. 나까지 포함해서 저주에 집어넣는 집단적 기준이 개인한테는 없다는 말이지요. 성령받아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받아야 되는 그 기준을 주께서 어떻게 하는가?

성경에서는 두 가지에요.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그 이야기를 먼저 던져놓고, 믿음으로 의롭다하는데 그 내용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가 싶어서 430년 후에 율법을 줘버립니다. 특히 이스라엘이 대표적인 모델케이스, 시범케이스니까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줘버리면 그 율법 안에서 모든 인간은,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온갖 일이지요. everything, 그리고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항상, 늘, 한시도 쉬지 않고 모든 율법을 틈을 주지 않고 한시도 쉬지 않고 다 이루지 아니하면 저주 아래 있다. 율법에 뭐가 있는지 압니다. 소용없어요. 옛날에 열심히 했습니다, 하는 것 말고 지금, 한시도 쉬지 않고, 밥을 먹을 때나 잠을 잘 때도 한시도 쉬지 않고, 끊어짐이 없이, 그것도 한 두 개가 아니고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지키지 아니하면 저주아래 있다.

이것이 저주의 시간이에요. 안동의 차전놀이처럼, 혹은 ktx 복합열차처럼 그걸 끌고 주께서 탑승한 채로 율법을 주면서 이스라엘을 끌고 온 거예요. 망하라고. 저주받으라고. 개인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입장에서는 왜 우리나라가 망해야 되고, 왜 우리나라가 이방민족한테 멸망당해야 되는지 도대체 이유를 모르고 납득이 안되는 거예요.

아무리 봐도, 도덕적으로 봐도 다른 민족보다 더 착하고 더 성실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데 왜 그런지 이유를 몰라요. 그 다음에 오는 것이 뭐냐? 갈라디아서 3장 22-24절에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이게 뭐냐? 카지노 게임판 용어에 잭팟이 터졌다고 하지요. 우리나라의 어떤 부부는 라스베가스 카지노에서 백억 잭팟이 터졌다고, 떼돈 벌었다는 사람이 있어요. 화산의 마그마가 터지듯이 속에 있는 것이, 그 내막이, 이 우주의 비밀이 한꺼번에 터진 사건이 있어요. 그게 제 3일이에요. 십자가입니다. 사도바울은 십자가외에는 자랑할 것이,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했어요.

십자가는 품어 있던 하나님의 요지부동, 변하지 않는 그 모든 감추어진 비밀이 한꺼번에 터져버린 사건이 십자가사건입니다. 잭팟 터졌어요. 진실이 터져버렸어요. 왜 저주받아야 되고, 왜 십자가 믿음으로 천국 가는지? 그 많은 죄, 저주받아야 합당한 인간이 그 피가 뭐길래, 그 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어서, 하나님의 거룩의 요건에 충족된 존재로서 인정받아서 거룩한 하나님과 영원히 사는 혜택을 누리는지 그 모든 진리는 십자가에 있습니다. 그게 제 3일이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 3일, 십자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서 성도는 이제 거기 그 사건에, 그 파도가 일어나는 그 현장에 휘말리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 잭팟 터지는 그 현장에서 화산 폭발하듯이 같이 화산폭발한 자가 오순절 성령받은 사람들이고 오늘날 성령받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오늘날 성령받은 성도는 이 세상이 벌건 불바다인 것을 미리 앞당겨서 미리 보여줘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탑승했기 때문에, 참된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그걸 미리 보면서 세상 사는 것이 그렇게 가볍고, 흥겹고, 즐겁지요. 감사하고, 고맙고. 특히 가벼운 것이 중요해요. 굉장히 가벼워요. 남하고 다툴 필요가 없지요. 어차피 저주받을 인간인데요. 자기의 사적인 기준이라든지 자기의 도덕적이고 개인적인 기준을 찢어버렸으니까 이것은 집단, 십자가 피라는, 구원받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집단적인 이스라엘에게는 누구에게나 골고루 적용되는 그 기준에 합류해서 이제는 움직이는 기준이 된 거예요.

하나님이 보시는 집단적 천국기준을 몸소 안에 담고 보여주는 사람으로서 이 땅을 사니까 이것보다 더 크고,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신분이 또 있을까요? 그래서 끝으로 말씀드립니다. 성도는 뭐냐? 호주산불에 화산 뒤집어 쓴 활개치는 코알라. 저주를 뒤집어썼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자랑이나 움츠러듦이 없이 다 터놓고 살아가는 사람, 이것이 바로 성령받은 성도,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다시 보게 하옵시고, 우리 주님을 다시 보게 하옵시고, 특히 우리 자신을 다시 보게 하옵소서. 그동안 얼마나 마귀한테 벌벌 떨고 살았습니까? 자꾸 자기인생 챙기려고 하고, 캐리어 끌고 다니면서 그거 자랑하지 않았습니까? 그거 다 불심판에 던져버리게 해주시고 십자가기준만 장착해서 살아가는 성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3강-호 6장 3-5절(온통저주)200108-이 근호 목사.hwp (32.0K), Dow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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