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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0 17:41:00 조회 : 114         
20200207a 울산강의-레위기 25장 : 생명의 주기 이름 : 한윤범(IP:119.192.174.200)
20200207a 울산강의-레위기 25장 : 생명의 주기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5장,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너는 육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너의 곡물의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고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1~5절)

땅에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새겨 넣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땅이란 전적으로 인간이 주도적으로 자기를 위한 땅이 될 수 없겠지요. 땅을 산다는 것은 곧 땅에 하나님이 심어준 것을 건드린다는 겁니다. “야, 땅이다. 내가 알아서 해야지.” 이게 안 되고 건드리게 돼있어요.

그러면 땅은 누구한테 복속 또는 소속이 돼있습니까? 약속의 땅은 하나님께 소속돼있기 때문에 만약에 안식년을 지키라. 6년 동안 일하고 1년 동안은 땅을 완전히 푹 쉬게 하라. 여기에 만약에 도전하거나 반발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드는 셈이 되겠지요. 그래서 이 땅을 약속의 땅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약속의 땅이란 것은, ‘약속+땅’이겠지요. 그러면 이것은 어떤 땅과 차이가 있느냐 하면, 약속이 없는 그냥 땅과 차이가 나는 겁니다. 약속의 땅은 어디와 관련돼있느냐 하면, 아담도 따먹지 못한 생명나무, 생명과 관련돼있어요. 그러면 약속이 빠져있는 보통 땅은 어디와 관련돼있느냐 하면, 선악의 저주, 선악의 죽음과 관련돼있는 땅이 약속 없는 땅입니다.

그러면 이게 땅이라면 약속이 있든 없든 간에 인간의 눈에는 뭐만 보이느냐? 땅만 보이겠지요. 땅에서, 울산이라 합시다. 울산에 많은 사람이 산다는 것은 결국 이 땅에 태어나서 이 땅에 생일 축하한다고 노래 불러주고 돌잔치하고 요양병원 가고 장례 치르고 하는 모든 것은 어디로 인도한단 말입니까? 선악의 저주, 곧 지옥으로 인도하는 겁니다. 약속의 없는 땅에 사는 것은 곧 지옥과 연결돼있어요. 많은 사람이 지옥과 연결돼있습니다.

울산에 유명한 태화강이 있지요. 태화강 까마귀들이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지옥 가고 있는 거죠. 땅에서 태어나서 지옥 가는 거예요. 이 말은 지옥 쪽에서 방향을 화살표를 반대로 돌리면 우리가 이 땅에 왜 태어났는가?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는데 그 역사적 사명이 뭡니까? 이런 곳이 지옥이란 걸 보여주기 위해서 세상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러워하지 마세요. 절대로 부러워하지 마세요.

이 땅에 살면서 퇴직은 언제 했고 연금은 얼마 받고 요양병원은 어디가 시설이 좋은가, 그런 모든 순간들의 전부 다 약속이 빠져있는 약속이 없는 선악의 저주라는 그 범주 안에서 주고받는 대화들만 하는 거예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걱정한다. 처음 발견한 의사는 죽었더라. 그러한 모든 이야기들은 그게 약속이 아니고 약속이 빠져있는 땅, 그러니까 지옥으로 이끄는 삶(목적으로 이끄는 삶이 있지요)에서 가면서 바퀴 달렸거든요. 지옥으로 가면서 말할 수 있는 에피소드지요.

이 에피소드, 선악 쪽으로 가면서 여기서 어떤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심지어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사람들이 교회 다녀요. 교회 다니면서 열심히 복 받기를 원하고 있는 거예요. 교회 다니면서 약속이 빠져있는 사고방식을 하면서 그들이 약속이 없는 교회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거예요.

이건 굉장히 쉬운 이야기인데 죽음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죽고 난 뒤에 부활이 있는 죽음이 있는 반면에 두 번째는 부활이 없는 죽음이 있어요. 부활이 있는 죽음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있는 죽음 안에다 자기 백성만 예수 안이라는 그러한 개념으로써 자기 백성을 포섭하지요. 예수 안은 왜 부활이 되느냐 하면, 예수님 자신이 약속대로 오신 분이기 때문에 약속+땅이에요. 약속이 있는 땅, 예수 안. 약속이 있는 예수 안에 되는 겁니다.

이것은 부활이기 때문에 신약에서는 약속이라는 것이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고 허황된 것이 아니고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써 약속이 없는 게 아니고 약속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약속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겁니다. 약속이 제일 중요해요. 사람들은 이걸 이야기해도 안 듣는 이유가, 지옥의 힘이 사람들의 눈을 가리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지금 몇 분은 입을 가렸는데 입을 가리는 건 괜찮아요. 눈만 안 가리면 돼요.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이 세상의 신이 약속이 없는 선악적인 의식 있잖아요.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나는 잘났다, 너는 못났다. 선악적인 의식, 과거는 못났는데 지금은 잘났다는 것, 전부 다 자기 의. 이것으로 온 천지에 마스크로 해서 복음이 들리지 못하게 한다고 돼있어요. 복음의 광채를 비추지 못하게 한다고 돼있어요. 고린도후서 4장 4절에는.

누가 그렇게 했는가? 인간이 한 게 아니고 인간보다 센 것, 이 세상의 신이 인간들로 하여금 부활이 있는 죽음이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못 느끼게 하는 거예요. 부활이 있는 죽음의 특징은 뭐냐? 죽지 아니하면 부활이 없다는 뜻이거든요. 죽음의 최종 종착점이 아니란 말이죠. 왜? 죽음 뒤에는 약속이 있으니까.

몸을 구부려서 좁은 구멍을 들어간다 할지라도 안에 넓은 영토가 나온다는 그런 건 감수가 되는데 사람들은 복음 앞에 자기 자신 움직임을 자존심 상해서 내가 뭐가 못나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느냐? 나는 도저히 용납 못하겠다. 이런 식으로 버티기로 나오는 겁니다.

로마서 14장 17절 누가 읽어보세요. 신약 때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 말의 뉘앙스를 보세요.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게 아니다. 그러면 저주받을 선악적인 이 세상에서는 최종 관심사가 먹는 것, 입는 것이죠. 잘 먹고 잘 입으면 성공한 출세한 사람으로 보잖아요. 딱 지옥 갈 타입이에요. 스타일이 지옥 갈 스타일이에요.

보통 남녀가 선볼 때 부모가 강권해서 자기 딸에게 선보라 하면 갔다가 쀼루퉁해서 그냥 커피만 마시고 집에 온단 말이죠. 왜 그래, 하면 내 스타일이 아니라 하는 거예요. 지옥 갈 사람, 선악을 따지는 사람한테는 약속, 생명이 자기 스타일이 아닌 모양이에요. 먹고 마시고 출세하고 성공한 것, 그게 자기 스타일이에요. 그거는 부모들이 어릴 때 자기 부모한테 그렇게 배웠고 그 배운 것을 그대로 자식들에게 자기 스타일대로 전수하다보니까 그런 일이 벌어진 겁니다.

자식을 잘 키운다는 것이 자식을 죽이는 일이에요. 죽어도 여한이 없다, 죽어도 상관없다고 가르쳐야 되는데 죽으면 안 된다고 가르친 거예요. 죽음이 끝이라고 자꾸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은 먹는 것, 마시는 것,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그게 인생의 전부가 되고 말았어요.

약속의 땅에서 약속이 빠지고 그냥 땅이 돼버리면 이건 선악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잖아요. 죽음이니까 약속에는 뭐가 와야 됩니까? 죽음이 아니고 생명이거든요. 그런데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생명으로 가는 길은 땅에서 가기 때문에 반드시 죽음 속에 들어가서 부활의 날을 맞이한단 말이죠. 하나님께서 성도를 이렇게 죽음 속으로 몰아넣을 때 거부하지 마세요. 그걸 섭섭하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살리려고 하는 일이에요. 그 길 외에는 없어요.

흔히 보통 이런 이야기를 하지요. 이런 이야기를 할 때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이 들 텐데 구약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한다. 맞는 말이겠지요. 요한복음 5장 39절 말씀 아닙니까. 나에 대해서 증거 한다. 문제는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한다 해놓고 여기서 뭘 빠트리느냐 하면, 십자가를 빠트려요.

죽음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해야 되는데 죽음을 빼고 그냥 지식으로 예수님과 결부시키려고 그렇게 성경을 보게 되면 그건 가짜 예수입니다. 부활로 가려면 죽음 없는 데선 부활이 없어요. 약속된 죽음 안에서만 약속된 부활이 있습니다. 죽음이란 것은 이래나 저래나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반겨야 돼요.

그렇다면 오늘 레위기 25장에서 하나님께서 안식년이 있는 땅이다. 6년간 그 땅에 일하고 1년간은 푹 쉬게 해라. 경작하지 말고. 그러한 이유가 뭐냐? 그것은 방금 설명한 대로 예수님을 설명할 때 죽음을 집어넣듯이 하나님께서 약속이라는 것을 모세에서는 약속이 율법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안식년을 지키라는 것이 이 땅의 백성들에게 약속으로 율법으로 들어와 버리면 이것을 지키면 영생 얻는다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런데 신약에 오면 율법이 주어진 것은 그들이 영생 얻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생 얻을 자격이 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죄를 더욱 더 죄로 드러나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평소에 인간들은 죄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지 잘난 척하고 있단 말이죠. 그럴 때 하나님께서 지시와 명령을 줘버리면 자기의 본색이 확 드러나게 돼있어요.

그 대표적인 해석이 뭐냐? 안식이란 것은 인간 세계 인류에게 하나님께서 복지를 허락했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니까, 라는 식으로 해석을 해버리면 이 해석은 어떤 해석이 돼버리죠? 여기서 뭐가 안 나타나지요? 너는 복지를 받을 자격도 없다는 사실이 이 해석에서는 안 나오지요. 죽어 마땅함이 안 나온다니까요. 우리 하나님 좋네. 복지까지 챙겨주고.

6일 일하고 하루 쉬라. 고생 많이 했다. 하루 푹 쉬고 다음 또 회사 나가야지. 하나님께서 언제 인간의 노동문제까지 다 관여하셨습니까? 최저임금까지 관여하십니까? 복지라는 말, 인간의 정서적인 안정, 이런 것 때문에 안식일을 줬다는 거예요. 아닙니다. 모든 율법은 인간의 죄를 들춰내기 위함이에요. 어떤 죄? 나는 하나님께서 이런 복지혜택을 받아야지, 라는 자체가 자기 주제파악을 못한 바로 감추어진 죄가 되는 겁니다.

오히려 안식년을 지키라는 명령을 따라서 복이 올 것을 기대했건만 복은 안 오고 반대로 저주가 왔다면 이것은 정말 이스라엘 백성에게 합당한 조치입니다. 안식년 지키면 하나님께서 복 줄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했었는데 복은커녕 나라 자체에서 추방돼버리죠. 그래서 율법을 주셨다는 것은 인간에게 오류가 있다는 것이고요 인간은 처음부터 오류가 있는 거예요. 안식년을 지키라고 한 것은 그 오류를 추적해 들어가는 겁니다. 안식년을 던져놓고 던져놓은 그것을 기준으로해서 추적해 들어가는 겁니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 1장 7절 같은 경우에 이런 말씀 있죠. 네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율법을 따라 살라고 돼있다고요. 그러면 네 하는 일이 잘 될 것이라고 돼있어요. 그런데 인간에게 좌로나 우로나 벌써 본인에게 결정돼있습니다. 인간이 있고 자기가 길을 간다면 여기는 좌측, 여기는 우측이면 본인이 결정돼 있잖아요. 그런데 이것을 빼는 거예요.

자기가 이익이냐, 손해냐를 따지면서 자기 이익대로 간다면 그것은 율법을 따라서 가는 것이 아니고 기준이 율법 기준이 아니고 누구 기준이에요? 내가 잘 돼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기준이 되죠.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서 이 자아를 긁어내라 했지요. 긁어내고 그 자리에 뭐가 들어갑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거든요.

그러면 이것은 결국 무슨 경쟁입니까? 나냐, 아니면 말씀이냐?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야 되느냐, 아니면 말씀을 위해서 살아야 되느냐? 늘 이런 대치되는 기준으로 자기 정체를 들춰내는 대상이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는데? 왜 살지? 결혼했다. 결혼 왜 했는데? 나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나오잖아요. 나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기준을 발휘할 때는 그 기준이 뭐냐 하면, 어느 쪽이 내가 행복할 것인지로 기준을 정하겠지요. 이게 바로 안식년이나 모든 율법이 네가 지옥 가는 그런 종류라는 것을 들춰내는 겁니다.

만약에 목사가 개척교회 하나 세웠다. 그러면 말씀 위주로 살겠어요, 안 그러면 자기가 개척교회 목사 위주로 살겠습니까? 나는 개척교회 성공하겠다는 위주로 살겠지요. 그게 바로 오류가 되는 겁니다. 그런 오류를 인간 스스로는 뽑아내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계속 율법을 주고 말씀을 줌으로써 비로소 내가 걸치고 있는 내 기준이 한 꺼풀 두 꺼풀 날아가는 거예요.

아까 로마서 14장 17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게 아니다. 잘 먹고 잘 입는다고 해서 하늘나라 도착한 게 아니에요. 그럼 하늘나라는 뭐냐 하면, 먹는 것이 아니요. 항상 성경에서 ‘아니요’ 할 때는 이미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말은, 율법이 스스로 완성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관리하고 우리에게 신경 쓰는 것이 율법이 완성된 그 빛 앞에서는 시시하기 짝이 없음을 나타낼 때 그게 마음속에 평강이 찾아온 거예요. “붙들지 말아야 할 것을 붙들었구나. 내 목숨 안 붙들어도 되는데 괜히 붙들었어.” 이러한 기쁨의 반성이지요. 결국 환희 속에서의 자책이죠. “아이고, 쓸데없는 나를 위해서 살았구나.” 그게 내 인생 목적도 아니고 의미도 아닌데 것을 밝히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주어진 기준이 어떻게 스스로 완성되어 가는가를 우리는 지켜보면 되지요. 내 안에 들어온 말씀이 내 위주가 아니고 오직 말씀 위주로 되어 가는데 우리는 휘말렸으니까 그 되어가는 추이를 과정을 지켜보면 되는 겁니다. 그것을 오늘 레위기 25장 본문에 적용시켜 봅시다.

안식년을 지켜라 할 때 지킬 생각하지 말고 안식년 스스로가 어떤 완성을 보이는지 그 추이를 보자. 안식년을 지키자. 6년 일하고 7년째 쉬면 그걸로 끝이냐? 끝이 아니에요. 25장에 보면 끝이 아니고, 8절에 보면,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칠 월 십 일은 속죄일이니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 제 오십 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라고 돼있어요.

안식년으로 모든 것이 종결되는 게 아니고 쭉쭉 더 나가지요. 스스로 안식년의 자체적인 완성은 뭐냐 하면, 6년 일하고 1년 쉬는 게 끝이 아니고 오십 년이 되는 날 모든 것이 종결돼요. 끝이 돼요. 여러분, 이런 것 다 아신다 치고 처음부터 간편하게 나가보겠습니다.

땅이 있습니다. 땅에 약속이란 이름으로 시간 요소가 들어왔어요. 시간은 뭘 목표로 하느냐 하면, 시작+마감, 마감 끝나면 또 시작+마감. 6년 경작하고 1년 쉬고 시작과 마감이죠. 또 그 다음에 이게 첫 번째 안식년이라면 두 번째 안식년을 뭡니까? 또 똑같아요. 시작과 마감. 이걸 비눗방울로 보세요. 안 그러면 헬륨가스 넣은 열기구로 봅시다. 공중에 붕붕 뜨는 거예요. 시작과 마감, 시작과 마감, 그러니까 이건 주기적이죠. 되풀이된단 말이죠. 이게 바로 질서가 되는 거예요.

땅인데 안식년, 율법이라는 약속이 들어왔다. 약속의 땅은 특징이 뭐냐 하면, 그 안에 질서가 돼요. 질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원칙과 원리가 분명히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율법이 없는 땅은 지옥으로 저주로 통하잖아요. 약속이 아닌 땅은 약속이 빠져있는 거예요. 그냥 땅에서는 부활이 없는 죽음 밖에 없어요. 이 땅은 무슨 땅이냐 하면, 질서의 반대가 혼돈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땅=혼돈으로 보고 혼돈 속에 있는 인간들이 스스로 질서를 뽑아낼 수 있는지를 묻는 거예요. 혼돈은 창조성이 빠져있는 상대를 말해요. 창세기 1장에서 혼돈인데 하나님의 창조가 있기 때문에 보기에 좋았더라가 되거든요. 보기에 좋지 않은 것, 뭔가 하나님의 원칙이 빠져버리면 보기에 안 좋아요. 이게 혼돈이 되는 겁니다. 혼돈이 된다면 혼돈의 이유가 있을 거예요.

혼돈의 이유가, 인간의 죄, 그리고 악마와 결탁된 인간의 죄성, 이런 것들로 혼돈이 야기된 거예요. 그래서 제 말은 혼돈된 사회, 살기 벅차고 힘들고 어려운 저주받은 이 땅에서 뭘 찾느냐 하면, 인간이 자기에게 주어진 혼돈 속에서 나름대로 질서를 뽑아내는 그 원칙을 보고자 하는 겁니다. 내가 살기 힘드니까 나름대로 애쓰고 노력하자. 그럼 주님께서 나름대로 애쓰고 노력하는 그런 뽐새를 보잔 말이죠. 그래야 네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아니까요.

여자가 결혼하고 아이 셋 낳았는데 남편이 일찍 죽었다 칩시다. 그런데 그 남편이 고위공직자였단 말이죠. 고위공직자로 고급정보를 미리 알아서 어디에 투자하면 아파트 몇 억 남는 걸 다 아는 그 정도 레벨에 있는 사람, 그런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고, 그리고 자기가 그런 계획을 입안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파트 사고 딸 둘과 잘 살았단 말이죠. 이런 정도로 가면 점점 더 승진하고 할 텐데 갑자기 그 남편이 자살했어요. 그 사람이 있던 곳이 기획재정부인가 그랬어요.

그러면 그 부인은 상당히 고급지게 살았지요. 자기 남편이 든든하니까. 그런데 남편이 죽고 난 뒤에 여자가 고등학생, 중학생 아이 둘 키운다고 그동안 일을 안 했네요. 경력 단절되고. 아버지 죽고 큰 딸이 하는 말이, 자기는 학교에서 반장하고 공부도 잘해서 아버지와 계획을 세워서 영국으로 유학하기로 했단 말이죠. 그런데 아버지가 죽었어요. 수입이 없어요. 영국은 물가가 비싼 데입니다. 엄마가 하는 말이, “유학 포기해라. 아버지 돌아가시고 수입 없으니 장학금 타고.” 그러니까 딸이 하는 말이, “엄마, 이 아파트 있잖아. 아파트 팔아서 나 유학 보내줘.” 이렇게 나온 거예요. 고등학교 2학년이.

왜냐하면 살던 가락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기 친구들의 자기가 얼마나 잘난 줄 아는데 여기서 자기가 비참하게 되기 싫다는 거예요. 그 딸의 입장에서 아파트 있으니까 아파트 팔아서 유학 보내 달라 하니까 엄마는, “그럼 나는 뭐 먹고 살란 말이냐?”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 집안에 뭐가 찾아왔습니까? 몰락했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은 몰락해도 괜찮아요. 왜? 처음부터 추락하고 처음부터 몰락하고 있는 중이었던 거예요. 그게 돈 잘 버는 아버지가 갑자기 죽으니까 진짜 현실이 등장했을 뿐이죠. 그런데 아버지가 살아서 돈 잘 벌 때는 가족들이 몰락할 줄을 모르고 있어요. 다른 친구들보다 출세하고 더 뛰어나기를 성공하는 그 생각 밖에 없단 말이죠.

주님께서는 이 약속의 땅에 약속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너희들의 혼돈에 빠졌으며 혼돈에 빠진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혼돈을 어떻게 하든 혼돈 속에서 나 잘 되기 위해서 어떤 질서를 따로 뽑아내려는 시도를 너희들의 꾸준히 해왔다는, 거짓된 시도지요. 그런 거짓된 시도가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준 겁니다.

“엄마, 아파트 팔자.” 그 소리 듣고 깜짝 놀랐어요. 목사님은 남의 가정사를 어디서 들었습니까? 이게 드라마 이야기거든요. <머니게임>이라는 드라마에요. 엄마도 만만치 않아요. 나는 뭐 먹고 사는데. 갑자기 아빠 죽으니까 각자 자기 살 궁리하기 시작했어요. 그동안 자기중심이라는 걸 애써 감춘 거예요. 내가 공부 잘하면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할까. 아버지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아버지 생각한 게 아니고 뭔가 없어질 때 나는 주님 생각이고 주님의 십자가, 거짓말 좀 하지 마. 전부 다 자기 위주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래요. 믿음이 없는 척하는 줄 알았는데 진짜 믿음이 없어요. 믿음이 없는 척한 게 아니고 진짜 믿음이 없는 거예요. 인간에게 혼돈세계에서 나름대로의 질서, 그리고 안정성을 얻었다는 것은 전부 다 나 위주였습니다. 이 땅에서 복음 있어야 돼. 그 복음 누구 좋으라고? 천국 있어야 돼. 그 천국 누구 좋으라고? 자기는 혼돈에서 빼달라는 거예요. 자기는 죄인에서 빼달라는 거예요. 나는 무조건 천국, 나부터 챙기고 보자는 겁니다. 그게 인간이 생각하는 그 질서라는 것, 좋으신 하나님의 본 내용이 그거에요. 오류에요. 그게 엉터리 해석이에요.

안식년 지키라 해서 안식년 지켰어요. 재밌는 것은 이스라엘이 안식년 지키고 망했습니다. 희한하지요. 안식년 지키고 망했어요. 희년 지키고 망했어요. 자기는 지켰다고 생각한 거예요.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열심히 안식년은 물론이고 안식일조차도 온 국민이 궐기해서 빨리 로마에서 벗어나려면 우리가 안식일 제대로 지켜야 된다고 그렇게 힘주어 강조해서 집집마다 안식일 지키는 것 감시까지 했어요. 망했어요. 망했습니다.

안식일 지켰다는 그 질서요, 안정된 원칙, 그것 누굴 위함입니까? 그건 자기 자신을 위함이죠. 그래서 여기서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둘을 생각하면 돼요. 하늘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요. 인간의 해방입니다. 벗어남. 요새 중국에서 빠져나오면 그게 출애굽이에요. 해방이에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지역에서 벗어난 해방입니다. 완전히 전세기 타고 온 사람들 해방감을 느꼈을 거예요.

첫째는 정치적 해방이에요. 정치적 해방을 다른 말로 생존보장, 생존위협으로부터의 해방.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바로 이 해방만 알았어요. 우리가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는데 이제는 더 이상 노예생활하지 않 해도 된다, 라고 정치적 해방, 자기의 생존, 목숨 보장하는 쪽으로 우리가 가야 될 곳이 그곳이다. 젖과 꿀이 흐른다는 말은 이제는 젖과 꿀을 퍼먹기만 하면 된다. 이런 관점에서 해방을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쪽 애굽 땅에서 이쪽 애굽 땅으로 옮겨가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그들이 정치적 해방을 생각할 때에 주님께서 이 땅과 땅 사이에 뭘 집어넣습니까? 광야를 집어넣었지요. 오늘 레위기 25장 2절에 보게 되면,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했지요. 그런데 그 땅에 들어갈 때 반드시 땅과 땅 사이에 뭐가 들어갑니까? 광야가 들어가지요.

지금의 생존과 나중의 부활 사이에 죽음이 들어간다고요. 그러나 그들은 자기가 죽어야 될 이유를 몰라요. 그들은 광야를 겪어야 될 거기에 대한 합리적 타당성을 모른다고요. 납득이 안 돼요.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름길이 있는데 왜 40년 동안 광야 헤매다가 다 죽게 하느냔 말이죠. 사막에서 우회할 길이 있는데 왜 의도적으로 사막 한 가운데를 통과하게 하느냐 말이죠.

그것은 그들의 몸에 맞는 정신에 맞는 땅은 광야가 적당합니다. 광야가 적절해요. 다시 말해서 너희는 살 수 없다. 사막이라는 것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조건들이 없어요. 죽으라고 있는 게 사막입니다. 사막에서 산다가 아닙니다. 사막에서 죽는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제발 사막에서 죽을 때 그냥 죽지 말고 죽어야 될 이유 알고 죽으면 내가 너희를 생명의 땅에 넣어줄게. 이게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코스모스, 질서에요. 원칙입니다.

지금 천국, 지옥이 문제가 아니고 본인들의 본인이 누군지 모르고 있다는 게 문제에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성경 보면 너무나도 성경에 대해서 잘 알지요. 하지만 막상 생존 문제에 어떤 사태가 벌어지면 아까 같이 아버지가 졸지에 돈 벌어주는 가장이 죽어버릴 때는 자연적으로 반항하고 반발하고 동시에 다른 가족은 어떻게 되든 유학 보내 달라.

친구들은 내가 반장이고 공부 잘한다고 희망을 걸고 있는데 아버지 죽어버리면 내 인생, 내 꿈은 어디서 찾느냐, 엄마? 이렇게 나오는 거죠. 엄마가 내 입장 돼봐. 지금 친구들은 나한테 주목하고 있다고. 그런데 지금 유학 못 가면 내 자존감을 어디서 찾느냐, 이 말이거든요. 애들 입장에서는 오히려 엄마가 자기를 이해 못한다 생각하는 거예요.

언젠가 설교 시간에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20대 생각은 대학 가고 취직하고 집 사고 결혼하고, 끝. 대학 가고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집 사든지 집 사고 결혼하고, 이것 이외는 다른 생각 없잖아요. 이게 인생의 전분에요. 먹는 것, 입는 게 전부에요. 따라서 여기에 대해서 부모라도 안 도와주면 부모를 원망한다고요. 부모는 내 꿈을 막는 사람이라고 하거든요. 부모가 만약에 예수님이라면 자식들의 누굴 죽이는 거예요? 예수님의 가슴에 칼을 꽂는 거예요, 그게.

그걸 자식 탓할 수 있습니까? 아이고, 철없어라. 네가 인생 살아보면 안다고 하지만 문제는 인생 살아보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도대체 그 사고방식이 처음부터 태어날 때부터 잠복돼있는 이미 그걸 품고 태어났다는 것. 하나님의 가슴에 칼을 꽂을 그런 속성을 품고 태어난 거예요. 모든 인간은. 그리고 그것을 자기가 사는 원리원칙으로 안정된 질서로 확정 시켜버려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대안은 뭐냐?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하나님의 대안은 뭐냐? 주기성, 다른 말로 하면 반복성이죠. 시작과 끝을 계속 반복시키는 거예요. 시작과 끝을 반복하게 되면 20대의 철딱서니 없는 애가 이 소리를 듣는다면 나라는 인생은 언젠가 끝이 나야 된다는 것, 이걸 분기점이라 하는데, 뭔가 나는 마감을 향하여 가고 있다는 것. 시작과 마감이라는 두 요소가 있어줘야 그게 바로 하나님이 생각하는 질서에요.

그런데 철없는 아이들은 약속 없는 야들은, “너 그러다 죽으면?” “죽는 건 나중 문제고. 지금 나는 유학 가야 된단 말이야. 엄마, 아파트 팔고 내 유학비 보태줘. 젊은 데 내가 왜 죽어.” 죽는 것은 나중 문제라는 거예요. 죽는 게 나중 문제입니까? 이건 젊은 20대뿐만 아니고 80대도 마찬가지에요. “아버님 요양병원 가셔야 됩니다.” “야 불편하다. 내 살던 집 놔두고 남의 집에 왜 가느냐?” 이게 뭐냐 하면, 결국 하나님의 질서라는 것은 내 인생 속에 주기성이 들어온 건데 그 주기성은 뭐냐? 태어났으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 내가 죽는 것이 질서라는 것, 죽어 마땅하다는 사실.

안식년이 시작과 끝, 안식이라는 시작과 끝은 아까 했지요. 안식일부터 시작해서 안식년을 거쳐서 마지막 마감을 뭐라 했습니까? 희년이죠. 이 자체가 반복적인 주기성을 갖고 한다는 말은 항상 시작과 끝, 시작과 끝, 시작과 끝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백성들에게 알려줬습니다. 언젠가 끝 날을 네가 미리 아는 것이 네 속에 하나님의 질서가 들어왔다는 티를 내는 거다. 너는 끝을 보여주는 존재가 돼야 돼.

왜냐하면 희년, 기쁜 날은 끝이 끝답게 될 때 기쁘니까. 지금 네가 기쁜 게 중요한 게 아니야. 하나님이 기뻐하는 게 중요한 거야. 그것 때문에 네가 이 땅에 태어났어. 하나님의 기쁨이 성도 속에 들어와야 돼요.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죽음이 남아있더라도 일찍 감치 죽음을 자기 안에서 마지막 죽음을 체험하게 되는 원칙과 기준을 우리 안에서 작열하고 있습니다. 이게 성도지요.

시작은 죄로 시작했으나 끝은 부활이라는 것, 부활이 있는 죽음이라면 오히려 반겨야 되고 감사해야 되는 겁니다. 정치적 그리고 생존적 해방, 이건 안 돼요. 해방에 두 단계가 있는데 첫째는 정치적 해방, 또는 생존적 해방. 애굽에서 벗어났다 이 말이죠. 애굽에서 벗어났는데 이게 땅은 땅인데 약속의 땅이 아니고 광야가 나온 거예요. 속에 원망이 막 불 같이 일어나는 겁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나로부터 해방. 왜냐하면 약속의 땅이 내 나라가 아니고 나를 위한 나라가 아니고 나 말고 다른 분에 의한 나라거든요. 그래서 안식년이란 어디를 겨냥하느냐 하면, 아까 나왔지요. 25장 9절. 칠월 십일, 대 속죄일입니다. 대 속죄일을 겨냥한다는 것은 안식년 안에서는 뭐냐 하면, 누군가 나를 위해서 대신 죽고 있다는 사실, 이게 질서에요. 이게 굉장히 들어보면 고마운 일 아닙니까.

누군가 나를 도와주는 게 아니에요. 누군가 내 대신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죽음 빼놓고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 한다? 다 구라입니다. 거짓말입니다. 믿지 마세요.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함이지 예수님 존재를 증거 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 하는 거예요. 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심이지 예수님 저기 계시다, 그게 복음이 아니에요.

주님이 저기 계시다면, 그 다음에 필히 도와주소서. 이렇게 되지요. 도와주지 않습니다. 도와줄 것이면 예수님이 죽었겠습니까?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이 도와주는 거예요. 그 외에 다른 도움 필요 없어요. 그 죽음만이 부활이 있는 죽음이에요. 그동안 우리가 죽어야 되는 것은 선악적인 의식 때문에 죽은 것. 나는 잘난 척하는 것, 선악 때문에 죽거든요. 선악의식은 선악의식으로 해결책이 없어요.

그러면 뭐냐? 우리로 따먹지 못하게 한 생명나무에서 누군가 오셔야 돼요. 자체가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 했으니까. 요한복음 6장에서. 생명나무가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나에게 해방돼야 되는데 버티면 안 되잖아요. 나를 없애는 거예요, 나를. 그것도 즐겁고 기쁘게 없애는 겁니다. 집 안에 마당을 팠더니만 석유가 나왔다. 주께서 나를 없애는 방법이지요.

없애는 방법에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방법으로 없애버려요. “이런 짓을 하다니. 에라, 이 나쁜 인간아. 돈 벌어라.” “이런 짓을. 뻔뻔스럽게. 에라, 인간아. 네 자식 이번에 사법고시 합격해라.” 과분한 처사를 해서 “잘못했습니다,” “네가 이런 것 얻고자 했잖아. 너, 하나님 갖고 놀고 싶지? 그래 너한테 져줄게.”

마치 지난 낮 설교처럼 야곱이 하나님 이겨놓고 당황스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죠. “주여, 이럴 수는 없나이다. 제가 왜 하나님을 이겨야 됩니까?” “네가 하는 짓이 이기고자 하는 짓이야. 너 잘났잖아.” “아니옵니다, 아니옵니다. 저 잘난 것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자아를 긁어내지요. 그 사이에 말씀을 주신 분이 스스로 말씀을 이루어가는 방법.

그것은 내 인생을 내 손에 맡기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스스로 성취하시는 주님 손에 맡김으로 교체해나가는 방법은 뭐냐? 지금도 주님이 내 대신 죽으셨다. 이 울산에서 죽으셨다는 사실. 예수님의 죽은 흔적을 찾는 거예요. 내가 안 죽는 방법을 찾는 게 아니고. 주님의 질서가 들어오는 것이 사실상 인생 최고의 순간입니다. 내 안에 주님의 질서가 들어오는 것.

원래 창세기 1장의 땅이라는 것은, 세 번째 날에 땅이 있거든요. 물이 갈라져서 땅이 있어요. 물에 덮여있단 말이죠. 창조란 처음부터 땅을 만드신 게 아니고 물을 만들어놓고 물을 비켜놓고 땅이 나오게 하거든요. 마치 지하에 있는 마사일 기지에서 뭔가 덮여있는 것이 갈라지면서 위로 솟아오르듯이. 이미 있는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주께서 심어준 질서, 대신 죽었다는 속죄의 죽음, 그것을 바깥으로 드러내게 되면 그게 바로 영원한 천국이고 약속의 땅이 되는 겁니다.

그걸 드러내기 위해서는 물로써 묻혀야 되겠지요. 정말 이 세상 전체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지배받듯이 이 땅 자체가 부정당해야 되고 그 위에 사는 나도 부정당하죠. 이 땅 자체가 완전히 물로 덮이는 사건이 무슨 사건이었습니까? 노아 홍수지요. 이게 아버지 뜻이에요. 딴 것 없다. 너희들은 땅에서 어떻게 살 걸 생각할 게 아니고 아예 땅이 없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땅이 없다면 우리는 못 삽니다. 그러면 땅을 준다면, 땅이 없게 하고 땅을 준다면 이 땅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땅이 아니고 우리는 죽어도 마땅함을 드러내는 질서가 작용되는 땅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거예요. 그게 평강이고 은혜라는 거예요. 무지개 은혜 안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 안에 하나님의 질서가 오게 되면 이게 뭐냐? 우리 안에 뭐가 작동하느냐? 생명의 주기, 오늘 강의 제목입니다. 생명의 주기.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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