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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0 17:43:06 조회 : 90         
20200207b 울산강의-레위기 25장 : 생명의 주기 이름 : 한윤범(IP:119.192.174.200)
20200207b 울산강의-레위기 25장 : 생명의 주기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도록 하겠습니다.

전쟁이란 사람 죽이는 거죠. 죽이지 않는 전쟁은 전쟁이 아니죠. 하나님께서 전쟁을 하시는데 그건 사람을 죽이고자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죽일만한 해서 죽이는 거예요. 그럼 왜 하나님이 죽이느냐 하면 약속이란 타이틀을 걸어놓고 약속의 땅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은 다 나가라. 하나님이 주신 그 질서, 원리원칙에 부합되지 않는 사람은 약속의 땅에 살 수 없다. 내쫓기 위한 전쟁.

율법 줘놓고 율법이 하나님과 같이 살 수 있는 조건이 되는데 이 조건을 거부하고 무시하면 나는 너희들과 같이 살 수 없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조건에 부합되는 것은 어떤 것이고 부합되지 않는 것은 어떤 것이냐? 그걸 알려줘야 되지 않습니까, 라고 나올 때 그렇게 알려주는 환경을 광야라고 해요.

광야는 항상 약속의 땅 앞에 머뭇거리고 있어요. 쑥 들어가면 되는데 항상 요단강과 홍해 사이에 광야 있거든요. 홍해를 건너서 광야에 들어옴으로써 그들이 생각한 해방, 구원, 이것들이 전부 다 자기 위주였다는 겁니다. 자기 생각이었다는 것이 광야를 통해서 증거가 드러나는데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원망, 하나님에 대한 원망은 결국 눈에 보이는 지도자 이름이 뭐지요? 모세에 대한 원망이에요.

마태복음 5장 5절을 누가 읽어볼까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약속의 땅을 상속,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이거든요. 상속이란 반드시 맏아들이 상속을 받고 둘째, 셋째 동생들은 맏아들의 재산에 합류합니다. 이스라엘 원칙이 그래요. 모든 재산을 맏이에게 다 주고 그 다음에 둘째, 셋째는 맏이를 맏이라고 인정한 조건 하에 맏이로부터 삶을 보장받아요.

여러분 오빠나 형들과 매치시키지 마세요. 그 맏이가 맏이 아닙니다. 맏아들 되시는 로마서 8장에 나오는 맏아들 형상,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거예요. 세상의 맏이는 믿을 ……. 그러면 하나님께서 맏아들 자리를 비워두십니다. 맏아들 자리를 하나님의 아들이 차지하게 되거든요. 신약에 와서.

그런데 맏아들 자리를 비워둬야 되는데 사람들은 재산을 맏아들한테 다 주니까 맏아들 자리를 비워두겠어요, 차지하려고 하겠어요? 이걸 차지하려고 하겠지요. 그 대표적인 사람이 야곱 아닙니까. 야곱과 에서는 이 땅에 태어나기 전부터 붙들고 싸운 사이에요. 엄마 뱃속을 링으로 여기고 격투기를 벌인 거예요. 붙잡고. 누가 맏이를 차지하느냐, 누가 맏이가 되겠느냐?

하나님께서 철도 없는 두 사람을 엄마 뱃속에 집어넣은 것은 이 세상에 모든 전쟁은 누가 맏이인지에 관한 전쟁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리브가의 자궁 안에 원초적이고 시원적인 인간이 모르는 자기 모습들을 보게 한 거예요. 그 모습에서 싸우지요. 에서와 야곱은 싸우잖아요. 그래서 인간은 본인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던 간에 전쟁 중이다. 내가 복을 받는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야심덩어리 채로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모든 인간은 야심가로서. 어떤 인간도 여기서 예외는 없는 거예요.

맏이에게 주는데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할 때 기업으로 맏이에게 주는 상속으로 차지하는 거예요. 그런데 온유한 자가 어떤 자냐 하면, 마음에 순한 자, 성품이 어진 자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은 공자, 맹자한테 배우라 하세요. 유교하는 사람한테 배우라 하세요. 온유한 자는 누구냐 하면,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보다 천하에 온유한 자가 없다고 했거든요. 민수기에 보면.

온유한 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길들여진 자, 하나님에 의해서 철저하게 길들여진 자가 온유한 자에요. 신약으로 하면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철저하게 길들여지는 자,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철저하게 인정하는 자, 내가 내세울 권리는 애초부터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자, 맏이 덕분에 들어가게 됐지 내가 들어갈 만해서 들어간 게 아님을 인정하는 자, 이게 바로 온유한 자에요.

그래서 온유하지 않은 자가 온유한 자, 성도지요. 성도한테 시비 걸기를, “너는 뭐 잘났다고 크루즈 여행 가서 일본에 갇혀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걸렸나. 무슨 돈이 많아서 수천만 원씩 들여서 하느냐?” 할 때 온유한 자는 말하기를, “내가 갔나. 주께서 가게 하셔서 갔지.”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주께서 하게 하신 거예요. 수동형입니다. 피동적이죠.

그런데 묻는 사람은 뭐냐 하면, “인간은 지가 하고 싶은 걸 자기 의지대로 한다.” 자기가 평소에 살아가는 그 원칙을 딱 그걸 바탕으로 해서 너도 뭐 별거냐. 나랑 똑같겠지, 라는 식으로 시비 거는 겁니다. 그게 고라의 자손이에요. 고라의 당들이 모세한테 대들 때 너는 뭐 잘났는데 혼자 대장질하느냐, 라고 나왔거든요.

또는 미리암 같은 경우에는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흑인 여자를 들이느냐. 안 된다. 네 아내감은 누나인 내가 정해야 되지 네 마음대로 좋다고 정하면 안 돼. 흑인 여자는 안 돼, 이런 식으로 구스 여인이란 이방여자란 뜻이에요. 이방여자는 안 된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미리암한테 문둥병에 걸리게 했습니다.

문둥병 걸렸다는 말은 인간은 본디부터 주제파악을 못하고 있다는 거예요. 인간이 아프다는 것은 자기 본래 모습으로 돌아간 거지 과분한 벌을 받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동안 은혜의 폭이 너무 컸지요. 그래서 까불었던 거예요.

여기서 두 번째 시간에 중요한 대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쟁이란 걸 이야기했지요. 하나님은 인간을 상대로 전쟁을 합니다. 안식년, 시간이죠. 시간개념에 대한 전쟁, 개념을 두고서 전쟁한 겁니다. 인간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시간개념 사이의 전쟁으로써 계속 시도되는 거예요. 그래서 안식이란 율법을 준 거예요. 안식이란 시간에 대해서 네가 갖고 있는 시간 감을 내놔라 이 말이에요.

그러면 여러분한테 물어보겠어요. 여러분, 전쟁을 원하십니까, 평화를 원하십니까? 어느 쪽입니까? 당연히 평화를 원하지요. 고요하고 평온한 생활, 우리는 이걸 원해요. 그런데 고요하고 평온한 이 생활이 바로 하나님의 분노를 자아냅니다. 좀 이해가 안 되지요. 고요하고 평온한 생활은 뭐냐 하면, 인간들의 시간 계산이 부당하다, 잘못됐다는 거예요.

아까 안식일 할 때 시작이 있었고 끝이 있었지요. 그 다음에 뭡니까? 또 새로운 시작이 있지요. 사람들은 시간개념을 그렇게 가져가길 원하지 않아요. 인간은 주기성을 싫어요. 그냥 줄곧 잘됐으면 좋겠어. 끝까지. 자꾸 주기성 하면 어지러워서 안 돼. 사사기 11장 40절에 이번 수요 설교에 언급했습니다. 입다 이야기 나오잖아요. 수요 설교 때는 시간 관계상 다 언급을 못했지요.

40절 읽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여자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 여기 보면, ‘해마다’에요. 입다의 딸이 아버지의 객기 때문에 대신 죽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수요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암몬과의 하나님의 전쟁은 입다라는 사나이의 승리로 마감되는 게 아니고 그 마감은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입다의 억울한 딸의 죽음에서 승리가 마감돼요.

오늘 배운 걸 적용시키면, 인간들은 애굽이란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서 정치적 해방을 원하지요. 1단계. 정치적 해방이 뭡니까? 다른 사람이 나를 안 건드렸으면 좋겠어. 내가 제일 잘났고 편안하게 살 권한이 있고 나는 풍족하게 살 그만한 자격이 있음을 계속 그런 식으로 유지됐으면 좋겠다. 그걸 사람들은 평화라고 이야기하고 고요하고 평온한 생활을 추구합니다. 두 자로 말하면 ‘행복’이죠. 사람은 행복을 원해요.

하나님은 뭘 원한다 했습니까? 전쟁인데 인간은 뭘 원한다? 행복을 원하는 거예요. 여러분 상상해봅시다. 이사 갔는데 집 근처에 연못이 있더라. 낚시를 좋아한다. 그러면 인적도 드문 연못에 유명한 낚시터도 없고 근처에 민가도 없고 혼자 앉아서 연못에 낚싯대 드리울 때 얼마나 사람이 고요하고 평온하게 됐을까요. 아무 생각 없이 인생 산다는 것, 이렇게 살아야 사는 거야, 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그게 하나님 보시기에 철딱서니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바깥은 영적 전쟁 중인데 그런 감이 오질 않았어.

어항이 있는데 물이 이만큼 있고 금붕어들이 놉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금붕어들이 어떻게 놉니까? 싸우면서 놉니까, 평화롭게 놉니까? 평화롭게 노니나니, 하지요. 이게 갇혀있는 거예요. 자기 세계, 자기 상상의 세계에 갇혀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교회 올 때 이런 걸 원해요. 주님께선 선악적으로 나는 잘났기 때문에 행복해야 돼, 라는 그런 꿈들만 있는 곳에서 빠져나와야 이게 생명인데 생명으로 빠져나오질 못하고 찰랑거리는 고요한 물속에서 놀기만 하면 더는 소원 없다는 식으로 되는 거예요. 인생들이.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시간개념은 바로 이 개념,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시간개념입니다. 주기적이 아니라니까요. 여기 제가 사사기에서 입다 딸이 죽고 난 뒤에 처녀들이 그때부터 해마다 나흘씩 입다의 딸을 위해서 애곡했다. 주기성이잖아요. 반복성이잖아요.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이게 죽음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죽었다는 사실, 그것도 하나님과의 전쟁에서 죽었다는 사실 중심으로 그걸 되풀이하고 반복해야 되는데 십자가가 날마다 보여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십자가 때려치우고 나는 고요한 연못에 낚싯대 드리우면서 평안하게 인생을 보내겠다. 지금 이런 식이에요. 세상 보는 안목이. 이거는 갇혀있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 여기 있는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 구천에 떠도는 혼령들이에요. 빠져나가지 못하고. 프로야구시즌 끝나면 프로야구 기다리며 농구 보고, 농구 끝나면 배구 보고, 배구 끝나면 밤새도록 유럽의 축구 보고. 구천을 떠도는 혼령들이에요. 본인이 죽은 자인 줄 몰라요. 거기서 거기야. 어항 바깥의 세계를 보질 못해요. 이거는 성령이 임해야 되거든요.

모세가 받은 율법은 이런 목적이 아니에요. 이런 평화로운 게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이걸 평화라고 하지 않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안식이라고 얘기해요. 안식일 잘 지키면 네 인생이 안식할 것이라고 이야기해요. 전쟁개념이 없어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생각하는 시간개념은 뭐냐? 창세기 1장을 보겠습니다. 어떤 분이 중요한 질문을 해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창세기 1장에 이미 빛이 있잖아요. 밝은 곳은 낮이고 어두운 곳은 밤이 됐잖아요. 질서지요. 간격을 짜 맞추는 거예요. 카스텔라 구울 때 직각 맞추잖아요. 이 세상은 각이 지게 하나님이 만든 질서가 있는 거예요. 그 질서가 모여서 안식일이 돼요. 하루, 하루, 하루, 그리고 일곱 째 날. 분명히 이 세상에는 시간 쪼개기가 있단 말이죠.

그런데 인간의 머리로선 물리학자, 어떤 철학자 동원해서 시간을 왜 쪼개지? 시간의 쪼갬이란 상상도 못합니다. 그것도 1234567, 7주기로 쪼개는 이유를 몰라요. 물리시간에 그걸 배웁니까? 물리시간 시간은 7의 반복주기라고 배웁니까? 안 배우지요. 시간은 어디서부터 왔는지 모르지만 영원히 죽 간다. 영원히 죽 가는 것으로 돼있어요.

만약에 우주비행사가 우주선 타고 가다 창문 열고 까불다가 휴대폰 흘렸다. 그 다음 질문은? 휴대폰을 어디서 찾겠느냐고 물으면 정답은 뭡니까? 영원한 우주와 함께 영원히 사라지지요. 영원히 사라진 쓰레기가 되는 거죠. 이게 어항 속의 생각이거든요. 인간의 혼돈스럽고 살기 어려운 문제는 누구 아이디어에서만 해답이 있다? 인간들의 지혜를 끄집어내고 모으면 그게 해답이지 다른 해답은 필요치 않다는 것은 선악체계 안에서 악마의 지배 아래서 인간들의 아이디어입니다. 이게 모든 초중고대학에서 다 그렇게 가르쳐요.

끝은 없다는 거예요. 끝이란 말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끝은 끝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게만 있지 끝을 인정하지 않으면 오직 영원한 것 밖에 없다. 그럼 시작은? 시작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영원부터 시작해서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게 오늘날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마의 의식이죠. 악마의 사고방식입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것은 미신이다. 미신은 인간들의 과학이 발달되기 전에 자연변화에 대한 공포와 그리고 대처할 수 없는 어떤 압박감을 느껴서 나름대로 세상을 해석해보려고 만든 것이 종교라는 겁니다. 그들을 비웃지 마세요. 태어날 때부터 모든 인간은 그런 생각이 있었음을 과학이 노골화시켰을 뿐이니까. 불교도 마찬가지고 소위 개혁주의신학도 마찬가지고.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얘들 서슴없이 나오는 질문이잖아요. 하나님이 천지를 만들었다. 그럼 하나님 그분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라고 질문하는 거예요. 시작의 시작, 끝의 끝, 무한의 무한, 무한의 끝은 뭐냐? 수학에서 과학에서 우주의 끝은 뭐냐? 우주의 끝은 지구 똑 닮은 환경이 있을 것이다. 지구와 닮은 환경을 위해서 미국 나사가 백악관에 예산 세워라. 돈 내놔라. 연구하게. 왜? 지구가 잘못되면 빨리 탈출해서 이사 가야 되잖아요. 이사비용 미리 내는 거예요.

질문하신 분이 뭐냐 하면, 낮과 밤이 있는데 왜 4일째에 하늘에 광명이 있어 주야로 나누게 했고 하늘에 해가 있고 달이 있고 별이 있고. 이걸 따로 만들 이유가 뭐냐는 거예요. 이미 밝으면 낮이고 어두우면 밤이잖아요. 그런데 왜 해와 달과 별을 만드느냐 말이죠. 정답은 해와 달과 별이 있어야 시간이 있어요. 공간도 마찬가지지만 시간은 모든 만들어진 피조세계를 감싸는 담아버리는 보자기입니다.

모든 우주는 시간에 담겨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한 거예요. 해도 달도 별도 변화되기 시작한 겁니다. 시간 따라서. 그러면 시간이란 변화의 차이를 두고 시간이라 한 거예요. 변화가 없으면 시간이라 하지 않습니다. 제가 하는 말이 아니고 창세기 1장에 나오잖아요.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14절)

해와 달, 별을 통해서 일년, 이년, 삼년, 일월, 이월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안식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말하는 안식은 뭐냐 하면, 모든 전쟁이 마감되는 걸 안식이라 해요. 그러면 마지막 안식 될 때까지 전쟁 중이에요. 그런데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인간 중심은 지 몸 편한 게 안식이에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말씀이 들어갈 자리가 말씀으로 좌우를 살펴야 되는데 자기 몸을 중간에 두고 좌우를 살펴요. 그리고 나한테 이익 되면 축복이고 손해되면 저주라고 보는 겁니다. 뭐가 빠진 거예요? 나는 죽어야 된다는 사실이 누락이 돼버린 거예요. 나는 안 죽겠다고 버티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십자가 믿는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복음을 믿는다고 주장해요. 그건 복음 아니고 예수 아니고 십자가 아니에요.

방금 시간을 세 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보자기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안식년, 희년, 안식일이라 하는 것은 나라는 인간을 어느 보자기에 휩싸여라? 시간이란 보자기에 담겨야 돼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가 하나님이 만든 시간에 담기는 게 아니고 자기가 시간을 이용한다니까요. 자기 스케줄이 있어요. 나는 놀 때 놀고 쉴 때 쉰다. 자기 위주지요. 자기 몸 위주에요.

살다가 힘들잖아요. 죽어버릴까? 예순 믿어놨겠다, 복음 알겠다, 확 죽으면 좋겠다. 복음 안다고 이제는 사는 것보다 천국 가서 놀란다고 죽겠다는 것은 순전히 누구 위주에요? 본인 몸 편 하려고 하는 위주지요.

다루어진다는 것은 길들여진다는 것은 바꿔지는 거예요. 모세가 온유하다는 것은, 그 길들여지는 표준 모델이 있어요.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처럼 만들어져야 돼요. 모세뿐만 아니고 모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길들여진다는 것은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예수님은 사는 쪽으로 갔던가요, 죽는 쪽으로 갔던가요? 예수님은 그냥 죽는다 하지 말고 빠져나온다. 십자가란 개구멍 찾아서 빠져나온 거예요. 쓴 잔을 마셔가며 빠져나오는 겁니다. 빠져나올 때 베드로 같은 경우엔 성급해서 빨리 죽겠습니다. 내 목숨을 바쳐서 따라 가겠습니다, 할 때

“아서라. 너는 뭘 바꿔야 되는지 그걸 몰라.” 결국 주님께서 성령 오기 전에 뭘 보여줍니까? 베드로가 악마에 의해서 지금 당하고 있고 그리고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한다는, 내가 그 정도에요? 내가 그 정도였습니까? 그 정도로 예수님을 배신할까요? 자기는 못 믿겠다고 하거든요.

이것이 뭐냐 하면, 인간 베드로로 하여금 시작과 끝이 아직 되지도 않았는데 인간은 성급해서 이쯤 했으면 주님 같이 해서 천국에 같이 갈 타이밍입니다, 라고 우기고 있는 거예요. 아직 자기 끝을 몰라요. 베드로 끝은 어디가 끝이냐 하면, 나는 저 사람을 저주한다, 나는 모른다, 저 사람과 아는 사이 아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는 그것이 베드로의 본모습이에요. 예수님을 저주한다는 인간을 예수님은 구원한다고요. 이게 남의 이야기만 되겠습니까? 남의 이야기 아닙니다. 바로 우리 이야기에요. 왜? 베드로가 교회 반석이니까.

내가 나를 버려야 돼요. 그런데 죽어도 안 버려요. 끝까지 나를 격려한다고요. 어떤 사람은 몸이 안 좋을 때는 이러라는 거예요. 티비 금요프로에 보면 몸을 따뜻하게 할 때는 이러라는 거예요. 이것 왜 합니까? 나를 포기 못하겠다, 더 오래 살아야 되겠다는 말이죠. 뭐 하려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위해서. 병원 왔다 갔다 하면 시끄러워서 안 돼요. 고요하고 평화로운 생활하기 위해서.

인간은 여기서 마감을 함으로써 육에서 육으로 반복한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안식년이란 주기성을 줌으로 말미암아 이 주기성은 포클레인이거든요. 인간들 자기 나름대로의 시간은 뭐냐? 나의 완성을 향하여 주기적이지 않고 갈 때까지 가보자는 이것을 안식년으로 팍 싸잡아버리면 네가 매일하는 그 짓거리가 끝장나야 마땅한 짓거리인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난 안식년 세 번 지켰다. 너는 몇 번 지켰나?” “일곱 번 지켰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율법을 자기가 지킨 줄 알아요. 율법은 지키라고 준 게 아닙니다. 율법과 매치가 됨으로써 나의 한계성, 내가 왜 구원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폭로시키기 위해서 말씀이란 포클레인이 우리를 덥석 물어버린 거예요.

전쟁, 그것은 우리를 죽이기 위한 용도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에서 우리가 죽으면 되지요. 그래서 보자기에 쌌잖아요. 안식일에 쌌지요. 우리는 안식년의 포로가 되고 안식년 안에서 우리의 시간개념이 얼마나 내 중심인지 발각당하면서 죄인으로서 안식년에 싸이게 되잖아요. 그러면 안식년 자체가 이동해요. 어디로? 희년을 향하여. 마지막 최후의 완성을 향하여 희년을 향하여 안식년 자체가 움직인단 말이죠.

모노레일 달리는 전차처럼 우리는 그 안의 탑승객이고 그 전체가 말씀이 알아서 말씀대로 완성으로 간단 말이죠.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닙니다. 말씀 듣는 데 잠 오는 데 언제 지키고 있어요. 설교 시작했다면 벌써 5분 안 돼서 잠에 빠지고. 아침 되면 테이프 지 혼자 틱틱거리고. 우리는 말씀을 못 지켜요.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나는 못 지키는 데 말씀이 알아서 지키고 나가는 그 증거를 찾는 거예요. 야 안 되는 걸 되게 하셨구나. 나밖에 모르는 데 갑자기 왜 주님 생각이 나지. 이것은 말씀이 내 의지보다 강해서 그래요. 붙잡힌바 돼서 그렇다고요. 케이블카 보면 대롱대롱 달리잖아요. 케이블카 지붕에 올라가는 건 007이나 하는 짓이고요. 그냥 매달려갈 뿐이죠. 말씀에 대롱대롱 매달렸다는 종속됐다는 이걸 영광으로 알아야 돼요. 이게 바로 예수님의 증인되는 겁니다. 지키기는 뭘 지킵니까.

어떤 분이 유튜브에 댓글을 달아서 답변해드렸어요. 어떻게 신앙생활하면 됩니까? 노력하지 마시고 그냥 막 사세요. 나중에 생각하게 되면 지나온 모든 날이 내 과거를 지워주세요. 선악적으로 살아온 모든 과거를 다 지워지는. 과거를 묻지 마세요, 란 노래 있잖아요. 지워진 과거가 왜 자꾸 생각나노. 과거를 지워나가는 겁니다. 우리의 시간관은 과거를 붙들고 나 잘났다고 남들한테 떠벌이고 싶어 하는 게 우리 모습입니다. 이만큼 고생했으니까 이런 호강은 마땅하지 않느냐. 이제 선악적인 의식이죠.

그 다음에 전쟁 이야기 계속해봅시다. 이 시간개념이 반복적으로 주어질 때 이스라엘은 길들여져야 돼요.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길들여진다고 돼있는데 구약에서는 만나 정신에 길들여져야 돼요. 만나가 희한해요. 이틀 치를 허락을 안 합니다. 하루가 하루 다음에 내일이 없어요. 언제 내일이 있느냐 하면, 안식일 때만 내일이 있고 그 외에는 하루+하루+하루지 하루 다음에 내일이 없어요. 내일이 되려면 지난 하루+내일이 돼야 되는데 플러스가 없이 그날 먹고 그날 소비하고 죽으란 말이죠.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이 만나를 40년 동안 먹었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누가 매일같이 살려주셨다는 거예요. 매일같이 살려주신다면 광야를 통과했다 칩시다. 매일같이 죽는 본인이 알아서 통과했겠어요, 아니면 매일같이 살려주시는 그분이 광야를 통과합니까? 그분이 통과한 거죠. 만나가 언제 이틀 치 줍니까? 안식일 맞이할 때 주기성이니까 이틀 치 줍니다.

이틀 치 주고 그 다음에 또 하루, 하루 살게 하셨다면 그렇게 하게 하신 분이 뭘 통과하느냐 하면, 바로 인간의 시간 층을 안식일의 주인 되는 하나님의 시간 층이 관통한다고 보면 돼요. 그러면 두 시간 층간에 전쟁이 벌어지겠지요. 어떤 전쟁이냐 하면, 언젠가는 이스라엘 나라에 약속대로 반드시 메시아가 온다, 오실 것이다. 기다리자. 이게 바로 유대인들의 시간관입니다. 인간의 시간 층이죠.

거기에 비해서 주님께선 뭐라고 합니까? 이미 하늘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 이게 말이 돼요, 그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겠습니까? 하늘나라가 이미 왔는데 이미 온 하늘나라 무슨 나라냐 하면, 인간의 시간 층을 파괴하고 그걸 심판하는 그런 방식으로 이미 임했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구원되는 날, 저희는 구원받기에 합당하다고 우기기 때문에, 구원받기 위해서 메시아 와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말하기를 너희들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야. 심판의 대상이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세례요한에 의하면 마지막 심판의 날이 가까이 온 거예요. 심판의 날이 와야 이걸 거덜 내야 그게 교체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씀대로 사시는 분과 말씀을 지켰다고 우기는 쪽과 전쟁이 벌어지는 거예요. 인간은 말씀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세리와 강도가 그리고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하늘나라를 가는 겁니다. 하늘나라는 자기의 성과로 가는 게 아니에요.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비유가 그 비유입니다. 아침 10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3시에 온 사람, 그들의 공통점이 뭐냐? 전부 다 자기 시간개념에 의하면 내가 이만한 노동을 했다는 기억이 자기 시간개념에 들어있어요.그런데 제일 마지막에 온 그 사람은 나도 한 시간 일했다고 이야기합니까? 품삯을 받을 때. 그건 한 시간 일한 품삯이 아니에요. 하루 종일 일한 품삯이라고요. 왜 하루 종일 일한 품삯이 한 시간 일했는데 그걸 왜 주느냐 말이죠. 최저임금 요새 얼마입니까? 8590원을 줘야 되는 걸 85만원을 준 거예요. 그러면 하루 열 시간 일한 사람은 850만원 받는 거예요.

이걸 받고 아르바이트 학생이 그냥 집에 갑니까, 주인한테 물어봅니까? 뭐라고 물어봐요? 왜 내가 일한 것보다 더 많이 주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 질문을 우리가 주님한테 매일같이 해야 돼요. 나 같은 인간에게 왜 영생을 거저 주십니까? 주께서 하는 말이,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기 때문에 너라는 성도라는 증거가 과분의 증거에요. 과분하게 얻어 챙겼다는 것을 나는 너희들이 행한 것 이상으로 줘도 너무 많이 줬다는 걸 증거 하기 위해서 막달라 마리아가 있고 성도가 있는 겁니다.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그러니까 교회가 내 목숨이 달아나든 애가 아프든 돈이 없든 구원받는 것 생각하면 그 앞에서 짜증내면 안 돼요. 우리가 짜증날 자리가 아니에요. 암 걸렸어요. 어쩌라고? 십년 전에 안 걸린 걸 천만다행인 줄 알아야지. 살만큼 살게 하고 암 걸리고. 여기서 어쩌라고. 천 년 백 년 살까, 그럼.

만나의 본체는 네가 하나님의 시간을 네 속에 먹었다는 거예요. 먹었으면 내 안에 구차 없이 만나 때문에 죽어서 가든 살아서 가든 약속의 땅에 기어들어가야 돼요. 왜냐하면 내 안에 들어온 어떤 칩이 자꾸 신호를 보내주는 데 그게 뭐냐 하면, 추격하는 발신신호가 왔다 갔다 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만나의 최종 목적지가 뭐냐 하면, 더 이상 만나가 필요 없는 곳, 만나=젖과 꿀이 되게 하는 땅, 만나는 말씀이니까 말씀의 실현태, 실현된 상태, 상황.

내가 있다면 나한테 꼬챙이가 있어서 하나님의 안식일, 안식년, 희년이 이 꼬챙이에 오뎅이나 닭꽂이처럼 들어가는 방향대로 꽂혀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냥 같이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이게 주 안에서 또는 십자가 안에서, 라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 안에서는 항상 과분함을 느끼게 하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베드로로 하여금 세 번 부인하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때 누가 그렇게 하냐 하면, 악마가 그렇게 하게 하거든요. 악마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삼키니까. 그러니까 주님께서 악마로 성도를 성도답게 하는데 보탬 되도록 사용하신 거예요. 악마까지. 친절해도 이렇게 친절한 분이 없어요. 악마마저도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본색을 드러내는 데 악마가 가장 적절하거든요.

악마는 항상 우리한테 뭐냐 하면, 딴 건 다 골치 아프고 잘 먹고 잘 살면 되는 거야. 이걸 아침 눈만 뜨면 매일같이 생각나게 해요. 나만 잘 되면 돼. 남 살든 말든 남 기침하든 말든 신종 코로나로 죽어라. 인구 너무 많다. 우리 새끼들하고 우리 가족만 안 걸리면 돼. 내 하는 일만 잘 되면 되고 나만 안 다치면 되고 나만 고요하고 평화로운 생활하면 하나님 앞에 수월치 않게 헌금할 용의도 돼있다고 나오는 거죠.

그게 온유한 겁니까? 길들여진 거예요? 악마가 그만큼 우리를 길들였기 때문에 전쟁을 하는 거예요. 너는 전쟁 안 하고 싶지만 내가 전쟁하고 싶다. 네 속에 만나를 집어넣고. 만나는 말씀입니다. 신약 때는 만나가 하늘에서 오는 게 아니고 말씀이 오시는 거예요. 말씀이 육신이 돼서 이 땅에 이미 말씀이 생명의 떡이 왔어요.

그런데 그 생명의 떡이 피를 토하고 살을 찢으니까 사람들은 나가자빠지는 거예요. 살기를 원했더니만 왜 죽음으로 다가오느냐 말이죠. 납득이 안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다 떠나고 말지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갈래, 하니까 못 가지요. 왜? 택했으니까. 한 놈만 죽인다 하는 것 있잖아요. 붙들고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 하신 일을 증거 하도록 주께서 그렇게 야무지게 잡고 우리를 놓치지 않는 거예요. 꼬챙이에 집어넣어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아까 제가 이야기했던 것 다시 해봅시다. 시간은 보자기라 했습니다. 시간이 움직임으로써 우리가 따라 움직이는 거예요. 그 점을 설명하겠습니다. 시간이 움직인다 할 때 시간의 폭이 있어요. 시간의 폭이란 뭐냐 하면, 제가 삼각 김밥이라면 삼각 김밥 안에 우리가 들어있습니다. 시간의 폭이 있다는 말은, 우리의 시간은 시간의 폭이 없고 단선이에요. 어렵지만 제일 쉽게 최대한 쉽게 하겠습니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로 가요. 과거 없이는 현재 감이 없어요. 과거 때문에 현재라는 인식을 갖고 있거든요. 많이 어렵더라도 참아주세요. 단선으로 가는데 시간은 뭐냐 하면, 위에서 수직으로 내려옵니다. 내려오면 이게 점이 돼버려요. 미래까지 안 가도 이미 구원받은 거예요. 낚아채었으니까. 시간의 폭이라니까.

구원받았으면 구원받은 거지 왜 폭이라 하느냐? 이 폭 안에서 계속해서 우리가 반복해서 세상적인 시간을 갖고 있다고 얻어터지고 또 돌아서면 세상적인 시간 때문에 얻어터지고. 그러면서도 그걸 3년, 4년 미랜 오지만 지금 현재 언제 가도 수직적인 시간 안에서 늘 현재가 돼버려요. 과거에 내가 이런 짓 안 했는데 지금 이런다. 이러지 마세요. 과거란 말 하지 마세요. 과거는 없고 시간 안에서의 그냥 회전이에요.

앞으로 잘할게요, 라고 하지 마세요. 앞으로는 없어요. 왜냐하면 그때 그 시간 되게 되면 과거에 내가 생각했던 예상이 다 흐트러져요. 왜냐하면 내가 20대에 봤던 50대의 모습은 막상 50대에서 보게 되면 20대에 봤던 나의 세상 관으로 기껏 생각한 50대에 불과하거든요. 안 어렵지요.

평생 제주도 안 가본 사람들이 제주도 한 번 가봤으면 좋겠다. 혹은 내가 중학교 수학여행에서 제주도 봤는데 그때 너무 좋았는데 지금 가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나중에 퇴직하고 70대에 가보세요. 그 제주도 20대 때 제주도 아니란 말이죠. 그때는 철딱서니가 그것밖에 안 되니까 제주도 가서 갈치백반 먹으면 소원이 없겠다. 갈치백반 칠성시장 가서 지금 먹으면 돼.

그때는 갈치 먹는 것이 너무나 맛있었기 때문에 과거기억 때문에 그런데 이게 수직적인 시간에서는 갈치가 그다지 나의 마음의 욕망을 충족 못 시키고 있어요. 왜? 과거가 내 발목을 잡아서 어지간히 만족 안 하면 감사가 안 나온다니까. 이게 우리의 약점 아닙니까. 과거에 이미 경험한 것 때문에 시답지 않은 거예요.

제가 대구강의에서 했지요. 부부생활에서 첫사랑을 잊지 마라. 보기만 보아도 어떻고 지금 숟가락이 몇 개고 티비 있는지 없는지 문제 되지 않아요. 같이 산다는 것만 해도 행복 했었었었던 그런 기억이 있지요. 과거완료. 자식 없어도 괜찮아. 있기만 해도 행복했던 그 시절, 그것 어디 갔습니까?

주님의 수직적인 시간에서는 첫사랑을 회복하는 겁니다. 계속. 그러다가 아내가 직장에서 출장 가서 일주일 있으니까 밥 혼자 맛있게 해서 너 없이 홈쇼핑에서 육개장 사서 다 먹는다고 했는데 육개장 해서 혼자 먹으니 무슨 맛이 나노. 잔소리 좀 해줘야 맛이 나는데 잔소리 할 사람이 말을 안 해. 세상에 이럴 줄 몰랐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내가 얼마나 마음이 교만하고 까불고 있다는 것을 수직적인 시간 안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겁니다. 구원이 안 된다는 말이 아니고 구원을 해놓고 전쟁을 벌이는 거예요. 주님의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더 강화시키기 위해서 오직 주님께 감사와 고마움이 넘치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환경 주십니다.

왜 새로운 환경을 주시느냐? 우리가 맨날 육적인 시간관을 매일 아침 되면 이걸 못 놓고 있으니까 여기에 맞추어서 더 깊이 파 들어가는 거죠. 첫사랑과 첫 기쁨, 그냥 구원받았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죽겠다는 말이 아니고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상관없어요. 저한테 죽어도 괜찮아요, 하는 그런 자유로움, 마음의 안식, 그게 완성이거든요. 이미 안식을 얻어놓고 안식을 방해하는 것들을 들추어내는 식으로 지금도 성령께서 우리를 닦달내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늘의 율법을 주심으로써 왜 예수 십자가 아니면 구원되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가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알고 나 잘만, 내 위주의 시간이 아니라 말씀으로 이미 다 이루었음을 드러내는 시간 속에 우리가 놓여있음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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