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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2 21:09:59 조회 : 106         
대전-118강 마태복음26장56절(죽음의 바이러스)20200225-이 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IP:122.43.170.138)
대전-118강 마태복음26장56절(죽음의 바이러스)20200225-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6절, 제가 읽겠습니다. 55절부터 보게 되면, “그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 하였도다” 56절,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 하니라” 아멘.

성경에 나오는 이 용어들, 이 용어에 대해서 사람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은 그냥 용어가 아니고 내가 아는 용어로 생각을 해요. 내가 아는 용어. 내가 아는 단어. 내가 아는 개념.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개념, 용어, 단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어떤 단어를 쓰든지 간에 일단 나한테 가져옵니다. 나에게 가져오게 되면 나 안에는 누가 기다리고 있느냐 하면은 과거의 내가 여기에 기다리고 있어요. 과거에 내가 익히 아는 것들이 축적되어 있고 집합되어 있는 그 지식의 더미, 덩어리에, 뭉치에 이 용어가 들어오게 되면 이 용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과거에 내가 경험했던, 체험했던 것을 가지고 마중을 나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 주의 뜻은 이거다. 이런 뜻이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그런 식으로 이 마태복음이나 성경말씀을 생각하는데, 그러면 이 악마라는 이 용어, 성경에 악마라는 용어가 나왔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과거에 자기가 무서웠던 거, 손해 봤던 거, 경기驚氣를 했던 거, 그리고 자기에게 공포를 안겨줬던 그 무엇, 그게 악마적이라고 생각을 하고 마중을 나와서 그 악마를 같은 의미로 일치시킵니다. 이걸 어렵게 말해서 개별적인 의미라고 하는 거예요. 개별적인 의미. 그러니까 두 사람이 같은 악마라는 단어를 귀에 들어도 옆에 있는 사람의 과거 체험과 내 과거 체험이 다르기 때문에 개념 자체가 달라요. 의미 자체가 다르다고요.

사람들은 달라도 좋다는 거예요. 왜? 중요한 것은 나의 의미, 개별적인 의미 그게 전부기 때문에,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악마라는 용어를 쓸 때는 이게 어디서 나온 의미냐 하면은 예수님 개인적인 의미에서 나온 악마거든요. 예수님 개인적인 의미에서 쓰시는 악마라고요. 제자들이 쓰던, 뭐 성령에 의해서 성경이 쓰여 졌기 때문에 악마라는 용어는 예수님 개인적인 의미, 체험이다 이 말입니다. 개인적인 체험.

그러면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또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성령으로 쓸 때는 결국 성경이 뭘 노리고 있느냐 하면은 내 개별적인 의미로 진리에 장착되어 있는 이거는 이런 뜻일 거라고 생각하는 그것과 주님이 말하는, 주님만 아시는 개별적인 의미와의 차이, 그 벌어짐, 그 간격, 그 텀, 그걸 부각시키기 위해서 성경이 있는 겁니다. 안다고 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서 그 아는 그것이 주님을 내치게 만드는 힘이 나오는 당사자라고 우리를 그렇게 규정해주는 겁니다.

이 말을 들으니까 섭섭합니까? 아니면 고맙습니까? 사실은 고마워해야 돼요. 왜? 나의 개별적인 의미로부터 떠나게 해주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만약에 주님이 나타나지 않으면 내가 옳다고 우길 것이 뻔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뒤에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성령은 본인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이야기만 하는 거예요. 그럼 예수님이야기만 하게 되면, 성령의 그 객관적인 사역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은 바로 우리가 잘못된 의미를 계속해서 생산해내고 있다는 것을 지적해주는 겁니다.

그럼 사람은 성경을 보지 않고 또는 성령에 의해서 이렇게 인도함을 받지 못하면 계속 착각 속에 빠지는 거죠. 자기가 환상 속에서 못 헤어 나오는 겁니다. 자기 착각과 환상 속에서 못 헤어 나온다, 이걸 성경에서는 마귀 들렸다고 이러거든요. 이 세상 신의 지배를 받는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쓰겠습니다. 전염병보다 더 무서운 상황, 이 상황이 북한말로 “일 없어~ 나 괜찮아!” 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아직 신종코로나 안 걸렸으니까 괜찮아.” 이거에요.

공중권세 잡은 이 세상 신, 악마의 사주를 받고 살면서도 자기는 괜찮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전염병이 생기니까 호들갑을 떠는 겁니다. 뭐 새로운 문제가 생긴 것처럼. 오히려 전염병에 호들갑을 떤다는 것은 평소에 얼마나 내가 전염병보다 더 무서운 지경에 놓여있다는 것을 까마득하게 지금 모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두 번째 강의는 전염병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한번 물어볼게요.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병균이죠. 세균. 바이러스는 선할까요? 악할까요? 제가 답변을 드릴게요. 바이러스는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아요. 선과 악과 상관이 없습니다. 바이러스는 선악을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바이러스라고 생각한다면 모든 의미를 나부터 출발하거든요. 내 몸이 아프면 나는 아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몸이 아프면. 아프니까 그냥 세균이 아니고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죽이니까 암세포 같은 것은 나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 내가 나쁘다는 것은 생각 못합니까?

바이러스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에요. 왜 그러냐 하면은 원래 인간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어야 합니다. 선악이라고 하는 것과 상관없어야 그게 하나님이 만든 인간이에요. 마치 인간은 바이러스와 같은 거예요. 그런데 악마가 쳐들어와가지고 악마의 유혹을 받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의미를 구축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거는 나한테 이익이 될까? 아, 선! 악하게 될까? 아, 이거는 bad나쁜 거! good과 bad 굿과 배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누가 결정합니까? 본인이 결정하기 시작한 거예요. 본인이.

우리는 본인이 결정할 수 있는 자격이, 처음에 창조할 때는 인간에게는 그게 없었어요. 그러면 원래 인간은 선과 악을 결정할 필요 자체도 없어요. 아니 바이러스가 동그란 선인장처럼 이렇게 생겼다 이 말이죠. 이렇게 생겼는데 이 바이러스가 말하기를 “나는 관대하다.” 이렇게 한다든지, “나는 선하다.” 하면 이게 말이 되겠어요? 안 되죠. 입 다물고 있어! 이렇게 되죠. 우리가 입을 다물어야 돼요. 인간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입니다. 입을 다물어야 돼요. 선하니 악하니 말을 하면 안 돼요. 쓰시는 대로 쓰일 뿐이에요.

그런데 아까 제가 강의한 것처럼 인간들은 어떤 것이 성경에 나오게 되면 개별적인, 자기에게 이익이 될까? 손해가 될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이익이 뭐겠어요? 이거 알아서 내가 천국 가는데, 영원이 영생을 얻는, 하늘나라에 가서 평생토록 행복하게 사는데 이익일까? 손해일까? 그걸 생각하겠죠. 그게 죄인 줄 모르고요. 그 자체가 죄인 줄 모르고. 결국 첫째 시간도 그랬지만 이 둘째 시간도 마찬가지에요. 계속해서 인간은 본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악마가 시키는 본능대로 움직여요. 본능대로. 나 위주로. 그냥 본능대로 움직여요. 그럼 본능대로 움직이면, 그 움직이는 것을 그냥 놔두면 되지 않겠느냐? 이래 생각할 수 있거든요.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어떤 질문이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시고 마지막에 사람을 만들었다는데, 사람을 안 만들고 1일부터 6일까지 만든 거, 짐승까지만 만들었다 치고, 하나님께서 1일부터 6일까지 스스로 만든 것에 만족하시고 자족하시고 기뻐하시면 안 됩니까? 라는 질문을 했어요. 아주 훌륭한 질문이에요. 사람 빼놓고 나머지기 다 만든 그것가지고 대단히 나는 기쁘다. 참 보기에 심히 좋았다. 그러고 그냥 쉬셔도 되는데, 왜 말썽꾸러기 사람을 만들어놓고, 왜 그래놓고 사람이 들어가야 자족하고 만족하느냐? 라는 질문을 한 거예요. 그리고 앞에서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했으면 그걸로 끝나면 되는데, 왜 문제의 소지를 만들었느냐? 라는 질문을 저한테 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답변을 이렇게 했어요. 어떻게 했느냐 하면은, 하나님이 한분이 아니고 두 분이라면 이야기가 된다. 하나님하고 또 주님이 계시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모든 만물은 하나님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십자가 지신 주님을 위해서 만든 거죠. 그러니까 주님이 주님 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슨 사건이 일어나야 하느냐 하면은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야 돼요. 십자가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사건이냐 하면은 죽음의 일이에요. 죽음.

아, 이거 진짜 어려운 이야기인데, 뭐 그래도 쭉쭉 밀고 나갑시다. 죽음의 이야기라고요. 니체라는 철학자가 이렇게 했다고요. 신은 죽었다고 이야기했어요. 자기가 기독교를 반대하기 위해서 이야기했는데 그게 복음이라는 말이죠. 그게 복음이에요. 죽는 하나님, 하나님이 죽어야 복음이에요. 이 모든 세상 만물은 하나님의 죽음을 위해서 있어야 되는 세상입니다. 골로새서를 한번 읽어드릴게요. 1장 16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는데 그분이 누구냐 하면은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말한 거예요. 그리고 천국도 아들의 나라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놀러왔다가 그냥 구경만 하고 가시는 분이 아니거든요. 대구에 와서 뭐 죽으러 오셨습니까? 주님은 죽으러 왔다고요. 죽으러. 죽음이 영광을 돌려요. 죽음이. 예수님 자기 죽음만이 창조의 목적이에요. 그게. 안 죽는 하나님은 마귀가 만들어낸 하나님이에요. 죽는 하나님이 진짜 나타나신 진짜 실증적인 하나님이에요. 죽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어놓고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죽임을 당해야 그게 창조의, 처음부터 원래 계획된 그 목적에 부합되는 겁니다. 만족되는 거예요. 만족스러운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해놓고, 에덴동산 만들 때에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을 아는 나무를 심어놓았죠. 그 나무는 무엇을 유발하는 나무입니까? 죽음을 유발하는 나무에요.

죽음이라는 요소가 중앙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낙원의 중앙부위를 차지해요. 기어이 하나님은 인간의 손에 죽어야 돼요. 그리고 인간은 기어이 하나님을 죽여야만 돼요. 그래야 일이 돼요. 그래야 창조가 완성이 돼요. 그래야 하나님의 본래의 뜻, 자기 아들을 주로 만드시기 위한 본래의 뜻에 합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 영원한 영광과 찬미가 돼요. 신비롭죠. 대단히 신비로워요.

인간에게 죽음은 기피요소인데, 하나님은 기피요소가 아니라 필수요소로 만드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에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살아있어야 이스라엘답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반대에요. 뭐냐 하면은 죽음이 반복되어야 해요. 이스라엘 속에서 죽음이 계속 반복되어야 해요. 그 죽음을 반복하는 법이 뭐냐, 제사법입니다. 유월절의 그 죽음이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계속해서 유월절이 계속되어야 해요. 아침에 한 마리 양, 이걸 상번제라고 하는데, 매일 드리는 양, 저녁에 드리는 양, 아침에 양 드리고 저녁에 양 드리고, 이게 죽음이 계속 바퀴처럼, 물레방아처럼 계속 돌아갈 경우에만 이스라엘이 살아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존재 의미는 뭐냐 하면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 죽음 자체를 계속 살리게 만든 게 이스라엘의 존재의미입니다. 죽음이 살아있음. 죽음이 없어진 살아있음이 아니라 죽음 자체가 주어가 되는, 죽음이라는 게 주어로 해서 죽음이 살아있는 상태. 그게 천국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일찍이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중심이 돼요.

죽음이 중심이 돼요. 제사가 중심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속에 주님이 뭐예요? 살고자 하는 내가 중심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죽으심의 반복을 위해서 우리가 아직도 살아있는 겁니까? 죽으심의 반복을 위해서 우리가 살아있을 때에 그 관계가, 아까 첫째 시간에 한 언약의 나 또는 관계 지어진 나, 주님과 관련 있는 나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죄라는 것은, 여기 두 번째 강의에서 죄라는 것은 무엇인가? 죄라는 것은 아까도 나왔습니다. 개별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나, 개별적인 의미, 자, 그렇게 생각하고 마태복음 26장 5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가 평소에 성전에서 외치고 가르쳤잖아? 그때 왜 나를 안 잡았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때 나를 잡지 왜 이렇게 잡지 않았느냐? 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주님께서 스스로 질문을 던져놓고 주님이 스스로 답변을 해요.

뭐냐 하면은 56절,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의 글을 이루려하심이라고 되어 있어요. 선지자의 글을 이루려하심이라. 그러니까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죽음을 두 종류로 나누겠습니다. 하나는 무슨 죽음이냐 하면 백색죽음. 하얀 죽음. 백색죽음은 가치 있는 죽음이라는 뭐 그런 뜻이겠죠. 이게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그다음에 백색죽음이 있다면 나머지기는 무슨 죽음이겠어요? 흑색죽음. 이거는 전염병이 걸려 죽으나 늙어죽으나 교통사고로 죽으나 그냥 죽는, 예수님 빼놓고 모든 자들이 죽는 죽음. 죄로 인하여 죽는 죽음입니다. 일반인의 죽음. 일반인의 죽음이다 이 말이죠.

이렇게 보게 되면 왜 이 땅에서, 이 땅 자체가 무슨 세계냐 하면은 죽음의 세계인데, 원래 죽음의 세계에서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무슨 죽음밖에 없습니까? 흑색죽음밖에 없겠죠. 흑색죽음.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는 죽기는 죽는데 어떤 죽음이 생기느냐 하면은 백색죽음이 생기는 거예요. 십자가 죽음이고 예수님 죽음이다 이 말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사흘 만에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분의 죽임인 거예요.

부활의 첫 열매가요, 부활의 첫 열매가 에녹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에요.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죽은 자도 살렸잖아요. 야이로의 딸, 죽은 자도 살렸죠. 그리고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도 죽었는데 살렸잖아요. 그게 시간상으로 보면 그게 마치 부활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부활이 아니고 소생이에요. 죽었다가 살아났을 뿐이지만, 진정한 부활은 그 사람이 시작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최초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는 겁니다. 이게 또 어려워요. 시간상으로 먼저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부활이 되는 게 아니에요.

부활은 예수님의 백색죽음, 그 죽음의 의미가 살아나는 거. 그게 부활이에요. 인간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은 소생이 될 뿐입니다. 엘리야도 안 죽었잖아요. 그냥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 거죠. 진짜 부활은 예수님 죽음만이 부활입니다. 이걸 달리이야기하면 부활되실 분이 죽는 죽음, 하늘나라 가실 분이 죽는 죽음, 그 죽음이 백색죽음이죠. 그렇다면 이 두 죽음을 하나님께서는 구분을 짓습니다. 일반인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을 구분시킵니다.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창세기의 질문을 다시 하게 되면,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 빼놓고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기뻐하셨는데 왜 인간을 만들어놓으셨습니까?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요. 그냥 인간이 아닙니다. 그게 고릴라, 같은 6일에 만든 오랑우탄하고 달라요. 코끼리하고 달라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게 인간이거든요. 인간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심히 좋았더라고 하신 거예요. 그냥 좋은 정도가 아니라 심히 좋은 거예요.

그러면 골로새서 1장에 보면 그 형상이 누구냐 하면은 예수님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그러한 공정, 프로세스process. 공장에서 제품 만들 때 공정 있잖아요. 그 공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인간을 만들어놓은 겁니다.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생산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생산하기 위해서 인간을 만들어놓고 인간이 사는 동네에 죽음을 야기 시키는 그러한 선악과나무가 있었고, 그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은 모든 생각을 선과 악 쪽으로 이미 마음속으로 장착이 돼요.

아까 한 것을 다시 해봅시다. 바이러스가 선합니까? 악합니까? 바이러스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면은 그처럼, 바이러스처럼 선과 악을 몰라야 된다 이 말이죠. 어디서 신종바이러스 욕을 합니까? 우리의 모델인데. 바이러스는 자기 역할을 다할 뿐이에요. 역할을 다할 뿐이라고요. 천사가 자기 역할을 하듯이 자기 역할을 다할 뿐이라 이 말이죠.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신했습니다. 선합니까? 악합니까?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신한 것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에요. 그냥 역할을 했을 뿐이에요.

마리아가 “하나님 제가 남자를 모르지만 그래도 임신은 해야 되지 않습니까?”라고 이렇게 평소에 이런 기도를 했어요? 안 했어요? 마리아가 그런 기도를 안 하죠. 기도를 했으면 마리아는 그걸 선으로 여겼을 거예요. ‘내가 예수님을 임신한 것, 그거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이렇게 선을 이미 예상했다는 말은, 그것은 선과 악의 논리에서 못 벗어났기 때문에, 이게 선합니까? 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일을 하실 때 선과 악을 벗어난 마리아를 벗어난 채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자기를 선하다 악하다 선악 논리로 자기를 평가하지 마세요. 그걸 제가 아까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인간의 죄는 개별적인 의미를 갖는 그게 죄라는 겁니다. 개별적인 의미.

자, 그렇다면 이미 인간에게는 흑색죽음밖에 없죠. 이 말은 인간이 왜 죽습니까? 개별적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부활되지 못할, 그것도 영광스럽게 부활되지 못할 그런 죽음이 일반인에게 속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모든 인간은 아무 의미 없이 죽는, 그러한 자기 죄 때문에 마땅히 죽어야 될 죽음, 그리고 그 뒤에는 저주 그거뿐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한 구절과 그리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내용을 좀 더 들어가 보겠어요. 약간 깊이 있게 들어가 보겠습니다. 열왕기하 7장 9절을 한번 찾아봅시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 하고” 됐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열왕기하 7장 10절, “드디어 가서 성 문지기를 불러 고하여 가로되 우리가 아람 진에 이르러 보니 거기 한 사람도 없고 사람의 소리도 없고 오직 말과 나귀만 매여 있고 장막들이 그대로 있더이다”

자,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엘리사시대인데요. 아람나라가 북쪽 이스라엘의 사마리아 성을 완전히 포위를 했어요. 포위를 하니까 거기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굶기 직전이 됐습니다. 그래서 참다못해서 왕이 엘리사를 데려다가 좀 대책을 세워보라고 할 때 엘리사는 “걱정하지 마세요. 넉넉하게 있어서 이 성은 굶어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거기에 있던 신하 한 사람이 모독을 했죠. 열왕기하 7장 2절에 “그때에 한 장관이 하늘에서 창을 내신들 어찌 이 일이 있으리요”라고 하니까, 엘리사가 하는 말이 “니가 그런 소리를 했지? 니가 나중에 그것을 보는데 너는 먹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그 사마리아 동네에 가만히 앉아있어도 굶어주고, 그러니까 잘사는 사람도 굶어죽을 판인데 거기에 문둥병 거지 네 사람이 양심이 있지 얻어먹을 수도 없지요. 그래서 여기 있다가 죽기보다는, 이왕 죽는 거 여기 있으나 나가 죽으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생각한 거예요. 이 마음가짐이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뭐냐 하면은요, 지금 문둥이 네 명은요, 바이러스에요. 어느 쪽이 선이고 악이고 간에 관계없어요. 지금. 자기들은 지금 선이고 악이고 관계없습니다. 내가 어느 편이냐 국적이 어디냐가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개별적인 의미가 소용이 없어요. 제가 아까 강의할 때 죄가 뭐냐, 죄는 개별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 죄라고 했죠. 문둥병, 노숙자 네 명은 국적이고 이거 뭐 혈육이고 관계없어요. 나 자신도 관계없어요. 그냥 여기 있어도 죽는 목숨, 나가도 죽는 목숨, 이왕 죽는 거 아람군대에 항복하자! 여기 항복이라는 말이 나와요. 7장 4절에. 항복하려고 나가보니까, 그때에 하나님의 계획이 다 있었습니다. 조치를 취했어요. 아람군대가 뭔가 급하게 빠져나간다고 자기들의 군대의 장비와 비상식량을 다 놔두고 완전히 그 많던 군대가 다 철수하고 말았어요.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러니까 배고파서 허기져가지고 그냥 목숨만 구걸하려고 갔던 그 사람들이 보니까 먹을 게 너무 많은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들은 실컷 먹었어요. 그리고 은과 금과 의복을 다 감추고, 다른 장막에 들어가서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난 뒤가 아까 읽었던 9절과 10절 말씀인 겁니다. “우리가 나만 챙기면 안 된다. 이것은 기쁜 소식이다. 복음이죠. 이 기쁜 소식을 지금 굶기 직전에 있는, 성 안에 있는 우리 백성들에게 알려주자.”라는 그 대목이에요. 제가 이 대목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 문둥병자가 복음을 전한다는 겁니다. 선과 악을 따지지 않아요. ‘내가 이렇게 힘든데 내가 잘못한 것이 있을 것이다. 아니야, 착한 일도 했는데.’ 착하고 잘못하고가 없어요.

우리의 본 신세는, 처지는 일반인이에요. 다시 말해서 이미 흑색죽음에 놓인 자입니다. 문둥병 네 명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황이 어떤 상황이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몰아세우는 상황이 뭐냐, 니가 종교가 어떠니, 신앙생활 몇 년 했니, 기도를 얼마나 잘하니, 헌금을 얼마나 했니, 성경공부를 얼마나 참석 했니, 묻지도 않고. 여기 있으나 저기 있으나 지옥가나 지금가나 이게 바로 지옥이다 이 말이죠. 이 삶 자체가. 이미 지옥에 왔다면, 이미 우리가 지옥에 왔다고 한다면 판결난 거예요. 니는 개별적으로 무가치하다. 하나님이 판정을 내리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 놨다 이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뭐라고 대드나 하면은 “제가 도덕적인데요? 제가 한 착함하는데요?” 이렇게 우기는 거예요. 그게 누구냐 하면은 소위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마리아 성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왜 하나님께서 그 문둥병 네 명을 통해서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라는 말을 왜 입에 담게 했을까요? 그것은 소위 인간의 윤리라는 것, 윤리나 도덕을 그냥 같이 봅시다. 윤리도덕. 윤리는 사회적인 것이고 도덕은 개인적인 신성을 의미한다고 구분할 수 있지만 같이 보고.

인간의 도덕이 선과 악에서 나왔다 이 말이죠. 선과 악에서 나왔는데 인간의 선과 악에서 나온 이 도덕이, 누가 그렇게 이 도덕을 가르치고 윤리를 가르쳤느냐 하면은 신과 같이 되려는 어떤 실체가 있어요. 신과 같이 되려는. 신으로부터 탈피하고 독립해서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존재감을 가지려는 그런 실체로부터 인간이 철저하게 양육 받고 있었던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신이 되려고 하는 자가 누구겠어요? 누굽니까? 인간에게 선악과 따먹으라고 권했던 자가 누구죠? 악마죠.

악마가 도덕과 윤리를 이야기하다보니까 모든 도덕과 윤리에 뭐가 있느냐, 어떤 게 있느냐 하면은, “내가 곧 최종자다. 내가 곧 절대자다. 내가 곧 궁극적인 의미자다. 모든 의미는 내가 납득이 되어야 돼. 왜? 나는 최고니까.”라는 정신으로, 그 정신에 독자적으로 있는 그 지점에서 흘러나온 도덕과 윤리가 되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이게 아까 이야기한 복음을 본의 아니게 전했던 사람이 누구였던가요? 신은 죽었다고 이야기한 사람? 니체죠. 니체가 이 도덕을 연구를 했어요.

이 도덕이라는 게, 도대체 도덕이라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그 기원이 뭐냐, 그 근거는 뭐냐를 이 사람이 조사를 해보니까, 모든 인간은 자기가 주인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에 있다는 거예요. 하여튼지 마귀가 마귀를 알아요. 마귀 안 들렸으면 이것을 알 수가 있을까요? 여기에 철저하기 때문에 이런 것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둘로 구분했어요. 어떻게 도덕을 둘로 했느냐 하면은 하나는 주인의 도덕과 또 하나는, 주인이 성립되려면 필히 뭡니까? 나 빼놓고 나머지기, 하늘에 태양이 둘이 될 수는 없잖아요. 가족들도 마찬가지에요. 아내, 남편 있지만 태양은 몇 개입니까? 하나가 되어야죠. 주인이 있다면 필히 뭐가 있어야 되겠어요? 자기 주인 빼놓고 다 뭡니까? 노예가 되죠. 노예도덕이 있는 거예요. 그걸 도덕이라고 하면 너무 어려우니까 의식, 주인의식과 노예의식으로 이래 보면 됩니다. 주인의식, 노예의식.

주인의식은 뭐냐 하면은 강함을 이야기해요. 강함. 강함, 화려함. 서울 강남 같은데 사는 사람. 대치동 같은데. 그리고 자신감. 니체가 그냥 이렇게 분류한 거예요. 그리고 결정적이다. 모든 것을 하는데 결정적이고 최종적이다. 그리고 모든 것에 긍정적. 생각하는 의식이 나는 강하다. 앞에 나를 집어넣었어요. 나는 강하다. 나는 화려해야 된다. 나는 늘 자신감이 넘친다. 나는 내가 최종적이다. 결정적이다. 나는 항상 긍정적인 사람이다. 이게 주인도덕이에요.

노예도덕에 보니까 자기 빼놓고 나머지기는 뭐냐 하면은 약하다. 약함. 화려함의 반대말 지저분함. 자신감 없음. 결정적이 아니고 의존적이다. 독자적이 아니고 남한테 빌어먹는다. 부정적이다. 그러니까 더 알기 쉽게 말하면 이 주인도덕을 북한의 김정은으로 봅시다. 김정은은 지금 백두산에 올라갈 때 백마 타고 올라가죠. 백두산 올라갈 때 백마 타고 올라가잖아요. 이거 뭐예요? 백마 타고 올라가는 사람은 강하다, 화려하다, 자신감, 결정적, 긍정적, 백마 타는 그 안에 다 보여주죠.

근데 그 뒤에 백마 못 타고 트럭타고 가는 그 사람들은 뭡니까? 자기 집 앞에서는 주인이지만 일단 김정은 앞에서는 잘못하면 폭탄으로 맞는 수가 있기 때문에 항상 약해야 돼요. 김정은이가 차타고 가는데 지가 벤츠타고 앞서가면 그건 사형이거든요. 실제로 그런 일이 북한에 있었답니다. 모르고 차를 추월해가지고 사형당한 사람이 있어요. 항상 김정은이한테 약한 척을 해야 되고 지저분한 척을 해야 돼요. 자기는 자신감이 없는 척을 해야 돼요. 그리고 “나는 그저 태양 같은 위대한 지도자 동지 덕분에 삽니다.” 의존적이어야 되고 부정적이어야 돼요. 이쪽 주인도덕이 만약에 당회장이라면 이쪽 노예도덕은 부목사들이죠. 이게 누구 생각이냐 하면은 주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노예 생각은 뭐냐 하면은 노예 자신을 뭐로 보느냐 하면은 선량하다는 거예요. 그리고 소박하다는 겁니다. 핑계 좋죠. 그 다음에 뭐냐 하면은 배려심이 많다는 거예요. 배려심. 그리고 평등, 민주적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항상 나는 자기성찰을 하고 자기 판단을 하고 회개를 한다는 거예요. 자기 성찰을 잘한다. 그러면 이 노예들이 볼 때 이 주인의 강함은 뭐냐, 센척하고 이거는 화려한 게 아니고 사치스러운 것이고 자신감이 아니고 건방짐이고 이거는 결정적인 것이 아니고 독단적이고 긍정적인 것이 아니고 허세라는 겁니다.

김정은이 앞에서는 약하지만 돌아서면 뭡니까? ‘이게 센 척 하네.’ 이런 다 이 말이죠. 과장이 사장한테 “아이고, 화려하십니다.”라고 하지만 ‘지가 재벌 3세면 다야. 사치스럽기는’ 이래 하는 거예요. 앞에서는 “자신감이 최고입니다.” 라고 하면서도 ‘아이고, 건방진 것’ 그래야 자기가 위로가 돼요. 자기도 호시탐탐 주인 되기를 노리기 때문에. 형편이 주인이 못 되게 해서 그렇지 마음은 늘 주인을 사모하죠. 주인을 기대하고 주인을 예상하는 거예요.

그런 인간들이 회사에서 당하고 술 먹고 집에 와서는 센 척 하잖아요. 그리고 결정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은 독단적이고, 긍정적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허세다. 이걸 주인 앞에서는 이야기 안 하고, 나중에 술집에 가서 누구 없을 때 자기끼리 돌아서서 이렇게 욕하는 거예요. 결국 따져보니까 노예든 주인이든 추구하는 것은 뭡니까? 자기가 절대자가 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절대자가.

오늘 본문에서 지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뭐로 봅니까? 우리는 주인이라고 본 거예요. 주인. 주인이라고 보니까 예수님의 세력이 어느 정도 크지 않을 때는 그냥 뭘 하느냐 하면은 봐주는 거예요. 왜? 위협의 대상이 안 되니까. ‘저거 해봐야 정권 하겠나?’ 그런데 예수님의 모든 활동이 어디를 건드리는가 하면은, 이 바리새인보다 더 센 자가 누굽니까? 그 당시에 누구죠? 로마권력자죠. 로마 권력의 심기를 건드리는 쪽으로 점점 파급이 되니까 유대인들이 사전에 자기 것을 지키려고 조치를 하는 겁니다.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하게 나와 버린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성전에 있을 때는 안 잡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점점 더 말이 세지고, 세력이 좀 강하다 싶을 그때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이 강하게 조치해야 될 대상으로 해가지고 마치 55절에 보니까, 강도 잡는 것같이 하여 검과 몽치를 가지고 잡으러 나온 거예요. 결정적인 마지막 순간에. 그런데 이걸 가지고 54절에 말하기를,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라고 되어 있고, 56절에도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죠.

자, 선지자의 글 다시 말해서 성경의 말씀은 이미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규정을 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을 죽이지 아니하면 결코 인간은 자기 자신이 왜 이 세상이 지옥이고, 왜 자기가 저주받는지를 인간들은 모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자, 아까 이야기한 것을 다시 해볼게요. 바이러스 신종코로나가 없는 상황이 더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신종코로나가 있으면 조치를 하잖아요. 그런데 전염병이 없으면 자기는 멀쩡하고 자기는 지금 주인노릇을 잘하고 있는 거예요. 아무 일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신종코로나가 우리한테 오듯이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구약적으로 이야기를 해볼까요? 사마리아 성이 아람 군대에 의해서 포위가 안 됐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들은 사마리아 성에서 공동체 생활을 잘하고 있을 거예요. 서로 도와주고 우정을 논하고 사랑을 논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할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아람군대가 포위를 해버리면 그때는 사마리아 자체가 뭐냐 하면은 지옥이 되는 겁니다. 다 몽땅 굶어죽게 되어 있어요. 그럴 때 기쁜 소식은 어디를 거쳐서 온 자들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까? 내가 여기 있으나, 공격하는 적과 아군 자체의 경계가 의미가 없음을 체험한 사람에 한해서 비로소 기쁜 소식이라는 것이 생겨나는 겁니다.

“내가 지옥가도 상관없습니다. 지옥가도 무관합니다.”라는 생각. 그래서 주님께서 성도로 하여금 이 땅에서 지옥체험을 하게 만들어요. 성도로 하여금 이 땅에서 사는 이유가 니가 잘해봤자 지옥이고 못해봤자 지옥이에요. 십일조 해도 지옥이고 십일조 안 해도 지옥이고. 교회 다녀도 지옥이고 안 다녀도 지옥이고. 복음 들어봤자 지옥이고 안 들어도 지옥이고. 그렇게 해서 우리를 바이러스 만들어요. 선악 자체가 무의미한 대상이라는 것을. 선악 자체를 알 필요도 없고, 알아도 소용이 없고 몰라도 소용이 없고. 그렇게 이미 우리는 그 지경에 놓여있다는 것을, 네 명의 문둥병자처럼 그렇게 우리를 다루신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감사해야 됩니다.

그리고 아까 제가 두 가지 죽음을 이야기했죠. 하나는 백색죽음 또 하나는 흑색죽음. 예수 믿는다고 백색죽음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 믿어도 일반죽음이에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은 모든 말씀은 예수님 한 분에 꽂혀있지 나한테 꽂혀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모든 선지자의 말씀, 성경말씀은 예수님 빼놓고 우리는 마땅히 저주받아야 된다는 그 동네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게 하기 위해서 말씀은 그쪽으로 계속 몰아가시는 거예요.

사자성어에 이런 것이 있잖아요. 조금만 더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이구동성異口同聲, 모든 입들이 같은 말을 하고 있죠. 지금 신종코로나 보세요. 사람들 모이는 곳에서는 마스크 하라고 하는 것이 전부 다 이구동성으로 똑같죠. “나라 일에 협조하겠습니다.” 주인 노릇하던 신천지가 갑자기 종이 돼버렸죠. 센 척하다가 갑자기 이러다간 조직 깨지겠다고 하겠죠. 왜냐하면 신천지는 자기 조직에 개별적인 의미를 부여한 거예요. 이러면 안 되는 거예요. 우리 교회가 우리 교회의 개별적인 의미를 부여하면 안 돼요. 우리는 지금 지옥 체험하라고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흑색죽음이에요. 우리는 항상 선악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선악적인 생각을 갖고 있어요. 이게 사단이 났다니까요. 이게 문제라니까요. 선악적으로 우리는 늘 독단적으로 주인이 되고 싶어요. 아까 주인은 뭐라고 했습니까? 독단적이죠. 독단적. 누가 도와주면 좋지만 결국은 뭡니까? 도와주면 좋지만,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게 사랑이겠어요? 자기가 최고죠. 자기가 최고라고요. 이걸 감추고 있지만 누구나 갖고 있는 겁니다.

주의 말씀은 또는 십자가의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네 명의 문둥병환자로 만들어버려요. 선악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어요. 악해도 의미가 없어요. 다만 우리 입에서 아름다운 소식, 복음, 아름다운 소식을 우리만 누리지 말고 전하자! 그런 사명과 책임을 부여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성도로 하여금 주님께서 때가 되매, 십자가의 죽음을,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두 번째 시간 맨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유월절 이야기를 다시 해보겠어요. 유월절 죽음은 옛날에 홍해 갈라질 때 딱 한번이었잖아요. 그럼 이스라엘을 왜 이렇게 움직이게 합니까? 러닝머신running machine 있죠. 다른 말로 하면 트레드밀Treadmill이라고 하죠. 같은 말입니다. 러닝머신은 어때요? 가만히 있어도 뛰라고 요청을 하죠. 자, 러닝머신에 올라탔습니다. 그 러닝머신이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그 위에 있는 우리는 매일같이 반복하게 되어 있어요.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반복하게 되는 거예요. 왜? 그 일을 위해서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 일을 위해서. 끊임없이.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자꾸 살았다고 하면 안 돼요. 죽음 자체를 실어 나르는 거예요. 죽음 자체를. 이스라엘이 천국의 바이러스라면 우리가 이 시대의 천국의 바이러스에요. 선과 악의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우리 단체라는 것이 필요가 없어요. 신천지고 구천지고 필요 없어요. 오직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십자가만을 자랑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성경대로 죽고, 결국은 선지자의 글대로 이루었다는 말은 예수님의 사건이 그걸로 끝이라는 말이 아니고, 일어난 그 사건을 오늘날 성령을 통해서 그 뒤에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이 그때 상황에만 일어날 일이 아니고, 러닝머신처럼 오늘날 우리에게 지금도 반복해서, 반복해서, 계속해서 일어나야 될 일이다. 신은 죽었다는 이것보다 더 확실한 복음은 없어요. 신은 죽었다. 따라서 우리가 죽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죽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마땅히 죽어야 되니까. 신이 죽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요, 기쁨이 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실증적으로 오실 때에 모든 성경말씀과 선지자가 예수님의 죽음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땅히 죽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부활될 수 있는 죽음은 주님의 부활밖에 없음을 살아있는 우리를 통해서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대전-118강 마태복음26장56절(죽음의 바이러스)20200225-이 근호 목사.hwp (67.0K), Down: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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