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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5 17:57:11 조회 : 74         
광주강의20200228b 마가복음14장 53절-71절(현장)-이 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IP:122.43.170.138)
광주강의20200228b 마가복음14장 53절-71절(현장)-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흔히 버릇처럼 하는 이야기기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주께서 하셨습니다.” 이런 문장. 만약에 교회 봉사를 했는데 다른 집사님이 “아이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힘들지요?”라고 하면,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건 제가 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하셨습니다.”라고 하죠. 이 말이 맞느냐 하는 겁니다. 인간 대 인간을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둘 다 이 안쪽 세계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이거 아무 의미가 없어요. 누가 더 겸손 하냐, 누가 더 경건 하냐, 그것 자체도 의미가 없습니다.

비교하는 것 자체도 아까 그림을 다시 보게 되면 십자가에서 성령을 통해서 여기에 관여해야 돼요. 관여할 때, 둘 중에 누가 더 낫다는 식으로 관여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 십자가에서 나온 성령이기 때문에 뭐만 증거 한다고 했습니까? 십자가만 증거 되죠. 십자가만 드러나는 식으로 관여해요. 십자가를 가지고 “이쪽이 십자가를 아네.” 이렇게 판정내리는 것이 아니고, 두 인간 없애버리고 주님의 살아계심만, 십자가만 드러내는 거예요.

그래서 “주께서 하셨습니다.”라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주께서 여기 계십니다.”라는 식으로 고백되어야 되고 이걸 더 풀이하게 되면 “주님이 주인공이십니다.”라는 말도 되고요. 또 달리 이야기하게 되면 “이번 일은 주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발생되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의미를 담아서 고백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주께서 하셨습니다, 라는 것을 제가 강남모임에서는 뭐라고 제목으로 했죠? “수고했어!”라고 했죠.

다시 말해서 내가 여기 이 현장에, 오늘 제목이 현장이죠. 현장은 항상 십자가를 반복하니까. 이 현장에 주께서 십자가를 반복하는데 있어서 니가 거기에 말려들어서 수고했다는 거예요. 이 수고했다는 말을 제가 강남모임에서 어디에 썼느냐 하면은 멀쩡한 처녀가 임신했다는 대목을 설명하면서 이걸 설명했어요. 처녀가 배가 부르고 임신이 된 거예요. 그럼 하나님께서 마리아 집안에 복을 내리시고 생활비 더 주고 그런 것 없어요. 그냥 천사가 와서 등 두드려주면서 “처녀가 임신하고 애 낳는다고 수고했어.” 이래 버리는 거예요.

수고했다는 말을 다시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니가 잘했다는 것도 없고 더 중요한 것은 니가 잘못했다는 것도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니가 잘했다, 잘못했다, 성립이 안 돼요. 잘했다, 못했다 하게 되면 주인공이 누가 되느냐 하면은, 주인공이 주님이 아니고 내가 돼버려요. 내가 된다고요. 지난 수요일에 므낫세 왕이라는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므낫세 왕. 므낫세가 우상을 섬기고 의로운 사람을 죽이고 므낫세가 마지막 막판에 회개를 할 때에 므낫세가 알게 된 게 있어요. 무엇을 회개라고 하느냐 하면은 여호와의 여호와 됨을 알았어요. 그게 회개라는 거예요. 자기가 반성한 게 아니고 여호와의 여호와 됨을 인하여 회개한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은 내가 잘했다, 못했다는 그 구조에 얽힌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거예요. 내 행동이 잘했다, 못했다, 라는 그 구조. 구조 바깥의 안목과 시선으로 자기를 다시 볼 수 있을 때, 이게 회개가 되는 거예요. 회개다 이 말입니다. “내가 참 열심히 했다. 아니야, 내가 너무 게을렀어.”라는 내 위주, 내가 주인공이 되는 위주의 판단을 벗어나서, 주께서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는 주에 의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음을,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이것이 뭐냐 하면은 주께서 하셨습니다는 본 내용이 되는 겁니다.

“주께서 하셨습니다.”라는 것은 “주께서 십자가의 언약의 완성을 드러내는데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드러내는데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역량이나 우리의 계획이나 그런 것으로 십자가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그냥 주께서 하셨습니다. 주체가 내가 아니고 주체가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이렇게 하시는데, 이 성령께서 오셔서 하는 과정 속에서 바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지금 누굴 붙들고 있어요? 나를 붙들고 있거든요. 왜 내가 하나가 아니고 둘입니까? 라고 했을 때에, 선악적인 판단이 되려면 판단하는 주체와 판단하는 대상 이 모두가, 두개 다 있어야 돼요. 내가 잘했나, 못했나, 판단하는 나와 판단 받는 나, 둘이 있어야 돼요. 둘은 그야말로 쌍둥이입니다. 꼭 나를 닮은 나에요. 꼭 나를 닮은 나가 있다고요. 나를 닮은 나가 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할 때 이 나는, 두 개의 나가 있으면요 어느 것 하나는 반드시 변동의 여지가 있습니다. 변동의 여지. 변화의 여지가.

판단하는 나와 판단 받는 나가 있으면, 판단 받는 이 나는 어떤 나인가 하면은 이 자리에 다른 사람들의 장점과 좋은 점을 여기에다가 다 집어넣는 내가 되고 싶은 나에요. 이걸 가지고 상상하는 나, 상상되는 나에요. 나는 항상 새로운 나를 욕망의 대상으로 상상하는 거예요. 욕망의 대상으로. 부모가 되어서 애를 나무랄 때 그냥 나무라지 않습니다. 현재 내 아들의 형편과 부모가 기대하고 있는 아들의 형편, 그 차이가 매질이 돼요. 때립니다. “니가 이럴 줄 몰랐어.”라고 때릴 때, 그 차이만큼 하는 거예요. 차이만큼만.

“니 수학 성적이, 나는 니가 100점 맞기를 원하는데 왜 90점 밖에 못해.” 100점-90점이니까 10점의 차이가 나죠. 그걸 혼내주는 거예요. 그때 애가 하는 말이 “엄마, 우리 반 평균성적이 지난번에는 85점인데 이번에는 문제가 어려워 45점이 평균성적이라서 내가 90점 맞았어도 우리 반에서 1등이야.”라고 할 때, 갑자기 차이점이 확 없어져요. “잘했어~ 잘했어~ 잘했어~” 그렇게 되죠. 시집간 딸네에 갔는데 딸이 평소와 달리 부모님을 홀대하고 인사를 안 한다. “니가 시집가더니 아버지 엄마를 모른다 이 말이가?”라고 하는데, “아빠, 나 암3기야.” 이래 나오면 “아이고, 집에 있어. 집에 있어. 인사하지 마.” 갑자기 확 태도가 돌변하죠.

내가 상상한 대상과 진짜 대상의 판정을 내가 하듯이, 그걸 남한테 한다는 것은 곧 나에게도 그런 대상들을 다 교체해서 상상의 자리에, 대상의 자리에 있는 겁니다. 그 한 가지 예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마가복음14장,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57절,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 하여 가로되” 어떤 사람들이 있죠. 어떤 사람들 또는 어떤 사람.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은 성전을 헐어라. 성전을 없애버리고 자기 손으로 성전을 3일 만에 짓겠다고 했다 이 말이죠.

성전 없애고 3일 만에 새 성전을 만들면 기분 좋은 이야기가 아닙니까? 만약에 우리 교회에 재벌가가 와가지고 “아이고, 교회 꼬라지하고는. 이 칠판 더러워서 예수님도 더럽다고 하고 도망가겠다.” 뭐 이런 식으로. “예배당 꼬라지하고는. 아이고, 이거 헐어버리세요. 아예 헐어버리고, 내가 3일은 너무하고 3개월 만에 새로 지어드릴게요.” 이거 기분 좋은 거 아닙니까? ‘참, 천사님이 보내셨구나!’ 뭐 이래가지고 훅 가죠. 반기죠.

그런데 이 사람은 오히려 이 말을 갖고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을 뭐해요?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겠다는 것을 가지고 지금 예수님을 정죄하고, 죽어 될 이유의 근거로서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 사람한테는 뭐냐면 성전을 허는 것도 기분 나쁘지만 무엇과 비교했어요? 사흘 만에 다를 성전을 짓겠다는 식으로 성전을 헐라고 했으니까, 사흘 만에 지을 수 있는 성전이 인간에게는 있을 수가 없지요? 못 짓잖아요. 기초공사도 사흘 만에 못하겠다. 못하잖아요.

예수님한테 그 소리를 들었다는 것은 결국 뭐냐 하면은, 이따위의 성전 없애버리라고 받아들인 거예요. 성전 없애라. 근데 성전 없애라는 것이 왜 그렇게 기분 나쁘죠? 아까 그림을 가지고 다시 보겠습니다. 십자가 이래 있죠. 십자가는 그리 생긴 것이 아니고 인간이 밀어버렸다고 했죠. 우리 세계에 있지 말라고 인간이 밀어버렸잖아요. 인간세계에서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을 알아요? 몰라요? 그 당시 사람들이 알아요? 몰라요? 알죠. 자기가 죽였으니까. 자기가 죽였으니까 없는 거예요.

그럼 인간세계 속에 뭐가 있습니까? 지금 성전이 있죠. 그러면 예수님을 왜 밀쳐서 죽이려고 합니까? 이 성전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누가 부정하고 있어요? 누가 거부했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거부했으니까 예수님을 죽여야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그거죠. 그런데 예수님 쪽에서 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평소에 말씀하시기를 새 성전을 또는 다른 성전을 며칠 만에 짓겠다고 합니까? 3일 만에 내가 짓겠다고 했어요. 3일 만에 짓겠다고 이야기한 거예요.

사람들 속에, 성전을 3일 만에 짓겠다고 하는 것을 도저히 못 받아들이는 이유가 인간 속에 뭐가 가득 들어있어요? 이 성전은 절대로, 이 성전은 누가 지었다? 하나님이 오랜 세월동안, 과거에 약속하신 이 성전이 있다. 따라서 이 성전을 헐어버리면 이거는 어디에 모순되느냐 하면은 하나님이 지은 성전을 하나님이 스스로 부수는 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러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들은 철저히 믿은 거예요.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지 주고서 뺏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에요. 이스라엘을 사랑해서 주시는 분이라는 거예요.

예수님의 뜻은 뭡니까? 뻿겨야, 뺏겨봐야 사랑을 안다는 겁니다. 안 뺏기면 니가 갖고 있는 하나님 자체가 엉터리라는 사실을 니가 모르게 된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을 밀쳤고 죽이려고 했던 그들 속에 이미 하나님이, 가짜든 엉터리든 간에 하나님이 없는 게 아니고 이미 하나님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있는 하나님에서 그들이 철석같이 믿은 거예요. 마치 사울이 율법에 흠이 없다고 자부하는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에게 충성하기 위해서 열심을 내던 사람들이에요.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있는 거예요.

기존의 사람들은 부처를 믿다가 하나님 소식 듣고 교회에 가서 하나님으로 갈아타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한국에도 있겠습니다만, 중국의 서커스단 중에서 유명한 게 뭐가 있느냐 하면은 1초에 옷을 갈아입는 그런 마술을 혹시 아십니까? 1초되면 빨간 옷, 원피스인지 투피스인지, 투피스는 아니겠죠. 1초마다 한 바퀴 도니까 옷이 바뀌고. 또 한 바퀴 도니까 옷이 바뀌고. 1초마다 옷을 바꿔 입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인간들은 지 몸은 안 바뀌고 종교는 맨날 바꿔요. 종교는. 절에 갔다가 교회에 갔다가 신천지 갔다가 다시 왔다가 여호와 증인 갔다가 온갖 것으로 다 바꿔요. 몸은 안 바뀌어요.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 앞에 자기가 있으니까, 이 하나님과 자기는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 이런 생각에서 뭐가 빠졌습니까? 제가 질문을 해봐야겠어요. 하나님 계시고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고 이스라엘 백성이고, 자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이 논리에서 빠진 게 있어요? 뭐가 빠졌습니까? 밀친 게 빠졌죠. 십자가가 빠진 거예요. 십자가가.

신천지나 기존 교회의 차이점이 뭡니까? 그 초신자가 그렇게 질문할 때 답변은 하나밖에 없어요. 십자가에서 다시금 그 모든 의미를, 규정을 새로 받아야 돼요. 십자가 안에서. 그럼 십자가 안에서 의미를 받는다는 말은 제가 첫째시간에 이야기했죠. 십자가 안에서 의미를 받으면 우리는 뭐가 됩니까? 산자가 아니고 뭐가 돼요? 십자가 받고 난 뒤에 죽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받고 난 뒤에 애초부터 우리는 죽은 자였음을 확인하는 거죠. 그게 성령 받은 입장이라는 말이죠. 죽은 자에요. 죽은 자.

근데 죽었다는 말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어요. 죽었다는 말은 무슨 뜻이라고 했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생명으로 갈 수 없는 상태를 말하죠. 죽은 인간들이 뭘 믿습니까? 하나님 믿는 거예요. 하나님 믿는 이들이 죽은 자라니까요. 교회 가서 하나님 믿는 자들이 죽은 자라니까요. 이 사람들이 지옥 가는 사람들이에요. 지금 성경에서 예수님이 누구한테 죽느냐 하면은 이슬람한테 죽는 게 아니에요. 부처한테 죽는 게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이 죽게 되는 것은 누구한테 죽습니까? 하나님 믿는 사람한테 하나님을 건드린 사람이라고 해서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거든요.

요한복음에 보면 평소에 예수님께서 누누이 이야기했다고요. 너희들의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악마라고요. 악마. 요한복음 8장에 나오고. 인간들은 이유가 된다고 여기는 곳에 둘러 모인다. 둘러싸서 모인다. 인간들은 이유가 된다고 여기는 곳에 둘러 모이는 거예요. 지금 방송에서 코로나 이야기하는데, 코로나코로나하니까 옛날 차 이름이 자꾸 생각나는데. 신종코로나 이게 전체 뉴스가 아닙니까? 이게 이거거든요. 이유가 된다는 사람들 앞에 둘러 모인다고요. 관심을 보인다고요. 마스크 쓰고 모이다가 전부 다 걸리고 하지만.

아니, 사람들이 지금 십자가 복음에 모입니까? 오늘 몇 명 나왔어요? 십자가가 그렇게 중요한 것을 사람들이 인식을 합니까? 못하죠. 사람들이 이유가 된다고 여기는 것에 집결하는 거예요. 지금 바리새인들은 뭐가 이유가 된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했다. 구원한 백성이다. 이게 이유가 되어서 모인 거예요. 그 모이게 하심으로서, 그 모인 장소에서 예수님은 어디로 갑니까? 지금 죽음으로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죽음이라는 결과를 가지고 다시 원인을 되돌려보게 되면 원인을 찾을 수가 있어요.

인간은 자기한테 이유가 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한 거예요. 예민한 거예요.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로마의 빌라도는 우리의 구세주가 아니다.”라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예수님을 죽입니까? 예수님 죽여요? 안 죽여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역시 축구는 한국이 일본보다 낫다.”한다고 예수님 죽이라고 합니까?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패러사이트,parasite기생충. “어떻게 아카데미상을 한국영화가 차지하느냐?”라고 트럼프 대통령이 그렇게 이야기했잖아요. 그런 이야기했다고요.

왜 트럼프가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은, 트럼프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데는 그럴 이유가 있어요. 뭐냐 하면은 우리 미국은 소사이어티society사회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근데 그 영화제가 어느 나라 영화제입니까? 미국영화제죠. 미국영화제에 무역장벽을 논하고 있는 한국이 그 최고상을 타냐 이 말이죠. 그 최고상을. 물론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탔지만. 자기는 그게 밉다는 거예요. 봉준호 감독이 트럼프 대통령한테는 미운 거예요.

바리새인에게 미운 게 뭐예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미운 게 뭡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왜 가짜냐 이 말입니다. 왜 가짜냐고 시비를 거느냐 이 말이 아닙니까? 그러면 여기서 정리할 수 있는 결론이 하나밖에 없어요. 십자가는 뭘 건드린다? 하나님을 건드리는 거예요. 십자가는 하나님을 건드리는 거예요. 하나님을. 이 이야기에 설명이 좀 더 나가야 하지만. 이 십자가는 우리를 건드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모시고, 우리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그 하나님을 건드린 거예요. 그 천국을 건드리고. 그 복음을 건드리고. 우리가 아는 삼위일체를 건드리고. 신학을 건드린 거예요.

왜냐하면, 이유가 뭐냐 하면은 살아있는 나를 더 살게 만들기 위해서, 죽어서도 또 살게 만들기 위해서, 죽어서도 영생 만들기 위해서, 영생하고 천국 가는 사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가 필요했고 십자가가 필요했고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그런 본성으로 우리는 버티고 있는 거예요. 바로 성령은 그걸 공격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위함이 아니고 누굴 위함이다? 골로새서 1장 16절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있는 거예요. 모든 성경말씀은. 성경말씀뿐만 아니고 모두가, 모든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있는 거예요. 우리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이죠.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객관적인 자기 대상을 만들죠. 자기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계속 좋다는 것을 다 끌어 모아요. 이것도 모으고 저것도 모으고 이것저것 다 모아요. 그러나 성령을 받은 사람은 십자가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새로운 자아를 받은 사람은 이미 정답은 몇 개입니까? 정답이 두 개가 아니고 하나에요. 하나. 오직 뭐가 정답이에요?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원하노라. 성령 받은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정답은 뭡니까? 십자가를 이용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가 구원된 거예요. 십자가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이걸 성전에다가 집어넣으면 다른 성전, 주께서 세운 성전을 위해서 기존에 있는 것은, 기존의 성전에다가 이 성전을 보태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에 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에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태는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가 오게 되면 뭐가 없어져야 돼요? 기존의 교회 자체가 무의미해져야 된다 이 말이죠.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처럼. 교회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사람들은 교회에 왜 모입니까? 교회가 교회에 모이는 이유가 됐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에 모이는 이유가 되었어요. 사람들은 이유가 없는 데는 안 모이니까.

이게 뭐냐, 정답이 주는 자유에요. 정답을 알아버렸어요. 정답을 알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어떻게 돼요? 남은 것은 자유뿐이죠. 자유. 정답을 알았으니까. 제가 지난 낮 설교인가, 죄 씻음을 받아버리면 그다음부터는 어떤 것도 이 기쁨을 빼앗아갈 수 없다는 취지로 말씀드렸잖아요. 죄 씻음이 돼버리면 더 이상 자기 행위에 대해서 굳이 탐색을 할 이유가 없죠. 죄 씻음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죄를 씻어주는 주체가 되고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객체가 돼요. 죄 씻어주시는 주님한테 죄 씻음 받는 죄인이 귀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실험실에서 생물학자가 연구할 때 실험실에 있는 개구리하고 저 논밭에서 개굴개굴 우는 개구리하고 달라요. 그 개구리는 천 마리 만 마리도 싫어요. 지금 중요한 것이 뭐가 중요하느냐 하면은 현미경 바로 유리슬라이드 밑에 있는 그 개구리는 돈 주고도 안 바꿔요. 지금 실험을 해야 되니까. 그 개구리를 통해서 주님은 자기 십자가지심의 취지와 의를 지금 나타나야 될 객관적인 대상이기 때문에, 그 대상을 주님께서 놓칠 리가 없죠. 놓칠 것 같으면 뭐 성령께서 오시지도 않았어요. 성령이 왔다는 것은 포클레인 가지고 꽉 잡아서 현미경 밑으로 집어넣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개인적인 사정과 형편에 대해서 관심 없습니다. 나에게 관심 있는 것은 나밖에 없어요. 주님은 아무 관심이 없어요. 어떤 분이 그런 질문을 했거든요. 제가 어느 도시에 가는 것이 잘했습니까? 못했습니까? 관심 없어요. 야고보서 4장에 나오는 거예요. 내가 어느 도시에 가서 열심히 일해서 돈을 얼마나 벌까? 말까? 거기에 대해서 야고보서 4장 13절부터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거는 아무 관심 없는 거다. 왜? 너는 어느 도시에서 돈을 얼마나 벌어도, 미국 뉴욕에 아파트를 사든 말든 간에 너는 뭐다? 너는 안개다. 너는 안개. 김안개. 최안개. 박안개. 성을 빼고 하겠습니다. 그냥 안개에요. 안개.

근데 안개가, 안개라고 하는 것은 곧 소멸되거든요. 그것도 하수구 물 빠지듯이 빠져가지고. 그냥 반복하는 거예요. 뭘 반복? 우리의 인생도 따져보게 되면, 내가 나를 닦달 내는 그 반복이 우리 한평생이에요. 계속 닦달 내요. 어떤 목적을 이루면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닦달 내요. 아침드라마나 드라마 보게 되면 무슨 마약 같아서 아슬아슬해요. 그러나 마지막 최종적으로 끝났다. 다 끝났다. 현빈 하고 손예진 하고 서로 잘 됐다. 사랑의 불시착이 끝났다. 끝났으면 그 다음은 뭐예요? 그 다음이야기는 없어요.

지금 북한의 현빈이는 코로나에 마스크를 쓸까? 안 쓸까?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요. 북한에 현빈이가 없어요. 지금. 드라마 속에 있었다니까. 드라마를 안 보니까 뭐 의사소통이 전혀 안 되네요. 북한 남자하고 서울 여자하고 연애한 이야기에요. 손예진이 돌풍이 불어서 패러글라이딩 사고로 북한에 넘어가게 되어 현빈을 만나 연애했다는 그런 이야기인데, 그 드라마 끝났잖아요. 우리 인생도 드라마잖아요. 주님은 우리를 드라마로 보는 거예요. 안개니까. 드라마 제목이 뭐냐 하면은 그냥 안개에요. 안개. 주제곡은 이봉조가 지었어요. 밤안개. 이봉조 작곡 현빈 노래. 그냥 안개.

그냥 안개로 와서 안개로 사라지는데 그거 뭐 의미가 있습니까? 주님의 사랑이 도달되어야 해요. 주님의 사랑이 도달되게 되면, 아, 사랑이라는 것은 아름답지도 않고 더럽기만 한데 그걸 아름답게 보시는 그게 사랑이에요. 천하에 아름다운 거예요. 우리의 몸, 행동,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보는 거예요.

자, 거기에 대한 답변을 한번 봅시다. 이 사람은 성전을 헐라고 했다. 그 말을 통해서 우리가 여기서 내는 결론은 십자가 복음은 뭘 건드린다? 나의 나다움을 위해서 최후로 지키는 그 점을 바로 폭격해버리는 겁니다. 나의 나다움을. 나의 나다움을 위해서 정말 이것만큼은 빼앗기고 싶지 않고 싶은 그 지점을 향하여 십자가는 거기다가 꽂아버려요. 십자가가 저 뒤에 있거든요. 뾰족해요. 아주 침놓듯이 꽂아버려요. 천사가 와서 꽂아버립니다.

애굽의 바로왕은 자기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은 영원해야 해요? 애굽이라는 제국은 영원해야 해요. 그러면 바로 왕에게 중요한 것은 뭐냐 아들을 낳아서 왕으로 이어나가면, 그 아들이 아들을 낳고 또 그 아들이 아들을 낳고 해서 이어나가면 제국은 계속 영원무궁할 것이라고 했어요. 하나님께서 어디를 칩니까? 천사가 와서 뭘 치느냐, 바로왕의 아들이 죽어요. 아들이 죽는다고요.

그러면 히브리인들의 아들은 안 죽어요? 히브리인들 아들도 죽어요. 아예 혈육을 다 끊어버려요. 히브리인들이든 애굽이든 바로왕이든 아들은 다 죽여 버립니다. 아들을 다 빼앗아간다 이 말입니다. 아들의 생명의 생명을 다 빼앗아간다 이 말이죠. 왜? 혈육적인 인간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보다 뭐가 중요하기 때문에? 자식이 더 중요하잖아요.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삭이다 이 말이죠. 그냥 이삭이 아니고 사랑하는 이삭이잖아요. 야곱에게 열두 아들이 있지만 가장 소중한 아들은 누굽니까? 본인이 가장 사랑했던 아들이 가장 소중한 아들이에요. 거기에 뭐가 날아와요? 십자가 언약이 날아오잖아요. 십자가 언약이.

바로왕의 아들을 죽여 버립니다. 혈육은 끊어지죠. 히브리인들 아들도 죽습니다. 죽이죠. 죽이는데, 히브리인들 아들은, 다시 이야기하면 나는 여기 살아 있다가 아니라 나는 이미 죽어있죠. 무엇을 근거로 해서? 십자가 어린양을 근거로 해서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의 자기 아들은 이미 죽은 자에요. 죽은 자이지만 앞에 지금 살아있는 것은 살만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 살아 있느냐 하면은 십자가가 반복해서 살아있다는 조건하에 아들이 살아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죽어야 될 아들은 어린양을 증거 하는 용도에 한해서, 지금 어린양과 관련지어서만 살아있기 때문에. 아들이 있는데 문설주에 피 발랐죠. 문설주에. 어린양이 살아있다는 증거의 용도로서만 살아있기 때문에 사실은 아들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아들 안에, 아들을 통해서 무엇이 살아있다? 아들 안에서 어린양의 취지가 반복해서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이 말이죠. 이스라엘의 참된 모습. 이게 오늘날 살아있는 교회의 참된 모습이거든요.

우리가 이 땅에 살라고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뭘 증거 하라고? 예수님을 증거 하라고,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 하라고 살아있는 겁니다. 십자가 복음을 증거 하라고 살아있다는 이 내용이 바로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설교의 핵심이에요. 사도들의 특징을 보게 되면 계속해서, 사도바울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계속해서 어디에 넘겨갑니까? 죽음에 넘겨가죠. 계속해서 죽음에. 자기 목숨을 빼앗기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11장에. 내가 강도의 위협과 도적의 위협과 바다의 위협과, 바다에 가면 바다의 위협. 지중해에서. 땅에 가면 땅의 위협. 유대인의 위협, 이방인의 위협, 강도를 만나고 또 병드는 위협. 신종코로나. 모든 것을 자꾸 하는 것은 내가 산자냐? 아니면 다른 것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여기에 관련되어서 아직도 살아있느냐를 분명히 하는 거예요. 관련되어서. 복음 때문에 살아 있느냐, 복음이 살아있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내가 여기 살아 있느냐 아니면 단독적으로 내가 살기위해서, 내가 천당가기위해서 내가 살아있느냐를 분명히 구분하라 이 말입니다.

한번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예수님을 고소할 때, 고소하는 자가 예수 저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된다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성전을 헐라고 했다는 겁니다. 자, 성전을 헐라고 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짓겠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했다. 자, 예수님한테는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고 한 이게 연결이 됩니까? 안 됩니까? 예수님한테는. 예수님한테는 연결이 되죠. 근데 세상 사람들한테는 십자가를 모르니까, 십자가와 부활을 모르니까 뭐가 연결이 안 돼요? 이 성전 말고는 다른 성전은 상상도 못하는 거예요. 이 성전을 짓는데 46년 걸렸으니까 상상도 못하는 거죠.

그러면 성전을 헐라고 할 때 “예수님, 옳소이다. 헐어버리세요.”라는 이런 생각을 왜 못 갖죠? 왜 그런 생각을 못 갖습니까? “예. 잘했습니다. 성전 헐어버리세요.” 왜 그런 생각을 못하죠? 그러는 바리새인들이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자기 자신을 절대자와 관련지어서 생각하는 겁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말씀을 받았거든요. 절대자 모세율법이 있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 모세와 독대해서 받았던 그 율법과 자기 백성이 이렇게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 연결된 율법에 의하면, 율법에 의해서 필히 역사의 하나의 증거로 나타나는 것이 뭐다? 솔로몬 성전이고. 그 성전을 헐라는 말은 우리보고 관계를 끊으라는 이야기로 밖에는 안 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뭐냐, “그게 아니고 너희가 오해했다.” 이렇게 나옵니까? 어떻게 나옵니까? 처음에는 답변을 안 해요. 안 하고, 오늘 본문 마가복음 14장 61절을 봅시다.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6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니시” 63절,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옷을 왜 찢어요? 비싸게 돈 주고 한 옷을 왜 찢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콕콕 집어서 이야기할 때, 우리가 오늘날 보면서 제사장을 나쁘다고 하지 마세요. 오늘날 주께서 십자가를 우리한테 적용시킬 때, 나의 나다움의 위신과 가치를 진짜 꼬깃꼬깃 숨겨놓고, 제발 이것만큼은 손 안 댔으면 소원하는 거기를 콕 집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에게 뭐가 일어나요. 화가 일어나겠죠. 분노가. 칠판 더럽다고 화내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자, 사람이 왜 화를 내죠? 왜 화를 냅니까? 내 것이 있기 때문에 화를 내는 거예요.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습니다. 안개가 끼었는데 내가 칼을 들고 “죽어라 안개! 안개가 끼다니!”이렇게 하면 안개가 화를 냅니까? 안개가 화 안내죠. 성경에서 우리보고 안개라고 해도 우리는 안개가 되기 싫어요. 안개 되겠다는 생각이 우리한테는 전혀 없습니다. 나는 나와 헤어지기 싫어요. 그런데 나와 헤어지기 싫은데, 문제는 이 나가 어디서 온 것인지를 전혀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나를 교체하기 위해서 찌르면서 여기서 뭘 교체하느냐 하면은 인자와 교체하거든요.

인자가 뭡니까? 사람의 아들이죠. 인자가 사람의 아들인 거예요. 하늘에 계신 아들 같으면 누구의 아들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죠. 하나님의 아들이 땅에 와버리면 뭐가 돼요? 의도적으로 사람의 아들이 되면서 기존의 사람의 아들들은 전부 다 예수님 앞에 부정당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나는”이라는 대신 예수님이 “인자”라고 해서, 인자로 말미암아, 인자가 나거든요. 예수님께서 말씀한 인자가 나잖아요. 나는 나다가 아니고 나는 인자다. 사람의 아들이라고 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인자되기 위한 어떤 구약적인 역사가 있을 거예요. 그 역사라는 말을 해도 되고 다른 말로 하면 주께서 인도해 가져온 배경 또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질서, 새로운 환경이 따로 있다 이 말이죠. 인자되게 될 새로운 세계가 따로 있는 거예요. 그런데 기존의 인간들은 어디서 온 겁니까? 제가 여러분의 몸을 누가 낳았습니까? 라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몸은 누가 낳았어요? 부모가 낳았죠. 부모가 낳았지만 나는 어디서 온 거예요? 나는. 인간은 몰라요. 인간은 알 수가 없어요. 내가 어디서 왔는지. 정답을 알려드려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시간과 공간, 이 세상은 뭐가 중심이 되죠. 창세기 1장에 보면 누구 중심입니까?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누구 중심입니까? 예수님 중심이에요. 예수님 중심.

우리 사위가 저한테 그런 질문을 했어요. 왜 천지창조 할 때에, 이거는 우리교회 어떤 분도 질문을 한 것을 제가 이야기하니까 우리 사위도 같이 질문을 한 거예요. 1일부터 6일까지 만들어진 짐승이나 그런 것들로 만족하면 되는데, 왜 마지막에 말썽꾸러기 인간을 왜 만들었습니까? 라고 질문을 했어요. 제가 답변을 10여 분간 하니까 우리 사위하고 딸이 불평이 있는 거예요. 질문은 간단한데 답변은 왜 장황되게 퍼져 있느냐, 명확하게 이야기해 달라.

그래서 명확하게 이야기해줬어요. 예수님 죽이려고 이거 만들었다. 예수님 죽이려고 인간을 만들어놨다고 하면 니가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하는 겁니다. 이게 장황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인간은 왜 있는가, 십자가 사건을 위해서 인간은 있다는 이 이야기를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짧게 1~2분 동안 이야기하겠어요? 그 절차가 다 있는데. 인간에게 “나”가 있고 이 “나”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나”거든요. 이 절대적인 나는 어디서 왔느냐 하면은 악마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악마가 집어넣은 거예요.

신과 같이, 이퀄(=)신과 같이 되게 된다는 거예요. 신을 부정하라는 말이 아니고 신과 같이 된다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성전을 고수하는 것을 통해서 나가 뭘 고수한다는 말입니까? 신과 같이 취급받는 거예요. 신이 되는 거예요. 독약 먹은 후유증이 이렇게 심해요. 환자가 보통 환자가 아닙니다. 인간들이 병든 자들이에요. 병든 자라야 의사가 필요할 것이 아닙니까? 제가 지난 설교에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신종코로나가 퍼진 것이 위험한 것이 아니고 전염병이 없는 것이 더 위험해요. 전염병이 없으니까 지가 지금 정상인줄 알고 있다고요. 자기가 멀쩡하다고 하는 거예요. 멀쩡한 게 아니에요. 환자에요. 환자. 나라는 것. 절대적인 나.

부모가 자식 훈계하니까 아들이 화내죠. 왜 화냅니까? 뭐가 있기 때문에? 그 안에 신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름만 신이 아니에요. 진짜 신이에요. 몸도 마음도 신이라니까요. 본인이 신이에요. 신. 이런 환자가, 언제 하나님이 이런 인간을, 하나님이 이런 인간을 만든 적이 없어요. 배후에 마귀가 그렇게 만든 거예요. 인간은 인간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 나름대로 펼쳐져 있는 자기세계가 있어요.

그리고 예수님은 예수님 마음대로 세계가 있죠. 여기서 하늘의 인자가 구름타고 옵니다. 구름타고 와요. 구름타고 온다는 것은 다니엘 7장에 보면 나오죠. 다니엘 7장 13절에 보면 옛적부터 계신 분이 인자에요.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인자 같은 분이 오죠. 왜 오느냐 하면은 심판하러 오시는 거예요. 심판하러 왔다고 할 때에, 오늘 강의 마지막에 제일 중요한 점에 온 건데, 재림이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 다음에 재림이 아니고 이 십자가를 펼치는 것이 바로 재림이에요. 이 말은 십자가 안에 이미 재림이 포함이 되어 있다고요. 재림이.

왜 그러냐 하면은 모든 시간이, 하수구에 물 빠지듯이 모든 시간은 오직 십자가로 다 모이기 때문에. 십자가로부터 퍼져나가서 십자가로 다 회수돼요. 인자가 오시고 하는 것은 십자가 바깥에 일어난 일이 아니고 십자가, 십자가 됨을 확실하게 적용하는 거예요. 끝까지 적용하는 거예요. 마지막 시간까지 자기 품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재림이다 이 말이죠. 이게 지금 나라는 것이 어디서 왔는가, 절대적 나라는 것은 악마에서 왔거든요. 그러면 십자가에서 다 이룬 것을 적용을 시켜야 될 게 아닙니까? 적용시켜야 된다고요.

알록달록하게 인간들이 그림을 그려놓은 거예요. 다 자기중심이죠. 모든 게. 자기중심, 그걸 자기의미화라고 하는데, 인간들은 이 세상을 자기와 관련된 의미로 본다 이 말이죠. 여기다 먹물을, 십자가 죽음이니까, 죽음색깔이 까맣다고 보면 까만 잉크를 확 덮어버려요. 십자가로 다 덮어버려요. 이게 바로 골로새서 1장에 나오는 모든 만물은 누구를 위해서? 모든 만물은 하나님을 위해서입니까? 주를 위해서 되어있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누굴 위해서? 주를 위해서 만들었어요.

하나님을 둘로 구분한다고요. 진짜 하나님은 없어요. 아까 이야기했죠. 십자가에서 뭐가 나온다고요? 성부, 성자, 성령이 나온다고요. 성부성자성령은 없어요. 인간세계에서는 가짜하나님, 가짜예수님, 가짜성령님밖에는 없어요. 이거는 십자가 말고 인간과 다이렉트로 하나님과 연결시켜서 인간들이 만들어낸 거라고요. 왜? 본인이 신이니까. 자기 신을 신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이용하고 성령 부르고 예수 찾고 기도하고 난리도 아니다 이 말이죠. 근데 십자가가 와버리면, 그런 모든 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덮여버려야 돼요. 덮쳐져야 한다고요. 덮쳐지는 것이 뭐냐 하면은 내가 산자가 아니고 죽은 자라는 것을 또 다시 확인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인자의 오심이 내 시간은 아닌 거예요. 나는 이미 죽었으니까. 내가 죽었으면 내 시간도 날아가잖아요. 그러면 인자의 오심은 뭡니까? 내 시간이 아니고 누구 시간이에요? 예수님의 시간이 되죠. 근데 예수님의 시간에 포함이 된 자만이 마지막 때에, 주님 오실 때에 영접할 수 있는 주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내 시간을 벗어나서 주님 시간 안에 있으니까. 그러니까 초대교회는 언제 오시느냐가 의미가 없어요. 따라서 계산할, 카운트할 시간은 의미가 없다고요.

주님의 사건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사건 안에 주님께서 하신 일도 이미 성취된 상태에서 같이 있는 겁니다. 여기 63절을 봅시다.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옷을 왜 찢는지, 화가 난다 이거죠. 열불난다 이거 아닙니까? 다시 말합니다. 인간은 왜 화를 내죠? 자기가 절대자인데 절대자의 말을 안 들으니까 화가 나는 거예요. 신의 말을 안 들으면 신이 노하잖아요. 신은 이미 모든 의미가 나한테 납득이 되는 쪽으로 신이 됐거든요. 그런데 나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어떤 상황이나 어떤 이야기가 나오면 죽이고 싶은 거예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자식을 사법고시해서 판사 만들려고 했는데 드디어 애가 로스쿨을 했는지 어떻게 했는지 판사가 되었어요. 동네에서는 플랜카드 걸라고 해요. 누구 집 아들이 판사 됐다고. 판사 됐다고 직접 아빠가 운전을 해서 자기 아들 옆자리에 태우고 가면서 맛있는 회도 사줘가며 고향으로 가는데, 문제는 사법고시 패스해서 판사가 된 아들이 가면서 방구를 뀌는 거예요. “방구 뀌지 말라고 했지.” 화나는 거예요. 엄마는 뭐냐 하면은 애가 방구를 뀜으로서, 판사인데 방구를 뀌지 않는 판사이길 원하는 거예요. 내기준이에요. 내 기준. 아무리 자식이 부모를 맞춰주려고 해도 이미 엄마아빠가 절대자에요. 본인이. 절대자인 그 욕망과 그 원을 아무리 달래도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서로가 신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그걸 십자가잉크로 확 부어버리면 전부다 다 같이 죽은 자가 돼버리는 겁니다. 주님의 의미만 있는 거예요. 십자가만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가족이 성령을 받아버리면 십자가이야기를 함으로써 방구 뀌게 되면, “수고했다.” “사법고시 됐어요.” “그래, 그거 뭐 의미 없어. 우리는 안개니까.” 이렇게 복음적인 대화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현장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구원이 우리한테 덮쳐서 보여주는 현장인 것을 우리가 알았사오니, 우리를 통해서 날마다 십자가가 되풀이 되고 반복되는 기적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그래서 오직 십자가만 자랑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광주강의20200228b 마가복음14장 53절-71절(현장)-이 근호 목사.hwp (63.5K), Down: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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