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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1 09:12:13 조회 : 69         
20200309b 부산강의 : [시편]26(18편)-본능과 증인 이름 : 한윤범(IP:14.39.134.102)
20200309b 부산강의 : [시편]26(18편)-본능과 증인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은 나사로의 구원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이 이처럼 그렇게 못 알아듣는 사람들 손에 버림받는 겁니다. 예수님이 버림받는다.

그런데 시편 18편 7절부터 보게 되면,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 발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그룹(천사)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로 높이 뜨셨도다” 그 뒤에 13절에 뇌성, 우박, 숯불 나오고 살을 날리고 죽죽 나오는 겁니다.

이건 뭐냐 하면,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원수와 전쟁한 결과가, 크게 쓰겠어요. 파괴에요, 파괴. 모든 파괴되는 겁니다. 파괴될 때 여기 나라는 이분은 지금 세상이 파괴될 것인지 안 될 것인지 전쟁 중인 것을 나라 사람은 알고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 세상을 파괴하기 위해서 나를 사용했다고 보는 거예요.

나를 사용할 때 나에게 어떤 일이 닥치는 하면, 아까 첫째 시간 후반에 이야기한 것처럼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지요. 환란이 이르렀지요. 그러니까 파괴될 이 세상에 나라고 지목이 된 이 사람에게 환란이 주어지고 사망이 찾아오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 말입니다. 더 알기 쉽게 말씀드릴까요? 숨어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예수님이죠.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파괴를 이야기하니까 예수님께 뭘 주십니까? 환란 주시고 사망을 가져다주었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시편에 있는 나는 누구냐? 바로 예수님을 말하는 겁니다. 그 환란과 고통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예수님도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 지나게 하옵소서. 그리고 십자가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이렇게 돼있지요.

그러면 이 세상이 파괴된다면 이 세상에 누가 살고 있습니까? 인간들의 살고 있는 세상을 파괴하지요. 인간 없는 황무지를 파괴하는 것 아니잖아요. 창세기 6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5~7절)

땅에 홍수가 오는 이유가 사람 피해서 홍수 내는 겁니까, 아니면 사람을 노리고 벌이는 홍수였어요? 사람을 노리고 하는 거예요. 지구를 이 세상을 파괴한다는 것은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파괴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우리는 파괴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 사는 것이 정상대로 본능대로 살 뿐이고 죽음 뒤는 잘 모르겠고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거다.

그걸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람 사는 본능이 뭐냐? 그저 편하게. 같은 말로 불편하지 않게 사는 것. 마스크 하니까 불편하지요. 짜증나잖아요. 그저 편하게 사는 게 목적이고 불편하지 않게 하는 게 인간의 목적입니다. 인간에게는 악마니 그리고 하나님이니 그런 것은 나중 문제에요. 중요한 것은 내 몸 편하면 끝나요. 내 몸 편한 게 제일 본성에 본능에 맞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주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님께서 버림받았다. 주님께서는 인간들이 파괴되어야 될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을 파괴하는 게 아니고, 그냥 파괴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 속에 일단 들어와야 돼요. 그래야 뭐야 발생하느냐 하면, 인간 세상이 왜 파괴돼야 될 이유가 증명이 되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인간이 심판받아야 될 정당성이 돼야 되는 겁니다.

사무엘상 28장을 펼쳐보세요. 제가 몇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사무엘상 28장 3절에 보면 사무엘이 죽었지요. 참 이것 어려운데 혹시 여러분 옆에 누가 죽으면 따라 죽습니까, 안 그러면 죽었구나 하고 나는 나대로 살면 돼요? 누가 죽는다고 따라 죽을 그런 바보는 없어요. 그냥 살면 되니까요. 평소에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살면 되니까요.

그런데 사울이란 왕이 사무엘이 죽고 난 뒤에 자꾸 전쟁이 일어나고 불안해지니까 여기 5절에 보면, 블레셋 군대를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자, 여기서 물어보겠어요. 사무엘이 살아 있을 경우와 사무엘이 죽었을 경우에 차이점이 뭐겠어요? 사무엘이 살아 있을 경우에는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잖아요. 그럼 사무엘이 선지자가 살아 있으면 든든하지요. 든든하면 굳이 두려울 필요 없이 사무엘이 일을 다 하면 되니까 사무엘의 혜택을 입으면 되니까 상관없는 거예요.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게 믿음입니까? 제가 묻는 겁니다. 첫째 강의를 들어보면 믿음이란 나의 부실함, 내가 어느 정도로 본능적으로 사는 그야말로 악마의 모습으로 사는 그게 들통 나는 믿음이죠. 사무엘이 죽음으로서 비로소 사울 본래의 본질이 드러나는 기회를 갖는 겁니다. 그래서 사울이 무서워해서 그 다음에 뭡니까?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이 점이 중요한 거예요. 사울이 신접한 무당 여인을 찾는 이유는 평소에도 자기 자신의 자랑거리를 포기 못하고 내가 나라의 왕으로서 뭔가 왕답게 했다는 그런 칭송을 받고 싶지요. 그런데 그전에는 누가 있기 때문에 가려졌다? 사무엘 때문에 덕을 본 거죠. 그런데 지금 사무엘이 죽었잖아요. 죽었으니까 사울 왕은 자기 본심이 톡하고 나온 거예요. 그래서 누굴 찾아가요? 무당 여자를 찾아갔지요. 신접한, 신이 접한 무당 여자.

이것은 새삼스럽게 찾아간 게 아니고 평소의 마음이 내가 무당 찾을 마음인 줄 본인은 몰랐지요. 그런데 사무엘 죽고 난 뒤에 본인이 안 거예요. 예수님의 빈 무덤이 중요한 이유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제자들의 태도가 어땠습니까? 같이 죽었습니까, 도망쳤습니까? 도망쳤지요. 바로 주님의 뜻은 그거에요. 도망칠 수밖에 없는 허접한 인간을 주께서 구원하시는 겁니다. 주님한테 충성한 사람을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의인은 없어요. 아까 율법의 행위로 의인은 없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거예요. 그래야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자랑거리가 되니 그렇게 한 겁니다.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은 거예요. 그동안 많이 참았습니다. 왕이란 체면으로 안 찾았지만 사무엘 죽고 난 뒤에는 본심대로 했지요.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여기 청도에 돌할매 있다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청도에 돌 만지면 용하게 뭐든지 잘 된다는 할머니가 살아요. 그걸 돌할매라 해요. 땅에 있는 갓바위라 보면 돼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은 모르겠고 교회는 있으니까 교회 찾아가서 제발 학원 문 열어달라고 기도 부탁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참 교인들이 거짓말쟁이라는 것이 다 드러나는 겁니다. 답답하니까 찾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변장해서 찾아갔습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질문할 게 계속 있어요.

뭐라고 부탁하느냐 하면, 신접한 여인에게 죽은 사무엘 불러달라고 부탁합니다. 질문입니다. 간단해요.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습니까? 사울이 사무엘이 그리운 거예요. 사무엘에게 한 수 얻겠다는 게 아닙니다. 사무엘 네가 내 대신 지켜달라는 거예요. 골리앗에 대해서 어린 소년 다윗이 지켰잖아요. 사울은 그런 존재에요. 일은 남이 하고 행세는 지가 하고 싶은 거예요. 인간의 자랑거리가 그런 것 같습니다.

자, 죽은 자가 과연 살아날 수 있습니까? 참 어려운 질문이지요. 답변은 제 몫입니다. 답변해드리겠습니다. “죽음에 대해서 우리 자신이 질문할 자격 없음.” 이게 정답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죽음 앞장 세워서 이 땅에 나타나셨기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는 빈 무덤을 앞장 세워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분이에요.

그러면 십자가는 죽음이죠. 하나님은 죽음으로 하나님 쪽에서 질문을 던지면서 다가오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질문의 담당자가 우리 주님밖에 없어요. 아까 두 가지 질문 있지요.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십자가에서 하신 질문 있잖아요. 그 질문을 우리가 할 수 있느냐 이 말이에요. 우리가 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죽음 안에 갇힌 죽은 자기 때문에 죽음 밖에 대해서 어떤 질문을 해도 그것은 죽은 죄인이 하는 질문일 뿐이에요. 엉터리 질문일 뿐이다 이 말입니다.

죽음과 생명에 대해서는 그 책임자, 그 고난자는 우리가 걱정하고 우리가 생각할 문제가 아니에요. 까라면 까면 돼요. 죽으라면 죽으면 되는 겁니다. 이 죽음에 대해서 애곡하거나 비탄에 잠기거나 애통해하면 안 돼요. 우린 그럴 자격이 없다니까. 내가 죽는데 대해서 항변할 권한도 없어요. 권한 부리는 것은 악마가 그런 짓하고 있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을 때 따먹는 날에는 그 다음에 뭡니까? 정녕 죽으리라고 했지요. 그러면 죽음은 누구 소관입니까? 피조물인 우리 소관이 아니에요. 피조물 따먹었느냐? 그러면 마땅히 죽어. 그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마땅히 죽으면 끝나는 문젠데 거기에 대해서 시비 걸면서 다가오는 유혹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누구냐? 하나님의 원수지요. 악마지요.

하나님의 원수와 같이 한 통속이 되다보니까 우리가 질문하지 말아야 될 질문을 계속하는 거예요. 주님 우리 죽고 난 뒤에 어디 갑니까? 그런 질문을 하면 안 돼요, 참. 죽고 난 뒤에 천국 있습니까, 지옥 있습니까? 그건 답변해줘도 엉터리 답변이에요. 죽은 다음에 천국 있습니다. 이 자체가 잘못된 답변이에요. 왜? 그 답변하는 그 사람 죽은 자인데 마치 산 자로 여기고 한 답변이기 때문에 그 답변 자체가 취소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할 때 부자도 죽고 거지도 죽었다 했지요. 거지는 죽고 어디 갔습니까? 낙원에 가고 부자는 죽어서 어디 갔습니까? 지옥 불에 들어간다는 비유를 했지요. 예수님이 그걸 알려줄 때는 살아 있는 인간들아 잘 들으라는 게 아니라 너는 죽었기 때문에 이 비유에 대해서 내 취지에 대해서 너는 진정한 취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왜? 모든 인간은 부자 되고 싶기 때문에.

제 말이 어렵습니까? 부자이고 싶어 하기 때문에 부자는 죽어서 지옥 간다는 자체가 설사 지옥 가는 게 정답이라도 우리는 우리 마음에서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찬양과 찬송과 기쁨이 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그건 답변이 아닌 거예요. 주님의 답변이 오게 되면 우리 마음에서 감사와 찬송과 기쁨이 나올 때 그게 성령이 주신 하나님의 정답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내가 살았다고 치고, 이게 문제에요.

목사님, 죽고 난 뒤에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천국과 지옥이 있기는 있습니까, 라고 묻는 취지 자체가 본인을 뭐로 봅니까? 죽은 자가 아니고 아직도 들을 귀가 있는 살아 있는 안 죽은 자로 자기를 치부한다는 그 자체가 엉터리 답변을 들을 준비 자세가 안 된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모든 인간의 질문에 대표자가 예수님 밖에 없어요. 최종적인 질문은 예수님만 해야지 다른 사람은 하면 안 됩니다. 그 질문이 뭐냐?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사무엘상 아직 안 끝났어요. 질문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누구 베드로전서 2장 7절 읽어보세요.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그러니까 십자가라 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천국 가고 싶어도 다 넘어지게 만드는 거예요.

신천지 교회와 대화하면서 내가 그 사람에게 수십 번 이야기했어요. 우리 동네 살던 분이라 만났어요. 성경의 중심은 내가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 중심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그 이야기에 그 사람은 계속 넘어지는 거예요. 막히고 한두 걸음 따라 들어오는 게 아니고 자빠지고 안 일어나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성경을 보더라도 자기 구원받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 이미 인간은 천국 가고 천국 가게 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권한과 권리가 이미 선악과 따먹은 상태에서는 정보를 캐낼 자격과 권한도 없어요. 참 이 사실을 누가 알까, 정말.

하나님에 의해서 프리즘이 된 사람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쓰인. 내가 최종이 아니라 내 뒤에 누가 최종이 돼요? 우리 주님이 최종이 된 사람이면 나는 최종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의 도구가 되죠. 그런 사람에게는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에요. 내가 천당 가나 지옥 가나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누가 결정할 문제입니까? 내 배후에 계시는 그분이 까라면 까지요, 뭐.

그게 마태복음 8장에 있잖아요. 나도 중대장인데 나도 부하가 있는데 저리 가라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나이다. 따라서 주께서 나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됐지, 뭐. 우리 주님이 든든하면 됐지 왜 내가 든든해야 되지요? 내가 의미의 최종 마감입니까?

지난 금요일에 이 자리에서 생중계할 때 그런 강의했거든요. 천상의 시간이 나의 시간을 갉아먹는다 했어요.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하늘의 의미가 나의 의미를 다 갉아먹어요. 왜냐하면 이 세상의 시간은 인간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이야기했고요, 하나님이 주신 안식일 시간은 예수 그리스도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니까 내 중심이란 말이 뭐냐? 우상중심으로 돌아간다. 수요일 강의에 의하면 우상중심은 마귀중심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마귀는 우리 멱살 쥐고 뺑뺑 돌려버려요. 계속해서 내 중심에서 못 벗어나도록. 주님은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죽었다 이야기하고 마귀는 너는 살았으니까 편하게 살라고 이야기하고. 우리는 누구 말 들어야 되지요? 강의 여기서 끝낼까요? 우린 누구 말 들어야 됩니까?

파괴되는 인간들은 자기가 파괴됨을 모릅니다.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오셔서 인간들 자기의 본심을 보여주니까 예수님께서 오셨다 떠날 때 그냥 죽은 게 아니라 버림받은 자 또는 베드로전서 2장 말씀대로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빠져나왔어요. 그러면 주님께서 왜 버림받았는가? 베드로전서 2장 7절에 보면,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지요. 그러니까 돌을 실선으로 그리면 나머지 남아 있는 것은 점선이 되는 겁니다.

성전의 모퉁이를 인간이 건드린 거예요. 인간이 안 건드리면 될 것 아닌가. 안 건드릴 수 없어요. 인간은 이미 죽은 존재기 때문에 죽은 티를 팍팍 내야 됩니다. 악마의 본성의 티를 인간은 팍팍 내야 돼요. 우리가 고치려고 스스로 새 사람 돼야지, 하지 마세요. 그건 안 되는 거예요. 주께서 쓰임 받을 때 이런 사실을 안다는 겁니다. 그래야 나의 자랑거리가 수치고 오히려 내가 수치로 여겼던 것이 자랑거리가 되지요.

그러면 제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파괴된 곳에 산다면, 파괴된 데서는 악마가 작용하기 때문에 자꾸 우리에게 네가 남들에게 자랑거리가 되라 하잖아요. 그러면 내가 나를 날마다 버리면 된다.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나를 날마다 버리는 거예요. 이걸 사자성어로 자기부인, 자기부정. 내가 나를 버리면 돼요. 나와 나를 안녕하면 된다 이 말이죠.

여기 내가 나를 할 때 ‘나’가 몇 개 나옵니까? 두 명의 자아가 나오지요. 이걸 로마서 7장에서는 두 명의 나라 하지 않고 나를 해부해서 내 안에 서로 합칠 수 없는 두 개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는 선을 원하는 나가 있고, 또 악을 원하는 나가 있다는 거예요. 이게 그냥 단순히 재밌는 말을 하는 게 아니고 실제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그냥 성령 받은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거예요.

누가 누굴 이기느냐? 악이 선을 이겨요. 이게 잘된 거예요. 못된 게 아니고 일이 잘 풀리고 있는 거예요. 왜냐? 내 악이 내 선을 이겨줘야 누가 빛이 납니까? 기뻐하리로다 찬양하리로다 누굴 인하여 감사하리로다? 주님이 내 안에서 빛이 나기 때문에 이게 본래 하나님이 원하시는 백성의 모습에 맞는다는 거예요. 선한 내가 알아서 악을 이기면 안 돼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어떤 경우라도 선악을 아는 상태에서 어떤 인간도 선으로 악을 이길 위인이 없음을 누가 알고 있어요? 주님이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한 거예요.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인간을 하나님이 만들었으면 처음부터 따먹어, 따먹어 했을 거예요. 따먹고 선으로 악을 이기면 되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선으로 악을 이기지 못하는 그런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아예 따먹지 말라고 한 거예요. 그걸 보고 악마가 따먹으라 했단 말이죠. 결국은 뭐냐?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한 것은 악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그리고 예수님을 승리자로 전쟁에 투입된 심판주, 전쟁의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을 오른편에 두기 위해서 악마와 인간을 그렇게 이용하신 거예요.

시편 51편에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아직까지 사무엘상 28장은 제가 안 건드렸습니다. 이것 하고 난 뒤에 말씀드릴게요. “다윗의시, 영장으로 한 노래” 영장이란 찬양대 대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셋바와 동침한 후”이렇게 돼있지요. 달리 이야기하면, 가인이 동생을 죽인 후에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나타났지요. 사울이 사무엘을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서 먼저 자기가 제사 드린 후에 사무엘이 나타나잖아요. 그리고 사울을 찢어버리죠. 너는 끝났어.

시편 51편에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에 누가 나타났습니까? 유명한 이름이죠. 나단 선지자가 등장했지요. 그렇다면 그때 사무엘상에 나오는 내용을 여러분이 잘 아시지요. 처음에 다윗이 안 들키려고 발악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단 선지자도 조심스럽게 접근했습니다. 어떤 사람이라고 해요. 이 나라에 어떤 사람이 자기가 부자인데 양이 많으면서도 양이 한 마리밖에 없는 자식처럼 키우던 종의 양을 손님 왔다고 잡아서 대접했다면 그 얌통머리 없는 사람을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했어요.

나단 선지자가 그렇게 접근하는 방법을 듣고 오늘날 여성주의자들, 페미니스트들이 얼마나 화를 내겠습니까? 여자를 뭐로 봤어요? 한 마리의 양이고 양은 질이 문제가 아니고 그냥 숫자로 측정될 뿐이라고 느끼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야에서 한 아내가 아니고 우리야에게 아내가 열 명 정도 됐으면 임금이 밧세바와 동침해도 별 탈 아니다. 이런 생각을 갖게 만들지요.

부자가 양이 많으면서 다른 말로 자기는 여자가 많으면서 여자가 달랑 하나밖에 없기에 너무 사랑했던 아내를 그렇게 탐내느냐. 이런 식으로 나단 선지자가 예를 들었다는 말은 앞으로 임금한테 아내를 안 빼앗기려면 아내를 열댓 명 둬야 어지간히 뺏겨도 숫자도 많으니 괜찮다. 이런 식으로 해석될 여지가 않겠느냐고 따질 수가 있겠지요.

그게 분노할 일입니까? 숫자가? 그러니까 나단 선지자가 그런 이야기한 것은 뭐냐 하면, 왕이 권세가 있다는 것, 왕에서 남의 것을 빼앗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양의 숫자로 표현한 거예요. 그럼 여기서 뭐가 빠집니까? 진짜 이건 묻는 내가 나빠.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을 한 건데 여기서 뭐가 빠지느냐 하면, 우리야가 너무 훌륭했다, 밧세바가 너무 섹시하다. 이런 문제는 다 빠지고 그냥 숫자 안으로 다 먹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의 많음으로 권세 부리는 그 하나를 부각하기 위해서 나머지 그런 질적인 요소는 없애버리는 겁니다. 작다와 많다만 따지는 거예요. 왕은 많은 쪽에 왕 빼놓고 신하 우리야는 작은 쪽에 없는 쪽에. 그렇게 쓰는 겁니다. 많이 가진 자, 권세 있는 자가 자기 것 훼손되기 싫어서 없는 사람의 것을 빼앗을 때 왕이면 그런 인간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물어보는 거예요. 그걸 역지사지, 입장을 바꿔서 물어보는 거예요.

그때 다윗의 답변은 상당히 건방진 면이 있어요. 뭐냐 하면, 내가 왕으로 있는 내 나라에 그런 극악무도한 일이 왕의 자존심에 스크래치 가게 하는 일은 용납 못하겠다. 끝까지 뭘 생각합니까? 나는 뭐다? 왕이다. 내가 왕으로 있는 이상은 그런 일은 내가 도저히 용납 못하지. 그런 인간은 죽여 버리라는 거예요. 죽기 전에 네 배로 갚아주고 아예 그런 인간은 죽여 버려라.

강의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시편이 다윗의 시편 아닙니까. 하나님이 여기 계시고 그 뒤에 프리즘이 있다고 했지요. 프리즘을 통해서 뭘 보여줍니까? 하나님은 나의 □다, 라고 돼있고 여기는 전쟁 용어들이 들어가지요. 그리고 그 전쟁은 반드시 적이 있고 하나님의 원수가 있지요.

그런데 지금 다윗이 말로는 하나님이 나의 왕이고 나는 하나님의 대리인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나 실제는 누가 왕이에요? 누구 자존심으로 스톱이 된 거예요? 자기의 자존감으로 스톱이 된 거예요. 그러면 원수의 극한이 원수가 있다는 이쪽이 아니고 뭐가 원수의 집결지냐 하면, 바로 다윗 자신이 하나님 원수의 모든 요소를 다 모아져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그 십자가란 죄 안에 인간의 죄가 다 들어있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그래서 그 벌이 뭐냐 하면, 율법에 위반된 자는 죽어야 마땅하다. 내가 죽이리라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나단 선지자가 유명한 말을 하지요. 죽여야 될 그 사람이 바로 다윗 당신인 거예요. 이 말을 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예수님이 심판주 되어 죽여야 될 자들의 누구냐 하면 예수님 본인이 되도록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렇게 조치를 하신 거예요.

다윗은 이스라엘 왕입니다. 자, 진정 이스라엘 왕은 어떤 자여야 됩니까? 남에게 명령하고 남을 통치하는 자리가 이스라엘 왕입니까, 아니면 백성의 죄 대신 죽는 자리가 이스라엘 왕일까요? 이 질문에 여러분 답변을 알고 있지요. 죽는 자리죠.

그러면 사무엘상 28장에서 사울이 이스라엘 왕이잖아요. 사울이 보여줄 것은 뭡니까? 백성들 죄를 위해서 자기가 죽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이것이 사울의 기능입니다. 왕은 이긴다, 승리한다, 이전에 무엇부터 해야 됩니까? 왕은 내가 죽어 마땅함을 보여주는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이스라엘 왕의 자리입니다. 그 다음부터 시편 51편 이야기가 술술 다 풀립니다.

내가 죄인된 것은 내 죄가 아니고 내 모친의 죄 중에서 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죽어야 될 것은 내가 죽지 않고 자기 아들이 죽어요. 밧세바와 다윗 사이에 또 이게 아다리가 됐네. 임신된 아이가 태어났고, 그 아이를 다윗이 아무리 애걸복걸 살리려고 애를 써도 금식까지 하면서 살리려고 한 것을 신하들이 다 봤거든요. 참 왕은 자기 아들에 대해서 애착이 많구나. 그런데 어떻게 됐습니까? 죽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내 죄를 위해서 대신 내 죄를 그대로 다 보여주면서 죽은 죽음이거든요. 그게 신약에서 누구 죽음이에요? 바로 십자가 아닙니까. 십자가 죽음은 나와 별개 문제가 아니고 내가 미처 모르는 모든 죄를 다 우리 코앞에 보여주는 겁니다. 이때는 우리가 치매 걸린 할머니 돼야 돼요. 십자가 거울 앞에 물을 퍼붓든지 네가 왜 사냐, 손가락질이라도 해야 돼요. 십자가 그 모습이 내가 달린 거예요.

그걸 주 안에서 중첩됐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우리가 중첩됩니다. 그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이게 중첩 아닙니까. 이렇게 중첩되고 난 뒤에 오늘 본문 시편 18편을 보게 되면, 이 세상이 파괴되는 것은 안부를 묻는 식이죠. 아직도 파괴 안 됐네. 보성아파트 아직도 안 무너졌냐. 이런 식으로.

세상에 대해서 파괴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거예요. 왜냐하면 길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죽어 마땅함을 알게 되었으니까. 지가 국회의원이니 판사니 자랑질 해도 그 자랑이 성도한테는 먹히질 않아요. 우리 집사님, 누가 자랑하면 먹힙니까? 겁나요? 아니지요. 장로님한테는 묻지도 않아. 그런 것은 안중에 없으니까.

이미 죽은 자들의 거리에 돌아다니고 죽은 자들이 대치동 학원 다니고 있는 거예요. 그 아들들이 딸들이 손자들이. 사람한테 무섭다 하는데 거짓말이죠. 사람한테 무서운 게 아니고 내가 나한테 무서운 거예요. 내가 잘못 될까봐 무서운 거예요. 나와 빠이빠이 할까봐 겁나는 거예요. 내가 자랑거리인 나와 헤어질까봐 겁나는 거예요.

시편 51편 8절에 보면,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다윗 참 뻔뻔스럽지요. 주께서 꺾으신 뼈가 누구냐 하면, 바로 밧세바로 낳은 자식인데 그 자식이 자기 자식이 아니고 우리야의 자식이 되는 거예요. 왜냐? 밧세바가 우리야의 아내기 때문에. 이게 마태복음 1장 6절에 나옵니다. 솔로몬이 우리야의 자식으로 돼있어요. 법적으론 다윗 자식이고 실제로는 우리야의 자식이고.

물론 신체적으로도 다윗 자식이지만 하나님께서 죽은 자의 자식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백성에 족보에 올라가지 않아요. 어떤 비문을 남기신 예수님의 자식이 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천국 백성이 아닙니다. 죽었던 주님의 자녀가 돼야 돼요. 주님의 형제가 되어야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은 지 자랑 안 해요. 십자가만 자랑하지요.

다시 사무엘상 28장 가봅시다.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사무엘상 28장에 사울이 사무엘을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만약에 이 대목을 소설로 쓴다. 픽션이 되면 안 되겠지요. 픽션을 우리말로 하면 뭐지요? 소설 또는 허구란 뜻이거든요. 그런데 메타픽션은 뭐냐 하면, 소설 속의 소설이에요.

쉽게 하면 내가 꿈을 꾼다. 이건 이해되시죠. 그런데 내 꿈에 내가 꿈을 꾼다면, 그 꿈은 꿈이 꾼 거예요, 내가 꾼 겁니까? 꿈이 꾼 것을 그 꿈을 내가 꾼 겁니다. 여러분 힘들게 하겠어요. 내가 꿈에 소설가가 되어서 자서전을 쓴다면 이 자서전 안에 있는 주인공은 꿈입니까, 납니까? 꿈속의 나에요, 아니면 꿈 깨고 난 납니까? 이런 질문들의 성립돼요. 그런 걸 메타픽션이라 해요. 소설 속의 소설.

왜 메타픽션을 거론하느냐 하면, 주객에 의해서 주인과 손님에 의해서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주인공에 의해 다뤄지는 대상이냐는 이런 문제를 이야기할 때 성경에서는 인간으로 모든 의미가 마감되는 게 아니고 성경인물 배후에 주님이 있어요.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주님을 위하여 만들어졌거든요.

주님의 자기 자서전이란 말이죠. 그러면 주인공이 주님입니까, 납니까? 분명히 동의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께 찬양한다면 이 찬양의 주인공이 납니까, 주님입니까? 주님이 되지요. 주님이 되려면 내가 찬양하는 나를 누구 꺾어야 돼요? 내가 찬양합니다, 라는 내가 주인공 되는 못된 육적인 버릇을 주님께서 그만 둬야 되겠어요, 밟아버려야 되겠어요? 이걸 밟아버려야 돼요. 이게 뭐냐? 나에게서 나를 헤어지게 만드는 겁니다. 나에게서 나를 강제로 떼어놓는 거예요.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 할 때 이 믿음의 주인공이 내가 어느 자리에 있어요? 주어 자리에 있으니까 내가 믿는 게 되잖아요. 그런데 지금 이 논리에 의하면 이건 잘못된 거죠. 주님이 나를 믿게 하셨습니다가 되겠지요. 이게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믿음은 행함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죠. 이걸 다른 말로 성령이 주신 선물이죠.

선물이 된다는 말은, 우리가 믿음의 주인공이다, 아니다?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안 된다는 것은 답이고 과정 속에서는 누구 주인공이냐 하면, “내가 주를 믿습니다.”를 필수조건으로 삽입되어 들어가야 돼요.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을 해줘야 진짜 이스라엘 왕다운 사람이 돼요. 이스라엘 왕이란 것은 백성의 죄를 위해서 대신 책임자로 나서는 게 이스라엘 왕이에요. 하나의 프리즘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이 이스라엘을 걱정하는 것은 뭡니까? 주께서 다윗을 통해서 주님이 자기 백성을 걱정하는 것을 중간과정에서 다윗이 보여주는 겁니다. 그걸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사도가 된 열두 사도는 전부 다 예수님을 한 번 떠난 적이 있다, 없다? 떠났지요. 떠났어요. 나 자신을 스스로 포기를 못하기 때문에. 그런데 성령이 왔어요.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그 마음이 오니까 비로소 띠 띠고 내가 원치 않는 길로 가는 겁니다.

성령의 마음이 뭐냐에 대해서 그걸 모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외로 많아요. 대부분이죠. 그런데 고린도전서 2장 8절에 보게 되면,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해놓고 그 십자가를 뭐냐? 하나님의 깊은 곳으로 봤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깊은 마음속에 십자가 들어있는데, 그래서 아까 제가 십자가로 할 수 있는 질문을 우리가 못하는 거예요.

왜? 십자가에서 스톱이 돼야 돼요.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 질문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만이 아버지께 할 수 있지 우리는 끼어들면 안 됩니다. 우리는 주제넘게 그 질문 넘어서서 질문하면 안 돼요. 까라면 까야 되지 우리가 살기 위해서 이 방법 말고 다른 방법 없습니까, 라고 베드로가 사탄의 말을 입어 그런 소리했잖아요. 안 죽고 일 되는 법 없습니까? 이런 질문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에요.

여기 보면,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11절) 그게 뭐냐? 하나님의 마음, 영이 뭐냐? 그게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이 왔다는 것은 십자가의 비밀에 대해서 우리에게 비로소 알려준 거예요.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십자가 알면 뭘 알았다? 모든 비밀은 거기로 다 빨려 들어가니까 십자가 비밀에 모든 게 몰려있으니까.

그래서 사도는 십자가만 증거한 거예요.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난 십자가 외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오직 십자가만 자랑한다. 그 과정 속에서 필히 우리가 어떤 자세냐 하면, 우리는 다윗처럼 내가 주인공인 양 행세하는 이 과정이 필요할까요, 필요 없을까요? 필요하지요.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서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서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는 것이 평소의 사울의 마음가짐이었어요. 선지자 이용해서 자기가 하자 없는 인간되고자 하는 이 시도를 한 거예요. 신접한 여인이 불러낸 게 아니고 하나님이 불러내신 거예요. 사울이 왜 죽어야 되는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인간은 불러내질 못합니다. 인간은 죽은 귀신을 못 불러내요. 하나님이 프리즘처럼 불러내게 하셔서 하나님의 뜻의 죽은 귀신 사무엘을 통해서 전한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대목 보면서 목사님, 죽은 사람을 무당이 불러낼 수 있지 않습니까? 무당이 불러낸 게 아니고 주께서 무당을 통해서 나타난 거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스스로 하신 일이에요. 따라서 우리는 일단은 내가, 이거는 백날 들어도 저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해요. 주인공이에요. 성경 펼치는 것도 내가 했어요.

일단 내가 해놓고 주께서 그것이 네가 왜 주인공이 아님을 깨우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나의 증인이 아니고 예수님의 증인되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이제 세상을 보면서 예수님을 떠난 세상은 무너집니다. 오래된 호텔 걱정하는 것처럼 우리는 세상 보면서 그냥 안부나 물읍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죽음에서 도피할 것이 아니라 죽음 속으로 이끌어 들이시는 주님, 십자가 안에 있다는 것이 바로 주님의 증인되기 위한 필수코스인 것을 저희들이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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