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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8 16:00:33 조회 : 37         
6강-암 3장 9-12절(죽음 속에 남은자)201007-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17.111.178.73)
6강-암 3장 9-12절(죽음 속에 남은자)2010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3장 9-12절까지입니다.

아모스 3:9-12

“아스돗의 궁들과 애굽 땅 궁들에 광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사마리아 산들에 모여 그 성중에서 얼마나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나 보라 하라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줄을 모르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땅 사면에 대적이 있어 네 힘을 쇠하게 하며 네 궁궐을 약탈하리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퉁이에나 걸상에 비단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이 건져냄을 입으리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나라를 찢으시고 주변나라, 여기서는 아스돗이라 되어 있지요, 애굽도 주변나라입니다, 그 주변나라에게 광포(廣布)라 해서 널리 선포하는 것, 광고하는 것, 그것을 하라고 하십니다. 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 치욕스럽게 파괴되고 벌 받고 있는지를 이방나라로 하여금 구경거리가 되게 하도록 하셨습니다.

에스겔 36장 4절에 보면 에스겔도 이런 점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산들아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주 여호와께서 산들과 멧부리들과 시내들과 골짜기들과 황무한 사막들과 사면에 남아 있는 이방인의 노략거리와 조롱거리가 된 버린 성읍들에게 말씀하셨느니라.”

이방인의 노략거리, 아무나 와서 탈취할 정도로 허약한 나라가 되게 하고 그리고 조롱거리가 되게 했다. 놀림거리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인 이스라엘을 이끄시겠다는 것, 그렇게 만들어버리겠다고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목자가 사자 입에서……”라고 되어 있는데 사자, 짐승이지요, 짐승의 입에서, 그리고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되어 있어요. 사자같이 덤벼든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망할 때 앗수르라는 큰 힘을 가진 제국이 와서 사정없이 무자비하게 격분해 있는 사자의 모양을 갖추면서 덤벼들어서 아주 이스라엘을 작살을 내는 그것을 미리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모스 3장 4절에 봐도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야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고야”라고 사자를 거론하지요. 사자의 특징은 무자비하다, 3장 4절에도 사자를 언급하고, 오늘 본문 12절에도 사자를 언급한 것은 이스라엘나라가 다른 이방나라보다 앞서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는 그 기능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 너희들의 앞길에, 가는 길에 뭐가 있는지 아느냐? 거기는 사자같이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의 장치가 벌써 설치되어 있다. 하나의 국가라든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 이방민족도 마찬가지고, 그들의 앞길에 뭐가 버티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보내신 무자비한 사자가 버티고 있는 거예요.

물론 그 국가 안에는 우리 자신도 포함되어 있지요.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 인간들이 희희낙낙 거리면서 희망을 꿈꾸는 그 길목에 가게 되면 얼마 안가서 막힌 길, 막다른 길이 되고 거기에는 심판해야 될 하나님의 무서운 맹렬한 심판의 도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걸 먼저 다른 민족에 앞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증거 하는 나라기 때문에 미리 보여준 거예요.

심판으로 막혀 있다는 것은 다른 민족은 생각도 못하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준 겁니다. 제가 방금 막혔다고 했어요. 막힌 길이라고 막혀 있다고 한 겁니다. 이것은 어느 민족도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하지 못한다. 심판을 피해서 보다 나은 미래로 갈 수 있는 어떤 민족도 이 세상에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하나님이 친히 만든 이스라엘이 이렇게 사자에 가로막혀서 산산 조각나고 파괴된다면 다른 민족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요. 모든 인류가 다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책을 썼는데 책 이름이 <브레이크 없는 벤츠>라는 책입니다. 홍 준표라는 사람이 옛날에 쓴 거예요. 검사시절에.

제목이 재미있는 것은 벤츠라는 차가 굉장히 멋있고 좋은 차거든요. 남들 보기에 멋진 차에요. 쌩쌩 달려요. 뽐내가면서, 자랑하면서, 나 성공했노라, 하면서 달리는데 문제는 그 벤츠에 브레이크가 없다는 겁니다. 스톱이 안 되는 거예요. 내리막길로 간다. 그것은 어떤 것도 저지할 것도 없이 지옥불구덩이로 그대로 들어가는 거예요.

남들 보기에 그 인생이 성공해보이고, 행복해보이고, 화목이 넘쳐 보이고, 늘 하하, 웃음소리가 크게 나는 가정이라 할지라도 브레이크 없는 벤츠입니다. 그것을 어디서 찾는가? 25평 아파트 같으면 저 위로부터 브레이크 없는 벤츠, 벤츠, 벤츠……, 모조리 똑같은 운명이에요. 그저 잘 먹고 잘살고 싶지요. 이것은 세상의 모든 국가도 마찬가지고요.

그들이 가는 앞길이 그냥 꽃길만 있을 줄 알지요. 꽃길 같은 것은 없어요. 삼킬 맹렬한 울부짖는 사자처럼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모스 3장 4절에도 하나님이 아모스의 예언가운데서는 그 예언하는 성격을 짐승에 비유해서 울부짖는, 그냥 사자가 아니고 울부짖는 사자, “어서 오너라. 내가 잡아먹어 줄 테니까, 심판해 줄 테니까, 찢어버릴테니까.”

그리고 그 예언대로 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스라엘을 건진다고 건지지만 몸통은 못 건지고 그저 두 다리하고 귀 조각만 간신히, 그것도 간신히 건지는데 그것도 하나님이 손을 썼기 때문에 간신히 빠져나오는 그런 형국이 인류의 미래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예언이에요. 사람들은 쌩쌩 달려요. 성공했다고, 자식 잘되었다고, 취직했다고, 결혼한다고 달리는데 브레이크가 없어요. 그것도 세상이 기울어진 운동장입니다. 한번 내려가면 다시 올라올 수가 없어요. 인간의 욕망은 뒤돌아가는 것이 없어요. 인간의 욕망은 새로운 욕망을 발굴하고 찾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욕망은 자기를 목마르게 하기 때문에.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찾듯이 인간은 옛날에 했던 욕망은 이제는 시시해져서 그 욕망 말고 다른 더 자극적인 욕망을 찾아 헤매게 되기 때문에 브레이크 없는 입장에서는 더욱 가속되지요. 비탈길이니까 가속공식에 의해서 그냥 꼴아 박습니다. 다시 못 돌이켜요. 세상맛을 봤는데 돌이켰다? 이것은 그야말로 내리막길 좋아서 가다가 헉헉거리면서 다시 오르막길 좋아하는 것처럼 이것은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이미 편한 맛을 봤기 때문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왜 이런 무서움을 주시는지, 그렇게 하나님이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하면서 왜 이런 낭패를 주시는데 왜 사전에 조치가 없었는가? 이스라엘에 이런 조치를 내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지키고 키우고 보호하고 가꾸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오직 아들만 지키고 가꾸고 보호해요. 온 인류가 아닙니다. 인간이 아니에요. 아들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아버지이고 싶어 하기 때문에. 아버지이고 싶어 할 때는 반드시 이 아버지에 의해서 인정받는 아들이 지상에서 발생되어야 됩니다. 만들어져야 돼요. 아버지와 아들사이,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만든 취지입니다. 모세가 애굽에 내려갈 때 출애굽기 4장에도 나오지요. 22절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분명히 아들이라 해서 하나님의 뜻은 “내가 왜 아버지인가, 그리고 아버지의 능력이 뭔가, 아버지의 하신 일이 뭔가, 이 지상에 있는 인간들아, 아들인 것과 아들 아닌 것의 차이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알아라. 아들은 이런 자들만 아들이고 그 외에는 결코 아들이라고 내가 인정하지 않겠다. 아들만 살리고 그 나머지는 아들이 아닌 고로 저주하겠다.”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만들어놓았으면 안 다치도록 보호를 하시든지 무슨 조치를 해야지 왜 그냥 이렇게 오늘 본문처럼 작살을 내느냐? 아들도 아닌 앗수르 이방민족으로 하여금 사정없이, 봐주는 것 없이 격노해서, 분노해서 작살을 내시는 그 이유가 뭐냐? 그것은 바로 뜯김에 있어요. 뜯김!

양이 사자에게 뜯기면 양에게 무엇이 남느냐? 이빨자국이 남거든요.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기대하는 아들은 이빨자국이 있어요. 이빨자국이 없는, 심판에 의해서 뜯겨진 흔적이 없는 것은 그것은 아들이 아닙니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니듯이 이 땅에서 상처가 있어야 돼요. 하나님이 주신 심판에 우리는 정녕 살아남을 수 없었다, 의 그 표식이 있는 자, 그만이 아들이에요.

예수님은 바로 창자국과 못 자국이죠. 십자가자체가 주님의 상처요 흔적입니다. 그러니까 아들인 거예요. 하나님의 매서운 심판을, 온몸으로 징표를 다 발산하고 보여줄 때만 아들이에요. 왜냐? 아버지가 살아계시기 때문에. 내가 이 몸 가지고 이 땅에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전혀 아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 땅에서 살아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상처를 가지고 살아 있는가?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나 건드리지 마라. 나에게는 십자가의 흔적이 있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여기서 보통 쉽게 말해서 남은자가 구원된다고 하는데 남은자가 구원된다는 말은 맞는데 그 남은자의 종류가 두 가지 종류에요

남은자 같지만 남은자가 아닌 그런 남은자,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중국 무협영화에 보면 두 개의 도장이 있어요. 서로 무술 잘한다고 자랑질 하지요. 진짜 고수는 이쪽 도장의 착한 스승인데 상대 도장의 솜씨 비슷한 고수가 밤중에 비겁하게 우르르 몰려와서 살해했습니다.

행여 나중에 보복이 있을까 싶어서 스승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 집안 식솔 모두를 몰살하는데 어린 딸 하나가 잠결에 도망쳐서 깊은 산속에 들어가게 되지요. 그래서 2십년 동안 숨은 도사에게 배워서 무예의 고수가 되는 거예요. 스승님이 어느 날 “얘야,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 이제 하산해서 강호로 가라.”

이런 명령을 하게 되면 그 애는 덜렁 그냥 하산하는 것이 아니에요. “스승님 아직 멀었습니다.” “아니다. 이제 내가 늙어서 죽을 때 되었다. 이것이 네 아버지가 남긴 칼이다. 이 칼을 가지고 가거라.” 그리고 하산해서는 제일 먼저 만나는 만두집에 가서 한바탕 벌이는 것부터 시작하지요. 1층 조지고, 다음에 2층 조지고, 그렇게 부하들 다 해치우고, 그 다음에 “오야붕은 나와라. 아버지의 원수!” 영화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마지막 남은 그 여자애가 무예 고수가 되어서 자기아버지 원수를 죽이는 것, 그것 성경적 남은자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여자애는 죽을 뻔 했지만 죽지는 않았어요. 복수의 칼날을 갈았지요. “우리 아버지의 명예를 더럽혀? 이 나쁜 놈들, 내 복수의 칼날을 받아라.” 그렇게 되거든요.

그래서 남은자가 심판을 통과할 때 ‘나는 착한데 저쪽은 나쁜 놈이다.’라는 식의 남은자는 이것은 가짜 남은자에요. ‘주님, 왜 저를 안 데려가십니까? 저도 나쁜 놈인데요.’라는 의식이 없는 남은자는 남은자가 아니에요. 구원된 자가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가 좋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꼼수, 요령과 온갖 묘수를 써서 세상은 멸망해도 나만은 건지려고 열심히 교회 다니고 성경공부하고 이런 짓 한다니까요. 자기만 어떻게 한 번, 내가 나를 살려보려고.

왜? 내 몸은 너무 아까우니까. 그것은 심판의 흔적이 없는 겁니다. 보통 남은자를 생각할 때 피자 중에서 한 조각 남은 것을 두고 남았다고 하는데 여러분 피자의 한 조각 하고 5만 원짜리 지폐가 불에 탔는데 귀퉁이 한 조각 남은 것하고 남은 자의 의미가 달라요.

피자 남은 것은 칼 가지고 잘라서 깔끔하게 남았잖아요. 불에 탄 5만 원짜리는 겨우 후다닥 건져낼 때는 시커멓게 타버린 거예요. 한국은행 가도 안 바꿔줘요. 너무 타버려서. 모퉁이만, 그 끝만 건졌으니까. 시커먼 심판의 흔적이 불에 시커멓게 타버린 5만 원짜리 지폐의 끄트머리, 그 부분만 빼고는 나머지가 시커멓게 되었을 때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남은자입니다.

나중에 올 심판을 미리 경험케 하는 자, 그래야 아들이라는 것은 바로 죽음 안에서만 아들이 있지 살아 있는 인간들 무리에서는 결코 아들이 생길 수가 없다는 것, 죽음을 겁내지 말고, 심판을 겁내지 말고 네 주제에 맞도록 아예 하나님의 심판 속으로, 사자 입속으로 들어가 버리라, 그 말이지요.

일단 들어가고, 주께서 잡아당겨버리면 양의 두 다리라도, 건져도 주께서 양의 두 다리 정도는 건져야지 내가 알아서 나를 건지는 그런 방식의 신앙은 그건 신앙 아닙니다. 그건 가짜에요 엉터리에요. 이렇게 이야기해도 여러분 잘 모르실 거예요.

좀 어려운 예 같은데 이런 예를 들어도 여러분이 공부를 다 하신 분들이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나간 시대의 공룡의 뼈나 유적지의 토기들의 연대를 측정할 때 고고학에서 방사성동위원소를 가지고 측정해요. 그중 대표적인 것은 탄소동위원소를 가지고측정하는 겁니다.

동위원소라는 것이 뭐냐 하면, 성질은 똑같은데 한쪽은 실실 빠져서 사라져가는 것, 그게 동위원소에요. 세월이 가도 계속 말짱한 것은 그것은 동위원소가 아니고 성질은 똑같은데 실실 사라져 없어져가는 것이 동위원소에요. 탄소라 하는 것은 원자번호가 6인데 원자 핵 속에 있는 양성자수를 가지고 원자번호를 매기거든요.

그러면 질량은 뭐냐? 양성자 수만큼 같이 있는 중성자 수를 합해서 질량이라 하기 때문에 원자번호 6 탄소라 하는 것은 질량이 12로 되어 있어요. 양성자 6개 중성자 6개. 그런데 어떤 변종이 있느냐 하면, 양성자는 6개인데 중성자가 8개 되는 것이 있어요. 탄소 14가 되는 거예요. 그게 동위원소에요.

동위원소는 실실, 제가 실실 빠진다고 했는데 웃으면서 빠지는 것이 아니고 방사성을 내보내면서 빠져서 나중에 질소가스 되어서 빠져나가요. 빠져나올 때 그 기간이 탄소의 경우 5730년마다 그 질량이 반 토막 나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가지고 어떻게 사용하느냐? 살아 있는 것 가지고는 측정이 안 됩니다. 이게 중요한 거예요.

어떤 공룡의 뼈가 있다. 그 공룡은 죽어버렸어요. 죽어버렸으니까 살아 있는 공룡의 경우에는 계속해서 활동을 하기 때문에 대기에 있는 산소12 그리고 산소 14, 계속 주고받고, 또 주고받고 해서 이것은 할 수가 없는데 공룡이 뼈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죽어버렸어요. 죽어버리니까 그 속에 있는 탄소는 죽음과 동시에 영원히 있고 그 다음에 죽어버렸으니까, 외부에서 더 유입되는 것이 없으니까 거기서 실실 탄소 14가 빠져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빠져나오기 시작하면서 대기 중의 탄소 양과 원래 뼈 속에 남아 있는 탄소 양을 계산해서 이것은 몇 천 년 되었다, 하거든요. 탄소동위원소로 밝혀내는 연대는 기껏해야 5만년 이상은 못가요. 왜냐하면 빠져나오는 기간이 5만년 되면 다 없어져버리기 때문에 5만년 이 전 것은 계산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공룡 뼈 가지고 5만 몇 천 년 전,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은 다 거짓말이지요.

그렇게 빠져나오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공룡이 죽은 공룡이에요. 죽은 공룡일 때 뭐가 살아 있느냐 하면, 그 때부터 실실 빠져나오면서 숨겨진 시간이 카운트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죽은 자 만이 십자가에 접근이 가능해요. 십자가로 다가서는 새로운 시간배열이 구성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죽어 있을 때

이걸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멸망했을 때, 이스라엘이 사망했을 때 비로소 그 사망함으로서 실실 시작되는 그 심판과 심판이 완료되는 십자가사이에 약속적인 시간대가 새롭게 연결되는 겁니다. 브리지, 다리가 연결되는 거예요. 의미 있는 역사가 되는 겁니다. 기존의 역사는 들락날락 살아 있다고 인간들이 우기기 때문에 이것은 역사가 아무 소용없는 역사에요. 십자가와 만나지 못하는 역사에요.

십자가와 만나는 역사는 뭐냐? 모든 죽음의 의미는 십자가로 종결됩니다. 십자가 안에서만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죽음, 유일한 죽음이 그 의미를 발휘하게 돼요.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죄 값이었다. 그런 의미로. 십자가의 죽음은 인간에게는 결코 없어야 될, 만들어져서는 안 될 자기 의로움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이유가 되었다.

인간의 의는 천국에서 안받아주는데 인간의 의는 역사를 통해서 계속해서 나는 의롭다, 나는 착하다, 나는 선하다, 나는 바르다, 이걸 계속해서 역사 속에서 전달해왔고, 싸워왔고, 이어왔던 거예요. 역사와 전통을 통해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잘 이해가 안 되지요. 제사지낼 때 좌청룡 우백호, 대추는 여기에 놓고 배는 여기에 놓아라. 할아버지가 하얀 한복입고 집안 어른이 그렇게 하면 싸가지는 없지만 똘똘한 손자가 하는 말이 “할아버지, 왜 자리 바꾸면 안 됩니까? 할아버지가 ”그것은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이다.“ ”전통 바꾸면 되잖아요.“ ”전통을 바꾸면 그것은 벌 받아.“ 하거든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질문 그만해라. 까불지 마라.” 그런 뜻이거든요. “왜 벌 받는데요?” “그것은 악하기 때문에 벌 받는 거야.” “왜 악한데요?” “그것은 의롭지 않기 때문에 벌 받는다.” 인간세계의 모든 사회조직이나 가정이나 모든 집안이나 국가 모든 것이 어떻게 하면 인간이 살아갈 정당성을 스스로 보장하고 그 조건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거기에 모든 인간의 역량을 다 투자한 거예요.

우리는 살아날만해서 살아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싶은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의한 심판은 그걸 헤집고 다니지요. 모든 것을 다 헤집고 다니는 겁니다. 옛날에 나왔던 컴퓨터 게임에 보면 또르르르, 또또르르, 하면서 온군데 다 돌아다니면서 중간 중간에 있는 보상금 다 따먹잖아요. 폴짝 뛰기도 하면서 5백점, 3백점, 다 갉아먹잖아요.

이게 스가랴 이야기거든요. 하나님의 천사가 하나님의 거룩을 기준으로 해서 이 땅에 하나님께서 인정하지도 않는 엉터리 거룩과 의로움을 창안해내는 모든 법적인 체제에 또또르르, 또르르, 다니면서 다 심판해버려요 “이게 어디서 가짜가 설쳐대고 있어!” 인간들이 “하나님, 저 구원해주세요.” 하면 그냥 구원하지 않습니다.

“자, 보자. 절개해볼까? 네 안에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가 있는지?” 의가 없지요 왜? 인간은 의를 못 만들어낸다, 그 말이지요. 인간은 의를 못 만들어내서 죄고, 또 의를 못 만들어낸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추가적인 죄를 또 범해요.

의가 없는 것이 인간다운데 인간이 자기가 천사처럼 되려고, 신처럼 되려고 언제 죽어도 할 말 없는데, 어떻게 심판해도 우리가 군말 없어야 되는데 그럴싸하게 신 앞에, 사람 앞에 ‘나 아직도 지금 죽어서는 안 될 만큼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사람입니다.’ 그 행세하려고 계속해서 자기 나름대로 꿍치고 있는 자기 의를 생산해내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바로 그것이지요.

살아 있으니까 그냥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수명이 50년이다, 혹은 60년 살았다, 또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찬란한 2천년역사다, 단군의 자손이다, 단군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단군의 자손이라면서 반만년 오천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그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그 역사는 살아 있다고 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쳐주지 않는 역사에요. 진짜 역사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주시는 율법의 심판과 맞닥뜨려서 죽어도 제대로 죽어야 돼요. 하나님의 심판 앞에 죽어야 돼요. 심판 앞에서 죽을 때 거기서부터 슬슬 빠져나오는 것이 ‘내 아들 이스라엘이 죽었다. 그러면 이 아들 죽은 것을 어떻게 살릴 수 있느냐?’

그 방안, 아버지가 아버지답게 할 수 있는 그 다음 조치 그게 뭐냐? 그 죄를 용서하는 그 다음조치가 그 사건이 올 때까지 그 기간은 이스라엘이 죽어 있기 때문에 쉿! 이 되지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만드는 거예요. 네가 스스로 너를 구원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에스겔 37장에 보면 에스겔 그 인자를 데리고 골짜기에 가는데 거기 보면 뼈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바짝 말랐어요. 불가능이지요. 뼈라는 것은 무엇의 표식이냐 하면, 예전에 죽었다, 죽은 지 오래됐다, 따라서 이것은 못 움직인다, 자체적으로 할게 아무것도 안 나온다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자를 아골 골짜기, 뼈 무더기 속에 가게 했어요.

가게 해놓고는 질문을 이렇게 던집니다. “이 뼈들이 살 수 있겠는가?” 추가적으로 말해서 “이 뼈들이 자체적인 노력과 시도와 행함으로 자체적인 그들의 기도와 움직임으로 살 수 있겠는가?” 답변이 뻔한 질문을 하시지요. 에스겔은 딱 보니까 답을 알잖아요. 택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겠느냐, 하는 그 질문 안에 하나님 나름대로의 목적을 발견한 거지요.

“말씀으로만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하나님의 지속적인 활동으로 삽니다.” 그걸 언급한 거예요. 그게 뭐냐? 아버지가 아들 이스라엘에 대한 아버지다움의 자기의 성과를, 자기의 약속을 충실하게 일관되게 변치 아니하시고 마무리 짓는 겁니다. 아버지기 때문에 아들을 살려내는 거예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또 왕이고.

시편 2편 7편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이게 일반사람들은 도통 무슨 소리인지를 몰라요. “살아 있는 인류가 이렇게 멀쩡하게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살려줘야지요. 우리를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최종목표가 아닙니까?”라고 묻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합니다.

“나는 너의 아버지가 된 적이 없어.” 내가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지상에 아들이 발생될 때 바로 그 아들과 엮여 있는 아버지일 때 가장 아버지다운 거예요. 이 지상에 아들이 없다면 아버지임을 누구도 알 수가 없어요. 아버지기 때문에 오직 아들만 고집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아들은 어디서 나오는가? “쉿, 입 다물고 너는 죽어 있어라.” 너는 이미 죽은자라는 거예요.

죽은 자라 하는 것은 이렇게 하면 제일 쉬워요. 죽은 자란 뭐냐? 더는 내가 나를 지키지 않는 거예요. 더는 나를 지키지 않는 것. 어릴 때 형제간에 방에서 자게 되면 형이 욕심쟁이가 되어서 맛있는 것 자기만 딱 챙겨요. 잘 때도 혹시 동생이 탐낼까 싶어서 품에 딱 주전부리 과자를 끌어안고 잡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과자의 존재를 모르면 안 먹고 싶은데 그 존재를 발견한 이상은 탐심이 유발되거든요. 그러면 형은 동생이 뺏어갈까 싶어서 딱 끌어안고 잠을 청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지요. 아무리 자기 것을 지키고자 애를 써도 잠들면 팔이 벌어진다는 사실, 팔이 벌어져서 떼구르르 하고 과자가 손도 안대도 몸에서 저절로 분리되어서 뚝 떨어지지요.

우리는 절대로 형의 과자를 뺏은 것이 아니고 그 근처에서 주운 거지요. 형이 포기했다고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형이 포기한 과자를 주워 먹은 것이기 때문에 주인 없는 과자를 먹었으니 아무 탈이 없지요. 인간이 자기의 잘남과 자기의 구원과 자기의 신앙을 악을 쓰면서 지켜요. 다시 말해서 무예를 닦는 겁니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그래놓고 자기는 이 악하고 험한 세대에서 유일하게 신앙을 지켜나갔다는 그 자부심이 대단하지요. 행여나 가끔 자부심이 희석될까 싶어 금요일에 모여서 철야기도 하잖아요. 뭐합니까? 수련하는 거예요. 수련 알지요? 검도관에 가서 웃! 웃! 웃! 하는 것처럼. 검도나 유도 수련하듯이, 몸 단련하듯이, 피트니스 가서 밥 먹고 빼고, 밥 먹고 빼고, 그렇게 하듯이. 내가 나를 안 지키면 누가 지키랴, 이 말이거든요.

이 말은, 살아 있는 나를 좀 더 오래 길게 살려 달라. 이것은 역사에요. 이것은 천국에서 의미 없는 카운트라니까요. 내 수명이 몇 년이냐? 내 살아 있는 수명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이거예요. 앞에 네모, 즉 괄호 나누기 6 은 1, 그리고 나머지가 1일 때 괄호에 들어갈 숫자는 무엇입니까 1) 2, 2) 8, 3) 7, 4) 7650, 몇 번?

괄호 나누기 6 해서 몫이 1 하고 나머지가 1이 남을 때는 앞에 있는 숫자는 뭐냐 하면, 1 곱하기 6 해서 더하기 1만 하면 7 나옵니다. 초등학교, 요새는 유치부도 아는 수학이거든요. 6은 뭐냐? 이 세상이에요. 세상이, 앗수르가 와서 나를 공격합니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움직이고 그 세상이 나로 하여금 못살게 만들어서 내가 내 의로 살고 싶은데 내 의도 박살나고, 사는 것도 아슬아슬하고 엉망이 될 때 그나마도 남아 있는 것은 나는 죄인이라는 것이 나머지로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과 부딪혀서 내가 있는데 그 나는 죄인 된 내가 있을 때 그걸 합쳐보자. 그게 7이에요.

다시 말해서 그게 바로 남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가 왔을 때 바리새인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죽게 만들어요. 그러면 예수님은 이 땅에서 1로 해서 사라져야 되는데 나머지가 1이에요. 그게 부활이에요. 세상을 향하여 죽게 만들어놓고 죽었다고 손 털고 돌아서는데 사흘 만에 1이 등장했습니다. 그게 남은자거든요.

무슨 남은 자냐? 아무도 통과 못하는 아버지의 심판, 그 무서운 심판을 통과한 자, 그게 바로 십자가의 증인, 부활의 증인,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의 영으로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그 영을 부여하십니다. 잘난 체 하는 것, 우리 힘으로 이 더러운 버릇을 못 고칩니다. ‘나 이만큼 잘났으니까, 가치 있으니까 설마 주님께서 날 버릴 리가 있겠나?’ 버립니다.

그 공룡의 뼈가 살아 있을 때 가치를 부여하지 않아요. 공룡이 죽어야, 아무것도 내가 나한테 할 게 전혀 없을 때 그 때 그 잠복되어 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시간, 아버지가 아버지답게 되기 위해서 제공된 약속은 인간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 이름에 의해서, 하나님의 보내신 분에 의해서 달성되는 식으로 째깍째깍 카운트가 되어서 어디까지 연결 되었는가? 십자가의 다 이루었다, 와 연결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온 인류의 일부가 되겠어요, 아니면 아들의 일부가 되어야 됩니까? 인류의 일부가 되면 하나님이 아버지가 못돼요. 아들의 일부가 되어야 되는데 그 아들의 일부는 남들이 모르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그 사자의 포효, 울부짖음, 그걸 그냥 받아들이세요.

심판을 먼저 받아들이세요.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시간표에 의해서 약속된 분이 시간표대로 재기 위해서, 십자가와 이런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매일같이 하루하루 우리를 살게 하십니다.

왜? 아들은 바로 아버지를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살려주시는 그 힘이 있음을, 심판을 통과한 성령이, 심판을 이미 통과한 부활이 된 그 영이 우리 안에서 작용한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내가 나의 의, 나의 나름대로의 거룩 나의 행함으로 그리고 나와의 관련으로 생긴 의 이런 것은 챙기지 마시고 그냥 주님 앞에 넘기는 것이 바로 약속의 증거물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이스라엘을 다 찢어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찢어버릴 때 세상에서 맛보지 못한 새로운 시간의 연속과 공간이 그 안에 들어 있어요. 낯선 공간과 낯선 시간입니다. 예수 안이라는 공간 그리고 하나님의 시간, 십자가와 연결되어서 모든 것이 십자가로 수렴되고 소환되는 그 십자가만 크게 보이는 인생, 낯선 시간이 주께서 이스라엘을 찢어버릴 때 나오는 거예요.

주님에 의해서 날마다 찢겨지는 것을 우리가 감수하고, 고마워하고,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해야 돼요. 내 것을 내가 지키고자 하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은 멋들어지게 보이는 벤츠지만 그것은 지옥으로 처박는, 꼴아 박는 브레이크 없는 벤츠에 불과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죽은 자 만이 의미 있는 시간이 됨을 저희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할 때 망한 이스라엘 속에서 생명이 피어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깨닫게 해주시고 저희도 그 찢김에 초대받는 아버지의 증인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6강-암 3장 9-12절(죽음속에 남은자)201007-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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