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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0 16:56:43 조회 : 41         
서울의존강의20201008a 베드로전서4장 15절(주의 일)-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하림(IP:124.254.211.180)
서울의존강의20201008a 베드로전서4장 15절(주의 일)-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4장 14절-16절

14절,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절,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여기에 성령이 나오죠. 성령이 나올 때 이렇게 생각하시면 제일 쉬워요. ‘성령은 나와 경쟁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어디서부터 오느냐 하면 ‘나’라는 이 존재 말고 다른 존재, 나와 대비가 되는 존재, 예수님의 존재, 예수님의 계심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나오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말미암아 나와 예수님 사이에는 애초부터 합치될 수 없는 요소가 있어요, 애초부터. 만약에 공통점이 있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때려죽이지 않았을 거다 이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의 생각과 그 외의 모든 인간의 생각이 대립관계에 있는 겁니다.

대립관계에 있는 양쪽에서 따로따로 어떤 의견을 제시하게 되면 그 의견은 대립적인 의견이 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저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경쟁관계에 있다’. 경쟁관계에 있다고 보면 됩니다. 이걸 달리 사도바울 식으로 이야기하면 ‘십자가는 반복된다’. 십자가는 예수님 세계와 인간세계에 대해서 대립이니까 십자가 사건은 그 때, 한 때로 끝나는 게 아니고 계속해서 대립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 사건은 대립된다고 하는데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는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 나왔기 때문에 이걸 이렇게 설명하시면 됩니다. 애초부터 에덴동산에 나무가 두 개 있잖아요. 에덴동산 중앙에 이슈가 되는 나무가 두 개 있었습니다. 하나는 선악을 아는 선악과나무가 있었고 또 하나는 생명나무인데 이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의 의미와 취지는 이 나무의 열매에 있어요.

이 열매에 대해서 인간이 선악과 열매를 먹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 열매를 허용하는 것이 아니고 대립관계에 돌입해버려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나무가 두 개 있다는 말은 하나는 먹지 말아야 될 나무이고 또 다른 하나는 먹어야 될 열매가 되는 거예요. 한쪽은 먹지 말아야 되고 한쪽은 먹어야 될 열매다 이 말이죠.

이 둘 사이가 대립관계에 있는 겁니다. 왜? 치워버렸으니까. 못 먹게 했으니까. 그러면 대립관계가 되게 되면 여기서 대립되는 두 가지 원리가 나와요. 대립되는 두 가지 원리가 뭐냐 하면 ‘인간은 나름대로의 선과 악을 안다’가 되고 생명나무에서는 ‘선과 악을 아는 것 자체가 악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다 아는 이야기죠. 선과 악을 아니까 인간들의 원리는 뭐냐 하면 선은 행하고 악은 안하면 되겠다는 그 의식 자체가 무엇과의 대립관계입니까?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는 생각이라는 것이 규정이 되는 거예요. 이게 악이 되는 거예요.

선은 행하고 악은 행하지 않겠다는 생각 자체가 생명나무 못 따먹는 입장에서는 뭐 아무리 착해도 그 생명나무는 못 따먹어요. 못 따먹으면 영원한 축복이 주어지지 못하죠. 저주가 되죠. 착해라. 그래, 내가 저주 주마.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 많이 착해. 훌륭하게 살아. 저주는 너한테 갈 거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 대립관계에 있다는 말을 또 달리 해볼까요? ‘각자 고유영역 확보’가 되겠죠. 각자 고유영역 확보. 자기 편, 네 편, 두 개의 영역이 대립관계에 있어요. 대립관계 또는 경쟁관계에 있다고 제가 말씀드릴 때 제가 뭐를 의식하느냐 하면 ‘교회 다녀서 바르게 살면 하나님이 받아 주겠지’ 이렇게 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대립관계가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죠. 연속관계죠. 친화적인 관계죠.

‘우리가 바르게 살면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있다’ 이것은 대립관계가 빠져버렸죠. 대립관계가 빠져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로마서 9장 33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이 십자가를 뭐라고 하느냐면 스캔들, 우리말로 하면 ‘걸림돌’이라고 칭합니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걸림돌이라 하는 것은 연속을 차단시키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착하게 살면 하나님과 하나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아서라, 말아라 중간에 차단시켜버리는 겁니다. 차단시켜버리죠.

연기를 가르치는 학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숙제를 내줬어요. 숙제는 뭐냐 하면 가장 귀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대사의 마지막을 이렇게 끝내세요. ‘아무개야, 가지 마.’ 라는 그런 테마를 주고 즉석에서 연기를 시켰어요. 그런데 연기지도 받는 어떤 남학생이 어머니가 생각나가지고 연기를 하는데 “어머니, 가지 마세요.”하고 눈물 죽 흘릴 때, 막 사람들이 야, 즉석에서 눈물이 팍 쏟아지면서 “엄마, 가지 마세요.” 할 때 연기가 대단했어요.

그런데 그걸 보고 있던 다른 개그맨이 자기도 하겠다는 거예요.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까 현숙이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현숙아, 가지 마. 휴전선 넘어 가지마.” 최양락이 팽현숙을 그렇게 불렀다 이 말입니다. 휴전선 넘지 말라는 게 뭡니까? 그 휴전선 넘어가버리면 막 총 쏘고 죽는다는 거예요. “가지 마, 총 맞으면 죽어.” 빵 터졌죠. 그 휴전선이라는 단어를 쓸 생각도 못했죠. 현숙아, 가지 마. 휴전선 넘어가지마. 자칫하면 탈북자 돼서...

가지 마. 어디 너머로? 지금 이 영역 말고 다른 영역으로 가지 말라고 한다는 것은 우리 한국의 정치적인 현상, 상황이 대립관계에 있고 경쟁관계에 있다는 거예요. 각자 고유의 영토, 영역을 갖고 있는 거예요, 고유의 영역. 그러면 고유의 영역마다 각자 가동되는 원리가 따로따로입니다.

여러분 들었으니까 아시겠지요. 자, 생명이 없는 곳의 원리는 어떤 원리입니까? 선과 악을 내가 구분해서 선은 행하고 악은 멀리한다는 그 원리가 가동되는 지역. 그 나라는 뭐가 없다? 방금 이야기했죠. 뭐가 없다고 했습니까? 이거 무지 쉬운 건데... 생명이 없죠. 영원한 복이 없는 거예요. 선과 악을 구분해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보는 거예요. 개코도 선을 모르기에 네가 선을 행하려하고 악을 모르기에 악을 안 저지르려고 한다는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니까 이게 착한 일인 줄 모르고 착한 일을 하고자 하고 악한 일인지 모르고 악을 안 저지르려고 하니까 너희들은 저주받는다 이 말입니다. 대립관계, 경쟁관계 또는 로마서 9장 33절 말씀처럼 십자가가 걸림돌이죠. 십자가가 걸림돌이라 하는 것은 자빠뜨리고 넘어지게 하는 거죠. 네 영역에서 그냥 있거라. 감히 깝죽대는 네 영역에서 이쪽 영역, 천국으로 넘어올 생각하지 마라. 이게 걸림돌이에요.

그러면 그 당시 걸림돌에 걸린 사람이 로마서 9장 32절에 보면 행함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는 어디서 다 자빠진다? 십자가에서 다 자빠지는 거예요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만약에 십자가를 말 안하고 치워버리면 그들은 뭐라고 착각하겠습니까? 우리는 행함으로 지금 천국 간다고 다 우길 거죠, 십자가가 빠져버리면. 그래서 십자가가, 주의 일이 중요한 거예요.

각자의 영역이, 영토가 달라서 서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한 걸림돌 역할로써, 스캔들 역할로써 십자가가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 행하고자 하는 사람이 구원받고자 할 때 그들의 아이디어는 뭡니까? 행하고자 하는 그것이 하나님 계시는 나라, 천국까지 이어진다고 할 때 그들은 악행을 하겠다는 시도에요, 선행을 하겠다는 시도입니까? 지금 무슨 말인지 몰라요? 행함 자체가 악행을 쌓아서 천국 가겠다는 말이에요,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선행을 쌓아서 천국 가겠다고 행함을 하는 겁니까? 선행이죠! 그게 십자가 걸림돌에 다 자빠졌다 이 말이죠. 자빠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십자가라는 것은 대립관계를 분명히 규정하면서 왜 사람들이 천국을 못 가는지 그 이유를 십자가 하나로 완벽하게 다 알려줄 수가 있는 겁니다. 십자가 모르는 인간들이 천국 간다하면서 악행을 저지를 리는 없을 것 아니겠어요. 천국 간다, 천국에는 거룩한 사람, 좋은 사람, 착한 사람만 간다. 그래서 그들은 맨날 자기 자신을 보면서 내가 착했는가, 나빴는가를 살피겠죠.

자기 자신을 보는 그 순간 그들은 창세기 3장의 유혹사건을 재현하고 있어요.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유혹받고 죄를 범한 이유가 자기 자신을 봐서 그래요, 자기 자신을 봐서. 내가 신처럼 된다는데 나를 다시 보자. 이 몸이, 내가 신처럼 되고 싶어라. 라고 되겠죠. 그게 사단난 거죠. 그게 낭패난 겁니다.

자기 자신이 유혹의 대상이 될 때 그것은 자기 자신을 선인가, 악인가 하는 측정대상으로 보는 거예요. 오늘 하루도 내가 잘 살았는가, 못 살았는가. 오늘 일기장 한 번 써보자. 오늘의 일기- 오늘 내가 착했다, 못했다.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스스로 칭찬하고 싶은 것은 스스로에게 칭찬하고 싶어. 이런 일기장을 쓰는 거예요. 그런데 그 자체가 그 시간이 누적이 되면 천하 최고의 내 매혹거리가 되는 겁니다. 내가 나를 못 버려요.

그렇게 되면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네 십자가를 지고 오라는 말 앞에 뭐가 붙어요. “자기를 부인하고”. 그걸 안양강의에서는 ‘내 존재 안에 부정성이 포함된 존재’ 내가 나를 질책하는 부정성을 내가 포함시키는 나. 전에는 나한테 악한 것을 쫓아내는 나였는데 이제는 나를 지적하는, 내가 죄인이라는 그 사실을 내가 품을 수 있는 사람으로 전환되는 것.

이것은 뭐냐. 생명나무가 움직인다. 생명나무가 움직이면 “선악과 따먹었잖아.”라는 그 사실도 동반해서 같이 움직이는 원리로 이 인간세계에, 하늘나라 영역에 계신 분이 찾아오신 거예요. 생명나무만 달랑 온 게 아니고 선악과를 동반해서 오는 거예요. 내 다리 내놔라는 식으로.

따먹지 말라는 걸 따먹었잖아. 네가 그런 인간이야. 뭐 선을 안다고? 악을 안다고? 어디서 나를 속여? 너는 네 자신이 지금 네 삶의 목표가 되었어, 너는. 네가 시도하는 모든 것은 네 자신을 못 버리겠다는 그러한 방향으로 너는 평생 모든 역량을 쏟아놓고 있다고. 나 하나 내가 챙기겠다는 그 목표를 네가 못 버리고 있잖아. 자기 부인 안 돼, 넌.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거예요.

고난과 역경을 겪더라도 고난과 역경을 이겨냈던 자기 자신이 그렇게 대견해 보이는 거예요. 찬미하고 싶은 거예요. 자기한테 찬미하는 거예요. 내가 나에게 오늘 또 표 하나 던지는 거예요. 표를 던지는 겁니다. 홍진영이라는 여자 트롯 가수가 부른 유명한 노래가 있어요. <사랑의 밧데리> 밧데리를 나한테 계속 채우는 거예요. 악은 버리고 선한 밧데리를. 이게 원래 밧데리라고 하면 안 되는데. ‘배러리’ 이렇게 되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사랑의 배러리를 채워주세요’ 이러면 노래가 안 되니까 ‘밧데리’한 거예요.

매일 아침에 눈만 뜨면 밧데리 채우는 거예요. 선행으로 무장하는 것. 왜? 이 세상에 나보다 더 매력적인 대상이 없기 때문에. 내가 최고기 때문에. 내가 나를 안 지키면 누가 나를 지켜주고 나를 안 챙기면 누가 챙겨 주겠어요. 그 일의 선배가 누구냐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얘기했죠. 바리새인들은 어디에 자빠졌다고요? 걸림돌에 다 자빠진 거예요. 그 걸림돌은 무슨 걸림돌입니까? 십자가. 십자가 앞에 다 자빠진 거예요. 어디를 넘어 와? 현숙아~ 휴전선 넘어가지 마. 하는 것처럼. 팽현숙이 휴전선 넘어갈까봐 남편 되는 최양락이 얼마나 걱정했다고. 넘어갈 수가 없어요.

처음부터 선악과 따먹었다는 이유만으로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이 내린 조치는 뭡니까? ‘오지 마’에요. 오지 마. 저리 가. ‘오지 마’보다 ‘저리 가’가 더 강렬하네요. 한번 써볼까요. ‘저리 가’ 이것보다 더 강렬한 것은 ‘그냥 있어’. 네 자리에 그냥 있어. 저리 가. 밀쳐내는 거예요. 밀쳐내는 것.

생명나무 자체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이 생명나무입니다. 나는 생명이다. 잠언서 8장에 보면 예수님 자신이, 지혜자가 생명나무에요.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는다고 되어 있거든요. 잠언서 8장 끝에 보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잠언 8장 35절,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런데 생명나무 올 때 우리는 생명나무만 달랑 그것만 오는 줄 알았죠. 밀어내면서 온다는 걸 몰라요. 뭘 밀어냅니까? 선악적인 의식과 체제를 갖고 있는 자를 밀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선악적인 체제는 왜 우리가 못 버리는 겁니까? 선을 취하고 악을 버리는, 그렇게 해서 낸 결과가 우리가 포기 못할 결과거든요. 뭘 포기 못합니까? 내가 선을 행하고 악을 버리게 되면 그렇게 낳은 결과는 누가 좋은 거예요? 이 동네에서 내가 보기에 내가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는 겁니다. 내가 유혹거리가 되는 거죠.

죄가 뭐냐 하면 바로 자기 영역이 어떤 영역인지조차 모르고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개체적으로 나만 착실하게 살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 자기가 어디 소속되었다는 것을 모르게 되면 항상 자기한테 시선이 되어 있거든요. 자기한테 시선을 주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유혹되는 나를 보는 그 자체가 이미 죄가 됩니다.

그걸 달리 말씀 드리면 내가 누구와 경쟁관계인가를 놓쳐버린 그것이 죄가 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과 경쟁관계, 대립관계에 있다는 그 생각이 없는 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십자가에 의한 걸림돌이에요. 아무리 훌륭하고 머리 좋아서 좋은 대학 가면 뭐합니까? 이 동네에서 못 벗어나는데.

영토라 하는 것은 동네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것을 명확히 합니다. 예수 안, 십자가 안, 성령 안. 구약으로 따져 볼까요? 율법 안. 더 따져 들어가 볼까요? 언약 안, 아브라함 안. 구약에서는 성신 안, 신약에서는 성령 안, 십자가 안, 예수 안. 전부다 안, 안. 그 ‘안’이 있다는 것은 반대로 ‘밖’이 있다는 말이고 안과 밖은 임의로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집어넣고 성령 집어넣고 하나님의 율법 집어넣고 하나님의 언약 집어넣고 약속 집어넣고 말씀 집어넣으면 그대로 두부 쪼개듯이 안쪽과 바깥쪽이 명확하게 드러나죠, 안쪽과 바깥쪽이.

일관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프로젝트에요. 누가 변경시키나? 아무도 변경 못 시킵니다. 원리이기 때문에 그래요. 원리라는 것은 변경하라고 있는 게 원리가 아니에요. 원리는 처음부터 그 원리대로 그냥 밀어붙인다는 뜻에서 원리에요. principle, 원리. 그냥 밀어붙이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주님은 내가 착하냐, 안 착하냐에 전혀 관심 없습니다. 내가 아는 영어로, 네버! 쉬운 우리말로 번역하면, 결코! 결코 내가 잘했나, 못했나에 관심 없어요. 내가 잘했나, 못했나에 관심 있는 것은 악마에 뒤집어 씌인 내가 관심 있어요, 내가. 잘하면 복 받을 거 같은 기분이 들고 악했으면 이제 저주 한보따리 받는구나 하죠. 착하다, 저주받는다고 측정하는 그 자체가 저주에요, 그게.

주님은 신경도 쓰지 않는데 왜 내가 나한테 신경 씁니까? 뭐 할라고 신경 써요, 나한테, 왜? 그것은 귀한 나를 소유하고 싶은 거예요. 소유성. 선을 소유하고 싶은 겁니다. 한번 적어 볼게요. ‘선을 소유하고 싶다’. 그 다음에 ‘선한 □을 소유하고 싶다’. 이 네모에다가 아무거나 집어 넣어요. 선한 ‘가정’을 소유하고 싶다. 선한 ‘교회’를 소유하고 싶다. 선한 ‘회사’를 소유하고 싶다. 선한 몸, 선한 몸을 두자로 ‘건강’이라고 합니다. 건강한 몸을 소유하고 싶다. 착한 ‘성품’을 소유하고 싶다. 전부다 소유라고요.

자, 소유가 되면 뭐가 없다? 대립관계, 경쟁관계 없는 거예요. 나만 소유하면, 내 것 좋은 거 챙기면 그만이지. 이게 뭐냐 하면 대립관계가 사라진 거예요. 십자가도 사라지고 성령 왔다는 것도 무슨 뜻인지 모르고 율법이 주어진 이유도 모르고. ‘예수 안’ 그게 무슨 뜻이죠? 그것도 모르고. 다 모르는 거예요.

제가 어제 수요 설교하면서 그런 이야기했죠. 하나님은 온 인류의 하나님이 아니고 ‘아들’의 하나님이다. 이것은 아들인 자와 아들 아닌 자. 그러나 인간들은 뭐냐 하면 육이 있으니까 혈육을 좀 옹호해 달라 이 말이에요, 혈육. 혈육을 옹호해 달라. 그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그걸로 선하다고 인정해달라는 거예요, 혈육.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잉태치 않은 것이므로 네가 잉태한 게 문제라는 거예요, 잉태한 게. 주님께서는 잉태치 못한 자를 천국에 보내는데 잉태한 게 문제다, 잉태한 게.

하나님의 소유성 보세요. 하나님이 소유하는 것은 잉태치 못한 사람들입니다. 잉태치 못한다는 조건 하에 아들이 돼요. 혈육으로 잉태되면 그것은 이미 육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육은 자기의 유혹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선한 가정, 선한 직장, 선한 몸, 선한 교회 전부다 그 자체가 주님의 십자가의 원리인 잉태치 못한 자가 구원받는다는 원리와 대립되는 거예요.

그러면 잉태치 못한 자가 구원받는다는 말은 이미 무엇과 대립관계입니까? 잉태한 자를 나는 받는다, 안 받는다? 일체 안 받죠. 일체 안 받습니다. 이스마엘 안 받습니다. 누굴 받아요? 이삭을 받죠. 왜? 이삭은 뿌리가 있어요. 약속으로 태어났잖아요. 뭐로 안 태어났다? 약속의 대립관계가 육이거든요. 육으로 안 태어나고 약속으로 태어난 겁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육에서 태어난 게 아니고 약속이 마리아의 몸을 이용했을 뿐이죠. 그러니까 거기에 개입된 단어가 뭐냐.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오실 때부터 이미 두 개의 대립되는 공간을 염두에 두고 성령이 오신 거예요. 대립성을 뚜렷하게, 더욱 확고하게 적용시켜버리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을 봐주겠다가 아닙니다. 네가 선악과 따먹었냐? 추방한다. 그 추방의 취지를 내가 중도에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고 그걸 더 확고히 할 거다. 추방했다는 것. 네 영역과 내 영역은 여전히 통하지 않는다는 걸 분명히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알아서 휴전선 넘을 수 없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휴전선 넘어서 우리 인간세상으로 왔다고 이야기해도 되지만 분명히 이야기해서 아예 휴전선 자체를 뽑고 어깨에 메고 온 거예요, 휴전선 자체를. 인간에게는 휴전선이 없으니까. 인간은 자기 영역과 신이 서로 통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 착각을 착각이라고 알리기 위해서 이 경계선 있잖아요, 대립되면 경계선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 경계선 자체를 자기가 몸에다 짊어지고 오신 거예요. 그 짊어짐의 결과가 뭐냐? 십자가 죽음입니다.

심지어 베드로도 그 경계선을 못 넘었어요. 왜? 네가 갈 곳이 없다. 하늘나라에 네 처소가 없다. 베드로에게 처소가 없다 했잖아요. 그걸 우리한테 적용시켜 보세요. 네 자리 없다는 거예요. 천국에 네 자리 없다. 뭐 그냥 베드로 사도처럼 가면 자리하나 마련해주겠지. 없어요. 자리가 없어요. 자리가 없다고.

그럼 “베드로에게 나중에 성령이 와서 자리 마련해줬잖아요.” 할 때는 베드로에게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이 베드로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죠. “네 자체가 경계선이다, 네 자체가.” 다시 말해서 ‘나 베드로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를 알리는 그런 베드로를 주께서는 구원하시죠. 그리고 왜 구원받지 못했는지 그 이유까지 베드로가 알고 있습니다. 선과 악 자체가, 주님이 오지 마라는 그 원칙에 부합되게, 우리는 그래서 갈 수 없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그 고집, 열심은 어떤 수를 써도 선악과 따먹은 자는 그 본질 그대로는 절대로 천국에 못 오게 여전히 말리고 있습니다. 못 오게 밀어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선이 뭐고 악이 뭐냐 하면 선이라 하는 것은 그 경계선 밖에 있는 ‘예수 안, 십자가 안’이 종합적인 선이 되고 악은 그 경계선에 못 오고 있는 모든 결과들이 악이 되면서 그들은 나중에 지옥 가서 악마와 만나게 됩니다. 왜? 악마한테 배웠거든요. 선악과 따먹으면 신이 된다는 것은 누구한테 배웠습니까? 악마한테 배운 거잖아요. 악마하고 한통속이었다 이 말이죠.

그걸 지금도 평소에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결탁되는 겁니다. 결탁은 서로 협조가 되고 확고하게 교제가 되는 사이.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 안 떨어지는 사이. 안 떨어지고 못 떨어지죠. 안 떨어지고 못 떨어져요. 결탁이니까. 딱 갖다 붙었으니까. 누구하고? 악마하고. 하나님의 원리는 계속해서 포기 안하고 밀어붙이니까. 선악과 좋아하는 인간들 너희끼리 잘 놀아라. 나는 그 선악과 인간들 노는 것에 대해서 너희들이 서로 헤어지는 것을 나는 원치 않는다. 잘 먹고 잘 살아라. 같이 한통속에다 갖다 가둬버렸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베드로가 못 간다니까요. 가도 자리가 없어요. 하늘나라에 처소가 마련 안 되어있는데 어떻게 가요. 자기 자리가 없는데. 처소가 예비 되면 오라 할게. 그러나 처소가 예비 되고 성령 오게 되면 베드로는 무슨 고백을 하느냐 하면 “나는 선악체제를 아는 그 순간부터 이미 나는 산 자가 아니고 죽은 자입니다.”

너희들 죄 때문에 나, 예수가 죽었다는 원리가 그대로 베드로에게 개입이 되어 버리면 선악을 안다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평가에 의하면, 죽은 자가 돼요. 예수님이 죄 때문에 죽었으니까. 예수님 죽었으니까 우리도 같이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죽음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은 뭘 동반하느냐 하면 거기에 약속 완성이 동반된 죽음이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또한 그리스도의 원리가 작동해서 함께 죽었다는 그 원리와 이어져 있는 생명 주신다는 부활의 원리와 결탁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에 국한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가 됩니다, 로마서 6장. 참 쉽죠.

이게 단순한 논리나 이론이 아니에요. 객관적 증거가 있습니다. 바로 빈 무덤이라는 역사적 증거에요, 빈 무덤. 무덤에 시체가 없어졌다는 사실. 이것은 그냥 이론이 아니에요. 인간을 달래기 위해 꾸며낸 좋은 소리 다 모아놓은, 인간의 지혜를 모아놓은 게 아니라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에요. 역사적으로 실제 일어난 사건이에요.

마치 이순신 장군이 총 맞아 죽을 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것이 역사적 사건인 것처럼. 그것은 전설이다 할 수도 있지만 그 이순신 장군이 총 맞아 죽은 그것보다 더 생생하고 확실한, 이순신 장군의 죽음은 부인할지라도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함을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다가 꽂아버리는 거예요. 확실함. 따라서 우리는 성령 오게 되면 그 때부터 확실함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확실함을 품고 산다고 하니까 또 이거 노래가 생각나네.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그 노래 있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그 노래보면 희망을 품고 살아가라고 하잖아요, 젊은이들이여. 우리는 확실함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 확실함이 어느 정도 확실하냐 하면 죽어도 괜찮을 정도로 확실합니다. 아니 내가 죽어야만 되고 그리고 이미 죽었다는 사실의 확실함. 십자가 안에서 나는 이미 죽었다는 그 사실.

그러니까 죽은 존재가, 죽은 놈이 죽은 놈에 대해서 기대를 가질 필요가 있다, 없다? 내가 착했나, 못했나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겁니다. 내가 죽었으니까 죽은 나는 내 소유대상이 아니죠. 소유대상이 아니니까 내가 나한테 신경 쓸 이유도 없는 거예요. 뭐 결과가 있어야 신경 쓰지. 결과 있을 게 없어요. 따져봐야 이미 죽음에서 죽음으로 가는 결과인데 뭘 따져요.

오직 나올 것은 감사만 나오죠. 고맙습니다.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우리한테 박아버리면, 성령이 와버리면 나는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살아갑니다. 내가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면 내 어떤 행위도 그 자체로서 선악적인 행위가 아니라 ‘주의 일’이 돼요, 어떤 일도. 코 후비는 것도 주의 일이 돼요, 어떤 일도.

왜냐하면 내가 기대한 일이 아니라 덮친 일이기 때문에. 주의 일이 나한테 옴팍 덮쳤기 때문에 그 행위에 대해서 내가 뒤돌아서서 잘했다, 못했다 평가할 그러한 입장자체를 아예 죽여 버렸으니까. 나를 죽은 자로 만들었으니까 내가 내 행위에 대해서 옳다, 그르다를 평가할 심사위원에서 빠져버리는 거예요.

이게 기쁜 소식 아니에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싹 없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일 낮 제가 설교하면서 아무에게도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말란 말이죠. 우리는 미안하다고 할 권리가 없어요. 앞으로 잘해줄게. 개코같은 소리. 뭘 앞으로 잘해줘?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내가 구상한 일이 아닌데. 내 일입니까? 앞으로 잘해줄게. 뭘? 잘해줘서 내 소유화시킬라고? 내 거 만들려고요? 내가 누굴 사육할 일 있어요? 내가 내 소유를 따로 챙길 이유가 없잖아요.

그리고 남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마세요. 내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마세요. 미안해, 나야. 너를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해. 미친 거 아니에요, 그거? 못 챙겨주면 또 못 챙겨줬다고 마포대교 가서 자살하려고? 우리 둘이 껴안고 죽자. 뭐 내세울 게 없기 때문에.

정리해보면 죄라는 것은 경쟁관계가 빠진 것. 경쟁관계가 빠지고 대립관계가 생각이 안 나는 것. 나는 나만 챙기면 된다.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러한 생각으로 선한 행함만 가득하면 나는 선으로 가득 찼다고 생각하는데 그 자체가 십자가가 빠진 거예요. 걸림돌이 빠진 거예요. 경계선이 있는데 없다고 자꾸 우기는 거예요.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는 겁니다.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 그 자체가 이미 사단난 거예요. 주님한테 추방된 세계에요.

선행과 악행을 규정짓지 말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결과는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심사위원도 아닌데 내가 왜 결정합니까? 지가 노래 부르고 난 합격. 지가 노래 불러놓고 지가 실로폰 들고 딩동댕~ 전국 노래자랑~ 딩동댕~ 송해가 웃겠다. 지가 왜 딩동댕을 합니까, 지가? ‘지가’는 경상도 말이고 자기 자신이 왜 합니까? 안 그래도 천지삐까리로 할 게 많은데, 나훈아의 말에 의하면.

구약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두 원리는 양보 없는 원리입니다. 절대로 양보 없는 원리에요. 경계선을 만들고 대립관계 짓고 경쟁관계 만들고. 양보 없습니다. 그 양보 없는 관계를 주께서는 인간들로 하여금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의 악행을 주께서는 사태를 통해서 증가시키고 그걸 점점 더 발전시킵니다. 악의 발전이에요.

창세기 4장에서는 무슨 죄만 있느냐. 살인죄만 있었죠. 가인이 아벨을 죽였잖아요.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가 뭐냐 하면 아벨 세계와 가인 세계가 눈으로 볼 때는 형제간이니까 같은 집안이거든요. 같은 가정이잖아요. 같은 가정이면 형이 드리는 제사나 동생이 드리는 제사나 그 집안에서 드린 제사 같으면 하나님께서 받으면 되는데 하나님께서 경계선을 개입시킨 거예요. 거기다 집어넣은 거예요. 가정이 두 조각나게 만들었어요. 집어넣게 된 거예요.

이삭 같은 경우도 그렇죠. 이삭하고 맏이 에서하고 한패 먹고, 엄마하고 야곱하고 한편 먹고. 이러면 가정 중간에 홍해바다가 생긴 셈이에요. 갈라져버린 거예요. 경쟁관계, 그게 언약이 주입된 결과입니다. 언약이 들어온 결과가 그 관계에요. 경쟁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겁니다.

그걸, 여러분들 잘 아시겠지만 눈으로 한 번 봅시다, 갈라디아서 4장 24절에,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그 다음에 뭡니까? “두 언약이라” 그러니까 언약이 추상적인 게 아니고 언약이 실체고 두 여자들이 비유가 되고. 완전히 반대에요. 인간의 몸은 허구가 되고 안 보이는 예수님 몸만이 실제가 되고. 인간은 지금 허탕 속에 공허 속에 헤엄치고 있어요, 이 땅의 삶이, 인간들의 삶이.

이 복음을 압축시키고 축약시킨 것, 이 세상의 한계성을 압축시킨 노래제목이 방금 떠올랐어요. 이 세상을 한마디로 압축시켜서 사람들이 뭘 추구하느냐. 이 노래제목이 적절해요. <뱀이다> 인간들은 뱀을 추구하는 거예요. 뱀 쪽에 있어야 예수님을 물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타인이잖아요. 타인을 물어야 내가 살기 때문에.

그러니 뱀이 뱀 고집을 안 꺾기 위해서는 하나님 아들의 발꿈치를 물어줘야 뱀다워요. 그렇다면 무는 뱀과 물린 예수님 사이에 대립관계, 경쟁관계가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경계선을 계속 유효하게 살리는 식으로 성령이 오신 거예요, 성령이. 무엇과 대립관계가 되느냐 하면 육에서 생각하는 선, 악과 성경에서 말하는 선과 악을 대립관계에 놓는 겁니다.

그러면 모든 세상은 통합해서 그들은 무엇을 찾습니까? 뱀이다~뱀이다. 뱀처럼 간교하고 뱀이 하는 행세를 계속 하죠. 주님께서는 그러한 뱀, 메시아의 발꿈치를 무는 뱀을 계속 동반해서 부각시키고 살립니다. 그 대목이 출애굽기 4장에 보면 모세가 지팡이 들고 애굽에 내려갈 때 하나님께서 기적을 언급하죠.

자, 기적이란 기적을 유발시키는 동네가 실제이고요, 기적을 받는 이 세상은 인간들은 실제라고 우기지만 사실은 허풍이 되는 겁니다. 공허함이 되죠. 그 경계선이 지팡이입니다. 언젠가 이야기했죠. 모세가 지팡이를 쥐는 게 아니고 지팡이가 모세를 쥐고 있다고요. 모세는 인간이고 지팡이는 나무 작대기잖아요.

그러면 우리 인간세계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인간이 작대기를 다루고 인간인 내가 깎아 만든다고 생각하죠. 대립되는 세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그걸 반대로 뒤집어버리죠. 지팡이가 이끄는 대로 네 몸은 따라줘야 될, 종속된 관계라고 보는 겁니다. 이 땅에서는 내가 실제, 이 몸이 실제이기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을 다루려고 하는데 이 땅에 있는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분이 주인이 되시고 우리는 거기에 따라가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 그러한 종속된 존재로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종속됐다는 말은 내 자체로서 내가 현실의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이게 자기부인이죠. 나는 내가 실제가 아닙니다. 자기부정을 자기 속에 담는 거예요.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를 자기 존재 안에 포함시키는 거예요. 살아가는 것도 이게 바로 내가 허풍이라서, 공허라서 내가 오늘 밤에 죽어도 괜찮은데 살게 하신 이것이 실재하신 분의 실제적인 업무, 작업의 결과로서 제가 오늘 또 하루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애굽의 사고방식과 모세가 하는 사고방식과 얼마나 크게 대립되겠어요. 정말 냉혹하게 대립되죠. 그래서 유월절할 때 하나님이 어린 양의 입장에서 개입되잖아요. 보통 집에서 키운 어린 양은 나 좋으라고, 내 먹잇감 되라고 키우잖아요. 그런데 반대가 돼서 어린 양 때문에 누가 살아요? 그 집안이 산다.

이게 바로 서로 다른 두 세계 원리가 아주 확연하게 반대가 되는 모습을 경계선 상에 있는 모세나 아벨, 그리고 이삭, 하나님의 언약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잉태치 못한 사라가 실제고 이스마엘을 낳았던 하갈은 하나님께서 하늘나라, 실제적인 천국에서 안 받아주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안 받아주는 사람이 돼요. 그래서 언약이 몇 개냐 하면 상반되는 언약이 두 개의 언약이에요. 이게 두 언약. 여자들은 하나의 비유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다 성령 받았겠지만 정말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게 되면 뭐가 날라가느냐 하면 남자와 여자의 차이도 날라가요. 이 땅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차이는 차이 값도 못하는 차이에요. 차이가 아닌 차이에요. 왜냐하면 진짜 차이는, 찐찐 진짜 차이는 ‘십자가 안과 십자가 밖’, 이 차이뿐이지 십자가 밖에서 있는 이런 차이, 남녀의 차이, 어린이와 어른의 차이는 차이도 아니에요. 구약에서 간음은 뭡니까? 율법 언약 안에 있는 자들이 언약 밖에 있는 자들과 관계하는 것이 간음이잖아요. 세상의 간음은 남녀 간에 문제 있는 게 간음이라고요.

쉽게 말씀드릴까요? 내가 아는 것은 다 엉터리이다. 야, 이거 오늘 제목으로 삼고 싶다, 진짜. 내가 아는 것은 다 엉터리이다. 그 목적하는 바가 나를 향하고 있기 때문에. 나의 의로움, 나의 거룩함, 나의 잘됨. 이걸 그대로 밀어붙여서 천국까지 밀어붙이려고 시도하잖아요, 바리새인처럼.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인간은 악을 모르기에 악을 안 저지르려고 해요. 바르게 살고 조심스럽게 살고. 네가 악을 알아? 몰라. 그냥 내가 상정한 악, 나쁜 짓을 안하면 돼. 살인 안하면 되고 악행 안하면 되고, 여기에 또 나오잖아요, 도적질 안하면 되지. 지옥 가보면 도적질 안한 사람들 지옥 많이 와있어요. 살인 안한 사람들. 간음 안하고 거기에 악행 안한 사람들 많이 들어가 있다고요. 성령은 안 받았는데 되게 착해요. 아니 착하다고 우기죠.

사람은 자기가 보이는 만큼 안다고 자기가 만든 법에 입각해서는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에요. 법을 한번 줘봐, 그럼? 법을 한번 줘볼까요? 사람들을 미워하면 그 자체가 살인죄라는 그 법을 한번 줘볼까요? 오른손이 범죄 하거든 그걸 찍어버려라. 그러니까 오른팔 멀쩡하고 오른 눈 멀쩡하게 있는 사람은 거의 전부다 위선자에요. 몰라 애꾸눈 선장, 캡틴 그거는 모르겠지만 오른 눈, 오른팔 멀쩡하면 전부다 거짓말쟁이입니다. 진즉에 잘라냈어야 해요. 그러면 왼팔만 있으면 이제 죄 안 짓습니까?

죄라는 것은 죄 안 짓겠다는 그 자체가 제일 나쁜 죄에요. 죄를 안 짓겠다는 그 자체가. 죄를 안 지어서 뭐를 얻고자 하는 겁니까? 죄를 안 지으면 의가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의가 죄 안지어서 받는 그런 의가 있습니까. 율법은 먹구름이에요. 어떤 인간도 통과 못합니다. 죄 안 지은 채 통과 못해요, 아니 통과 자체가 되지를 않고요.

사람이 왜 통과를 못하느냐 하면 나중에 죄, 죄, 자꾸 죄라 하면 기분 더러워서 그 다음부터 삐쳐가지고 나 통과 안 해. 지가 도로 착한 일이라도 얼추 챙기자. 그걸로 돌아서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 버린 겁니다, 그 따르던 많은 사람들도.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왜 죽였습니까? 자기 것을 포기 못해서 그래요. 자기 유혹을 자기가 못 이겨서 그래요. 내가 어때서? 내가 어때서. 요즘 말로 하면 이 나이가 어떤데. 내가 어때서. 내가 소중해, 예수가 소중해? 내가 소중하지. 그걸 물어보나마나. 왜? 타고난 본능이니까. 선악과를 따먹고 선과 악을 안다고 생각하는데 이미 알게 된 것을 내가 일부러 버릴 필요는 없지 아니한가.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알고 있는 선과 악이니까 선은 하면 되고 악은 버리면 되지. 이게 뭐가 문제냐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아는 친척들한테 복음 전하면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가 이거에요. “내가 어디를 봐서 죄인이냐?” 그래서 죄인이에요, 그래서 죄인이에요! 십자가를 무용지물로 만들어서 죄인입니다. 주님은 다 알고 십자가 지셨거든요, 알고. 우리는 개코도 모르면서 지가 법 만들어놓고 지가 만든 법이니까 지가 다 지켰지.

제가 어릴 때 아주 독실한 유교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 집안에서는 대청마루 올라설 때 신발을 나란히 해서 나가기 좋도록 다시 원위치로 하지 아니하면 죄가 돼요, 우리 집에서는. 우리 집에서는 죄가 돼요. 그런데 신입생 환영회가가지고 신발 함부로 버리고 갔을 때, 신발 나란히 하지 않는 것이 내 죄의 안목에서 볼 때는 이런 못 배운 인간들!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무슨 뜻인지 아시죠? 아시면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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