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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0 16:58:03 조회 : 37         
서울의존강의20201008b 베드로전서4장 15절(주의 일)-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하림(IP:124.254.211.180)
서울의존강의20201008b 베드로전서4장 15절(주의 일)-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하나님 뜻은 이거에요. “받은 것 내놔라. 네 것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것 말고 내가 너한테 준 거 있잖아. 줬잖아.”, “뭐요?”, “성령 줬잖아, 성령.” 성령은요, 자의로 말하지 않아요. 성령의 특징이 뭐냐. 성령 자신도 자기부인이 돼요, 성령 자신도.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예수님만 증거하거든요. 분명히 본인이 있으면서도 본인이 뻔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 이야기를 해버려요. 요한복음 16장에서.

왜 그러냐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베드로전서 4장 15절에 나옵니다. 여기서 악행과 도적질과 그리고 살인과 같은 레벨로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나와요.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 그러니까 악에 서열이 있다, 없다? 악에 서열이 없어요. 왜냐하면 이 동네가 다 악이기 때문에. 작은 악, 큰 악 이게 없어요. 어차피 하나님의 것이 없으면 전부다 한통속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큰 악을 기르고 어떤 사람은 작은 악을 기르는 것은 뭐냐. 그들은 큰 악을 기를 기회를 얻지 못해서 그래요.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이는 기회를 얻지 못해서 그래요. 가정교육을 너무 잘 받아서. 파리도 하나 못 잡아요. 북한에서 파리도 하나 못 잡는 착한 사람이 연평도 군인으로 있는데 뭐가 물에 뜨니까 부북 쏘아버린 거예요. 북한에서는 충성이지만 남쪽에서는 살인자가 된 셈이죠.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그런 기회를 맞닥뜨리게 되면 내가 예상 못할 악이 항상 나올 잠재성을 지니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여기서 우리가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죄가 나를 농락한 거예요. 죄가 기회를 타서 나를 통로로, 파이프로 사용해서 현재 눈에 보이지 않는 죄가 나를 통해서 죄를 현실화시키는 겁니다. 죄가 자기를, 스스로 죄를 펼쳐보는 거예요, 나를 통해서.

이게 로마서 7장에 나오죠. 행해놓고 자기는 죄 지은 줄 몰랐는데 갑자기 율법으로써 ‘탐내지 마라’ 하는 순간 자극받은 거예요. ‘탐내지 마라’ 하는 순간 그 다음부터는 아, 탐내는 것이 죄라는 거야? 하는 순간부터 이미 탐내기 시작 작업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이 인간세계 속에 주어졌다는 말은 그들이 죄와 결탁된 그 사실을 노골화시키는 데에 하나님의 언약, 율법이 계속해서 자극을 주고 있는 겁니다.

그걸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인간의 악의 본성이란 소망하는 건데, 나는 금지된 것을 소망한다. 이걸 개 버릇 남 못준다는 말이에요. 조상부터가 따먹지 마라 하는 것을 따먹었기 때문에 금지한 것을 도리어 소망하기 시작하잖아요. 우리가 형편이 되어서 여러 가지 죄를 못 짓지만 기회만 된다면 그 누구도 그 형편상 죄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숨이 안 끊어져도 죄와 결탁되어 있는 자체가 하나님의 율법, 언약, 말씀에 의하면 그 인간은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심지어 태어난 지 보름 된 애가 죽는 이유도 죄값으로 죽는 겁니다. 죄를 더욱더 죄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대한 지시약을 이 땅에다가 뿌리는 거예요, 지시약. 율법오기 전까지는 우리 전부다 건전하고 훌륭하고 하이고, 아저씨 왜 그리 착해요. 하고 너무 착한 거 같아. 막 이렇게 하다가 율법만 줘버리면 그게 독자적으로 절대화시키는 하나의 유혹거리가 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제시하는, 인간극장이나 여러 가지 드라마나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이 나열하는 착한 일들을 보게 되면 전부다 개인적으로 혜택 입은 것들이에요, 개인적으로. 우리 할아버지는 얼마나 좋은지. 엄마가 날 버리고 아버지가 힘든 가운데 날 키우는데 나 같은 손자에게 할아버지가 색소폰 가르쳐 줘, 트롯 노래 가르쳐 줘, 심지어 할아버지가 자기는 간암에 걸려서 곧 죽으면서도 끝까지 이 손자한테 용기를 부여해 줬다. 그 사람이 누구냐 ‘여백’을 불렀던 정동원이라 이 말이죠. 그거 사람들이 보고 감동 먹죠. 아참, 그 할아버지 훌륭하다. 지금도 할아버지 생각하면 난 눈물이 나요.

그놈의 눈물은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흘리는 눈물인지 몰라. 전부다 눈물이 절대적 나의 것은 이미 확보되어 있다는 것을 티내는 눈물이에요. 내 것이 없으면 눈물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내 것이 없는데 왜 눈물이 나요? 내 것이 없다면 눈물 안 나죠. 눈물 난다는 것은 내 것이 있어서 좋아서 울고 내 것이 빼앗겨서 또 서러워서 울고. 이래도 울고 저래도 울고. 감격해서 울고 슬퍼서 절망해서 울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는 자는 쫓아버리라고 하죠. 우는 자는 쫓아버려라. 제가 설교에 인용했잖아요. 날 위해서 울지 말라. 나는 이 세상에 없는 존재다. 없는 존재를 위해서 왜 우느냐. 차라리 울려면 있는 존재를 위해 울어라. 왜? 저들에게 딸이 있거든요. 날 위해 울지 말고 네 딸들을 위해 울어라. 네가 딸 소유하고 있잖아.

이 소유성은 우리가 못 벗어납니다. 우리의 소유적인 본능은. 아침 눈뜨고 살아가는 모든 것은 바로 내 소유를 더욱 더 공고히 하기 위한 나에 대한 헌신.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사명감이 있어요. 누구에 대한 철저한, 투철한 사명감입니까. 나를 위한 사명감. 나를 위한 사명감이 투철하니까 주님한테 줄 사명감이 남아 있을 리가 있습니까. 사명자니까. 누구를 위한? 나에게 헌신하기 위한 사명자가 있는데 내가 나 빼놓고 달리 또 누구한테 남아있는 사명감이 있을 리가 있어요? 없죠. 존재자체가 악행이에요, 우리는 존재자체가.

남의 일에 간섭한다는 말은 그 남이라는 규정을 누가 합니까? 내가 여기 있기에, 내가 여기 확보되어 있기에 내 영역 밖에 있는 것을 남이라고 하는 거예요. 남이라고 이야기할 때는 내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남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주님과 우리 사이가 남남의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이 오게 되면 남의 일이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없기 때문에 남의 일도 없는 거예요.

남이라 하는 것은 내가 있다는 근거 하에 내가 아닌 것을 남이라 하거든요. ‘남’에서 점하나 떼면 뭐가 됩니까? ‘님’이라는 글자가 되죠. 남에서 님 돼요. 님 되다가 점 하나 붙으면 남이잖아요. 님으로 살다가 남으로 가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남 됐다가 님 되는 건 힘든데 님 됐다가 남 되는 건 왜 그리 쉬운지. 점하나만 붙이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남이 아닌 이유가 우리가 주님한테 종속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종속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한 영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 그 대표적인 하나가 주님이에요. 마태복음 7장 한번 봅시다. 이것을 유념하면서 마태복음 7장 22절부터 23절 부분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되어 있죠.

이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뭘 했어요? 귀신 쫓아내고 선지자 노릇하고 또 많은 권능을 행했잖아요. 그러나 이것이 말씀이 오게 되면 내가 권능을 행하고 내가 귀신을 쫓아낼 수가 없어요. 내가 죽은 자가 되기 때문에. 말씀이 완성이 되어 버리면, 말씀이 나한테 완성이 되는 것이 십자가고 그게 성령이잖아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령은 누구 이야기한다고요? 성령은 자신 이야기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을 이야기해요. 자의로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행한 일을. 그리스도의 일화들 속에 모든 말씀이 다 완성되어 있죠. 그 완성이 우리에게 택배로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내가 하는 일이 없죠. 내가 오줌 누는 것도 주의 일이라니까. 내가 밥 먹는 것도 권능이에요. 내가 내 일을 구분 지을 그러한 자격 자체가 우리한테는 없어요.

사람이 근심 걱정하는 이유, 이제는 말한다. 근심 걱정하는 이유가 내가 따로 책정되어 있기 때문에 근심하는 거예요. 지킬 내가 있기 때문에 걱정 근심도 따라오는 거예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고. 이건 악행이고 이건 바른 행동이고. 악행이고 바른 행동이고 내가 결정지으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우리에게는 나의 일도 없고 남의 일도 없어요. 모든 것이 주의 일입니다. 만약에 이웃에서 떡을 준다. 주께서 주신 거예요. 내가 이웃에게 떡을 주고 싶다. 주께서 하게 하신 거예요. 우리가 전에 봤던 베드로전서 4장 11절을 누가 제 대신 한번 읽어 보세요.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인데 거기 예수그리스도에다 괄호를 해놓고 거기다 내 이름을 임의로 한번 집어넣어보세요. ‘이는 범사에 내 행함으로,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까? 아니다 이 말이거든요. 나로 인하여 내가 봉사하고 내가 희생하고 청소한다고 피나가지고 피 줄줄 흘려가면서 청소를 했다. 그러면 이게 희생자는 나니까 나로 인하여 영광 받습니까? 아니죠. 누굴 위하여? 주를 위하여.

<주 예수는 나의 산 소망>이라는 노래, 제가 대전강의에다 올려놨잖아요. 자, <주 예수는 나의 산 소망> 참 은혜가 되는 노래에요. 그러면 제가 비교해볼게요. <주 예수는 나의 산 소망>이라는 노래하고 <사랑이 지나가면>하고 둘 중에 어느 게 더 은혜가 됩니까?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가사가 있는, 이문세의 <사랑이 지나가면> 노래하고 <주 예수는 나의 산 소망>노래하고 어느 것이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이 말이에요. 어떤 것도 자동적으로 영광이 안 되죠.

주께서 나를 삭제시킨다면, 주 앞에서 나를 희미하게, 옅어지게 한다면 그 어떤 노래라도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하나님의 원리에 부합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원리는, 성령이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죠. 그러면 그 원리가 우리한테 오게 되면,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나에 대해서 ‘잘했다 못했다, 이것은 내 실수야, 이것은 나쁜 짓이야, 옳은 짓이야’ 가 완전히 날라가버려요. 어떤 것 하나라도 내가 책임질 필요 없는 주의 일이 됩니다, 주의 일. 이게 복음이에요.

지식으로 예수 알고 바르게 살겠습니다. 이건 복음이 아니에요. 여전히 누가 살아있어요? 말씀 지키고 신앙생활 하는 내가 중요해. 주님이 안 중요하고 주님을 믿는 내가 중요해버려요. 제가 주일 낮 설교에서 했죠. 자기 자신을 그대로 지키는 자는 다 어디간다고요? 지옥 가 있어요. 중간에 자기를 밀어내야 되는데 거지 나사로처럼 밀어내야 자기는 안보이고 뭐만 보입니까? 주님만 보여야되는데 자꾸 주님을 이용할 생각하니까 십자가 이용해서 내가 천당 갈 생각하는 겁니다. 성경을 천독 만독해도 소용없어요, 그건.

성령을 안받아놓고 받은 척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막상 내놓으라 하면 뭐를 내놓느냐 하면 내가 예수 믿고 이렇게 잘된 것, 착한 것 내놔요. 주님께서는 받은 거 내놓으라니까, 네 것 내놓지 말고 받은 것. 너의 일 내놓지 말고 주의 일 내놓으란 말이죠. 너를 부인시킨 일 내놔라. 나는 죄인입니다. 이게 아니고 나는 있으나마나한 존재입니다. 제가 주제넘게 끼어든 그것이 나쁜 죄입니다. 그걸 내놓으란 말이죠. 내가 끼어들 잽도 안 되는데 끼어들고.

어디 내 인생에 내가 끼어들어요. 값도 못하면서. 우리가 값이 됩니까? 내 인생에 내가 콩 놔라 팥 놔라 할 값이 돼요? 참 성경에서는요, 독침처럼 우리를 찔러주는 말씀을 합니다. 네가 네 힘으로 머리를 희게 할 수 있느냐. 뭐 흰머리 계시니까. 한 자나 길게 할 수 있느냐. 꼭 우리가 불가능한 것만 이야기해요. 왜? 우리는 가능한 걸 추구하는 이유가 잘난 척하고 싶어 환장해서 그래요.

내가 빠져버리면 내가 사는 보람이 없다는 것이 우리가 죄인으로 태어난 본능입니다. 아니 내가 없는데 내가 왜 살지? 이런 식이에요. 뭐 괴로운 일 있으면 자꾸 자살할 생각만 하고, 자살. 한강 요새 물이 많이 불었다마는 걸핏하면 번개탄 피우고 뛰어내릴 준비하면서 유서는 또 그럴싸하게 쓴다고, 아내야 미안하다. 미안하면 왜 죽어? 미안하다. 내가 너한테 짐이 되는구나. 빚이 많은 나 하나 죽으면 너희들이 호강하겠지. 유서 써가지고 번개탄 피워놓고 죽으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자살하는 것은 본인이 기어이 안 죽겠다는 항거입니다. 심보가 안 죽겠다는 거예요. 물에 빠지면서도 I'll be back. 이런다고요. 용광로 물에 빠지면서도 터미네이터가 마지막에 하잖아요. 내가 다시 돌아온다. 내 명예는 건지고 내 몸은 장렬하게 없어지겠다는 거예요. 아예 장렬하게 불에 화장을 해버리지. 지옥에 가면 전부다 나때 에요. 커피라떼 이런 것처럼 내 때는 이렇다. 역사를 가지고 있어요, 역사를.

공허한 자에게는 그림자도 없어요. 역사라는 그림자가 남아있으면 안됩니다. 내 일이 아닌데 자기 그림자가 왜 있어요? 내 일이 아닌데. 빛 앞에서는 그림자가 없어요. 바로 수직으로 서면 그림자가 없어요. 삐딱하게 보니까 그림자가 생기는 거예요, 삐딱하게 서니까. 주님께서는 아예 성도한테 죄의 그림자가 생기지 않게 만들었어요. 너의 그림자가 없어요. 네가 없는데. 그림자가 있다면 그건 주님의 그림자죠.

우리는 주님의 그림자에 푹 싸여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받은 거 내놔라. 네가 받은 것. 성령 내놔라, 성령. 그런데 성령은 자신을 내놓는 게 아니고 누굴 내놔요? 성령은 누구 이야기 한다고요? 주님 이야기하죠. 바로 주님이 주신 십자가를 내놓는 겁니다.

그럼 구약 때는 어떻게 되느냐. 구약의 율법의 발전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율법의 발전이라는 것은 율법의 조항이 풍부해지고 늘어나는 거예요. 법조항이 늘어난다. 자, 법조항이 늘어나게 되면 더 지적할 일이 많아지겠죠. 그만큼 이 지상에서 지적할 일이 더 새롭게 생기는 거예요. 계속 생성되는 겁니다. 죄가 계속 많아지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죄를 더 지었다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창안해 낸 새로운 자기 의로움과 자기를 지키는 변명거리가 더 많아졌다 이렇게 보면 돼요. 전라도 담양에 대나무 숲 있잖아요. 그 대나무 숲이 촘촘해요, 멀리서 보면. 야, 이거 사람 들어가겠나. 그런데 자세히 보면 비집고 들어갈 수 있어요. 아무리 멀리 있어서 법들이 많다할지라도 사람들은 자기의 행함 중에서 법의 지적을 안 받을 구석은, 빈틈은 기어이 찾아내요. 그게 윤리, 도덕입니다. 그게 철학이고요.

철학은 인간이 자기를 긍정할 수 있는 그러한 논리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겁니다, 끊임없이. 뭐든지 죄가 되고 뭐든지 죽을 죄인 되게 되면 내가 내 유혹거리가 되는 나를 거룩하게 지킬 수 있는 그것이 위협받잖아요. 그래서 ‘늘 죄만 짓는 게 아니고 착한 구석도 여기 있잖아’ 라고 내놓기 위해서 지킬만한 법들을 발명해 내는 거예요. 발명해버리면 그걸 발명한 나는 지킨 자가 되고 미처 내가 지어낸 법을 모르는 자는 뭐가 돼요? 나에게 범죄자가 되면서 나에게 통치 받아도 할 말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이 몰아세웁니다. 여러분들이 아이스하키 하는 것 보면 아이스하키 스틱가지고 조그만 퍽(puck)을 자꾸 몰고 다니죠. 율법이 어디로 몰고 가느냐 하면 ‘왕을 주세요’ 까지 몰고 가요. 사무엘상 8장에. 그러면 사무엘상이니까 그전의 시대는 무슨 시대냐 하면 사사시대죠. 사사시대에 반복구가 나와요. 어떤 일 벌여놓고 꼭 반복구가 나오는데 그 당시에 왕이 없으므로 본인의 소견에 보기 좋은대로 했다.

본인의 소견에 좋은대로 했으면 나라꼴이 잘 되어야 될 텐데 나라꼴이 되지를 않는 거예요. 서로 대장이 너무 많아서. 사사가 너무 많아. 대장들이 너무 많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불편한 거예요, 사는 게. 사는 게 불편한 겁니다. 현대 국가가 대체로 정당이 달랑 두 개에요. 실제로 작은 것까지 하면 미국 같은 경우 수백 개 되지만 그러나 대세를 차지하는 것은 민주당과 공화당이잖아요. 딱 두 개라고요. 번갈아가면서 찍어주겠다고 하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최고의 어떤 고정된, 안정된 권세처가 있어줘야 덩달아 우리가 삶에 있어서 안정감을 얻게 되는 겁니다.

자식들이 부모한테 요구하는 것 중에 많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생계비 제공, 조달하는 것도 요구하지만 정신적으로 자식들이 부모한테 제일 요구하는 것은 뭐냐 하면 제발 좀 정서적으로 안정되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싸우지 말고. 부모들끼리 싸우게 되면 왜 자식들이 불편하냐 하면 내가 어느 편에 설지 자꾸 혼동되기 때문에 그래요. 아빠 편에 서면 엄마한테 당하고 엄마 편에 서면 아빠한테 당하고.

그러니까 에서와 야곱 같은 경우에 패가 갈리잖아요. 아까 제가 얘기했죠. 한 가정에 경계선이 생겨버렸다고요. 백날 신앙대로 살아라, 교회 나와라, 바르게 살아라 해도 아빠, 엄마 싸워버리면 그것들이 다 구라가 되어 버립니다. 자기들끼리 하나가 안 되는데, 뭐. 그럼 하나 되면 되지. 하나 된 게 왕이에요. 그 집안의 왕이 엄마가 기가 세면 엄마가 왕이고 아빠가 기가 세면 아빠가 왕이에요. 아무나 하세요, 그냥. 기 센 사람이 하세요. 아빠 왕 만들어놓고 밑에서 흔들지 말고 그냥 본인이 왕 되면 돼요, 본인이.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권을 가진 자가 왕 노릇을 하죠. 엄마가 경제권을 가지면 엄마, 기 살아가 되고 아빠가 경제권을 가지면 아빠가 또 지 마음대로 취미생활하고 지가 대장, 큰 소리치고 그러죠, 이 사회에서는. 여기서 이 아파트 명의가 누구냐. 공동명의냐. 과거에 남편이 나쁜 짓을 많이 했으면 모든 명의가 아내한테 다 넘어가게 되어 있어요. 김학래 지 명의 하나도 없어요. 이혼 1위가 되기 전에 빨리 아내한테 알아서 수그리 그렇게 살아야 돼요, 협의해서.

이게 뭐냐 하면 권세를 현실적으로 한 곳에 모아야 우리가 살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뜻은 뭡니까, 율법은? 내가 율법으로 그렇게 몰아넣었다. 그게 바로 죄이다. 왕을 달라는 게 죄에요. 왕이 왜 필요한데? 왜 왕을 달라 하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사는 게 정당하다는 것을, 그리고 살 때 그냥 사는 게 아니고 안정되게, 평화롭게 살 권리가 괜찮은 왕을 만나서 나한테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음을 내가 스스로 확인하고 싶다는 거예요.

무탈하게, 탈 없이 잘 산다는 것은 곧 내가 악이 아니고 의롭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방법이 된다는 겁니다. 내가 아무 탈 없이 무탈하게. 뭐 애들이 아프기를 하나 공부를 못하기를 하나. 시험 치면 무조건 백점, 애들은 뭐든지 알아서 ‘공부가 제일 쉬워요’ 하면서 지 방에 가서 알아서 숙제 다 하고. 딸애는 ‘어머니, 힘들죠? 제가 도울게요.’ 지가 또 요리 배워가지고 하고 ‘엄마, 내가 주물러줄게.’ 어깨 주물러주고 ‘엄마는 가만히 있어요. 제가 요리해가지고 전부다 갖다 바칠게.’ 접시는 접시대로 집안 살림을 어떻게 그리 잘하는지.

무탈해. 탈이 없어요. 탈이 없으니까 어떤 생각이 듭니까? 역시 우리가정은 의롭기는 의롭구나. 의로우니까 하나님의 징벌이 없지요. 징벌이 없으니까 그만큼 착하다는 거예요. 이게 미친 거거든요, 사실은. 그러면 그 사람은 뭘 내놓겠어요? 성령을 내놓겠습니까, 나는 정당하다를 내놓겠습니까? 나는 정당하다를 내놓겠죠. 그렇게 정당하다를 내놓을 때 주님께서는 우쌰! 성공한 거예요.

율법으로 계속 몰아세운 마지막 모습은 창세기 때 선악과를 따먹은 그 심보를 그대로 노출시키죠. 더러운 이야기지만 종기나면 피부가 볼록하게 올라와 있잖아요. 아이, 나 이거 더러워서 이야기하기 싫은데 이야기 해야 돼요. 팍 터트려버리면 그 안에 들어있는 누런 것이 노출되지요. 죄송합니다. 더러운 얘기 해가지고, 아까 빵 먹었는데. 교묘하게 가식적으로 위선적으로 덮어있는 것을 주께서는 콱 짜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감사해야 돼요. 왜? 주님이 바로 고름덩어리거든요. 누구도 기피하는 겁니다. 나는 죽으면 죽었지 저러고는 못산다고 기피하는 대상이 예수님이에요. 아무 흠모할 게 없어요. 십자가를 믿는다고요? 그거 미친 거 아니에요? 왜 고름을 좋아해요? 누가 좋아하겠어요. 그러나 성령은 자의로 자기 뜻을 이야기하지 않고 누구 이야기한다? 그 분이다. 네가 기피했던 그 분이야, 이 베드로야. 네가 도망쳤던 그 분이야. 네가 부인하고 저주했던 그 분, 네가 알아서 버린 패잖아요. 네가 버린 패가 너를 살리는 거야.

그러니까 베드로가 잘 버렸죠. 예수님을 잘 버려야 베드로가 구원받을 때 아무 소리도 못한 거예요. 자기가 버렸으니까. 자기 쪽에서 차버렸으니까요. “나는 너하고 살기 싫어.” 하고 남편이 아내를 내쫓아버렸어요. 아내가 매달렸는데도 불구하고 “꼴 보기 싫어, 나는 다른 여자 있어. 할 수 없어. 잘 가.” 하고 갔는데 그 여자가 나중에 세상적으로 성공을 해서, 또 드라마 쓴다, 애까지 번듯하게 판사에 의사 다 시켜가지고 왔을 때 “미안해, 그 때 내가 잘못 생각했어. 어떻게 하면 용서받을 수 있겠어? 너 예수 믿는다며? 나도 이제부터 예수 믿을게.”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입니까? 이게 누굴 위한 거예요.

용서라는 말을 한다는 자체가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우리는 용서해 달라 소리하면 안돼요. 용서받아서 또 뭘 얻을 건데? 또 같이 붙어 살라고? 어디 꼼수를... 용서를 요구할 깜냥이 됩니까? 그거 되지도 않죠. 안돼요, 우리는.

그래서 <주 예수는 나의 산 소망>이라는 가사에 이런 가사가 있어요. ‘주의 십자가가 나를 부를 때’. 내가 십자가를 믿는 게 아니고 주의 십자가가 나를 불러요, 같이 죽자고. 내 십자가에 네가 필요하다고. 너는 가망성 없기 때문에. 가망성 없는 것, 그것이 십자가 사랑을 사랑만, 오직 주님의 일방적인 사랑만 고스란히 100% 드러낼 수 있는 대단한 재료가 되기 위해서 내가 율법으로 너를 몰아세웠다.

물침대 한쪽 누르면 저쪽이 튀어나오듯이 계속 율법으로 몰아세우면 인간은 자기 정당성을 버리는 게 아니고 ‘그래도 나만큼 착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해가지고 자기 정당화될 수 있는 요소를 계속 발굴하고 있어요. 계속 찾고 있어요. “너 사람 죽였지?” 그러면 “난 하나밖에 안 죽였다. 저사람 열 사람 죽였다.” 이런 식이에요. 꼭 이런 식이라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계속 발굴해서 상대적으로 내가 그다지 나쁜 자가 아니라는 것을 자기 내부적으로, 윤리 도덕적으로 자꾸 그 매커니즘이 가동되는 거예요.

우리의 죄악 된 마음이라는 것은 자기 정당화와 자기 의를 계속 쌓는 겁니다, 그게. 지적받으라고 주신 율법을 가지고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남에게 과시하는 용도로 용도 변경이 된 겁니다. 우리는 율법을 써먹을 데가 없어요.

십계명이 주어졌다는 말은 앞으로 어떤 인간도 십계명에서 위배되는 그런 민족을, 십계명을 시작으로 해서 만들어내겠다는 뜻이에요. 어떤 인간도 십계명을 준수한 인간이 없게 그런 민족으로 이스라엘을 만들어내겠다는 겁니다. 한번 몰아세워볼까? 이런 거예요. 결국 이스라엘은 망했습니까, 안 망했습니까? 망했죠. 이스라엘이 망함으로써 비로소 구원자가 나타난 거예요. 같이 망하자. 나도 망할게. 우리 망함의 자리에서 만나자. 라고 성립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이지만 그 자리를 비우시고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졌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 이 독특한 죽으심 이 안에만 거룩이 있고 의가 있는 거예요, 이 안에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주님의 죽으심 안에만 들어있어요. 그래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면 우리가 나만 죽는 것 말고 주님의 죽으심에 일찌감치 같이 합세하도록 성령께서 역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남이라는 게 없고 간섭하더라도 주님이 보시기에 내 영역, 영토에 해당되지 않는 남이 있을 거예요. 주님께 해당되지 않는, 주님께서 초청하지 않는 남이 있을 거예요. 그걸 내가 마치 주인공인 것처럼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남의 일에 간섭하는 거나 살인하는 거나 도적질하는 거나 악행을 같은 류로, 같은 종류의 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마라.

다시 복습하게 되면 남이라는 것은 내가 먼저 정립되어 있으니까 남이 나온다는 말이죠. 그럼 남의 일에 간섭할 때는 상대적으로 ‘나는 너보다 낫다’를 과시하기 위해서 남의 일에 간섭하는 거예요. 아저씨, 차 똑바로 안 해요? 이 말은 뭡니까? 이 말은 나는 똑바로 하고 있는데 당신은 지금 교통질서를 흐리고 있잖아. 그럼 내가 위협받으니까 당신 똑바로 하세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묻죠. “너 왜 간섭했냐?”, “내가 위협받으니까.”, “그 위협 좀 받으면 어때.”, “내가 죽잖아요.”, “너 이미 죽었잖아. 또 잊어버렸구나. 네가 이미 죽었잖아.”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아저씨, 같이 죽어요. 나도 죽고 아저씨도 같이 죽어요. 물귀신 작전 나오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여보, 당신 술 먹고 늦게 들어오지 마.”, “왜? 술 먹으면 좀 어떤데?”, “우리 가정의 분위기를 흐렸잖아.” 누구 가정? 내 가정. “나는 술이 좋아 술 먹는데.” 그럼 “당신은 왜 술 먹습니까?” 물으면 남편 하는 말이 “이거 내 가정이거든.” 아니 하나의 가정을 두고 서로 지 가정이래. 이게 마음이 통할 리가 있습니까? 우리라는 것은 이거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우리는 있을 수 없어요.

우리는 누구를 안에 집어넣어야 우리가 성립돼요. 너와 나가 하나 되는 것은 제3의 요소가 들어가야 돼요. 그 분, 제3자의 처벌이죠. 주님이 너도 처벌하고 나도 처벌할 때 우리는 복음 안에서 한 가정이 되는 겁니다. 내 기 살리고 네 기 살리는 게 아니고 반대로 나를 죽은 자로 하고 너를 죽은 자라고 할 때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감사가 나오죠. 감사가 나온다는 것은 무슨 경계선에서 벗어났다? 선과 악에서 벗어난 거예요.

그러니까 선과 악에서 벗어났다고 자꾸 고집부리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고요. 감사하면 그건 누가 뭐래도 선과 악에서 벗어난 거예요, 감사하면. 감사하는 순간에 나로 인하여 감사 안하거든요. 감사한다는 말은 나 말고 다른 어떤 분에게 감사한다는 뜻이잖아요. 감사가 되면 그 순간 나를 봅니까, 안봅니까? 나 잘했나, 못 했나 안보죠. 나를 죽은 자로 신경도 안 쓰고 나에게서 나를 밀쳐버리니까 내가 없으니까 남는 것은 뭐밖에 없어요? 감사밖에 없죠.

감사가 없으면요, 자꾸 뭘 해야 된다고 여겨요. 다음엔 그런 짓 안해야지. 내가 지금 실수한 거야. 다음에는 제대로 해야지. 감사가 없으면 미흡함을 느끼고 그 미흡함을 마저 채우기 위해서 새삼스럽게 새로운 모험에 나설 수밖에 없어요. 모험은 위험한 거예요. 그 모험이 정당한 모험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가 또 법을 만들어.

아까 법을 만드는 이유는 뭐라고 했습니까? 법을 만드는 이유는 자기 정당함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법을 만들죠. 그 법과 법의 틈새 사이에 나의 정당함의 근거를 또 만드는 거예요. 그러나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로서 이미 우리가 죽은 자잖아요. 예수님의 죽음으로써 모든 인간은 죽은 자로 확정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가서 빈 무덤으로 빠져나오는 순간 빈 무덤이 될 수 없는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한 존재로서 확인이 됐었어요. 부활이 안 되는 존재는 죽어 마땅한 거예요. 죄인인 거예요. 주님이 우리한테 묻는 건, 너 부활할 자신이 있어? 묻는 거예요. 없어요. 그러면 죄인 맞아요. 예수님만 빠져나온 거예요.

그런 입장에서 담양에 촘촘한 대나무 숲 같은 새로운 법을 만든다 할지라도 결과는 사형입니다. 어떤 정당한 법 가지고 자기 옹호에 나서도 소용없어요. 그건 사형이죠. 하나님의 뜻은, 성령을 주신다는 것은 나의 존재성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근원적으로 감사할 일입니까.

사람이 내 존재를 생각한다면 그냥 존재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선악으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에 이왕 존재하는 것, 착하게 살아야지! 이렇게 되죠. 착하게 살려면 내가 신경을 많이 쓰게 돼요, 자꾸 검토가 되어야 되니까. 자꾸 일을 벌여놓고 내가 스스로 나한테 채점을 한다는 게 얼마나 이게 스트레스 받는 일이에요.

내가 아버지로서 아버지 값을 못했구나. 이게 얼마나 아버지로서 힘든 일이에요. 내가 엄마로서 미안하다. 자식들에게 따뜻한 밥도 못해주고 엄마가 돈 번다고 뛰어다니느라 따뜻한 밥도 못해주고 미안하다. 자식들이 뭐 감동받을 줄 알아요? 엄마, 걱정하지 마. 또 돈 벌러 나가. 왜? 짜장면 시켜먹게. 엄마밥보다 훨씬 맛있어. 애들은 자기밖에 몰라요. 감동받고 그런 거 없습니다. 부모를 이용할 재주가 타고났기 때문에. 그러니까 감동받고 눈물 흘리고 그런 드라마에 있는 거를 미리 상상하지 마세요.

그래서 제가 분명히 적습니다. 악이 뭐냐. 감사가 없는 게 악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감사가 안 나오면 악이 되는 겁니다. 자기 쳐다봤다 이거죠. 감사 없음이 악이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범사에 뭐하라고 했습니까? 성령 안에서 너희를 권하노니 범사에 감사하라. 네 계획은 아예 없다. 성도는 자기의 계획, 기대, 목적 다 없애버려야 돼요. 그게 내 존재의 정당성을 자꾸 보장해주는 것처럼 제공되기 때문에. 나 그 일 때문에 죽으면 안돼. 이런 식입니다.

‘10월 4일에 내 딸 결혼식 하는데 그 때까지는, 나는 딸 손잡고 들어가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여, 날 죽이면 안 됩니다.’ 이러거든요. 기도 가운데 ‘절 죽이면 안 됩니다. 아프거나 죽이면 안 됩니다. 딸애 손은 잡고 가야되죠.’ 그러면 주님이 묻습니다. ‘딸애 손 잡는 것이 왜 정당하냐.’ 그러면 기도하는 사람이 ‘다들 그렇게 하니까, 다들. 다들 그렇게 하고 만약에 아버지 없으면 쟤는 뭐 아버지 이혼했나, 어디 갔나? 궁시렁거려가지고 이상한 나쁜 소리들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묻죠. ‘왜 나쁜 소리를 들으면 안 되는데?’, ‘내 가오 다 무너지잖아요.’, ‘가오 다 무너지면 왜 안 되는데?’, ‘나는 정당하거든요.’, ‘네가 어디를 봐서 정당한데? 왜 자꾸 너는 너만 쳐다보느냐? 네가 어디가 정당하냐? 정당한 근거를 대라.’, ‘하나님이 뜻이 있어서 이 땅에 태어나게 했잖아요.’

‘지옥가라고 태어나게 했는데? 죽은 자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율법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리기 위해서 내가 태어나게 했는데? 왜 너는 일방적으로 생각하느냐?’, ‘교회에서 그렇게 안 배웠어요.’, ‘그러니까 교회가 엉터리야. 네가 엉터리 하나님을 골라잡았구나. 네 마음에 드는 하나님을 네가 네 마음대로 정했구나. 네 정당성, 너의 사는 보람을 채워주는 그런 희망을 주는 하나님. 그거 네가 만든 거야, 우상이야.’, ‘그래도 하나님은 다들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십자가 걸림돌이 그게 좋은 하나님이야, 그게?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서 사람들이 날 배척했어. 인간들은 진짜 하나님만 배척해. 진짜 하나님이기 때문에 배척한 거야. 배후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진짜 하나님이라는 이유 때문에 악마로 인하여 죽임 받고 배척당한 거야.’

배척되지 않는 신은 악마가 만든 가짜 신입니다. 악마는 자꾸 작업을 하죠. 법을 만들고 그 법은 나의 정당성을 보장한다. 이게 악마가 계속해서 그래서 착하고 바르게 살라고 독촉하는 거예요. 우리를 독려하는 거예요. 나쁜 짓 하라는 말이 아니고 나쁜 일이고 착한 일이고 간에 우리에게는 오직 주의 일밖에 없지, 내가 점검에 나설 나의 일은 없는 겁니다.

들어도 5분도 안 지나서 다 잊어버려요. 5분도 안되어서 다 없어질 걸요. 워낙 삶의 버릇이 되어가지고, 불평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 가지고. 심지어는 감사 안하기 위해서 일부러 뭐가 부족한가 그거 찾으러 다녀요. 뭐가 부족한가 찾는 거예요. 감사 안하려고.

나의 가치 평가에서 여러분 자신을 빼주세요. 부탁해요~ 여러분의 가치평가에서 여러분 자신을 빼주세요. 그래야 마귀의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공부에 처음에는 피곤해서 못가고 두 번째 가려니까 전에 안간 게 미안해서 못나오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너 요새 안보이대? 하면 성경공부 참석해야 천당 가나? 성경공부 참석해야 천당 가? 성경공부 참석 안 해도 예수 믿으면 천당 가잖아. 이렇게 이야기하죠. 그럼 법을 누가 만든 거예요? 그 법은 참석한 사람이 만들었습니까, 참석 안한 본인이 만들었어요? 본인이, 본인이 법을 만들었죠, 전두환처럼 본인이 만들었죠. 이게 뭐냐. 자기가 왕인 거예요.

하나님의 율법은 뭐냐 하면 “본인이~”하는 그런 모습으로 내 내부의 악마성이, 자기 절대성이 출몰하도록 율법이 계속 강압하게 되면 그 율법에 대한 변명이 계속 동반해서 증강해요. 죄 지을 때마다 변명이 100가지가 더 튀어 나오죠. 생각해보세요. 죄를 짓게 되면 나를 선한 쪽에서 보기 위해서 죄가 선한 이유를 100가지도 더 댄다니까요. 그러니까 이런 장난질을 하는 자체가 죄가 된다는 걸 모르는 거예요, 이런 장난질 자체가.

죄는 감사가 없는 게 죄에요. 참 다른 모임 같으면요, everybody repeat~ '감사가 없는 게 죄다' 뭐 이렇게 하겠는데 여러분들은 다 성숙한 사람들이라. 제발 선과 악을 집적거리지 마세요. 우리는 우리의 선악체계에서 이미 죽은 자이고 거기서 벗어났어요. 선과 악을 장난감처럼 집적거리며 갖고 놀지 마세요. 자꾸 자기 자신이 얼마나 착한지 모험에 나서지 마세요.

50km/h 적혀 있는데 55키로 가서 걸렸다. 아, 아깝죠. 벌금 3만원. 그런데 어떤 사람은 55키로 가도 안 걸렸어요. 60키로 갔는데 안 걸렸어. 70키로 갔는데도 안 걸렸어요. 나중에 100달렸는데도 안 걸렸어요. 그 사람 죽었어요. 이미 죽은 자에요. 왜냐? 스스로 과연 내 행운이 어디까지 이르는가, 자기가 자기를 측정한다는 자체가 자기가 유혹거리이고 내가 나를 다루려고 한 거예요.

주님께서 주신 걸 내놓으라 하면 감사밖에 나올 게 없거든요. 우리가 세리와 창기이기 때문에. 주께서는 이미 우리를 바닥 치는 존재로 본 거예요. 쓰레기로 본 거예요. 쓰레기인데 주님도 같이 쓰레기 되셔가지고 그 주님의 쓰레기에 참여된 자이기 때문에 묻거나 따지지 않고 그냥 성령으로 의롭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 되게 했다 이 말이죠. 이게 복음 아닙니까? 그럼 받은 복음을 내놔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가 어느 정도 착할 수 있는가 그걸 자꾸 측정한다고요. 뭐 꼭 참석해야 천당 가나. 나 참석 안 해도 천당 갈 자신 있다. 왜? 예수 믿으니까. 나 너보다 십자가 더 안다. 뭐 이런 식으로. 자기가 있을 때는 누구하고 경쟁이 되어 버려요. 그러나 우리는 경쟁 상대자가 없어요. 고만고만한데 도토리 키 재기. 뭘 경쟁해요? 우리가 아직 그런 기회가 안 되서 죄 못 짓는 거지.

장발장이 쇼윈도에 있는 빵을 훔칠 때 장발장이 배터지게 먹은 데에다가 또 그 빵을 훔쳤습니까? 배고파서 빵을 훔쳤잖아요. 그러면 누구나 장발장같이 배고프면 본능 상, 살아야 되겠다는 게 본능이기 때문에 유리창 깨고 빵을 먹을 수밖에 없죠. 그러면 장발장이 성도라면 4년형을 때리든 10년형을 때리든 이미 죽은 자로 있어야 되는데 내가 한 행위에 비해서 죄 값이 너무 무겁다는 거예요.

이거 누가 이야기했어요? 창세기 4장에서 누가 이야기한 겁니까? 가인이 이야기했잖아요. 가인 본색 다 드러났어. 하나님이 누구시냐는 관심이 없고. 주의 계획이 뭐냐. 뱀이 발꿈치를 물고 여자의 후손이 머리를 친다. 그런 거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나의 정당성, 비록 동생 죽였지만 남까지는 안 죽였잖아요. 이런 식으로 말이죠. 끝까지 그래도 정당한 게 뭔가 있을 거야. 그게 진짜 나의 진면목이야. 그걸 발굴하는 데에 온 신경을 쓰는 거예요. 교회에 다녀도 마찬가지죠.

16절하고 마치겠습니다. “만일 그리스도로 인하여 고난 받은즉” 왜? 한 영이니까, 한통속이니까. 모든 게 본의 아니게 주의 일에 말려들었으니까. “주께서 얼마나 씹어댈까요. 예수 믿는다는 작자가 그렇게 나쁜 짓을 해?”, “아니, 내가 예수 믿는 작자가 되었다는 것은 내 뜻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셨으니까 따지려거든 주님께 따져라, 인간아.” 왜 나보고 따지냐 이 말이죠. 주께서 상황을 그렇게 몰아넣었는데. 왜 내가 마치 그 일을 안 할 수 있는 그런 권한 같은 것이 있는 것처럼 나를 보지 마. 나는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 거야.

그러면 “자기변명이 너무 심하구나.”, “심하든 뭐든 네가 너를 측정하는 것처럼 그 측정으로 나를 측정하려 하지 마라. 나는 소속이 다르다. 너하고 가치가 달라. 나는 받은 걸 내놔야 되니까.” 뭘 받았습니까? 쓰레기인데 용서받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성령이 이야기하는 그 피, 십자가의 다 이루심. 그거 내놨다고 착하다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착한 게 아니고 이것조차도 주의 일입니다, 이 고백도.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일은 아예 없음을 알고 매사가 주의 일이 됨을 감사함으로 발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서울의존강의20201008b 베드로전서4장 15절(주의 일)-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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