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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5 15:57:02 조회 : 38         
7강-암 4장 1-3절(주님의 통로)201014-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06.240.236.10)
7강-암 4장 1-3절(주님의 통로)2010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4장 1-3절까지입니다.

아모스 4:1-3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임할찌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 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을 그리하리라 너희가 성 무너진데로 말미암아 각기 앞으로 바로 나가서 하르몬에 던지우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을 놓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추적, 하나님의 인간추적이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오늘 이 본문말씀은 1차적으로 그 당시 북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 당시 북 이스라엘은 남쪽 유다와는 달리 가장 영토가 넓었던 시대였습니다. 여로보암이라는 왕이 통치했는데요.

기원전 786년에서 746년까지 40년 동안 통치했는데 그 쪽에서는 물질적으로나 국력 재물이 최고도에 달했습니다. 그 시절에 왜 그렇게 나라가 강해졌는가? 정치적으로 보면 북쪽에 압박을 가하던 앗시리아는 쇠약했고 그 옆의 시리아는 무너져가는 중에 있었습니다. 여로보암왕 때 이 두 나라가 약체에 있으니까, 또 전쟁에 있으니까 주변나라에서 안심하고 무역할 나라가 북 이스라엘밖에 없었어요.

물자의 소통이 원활하니 시장이 발달하고, 시장이 발달한다는 말은 이윤 남는 장사가 되었던 겁니다. 역시 돈은 장사해야 되지 농사지어서는 돈이 안 되잖아요. 요새는 농사를 지어도 전부 다 장사 쪽으로 하지만. 그 당시 장사가 잘되었고 장사가 잘 된다, 또는 물자교환을 통해서 이윤이 많이 남는 것, 이미 그들이 자본주의 맛을 본거지요.

그 많은 돈이 모이니까 돈은 또 쓰는 재미겠지요. 외국에서 비싼 명품들이 북 이스라엘 속에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돈을 가진 자가 외국의 명품유혹에 자극을 받아서 물품을 사지요. 풍요와 사치로 가득 차게 됩니다. 나라 안에는 누가 더 명품을 사들이면서 사치를 하느냐의 시합이 벌어졌습니다.

아모스 3장 15절에 보면 그게 나와 있습니다.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궁들이 파멸되며 큰 궁들이 결딴나리라.” 부자들은 비싼 상아로 장식한 여름별장과 겨울별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요새 같으면 여기에 요트 하나 더 보태도 괜찮습니다. 비단 베개가 있는 화려한 침상이 나옵니다. 아모스 3장 12절이지요. 그리고 음탕한 향연을 벌였습니다. 그들은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고 값진 향유를 몸에 발랐습니다. 아모스 4장 9절 그리고 5장 11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아모스 4장 1절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 암소들아” 암소들아, 하니 이것은 여자들이에요. 여자를 직접 지적하는 것이 성경에서 여러 군데 나옵니다만 자주는 나오지 않습니다. 바산의 암소, 수소가 아니고 암소들아. 부요한 집의 여성들이 할 일이 없어서 고급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본인들이 저축한 돈, 갑자기 졸부가 된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너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자기 남편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여자들이 술에 취해 있지요. 그 결과로서 가난한 자들이 시달림을 당하고 착취를 당하고 마침내 종으로 팔려갔다는 것이 아모스 2장 6-8절 5장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거기다가 재판관들은 뇌물을 받고 엉터리 판결을 내렸습니다. 아모스 5장 12절에 그렇게 되어 있어요.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도다.” 누가? 재판관들이 그렇게 한 겁니다.

이러한 사정은 아모스 2장 6-8절에 보면, 죄 없는 사람을 빚돈에 종으로 팔아넘기고, 미투리 한 켤레 값으로 가난한 사람을 팔았고요. 힘없는 사람의 머리를 짓이기고 가뜩이나 기를 못 펴는 사람을 길에서 밀쳐냈습니다. 아모스 5장 11절에도 나옵니다. “너희가 가난한 자를 밟고 저에게 밀의 부당한 세를 취하였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거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심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관여하는 겁니다. 여기서 이걸 보면서 우리가 ‘참 부자들은 나쁜 사람이고 가난한 사람은 억울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보지 마시고 이스라엘이 하나의 역할을 맡았다고 봐야 합니다. 배역을 맡은 거예요. 이스라엘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에요. 하나님 자기나라로 보면 돼요.

자기 나라에서 바산의 암소들, 벌써 풍채가 여자인데 뚱뚱한 여자, 이야기하기도 곤란한데요. 얼마나 맛있는 것을 고기 종류로만 골라먹었는지, 부잣집 마나님, 명품으로 칭칭 감고 다니는 부잣집 마나님 인상이 풍기잖아요. 하나님이 자기 나라에 그런 사람들을 허용했다는 이유가 뭘까, 를 생각해 봐야 됩니다.

그것은 현장성이에요. 배역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에게 역할을 맡긴 거예요. 어떤 역할을 맡겼느냐 하면, 바산의 암소역할도 맡기고 가난한 사람의 역할도 맡긴 거예요. 가난한 사람은 착하고 바산의 암소 이런 사람들은 악하다, 가 아니라 이스라엘은 어떤 역할도 다 해야 된다는 것을 여기서 의미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 유일하게 나타나는 그 현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알기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아, 네가 바산의 암소의 역할을 해서 너로 인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짓이기고 가난한 사람들을 못살게 하는 역할을 맡아라.”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아는 이스라엘 같으면 “예, 이제부터 제가 악한 역할을 맡아서 가난한 사람을 짓이기겠습니다. 충성!” 이렇게 나와야 돼요.

똑같이 “이 가난한 자들아, 너희는 이제부터 내가 만든 이스라엘 나라에서 역할을 맡는데 가난한 역할을 해야 된다. 가난한 역할을 해서 부자에게 설움 받고, 다 빼앗기고, 종으로 노예로 팔려가서 세상 어떤 즐거움도 누리지 못하고 비참하게 사는 역할을 해야 된다.” 이렇게 하면 그 가난한 사람이 성도라면 “충성! 나 하겠습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괜히 부자들 시기하고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아등바등 발버둥 치면 안돼요. 그런데 그 역할에서 오늘본문 4장 2절에 보면 그렇게 부자로 사는 역할 하는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을 그리하리라.” 3절에 “너희가 성 무너진 데로 말미암아 각기 앞으로 바로 나가서 하르몬에 던지우리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소위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는 이 부유한 자들을 하르몬이라는, 포로 잡혀가서 처참하게 대우받는, 앗수르에 끌려가서 완전히 인생의 끝이 비참하게 되는 그 역할을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던진다고 해요. 던져버린다. 던진다는 말은 전혀 가치 없기에 사람취급 하지 않겠다, 하고 던져버리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바산의 암소 역할 하던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한다면 이렇게 해야 돼요. “던져 주옵소서. 묻지도 마시고 던져짐을 당하는 일을 당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되어야지요. “처참하게 하나님 앞에 벌 받는 그 역할이라면 제가 담당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야 돼요. 여러분 감당할 수 있겠어요?

이 본문 보면서 ‘나는 조심조심 살아야지.’ 이렇게 나오지 마시고 주님 일에 참여자가 되었다는 것은 곧 주님 앞에 지목을 당하는 기적을 누리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성도의 눈으로 봐서는 어떤 역할이라도, 가난한 자 역할을 해도 충성, 악한 역할을 해도 충성,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서 어느 것도 주의 일인 것을, 심지어 하나님 앞에 벌 받아 던지우는 것도 주의 일인 것을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은, 이것은 곧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일에 내가 같이 참여했다는 그 감사와 기쁨이 있을 거예요.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것, 주님의 개입으로만 있을 수 있는 풍경이지 사람이 만들어갈 수 있는 풍경이 아니다, 라는 것을 미리 감지하고 알아채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에요. 이스라엘 망할 때 망하는 것도 주께서 시킨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망해버리면 그 이스라엘은 진짜 이스라엘이고 오늘날 성도라는 거지요.

그런데 구약의 아모스에 나오는 바산의 암소들이나 가난한 자들 모두 다 그 당시 현장성 속에 그들이 놓여 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바산의 암소가 되었고 실제로 그들은 가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데 어떤 표절도 하나님께서는 허용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부자면서도 자기가 부자로서 망하는 것을 겁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주면서 가난한 마음을 가진 척 할 때 그것은 표절입니다. 부자역할 맡았으면 부자로 있을 때까지 부자역할에 감사할 수 있어야 돼요. 참, 그런 역할 언제나 좀 해보나. 아, 참, 역할이……. 그 부자역할에 감사할 수 있어야 돼요.

캐나다 어떤 심리학자가 실험을 했어요. 한 스무 명 모아놓고 한 주 동안 한 쪽은 간수역할 다른 한쪽은 죄수역할을 하게 해요. 주로 대학생들 상대로 실험을 했어요. 실제로 감옥을 만들어놓고 반은 죄수역할 하고 나머지 반은 간수역할 하게 하는 겁니다.

각자 복장 입혀서 역할을 주니까 첫째 날은 주뼛주뼛하지요. 서로 아는 사람이고 이미 실험이라는 것도 다 알고 있으니까. “실험입니다” 이걸 몇 번이나 강조했다고요. 일주일만 하게 되면 한 2백만 원 이상 받아요. 단가 세지요. 일주일만 견디면 2백만 원 받는 거예요.

따라서 그냥 역할이나 하고 나오자, 했는데 이게 하루 이틀 사흘 지나니까 간수는 진짜 간수가 되어 있고요, 죄수역할은 일반인이 아니고 진짜 죄수처럼 사태가 원활하게 잘 돌아가고 있어요. 한쪽은 때리는 역할, 한쪽은 얻어맞는 역할, 충실하게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게 가짜인 것을 알면서도 해요. 그게 현장성입니다.

인간은 그 현장성에서 못 벗어나요. 하나님께서는 가상이다, 허상이다, 아무리 해도 부자이고 집에 돈 많은 이것은 실제상황이라고 느껴지거든요. 그리고 당장 집에 돈이 없어서 내일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이것도 ‘이것은 가상이야. 허상이야. 망상이야.’ 백날해도 집에 돈 없는 것은 없는 것이고 배고픈 것은 배고픈 거지요.

길가에서 붕어빵 굽는데 돈이 있어야 사지요. 이것은 실제상황이잖아요. 이게 어떻게 허상이고 망상입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것마저 역할이라는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에게 맡긴 역할입니다. 이것은 다른 민족이 아니고, 우리 같은 이방민족이 아니고 이스라엘한테 맡긴 역할이 바산의 암소역할 그리고 가난한 역할을 맡긴 거예요.

과도기적으로 가룟유다에게는 예수님의 제자역할을 맡긴 겁니다. 제자가 되니까 마태복음 10장이나 11장에 보면 제자들이 모두 권능을 행했어요.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예수님과 떨어져 있어도, 제자들끼리 가도 귀신이 쫓겨나갔어요. 왜냐하면 예수님 쪽에서 권능을 배급해 줬기 때문에, 그 현장에 예수님이 없다 하더라도, 심지어 70명이 가더라도 주님이 권능을 줬기에 귀신을 쫓아내고 전도할 수 있었습니다.

가룟유다도 물론 권능을 행했지요. 기적을 행하고. 그런데 제자들과 똑같은 역할을 했던 가룟유다가 나중에 어떤 역할을 맡느냐 하면, 예수님을 팔아먹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룟유다보고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 가룟유다에게는 굉장히 손해처럼 느껴지지만 그게 인간이에요. 인간은 자기 고유의 것을 생각하면 안돼요.

나만의 것을 생각하면 안돼요. 독자적인 것을 생각하는 것은 주님의 생각이 아니고 악마의 생각이었던 겁니다. 창세기 3장에서. 독자적으로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꺼야, 라고 하는 것은 악마가 그렇게 인간을 다루기 위해서 자기 맘을, 악마의 마음을 인간에게 주고 그 인간을 장난감처럼 다뤘던 거예요. 자기 맘에 들어갔으니까 다루기 쉬운 거예요.

‘네가 어떻게 무엇을 하든지 간에 너는 손해 보면 안 돼. 왜 너는 너니까. 너는 너야.’ 남진노래 있잖아요. <나야 나> 너는 너라는 말이지요. 그걸로 족하다는 거예요. 이게 마귀가 인간을 다루기 위해서 한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반대에요. ‘너는 너’가 아니라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주님의 역할이 뭐냐? 빌립보서 2장에 보면 나오지요. 빌립보서 2장 5절에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주님 쪽에서 인간을 다룹니다. 자기 성도를. 악마가 아담에 있는 인간의 마음을 다루었듯이 주님 쪽에서 자기백성의 마음을 다룹니다. “이 마음을 품으라.” 들어간다는 거지요.

5절에서 8절까지 보면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게 뭐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땅에 오는 경로에요. “이스라엘아, 주님이 지나가는 통로를 열어주어라.” 그 말입니다. 주님이 지나가는 통로. 구급차 지나가면 차들이 쫙 모세의 기적처럼 벌어지잖아요. 통로를 내주잖아요. 주님께서 통과하는 통로를 이스라엘은 자기배역을 통해서 봐야 되는 거예요.

가난한 자는 가난한 배역, 부한 자는 부한 배역을 보면서 그 가운데 누가 지나가는지를. 하나님의 언약이 지나가요. 약속이 지나간다고요. 그게 인간의 도리요 인간이 할 바 전부입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익을 봤다 손해를 봤다, 그런 것은 없어요.

그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하나의 통으로 보게 되면 이스라엘은 가난한 경험도 하게 하시고 자체적으로 가난한 자에게서 빼앗는 부자의 경험도 하게 하시는 거예요. 부자경험하고 가난한 경험을 하면서 어디까지 가느냐? 주님에게 통로를 내어주기 때문에 주님 통로의 다 이루심이 뭐냐 하면, 구약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신약에 와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거든요. 통로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신약에 와서 부한 것은 뭐고 가난한 것은 다 뭐냐? 그것은 환상이라는 겁니다. “인간이 부하다, 인간이 가난하다, 나는 가난하다, 그거 망상이야. 나는 부하다, 그것도 망상이야.” 둘 다 망상이에요. “나는 아예 없고 주께서 가난하게 하셨고 주께서 부하게 하셨다만 남아 있어라.” 그러면 내가 만약에 부자라면 “주님이여, 제가 부자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네가 부자로서 네 부자 됨 자체도 망상인 것을 보여줄 수가 있느냐?”를, 우리에게 그 점을 보여주도록 맡기는 거예요.

디모데전서 6장에 보면 17-19절에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이 역할을 하는 거예요. 부자역할을 하면서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줄 때 나는 부자이기 때문에 가난한 너에게 준다, 가 아니라 내가 부자라는 자체가 망상이기 때문에 이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너한테 주게 하신다. 왜? 나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이 땅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야고보서 5장 1, 2절에도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2.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부한 자들은 역할이 뭐냐 하면,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고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명품 있잖아요, 루이비통이라든지 그 옷을 입으면서 이 옷은 좀먹었으며, 집에 돈이 한 2백 5십억이 있잖아요, 그걸 보면서 통곡할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야고보서 5장대로.

미친 거 아닙니까? 물론 미쳤지요. 그런데 구약 이스라엘 신약의 성도들은요, 인간으로 해석될 수 없는, 인간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일이 퍼지는 거예요. 분명히 부자는 교만해야 되고 잘난 체해야 되는데 그게 아니에요. “도대체 이 집에 벤츠가 몇 대야, 대체……” 하고 통곡하는 거예요. 야고보서 5장 3절에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말세에 재물을 쌓는 역할을 하면서 통곡하는 겁니다. 참, 그런 통곡이나 한번 해봤으면 좋겠는데. 누가복음 12장도 마찬가지지요. 성경, 복음서나 설명할 때 이 세상은 환상이다, 나는 가짜다, 그거 하나만 알아도 성경해석 절로 돼요. 누가복음 12장 18절에 보면 어떤 농부가 농사가 너무 잘됐어요. 농사가 잘되는 것이 환상인 거예요. 환상인데 농사가 갑자기 잘됐다는 그 현장성에서 깜박 환상을 놓치고 이게 실재라고 본 거예요.

실재라고 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17-20절에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오늘날 이 신약시대에 자기성도를 만드시고 거기다 배역을 맡긴 거예요. 어떤 사람은 농사가 잘되는 배역을 맡았는데 배역이 어떤 배역이 있느냐 하면, ‘내 영혼아 걱정하지 마라. 우리는 평생 먹고 산다.’ 할 때 주께서 “이 어리석은 자여!” 라고 하는 거예요. 그 어리석은 역할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해 농사가 너무 잘되게 하시고 창고를 짓게 하신 거예요.

인생이 내 인생이라는 자체가 없어요.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 네 영혼 데려가면 누구것이 되겠느냐”라는 이 말씀을 내 입에서 고백하게 하는 겁니다. 농사가 너무 잘되었는데 농사 잘된 내가 누가복음 12장을 보고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농사 너무 잘 되었어. 내 영혼이 너무 기뻐, 라고 할 줄 알았지? 내 영혼아, 이 어리석은 나여, 망상이야. 그거 오늘밤 네 영혼 데려가면 누구 것이 되겠느냐?’

치킨 먹어가면서 돈은 있겠다. 뭐 치킨 시키고 자장면 시켜서 먹으면서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신앙생활 참 쉽지요, 잉! 누가복음 10장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방인이 지나가는데 강도만난 사람이 나타나요. 그럴 때 누가복음 10장 35절에 보면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사람은 부자는 아니지만 뭔가 줘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 그 현장성에 하나님이 맡은 그 배역, 연극에 저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의 역할을 맡았고, 나는 거기에 지나가는 역할 행인2, 또는 행인3을 맡은 거예요. 그런데 행인은 1, 2, 다 지나갔어요. 그 사람 역할이에요. 내 역할은 뭐냐? 행인3이 지나가면서 그 현장을 보니 눈에 어떤 사람이 띄는 거예요.

나에게는 현재 당장 조치할 돈만 있고 그래서 빨리 그 사람을 데려갔고, 그 사람을 돌볼 추가적인 돈은 지금 없으니까 여관주인한테 말하기를 “내가 다시 와서 모자라는 돈은 값을 테니까 돈 걱정하지 말고 치료해주세요.”라는 역할을 본인이 하는 거예요. 그리고 36절에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누가 이웃이 되겠느냐, 라는 이웃을 사랑하는 그 말씀의 역할을 주께서 하게 하신 겁니다. 신약에서는. 왜? 나는 없으니까, 주께서 시킨 배역이 있으니까, 내가 따로 독자적으로 악마의 마음을 먹어서 나는 나다, 이게 아니라 그냥 주님의 마음이 들어와서 주님이 여기 계시고 나는 그 역할을 맡을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말씀이 서슴없이 진행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구약은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 신명기 8장 12-1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이게 뭐냐 하면, 신명기는 광야 때거든요. 광야의 원리가 있어요. 광야의 원리는 다 거지에요. 모든 자가 다 거지에요. 새삼스럽게 가난이 없이 전부다 거지인데 그 거지 중에 누구도 거지냐 하면, 하나님마저 거지에요. 동행하시는 주의 이름마저 거지라고요. 그들이 약속의 땅에 가는 것이 아니에요. 그 거지왕초 되시는 하나님이 거지를 거쳐서 약속의 땅, 풍부한 땅에 가시는 거예요. 그 여정에 이스라엘이 동행하는 겁니다.

그 거지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언약이라 또는 약속이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약속의 땅에 가서 광야 때의 원리, 나는 거지라는 사실을 놓쳐버리면, 갑자기 우양이 번성하고 은금이 증식되면 이것은 거지 아니잖아요.

소유가 넉넉하고 번성할 때 두렵건대, 라는 말은 필시 광야 때 우리는 아무것도 없었고 가난의 바닥을 쳤다는 그 사실, 그게 우리 신분에 합당하다는 내 본심, 처참하게 진짜 죽음, 가난하다는 말은 죽었다는 뜻이에요, 그냥 죽은 상태, 시체에 불과했다, 주님이 시체를 질질 끌고 갔다, 70만 시체를 끌고 갔다, 왜, 매일같이 만나를 줬으니까, 죽은 자를 만나로 그냥 또 살리고 죽은 자를 또 살리는 식으로 끌고 갔다는 사실, 그 원리를 놓쳐버리면 그 다음에 뭘 놓치느냐?

신명기 8장 2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그러니까 19절에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

그러면 이방민족에게는 뭐가 없느냐 하면, 광야의 원리가 없어요. 인간이 누구냐 하는 사실, 인간은 죽은 시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그 내용이 이방신에게는 없다고요. 악마가 인간에게 마음을 줘가지고 악마의 마음이나 인간의 마음이나 똑같아요. 전부 다 악마가 인간이고 인간이 악마에요. 인간의 애비가 악마라는 말이지요.

아비가 자식을 낳잖아요. 악마의 자식이니까 자식이 누구를 닮겠어요? 아비인 악마를 닮지요. 악마란 뭐냐 하면, 독자적인 거예요. 나는 나로 인하여 사는 거예요. 살아보자, 살아보자, 가 사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독자적이니까, 자기가 최종적이니까 결국은 내가 누구의 종으로 산적이 없어요.

예수님께서 빌립보서 2장에서 하늘을 버리고 땅에 왔잖아요. 그 순서를 이스라엘을 통해서 역순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하늘의 영광을 가졌으나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져서 복종했다는 말은 아버지의 종으로 살았다는 그 말이거든요. 이사야에 내 기뻐하는 종이라고 했으니까. 이사야 42장 1절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주님은 아버지를 철저하게 따르는 종으로 살았고 이 땅에 와서 그걸 낮아지심으로 보여준 거예요. 주께서 하늘에 계시다 땅으로 낮아지는 그 순서를, 그 통로를 지금 망해가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역순으로 보여준다고요. 쉽게 말해서 바산의 암소가 된 것에 대해서 이스라엘 본인이 스스로 지적 못하는 것은 오히려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을 부러워한 거예요.

이것은 장차오실 메시아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도리어 가난한 자가 된다는 그 순서하고는 방향이 반대방향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반대방향을 먼저 보여줘요. 그리고 반대방향을 먼저 보여준다는 말은 가난한 자가 누가 되느냐 하면, 가난한 자의 편에 주님이 함께 있고 바산의 암소 사치의 극을 향하는 그 잘난 집 마나님 역할을 누가 하느냐 하면, 그 때는 북 이스라엘이 하는 거예요.

왜? 모든 관심사가 거기 가 있으니까. 출세하는데, 부자 되는데 가 있으니까. 그럴 때 가난한 자와 부자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느냐? 바로 학대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미리 연극으로, 드라마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 연극에 갈고리가 나오잖아요. 갈고리가 뭐냐 하면, 학대한 그 경로를 반대로 보여주는 것이 갈고리에요.

갈고리 딱 걸어서 질질 끈다는 것은 바로 네가, 그 잘난 체 하는 네가 가난한 자를 이런 식으로 갈고리에 걸어서 질질 끌고 다닌 그런 일을 네가 술 먹을 때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제가 아가씨들에게 말하곤 하거든요. 술 먹고 담배피우는 남자하고 결혼하지 말라고. 그게 뭐냐 하면, 독자적으로 자기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술 먹는 순간 자기가 누구의 종이 아니에요.

본인이 신이 되고 왕이 되고 주님이 돼요. 술(酒)을 먹으니 당연히 주(酒)가 되지요. 이러면, 내가 주인이면 자기는 종이 아니기 때문에 누굴 부리느냐 하면, 술 먹고 남들을 종으로 부리는 식으로 나가요. 그러면 방향이 높은 데서 낮은 곳을 바라보는 그 것만 머리에 들어와요. 그 현장성에서.

주님께서 가난한 자 편에 속해버리면 소위 부자 아니어도 부자 되겠다 하는 인간들 전부 다 예수님의 적이 되는 겁니다. 왜? 경로가, 방향성이 저 낮은 쪽으로 갈 마음이 아예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신약에서는 부자가 되든 술을 먹든 다 하나의 역할입니다. 이런 이야기하면 좋아할 사람이 있을 건데.

그게 다 역할인데 주여, 주님의 그 갈고리로서 나의 코를 꿰어서 저 지옥 같은 하르몬……, 하나님께 대들었던 자들을 다 쓰레기처럼 집어넣는 장소지요. 어디인지는 그 장소가 분명치 않지만 장소가 있어요. 높은 산 어디쯤 되겠지요. 그래서 “갈고리로 나를 인간취급 하지 말고 지옥 불에 넣는 역할이라도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충성! 술 먹자.”

술을 먹든 뭘 먹든 부자가 되든 괜찮아요. 이 역할이 주께서 나를 지금 갈고리로 잡아당겨서 “너는 지금 주님 가신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가니까, 너는 이런 욕을 얻어먹고 말로가 비참하게 된다 할지라도 네가 후회 없지? 후회 없습니다. 충성하겠습니다!” 이러면 된다고요.

왜? 어차피 그것은 역할이고 배역이고 환상이기 때문에. 오늘 설교가 너무 어려워서 여러분 이해 되시겠어요? 뭘 하고 뭘 안하고, 요령을 부리면서 빠질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어떤 역할이든 가난한 자 역할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가난한 자가 되면 사회에 대한 복수심이 강렬해져요. 보복심이. ‘너희들 때문에 나 망했다.’ 맨 날 남 탓으로 돌려요. 자기 게으름에 빠진 것은 생각 안하고.

공부 잘하는 애들 공부 열심히 할 때 공부 못하는 애들 왜 공부 못합니까? 맨 날 놀아. 방탄 소년단은 아무나 됩니까? 케이 팝이 어떻고 아이돌이 될 래, 하면서 드럼치고, 그런 소질이 있는 사람도 있으니까 내가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유명한 말씀 하셨어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죽었다, 나는 없다, 이게 심령이 가난한 거예요. 내 마음은 깨끗하다. 그게 심령이 가난한 것이 아니에요. 그냥 가난 자체가 죽음의 표현이에요. 죽음과 맞닿아 있으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마태복음 5장 39절 42절에 보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 말은 뭐냐? 네 것은 없다, 이 말이지요. 그냥 빼앗겨라, 그 말입니다. 오늘 본문 아모스 4장에서 가난한 자의 역할은 빼앗기는 역할 그리고 부자의 역할은 가난한 자의 것을 빼앗는 역할 역할이에요. 드라마에서 부자역할, 못된 역할, 한다 합시다.

그리고 어떤 역할은 맨 날 사기당하고, 부자에게 치이고, 억울함 당하고. 드라마 초반기, 원래 선악구조로 되어 있는 드라마 초반기에는 선한 사람이 당해도 얼마나 당합니까? 딸이 억울함을 당하니까 아버지가 신고하러 가는데 부자재벌집이 부리는 깡패들 시켜서 인천 송도 넓은 도로에서 트럭에 받혀서 죽게 만들었잖아요. 운전사는 해외로 튀어버리고.

빼앗기는 것이 역할이라고요. 역할인데 다른 사람 보기에는 “저 나쁜 인간 안 돼.” 하지만 “오늘 촬영 끝났습니다.” 하면 둘이 싸웁니까? “선배님, 오늘 연기 너무 좋았어요. 때릴 때 확실하게 때려주세요.” 이렇게 한다는 말이지요. 이 세상은 하나의 역할이에요. 그래서 이 본문은,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이 있고 좋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역할이 있어요.

좋은 역할 한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나쁜 역할 한다고 지옥 가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의 역할로 봐야 돼요. 그게 뭐냐? 주의 종입니다. 오늘날 성도가 세상을, 이 현장성이라는 하나님이 주신 이 드라마속의 현장 이 자체가 망상이라는 사실, 망상이지만 이 망상에 충실해야 돼요.

왜? 우리 자체도 망상이기 때문에. 망상은 망상에 충실해야 되고 실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로, 그런 현장에서 통과하는 하나님 이면서도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한 그 통과하신 주님을 보여주는 것 이게 실재입니다. 이게 유일한 실재에요. 우리는 그의 들러리고.

그분이 지나가는 여파, 바람 부는 것, 그분이 지나가는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우리는 각자 맡은 역할이 있지요. 성경에서 부자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 나오는 것 받지요. 그 때 집안이 가난한 사람 같으면 ‘이것은 나에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고……’ 이러지 마세요.

성경에서 자기에게 해당 안 되는 사항이 어디 있어요? ‘내가 뭐 부자도 아닌데……’ 아니에요. 부자를 지향하는 그 자체가 이미 심령이 가난한 것이 아니에요. 부자에요. 그래서 심령이 부자 되기를 원하거든 부자 되세요. 되고서 갈고리에 꿰어서 끌릴 때 “충성! 갈고리에 끌리겠습니다.” 할 때 그 사람을 통해서 아모스 4장 1-4절이 발현되고 있는 겁니다. 말씀이 나에게서 나오는 거예요.

그 가운데는 뭐냐? 말씀 되신 주님이 우리 자신을 통과하고 있는 겁니다. 어떤 일도 자기 행한 것으로 나는 정당하다는 것을 주께서는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부자가 되면 왜 그리 건방집니까? 언약이 없을 경우에는, 광야의 원리가 빠져버리면 부자 되는 것을 나의 의가 부자 될 만큼 충분하기 때문에, 합당하기에 복 주셔서 부자 된 것으로 착각하는 거예요.

부자가 얼마나 위험해요. 반대로 가난한 사람은 왜 가난하냐? 내가 나쁜 짓을 해서 가난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것도 굉장히 위험하지요. 이러나저러나 인간들은 언약이 없어버리면, 광야의 원리가 없으면, 나는 처음부터 죽은 자라는 원리가 없어버리면 이것은 마치 나로 모든 의미가 종결되는 것처럼 그렇게 되어버려요.

저는 그걸 ‘최종성의 과열’이라 하는데 자기를 마지막의 과열로 여기고 자꾸 성경말씀을 모방하려고 해요. 성경말씀이 나오는 주님이 하시는 일을 본인이 하겠다고 표절을 해버려요. 그런 가짜는 주님 앞에 안 통합니다.

울산에 그런 게 많은데 울산에 가게 되면 바위조형물을 만드는데 예산이 없었는지 시멘트로 바위를 해놓았는데 색깔로 폼만 내고서 비 오니까 색이 다 지워져서 이게 엉망이거든요. 내가 광야에 있고, 나는 이미 죽은 몸이고, 말씀이지요, 매일의 말씀이 나오도록 살린다는 이 광야의 원리를 놓쳐버리면 우리는 가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어떤 역할을 주든지 간에 그저 약속된 말씀만 나타나고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7강-암 4장 1-3절(주님의통로)201014-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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