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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7 13:52:22 조회 : 24         
안양20201008a슥3장8절(지정과 고정)-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175.212.135.128)
안양20201008a슥3장8절(지정과 고정)-이 근호 목사

스가랴3장, 지난시간에는 제사장과 여호수아를 연결시켰습니다. 여기 3장1절에 보면,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이렇게 되어있지요. 그런데 그 여호수아 대제사장의 의미는 뭐냐, 옷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옷을 벗기라 하고 다시 입혔습니다. 이것을 이렇게 생각하시면 오늘 강의가 굉장히 쉬워져요. 최종자리. 또는 앞에다가 나의 최종자리로 붙어도 괜찮고. 최종자리는 옷 바꿔치는 자리. 이게 최종자리에요. 우리가 갈 수 있는 최종자리는 옷을 바꾸는 자리에요.

그러면 이 옷 바꾸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냐는 것은 무엇과 대비가 되느냐 하면 악마와 대비가 됩니다. 악마에는 하나님이 친히 입혀주는 옷이 없습니다. 악마는 그냥 있는 자기에게 있는 그 모습 그대로 그게 최종자리에요. 최종자리. 그런데 여호수아는 최종자리가 옷을 바꿔치기하는 그 하나님의 행하심이 담겨있는 자리가 최종자리, 마지막 자리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자리까지 이르는 옷은 더러웠지요. 이게 마지막 가는 자리까지 이어지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자아의 자리에요. 자아의 자리, 나. 내가 나에게 최종 됨으로서 우리는 최종자리를 가리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내가 나로 계속가면서 그동안 이 세상에서 입었던 우리의 옷이라는 것은 나를 대체하거든요. 나 자신을 표현하는 거죠. 옷은 자아표현형. 나를 표현하는 용도입니다.

그런데 이게 뭐냐 하면 더럽고 추잡하다, 이 말은 곧 내 자아가 나라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추잡하고 더럽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옷이 그렇게 내 자신을 가지고 있는 나를 대표하는 그 나가 더럽다면 여기서 나오는 인간이 하는 모든 해석이죠. 인간의 모든 말이나 세상을 보는 그 해석 자체가 더럽다가 돼요. 이건 하나님께서 받아주지 않는 더러운 해석이 되는 겁니다. 어쩠든 간에 이 여호수아에게는 최종자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옷을 친히 바꿔주는 자리, 그 자리가 됩니다.

오늘 본문 한 번 봅시다. 지금 옷을 입은 상태에요. 옷을 바꿔 입은 상태입니다. 8절에 보게 되면.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그렇게 되어있지요. 계속해서 옷을 입혀 놓고 옷 자체가 역사 속에서 쫙 펼쳐지게 돼요. 옷의 갖고 있는 의미가. 옷이 펼쳐지게 되면 여기에 하나님이 바꿔준 옷과 대제사장 입는 옷과 자아사이가 이렇게 벌어지게 돼요. 분리됩니다.

그러면 이건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이렇게 하면 돼요. 표현은 어렵지만, 들어보면 여러분이 아~ 그 뜻이구나! 아는 겁니다. “나는 나의 개념 외에 있다.” 외부에 있다. “나는 나의 개념 외부에 있다.” 가 이제부터 여호수아의 역사를 따라 가게 돼요. 여기에 ‘나는’와 ‘나의 개념’이 달라집니다. 나는 그냥 나가 있는 거고, 나라는 개념은 이건 뭘 하느냐 하면 최종자리, 인간은 더 이상 갈 수 없는 최종자리가 무슨 자리냐 하면 여호와 앞에 가요. 여호와 앞에 가서, 최종자리에서 아까 무슨 일이 일어났지요? 여기서 옷 바꿔치기가 일어났지요.

그러면 나는 그동안 더러운 옷이 뭐냐 하면 대제사장 옷입니다. 대제사장옷과 나는 그동안 일치가 된 거예요. 여호수아가 일치됐는데. 최종자리에 가보니까 그 옷 벗으라는 거예요. 그 옷 벗어라. 그러면 나와 이 제사장 옷이 일치와 합치가 됐는데 이걸 하나님께서 더럽다고 이야기한다면 그동안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주신 이 나라는 개념. 나라는 개념과 나는 이게 처음부터 이건 합치될 수 없고 떨어져야 된다는 사실이 드러나지요. 그걸 주일날 설교에서 밀어낸다고 이야기했는데 나와 내 개념이 이게 꾸준히 떨어져 있어야 돼요. 떨어져 있다는 것은 우리한테는 정말 복된 소식입니다.

왜냐 하면 더 이상 내가 나에 대해서 신경 안 써도 되기 때문에. 나는 주님이 주신 개념 바깥에 외부에 있기 때문에 어차피 떨어져 나가야 돼요. 그러면 옷 바꿔치기를 여러분이 아는 용어로 바꾸겠습니다. 이것이 뭐냐, 약속이에요.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약속이라고요. 약속이 나라는 못난 인간을 통해서 나의 약속된 개념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나를 통해서.

그러면 그 과정에서 나의 역할은 뭐냐, 떨어졌다. 나는 그 개념과 상관없어. 외부에서만 계속 발설하면 돼요. 굉장히 이건 쉬운 겁니다. 더 쉽게 얘기해서 인간은 해낼 수 있는 어떤 해석도 하나님이 거부한다.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어떤 해석도. 진정한 이 세상의 신학자 같으면 유일한 신학자는 누구냐, 악마입니다. 악마만 신학자에요. 왜냐하면 신학자는 신학 자체가 나를 고수하려하거든요. 나를 지키려고 하니까 성경 모든 개념을 나와 안 떨어지려고 하는 거예요. 모든 개념을.

구원, 천국, 율법, 좋다는 것은 ‘그거 내가 해야 돼!’ ‘내거 해야 돼!’ 약속. ‘아~ 그 약속 내거 만들어야 돼!’ 그렇게 생각하면 악마의 사고방식에서는 주께서는 친히 바꿔치기 한다는 개념이 스며들 수가 없어요. 바꿔치기 하는 개념이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이걸 뭐라고 함축해서 하느냐 하면 이걸 함축하면 이렇게 됩니다. ‘나의 동질성에는 기억이 무능하다.’ 나의 동질성, 내가 나답게 하는 데서의 나의 지난 과거는 아무 힘도 못써요. 무능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이 말은 달리 하면 내가 견고해질 필요가 없다. 내가 견고해질 필요가 없는 거예요.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할까요. 나는 나의 보호가 필요치 않다. 이게 바로 복음 아닙니까. 이게 바로 복음이거든요. 내가 나를 보호할 필요가 없어요. 무엇 때문에? 최종의 자리 때문에. 그래서 이 개념은 어디서 나오는가, 오늘 제목 나갑니다. 이 모든 개념에서 나오는 건 뭐냐 하면, 자리. 자리에요. 자리인데, 이 자리라는 제목보다도 요걸 바꾸겠습니다. 뭐로 바꾸느냐 하면 ‘지정과 고정’ 지정과 고정.

고정은 내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내가 견고해지기 위해서 나의 기억의 뭉치로서 지난번 나와, 나와 일치되기 위해서 세상 모든 것이 좋은 것들이 다 내 것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기 위해서는 내가 한 장소에 고정되어야 되는 거예요. 고정. 그런데 고정된 것은 주께서 고정된 것은 바꿔치기가 없기 때문에 요건 누구와 최종 만나느냐 하면 악마와 한패인 것이 나중에 들통이 나요. 악마와 한패.

악마는 바꿔치기가 없어요. “그냥 가! 니 잘났잖아. 니 잘할 수 있잖아. 기도 잘 하되. 니 선교 잘해. 그냥 가!” 바꿔치기가 없어요. “그래야 니가 살아. 니 행함이 니를 살리는 거야. 너의 행함이 너를 살리는 거야. 기도하면 복 받고 기도 안하면 니는 작살났어. 끝났어. 하나님의 십자가? 그거 니가 믿으라고 한 거야. 니가 믿으면 니가 살고, 안 믿으면 니가 죽는 거야.” 모든 개념, 모든 성경 개념은 나와 합치시키기 위해서 그걸 통해서 내가 견고해지고 나의 모든 행했던 모든 업적과 기억들이 나와 이 개념과 동질시 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던 거. 그걸 통해서 내가 노리는 것은 뭐냐, 나는 나를 보호해서 그것이 나의 영원한 자리. 자리도 두 종류가 있지요. 하나는 지정된 자리와 고정된 자리인데, 고정된 자리에 묶여버립니다.

요 고정된 자리가 마지막 누굴 만나느냐, 하나님의 여호와의 회의 앞에 여호수아 맞은편에 쪽으로 가요. 여호수아 맞은편에 쪽으로. 제가 언제 설교할 땐가 했지요. 해운대역 지하철 엉뚱한데 나왔다고요. 자기는 해운대역 쪽으로 나온다고 보니까 나와 보니까 해운대역 맞은편에 나왔어요. 여호수아 맞은편에 누가 있습니까? 악마. 악마와 만나요. 결국 악마와 단짝인 것이 비로소 노출이 된 겁니다.

내가 나를 구원하려는 것이 이게 악마가 배후에서 시킨 일을 내가 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나를 보호하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하나, 노출되면 되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자리는 뭐냐 고정된 자리가 아니고 주님의 바꿔치기로 인하여 주어진 지정된 장소지요. 고정된 장소가 아니고. 고정은 내가 결정한 장소, 내가 영원하고 싶어 있는 장소는 고정된 장소고. 주께서 오늘 여기 살아라. 오늘 경기도 살아라. 서울 살아라. 이렇게 지정해 줄 때는 그 풍경이 그렇게 슬프지 않습니다.

참, 남자들이 가을되면 굉장히 가을을 좋아하고, 여자는 봄을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우스개소리로 이런 농담도 있어요. 여자들은 주로 봄에 결혼하고 남자들은 주로 가을에 결혼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데. 가을되면 왜 쓸쓸해지는 이유냐 하면 그 풍경이 그 풍경이라서 그래요. 나무 있다고 숲 있다고 좋다고 와보지만 몇 개월 안가서 지루한 일상을 반복되는 풍경이라고 하는데 새로움이 없는 풍경. 새로움이 없는 풍경에서는 굉장히 위험스럽게 되지요. 왜? 또 새로운 걸 하려면 모험이 필요하고, 특히 남자들은 직장 때려치우는 이유가 똑같은 풍경이기 때문에 그래요. 학교 가기 싫은 아이들이 월요일이 되면 월요병 걸려서 꾸리해가지고 학교 언제 졸업하느냐고, 언제 청소년길 끝나느냐 그것만 생각하듯이 학교 가듯이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새로운 것이 없으면 살맛이 없어요. 새로운 거. 그래서 교회의 목회자들은 프로그램을 왜 자꾸 짜내는 이유가 뭐냐 하면 교회 다니기가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서 그 교회 발목 잡기위해서 그렇게 해요. 그거 못하면 목회자로서 장로한테 잘립니다. 계속 이벤트에 프로그램을 돌리고, 돌리고, 계속 돌리고, 돌리고. 1년 내내 돌아가는 거예요. 내내.

특히 서구 독일이나 프랑스나 이태리나 그런 데는 일 년 내내 성자들의 축일, 생일, 그런 것을 계속해서 놀고 또 놀고. 또 놀고. 카렌더 자체가 아주 성경 내용으로 꽉 차있어 가지고 계속 돌려가지고 기독교 문화를 계속 지속하려는 그 수법처럼. 교회가 그 시도를 하고, 교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그거 다 따라가면 자기가 하나님을 만날 줄 아는데, 하나님까지는 가는데 누구와 만나느냐, 악마와 만나요. “반갑다 친구야! 잘 왔다. 그동안 니가 한 일은 내가 다 시킨 거야.” 성경개념과 나를 일치시키는 거예요. 합체 시키는 것.

그러면 이 새로운 개념은 어떻게 되느냐, 이제부터는 어렵습니다. 이건 아셔야겠어요. 제목은 지정과 고정입니다. 하나님이 지정한 곳은 거기에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을 할당받기 때문에, 배급받기 때문에 지금 있는 풍경이 나를 위한 풍경이 아니고 나를 노출시키는 풍경이 돼요.

성경을 찾아보고 좀 더 어려운 이야기를 해봅시다. 누가복음24장26절에서 27절.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이 말씀이 뭐가 어려우냐 하면 하나의 개인이 있고 하나의 개인이 있다면, 그 사람 이야기는 그 사람에 해당되는 이야기만 우리가 들려질 때, 이게 상식적이지요.

그러나 시편이야기, 그리고 모세 율법이야기, 선지자 스가랴, 호세아, 아모스, 모든 이야기가 한 인간에게 다 담긴다는 것이 이게 믿을 수가 있느냐, 본인이 경험하고 본인이 체험했으면 당신 한 이야기만 하라고. 어떻게 저 미국에 있는 일이 당신에 관한 이야기야?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하지 마. 전 세계 아프리카에 있는 일이 나와 연루되어 있어. 이게 구라지요. 이건 말도 안 되거든요. 인간세계에서.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파리가 나는 거, 들풀이 꽃피는 거, 전부 다 예수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를 다 담고 다 거기다가 소급시키고 거기다가 다 함축시킨다는 게 인간세계에서의 논리로서는 이건 터무니없는 거예요. 어처구니없는 거죠. 왜 그렇게 하시는가 이 말이죠. 모세는 모세 이야기뿐이지. 어떻게 모세 이야기가 당신이야기고, 아브라함 이야기가 당신 이야기고 이삭이 어떻게 당신 이야기냐. 그건 말도 안 된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했지만 인간의 모든 해석은 거부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해석은 거부하는 게 본인이 세상을 보는 풍경을 보는 것처럼 예수님도 그렇게 대해버리면 이게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맞은편에 서요. 자, 여기 하나님이 계십니다. 여기 악마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악마를 만드셨습니다. 그 맞은편에 누가 있었습니까? 맞은편에 여호수아가 있지요. 악마가 여호수아가 부러워서 하나 되자. 이렇게 제안했습니까? 아니면 고소했습니까? 고소했지요. 여기에 고소가 들어오고 고발이 들어왔어요. 더럽다고. 욥기에 보면 나오지요. 욥을 고소한 것처럼. 고소, 고발했다는 말은 결코 하나 될 마음이 전혀 없다 이 말이죠.

니는 니 쪽에서 나는 나 쪽에서 서로 마주보자는 겁니다. 악마의 제안이. 악마가 보기에는 여호수아는 개인이에요. 하나의 개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옷을 입히는 순간 거기서 개체가 여기는 여기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스가랴3장 8절에 보면,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 내 종 순을 나게 한다는 거예요. 여기서 어떤 생산이 일어나는 거예요. 여호수아에게 입힌 옷에서, 옷을 주신 그 약속에서 어떤 분이 생산되는 거예요.

생산되어버리면 이 분에 의해서 그 전에 일어났던 모든 시편과 모든 예언, 율법, 선지자의 모든 예언이 이 새로 생산되는 전적으로 전부다 이게 다 쏠리게 되어있어요. 몰리게 되어있다고요. 이게.

하나님께서는 최종자리에서는 누구 편을 드느냐, 여호수아 편을 들었어요. 여호수아가 훌륭한 게 아닙니다. 여호수아는 더러워요. 더러우니까 악마의 고소대상이 된 겁니다. 우리가 성도가 되었으면 남이 우리를 고소할 때 고마워해야 돼요. “그래, 니가 고소할만해. 그래 니가 보듯이 내가 어설프기 짝이 없어. 니가 보기에는 내가 허점투성이지. 바로 그거야. 내가 허점투성이인 거 맞아.” 악마는 여호수아 앞에서 타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이 여호수아하고 타인이 아니고 여호수아 안에 약속이 스며들어와 버려요. 이건 동질입니다. 타인이 아니고 새로운 나로서 치고 들어온 거예요. 내가 있는데 이거 말고 새로운 개념의 나가 나를 대신하는 나. 나를 대신했던 나. 약속을 담은 새로운 나가 나의 자리에 치고 들어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외형적으로 그걸 나라고 주님께서 나라고 지칭하는 겁니다. 아~ 정말 이건 신비로워요. 그러면 이걸 더 쉽게 이야기해서 차고 들어온 걸 약속이니까 이걸 뭐라고 하느냐, 무한으로 보는 거예요. 그리고 나는 어설픈 개인이니까 유한으로 보자 이 말이지요. 유한 속에 뭐가 들어온다? 무한이 들어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이걸 알게 된 거예요. 나는 유한한데, 무한이 들어오게 된 겁니다. 사도행전9장7절에 보면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분명히 사울이란 사람은 주님하고 대화를 했어요. 대화를 했다고요. 대화를 했는데 말을 주고받았는데 같이 가던 동행들은 그냥 천둥소리 정도, 소리만 듣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말도 안 들린 거예요. 같은 인간인데 왜 다르지요. 같은 인간인데.

하나는 자기 자리가 고정돼 있고, 또 한 쪽은 사울에게는 성령을 통해서 고정된 자리가 아니라 지정된 자리가 되고. 나는 고정된 자리를 고수해요. 내 안에 쓱 들어온 주님은 나로 하여금 잠시 있다가 가는 지정된 자리로서 전환시켜버린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나를 표현하고 나를 나타내고 나를 증거 하는 그런 인생이 아니고, 약속을 증거 하는 사람으로 달라집니다.

그런데 그러한 약속은 뭐를 반복하느냐, 옷을 벗기고 다시 새 옷으로 갈아입는 사건의 반복으로서 계속 매일같이 또는 그냥 그것이 계속 반복하는 거예요. 보통 인간의 나라 하는 것은 악마는 유일한 신학자니까 신학자들이 추구하는 것은 뭐냐 하면 최상급이에요. 최상급. 최상급인 반면에 성령 받은 것은 초월입니다. 이걸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게 보면 돼요.

작곡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곡자는? 베토벤이다. 베토벤 좋아하는 사람들은 되게 좋아할 거예요. 최고의 작곡자는 베토벤이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다른 작곡자다. 어느 게 높습니까? 다른 작곡자지요. 우리 나이 때에 한창 20대 때에 심심해서 막 싸우는 게 있어요. 나훈아냐, 남진이냐, 전라도 남진, 경상도 나훈아. 여학교에서는 서로 팬클럽하고요, 서로 싸우고 난리도 아니에요. 핑클이냐, 쿨이냐, 그런 거 있잖아요. 하는 것처럼. 라이벌 의식이 되어야 그 반복적인 학창시절이 심심하지 않습니다. 싸우는 가운데서.

최고라는 것은 인간의 해석 범위 안에 들어가요. 최고. 그리고 그 최고는 나와 연속되어있어요. 끊어지지 않고 있어요. 나도 노력하면 되는 것이 최고입니다. 그러나 그 선을 훌쩍 넘어가 버리면 그건 초월이지요. 이건 인간일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동행자와 같이 가면서 하나님께서 배려해가지고 동행해 가지고 알아들으면 되는데 다른 사람은 배제시키고 사울에게만 하나님과 대화해버린 겁니다. 십자가 질 때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십자가 옆에 하나만 있는 게 아니고 두 개, 세 개였지요. 세 개인데 같은 강도들 다 구원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한쪽은 건지시고 한쪽은 버리시는 이유가 예수님 자신이 이 세상과 초월되어있다는 것을 두 강도의 비교로 표현하려고 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그 비교가 반복해서 악마 쪽이냐, 그리고 하나님의 여호수아 쪽이냐, 요 간격. 요 차이를 이걸 여호수아만 그런 게 아니고 요건 사건이니까 약속은 사건으로 구성되어있어요. 요 사건을 그대로 우리에게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평소에 뭘 생각하느냐 하면 악마 쪽에 속해요. “나는 나다. 나만 보호하고 나만 챙기면 그만이야.” 라고 하지요.

그러면 여기 이제 주님께서 사건을 주게 되면 나 말고 나는 나의 잘남 덩어리 나에서 뭐로 전환되느냐 하면 주님이 구성한 사건에 의해서 나의 잘남 덩어리가 아니고 약속 덩어리. 약속덩어리로서 내가 되는 겁니다. 약속덩어리에 대해서 때가 되게 되면 이 약속은 나중에 마지막 때에 어떤 모습이 되느냐 하면, 어떤 모습으로 변형되느냐 하면, 약속이 인물이 됩니다. 사람이 돼요. 말씀이 육신이 된다고요.

사람이 육신이 되어버리면 나있을 때, 나는 남하고 타인하고 무슨 관계냐 하면 나와 타인은 나는 나고 타인은 타인이기 때문에 어떤 관계냐, 말의 관계에요. 언젠가 설교할 때 했지요. 말의 관계에요. 어떤 말을 해도 내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나의 정당성을 지켜내기 위해서 우리는 하는 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말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좋은 건 다 들어있어요. 십자가, 언약, 피, 하나님의 천국, 다 들어있는데 그렇게 하는 의도가 뭐냐, 내가 나의 가치를 고수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우리가 지난 강남모임일 때 악마가 말씀을 사용하는 걸 봤지요. 시편91편 그 말씀을 사용해요. 예수님한테 말씀가지고 하는 거 봤지요. 그 악마가 계속해서 교회 다니면서 말씀을 사용해가지고 그 말씀이 결국 어디로 나중에 최종 도착하느냐 하면 주님이 주신 지정된 자리가 아니고 고정된 자리로 와요. 나의 자리로 온다고요.

“그러니까 내 신앙이 맞잖아. 신앙이 맞는다고 박수쳐주고 인정해줘. 서로 서로 인정할 때 우리는 교회가 되는 거야.” 그런데 서로라 하는 것은 이건 하나일까요? 나와 타인과의 관계일까요? 서로가 서로에게 타인관계에요. 절대로 하나 되기 싫어. 하나가 되기를 싫은 거예요. 밀고 들어오잖아요. 밀어버립니다. 밀고 들어오면 타인을 밀어버려요. 요기까지. 넘어오지 마세요. 화낼 거예요. 요기까지. 여기까지 한계에요. 나, 신자 맞으니까.

그래서 이걸 가지고 어떤 철학자 표현에 의하면 이걸 아주 멋진 표현을 했어요. ‘뒤로 물러서기’ 공격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공격하면서도 하는 행위 자체가 나를 뒤로 빼돌리는 거예요. 자꾸 뒤로 빼돌리는 거예요.

초등학교 때 학우끼리 싸움하는데 갑자기 여기에 6학년 형이 딱 등장했다 말이죠. “어이, 너희들 뭐하는데?” 오게 되면 동생은 갑자기 어디로 갑니까? 뒤로 숨지요. 형은 앞장세우고 지는 뒤로 숨어버리지요. 뒤로 숨는 행위에요. 내가 그동안 모아놓은 모든 성경지식 뒤에 나를 숨겨버리는 겁니다. 그 성성지식이 얼마나 추잡하고 더러운 옷인지를 모르고. 특히 목사들이 이런 짓을 많이 하지요. 목사들이. 성경지식 앞에다가 뒤로 숨는 거예요.

그러나 목사들의 가르침은 뭐냐 하면 김유성이가 이야기한 것처럼 “니는 나처럼 하면 1주일하면 컴퓨터 뗀다.” 하는 것처럼 연속성을 제공해요. 연속성. 연속성을. 이건 나도 공부를 하니까 알아듣더라. 계속 연속성을 추가해가지고 나는 가르치는 자의 배운 자가 종속되게 만들어버리지요. 종속.

그런데 교인들이 목사한테 종속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타고났으니까. 어떤 아무리 도와줘도 고맙다는 소리를 하지만, 여전히 나는 나지요. 타인관계를 이용가치가 있는 한도 내에서는 거리를 두면서 요새 사회적 거리두기 많이 하잖아요. 밀고 당기는 그런 사랑싸움처럼. 밀고 당기는 그런 사이지. 상대방에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 나는 나를 보호하니까. 나는 나를 보호하는 것에 반대 격이 뭐냐 하면 말이 아니고 말씀이 되는 거죠.

말씀은 우리보고 뭘 하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악마와 같이 있음을 노출시키는 겁니다. “목사님 신앙생활 어떻게 할까요?” 사람 말 앞에 노출하지 말고 말씀에 노출하면 돼요. 사람 대 사람관계 따지지 말고 주님 십자가 앞에서 나를 날마다 노출시키는 작업이, 약속 앞에 노출시키는 그 작업이 오늘 본문에 여호수아가 해야 될 일이에요.

그래야 여호수아가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이런 사건이 있었다. 너희들은 모르지? 마지막 최종 자리는 여호와 앞에 설 때에 맞은편에 악마 있더라. 내가 봤다. 나도 악마와 한통속이었는데 주께서 친히 놀랍게도 옷을 갈아입혀줬더라. 내가 자랑할 것은 이 옷밖에 없어. 이 옷이 나의 전부야. 나는 옷을 위해서 나는 이제부터 옷을 벗긴 사건을 증거 하는 증거자야. 라는 최종이야기를 스가랴가 지금 외치고 있는 거예요.

마지막 오실 여호수아는 곧 순이 되고, 환상이니까. 사실 십자가는 육신이 오기 전에는 환상이잖아요. 십자가가 막상 떠버리면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버리면 세상 자체가 교회가 환상이고 가정이 환상이에요. 실제는 뭐냐, 십자가만이 실제고, 유일한 실제로서 십자가고, 나머지는 전부 다 환상입니다. 왜냐 하면 마지막에는 십자가로 전부 다 쏠리기 때문에. 그게 예언대로 되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까지 한 거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마지막 자리가 우리가 죽어서 만나는 게 아니고 마지막 자리가 순으로, 종으로서, 이미 마지막이 돌아다니는 거예요. 마지막에 돌아다니는 거예요. 이것을 이렇게 이해하시면 쉽습니다. 쉽다는 것을 반복하는데. 모든 시편과 모든 선지자의 글과 율법이 예수님의 한 분한테 다 담긴다. 라는 사실을 인간의 힘으로서는 안돼요. 그런데 여기에 뭐냐 하면 카이로스라고 하는데. 카이로스. 역사가 이렇게 가게 되면 위에서부터 한 점을 형성하면서 순간적으로 모든 진리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걸 카이로스라 해요. 우리말로 하면 때가 되매. 성경에 때가 되매. 그 타이밍이 되매. 타이밍 안에 모든 진리가 한꺼번에 다 쏟아져요. 모든 걸 안다는 뜻이 아니고 모든 진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가지고 그 다음부터는 나의 운명이 전에 내가 알던 운명이 아니고 강제로 강제조치를 당한 겁니다.

그러면 이 자리는 누구 자리이냐 하면, 주님이 카이로스 말씀이 찾아올 때는, 성령이 찾아올 때는, 이건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고 누적된 시간의 중첩에 의해서 양이 질로서 도약되는 게 아니고, 그건 마르크스의 유물론이고, 양이 많아지면 그게 결국은 질이 바뀐다는 거예요. 종이학을 천 번을 접으면 뭐가 됩니까? 학이 됩니까? 그렇게 된다는 게 마르크스의 이론이에요. 마르크스 공산당 이론이라니까요. 공산주의 이론이에요.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풍경이 똑같아요. 행여나, 행여나, 행여나, 하다가 나이 60되고, 70돼요. 아무 변동 없어요. 그날이 그날이고, 그 인간이 그 인간이고. 주변의 친구들은 점점 죽고, 나도 죽어가고 있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낯설지 아니하고 점점 낯설지 않아요. 왜? 전부 나이대가 비슷하니까. 내가 고등학교 나왔는데 자살한 아이가 있는데. “자살해? 그 나이에.” 하는데 우리는 약간 지연된 자살이지. 결국은 우리는 다 죽잖아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성경은 예수님의 한분에 십자가, 또는 한 분의 말씀이 육신이 되면서 다 이루었는데 우리는 그 내용을 가만히 있어서 지속으로 모르고 이제는 그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그 지식이 우리를 하나의 마이크로 사용해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퍼트리게 되는 거예요. 어떤 과정을 통해서? 나는 악마 편이었다, 라는 고백을 통해서. 편이었다고 과거완료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악마 편이었어. 나는 나밖에 몰랐었었어. 모자라면 열 댓 개 더 붙이던지. 나는 나밖에 몰랐었었고. 내일도 그랬어야 될 걸. 왜냐하면 지나간 모든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어디까지나 이건 주님보시기에 진리 앞에서는 이미 전부 다 완료된 것이기 때문에.

제일 어려운 이야기죠. 앞으로 2050년도도 완료된 거예요. 이미 지나간 거예요. 왜? 초월의 입장에서는 백날 시간이 흘러봐야 그건 어차피 완료에 소급될 거니까. 이 주님의 말씀과 결국 마지막에 수평선이 결국 만나거든요. 모든 시간은 주님 몸에서 나왔다가 낚시대 돌리듯이 둘둘 감아서 주님 몸으로 전부 다 시간과 공간을 다 데리고 오는 거예요. 그러면 파리 잡는 거 찍찍이죠. 찍찍이가 한 5미터짜리가 있다 합시다. 더럽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거기다가 둘둘 감아버리면 그 찍찍이의 표면이 두루마리처럼 감겨가지고는 주님한테 오는 거예요.

그럼 애초부터 파리 잡는 찍찍이는 주님 몸에서 나왔다고 보면 돼요. 그게 요한계시록에 두루마리를 누가 떼느냐 하는 겁니다. 그 봉인된 초로 파라핀으로 한 옛날 편지는 비밀 편지는 파라핀이 딱 떨어져야 그 안의 내용을 알 수 있거든요. 하나님의 그 날아가는 두루마리는 요한계시록 이야기는 그 전에 스가랴에서 다 나온 이야기에요. 스가랴에 보면 나옵니다.

하늘로 전국을 다 날아다니는 그 두루마리 하나님의 말씀이 결국은 그게 나중에 공기가 되어버리면 전부 다 예수님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의 했던 약속임을, 약속의 최종자임을 알리기 위한 세상의 시간 편성이 방송국 프로그램 시간편성이 다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수요일날 예를 들면서 컴퓨터 옛날 고전 게임에 보면 또르르, 또르르 해가지고 가서 500점, 300점, 톡 뛰어가지고 200점, 온 구석 구석 다 돌아다녀요. 로봇청소기처럼. 온 구석을 지가 알라서 충전하고 지가 알아서 돌아서고 다 돌아다니듯이. 이 스가랴에 나온 이야기에요. 천사 4명이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전부 다 샅샅이 어디로 회수하느냐 이 모든 것은 바로 여호수아. 여호수아가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에요. 합체하면.

예수 그리스도, 여호수아를 위해서 했다. 최종자리에서 예수님은 죄가 있지만, 주께서 의로 바꿔버린 거예요. 그것이 스가랴를 통해서 알려진 최종 마지막 드러난 진리 그 자체입니다. 죄를 의로 바꾸는 작업을 하나님께서 아들과 더불어서 창세전에 이미 기획하신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 약속이 말씀이 되었으면 예수님이 로봇청소기라. 예수님이 로봇청소기인데 그 로봇청소기 기능이 성령을 통해서 오늘날 성도한테 와버리면 성도가 로봇청소기에요.

나는 여기 산다, 가 고정된 자리가 안 되고, 주께서는 또 일이 있어가지고 저쪽 전라도 가서 살아라, 하면 그게 또 지정된 장소고. 강원도가라 하면 그거 또 지정된 장소고. 고정된 장소가 되어버리면 이건 나 자신이 표현이 돼요. 나는 이 동네에서 이렇게 살다 이렇게 죽는다. 자기 자신을 증거 하게 되지만, 지정된 장소 같으면 내가 이 동네 살 이유가 없는데 주께서 이 동네에 파견근무 시켰어. 이렇게 되어버린다고요. 그러니 인생을 살 때, 고정적으로 살거냐, 지정된 것으로 살거냐, 지정된 사람은 주와 하늘나라와 연결된 사람이고, 약속과 연결된 사람이고, 고정된 사람은 이거 뭐 하나님 만나기를 마음이 별로 땡기지 않고 나는 나대로 살래.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추가적인 하나님의 바꿔치기를 나는 원치 않습니다. 이게 내 생각입니다.’ 자기 생각인 줄 알았더니만 스가랴에 보니까 누구 생각이냐 하면, 악마의 생각이에요. “나는 이대로 좋으니까 여호수아나 옷 많이 바꿔주세요. 나는 이대로가 좋겠습니다.” 이게 악마잖아요. “그래, 니가 니다운 처우를 내가 지옥 불에서 해줄게.” 그게 지옥인 거예요.

천국과 지옥이라는 것은 약속이 없으면 지옥. 약속으로 무장되어 있으면 그건 천국입니다. 그 약속이라 하는 것이 우리가 찾아가는 게 아니고 이미 생산되는 게 있어요. 그 생산이 뭐냐 하면 카이로스. 중국의 연길에 갔을 때 묵었던 호텔 이름이 카이로스에요. 그 사람이 뭐 아는지 모르겠어요. 때. 때, 이러면 밍밍하지요. 결정적인 때. 이래도 밍밍하지요. 최종 순간. 최종 순간이 역사가 안 끝났는데 미리 성도에게 성령을 통해서 와버려요. 십자가로서 최종 순간.

최종순간이 와버린다고요. 그럼 우리는 사건 자체니까. 그러면 나는 구원받았다, 가 아니라 반응이 ‘도대체, 나는 무슨 사건에 휘말린 거야.’ 이리 되는 거예요. 어떤 사건에 휘말렸는가, 남들처럼 고정된 자리에서 평생토록 여기서 그냥 심심하던 말든 그냥 살고 싶어. 이사 가는 것도 지겨워. 14번 가니까 지겨워 죽겠다. 이런다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고정된 장소가 아니고 지정된 장소로 가는 거예요. 지정된 장소라 하는 것은 고정성과 싸워야 될 문제에요.

고정성은 악마 쪽이니까. 고정적 이건 내거야. 요건 내 지갑이야. 요건 내 재산이야. 이 아파트 명의는 누구로 되어 있느냐 식으로. 모든 일이 고정되어있으면 이 자체가 우상이 되어버립니다. 우상이 되어버리지요. 이 고정적 중에서 가장 못 버리는 고정은 뭐냐 하면 교회라는 겁니다. 교회는 이게 허상이거든요. 교회에서 나가면 니 지옥 간다. 우리교회에서 나가면 지옥 간다. 이게 허상이라고요. 주께서 잠시 지정한 거예요. 고정이 아니고. 우리교회도 마찬가지고. 어느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그리고 교회보다 더 고정을 고집하는 장소가 있었으니 그게 뭐냐 하면 가정입니다. 가정. 만약 어떤 사람이 저보고 “요새 사람들이 신앙생활 왜 안하고 성경 왜 안보고 기도할 줄도 모르고 왜 취미 생활하듯이 친목 놀이하듯이 왜 교회 와가지고 그렇게 합니까?” 이유는 딱 한가지에요. 교회가 고정이 아니고 내 집구석이 고정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 집구석이 고정이 될 때 이 고정과 고정은 나의 표현이에요. 나의 표현형이에요. 나는 내 가정이 있음으로서 나는 나다운 거예요. 특히 남자들은 그런 게 있어요. 못났던 잘났던 어떤 남자든 간에 애가 없고 지 맘대로 하는데, 애가 생겨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막 죽기 살기로 돈 벌고 직장에서 고개 숙이면서 밑에 사람 콱 콱 밟아가면서 남이 죽든 말든 지 집구석만 살리면 그만이에요. 그게 아버지로 책임감이라는 거예요. 희생정신. 그리고 그 희생정신으로 생겼던 그 결실, 다시 말해서 아내가 방긋 방긋 웃으면서 앞치마 입고 저녁 때 된장찌개해주는 그것과 아빠! 하고 달려올 때 남자는 모든 직장의 피로감을 다 잊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남자는 책임감 때문에 결국 나이 40넘고 50되면 남자의 그 소박한 작은 소망도 남자는 꾹꾹 누르고 이렇게 버텨야 되는 거예요. 오죽했으면 남자의 소원이 뭐냐 하면 원 없이 울어보는 거예요. 남자라는 이유로. 담아둔 그 서러움을 언젠가 실컷 원 없이 울고 싶은데, 그동안 울지 못한 기간이 너무 길~~어요. 조항조에 의하면. 너무 길었어. 남자들 그 노래 들으면 안 우는 남자 없어요. 그동안 설움에 받친 설움 있잖아요. 이것도 참아야 되고. 남자가 그것도 못하나. 그 서러움. 나를 챙기고 싶은 게 본심인데 차마 챙기지 못하고 처나 아내한테 모든 걸 양보하고 또 양보하고. 양보했는데 또 양보해라해가지고 또 양보 더하고. 그게 얼마나 나의 악마적 본성을 억누른 거예요. 나는 나답고 싶은데.

하나님 앞에서 악마는 뭐냐 하면, “하나님 조치 필요 없습니다. 나는 나대로 삽니다.” 이게 오늘날 선악과 따먹은 우리들의 악마가 심어놓은 모든 자식들 공통점입니다. “나는 나대로 그냥 살래요. 아이고~ 복음이고 십자가고 다 귀찮으니까 나 이젠 내버려둬. 나 그냥 살래.” “여보, 교회 가자.” “아니야, 아니야, 니나 교회가. 집에 늦게는 오지 말고. 니 할 일은 다하고 교회가. 하지만 나보고 건드리지 마! 나 이대로 살래.” 이게 어떻게 낯설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모습인데. 왜? 맞은편이거든요. 악마와 맞은편이에요. 오히려 악마가 생소한 것이 아니고 옷 갈아입혀주는 이 놀라운 카이로스적인 성령이 임함이 오히려 의아해하고 너무 감사하고 너무 놀라울 정도지요.

이 더러운 옷을 그냥 입어도 되는데 벗으라는 거예요. 그래서 말로 할 때는 서로가 옷을 안 벗어요. 지 잘난체한다고. 그런데 멋도 모르고 말씀 아는 사람이 여기도 말씀 안다싶어 들어가 가지고 자기는 홀딱 다 벗고, “나 이 정도밖에 아닙니다.”하니까 이 사람은 “어머야.” 하고 감당이 안 돼 톡 튀어 나갔어요. 우리는 서로 감추는 재미로 얼마나 교묘하게 감추는 맛으로 우리는 대화했는데 한쪽에서는 당신은 너무 공개해버리면 나는 감당이 안 되니까 나는 도망칠 친구가 없지 않습니까. 이리 되는 거예요.

누가 이런 잘못을 했느냐, 베드로가 했지요. “먹어라.” “못 먹습니다.” “먹어라.” “저 못 먹습니다. 내가 이 율법대로 지킨다고 의롭게 지킨다고 공들였는데 지금 율법에 위반되는 것을 먹어버리면 먹지 말라는 것을 먹어버리면 나는 뭐가 됩니까?” 이런 식이에요. 베드로가. 이게 바로 베드로 하여금 베드로 구원 받은 거 맞아요. 하지만 출발은 항상 뭐냐 하면 무한 반복을 하기 위해서 출발을 악마 편에 서서 또 다시 악마 편에 서게 하는 거예요.

눈만 뜨면 다시 악마 편에 서서 하루 일과 가운데서 어떻게 악마 편이 여호수아, 예수님 편에서 살아가는 그런 기능이 우리의 지정된 고정된 게 아니고 지정된 내 직장에서, 그러니 직장 오래 다닐 수 없지요. 지정된 거니까. 지정된 고정이 아니고. 지정된 장소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증거 할 수 있느냐, 그런 식으로 우리가 다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카이로스의 특징이 뭐냐, 아까 제가 마지막 때가 온다 하는데. 그게 정답이지요. 막지막이라는 말은요, 시간의 분량의 끄트머리가 마지막이 아니고 이 모든 것을 다 해석권을 가지고 있는 게 마지막입니다. 시간이 마지막이라면 앞에 있는 그 모든 일어난 일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게 마지막이라면, 이 마지막이 아까 했지요. 역사 끝에 오는 게 아니고 성령을 통해서 수평적인 시간대에 수직적으로 오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침노’라고 해요. 침노.

완성된 하늘나라가 너희에게 침노할 그 때가 성령이 올 때다. 지금 초라해 보이는 내 모습을 너희가 부정해도 네가 용서를 받되, 마지막에 오는 영. 마지막 영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령이라 해요. 마지막 영. 요한일서2장에 보면 마지막에 성령을 보이거든요. 마지막에. 인간에게 모든 것을 지시시켜 보게 되면 그들이 어설프다 하는 것이 다 들통 나요. 그러나 마지막에는 뭐냐, 아예 인간에게 기대를 안 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성령 받고 난 뒤에 마지막에 해석을 하고 난 뒤에 내 속에 율법을 지키고 싶어도 내 자체가 율법을 지킬만한 오히려 율법을 방해하는 다른 악한 것이 있어서 내가 하나님이 원하는 온전한 사람으로 나 자신이 망가졌음을 성령 받고 난 뒤에는 망가졌음을 보는 거예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그런데 갑자기 곤고하다가 뭐로 바뀌었습니까? 감사로 바뀌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어떤 경우를 당하더라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걸 따져볼 때에 감사가 나오면 성령의 일이고, 열심히 잘하겠습니다. 나오면 그건 악령의 일이에요. 악마 편으로 가면 악마의 일이고, 주님 쪽으로 가면 감사지요. “저한테 이런 옷 바꿔주는 혜택을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이리 되는 거예요.

바로 우리로 하여금 늘 악마 편에서 다시 주님 편으로. 그 다음 하루가 또 생명을 주게 되면 그 다음 악마로부터 시작해서 또 주님 편으로. 계속 바꾸면 되지요. 왜? 그게 범주 안이니까. 약속이 그 안에서 움직이니까요.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안양20201008a슥3장8절(지정과 고정)-이 근호 목사.hwp (38.0K), Dow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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