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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1 07:54:04 조회 : 35         
20201109b 부산강의 : [시편]33(21편)-깔때기 은혜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96)
20201109b 부산강의 : [시편]33(21편)-깔때기 은혜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모든 말씀 뒤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깔려있어요. 우리는 성경말씀 볼 때 멀쩡하게 살아 있는 내가 하나의 가설을 들어요. “아, 이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성경말씀이 뭐라 해도 성경말씀이 좋은 게 아니고 내가 살아 있다는 이게 희희낙락이에요. 살아 있으면서 죽은 자를 이해하는 것처럼 하는데 주님께서는 절대로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하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날 죽이는 폭탄으로 생각하지 않고 더욱 더 날 살려내는 말씀인 줄 알고 성경말씀을 보고 설교를 듣는단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실제로 주님이 활성화돼버리면 주의 힘, 죽어도 상관없다는 정도의 대단한 힘이 발휘돼버리면 안 죽으려고 난리를 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극구 말씀은 하나의 가설이야, 이론이야, 성경책은 여러 가지 신화로 조립된 편집된 책이야, 라고 온갖 악마한테 들었던 이야기를 다 하면서 떼어내는 거예요. 제발 내가 살아 있게 끔만 해주세요. 멀찍이서 관찰할 테니까, 십자가 관찰하고 부활이야기 수용할 테니까 제발 살아 있는 행복과 즐거움을 뺐지 말아달라고 밀어내지요.

그러나 그렇게 밀려서 밀릴 수 있는 주님이라면 애초부터 성도가 아닙니다. 그건 아주 고집스럽게 주님께서 네 열심보다 내 고집이 더 세다고 쳐들어와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모든 말씀에 대해서 이제부터는 내가 사는 기쁨에서 생생하게 말씀이 내 안에 살아 있는 기쁨이 전환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시편 21편이 내 안에서 살아 있게 되지요.

여기 시편 21편 5절을 봅시다. “주의 구원으로 그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으로 저에게 입히시나이다” 21편 3절에 보면,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 정금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해당되고 예수님께 주신 주의 힘이 그 백성에게 고스란히 주어지게 되면 시편 1편의 복과 즐거움에 백성들도 함께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참여할 때 여기 7절에 보면,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극히 높으신 자의” 그 다음에 뭡니까? “높으신 자의 인자함” 다른 말로 하면 인자함, 긍휼, 사랑, 전부 다 특징이 뭐냐? 다 거저주시는 거예요. 죄 사함도 마찬가지고. 거저주신 것으로 그 다음에 뭐냐? 요동치 않지요. 고정된 거예요. 다시 말해서 확정날짜입니다. 확정돼버린 거예요.

인자하심, 긍휼이 확정돼버리면 그 나머지가 아무리 흔들리고 변화 있어도 이 고정의 힘을 이 변화를 수시로 이깁니다. 늘 이겨요. 이기는데 이것이 긍휼과 인자가 오기까지, 8절에 보면, “네 손이” 여호와입니다. 왕이죠. “네 손이 네 모든” 그 다음에 뭡니까? “원수”지요. 전쟁의 결과로 온 거예요.

그렇다면 성도는 뭐냐? 전쟁하기 전에 여호와의 주님의 적 편에서 꼼짝 마라, 하고 볼모로 잡혔던 포로로 잡혔던 우리가 주님의 전쟁의 여파로 해서 다시 주님 품으로 오지요. 그럼 여기에 경로가 있어요. 악마에서 살다가 주님에 품에 사는 경로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 경로에서 본인이 한 게 있어요, 없어요? 본인은 한 게 없지요. 본인이 한 게 없다는 식으로 이 경로에 대해서 뭔가 할 말이 있어요.

성도가 기쁨과 자비와 사랑의 기쁨으로 넘쳐서 내놓는 기쁨과 인자하심과 사랑을 형성하는 그 내용에 담기는 단어들, 이런 것들을 내놓는 게 있어야 돼요. 내놓는 게 뭐냐 하면 나는 안 했는데 우리 주님이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해서 건져냈다는 그 내용이 실려 있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교회에서 설교할 때 누구 이야기해야 돼요? 주님의 거저주심이 주님께서 이런 고생을 했고 이런 희생을 했다는 그 이야기만 나와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것이 오늘날 성도 안에서 어떻게 살아 있는가? 한 컷, 한 컷 살아 있지요. 그리고 그걸 한 프레임이라 하는데 영화의 한 컷, 한 컷으로 살아 있어요. 그걸 쭉 이어보게 되면 동영상이 되지요. 따져보면 사진 한 컷, 한 컷이지만 쭉 이어보면 동영상이에요. 그 동영상이 우리네 성도의 인생 아닙니까. 발걸음을 세신다 했거든요. 한 컷, 한 컷 다 찍는데 우리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걸으면서도 걷는 것도 누구의 힘이다? 주의 힘으로 걷고 모든 숨 쉬는 것도 쉬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오늘 제목 후보감이 하나 등장하는데요. 제목을 아까 깔때기라 했지요. 이것도 후보감이에요. “엿 같은 인생” 욕하는 것 아닙니다. 왜 엿 같은 인생이란 그런 제목을 다느냐 하면 어릴 때에,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가잖아요. 어린애들은 집안에 있는 쇠붙이나 병을 주게 되면 엿장수가 달콤한 엿을 주잖아요. 그 엿 먹는 기쁨이 있어요.

어떻게 바꿔치기하는 기쁨, 내 행함 부정하고 주께서 주시는 달콤한 엿 같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 긍휼을 받거든요. 내 노력과 주님의 자비를 바꿔칠 때 엿 같은 인생이에요. 기쁨의 걸음걸이를 걷는 거예요. 지금 그 노래가 시편 21편 노래에요. 다윗이. 다윗이 지금 얼마나 혼이 납니까. 나쁘게 말해서 다윗은 그야말로 엿 같은 인생, 사울에게 억울하게 쫓기는 인생인데 쫓기는 이 모든 프로젝트, 프로그램은 어디서 나왔단 말이에요?

주님의 힘에서 그것도 영생, 내 잔이 넘치나이다. 목자 되시는 분이 양을 인도해서 내 상이 넘치나이다. 평화로운 푸른 초장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는 그 과정이거든요. 그 과정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주께서 은혜와 내가 행하지 않은 내가 공들이지 않은 거저주신 은혜, 우연적인 은혜, 자비가 넘치는 그것을 기뻐하면서 자기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노래하고 있는 겁니다. 주의 원수가 이겨서 이렇게 달콤한 엿을 먹습니다.

그러면 이 마음은 어떤 마음이냐 하면 어른의 마음이 아니고 내 자랑질하는 마음이 아니고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죠. 어린아이들 특징이 참 잘 나타난 게 뭐냐 하면 옛날에는 학원 같은데 다니지 않고 학교 마치면 골목에서 아스팔트로 안 돼 있잖아요. 흙이잖아요. 골목에서 그냥 소꿉놀이나 흙장난하고 여러 가지합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엄마가, 옛날의 엄마는 다 치마를 입었고 앞치마를 둘렀어요. 머리는 파마하고. 요새 엄마들은 오십 되도 스트레이트 단발머리하고 젊어지려고 아주 애를 쓰는데 옛날에는 결혼만 하면 파마했어요. 엄마가 하는 말이, “밥 먹자” 하면 있는 그대로 놔버려요, 경쟁하듯이. “밥 먹자” 하면, “예” 하고 소꿉놀이가 어떤지, 프로젝트가 완성됐는지 그것도 필요 없어. 그냥 손 놓고 가버려요. 저녁 먹고 난 뒤에 그냥 죽어버려요.

그냥 가버렸어요. 왜? 어린애들은 자기가 하는 프로젝트보다 엄마의 소리가 더 기쁘기 때문에. 그래서 사랑은 모든 되어진 것을 믿으면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됨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모든 것을 견디지요. 로마서 5장에 보면 그걸 연단이라 해요. 불순물을 제거하는, 진짜 아픈 일이에요. 불순물을 제거하면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정금같이 나오지요. 욥기에도 나오고, 정금같이. 이걸 단련시킨다, 또는 연단시킨다고 돼있어요.

로마서 5장 잠시 보겠습니다. 3절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게 말이 됩니까? 환란 중에 뭘 즐거워해요? 다 날아갔는데. 돈 다 날아갔는데.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뭘 이룬다? 비로소 없던 예상 없던 우리가 기대하지 않은 소망, 거저주시는 소망, 이미 거저주신 거예요.

제가 어느 강의에선가, 아 울산강의에서 그 이야기했잖아요. 개표에 역전은 없다고요. 왜냐? 표는 이미 끝났어. 투표함에 있는데 무슨 역전이 있어요. 이제 확인만 하면 되는데 무슨 역전이 있습니까. 새삼스럽게 트럼프 찍어서 넣습니까? 아니잖아요. 이미 개봉했단 말이죠. 인생에 역전은 없어요. 역전은 역 앞이 역전인가. 인간은 이미 창세전부터 끝났어요. 게임오버에요.

우리의 인생은 주님의 조치가 뭔가를 확인 차 40, 50, 60까지 살고 있는 겁니다. 그 인생사는 동안 복음을 못 받아들인 것은 뭐가 확인됩니까? 처음부터 저주받도록, 멸망되도록 진노의 그릇으로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뿐이에요. 주님의 기쁨이요. 주님은 인간의 말을 안 듣습니다. 확인절차 상 피조물을 다루고 있을 뿐이에요.

종이 자기 운명을 못 바꾸잖아요. 종으로 태어났으면 할 도리를 할 뿐이지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올 뿐이지 뭐 내 운명을 내가 바꿔요. 인간은 바꿀 운명이 없어요. 옆자리에서 옆자리로 갈 뿐이에요. 노란색 바퀴벌레가 파란색 바퀴벌레로 바꿀 뿐이지 심층으로 내려가는 변화는 없어요. 이 차 타나 저 차 타나 네 바퀴에다 벤츠나 랜드로버 타나 전부 다 평면적 이동이지 수직은 없어요. 마귀는 수직을 싫어해요. 정말 평면이 전부라는 거예요, 인생은. 학교, 모든 공부가.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평면세계에 대적, 하나님의 적을 보내버립니다. 물리학에서 파동의 간섭현상이 일어나요. 여기서 파동을 보내는데 두 개의 입구, 두 개의 문을 통과해요. 통과하게 되면 파동이 나오는데 파동이 원래 이렇게 가는 게 아니고 간섭되니까 높은 골과 골이 만나면 플러스 합치면 파동이 이렇게 된다고. 파동이 불규칙하게 되잖아요.

파동의 간섭효과를 일으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기존에는 전부 다 안정돼있는 질서체계에요. 인간의 선악구조기 때문에 납득이 된다고요. 인간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것만 이 세상에 계속해서 추려서 그 사태에 맞추어서 있는데 여기서 예수님의 복음이 들어와 버리니까 파동이 혼선이 일어나는 겁니다. 파동의 간섭효과에 의해서 혼선이 일어나서 제자들은 무척 당황스럽게 돼요.

그러나 그 파동 중에서 세상 파동과 주님의 파동을 만약에 골라낼 수만 있다면 이것은 바로 천국의 힘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 이제부터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비유 중의 하나를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이요.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자, 이게 천국입니다. 천국이란 뭐냐? 천국은 하늘 위에 있는 게 아니에요. 지상의 표면, 파동의 간섭효과로 이미 온 거예요.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천국은 이미 이 지상에 오신 거예요. 왔는데 무질서가 증식되는 거예요. 유대인들의 질서 잡힌 법체계에 모세 법에 의해 체계에 인간의 합리성, 모든 이성을 다 동원해서 산뜻하게 담아놓고 체계 있는 그 구조에 간섭의 흔들림이 시작된 겁니다. 파동의 흔들림이.

그게 뭐냐 하면 천국이 오게 되면 농부가 밭을 샀다는 거예요. 그런데 농부 입장 말고 다른 사람 입장을 들어봅시다. 그 밭은 그만한 돈 주고 살 가치가 없어요. 잘못 산 거예요. 보이스피싱 당한 겁니다. 사기꾼한테 걸려든 거예요. 생돈 날린 거예요. 바보에요. 농부 외에 모든 사람은 농부의 조치에 대해서 끌끌끌, 똑똑한 사람이 왜 저래, 할 정도로 바보천치 같은 행동을 한 거예요.

그런데 농부 혼자 싱긋이 웃지요. 갑자기 제목 후보감이 멋진데? 싱긋이 웃는 거예요. “너 왜 큰 교회 안 가고 그 교회 왜 가느냐?” 그러면 이 교회 교인들은 싱긋이 웃지요. “아 점심 맛있게 먹는다고?” 그게 아니야. 그냥 싱긋이 웃지요. 설명해도 네가 몰라. 육과 영은 대화가 안 됩니다. 이게 간섭효과에요. 파동의 간섭효과. 애써서 해봐도 나중에 중도 포기합니다.

천국은 오게 되면, 빛이 어두움에 오면 어두우니까 “야 빛이다!” 이렇게 압니까? 어두움이 아주 발악을 해요. 요한복음 3장에서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싶어서 극구 빛으로 오지 아니해요. 그래서 어두움의 속성은 빛을 도망치는 성질만 나타내요. 그런데 농부는 싱긋이 웃는다니까요. 네가 게 맛을 알아? 랍스타 맛과 달라. 대게 맛은 랍스타 맛과 다르다 이 말이죠.

차이 좀 나지. 너희는 선악밖에 몰라. 착하면 천당 가고 나쁜 짓하면 지옥 간다, 그것밖에 모르지. 다른 파동이 있어. 다른 파동이 오니까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마귀의 고수인 줄 알았어요. 마귀의 대장인 줄 알았습니다. 왜? 자기들의 딱 정돈돼있는 선악의 누구나 납득이 되는 그게 어딜 해도 먹히지 아니까요. 주님의 말씀이.

따라서 그 땅, 토지를 비싼 돈 주고 사는 천국의 파동을 받은 사람만이 예수님이 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다 알아버려요. 뭐 주님의 뜻을 안다는 뜻이 아니고 반대구나, 라는 것, 우리를 지적하는구나. 따라서 우리는 주의 뜻을 다 알아서 하는 게 아니고 시킨 대로 하면 되는구나. 그러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주님이 하신 말씀에 보조 맞춰서 그 현장에 하라면 하고 가라 하면 가면 돼요.

어린아이 마음으로 내게 귀한 것 가지고 땅 사듯이 우리 집의 귀한 쇠붙이로 달콤한 천국의 엿 몇 쪼가리로 바꿔먹는 그것도 맛있다고 좋아하는 어린애 같은 마음,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마트에 팔지 않는 것, 시장에서 구할 수 없는 것, 거저주신 영생입니다. 천국은 반드시 그렇게 오게 돼있어요.

인간이 선악으로 애써서 교회에서 상품화된 것은 천국이 아니고 그것은 지옥 대용품이에요. 그거는 가짜입니다. 마네킹 주여, 하는 건 바보 아닙니까. 예수님 제삿날 섬기고 이 짓하고 있다고 교회에서. 부활절, 추수감사절 이게 뭐예요? 제사 지내는 거거든요. 산 사람은 살아서 자기 백성을 구하고 있는데 지 살고 싶어서 공들이는 거예요. 주여, 이케요, 저케요, 성만찬 맨날하면 천당 갑니까? 이러고 있다고요.

맨날 기억하는 것은 내가 행한 것, 주님께서 드린 헌금, 자기가 한 행함을 이게 빠지지 않아 이걸 빼지 않고 자꾸 축적을 시켜. 연금, 적금 붓듯이. 계속 적금 붓는 거예요. 그래서 얻은 게 뭡니까? 장로 직이잖아요. 그것 건드리면 화 벌컥 내지요. 복음 때문에 화내지 않습니다. 내가 삼 대째 이 교회 섬기고 있다. 이것만 자랑질하고 있어요. 그 장로님의 부인을 뭐라 합니까? 권사님. 아주 죽이 맞아. 짝이 맞아요.

자, 그렇게 해서 마태복음 한 군데 더 보겠습니다. 25장. 이건 볼 필요도 없어요. 유명한 씨 뿌리는 비유. 씨 뿌리는 비유에서 마태복음 25장 21절에 보면,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했지요. 착하고 충성된 종과 반대말이 뭐냐 하면 게으른 종이 나와요. “악하고 게으른 종아” 게으른 종에서 종들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28절에,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1)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라고 돼있거든요.

이건 뭐냐? 네가 왕의 것을 받을 백성답지 못하다는 거예요. 내가 거저 주었으니 너에게는 거저 줌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나는 거저 준 은혜가 너한테 합당치 않다고 빼앗아버리는 겁니다. 그럴 때 여기 30절에 보게 되면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바깥. 어제 낮 설교에 바깥 이야기했지요.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게으르고 악한 종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것을 나의 것으로 여겼다는 거예요. 나가 살아 있다는 거예요. 이게 문제였어요. 나의 것이 있으니까 뭔가 주어지면 자기 소유로 삼아서 결정과판단과 선택을 누가 합니까? 본인이 하는 거예요. 이걸 내가 땅에 묻을까, 말까? 주님께서 말하기를 그렇게 결정할 테면 이자나 받지.

그러니까 나가 있는 어떤 결정도 천국에서는 받지 않습니다. 달란트 비유가 천국 비유에요. 천국은 이와 같으니 어떤 자를 내쫓는가를 통해서 천국이 증명된다는 거예요. 천국이 어떤 자가 들어온 자가 아니라 어떤 자가 못 들어오는가를 보여줌으로서 천국이 천국답게 되는 거예요. 뭐냐 하면 나의 것이 있는 사람은 결단코 내가 지옥으로 밀어 넣겠다는 겁니다. 나의 것, 내 교회, 내 가족, 내 돈, 내 것이 있으면 무조건 지옥으로 가는 거예요. 우리도 못지않지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뭘 했느냐 하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그것 한 거예요. 내가 일어난 일은 천국에서 밀려들어온 주의 힘의 파동이라는 겁니다. 뭐 헌금하라, 전도하라는 말이 아니고 전도를 하던 뭘 하던 간에 내 하는 일은 내가 결정할 문제는 아니라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나를 비껴가서 일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주님의 파동, 천국의 파동에서 제시되는 나가 있어요. 그러면 기존에 악마에 속한 나가 있지요. 이 둘의 나가 내 일생을 통해서 파동의 간섭효과를 일으킵니다. 주께서는 거저 주었다 하고 나는 애써서 자식 이만큼 키웠다고 하는 거예요. 내 새벽제단 밝혀서 자식이 멀쩡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주님께서는 그런 것조차 네가 뭘 하는 것조차 내가 거저 준 힘으로 했다 하고. 이렇게 간섭파동이 계속 일어나는 거예요.

이것이 시편 21편의 다윗의 일생입니다. 다윗 일생 자체가 간섭효과에요. 사울로부터 쫓기고 있고 고난 받는 것, 이건 본인이 원했습니까, 본인이 나쁜 짓했습니까? 골리앗 때려잡는 게 나쁜 짓이었습니까? 누가 시켰습니까? 주님이 시키는 대로 자기가 돌 던졌고 돌이 알아서 골리앗 죽였단 말이죠.

다윗이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한 게 아니고 이 전쟁은 나와 골리앗의 전쟁 아니고, 자기를 빼요. 하나님이 할례 없는 저 민족을 치기 위한 하나님 본인의 나타남이라,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분명히 언급했건만 사울 쪽이나 아무도 그 말을 이해 못하고 있는 거예요. 다윗도 섭섭한 게 한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울 왕이 이기고 난 뒤에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고 열 배난 값을 쳐주니까 질투심이 동해서 죽이려고 하니까 다윗도 도망갔지요.

도망가면서 뭐라 하느냐?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시편 22편 미리 한 번 봅시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은 두 개의 ‘나’ 중에서 이쪽 나를 버리는 식으로 나가 등장해요. 동반해서. 하나의 무대에 주인공이 졸지에 둘 돼버린 거예요. 기존 주인공은 마귀한테 속한 주인공이고 새로 등장한 주인공은 주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주인공이고.

그러니까 두 주인공이 한 무대에서 공연해줘야 여기서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 차이 남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여분 또는 잉여. 없다고 여겼는데 불록하게 새로 생긴 것, 주께서 작용했더니만 내가 예상도 못한 볼록한 게 등장하는 여분의 것, 나의 눈과 코와 이성 이런 것 다 가로막아버리고 다시 등장한 여분의 것, 차이 남. 이 차이를 세상의 갈등 속에서 끄집어내는 거예요. 파동의 간섭효과.

이걸 보게 되면 달란트 비유 때 하나님께서 게으른 종을 배제하고 착한 종에게 주고 배제 안 한 이유를 알겠지요. 동일하게 줌으로써 다시 이야기하면, 천국은 천국 갈 사람만 하는 게 아니고 천국에 안 갈 사람과 같이 결합해서 그 차이 나는 것,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 차이만 알면 되는 거예요, 성도는.

성도는 뭔가 업적을 이루고 나라 세우고 그 짓하지 마시고, 교회 세우고 하지 마시고 내부의 차이에요. 내부의 차이를 그걸 그대로 바깥에 드러내는 거예요. 나 이렇게 죄인 중의 괴수였는데 주님 오셔서 내가 몰랐던 주님의 활동하심을 이렇게 토해놓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까지는 일방적으로 밀어붙였지요. 그래서 이방민족이 난데없이 밀려갔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어요. “하나님이 우리 편이니까 적들이 어딜 까불어? 하나님 너무 좋아, 예수님, 여호와 너무 좋아.” 이러고 있단 말이죠. 이제 누구 차례입니까? 이제는 약속의 땅에 걸 맞는 약속의 백성, 달리 할까요? 준비된 왕에 맞는 준비된 백성만 골라내기 위해서 그들로 하여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 긍휼이라는 거저주심을 그 땅에 실현시키기 위해서 그 땅에서 차이 나는 자기 백성과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번 수련회에 사무엘상 하는데 교재는 곧 올라오겠지요. 서 목사님 검토 중이니까 올라올 겁니다. 그 사무엘상 제목이 <두 개의 구원>이에요. 차이 남이 되려면 이질적인 두 개가 다 같이 등장해야 돼요. 참고로 이번 장소는 코로나 여파로 인해서 가야산에서 할 예정입니다. 하도 지 방 달라고 해서.

사무엘상에서 다윗에게 왕 주기 전에 먼저 사울 왕을 주잖아요. 그런데 사울 왕은 어디서 밀고 온 거냐? 표면에서 표층에서 올라온 거예요. 그 교재 초반에 서론부분 내용에 이런 게 있어요. 통치자를 뽑는 이유가 아무도 통치할 권리가 없음을 알리기 위해서 통치자를 뽑는다 했어요. 아무도 통치할 권리가 없음을 백성들이 요구하기 위해서 통치자를 뽑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나의 통치자는 이미 정해졌습니다. 누가 나의 통치자입니까? 나지요. 내 소망대로 내 요구대로 해줄 수 있는 임시적 통치자를 백성들이 왕으로 요구를 한 겁니다. 그걸 아시고 하나님께서 백성들 너희 소원대로 만만하게 안 될걸. 왕이 되게 되면 너희들이 통치하고 싶은 통치자가 되레 너희들 귀한 것 다 빼앗아가 갈 텐데. 너희의 처녀, 너희의 밭, 너희의 십일조 다 받아 챙길 건데.

너희들이 요구했기에 왕 줄게. 이제 왕 주는데 그 왕은 뭐냐? 너희들 이스라엘의 반대가 증식되는 조치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통치는 얼마나 센 통치인데 얼마나 힘이 셌으면 통치자를 원했던 백성들이 통치자한테 억압을 받고 구박을 받는 사태의 역전이 일어납니다. 그래도 못 빠져나와요.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통치자는 내 속에 있었던 악마의 가현체가 돼요. 내 속에 이미 누가 들었다? 악마가 있었던 거예요. 우리는 악마가 왕이 되기를 원했던 겁니다.

우리의 소망이 뭐냐? 그 왕이 고분고분 내 말을 잘 듣는 왕이기를 원해서 대통령 뽑아놨는데 김정은 뽑아놨는데 이제 김정은이가 내 모든 걸 홀라당 가져가지요. 이걸 한 프레임 내에 한 컷, 한 컷 적나라하게 짧은 시기에 다 보여준 그러한 단체가 교-회-라는 겁니다. 교인과 당회장 목사에요. 여러분들은 그런 교회를 거쳐 왔습니다.

교인 말 잘 듣는 만만한 목사, 복음만 전해서 우리 교회는 복음적 교회, 몽땅 등록한 사람 천당 간다고 좋아들 했지요. 나중에 보니까 복음 전하니까 내 말 들으라. 복음 전하니까 돈 내놔라. 막 학개 동원시키고. 학개 뭡니까? 자기는 좋은 집 살면서 교회는, 아까 바퀴벌레 이야기했어요.

이래서 되겠느냐, 받아놓고 헌신도 안 하고 인간들, 못된 것. 목사의 나중 노후대책 내놓고, 생활여건 해운대에 맞도록 해달라고. 온갖 요구 다 나와요. 안 그러면 넌 지옥 간다. 내 말 안 들었으니까. 이게 모든 한국교회의 특징입니다. 그러면 부교역자는 어떤 생각할까요? 난 언제 부교역자 신세 면해서 당회장의 절대권력, 절대자리.

그걸 가지고 영화제목에 나오지요. <반지의 제왕>이죠. 세상의 모든 힘, 최고의 힘을 갖고 있는 게 당회장 목사에요. 특히 개척교회부터 한 당회장 목사는 중간에 날아온 돌 말고 개척교회 한 목사는 절대 황제입니다. 신천지 욕할 것도 없어요. 모든 교회가 신천지 교회에요. 반지의 제왕이에요.

이 반지의 제왕과 반대되는 모습으로 오신, 모든 백성들은 반지의 제왕에 꼼짝 못하고 있을 때 그 반대자리에 오셨잖아요. 세리와 창기와. 너는 이 교회에 충성 안했으니까 지옥 가라. 그 지옥 가라를 자기 백성으로 만드는 왕, 예수님이죠. 메시아인 거예요. 왜? 다윗의 일대기가 그리스도 안에 그대로 복사돼있기 때문에 그래요. 억울하게 이상하게 쫓겨 다니는 거예요. 예상 못하게. 간섭파동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반지의 제왕이 살고 있는 표면에 주님께서는 어떤 무기를 동원하는가? 신명기 4장 24절 보겠습니다. 누가 읽어보세요.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됐습니다. 같은 구절이 히브리서 12장 29절에 나오는데요. 신명기 4장 24절, 자 하나님은 실체입니까, 인물입니까, 불입니까? 어느 쪽이에요? 구약의 하나님은 뭐로 나타나나? 과정으로 나타나요. 과정인데 어떤 작업을 하는 과정입니까? 소멸하는데 뭐로 소멸해요? 불로써 소멸하는 거예요. 다 태워버리고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거기에 대한 무기가 뭐냐? 불로써 나타나는 그 불은 앞장세우는 것이 율법이에요. 율법이 주어진 것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게 함이라. 로마서 2장에 나오지요. 인간의 양심? 그건 내 안에 있는 나를 소멸시키는 불이에요. 두 개의 나가 있잖아요. 이쪽 나가 와서 소멸시키는 거예요. 구약에.

소멸시키면 사람들은 악마의 본성이 나타나요. 소멸하시는 무서운 진노를 완화시키기 위해서 무슨 해석에 나서느냐 하면 율법에 대해서 계속해서 수정된 해석으로 백성들에게 유포를 시킵니다. 내가 죽어 마땅한 존재가, 그건 잠시 주께서 겁주기니까, 거기에다 가짜 도금을 입혀버려요. 안에는 불이 있는데 불이 안 오도록 사랑의 하나님으로 포장을 해버린다고요. 주께서는 봐준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진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우리에게 어떤 희망과 기대를 갖고 있다는 것이고, 진짜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습을 그냥 십자가에다 하나의 엑스레이 사진으로 걸어놔 버렸어요. 뭡니까?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버림받는 처참하게 사형당한 그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라 누구 모습이에요? 바로 죄 있는 우리의 모습을 죄 없는 예수님이 자기 것으로 담당시킨 거예요.

담당했다는 말은 원래 그런 처우를 안 받아도 되는데 자기 백성들에 터치, 그러니까 내가 몰랐던 나의 진짜 모습을 자기 백성에게만 성령이 와서 알려주는 거예요. 터치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경로가 있을 것 아닙니까. 나는 저주받아야 되는데 저주 안 받는 게 이상해요. 지옥 불, 불이거든요. 불은 소멸하는. 지옥에 가야 되는데 안 가게 된 것이 이상해서 보니까 뭔가 다녀갔어. 주님이 지옥까지 다녀가서 건질 자를 자기 백성을 건져내는 그 과정, 그 과정만 우리가 토해내고 고백하면 되지요. 그게 성도의 남은 인생입니다. 소멸하시는 불이요.

이사야 4장 4절 보겠습니다. 성령이 어떤 일을 하는지 나옵니다. 예언돼있습니다. 귀찮겠지만 마지막으로 부탁하는데 누가 읽어보세요.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아멘, 됐습니다. 시온의 딸, 다윗언약에 해당되는 백성을 씻어주는데 뭐로 씻어주느냐 하면 여기에 심판하는 영과, 성령이죠. 소멸하는 영.

제가 강남강의에서 했지요. 성신과 성령의 차이점은 십자가를 다녀가면 성령이고, 십자가 안 다녀가면 성신이라 했지요. 이미 완성의 맛을 보면 성령이고 아직 미완성의 모습이 있으면 성신이고. 성신은 성령이 되기 위해서 달려가고 있지요. 십자가 터치하고 난 뒤에는 성신이 아니고 성령이 돼버립니다. 성령이 돼버리면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함이 돼버려요. 그럼 죽어 마땅한 성도 안의 나는 뭐냐? 주님의 나가 그대로 거기에 꽂히게 되는 겁니다.

다시 표면층에서 사람들은 나를 나라고 이야기하고, 두 개의 나가 아니고 하나의 나입니다. 나 말고를 너라고 이야기해요. 표면층에서 나, 너. 그런데 주님께서 나로 오셔요. 나는 하나님이다. 나로 와버리면 기존의 나는 뭐로 변하느냐 하면 전부 다 it, 그것으로 변해요. 하나의 사물이죠. 노골적으로 말해서 기계가 돼요. 모든 인간은 기계와 기계의 만남이에요. 욕망과 욕망의 만남이에요. 그 기계가 무슨 기계냐? 욕망하는 기계에요.

엿장수한테 팔아먹어야 될 고물이에요. 하나님이 갖다버린 거예요. 하나님이 생명나무에서 “나가, 인간아” 해서 고물로 나가버린 거예요. 고물로 나가떨어져 놓고 저희들끼리 너라고 나라고 이야기하면 저희끼리 하나님 만들고 우리를 만들어서 기계의 문명을 이뤄요. 어떤 기계? 욕망하는 기계.

욕망하는 기계니까 기계 자체는 아무 힘이 없어요. 기계보다 무슨 힘이 셉니까? 욕망의 힘이 더 세요. 이 욕망을 구체화한 것이 바로 자본입니다. 돈입니다. 인간은 돈 따라 움직이는 거예요. 내가 돈을 욕망하는 게 아니고 돈이 자본이 나를 욕망해요. 역전된 겁니다. 이 주의를 자본주의라 해요.

명목자본과 실질자본으로 경제학에서 구분하거든요. 자본이나 소득에도 물가인상률과 같이 반영이 되고 동반이 되는 그러한 펀드가 있는 반면에 그렇지 않은 국채 같은 펀드는 물가인상률이 반영이 안 돼요. 그래서 물가상승보다 이자율이 낮아서 가만 앉아서 점점 까먹는 셈이 돼버리죠. 물가상승률과 연동이 되는 펀드를 뮤추얼펀드라는 겁니다.

어제 설교시간에 이야기한 뮤추얼펀드, 개방형회사채투자신탁. 은행에 넣어봐야 이자 0.8% 나오거든요. 신한은행. 물가상승보다 떨어지는 거예요. 은행에 넣으면 넣을수록 손해가 돼버려요. 밑지니까. 그럼 어떻게 되느냐? 뮤추얼펀드에 넣어서 물가상승과 연동해서 그만큼 이자가 많으면 되지요. 문제는 그 회사 망하면 다 날린다는 거예요.

그러면 회사의 과장이나 차장이나 부장이나 할 일 안 하고 수시로 어딜 들여다보느냐 하면 내가 투자한 뮤추얼펀드에서 삼성주식에 투자한다는데 지금 삼성주가가 얼마인지 그것 쳐다보고 있어요. 그러니까 하루하루의 일과가 본인이 뮤추얼펀드에요. 본인이 자본이에요. 본인이 자본이란 돈의 욕망 따라하는 그냥 기계에 불과합니다. 인생이란 게. 그리고 주일에 교회 나와요. 기가 찰 일이죠. 그야말로 기가 차고 코가 찰 일이죠.

교회에서는 장로가 그걸 위해서 기도를 해야 된다고. 왜? 기도해야 이자율이 남아야 십일조를 내야 내가 세운 교회가 운영이 되니까요. 펀드 대박난 사람은 새 집사로 오라, 이런 식으로. 그래야 물가반영이 책정된 일종의 공직이라 할 수 있는 목사 월급을 주니까. 주의 종을 소홀히 하면 본인의 펀드 수익이 안 나는 수가 있어. 저주받아서.

전부 다 모든 생각을 욕망이라는 그러한 기준으로 평가하다보니까 욕망의 구체화가 뭡니까? 돈이죠. 얼마짜리냐, 얼마짜리 목사냐, 얼마짜리 집사냐, 전부 이걸로 되니까 내 자식은 얼마짜리 자식이냐? 도대체 장학생이냐, 장학생 아니냐, 얼마짜리냐? 그걸로 세상은 그런 세상이에요. 이 표면층이 그래요. 그래놓고 기도의 내용은 뭐예요? 우리의 소원대로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성령 주시옵소서. 그 성령이 무슨 성령이라 했습니까? 지옥을 앞당겨 우리에게 덮쳐지는 영, 나와 나 사이에 기존의 고물 나를 없애버리고 그 고물 나를 엿과 바꿔먹는 엿 같은 인생, 천국의 달콤한 엿으로 바꿔먹게 하시는 성령이에요. 날마다 우리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어제 오후에 제가 인생은 농담이라 했거든요. 전혀 진담 아닙니다. 이래 사나 저래 사나 농담이에요.

그 진지한 심각한 인생은 없습니다. 그 인생을 박살내는 그것이 진지함이고 심각함이고 그게 주의 뜻이에요. 그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하는 것은 자기 것 지키는 게 착하고 충성된 종이 아니고 시킨 대로 돈 날린 게 충성된 종이에요. 그래 내 시킨 대로 날렸구나. 아이고, 잘했다. 이 엿 같은 인생아, 너 참 잘했다.

마지막으로 이 땅에서 우리는 입자에요. 기계니까 실체가 있어요. 여기에 대해서 주께서 흐름으로 오십니다. 이 실체를 강력한 바람으로 흔들어버리죠. 성령의 바람으로. 흔들어버리면 실체라는 자체가 내가 나를 알지도 못할뿐더러 내가 붙잡고 있는 나는 전부 다 망상이고 허상이에요. 저 사람처럼 될래, 라고 꿈꾸는 거예요. “나 저 사람처럼 안 될래. 저 사람처럼 되면 무서워. 자살할 거야.”

전부 다 나라는 것이 세상에서 참조해서 들었던 그런 제도들의 규합이에요. 인간은 나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 남는 건 뭐냐? 봉사지요. 성령은 봉사의 영이거든요. 우리가 감사할 것은 내가 바쳐야 될 섬겨야 될 주님이 계시다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21편에서 다윗은 뭐냐? 주께서 하신 일을 봉사하는 봉사자입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네가 노할 때에 저희로 풀무 같게 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진노로 저희를 삼키시리니 불이 저희를 소멸하리로다” 이 이야기가 여기는 왕이라 하는 다윗이지만 다윗 안에 장차오실 왕이 계시죠. 왕이 오시면 불이 저희를 소멸한다는 거예요. 아까 불 이야기 제가 해드렸잖아요.

실제로 이스라엘은 불을 봤어요. 산 밑에서 변화하는 본인들 마음 말고 산 위에 고정된 불을 봤습니다. 시내산 불을요. 율법과 함께 있는 불. 아까 이야기했지요. 진노로 오는 불은 무엇을 앞장세운다? 율법을 통해서. 율법은 변함이 없는데 우리는 맨날 그걸 다른 해석해서 자기도 고정화시키려고 자꾸 거짓해석을 하고 있는 거예요.

11절에 보면, “대저 저희는 너를 해하려 하여 계교를 품었으나 이루지 못하도다 네가 저희로 돌아서게 함이여 그 얼굴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기리로다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칭송하겠나이다“

13절에 나오는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칭송하겠나이다“ 이것이 되려면 나 말고 쳐들어오신 주님의 나가 그 사이의 투쟁 가운데서 나는 하나에 주님의 오심을 보여주는 봉사자로서 나타날 때 이러한 찬미가 거기서 생겨나는 거예요. 내가 주의 말씀에 순종 못해요.

누가 내 안에 예상치 나가 들어와서 나는 그분 앞에서 옛날식대로 그럼 내 것은요, 돈은요, 자존심은요, 나 창피하잖아요. 이런 발악이 일어나는 거예요. 발악하면서 나는 실체로 여기고 주님께서 바람 같이 흐름으로 파동이 오는 거예요. 그럼 나는 입자가 되어 반항하지요. 나중에서 그 흐름이 이겨요.

이겨버리면 그 사이에 내가 몰랐던, 옛날에는 알았다 하지요. 주님을 찬송해야 마땅하다 하고 합당하다고 하는데 그 찬송이 건성이 되는 데요. 찬송과 가스펠송 너무 많이 알아. 하지만 백날 불러 봐도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마구 불렀던 거예요.

그런데 나를 깎아버리고 나를 소멸시키고 부정해버리고 그 자리에 주님이 등장해버리면 아까 그 놀라운 대중가요란 이름의 가스펠송, 너에게로 오는 참 힘들었다는. 나는 힘든데 주님께서는 마땅한 거고. 결국 내가 한 것은 주의 봉사가 되도록 나는 숨기고 주님을 위해서 섬기게 되는 거예요.

끝으로 한 말씀한다면,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란 사실이 성령의 바람으로 우리에게 밀려왔다가 떠나고 또 밀려오고, 떠나버리면 나 잘났다 하다가 또 밀려오면 역시나 주의 말씀은 주의 죽음이 있는 말씀이 진정 살아 있고 나는 죽은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우리를 소멸해주시는 성령이 오심을 감사합니다. 거저주시는 데 태어난 것도 우연인데 우연일 것을 모르고 마치 마땅히 내가 꼭 잘나야 된다는 우김이 내 생각이 악마의 생각인 것을 늘 들추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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