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HOME > 게시판 > 자유게시판
2019-10-16 15:57:45 조회 : 66         
안양20191010b야5장17절(밭이랑)-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119.207.152.148)
안양20191010b야5장17절(밭이랑)-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엘리야는 지금 죄가 관영했기 때문에, 죄가 관영했다는 것을 그 타이밍을 그 거대한 중복된 현실, 그게 하늘나라에서는 눈치 채가지고 하늘나라 천상회의의 결정에 의해서 엘리야는 선지자니까 엘리야를 파견시켜 버립니다. 이건 뭐냐 하면 악마의 목구멍 속에 엘리야가 지금 들어가는 거예요. 사적으로 구원받고자 한다면 우리는 악마와 사귀어야 합니까, 멀어져야 합니까? 악마가 못 따라오는 곳으로, 악마가 없는 곳으로 도망쳐야 되지요. 악마가 없는 곳. 현재 사람들 보기에 악마가 없는 곳은 어딥니까? 강남이지요. 환경이 깨끗하잖아요. 깨끗해서 지리상 골짜기가 아니고 터가 땅값이 비싸요. 악마가 없는 곳에.

악마가 있는 곳은 뭐냐 하면 구로동 저 후진데. 빌라 옛날 못사는 동네, 지금 말고 옛날 광명, 부평이나 부천, 소사, 요새는 많이 개발했지만. 서울로 올라가다가 튕겨가지고 경기도 변두리 촌으로 가는 사람들. 못 살고. 제일 전셋집 허름한데 사는데. 그렇게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반대로 악마의 목구멍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개인적으로 어떻게 구원 받느냐는 이건 성립이 안돼요. 이미 모든 인간들은 구원받지 말아야 돼요. 선악과 따먹은 후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칙에 의하면 구원 있을 수도 없고, 구원될 수도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그 인간들을 위하여 위로한답시고 악마가 만든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종교에요. 종교. 기독교도 그런 종류에요. 악마가 만든 중에 하나가 위로해 주는 겁니다. “사는 게 힘들지? 이 땅에서 고생 많지? 죽어서는 호강해야 되지 않겠어. 고생 많이 하면 비례해서 죽어서는 니가 상급 받고 좋은데 갈 수 있어.” 끊임없이 이렇게 위로를 하는데 위로에는 뭐가 빠졌느냐 하면 나라는 자기 부인이 빠져버렸지요. 자기 부인. 끝까지 내가 나를 지켜야 돼! 마지막 버티는 제일 소중한 것은 나. 어떤 수단과 목적을 해도 나는 버리면 안 돼. 이리 된다니까요. 갈수록 점점 악마가 돼는 거예요. 갈수록.

어제 수요설교 같으면 당구공이 있는데 복음으로 하니까 복음이 다 흘러내리는 거예요. 스며들지 못하고. 굳건히 지키는 거예요. 나를. 최고로 따지는 것은 뭐냐, 결국 내가 이렇게 10년 교회 다녔다. 남는 건 뭐냐 하면 ‘나한테 실익이 뭐였던가.’ 계산하는 거예요. 나에게 오는 이익은. 내가 원하는 나 되는데 신께서는 어떤 보탬을 줬느냐, 내 과거의 아픔을 보상해 줬느냐, 어쩠든 간에 내가 빛나는 존재로서 어디까지 성과를 냈느냐, 그걸 따지는 거예요. 목숨 걸고 지키는 게 있어요. 인간은. 그것은 뭐냐, 자긍심이죠. 자존심이에요. 그걸 목숨 걸고 지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예수를 이야기하고 신학을 이야기하고, 신학박사, 목사가 된다 할지라도 마지막 최후에 나오는 진짜 알맹이는 뭡니까? 그러니까 나를 무시하지 마세요. 나 인정받고 싶어요. 이 세상에서. 아까 나왔지요. 나, 인정받고 싶어요. 그것만 나오는 겁니다.

그림하나 그리겠습니다. 이런 괴물이 있다면 혀를 낼름거리는 괴물 속에 목구멍이 이렇게 있을 게 아닙니까. 이 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이 속에 들어가면 그 다음부터 성도가 들어갈 때는 자아를 가지고 들어가다가 들어가면 여기서 뭐냐 하면 이게 돼요. 어릴 때 많이 먹은 적 있는데. 발포성 알약 아십니까. 물에다가 딱 넣으면 신기하게도 뭔가 거품이 막 일어나면서 점점 더 그 실체는 축소되지요. 사라지지요. 마그네슘 있잖아요. 쥐날 때. 후딱 마그네슘 먹으면 약 한 3초 내지 5초 만에 풀리거든요. 이건 너무 구라 같은데. 마그네슘을 복용하게 되면 그것도 독일제 복용하게 되면 질 좋은 거 하게 되면 풀려요. 미리 먹던지. 다리 서서 강의하는 사람들 좋아요.

발포성 알약이 퍼지면서 녹아져 버리지요. 이게 뭐냐 하면 자기 부인인 거예요. 죄가 있어줘야 자기 부인이 되는 겁니다. 물어뜯으니까. 사방에서 물어뜯어요. 닥터피쉬 같아. 닥터피쉬 알아요? 우리교회 어떤 분이 몰라서 뭐요? 하는데. 온천 같은데 가면 조그만 물고기가 몰려와서 각질은 다 뜯어먹는 게 있어요. 우리 힘으로 절대로 자기 부인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이건 개체가 녹아지는 거예요. 어디로? 집단 속으로. 보편명제 속으로. 개체사실이 보편명제 용도로서 발포성 알약처럼 녹아져버리지요.

그러면 그걸 다시 끌어 모아서 이게 나야! 라고 끌어 모을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는 거예요. 해봐야 그게 중량 무게만 나가니까. 그래서 죄가, 악마가 왜 필요하고. 제가 악마를 공룡으로 그림을 그렸지요. 실제로 욥기에 보면 악마를 이렇게 큰 악어로 묘사되고 있어요. 괴물이 이렇게 큰 것은 이 안에 큰 속에 악마가 성도의 구원 받는데 필수적인 환경이 되는 겁니다. 악마를 싸워서 피하지 말고 도망치지 말고, 악마 속으로 들어가면 돼요. 악마 속으로. 그럼 악마는 무슨 세계냐 하면 선과 악으로 법을 강조하는 세계에요. 법으로서 선과 악을 강조하는 세계. 그렇다면 아까 제가 첫 번째 강의한 거 여러분들이 잘 이해했으면 다시 한 번 여러분이 이해했는가, 복습 들어갑니다. 물으면서.

선과 악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습니까? 언어로 구성되어있지요. 남이 이야기하기 전에 퍼뜩 이야기해줘야 여러분들이 똑똑한 걸 유지가 되기 때문에. 선과 악은 언어로 되어있지요. 그럼 어떤 집안 식구나 남편이나 아내나 아들이나 뭔가 말을 할 때는 그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나는 이래서 착한데 엄마도 나처럼 착해. 라는 그런 의도가 담긴 체 말을 하게 되어있어요. 친구사이도 마찬가지에요.

나는 착한데 너도 나처럼 착할 수 있어? 라고 하는 거예요. 동의하면 우리 둘은 이젠 착함의 동호회. 우리 둘은 에브리바디 착한 거예요. 항상 내가 착하다는 것은 무엇의 권리가 있느냐 하면 존재할 권리가 있고, 건강하고 오래 살 권리가 있다는 겁니다. 착하면. 만약에 안착하기 때문에 조기에 죽고 사업 망하고 다 깨지고 이렇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환경이 자기가 의도대로 안 되고 어렵다 할 때는 무엇을 또 투입하는 거예요. 이 악마 안에 악마의 세계에서는 착함을 투입하는 거예요. 그 착함 중의 하나가 예수 믿기, 성경공부 하기, 착실하게 나쁜 일 적게 하기, 길에서 동량하기, 이런 거 하는 거예요.

어젠가 우리교회 질문하신 분 있지요. 예수 믿고 난 뒤에 길에서 동량하고 싶은데 예수 믿고는 목사님 말씀대로 동량하기가 갑자기 돈이 아까와지고 싫기도 한데 이 문제 어떻게 해결합니까? 과연 예수 믿고 난 뒤에도 구제해야 되고 동량하라는 말이 성경에 나오는데 그걸 어떻게 해석해야 됩니까? 그런 질문을 했는데 보신 적 있어요? 우리교회에 질문답변에 나와 있어요. 그래서 내가 답변을 이렇게 했지요. 구제는 선행이든 동량이든 간에 불신자와 달라야 되겠지요. 이렇게 운을 떼고, 불신자의 특징은 뭐냐, 뭘 해도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아챈다는 거예요. 그러면 신자의 특징은 뭐냐, 신자도 마찬가지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아채는데 이게 내가 숨어있던 죄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신자는 주께서 친히 다루시는 서커스 꼭대기에서 다루시는 방법이에요.

내 나름대로의 행함을 통해서 선에 머물고자 하는 모든 시도가 이게 애초부터 안 되는 일이었어요. 깡길렘이라는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가 있어요. 프랑스 인식론에 계보라는 책에도 이 사람 이름이 나와 있는데. 제 글에도. 이 사람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 사람은 의학과 생물학에 인식론을 연구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그냥 이야기했다면 유명한 사람이 아닐 텐데 이 사람은 반대로 이야기했어요. 멋진 아이디어를 끄집어냈는데 뭐냐 하면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가운데서 사람들은 뭐를 우선시하느냐 하면 정상적인 것을 우선해가지고 여기에 어긋나면 이건 병리적이라고 이렇게 봤다는 거예요. 병리라 하는 것은 환자다 이 말입니다. 몸이 건강하지 않다 이런 뜻이지요. 정상이란 말은 몸이 컨디션이 괜찮고 건강하다는 뜻이거든요.

건강을 우선으로 하고 거기서 이탈된 것을 병리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깡길렘이라는 사람은 이게 틀렸다,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의학이라는 것이 발생되려면 반드시 환자가 자기가 아프다는 것을 언급을 해줘야 의사가 그 다음 조치에 나서게 돼있다는 거예요. “어디 아파서 병원에 오셨습니까?” 멀쩡한데 오는 것은 생수 팔러왔거나 보험 들라고 온 것밖에 더 있어요. 아프기 때문에 온 게 아니냐 말이죠. 그렇다면 정상이 이 아픔을 확대시키자 말이죠.

확대시키면 뭐가 돼요? 정상이라는 것은 기껏 그 시대에 평균에 지나지 않아요. 평균. 그 시대가 만약에 60세가 인간의 평균이라면, 이건 제가 어릴 때는 60세가 평균이었어요. 그래서 환갑 했거든요. 아이구~ 아직까지 살아있으니 복된 영감입니다. 지금 60세가 환갑 한다고 하면 니 지금 욕보이나! 이렇게 하거든요. 평균인데, 평균보다 못한 걸 병자라 했는데, 이 병리적인 것을 더욱 더 연구해 보니까 이게 60세가 환자네. 도대체 얼마나 못났으면 60살까지 밖에 못 살겠어요. 그러면 지금의 평균이 뭡니까? 80이다 말이죠. 전에는 60밑을 전부다 환자로 봤는데, 지금은 80밑에 75세에 죽으면 이건 당신 무슨 병에 걸려 죽었느냐? 실제로 노환이라는 말을 쓸 수가 없어요. 80밑에는. 80밑에는 노환이란 말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점점 늘어나지요. 왜냐하면 병리를 연구하는 의학이 발달하다 보니까 평균도 병행해서 늘어나요. 지금 90 안되면 무슨 병에 걸렸어요? 이러고 있다고요. 기력이 빠진 걸 모르고 무슨 병에 걸렸어요? 따라서 뭐냐 하면 병리적인 것이 이것이 전제로 해서 정상인 것을 이건 유동적이다 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아픈데 건강한 것이 그 때 그때 달라요. 이렇게 주장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이 주장하는 말이 바로 마태복음9장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해요. 의사는 병든 자가 있기에 의사가 있지, 병들지 않으면 의사를 찾지 않는다. 이걸 오늘 본문에다가 적용시키면 뭡니까?

죄가 관영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죄라는 것을 특수한 경우로 봐요. 우리는 다 멀쩡하고, 괜찮고, 인격적인데 죄라는 것은 교도소 가는 사람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만 나쁘다고 생각했는데 성경은 어떻게 됩니까? 그걸 선지자를 통해서 엘리야를 통해서 그걸 반대로 하는 거예요. 정상적인 것이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정상의 모델은 장차 최초의 인물로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만이 말씀 외에 또 있다는 말이 아니고 그분만이 정상이고 다른 사람은 정상이 아닙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오직 예수님에게만 그 이야기했어요.

이제 그것을 확대시켜 나갈 거예요. 확대시키는 방법은 뭐냐 하면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님을 당의정으로 여겨요. 당의정. 발포성 알약으로 당의정으로 해가지고 여기 하늘나라를 만들면서 요걸 세상에다가, 죄에다가 퍼트려버려요. 퍼트려버리면 요 당의정의 혜택, 발포성 알약의 혜택을 입은 사람이 있겠지요. 그 사람이 뭡니까? 예수님의 영이 임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볼 때에 니가 어디서 어떤 짓을 했느냐를 보는 게 아니고 내가 준 게 그 안에 있는가를 보는 거예요.

제가 설교시간에 서랍 안에 공 들었다 했지요. 그게 로마서8장에 나오는데 여러 번 했지만, 세월 지나면 잊어버리니까 다시 한 번 확인에 들어갑니다. 이런 본문 같은 것은 자주 봐서 기억하는 게 좋겠지요. 로마서8장9절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만일 너희 속에,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둘로 본다고요. 우리를 보는 게 아니고 우리를 하나의 껍질로 보는 거예요. 우리를 하나의 서랍장으로 봐요. 만약에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되어있다고요. 그럼 우리는 뭡니까?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서랍이고, 주님은 공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은 공이 되는 거예요. 흔들어 보세요. 공이 있는가.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라. 아! 이 대목. 그러니까 성령이 왜 와야 되느냐 하면 우리가 이 성령 없이 껍데기 가지고 아무리 착해봐야 그것은 이 율법 앞에 노출되고 이 법 앞에, 말씀 앞에 서게 되면, 우리는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는 존재에요. 우리 자체로서. 중복현실이 아니고 단독현실이 되게 되면 우리는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는 거예요. 여러분들 다 유식하니까 거기에 수준 맞춰드려야지요.

실제세계를 현실로 이걸 전부로 보면 안 되고, 실재세계로 봐야 돼요. 실재세계. 이게 같이 있어야 돼요. 실제세계라 하는 것은 과학에서 말하는 눈에 보이는 세계고, 실재세계라 하는 것은 고린도전서1장16절처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전부 다 그리스도를 향하여, 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실재세계거든요. 이게 중복되어있다니까요. 하나님의 영은 실재세계에서 영이 주어지게 되어있어요. 영이 주어지게 되면 이 사람은 뭐가 보이느냐 하면 나 혼자 있는 자체가 이미 악마의 결과물이고, 나 혼자 있다면 아무리 몸부림치고 교회 다녀도 소용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에요. 성경공부해도 아무 소용없어요.

그러나 우리 안에 누가 온다? 성령이 오게 되면 그 다음에 로마서8장에 보게 되면 실재세계가 실제세계에 들어오게 되면 그 다음에 육신은 이미 우리를 뭘로 봅니까? 이미 맛이 간걸로 봐요. 실제로 우리는 조금씩 매일같이 우리는 점점 죽어가고 있어요. 조금씩. 아무리 화장품이 발달해도 조금씩 화장품이 감당하지 못할 세월의 무게 갑니다. 시간은 고장 난 벽시계처럼 멈출 수는 있지만, 이건 시간의 시계는 고장 나지도 않아요. 계속 우리를 없앨 때까지 멈추지를 않습니다. 대단한 고집이에요.

어릴 적 놀러갈 때, 소풍갈 때 들떴지요. 집에 오면 퍼지는데요. 여행은 두 번 다시 못갈 거야. 힘들어 죽겠어. 그래가지고 또 있다 보면 한 번 바람 쐐. 갑자기 또 중독돼가지고 또 나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로마서8장에 우리 육신은 죽을 몸인데 이미 우리가 죽었지요. 죽었으면 죽은 자가 스스로 꼼지락 거리면서 자기를 잡아당기면 안돼요. 왜냐하면 그건 산 게 되니까. 죽으려면 어떤 짓거리도 죽음에 이미 합류돼가지고 그 자기를 살리려고 애쓰는 것도 점점 더 자기를 죽음의 질곡에 더 빠트리는 죽음의 짓에 해당되는 겁니다.

기도하는 것도 더욱 더 나를 지옥 보내고, 선교, 전도, 성경공부 이 모든 설교 강의도 나를 더욱 지옥 사람 되게 하는 하나님의 방식이에요. 어디를 주목하라는 거예요? 실제세계에서 내가 활동하는 것은 이게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엘리야가 기도한다고 해서 엘리야가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삼년 육 개월 동안 비오지 않기를 기도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이미 엘리야가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서 아까 베드로전서1장11절 말씀처럼 영이 있어서 엘리야로 하여금 엘리야 본인이 예견하거나 예상한 일이 들어있지 않은 다른 일이 툭 튀어나온 거예요.

한 번 물어봅시다. 인간이 예상하지 않은 일이 나오면 즐겁습니까? 뭔가 바보 된 느낌이 들어요? 어느 쪽입니까? 바보 된 느낌이죠. 바보 된 느낌이 기분 좋아야 되는데 기분 나쁘다는 것은 아직까지 개체가 덜 발포됐어요. 바로 안 되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왜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은 충동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이 정도하면 나 인간 맞잖아. 라고 자꾸 우기고 싶은 거예요. “목사님, 저 바보 같지요?” 이건 발포성 많이 된 겁니다. 아니고 “목사님, 저 복음도 알고 똑똑하지요?” 에이, 지옥이나 가라. 자기 부인이 안 돼요. 왜? 왜 집단 속에 보편명제 속에 빠지지 않고 개별사실을 계속 붙잡고 있느냐 말이죠. 누구 좋아라고? 마귀만 좋아하지요.

그런데 영이 있으면 죽을 너희 몸도 살리라. 사는 권한은, 주도권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주님한테 있는 겁니다. 어제 수요설교에 의하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창세기3장16절에서는 여자의 주도권은 누구한테 있다? 남자한테 있는데, 호세아에 오게 되면 남자한테 있는 게 아니고 값에 있어요. 값 치름. 값을 치름에 있어요. 그리고 여자는 모든 인간을 주의 백성을 이야기합니다. 음녀 같은 인간들을 값이 와서 값이 꽂혀서 구원받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실컷 이 땅에서 원 없이 죄인 되어야 돼요. 원 없이. 원 없이 죄인이라는 말은 내가 따로 죄인이 아니라 죄 속에 일부가 되어야 돼요. 죄 속에 일부. 왜? 육신이 그러하고 육신에 대해서 주께서 그런 식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공룡그림을 또 그리고 싶지 않아요. 그림을 하도 못 그리기 때문에. 어떤 목사님이 저보고 그런 이야기해요. 목사님의 그림은 발전이 없네. 저는 진화론 안 믿거든요. 몰락입니다. 그림에서도 몰락이에요. 그 공룡 속에 악마의 목구멍 속에 집어 들어가요. 하나의 알약 삼키듯이. 수면제 먹듯이 들어갑니다. 들어가면 그 안에 온 전체가 악마의 세계라는 것을 발견하게 돼요. 그런데 처음에는 그걸 발견 못해요. 왜냐하면 아직까지 발포를 덜했기 때문에. 내 개체가 살아있어요. 분명히 주의 종 맞는데, 말씀의 주되심을 인정하는데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나는 주님을 이용해서 내 구원받겠다는 시력을 놓치지 않고 있어요. 이게 문제거든요.

그러면 여기서 악마의 세계에 들어왔고, 어두운 세계에 들어왔기 때문에 주위에서 뭘 가지고 자꾸 이렇게 우리를 흔들어 놓습니까? 우리에게 걱정 근심을 넣어줍니까? 니가 잘해야 된다고 흔들어 놓겠지요. 그럼 반응이 뭐예요. 자존심은 있어가지고. 우리가. “그래, 이 정도는 잘했어. 이 정도 기도 많이 하고, 강의 잘하고, 나는 착해. 나는 나쁜 짓 한 거 없어.” 라고 대들겠지요. 이게 그 악마의 술수에 빠진 거예요. 말로 해가지고는 잘 실감이 안 나는데요.

열왕기상17장 한 번 봅시다. 1절은 누가 읽어주셔야 돼요. 열왕기상17장1절,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렇게 되어있지요. 수 년 동안 비가 오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그리고 19장 봅시다. 그걸 기억하세요. 그 정도로 지금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왔습니다. 선지자니까 온 거예요.

19장14절 읽겠습니다.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히 특심하오니, 특심하오니 갑자기 개체지요. 개별사실에 자기가 쳐다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를 죽였사오며 오직 누구만 남았다고 되어있어요? 오직 나만 남았지요.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서 빼앗으려 하나이다. 그래서 자기는 지금 악마를 피해서 도망치고 있다는 거예요. 19장 1절에 보면 이세벨이 현상수배 때려가지고 엘리야 잡아라 나오니까 겁이 나서 도망치는 거예요. 19장 2절에 보면.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내가 이맘때에는 니가 정녕 죽으리라. 하니까 엘리야가 그 소리 듣고 브엘세바 저 남쪽까지 냅다 도망칩니다.

자, 악마의 목구멍에 들어가야 될 엘리야가 피해서 도망치기 시작하는 거예요. 왜? 개체가 있으니까. 어쨌든 나한테 실익이 있어야 하니까. 하나님이고 뭐고 다 좋은데 우선 나부터 살고 보자는 거예요. 그게 지금 자기 부인이 안 된 상태인 거예요. 분명히 선지자인데. 그 기도가 응답됐잖아요. 그 정도 대단한 사람 아닙니까? 엘리야는 대단치 않아요. 성정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에요. 그냥 댄 통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왔을 뿐이지. 나만 착하다는 말은 자기는 죄를 모른다는 말이에요.

그 공룡, 악마의 내부를 더 깊이 내려가 봐야 저쪽이나 내 쪽이나 둘 다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서 발포성이 나는데. 아직까지는 뭐냐 하면 나는 착하고 저쪽은 개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던 그가 나만 남았다고 하니까 열왕기상19장 18절에 이거 누구 한 번 읽어보세요.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아멘. 감사합니다. 참, 그 용감함에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이렇게 대표로 읽는 죄를 지어줘야 발포성이 또, ‘아! 그 때 목소리가 너무 깨진 목소리였지 않은가, 남들이 내 목소리 뭐라고 하는가.’ 갑자기 집에 가면 그게 2시간 반 동안 생각나요.

“제발 나보고 기도하지 마세요.” 라는 이유가 기도하게 되면 속에 들어있던 그 죄성이 다 남한테 폭로가 되니까 그동안 자기가 굳혀 온 세상의 인정에 그게 홈이 파이는 거예요. 여러분, 애플이라는 회사 로그가 뭡니까? 이미지가. 사과인데 한 입 베어 먹었지요. 이게 뭐냐 하면 선악과 사과를 베어 먹었으니까 이제부터 우리는 지혜로운 회사다 이 말입니다. 악마의 지혜, 뱀의 지혜에요. 이 지혜를 더 크게 하기 위한 회사 세웠다 이 말입니다. 조롱하는 거예요. 기독교를. 거기 조롱에 대해서 사람들이 스티브잡스가 어떠니, 청바지가 어떠니 하는데 청바지 입으면 뭐 합니까 이미 죽었는데. 그 책들이 많이 나왔잖아요. 그게 바로 악마의 보편성을, 악마가 이야기한 보편 명제를 스티브잡스가 대신 보여준 거예요. 한국의 살길은 저런 인재나 천재를 키워주는 것이다. 정권 잡은 자들이 전부 다 높여주는 거예요. 앞으로 인류가 밥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을 수 만 가지나 그 사람이 만들어줬기 때문에 우리의 희망이고, 우리도 그걸 본 받아야 돼!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니 그런 스티브잡스가 있으니까 세상이 얼마나 지옥스럽다는 걸 알겠지요. 그게 무슨 자기 부인입니까.

그런데 오늘 보니까 스티브잡스 나왔네요. 여기에 엘리야. 로마서11장4절에 사도바울이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 남겨두었다는 이야기를 하거든요. 뒤에 뭐라고 해석하느냐 하면 그러므로 행함이 나와요. 자기 행함이라는 것은 모든 방향이 “나 잘났지요. 나를 지옥 보내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 라는 식으로 나온다면 복음이 안 나오고 나 구원이 나온다면 그 사람은 행함주의자 이 말이에요. 행함주의자. 그 자체가 그것은 전혀 그냥 서랍장에 공이 안 들어있는 거예요.

아까 로마서8장에서 육신을 뭐라고 했습니까? 이미 우리는 죽은 자죠. 죽은 자가 할 소리가 없어야 되지요. 이사야6장에 의하면 우리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끝나는 문제인데, 엘리야가 아직 큰 소리 치는 거예요. 왜? 비교해보니까. 하나님 앞에 인정받은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거예요. 왜? 나만 복음을 알고 나만 제대로 사니까. 그 자체가 주께서 십자가라는 시초적인, 원형적인 인간, 유일하게 생명나무가 되시는 그 분하고 한 번 엘리야하고 비교해 보세요. 예수님은 죄가 없는데 어떻게 됐습니까? 죽었잖아요. 무슨 뜻에 의해? 아버지 뜻을 위하여.

그런데 엘리야는 아버지 뜻을 빙자해서 자기가 기어이 살아남고자 하는 거예요. 천국 가고자 하는 거예요. 오늘날 교인들처럼. 복음에 목숨 걸지 않으면 결국 복음 다 떠나게 되어있어요. 제가 두 가지를 항목을 내세울 테니까 어느 게 맞는가 보세요. 1번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 2번 성령이 임하면 십자가의 증인이 된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2번이 정답이에요. 2번.

나의 증인이 되리라, 할 때 예수님이 이 땅에 나타나셨을 때, 반드시 사건으로 나타나거든요. 사건으로. 예수님이 육신으로 나타난 것은 언제냐 하면, 특별할 경우에요. 부활하고 난 뒤 제자들에게 나타났고, 사도바울에게 나타났지요. 504명에게 나타났고. 끝이에요. 그 다음에 주께서 사도바울에게 로마에 갈 때 풍랑일 때 그때는 예수님이지만, 성경에 보면 천사가 곁에 서서 두려워 말라. 기어이 로마에 가야 돼. 사실은 천사가 나타났다면 배후에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예수님이 하신 거죠.

그러면 사도가 그렇게 했을 때 사도가 1번 나는 구원받았다. 2번 나는 십자가의 증인이다. 어느 쪽이겠습니까? 주님이 나타날 때. 주님이 증인돼서 나타날 때는 나는 구원받았다. 헤헤헤! 가 아니라 뭡니까? 나는 할 일이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다 이루심을 증거 하는 거예요.

여러분 왜 삽니까? 왜 살아요? 예수님 증인입니까? 십자가 증인입니까? 예수님 증인 같으면요, 쉬워요. 성경공부해가지고 예수님 이야기해서 강의하고 이러면 돼요. 그러나 십자가라 하는 것은 물어 뜯겨야 돼요. 이건 내가 아는 지식은 예수의 증인이지, 십자가 증인이 아니라고요. 십자가 증인은 가만히 있어보세요. 주위에서 가만히 두지를 않습니다. 마구 흔들어대요. 우리를. 왜냐하면 우리가 흔들 조건을 내 쪽에서 제시했기 때문에 그래요.

“아휴, 부러워라! 우리 집에는 저런 것도 없고. 우리도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뭔가 세상에 미혹 받아서 가니까 거기서 기다렸다는 듯이 거기서 “니가 이렇게 하게 되면 이거 줄게.” 라는 그러한 광야의 예수님이 사탄에게 시험받은 그 시험들이 마구 우리에게 쏟아지는 거예요. 아직까지 우리는 죽을 때까지 개체가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래, 나는 저거 가지면 예수의 증인으로 거듭날 수 있어!” 또 개별적 사실에 대해서 집착을 하고 보편적 명제는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겁니다.

그 개인을 다루는 그림에 대해서는 제가 대구 강의하면서 이런 그림을 그렸지요. 십자가 보이고 아스팔트길이 있잖아요. 그런데 수시로 중간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수시로 대구 강의에서. 골목길이 있다 했지요. 골목에 들어가니까 기역자로 꺾어 들어가니까 뭐가 안 보입니까? 십자가가 안 보이죠. 처음 믿을 때 “예수님 십자가! 감사합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하다가 골목 가니까 골목에서 자, 골라! 골라! 골라라 하니까 들어간 거예요. 들어가기 전에 갑자기 골목이 있으니까 골목이 차단하니까 십자가가 안 보이지요. 여기서 누가 더 잘났고, 인정받는가, 그것만 보인다고요. 여기서 진탕으로 싸우지요. 여기서 발포성 많이 나서 많이 깨졌거든요. 깨져가지고 성령께서 강제로 이 길로 보이게 만듭니다. 십자가 보이게 끄집어냅니다.

“그렇지. 내가 이렇게 큰 은혜 받아 놓고도 아직 내 잘났다고 하는구나. 남한테 안 지려고 하는구나! 그래, 이 길로 가자.” 가면 뭐합니까. 오른 쪽 골목에서 또 기다리는데. 또 집어내가지고 니가 복음을 더 아나, 내가 복음을 더 잘 아나, 또 한바탕 싸우고 와가지고. 아무 의미 없는 항상. 갈라디아서3장1절이잖아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어느 골목에서 너를 이끌고 들어가느냐. 어느 누가 너를 꾀더냐. 그러니 이 전체가 뭐냐, 공룡 안이에요. 이 전체가 악마의 세계 안이 이렇게 되어있어요.

십자가는 있는데, 악마가 약이 올라가가지고 자기는 못 들어가지만 자기 수하에 그동안 자기가 붙잡고 있던 그 사람들 중에서, 악마가 자존심이 되게 세거든요. 내가 못 들어가는데 니도 못 들어가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구원도 못하고 내가 잘린 그 세계에 니가 뭔데 이 후배가 들어가느냐, 선배가 못 들어가는데. 직장에서 많이 왕따 당할 거예요. 내가 지옥가면 너도 같이 지옥가자. 니가 뭔데 천국 가. 그렇게 된다 말이죠.

임재범이 불렀던 유명한 노래 <고백>이라는 노래있지요. 그 여자만 허락한다면 무슨 죄도 다 받겠다는 거예요. 저 여자만 나한테 허락하신다면 무슨 죄도 다 받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임재범은 그걸 뭐로 보느냐, 그걸 사나이다운, 여자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인양 생각한 거죠. 옛날 임재범이죠. 요새 교회 잘 다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개체가 복음 앞에서는 눈부신 광채 앞에서 나는 있으나 마나 느끼지도 않아요. 그런데 세상을 살다보면 주의 허락에 의해서 악마가 나를 골목으로 집어넣습니다. 그래서 분탕질하고 또 온갖 스트레스 받는다. “주여! 어찌하여 저에게...” 주님 들으면 무슨 소리하는지 몰라요. 나만 남았습니다. 이 세상에 믿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하는지 몰라요. 그러다가 다시 끄집어내게 되면 바로 이 세계. 이제부터 이 세계를 소개합니다.

이 세계는 무슨 세계냐 하면, 첫 째 시간에 잠간 언급했는데요. 성도로 인해 또는 오늘 본문 엘리야로 인해서 이 세상이 죄로 관영했음을 폭로시킨다. 죄가 관영, 더 쉬운 말로 죄가 매 맞을 만큼 죄가 숙성했음을 폭로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그런데 제가 엘리야의 예를 들었지만, 제 말을 들어보면 엘리야가 훌륭하지가 않지요. 저도 똑같아요. 똑같은데 엘리야를 발포성으로 점점 더 자기 부인시키고. 왜냐하면 니만 있는 게 아니고 칠천 명 있어. 라는 자체가 얼마나 부끄럽겠어요. 왜냐, 자기가 살펴본 자기가 아는 지식수준에서는 자기밖에 없는데 주님께서는 내 모르는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얼마나 또 다시 여기서 깨지는 거예요. 엘리야가.

‘아! 내가 선지자라 하지만, 오실 분에 비할 바가 아니구나!’ 예수님의 고생에 비할 바가 안 되고 예수님의 수모에 비할 바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놀랍게도 주께서 미처 모르는 주님이 주님 스스로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가신 길로 가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 굳히고 하나의 개체로서 유지한다는 자체가 갈수록 점점 더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이걸 오늘 제목으로 정하겠는데, 이게 뭐냐 하면 ‘소환’ 또는 ‘소환 당함’ 주님께로부터 소환 당함. “너, 교무실로 와!” 이런 거 있잖아요. “어이! 너 쉬는 시간에 교무실로 와!” 교무실에 있는 담임선생님한테 학생이 소환 당하잖아요.

우리의 인생은 소환 당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동안은 내가 고생했습니다. 내가 힘들어죽겠습니다. 하다가 소환 당하면 당할수록 그런 소리가 나올 처지가 아니고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건 일종의 성화론 아닙니까. 이건 일종에 내가 점차, 점차 발전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또 이렇게 대들 수 있지요. 그러면 내가 주님께 몇 년 걸려야 어느 정도 수준까지 이릅니까? 갑자기 자기 개체 수준 또 생각나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건 개인이 커지고 위대해 지는 게 아니고 닥터피쉬 이야기했지만, 이게 주의 폭탄이 주어지는 거예요. 폭탄이. 언약의 폭격이 주어지는 거예요. 내 인생에 하나님의 약속의 폭격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붙들고 싶은 가치 있는 것이 작살나고 파괴되지요. 제가 이 말하면 너무 쿨하니까 여러분들이 생각하면 ‘내 인생에서 뭐 파괴된 거 있나? 별로 없는 거 같은데.’ 또 이렇게 따져가지고 ‘그럼 나는 구원 못 받은 것인가.’ 또 걱정할 거예요.

그래서 제가 폭파 또는 파괴라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은 이게 엘리야도 이렇게 당했어요. 엘리야는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러나 주님에 의해서 매일 이렇게 끌려 다니고 수배당하고 힘든 인생을 살았거든요. 야곱도 그렇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마리아는 특히 예수님 임신해가지고 예수님 낳았던 마리아 같은 경우는 팔자가 더러운 팔자잖아요. 이런 고생이 어디 있어요. 그러면 이게 실재화가 되게 되면 어떻냐, 실재세계에서는 폭파당한 거 맞아요. 그러나 어에 이, 실제 세계에서는 뭐냐 하면 밭이랑이에요. 밭이랑.

밭이랑이라 하는 것은 특징이 뭐냐, 당사자는 고요합니다. 조용해요. 땅콩을 심던지 작물을 심어놓고 두툼하게 흙 해놓고 비료를 줘가지고 식물이 있잖아요. 그러면 그 옆에 반드시 뭐냐, 비가 와서 물이 흐르도록 밭이랑을 만들어줘야 돼요. 비가 안 올 때는 물을 뿌려가며 물이 뿌리에게 본래 얻고자 하는 수확물에게 공급이 되겠지요. 그러면 밭이랑 덕분에 식물이 잘 자랍니다. 주님께서 우리 주변에 우리가 예상도 못했는데 밭이랑을 계속 만들어준 거예요.

그 밭이랑은 우리가 예상 못했지요. 우리 뜻이 아니지요. 우리 뜻이 아닌데도 나는 그냥 옛날이나 지금이나 5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똑같아요. 꼭 여러분 같아요. 똑 같은데, 주변상황이 나로 하여금 복음으로 몰아넣는 거예요. 주님 앞에 소환 당하는 무빙을 의식하게 만들어요. 감지하게 만드는 겁니다. 돌아가는 내 인생 상황이.

그러니까 이 밭이랑이 왜 중요하냐 하면 내가 열심내서 내가 성경공부 하러 쫒아 다니고 하면 필히 우리는 이 개체가 더욱 더 우수한 개체라고 점검에 나서기 때문에 이 나는 바로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의 개체와 비교에 들어갑니다. 비교에 들어가면 이 개체와 개체가 베틀이 일어나요. 니가 믿음 좋은가, 니가 복음 많이 아는가, 시합에 들어간다고요.

그것은 모든 공로가 나도 모르게 내 주변에 이랑을 만드신 주님의 공로가 어디 있습니까? 날아가 버렸지요. 여러분들이 옛날에 해변가에 여름에 해수욕장에 그것도 차도 없어가지고 버스타고 가본 적 있잖아요. 친구들끼리. 버스타고. 튜브하나 사가지고. 한 개 사는 이유가 돈이 없어가지고 열 명씩 번갈아 가면서 물에 띄우고 하는 거 있잖아요. 할 때 모래사장에서 어떤 놀이하느냐 하면 심심하니까 중국집의 자장면 시켜먹고 남은 젓가락이 있으면 여기다가 모래를 해놓고 마지막으로 끝까지 모래를 남아있게 하다가 마지막에 잘못 건드려서 넘어뜨리면 그 사람이 벌칙을 받는 그런 게임 있지요. 이게 바로 이랑이에요. 이랑.

구원은 누가 하느냐 하면 주님이 다른 사람을 통해서 구원해요. 내가 반듯이 서게 되면 옆에 서있는 다른 주어진 젓가락하고 비교에 들어가게 되면 무엇을 놓치느냐 하면 주님께서 은밀하게 나를 구원시키고 있는 그 현재 움직이는 움직임을 우리가 까마득하게 모르게 되고, 자꾸 우리는 내가 이 정도로 잘났음을 가지고 거기에 집중하게 되면 이건 성화론에 빠집니다. 구원론에 빠지지요.

그 예가 뭐냐, 엘리야가 잘났어요? 남은 칠천 명이 잘났습니까? 이건 엘리야가 밭이랑으로서 남의 칠천 명 도와주는 구원되게 하는 밭이랑 가꾸는 일꾼으로서 주께서 사용하신 거예요. 엘리야가. 그러면 뭐냐 공부해서 남 주는 거예요. 기도해서 남이 응답받는 거예요. 이게 엘리야의 기도에요. 오늘 본문에.

그 정신이 본인이 피를 흘려서 본인의 목숨가지고 자기 백성 살리는 자기 백성으로 공급하는 지금도 멈추지 않는 그 작업을 옛날에는 엘리야를 통해서 오늘날 성도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남편이 복음도 모르고 교회도 안 나가는데 이상하게 밥하라고 월급은 갖다 줘. 밭이랑입니다. 자기는 내가 밥 먹고 어디에 관심 있는 걸 몰라요. 자기처럼 이 가정을 잘 건사해서 애 교육 잘 시키라고 돈 갖다 주는데. 그건 쓸데없는 헛짓하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 남편을 통해서 이렇게 나는 이 땅에 악마의 목안에 들어있는 그냥 발포성 알약이라는 것을 이 세상이 얼마나 악마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십자가의 증인 노릇하는데 그거 이야기하지 마세요. 그거 이야기해봐야 못 알아듣습니다. 그 이야기. 하나의 개별사실이거든요.

자, 결혼한 사람이 개별사실에서 제일 중요한 건 뭡니까? 가정입니다. 가정행복이 바로 나의 행복이에요. 가정이 요런 땅콩 밭이에요. 남의 땅콩보다 내 땅콩이 더 많이 열리기를 바라고, 내 자식이 남의 자식보다 더 잘되기를 원하고 내가 부은 연금은 나중에 반 토막 안 나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래서 태극기 흔드는 거예요. 정치적 발언이 나와서 미안합니다마는. 왜 노인들이 태극기 흔듭니까? 그리스, 스페인, 베네수엘라처럼 자기 연금 부은 게 반 토막 날까 싶어서 가는 거예요. 사회주의로 다 퍼주니까. 퍼줘야 다음에 정권할 때 표가 나오니까. 그리스가 그 짓해가지고 그 좌파로 다 날랐거든요. 갑자기 좌파 나오고. 다른 사람 또 강의 안 듣겠다. 미안합니다. 또 관리해야 돼. 복음 들으세요. 좌파라도. 좌파고 우파고 간에 지금 제가 말하는 것은 좌파를 욕하고 우파를 긍정합니까. 그게 아니고 인간은 복음 모르면 좌파든 우파든 전부 다 주님 앞에 좌파에요. 전부 다.

나만 밥 먹고 살자는 거예요. 그래서 니는 내가 월급 줘서 살면 따박, 따박 그걸 잘 하고, 또 엉뚱한데 우리은행 꼬임에 6%준다고 6억 날리지 말고. 잘 봐가지고 안전한데 잘 봐가지고 또 잘못해가지고 괜히 또 독일사채해가지고 50% 반 토막 나지 말고 내 가정 잘되게 돈 맡길게. 내 신임한다. 우리 부부는 신뢰 아닌가. 따라서 돈 맡기니 잘해라. 해도 복음 아는 사람은 그게 주께서 밭이랑 이루는 거예요. 왜? 개체가 무슨 소용 있어요. 주님만이 영원한 개체가 되고 우리는 거기에 주님 덕분에 살아가는 주님이 비료 줘가지고 매일같이 내가 예상 못한 예견 못한 다른 요소들이 나로 하여금 자기 부인하게 만드는 작용으로 계속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거든요.

엘리야가 그런 겁니다. 엘리야는 지만 잘 났어요. 내가 얼마나 예수님과 비교할 때 말도 안 되게 다른 존재라는 것을 인식을 못 했습니다. 왜? 시킨 대로 다 했으니까. 하자가 없어요. 시킨 대로 다 했는데 무슨 하자가 있어요. 엘리야가 욕심냈던가요. 아니잖아요. 그런데 주님에 의해서 자신의 문제점을 발각시켰지요.

결국 엘리야는 마지막 자기가 불 수레 타고 올라가면서 알게 된 것은 뭐냐 하면 그야말로 사도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다시 말해서 내가 아니다. 내가 나를 살리지 않았습니다. 주여. 나는 로마서8장에 의하면 죽을 육신이었고 내 안에 예수님의 영이 나한테 임하니까 그 임한 효과가 나의 70평생 80평생 90평생 그 효과가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말씀에 부합되도록 나로 하여금 한평생 내 몸을 통해서 죄라는 것을 노출시키는 그 밭이랑 작업을 하신 거예요.

갑자기 제목을 소환으로 했다가 밭이랑으로 합시다. 제목 ‘밭이랑’이에요. 주께서 다 이루어주신 거예요. 따라서 이런 밭이랑을 안다는 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이게 내 예견대로 내 뜻대로 모든 게 박살날 때입니다. “나, 주님하고 안 살래.” 그렇게 깨달을 때 복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아주 목구멍에 더 내려가야 돼. 악마의 목구멍에서 식도에서 더 내려가야 돼. 창자까지 내려가야 돼요. 세상이 악마라는 것을 이미 지옥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파견 근무시킨 겁니다.

이 세상이 지옥 가는 것은 문이 따로 없어요. 그냥 살다보면 지옥으로 빠지는 거예요. 이상한 게 뭐냐, 똑같은 죄인인데 천국 가는 게 이상해요. 성정이 그들과 다를 바가 없는데 주께서 일을 시켰다는 게 성령을 주셨다는 게 신기해요. 그 신기함에 감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한 걸음, 두 걸음 살아가는 것도 우리는 미처 몰랐다고 화를 내지만, 주께서 이미 예견하신 것이고 너 개체를 붙들지 말고, 자기를 부인하는 조치, 사랑의 조치인 것을 깨닫고 주님의 그 사랑만 무럭 무럭 자라나는 작물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안양20191010b야5장17절(밭이랑)-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6
게시물8,126건
번호 제 목 이름 날짜 읽음
8604   50강-엡 5장 14절(일어나라)191117-이 근호 목사 오용익 19-11-18 71
8603   5강-욥기 1장 13~19절(악마의 권세) 20191117-이 근호… 송민선 19-11-17 58
8602   주일학교 설교 / 예수님을 만난 사울 / 191117 정인순 19-11-17 59
8601   대구 모임 안내 이근호 19-11-17 27
8600   강남 모임 안내(11. 19. 화) 이명직 19-11-17 32
8599   부산 11월 모임 후 아홉산 숲에서 (1) 이창섭 19-11-15 165
8598   15강-호 4장 8-10절(법대로 일하심)191113-이 근호 목… 오용익 19-11-14 55
8597   20191111b 부산강의 : [시편]23(15편)-동거 한윤범 19-11-13 52
8596   20191111a 부산강의 : [시편]23(15편)-동거 한윤범 19-11-13 56
8595   49강-엡 5장 10-13절(책망하라)191110-이 근호 목사 오용익 19-11-11 56
8594   4강-욥기 1장 9~12절(사단의 존재성) 20191110-이 근… 송민선 19-11-10 82
8593   주일학교 설교 / 스데반집사의 죽음 / 191110 정인순 19-11-10 57
8592   부산 성경공부 안내 서경수 19-11-10 53
8591   서울의존강의20191107b 베드로전서3장 16절(선입견 공… 이하림 19-11-10 76
8590   서울의존강의20191107a 베드로전서3장 16절(선입견 공… 이하림 19-11-10 55
8589   14강-호 4장 6-7절(죄의 생산)191107-이 근호 목사 오용익 19-11-07 83
8588   293강-YouTube강의(진지함)20191105-이 근호 목사 이하림 19-11-06 56
8587   292강-YouTube강의(행복과 불행)20191105-이 근호 목… 이하림 19-11-06 62
8586   서울 강의 안내 이미아 19-11-05 48
8585   안양 모임 안내(11. 7. 목) 공은주 19-11-05 54
맨처음 이전 [1] [23 [4] [5] [6] [7] [8] [9] [10] 다음 맨끝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