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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2 19:13:08 조회 : 91         
97강-욥기 29장 19~25절(병주고 약주고)210822 이근호 목사 이름 : 송민선(IP:119.206.92.141)
97강-욥기 29장 19~25절(병주고 약주고)210822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9장 19~25절입니다. 구약성경 787페이지입니다.

“내 뿌리는 물로 뻗어 나가고 내 가지는 밤이 맞도록 이슬에 젖으며, 내 영광은 내게 새로워지고 내 활은 내 손에서 날로 강하여지느니라 하였었노라, 무리는 내 말을 들으며 나의 가르치기를 잠잠히 기다리다가, 내가 말한 후에 그들이 말을 내지 못하였었나니 나의 말이 그들에게 이슬같이 됨이니라, 그들이 나 바라기를 비같이 하였으며 입을 벌리기를 늦은 비 기다리듯 하였으므로, 그들이 의지 없을 때에 내가 함소하여 동정하면 그들이 나의 얼굴빛을 무색하게 아니하였었느니라, 내가 그들의 길을 택하고 으뜸으로 앉았었나니 왕이 군중에 거함도 같았고 애곡하는 자를 위로하는 사람도 같았었느니라”

욥이 자기의 위상, 그 당시 사회에서 욥이 느끼기에 사람들이 나를 어떤 식으로 생각해왔는가를 욥이 다 들은 것이 있고 본 게 있거든요. 그래서 그걸 솔직하게 다 이야기합니다. “내가 너희들보다 뛰어나기는 뛰어나잖아. 그것은 너희도 나도 다 같이 공감하는 바이다”라고. 물론 욥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욥이 아프기 전에 이야기예요. 아프기 전에 욥이 이렇게 대단한 위인으로서 일종의 멘토였죠.

정신적 지주로서, 스승으로서 이야기를 해왔고 많은 사람은 욥이 내뱉은 그 지혜에 감복 감탄해서 “당신 앞에서는 내가 할 말이 없네. 역시 당신은 나보다 더 뛰어나고 당신은 가르치기만 하시고 우리는 듣기만 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했고 어떤 사람은 “당신은 우리의 왕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신은 소중합니다”라는 식으로 당신들이 나를 평했잖아요. 좋게 봤잖아요.

그런데 이제야 와서 왜 이러는 거요? 몸이 아프고 망가지고 다 허물어졌다고 해서 너도나도 앞다투어 나를 질책하고 모독하고 짓밟고 무시하고 저주받았다고 한목소리로 말하니까 본래 잘 나가던 나, 그리고 몸이 아프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나입니다. 제대로 나를 평가해주세요. 이런 식으로 욥은 자기의 입장을 주저 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그당시 사람들과 친구들은 반박하지 못해요. 실제로 욥은 그만큼 남보다 뛰어났고 의로웠고 많은 사람을 구제했고 도와줬고 철저하고 완벽하고 가장 인간들 보기에 이상적인 존재로서 그 시대에 있었던 겁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욥이 많은 과부와 고아들을 도와줬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욥의 이러한 이야기가 성경에 나온 의도가 뭐냐 하면 지금도 사람들은 나보다 더 뛰어나고 많이 알고 훌륭한 사람이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것 말고 그분이 생각하는 것을 하게 되면 나는 그분의 생각을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면 내 인생은 펴고 아무 문제 없다고 믿고 싶은 그런 대단한 사람을 사람들은 찾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영웅을 찾고 욥은 영웅 행세를 했고 죽이 잘 맞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뒤에 욥을 망가뜨린 거예요. 욥을 망가뜨리니까 그동안 어떤 인간도 욥을 존경했다는 그것이 진짜 욥을 존경한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유리하다 싶은 것이 있기 때문에 욥을 한시적으로 존경하는 척했고 이용한 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까지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에게 뭔가 나올 것이 있다고 은근히 기대했던 그 사람들의 태도, 그 모습을 그대로 여기서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욥이 있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정신 차리라는 말이죠. 사람 볼 때 제대로 보란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왜 고난을 주었느냐. 우리는 왜 그렇게 고난을 주었는지를 따질 것이 아니고 욥이 뭐가 문제가 되느냐를 따지면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고난을 받을 때 ‘아마 죄지어서 고난받는다’라고 이렇게 생각한다면 욥 친구들의 오해와 동일하게 되어버려요.

그래서 왜 욥에게 고난이 왔는가, 욥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지 마시고 욥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가에 대한 겁니다. 말이 달라요. 문제가 있더라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들, 살아가는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문제 있다고 해서 뭔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문제없더라도 잘못한 것이 있다는 것을 욥의 문제점을 끄집어내면서 우리는 이걸 보편화시킬 수 있습니다.

‘나한테 그런 고난이 없다고 할지라도 나는 문제가 많구나’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거예요. 그러면 욥은 뭐가 문제냐 하면 욥은 자기를 정규직으로 본 겁니다. 계약직으로 보지 않아요. 하나님과 나와 계약한 것은 이제 계속 같다고 여겼던 겁니다. 왜? 너무나 바르고 착하고 하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가 하자가 없고 잘못이 없고 착하고 성실하고 정의롭고 하는 이 가치를 하나님도 상당히 귀하게 봐서 ‘참 아깝다. 너를 다치면 나에게 손해다’라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처참하게 손대시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죠.

어떤 가정에 아이가 있는 공부도 잘해, 똑똑해, 모든 것을 잘해요. 그런데 설마 엄마가 나를 때린다는 것을 상상도 못 하죠. 왜? 완벽하니까. 너무 완벽하니까 나를 나무랄 것이라고 상상도 못 한 겁니다. 욥이 그런 생각을 한 거예요. 욥은 지금 하나님 나라에, 하나님 세계에 자기는 숟가락만 하나 얹으면 되는 걸로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어물쩍 얹어도 하나님께서는 “야, 내 생각과 네 생각이 같으니까 우리는 자연스럽다”라고 받아 줄줄 알았죠.

마치 베드로 생각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았나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하나님 나라에 끼어도 괜찮은 그러한 조건을 갖춘 것 맞잖아요. 이런 베드로의 생각이나 욥의 생각이 지금 같습니다. 그러면 욥이 정규직으로 생각했던 이것은 뭣이 정규직으로 생각하고 내가 주와 함께 있다는 생각이 왜 잘못되었는가. 이것이 주님에게 필요한 세상인데 욥은 거기에 자기가 필요한 세상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주님에게 필요한 세상에서는 인간의 의도와 선입관은 일체 하나님께서 받지를 않습니다. 그중에 하나 예를 들게 되면 지난 시간에 욥이 빈궁한 자의 아비가 되고 빈민을 많이 도와주고 과부를 도와주고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그것과 예수님과 비교를 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4장 25~27절에 보면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그 당시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예수님은 오직 한 사람 사렙다 과부에게만 갔어요. 그 당시 욥이 있었더라면 욥은 오지랖을 떨면서 온 과부를 다 도와줬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 한 사람, 심지어 한 사람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라고 하시면서 단 한 사람도 과부라는 이유 때문에 도와줄 의무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그 한 사람도 안 도와준다고 하면서 도와준다고 한 사람이 단 한 사람이에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과부라는 이유 때문에 도움 받을 자격이 못 된다는 겁니다.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그 당시에 문둥병자가 한두 사람이 아니고 여러 명이지만 그냥 문둥병 걸려서 살갗이 썩어 죽으라고 내치시는 것이 하나님 뜻이에요. 그 뜻을 욥은 이해를 못 하는 겁니다.

세상을 사랑해서 인간을 만들어 놓고 인간이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는데 하나님께서 나 몰라라 하면서 방치 하는 것이 진정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이 “그렇다. 어쩔래? 네가 지금 개개냐? 대드냐?”라고 하십니다. “저렇게 텔레반에게 여자들이 죽어나가는데 가만 보고 계십니까?”라고 하면 “그냥 가만 보겠다. 왜? 뭐 어쩔래? 그런 이야기 하려거든 욥에게 이야기해라. 욥은 그런 거 잘 도와준다. 그게 뭐 어째서. 그걸 왜 도와줘야 하지?”

“사랑한다면서요. 하나님이 인간을”이라고 대답하면 “사랑은 개뿔. 네가 사랑의 개념을 알아? 인간은 사랑의 정의도 개념도 없어요. 이 세상은 인간 자기의 세상이 아닙니다. 인간은 없애버릴 요량이에요. 인간 싹쓸이 없애고 예수님의 세계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보면 됩니다. 이건 공식인데요 ‘언약의 본래 모습 갖추면 예수님 된다’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모습이 본래 모습을 갖추게 되면 예수님처럼 되는 거예요.

아무리 불쌍한 과부가 많아도 아무에게도 가지 않고, 문둥병자가 그렇게 범람해도 아무도 고쳐주지 않는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아무도 고쳐주지 않는다는 것을 근거해서 한 사람에게 찾아가고 한 과부에게 찾아간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일을 그런 식으로 하느냐. 그게 역시 이스라엘 역사 속으로 되돌아와야 합니다. 욥은 모릅니다. 제가 오전 설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이웃이 된다고 하는데 이웃이라는 것도 인간세계에는 없어요.

가게 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은 이웃이 아니고 손님이에요. 손님을 원하지 이웃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힘들고 외로울 때 누가 옆에 있어 주기를 바라죠. 그런데 혼자 있고 싶을 때 옆에 있으면 죽이고 싶습니다. 이건 알아서 나가지 왜 옆에 붙어서 그러지. 더운데 짜증 나게. 이거 귀신은 안 잡아가고 뭐 하나.

인간은 자기 세계 밖으로 못 나갑니다. 욥은 이걸 몰라요. 왜 모르느냐. 욥은 사람을 구경한 거예요. 관람한 겁니다. 사람이 사람 속으로 들어와야 하거든요. 이건 예수님만 할 수 있어요. 인간은 타인 속에 못 들어갑니다. 부부가 일심동체라고요? 꿈이 같을까요? 꿈이 같지 않습니다. 한쪽은 이빨 아픈데 옆에 있는 사람도 같이 아플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멀쩡하게 갈비 뜯고 있지요. 아주 약을 올립니다.

한쪽은 이빨 시려서 힘들어하는데 옆 사람은 아이스크림 먹고 있다니까요. 인간은 남들은 못 하는데 본인만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사는데 쾌감을 느껴요.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어떤 세상이냐 하면 못 믿을 세상이에요. 못 믿을 세상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믿음도 못 믿을 믿음이에요. 못 믿을 믿음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다고요? 그 믿음 다 헛방입니다.

욥이 지금 이렇게 탄식하는 것은 좋았던 기억이 자기 기억에 올무였다는 사실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좋았던 것이 올무예요. 좋았던 것이 발목 잡는 겁니다. 좋았기 때문에 좋았던 시절이 그게 나의 이상적인 진짜 내 모습과 합치되는 줄 알았어요. 그러나 욥은 자기 자신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 들어가 보면 이번 수련회 때 했던 대목입니다.

사무엘하 12장 24~25절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사랑이란 것이 어떤 거냐 하면 왜 다윗이 밧세바를 버리지 않고 정식 아내로 받아들였느냐 하면 그 밧세바 속에 자신의 죄가 계속 유지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밧세바가 있어 줘야, 우리 둘이 간음했음이 있어 줘야, 비로소 하나님이 원하시는 상한 심령이 계속해서 살아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욥처럼 자기 잘난 맛이 있는 사람 같으면 이건 자기 사랑에 빠져서 주님의 사랑을 내치게 되어있어요. 그냥 욥은 이겁니다. 내가 나를 사랑한 것처럼 신도 나를 사랑해주면 안 되겠어요? 이런 식으로 윽박지르고 하나님에게 압박하고 윽박지르고 있는 겁니다.

이게 욥만의 이야기겠습니까? 우리 평생의 모든 생활이 다 그런 거예요. 대구, 경상도, 이쪽 사람들은 ‘언제까지 한국을 좌파 공산주의 정권에 맡기겠습니까? 신이시여, 사랑해주옵소서’라고 하는 거죠. 갑자기 정치적 발언이 훅 들어갔죠. 그것은 평소에 우리가 얼마나 우리 자신만을 사랑하고 있다는 티를 정치적으로 그렇게 감추지 못하고 완전히 티를 확 내버린 거예요. 텔레반 확 침범해야 한다니까. 저는 괜찮아요. 공항이 가까워서.

수송기에 매달릴 필요 없어요. 텔레반 온다고 하면 빨리 도망치면 되니까. 인간이 좋았던 기억만 긁어모으는 그 더러운 버릇, 이것은 계속 자기 자신을 조작해 내는 겁니다. 다윗은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이 다윗 되었다는 것은 다윗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다윗이 다윗 되게 하는 이것은 주님께서 생각한 그 다윗을 그대로 만들어 내는 겁니다. 이게 인간의 이중성이라고 했잖아요. 지난 낮 설교에서.

두기고가 두 개고, 사도바울도 두 개인 것처럼 성도도 둘 되어야 해요. 내가 만드는 내가 따로 있고 주님이 천국 가기 위해서 만드는 내가 따로 있어요. 이걸 좀 어렵게 하면 이렇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결합은 에너지거든요. 그런데 그 에너지가 두 종류가 있어요. 악한 에너지로 묶은 것이 있어요. 악한 에너지. 사실은 이게 묶은 것이 아니고 서로서로 이용한 겁니다. 서로서로 이용한 거. 이게 죄 에너지인데 인간과 인간의 만남은 부지런히 만나요.

오늘 주일학교에서도 그런 이야기 했지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원하는 사람 되기 위해서 수련회도 그런 이야기 했지만, 끊임없이 남에게 다가가서 말을 건넵니다. 뭘 잘해드릴까요. 봉사해 드릴까요. 자꾸 말을 하는데 그 말을 한다는 것은 이상적인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위해서 저 사람이 뭔가 도움이 될까 싶어서 말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런데 기도라는 것은요, 이런 말이 끊어질 때 시작하는 것이 기도예요. 주님을 이용하겠다고 그렇게 말을 끄집어내는 것은 기도라고 이야기하지 마세요. 그건 기도 아닙니다. 수작 부리는 거예요. 기도할 때는 말하지 마세요. 그냥 넘기세요. 이 못난 거, 말할 가치도 없는 거, 그냥 넘기세요. 왜 기도하냐고 묻거든요.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어쩌고 하는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냥 웃지요.

이게 일제 강점기 시인 김상용 씨가 지은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시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왜 사냐고 누가 물을 때 자기는 그냥 웃지요. ‘내가 말해준다고 네가 알아서 뭐할 건데. 네가 알 필요 있어?’라는 의미로. 주님 앞에서 우리는 말을 멈출 수 있어야 해요. 지금 욥은 말이 너무 많아요. 욥은 왜 그리 말이 많은지 몰라요.

욥의 중간까지는 말이 많은 욥이 등장하다가 끝에 가서 욥이 말을 중지해버립니다. 중지하고 욥이 재를 뒤집어써요. 요새처럼 하면 담요를 한 열다섯 장 뒤집어쓰는 거죠. ‘아이고, 부끄러워라’라고 하면서 담요를 뒤집어쓰는 욥의 모습이 마지막 모습입니다. 그동안 받은 것만도 감사한데 거기에다가 뭐 주저리주저리 뭐가 어떻고 저쩌고 그런 식으로 말을 그렇게 말을 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주신 것은 욥의 신뢰를 인정하지 않고 욥을 하나의 물건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 대 인간의 그 모든 관계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물건으로 봅니다. 자기만 인간이고 남은 물건이에요. 물건이기 때문에 쇼윈도에 있는 거 관람하듯이 구경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그냥 관람하시면서 “똑바로 하란 말이야. 제대로 못 하냐? 내가 산상설교 줬잖아. 그거 왜 안 지켜? 빛과 소금 되라고 했는데 왜 맛을 잃었어?”라고 잔소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는가 하면 히브리서 10장 16절에 보시면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라고 되어있거든요. 히브리서 10장 16절을 계속 말하기 전에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잔소리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그냥 본인이 꼬로록 죄 속에 들어와 버렸어요. 죽어가는 인간 속에 그냥 같이 죽겠다고 들어오신 거예요.

이건 사람이 못합니다. 이건 남편이 못하고 아내가 못해요. 자식도 못 해요. 누구든지 처나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나보다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는 말이 거기에서 나온 거예요. 아무도 못 한 것을 주께서 하신 거예요. 그냥 허락도 없이 쑥 들어왔어요. “너 죽는데 내가 같이 죽어줄게. 됐냐? 입 다물어”라고 하시고 그게 끝이에요. 끝. 뭐 교인 다 빠져나갔네, 뭐 헌금도 안 나오고, 뭐 가정에서는 몸이 또 아프고 어쩌고, 쓸데없이 말하는 그거 주님께서는 안 들은 것으로 해주시는 거예요.

“어~~~안 들린다. 안 들었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왜냐 하면 주께서 조치를 다 취해줬거든요. 내가 직접 너의 안에 들어올게. 그게 뭐냐 하면 산 제물입니다. 히브리서 다시 보면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이게 바로 정규직입니다.

이게 신약 성경에 나온 정규직입니다. 계약직 아닙니다. 우리와 계약 안 했습니다. 우리 안에 들어온 주님이 아버지와 계약한 거예요. 우리와 계약한 적 없어요. 예수 이름으로 사인된 거예요. 예수 이름이 성령으로 직접 예수 이름으로 사인하신 거예요. 허락도 없어 쑥 들어오신 거예요. 그러나 부부 사이든 뭐든 이 모든 관계는 ‘내가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데 너는 나에게 뭐 해줬냐?’라는 이거는 순전히 상품거래와 같은 거예요.

욥이 결정적으로 몰랐던 것은 하나님께서 병 주고 약 준다는 원리를 몰라서 그래요. 이 병 주고 약 주는 것은요 인간세계에서 불합리도 그런 불합리가 없습니다. 멀쩡한 놈 병신 만들어 놓고 옆에서 돌봐준다고 사랑이라고 한다면 이게 말이 되는 겁니까? 어떤 불신자들은 제대로 복음을 알아듣고 그런 식으로 정리하는 사람이 있어요.

멀쩡하게 잘 사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 놓고 “내가 십자가를 너 대신 졌다. 거봐. 내가 너 대신 죽었잖아. 너 죄인 맞지? 걱정하지마. 내가 너를 사랑해주마” 이런 말을 고상한 인간 입장에서 들어보면 이거는 마치 영화에서 일어난 일이랑 비슷한데 ‘런(Run)’이라는 영화에서 딸에게 병신 되는 약 먹여 놓고 딸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는 엄마 이야기예요. 물론 진짜 엄마 아니고 납치해서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 엄마 행세하는 영화예요. 나중에 딸이 알아서 반항해요.

내가 아는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하고 나에게 좋은 점, 착한 점, 선한 것을 끄집어내서 정성과 지성을 다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참 훌륭하게 살고 바르게 살았다고 천국 넣어주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유일하게 인간에게 통하는 하나님이에요. 유일하게. 인간 조져놓고 고쳐주는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의 멀쩡한 것을 장려하고 그것을 키워내시는, 그렇게 너와 내가 공통점이 있다고 공통점을 키워내는 그런 하나님을 인간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골치 아플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믿습니다’하고 받아들여요.

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욥은 주님 앞에 작살나야 하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고. 그건 네가 잘못 알고 있다고. 어떤 훌륭한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그는 국민들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돈 백만불을 이 나라에서 제일 착한 사람에게 주게 되면 국민들이 ‘야, 착한 사람에게 대통령이 돈을 백만불을 주는구나’라고 너도나도 착한 일 하게 되면 나라가 좋은 나라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부인에게 물었어요.

“여보, 백만불을 한 사람에게 주지 말고 두 사람에게 오십만 불씩 주게 되면 두명이나 착한 사람 있으니까 나라가 두 배나 착한 사회가 될 겁니다”라고 하니까 그걸 듣고 있던 딸이 “아버지, 두 명하지 말고 25만 불씩 네 명에게 주게 되면 네 명이나 착한 사람 있게 되니 나라가 더 좋은 나라 될 거예요”라고 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손자가 제대로 대통령을 봤어요. “창문에서 괜히 착한 사람에게 돈 뿌리지 말고 할아버지 자신이 창문에서 뛰어내려 죽으세요. 당신 죽는 것이 나라 살리는 일입니다”

개뿔 본인 자신도 모르고 무슨 착한 일을 합니까. 네가 존재하는 자체가 나라 망한 거야. 너 때문에. 이건 정치적 발언 아닙니다. 욥은 예수님과 차이점이 본인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이게 오늘날 우리를 얼마나 닮았는지요. ‘착하게 살려고 하는데 왜 주님은 안 도와주십니까’라는 매사 이런 식으로 생각해요. 왜 도와줘야 합니까.

욥이 보여주는 이 모습은 바로 성령 오기 전에 우리 육신이 지금 이 세상이 욥의 판, 욥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있는 세상에 주님은 죽으러 오셔서, 목숨을 바쳐서 이 세상에서 우리를 건져낸 거예요. 이 소말리아 내전에서 모가디슈에서 건져내듯이 이 카불에서 건져내신 거예요. 이 지옥같은 세상에서 욥의 판 같은 세상에서 자기밖에 모르는 자를 살려내신 겁니다.

주님은 관람자가 아닙니다. 그냥 우리 몸속에 말씀 자체가 들어와 버렸어요. 따라서 우리 본의 아니게 우리는 정규직이 되어 버린 거예요. 천국 백성이 된 겁니다. 백성이 되지 않아야 하는데 천국은 어디인지 알지도 못하는데 이미 천국 백성된 것은 이미 예수님의 용서하심이, 그분의 의가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불가능했으면 얼마나 우리 힘으로 구원되는 것에 아예 실패작이었으면 친히 우리에게 찾아오셨겠습니까?

예수님의 존재가 아니고 예수님의 그 피, 죄사함의 피 흘리심, 그것만 자랑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몰랐습니다. 욥처럼 주장하는 그런 주장이 이미 우리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 자세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잘해보겠다고 나왔습니다. 그게 다 뒤엎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도리어 반기게 해주시고 십자가 앞에서 진짜 욥과 같은 자가 우리 자신인 것을 고백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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