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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5 20:43:05 조회 : 72         
광주강의20210924b 민수기 25장 3절(이스라엘의 이질성)-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하림(IP:112.212.44.181)
광주강의20210924b 민수기 25장 3절(이스라엘의 이질성)-이 근호 목사

빈 자리를 만들지 않으면 새로운 창조가 아무것도 발생되지 않습니다. 후벼파는 거예요. 우리 자신을 후벼파는 겁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멀쩡할 것 같으면 주께서 그런 작업을 할 이유가 없어요. 그냥 교회 다니고 세례 받으면 그걸로 끝날 거예요.

‘그냥 교회 다니고 세례 받으세요. 그래가지고 성만찬하게 되면 나중에 천당 갑니다.’ 교회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죠. 그러면 사람들은 자기가 파스 붙이듯이 덧붙이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훈장 같이. 북한의 장군들 훈장 달아서 옷 늘어지는 것 봤죠?

훈장 달아서 옷 늘어지면 뭐합니까? 목이 잘리는데. 아래쪽에 늘어지면 뭐해요, 목 잘리면 끝나죠. 마찬가지죠. 우리가 아무리 교회 다녀서 뭐하고 직분 맡아도 내게 뭐가 문제냐를 모르고 있으면 그것은 성경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성경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빈 자리로 만들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새로운 창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빈 자리를 채워주면 되지 않겠냐고 하는데 그 빈 자리 만들기에서 우리보고 ‘빈 자리 만들어라. 자기를 비워라.’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오셔서 주의 피 묻은 손으로 우리 죄 부분을 끄집어내줘야 돼요. 우리의 빈 자리 만드는 작업까지 주님의 일이에요, 우리의 일이 아니고. 그게 바로 성령의 오심입니다.

성령의 오심은 세례 받고 학습 받고 덧붙이는 게 아니고 성령은 반대로 우리의 중앙 부분을 빈 자리로, 싱크홀로 만들죠. 블랙홀로 만들어요. 텅텅 비게 만들어요. 허무죠, 허무. 허무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그 허무하게 만드는 작업을 바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두 번째 시간에 말씀 드릴게요.

두 번째 시간에서는 구약에서의 짐승, 물론 다니엘도 구약이지만 다니엘 이전에 구약에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짐승 또는 악마는 어떤 일을 했는가. 주님이 어떤 일을 했는가만 알지 마시고 악마가 어떤 일을 했는가를 보셔야 돼요.

그럼 악마가 어떤 일을 할 때 구약에서 ‘바알세불’이라는 단어를 이스라엘 쪽에서 쓰신 적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선지자 모세가 썼지만. 이 바알세불이라는 단어가 마태복음 12장에 나오죠. 마태복음 12장 24절,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바알세불, 바알의 집주인이다, 그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25절에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보고 얘기하기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아주 정확하게 봤어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했느냐 하면 ‘너는 너의 세계를 따로 건설하려 하는구나. 따로 만들려고 하는구나.’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리고 그 우두머리는 예수 너이고. 이렇게 본 겁니다. 얼마나 정확하게 본 거예요.

그러니까 그 바리새인들의 예수님에 대한 인상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하나님이다. 메시아다, 그런 인상이 아니었고 정반대였어요. 우리가 주의를 해야 될, 우리가 경계해야 될, 우리가 기어이 목숨을 제거해도 상관없는, 죽여 버려도 상관없는 작자가 예수다. 이게 바로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옷을 지켜 준 사울이라는 청년의 의식이었습니다. 의식, 이데올로기, 이념이죠.

그 사울이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님 만나고 사도 바울이 되죠. 사도가 된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핍박한 가운데 사도가 생겼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도는 인간의 선택이 결코 아니올시다. 사도만 그럴까요? 우리가 성도로 선택받은 것은 결국 성도 본인의 선택이 아니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선택해서는 결코 천국 갈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정하지 말아야 돼요. 우리의 실력이나 우리의 결정이나 우리의 학식에, 믿음에 우리가 일체 기대를 걸면 안 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선택을 모독하는 거예요.

이 바알세불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게 신약이거든요. 구약에서는 바알 또는 바알브올이라는 용어가 있어요. 민수기 25장이니까 두 번째 시간에는 그 중심으로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드릴 게 많아요.

민수기 25장 1절-3절,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그다음에 무슨 용어입니까?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되어있죠.

참 이 대목을 보고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다 말은 안하는데 전부다 민수기 이 대목, 그 전에 민수기 22장, 23장, 24장을 쭉 보면서 25장까지 보면서 사람들이 말은 안하는데요. 끄집어내진 않는데 찝찝함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압 왕 발락이 발람 선지자를 채택해가지고 자기가 고용해서 저 지나가는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뇌물을 줬잖아요. 뇌물을 줬는데 여기에 하나님 여호와가 개입을 해버리니까 심지어 타고 다니는 당나귀한테도 개입해서 발람 선지자로 하여금 저주를 금지하고 오히려 저주해야 될 타이밍에서 이스라엘을 축복하도록 그렇게 조치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발람 선지자를 스카우트한 발락, 모압 왕은 그냥 돈만 날린 거예요. 그래서 돈 더 줄게, 해도 ‘아,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그 말 외에는 못한다.’ 라고 한다면 이 발람 선지자가 이스라엘 입장에서 아군입니까, 적군입니까? 분명히 지금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매개자가 되었으니까 아군 편에 선 것으로 보이죠. 민수기 24장 끝에 보세요. 축복을 해도 발람 선지자가 아주 노래를 지어서 축복을 했거든요.

시간이 좀 가더라도 성경 볼게요. 24장 15절,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16절, 같은 이야기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말하며 지극히 높으신 자의 지식을 아는 자, 전능자의 이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내 말이 아니고 주의 뜻이다 이 말이죠.

17절,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 편에서 저 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멸하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자기들끼리만 있는 게 아니고 왕이 있다. 홀은 지팡이거든요. 왕이 그들 가운데 같이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에요. 왕이 있다.

왕이 있으면 그 왕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 백성은 무너집니까, 안 무너집니까? 무너지지 않죠. 이 말은 백성을 건드리는 것은 곧 왕을 건드리는 거예요. 왕이 그 백성을 책임지는 겁니다. 왕은 자기 칼의 무게를 견뎌내야 돼요. 그만큼 왕은 책임이 막중한 거예요. 그 말은 백성에게 책임이 있다, 없다? 백성한테는 책임이 없어요.

책임감을 느끼는 백성은 그 왕의 백성이 아닙니다. 그럼 왕에 의해서 밀어냄을 당하죠. 그래서 지금도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건질 때 밀어내는 작업을 한시도 멈추지 않습니다. “오지 마세요!” 하고 밀어내는 거예요. “천국 오면 안돼요. 너는 천국 오기로 작정 안 되었으니까 가세요.” 계속 밀어내요. “주님 믿고 싶어요. 주님 사랑합니다.” “됐습니다. 됐어요. 나 사랑 안 해줘도 돼요. 저리 가세요.” 계속 밀어내는 겁니다.

여기 18절, “그 원수 에돔은 그들의 산업이 되며 그 원수 세일도 그들의 산업이 되고” 그들이 이스라엘이 왕이 되는 데에 재료가 되고 밑거름이 된다 이 말이죠. “그 동시에 이스라엘은 용감히 행동하리로다” 19절, “주권자가 야곱에게서 나서 남은 자들을 그 성읍에서 멸절하리로다 하고” 모든 이방민족은 이제 기다려라. 이스라엘 왕이 너희들을 저주해버릴 것이다.

또 20절에, “또 아말렉을 바라보며 노래를 지어 가로되 아말렉은 열국 중 으뜸이나 종말은 멸망에 이르리로다 하고” 아말렉의 운명의 모습이, 전체 이방민족의 운명을 아말렉이 대변해준다 이 말입니다. 이방민족은 어떻게 될까 뭐 따질 것 없어. 아말렉이 어떻게 망하는가를 보면 안다. 그들은 최고였지만 최말단으로 빠지죠. 이게 바로 악마에 속한 세계에 그 마지막 모습을 미리 아말렉이 다 보여주는 거예요.

그럼 철저하게 이스라엘은 결국, 이스라엘이 누구하고 싸우기를 좋아한다, 가 아니라 이스라엘 왕 되시는 분이 이스라엘 왕이신 분이 이방민족을 그냥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작심해서 일을 벌이는 거예요. 이스라엘 이름 자체가 싸우는 거니까 이스라엘은 싸우기 싫어도 싸워야 돼요. 이방민족이 멸망할 때까지 왕이 싸움을 멈추지 않는 거예요.

지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했죠. 감정의 기복은 사치라고요, 감정의 기복. 이상하게 나 기분 나쁜 것 같아. 갱년기 같아. 이것은 지금 영적 전쟁에서는 아무 따질 필요도 없는 미미한 거예요. 목사님, 우리 가정이 왜 이렇게 화목하지 않아요? 지금 전쟁 중입니다. 지금 전쟁 중이에요. 그거 아무 문제도 안 됩니다. 전쟁 중이에요. 왕을 보세요, 왕을. 백성들끼리 싸우지 말고.

21절에 가인족속도 작살납니다. “또 가인 족속을 바라보며 노래를 지어 가로되 너의 거처가 견고하니 네 보금자리는 바위에 있도다 그러나 가인이 쇠미하리니 나중에는 앗수르의 포로가 되리로다 하고” 그리고 24절, “멸망하리로다” 그리고 25절, “발람이 일어나 자기 곳으로 돌아갔고 발락도 자기 길로 갔더라” 건들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드린 거예요, 이 발락이.

민수기 23장 보겠습니다. 23장 20절,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21절, 결정적이죠.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자, 이방민족은 멸망이거든요. 그러면 이스라엘 왕이 이스라엘한테는 어떻게 해주느냐 하면 허물을 보지 아니하고 패역을 보지 아니하는 분으로 그들과 함께 동행한다. 창세기부터 민수기 22장까지, 23장까지 읽었던 사람한테는 자신이 이스라엘편이라도 된 양 기분이 막 업 됐죠. 우리 허물과 패역을 보지 않는 이런 좋은 왕이 있으니 내가 그의 백성이라고 간주한다면 아, 이건 정말 내 인생 제대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막 기분 좋아가지고 사이다 팍, 폭발하듯이 기분 좋을 거예요.

그리고 적들이 발람까지 매수를 해도 하나님이 개입하니까 그 저주가 저주하는 족족 복으로 변한 거예요. 여러분 그런 경험 많잖아요. 죽어라, 죽어라, 죽으라고 주변 사람들이 막 그렇게 외치는데 천사가 통역자가 되어가지고는 뭐로 들리느냐 하면 잘 되라, 잘 되라, 잘 되라, 제발 플리즈. 제발 잘 되라. 는 식으로 저주를 복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천사가 그렇게 해주니까 뭐 이건 그대로 민수기 23장의 실현 아닙니까?

민수기 24장 10절에서 발락이 정말 화가 났어요. “발락이 발람에게 노하여 손뼉을 치며 발람에게 말하되 내가 그대를 부른 것은 내 원수를 저주하라 함이어늘 그대가 이같이 세 번 그들을 축복하였도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손뼉을 쳤겠습니까. 답답해가지고 말로 안 되고 뭔가 몸짓을 해야 돼요.

그러니까 11절, “그러므로 그대는 이제 그대의 곳으로 달려가라 내가 그대를 높여 심히 존귀케 하기로 뜻하였더니 여호와가 그대를 막아 존귀치 못하게 하셨도다” 13절에 보면 “가령 발락이 그 집에 은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지라도 나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간 임의로 행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말하리라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자, 여기서 문제 나갑니다. 발람이 신앙인입니까, 신앙인 아닙니까? ①신앙인이다, ②신앙인이 아니다. 지금 민수기에서 24장까지 보면 정말 발람을 스카우트하고 싶어요. 발람을 당회장으로 모시고 싶어요. 진짜 교회 횡재한 거 같아, 이런 분 들어오시면. 이렇게 믿음 좋으면. 왜냐하면 발람 선지자가 대단한 게 아니고 여호와가 함께 있다는 그것 때문에 월급 몇 푼 안주고도 당회장으로 모실 수 있으니...... 아까 돈이 실체라고 했죠, 돈 몇 푼 안주고도 그런 목사 모시면 교인들 주머니에서 많이 나올 것도 없고 자기 집은 자기 집대로 융성하게 될 것이고 교회는 부흥될 것이고 땡잡았잖아요.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신앙이라고 이야기하고.

그러니까 민수기 25장 전까지 오게 되면 신바람 이박사에요. 전부다 룰루랄라 신났어요. 분명히 여기 23장 21절에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잖아요. 분명하죠.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에요. 그런데 25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다, 진노. 왜 진노하셨는가? 여기 누가 개입했는가? 호세아 9장 10절에 보니까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열조 보기를 무화과 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저희가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의 사랑하는 우상같이 가증하여졌도다” 호세아 9장 10절에 이렇게 너희들은 내가 맺은 열매가 아니라고 했는데 그러면 이렇게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저주를 유도하게 한 당사자가 누구였다는 말입니까?

민수기 31장 16절에 보면,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좇아 이스라엘 자손으로 브올의 사건에 여호와 앞에 범죄케하여 여호와의 회중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누가 꾀었다고요? 발람. 그 믿음 좋아 보이는 발람이 이스라엘을 꾄 거예요. 발람이 고객한테 돈을 받았는데 서비스가 지가 생각해도 좀 불충실한 거예요. 저주하라고 돈 받았는데 축복을 했으니까 미안스럽잖아요. 그래서 ‘내가 이스라엘 망하는 방법 이야기해줄까?’ 이렇게 된 거예요.

이런 게 어려운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분명히 민수기 23장 21절에 보면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잖아요.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죠. 그렇다면 그들이 우상숭배해도 봐줘야지요. 왜 다른 허물은 되고 바알 섬기는 것은 왜 안 됩니까? 뭐 죄의 종류가 다른 겁니까? 같은 인간에게서 나온 건데. 똑같은 죄인데. 다른 죄는 허물도 용서하고 패역도 용서하면서 왜 바알 섬기는 것에 대해서는 곧이곧대로 저주를 해버리냐 이 말입니다.

그냥 간단하고 쉬운 문제가 아니겠죠. 그걸 이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시간을 기억해야 돼요. 지각장(스크린). 사람들은 자의식, 아까 의식이라 했는데 앞에 자(自)를 넣으면, 자기 의식이 있기 때문에 현실을 볼 때 자기가 관찰로 보는 거예요.

유동성자금이 불어나게 되면 미국의 연방준비위원회에서 각국 은행에 주는 이자율을 높인다는 이야기를, 경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그런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잖아요. 현실에서 일어나도 지가 보고 싶은 현실 속에서는 내일은 짜장면 몇 그릇 배달해야 되나, 그것만 보이지 유동성자금이 불안하고 세계 경제가 어떻고는 안 보이죠.

인간은 자기가 만든 현실을 주목하고 그래서 하루 일과 보내고 자기 방에 가 주무시는 거예요, 인간은. 인간에게는 놓치는 것이 너무 많다. 인간은 놓치는 것이 너무 많아요. 도대체 몇 년을 살고 얼마나 돌아다녀야 다 알겠습니까.

솔로몬이 모든 세상 지혜를 다 알아도 결국 솔로몬이 안 게 뭐냐. 내가 모르는 게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내가 아는 게 아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공부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내가 무엇을 모르는가를 알기 위해서 공부하는 겁니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가를 알기 위해서 공부했는데 그걸 모르겠어요. 아무리 공부해도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르겠어요.

그것은 신약에 오게 되면 너는 너 자신이 문제 있고 죄의 종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네가 몰랐기 때문이에요. 원인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거예요.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자격이 못 됩니다.

만약에 내가 이렇게 이 세상 사람들처럼 관찰해버리면 이 현실에다가 예수님의 강림과 재림을 집어넣어요.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주님이여, 우리 가정에 축복을. 이게 뭐에요? 누가 축복 받는지 안 받는지 누가 관찰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일방적으로 내 현실이 잘 되느냐 그걸 관찰하겠다는 거예요.

내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런 건 모르겠고. 그걸 가지고 ‘됐고~’라 해요. 됐고, 알고, 지금 난 그거 관심 없고! 내가 예수 믿고 내 가정, 내 인생이 잘 되느냐 나는 여기에 관심 있고. 이게 인간 사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관찰한다는 말은 내가 비워져야한다는 사실을 지금 놓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무엇에 주목을 해버리면 주목하는 나를 뺄 수가 없어요. 주목하고 있는 나를 내 자리에서 뺄 수가 없다고요.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어떤 산부인과 의사가 손님 와서 곧 해산해야 되는데 지는 바둑 티비 보고 있었어요. 그거 보다가 아기 엄마는 지금 죽어가고 있는데. 그래서 환자 남편한테 귀싸대기 맞았다는 거예요. 바둑 게임하게 되면 저쪽에서 5초 만에 한 수씩 두는데 나도 같이 덩달아 둬야 기에서 안 밀리거든요. 좀 끄고 나갈라하면 지금까지 30분 바둑 둔 게 아까워서 졌다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그거 두고 있다가, 가만 있어 봐요. 좀 이따 갑니다. 하다가 귀싸대기 맞은 거예요.

이 현실 속에서 자기를 뺄 방법을 몰라요, 인간은. 나를 가위표할 방법을 몰라요. 자살을 해도 안돼요. 자살해도 안돼요. 언제 그런 이야기했죠. 자살은 가장 자기한테 성실했던 순간이라고. 남들에게 나를 과시하는 데에 평생을 정력과 모든 수고를 다하고 ‘나 이런 인간이에요’ 남에게 알리던 그 모든 마지막 남은 여력을 최고로 자기한테 집중해서 쏟는 순간이 번개탄 피우는 순간이에요. 자살하는 순간.

자살은 타인에 대한 복수. 나를 지켜본 너희들에게, 너희들한테 시달렸다는 것에 대한 비겁한 복수죠. 그래, 내가 죽을게. 죽을게. 이게 복수에요. 이놈의 중사, 이놈의 상사. 그래, 여자의 몸으로 군대 왔다. 이게 죄라면 죄구나. 내가 죽을게, 그러면. 그래서 해군 중사, 공군 중사 자살했죠. 자살할 때 그냥 자살 안했죠. 다 일기장 써가지고 어떤 상사가 건드렸는데 그냥 덮었다, 전부다 썼잖아요. 미국의 어떤 해병대는 여군 하나가 성폭행 당해가지고 그 수치심에 자살을 했는데 그것 때문에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800명이 전역했답니다. 처벌 안 받고 800명이 전역했어요. 군대를 그만 뒀어요. 일종의 처벌이긴 하지만.

제가 설교시간에 그 이야기 했잖아요. 모르는 여자가 아름답다고 했던 그 노래를 이동원이 불렀지만 가사는 고은이 지었거든요. 고은 시인은 지금 나이가 팔십 가까이 됐는데 미투 운동에 걸려가지고 후배 시인한테 욕 되게 얻어먹고 받은 상 다 잘리고 노벨 문학상 후보감도 다 잘리고 한 사람이에요. 영화배우 여러 명 죽었어요. 감독도 죽고. 복수에요, 자살은.

그런데 성경 로마서 12장 19절에서는 원수 갚는 것은 내게 맡겨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가 자살로 남한테 원수 갚지 마라. 왜냐하면 네 원수가 본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네가 원수면서 어디 남 탓 하고 있느냐는 말이죠.

나는 당해도 싸, 이런 생각을 인간은 못하고 있는 거예요. 내 원수는요, 나를 지키려는 자가 나의 원수에요. 주님은 나를 안 지키려고 하거든요. 그런데 누가 지키려고 해요? 주님은 나를 안 지키려고, 죽이려고 하는데 내가 나를 살리려고 하는 거예요.

온갖 복음적 지식을 다 끌어 모아가지고 ‘예수 믿고 하면 부활 되죠?’ 그거 누구 좋으라고요? 누구 좋으라고 예수 믿고 십자가 믿고 부활 믿는 거예요? 누구 좋으라는 거예요? 본인이 본인 좋으라고 믿는 거잖아요. 그게 바로 마귀가 하는 짓 아닙니까? 그게 마귀가 하는 짓이에요.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물을 보지 않으시고 패역을 보지 않으신다 해놓고 그렇게 하는 이유가 바로 내가 관찰한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그 당시에. 이스라엘이 있고 내가 관찰한 이스라엘이 있잖아요. 구멍 난 이스라엘의 허물을 보지 않고 패역을 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 허물과 패역을 유발시켜 놓고 그걸 구멍내버린 거예요. 구멍을 내버린 거예요. 그걸 누가 한다? 왕 되신 분이 직접 해요, 왕 되시는 분이.

결과적으로는 이미 온전한 이스라엘은 왕 되신 여호와한테 마련되어 있어요. 마련되어 있어가지고 역사적 이스라엘과 주께서 마음 속에 두신 이스라엘과의 차이, 그 차이를 뚜렷이 드러내는 겁니다, 그 차이를.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한 기억이 나는데요. 제가 오르골 이야기했죠. 성도는 본인 자신이 구원받는 게 아니고요. 주님이 생각한 구원과 내가 생각한 그 구원의 차이를, 택배 차 있잖아요, 1톤 화물차는 그냥 놀러 다니는 게 아니고 뒤에 뭔가 실어야 되죠. 싣는 게 화물차 아닙니까. 화물에 뭘 싣느냐 하면 차이를 싣는 거예요, 차이를. 주님이 생각한 나와 (내가 생각한) 나와의 차이를 싣고 다니면 그 사람이 성령으로 감긴 사람이에요, 수요일에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은 자기 것을 비추려고 했지만 주님이 원하는 것은 너를 둘러친 성령이 보고 싶은 거예요. 너 화물차 택배에 뭐 실었냐? 그걸 보고 싶은 겁니다. 주님은 성령을 보고 싶어 하는데 우리는 내 주특기 내놓고, 이거 어때요? 이러고 있는 거예요. 인간들한테 하는 행세하고 똑같이 주님한테 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은요, 우리 잘난 것, 의 찾으려고 오신 게 아니에요. 주님은 죄 없음을 확인하려고 오신 거예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단 말이죠. 그걸 또 다른 사람들에게 써먹지 마세요. “아버지, 저 나무라지 마세요. 목사님 말 들어보면 죄 있는 자를 돌로 치라고 했는데. 아버지나 나나 다 죄인인데 나한테 왜 간섭합니까?” 지금 그렇게 써먹을 게 아니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 그 죄인 됨은 주님께서 직접 파내는 거예요.

“아버지, 잔소리하지 마세요.” 가 아니라 진짜 성령 받았다면 “아버지, 잔소리 가지고 되겠습니까? 저를 밟아주시고 저를 개 취급해도 저는 감사하겠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지금 구멍 난, 진짜 주님이 손댄 사람이 된단 말이죠. 이걸 가지고 ‘파편화된 자아’라 해요. 자아는 조립이에요. 자아는 조립된 거예요. 그것도 어설프게 조립돼 가지고 결국은 건드리면 팍! 하고 산산조각 나요. 파편화된 자아 또는 파편화된 인간.

그래서 주님께서는 발람을 이용한 겁니다. 발람은 처음부터 매수된 사람이에요, 모압 왕 발락이. 죄송합니다만 여러분들이 발람 선지자라고 쳐봅시다. 돈은 받아 챙겼지. 제대로 하자를 보수해달라고 했는데, 저 집 좀 망가지라고 저주하라고 했는데 오히려 반대로 근사하게 했으니까 받은 돈을 돌려줄 수는 없고 결국은 이스라엘을 무너지게 해줘야 되잖아요. 그런데 중간에 자기가 받은 것은 뭡니까? 이스라엘은 손대지 마라, 이거였거든요.

그런데 발락이 와서 여호와 말고 스스로 하나님한테 무너지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라고 했을 때 여기서 발람이 사용한 게 있어요. 그야말로 아까 민수기 31장 16절의 말씀대로 발람이 악한 사람이에요. 여기만 나온 게 아니고 시편 106편 28절 봅시다. “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에 왔습니다. 어떻게 패역도 허물도 보지 않는다 해놓고 주께서 끝까지 한번도 안 봐야지, 왜 이스라엘을 망가뜨려서...... 25장에 보면 24000명 죽였습니다. 우상 섬겨서 바알 제사에 참석해서 이만 사천 명 죽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 발람이 중간에 역할을 했는데 발람이 무엇을 이용했는가.

바로 ‘이스라엘의 이질성’.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과 다르다. 아까 그 ‘다르다’가 차이라고 했습니다, 차이. 그 차이성을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스스로 못 느끼게 하려면, 차이성은 하나님이 남기고 싶고 기존의 차이성을 남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가짜 이스라엘은 파편화되어서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구원하신다는 것을 발람이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중에서 차이성을 모르는 사람을 드러내도록 유도하는 방법을 발람 선지자가 사용한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꿈쩍도 하지 않는 요소가 이스라엘에게 있다는 것을 발람 선지자는 알았어요. 그것은 이방나라와 이스라엘의 차이성, 그것이 언약이죠. 약속의 차이성만큼은 하나님도 절대적으로 사수한다. 차이성이 깨지는 일은 없다. 차라리 이스라엘을 다시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차이성만큼은 남긴다.

그걸 신약에 와서는 십자가만 드러낼 수 있다면 기존의 모든 교인들도 잘라낸다는 방식, 원리원칙을 여호와 하나님, 주님은 사용하신다는 것을 누가 알아요? 악마가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이질성, 그 차이성은 뭐냐? 간단하죠. 차이 남을 알지 못하는 차이성이죠. 차이성을 알지 못하는 차이성.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한마디로 말하면 기존의 인간과의 차이성. ‘나는 목자다’가 아니라 너희는 목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자기(예수님)는 목자에요. 요한복음 10장 이야기입니다. 너희 목자는 네가 살려고 하지만 나, 목자는 차이나는 것. 인간은 모두 살려고 하잖아요. 그럼 예수님의 차이나는 목자상은 살려고 할까요, 죽으려고 할까요? 죽으려고 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을 저쪽으로 다 보내버리고 예수님 홀로, 모든 인간에게 없는 요소가 예수님이죠. 그 차이성을 아버지의 뜻으로 부여받은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아무도 없고 예수님 본인이 이스라엘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에요. 아, 오늘 여러분들 너무 괴롭혀서 미안한데 용납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괴롭힐 의사가 없었는데.

요한복음 1장 47절,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누가 누구보고 이야기합니까? 예수님이 나다나엘보고 새로운 규정을 줘요. 네가 이스라엘이다. 그다음에 49절,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지금 죽이 맞죠. 뜻이 통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5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나다나엘 속에서 인간에게 없는 차이나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발견했다’도 되고 주께서 그것을 ‘제공했다’가 돼요.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해석했다’가 돼요. 그 해석을 차이 남으로 나다나엘이 받아서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제가 하고 싶은 것은 51절,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자,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은 어디 나오는 이야기입니까? 야곱이 벧엘에서 잠 잘 때 꿈에 나타났죠. 그렇죠? 꿈에서 나타났잖아요.

‘꿈이 현실이 된다.’ 꿈이 현실이에요. 기존의 현실은 현실이 아닙니다. 어떤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어요. ‘꿈에만 보이나봐’ 왜냐하면 너는 꿈속에만 사니까. 김태원이 만든 노래, ‘꿈속에선 보이나 봐’하는 노래 있어요. 꿈에서만 보이나 봐 너는 꿈속에서 사니까. 그러니까 현실에 있는 인간은 주님을 만날 수가 없어요. 꿈에만 보이니까.

꿈이 뭐냐 하면 언약이거든요. 약속이거든요. 십자가 안이란 말이죠. 성령 안이거든요. 성령 안에서만 주님이 사시는 겁니다. 주님은 그런데, 그 꿈이 꿈이냐? 꿈이 깨지지 않고 현실이 되는 거예요. 이게 차이성이에요, 이게. 이게 이스라엘의 차이성이라고요.

나다나엘이 기도할 때 기도했겠죠. 그러나 나다나엘에 대해서 ‘간사함이 없다, 네가 뭐하는지 내가 봤다’는 것은 누구 해석입니까? 꿈속에서 계시는 분, 새로운 현실을 꾸려나갈 그 분이 일방적으로 나다나엘에게 해석을 해주는 거예요. 그 해석을 해주듯이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겁니다. 성령 안의 세계가 네가 생각한 그 세계를 구멍내버리는 거예요. 움켜쥐고 무산시켜버리는 거예요. 경상도 말로 뿌사버리다. 뿌셔뿌셔 있잖아요, 라면 튀긴 거. 그냥 뿌사버리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보고 바알세불이라 했죠. 너는 따로이 너의 세계를 구축하러 왔구나. 이 말을 예수님이 들을 만하죠. 왜? 차이성이니까요. 아무리 예수님 해석을 듣고 기적을 봐도 주님 쪽에서 성령으로 내 자아 속에 와서 나를 부숴버리는, 뿌셔뿌셔, 너는 현실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꿈이야. 그게 개꿈이야, 꿈도 개꿈 같죠, 하고 부숴버립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요. 아까 스크린이 지각장이라 했죠. 지각의 필드, 영역 안에서 인간은 보는 게 아니고 본인이 스크린의 일부이듯이 주님의 세계를 우리가 믿고 바라보는 게 아니고 같이 뒤섞여서 로또번호처럼 주님과 함께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지금. 이게 주님의 현실이고 주님의 지각장입니다.

여기서는 누구의 시선이냐? 주님의 시선, 이미 완료된 시선으로서 이미 우리를 차이 나게 하셨습니다. 계속해서 내가 모르는 해석을 우리한테 해석하는 겁니다. 뭐라고 해석하느냐 하면 누가 뭐래도 나는 너를 인정한다. 그 해석 하나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기죽지 마라. 남들이 인정 안한다고 그거가지고 서러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인정해주면 되잖아, 내가. 내가 너를 내 사람으로 인정해주면 되잖아.

왜 자꾸 네가 이 예수한테 인정받으려고 그렇게 부질없는 애를 쓰느냐 이 말이죠. 나는 너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인정을 해줘버렸는데. 왜냐하면 네 속에 구멍 났으니까. 뚫렸으니까. 네가 빵꾸 났으니까. 너는 걸레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의 왕, 악마한테 속아 넘어갔다는 그 흔적을 차이 남으로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재명한테 속았고 또 윤석열한테 속았고 내가 또 홍준표한테 속았고 나는 이 땅에서 속았고 사기 당했고. 그것만이 내 인생.

그럼 난 이 땅에서 뭐가 돼요? 패배자가 되죠. 패배자가 되게 하신 주님께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주님한테 인정받으면 되는데 자꾸 주님한테도 인정받고 사람한테도 인정받으려 하니까 이 차이 남이 없어져요.

지금 이 교재를 어디까지 했느냐 하면 212페이지 위쪽까지 한 거예요. 그런데 글자 틀린 것 하나 고치고 가실게요. p.212 첫 번째 줄, “반복적인 묵시적 힘의 각질은” 각질 알죠, 발뒤꿈치. 각질은 지층화 되어서 계속 벗겨져요. “짐승의 내부 속성이 자꾸만 표면화되는(X)-> 표면화되어(O) 올라와” 각질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또 올라오고 해서 “십자가 사건과 만난다.”

일곱째 줄에, “즉 땅의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같이 생긴 짐승을 내심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짐승과 친화적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멀쩡하기를 원하고 실패자 되기를 싫어하고 멀쩡한 내가 원하는 그리스도는 바로 악마가 그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악마가.

아까 했던 이 이야기를 하나의 공식처럼 쓰게 되면 이렇습니다. ‘빈 자리 없이는 아무것도 창조되지 아니한다.’ 그러니까 이만 사천 명이 죽었단 말이에요, 그 바알 제사, 우상 제사에서. 야, 이런 신도 있구나, 이런 멋진 신. 이렇게 우상을 섬겨서 이만 사천 명 죽을 때에 그 바알을 동원하는 것도 주께서 다 아시고, 진짜 이스라엘은 허물을 보지 않으시고 패역을 그냥 용서하시는 이스라엘로 전체적인 지각장을 만들어놓고, 그다음에 실제적으로서는 그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만 사천 명이 죽어나가는 그 작업이 필수적이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발람이 동원되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겁니다, 발람이. 이스라엘은 발람이 없었으면 이스라엘은 이렇게 오해해요. 자기가 이스라엘을 관찰하려고 하는 겁니다. 역시 하나님은... 좋은 나라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멀쩡하다. 하고 자기 안에 아무런 실패의 체험과 실패의 경험이 없어요, 이 안에. 자기가 빈 자리가 없는 게 아니고 괜찮은 나로 꽉꽉 채워져 있어요.

사람이 뭔가 일에 몰두하고 거기에 어떤 기대를 해버리면 자기 안에 빈 자리가 없고 차이가 없어요. 그 목적에 대한 집착과 집념밖에 없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차지해야지. 이번 주식은 반드시 대박나야 돼. 우리 애는 반드시 잘 되어야 돼. 거기에 무슨 빈 자리가 있습니까? 자아성으로 꽉 차 있는데, 그때는요.

제가 강의하면서 잘못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사람들을 쭉 보니까 ‘잘난 척하며 산다-> 죄인이다’ 사람들은 이것까지는 동의를 해요. 잘난 체, 자기 의로 살다가 복음 들었으니까 이제 죄인 되었구나, 여기까지는. 그다음에 나갈 게 뭐냐 하면 ‘->죽은 자’이다, 이것까지는 사람들이 안 나가요. 나가지를 않아.

죄인 되었다는 이것을 관찰해서 죄인 되었다는 이 좋은 것을 자기 안에 중심으로 가져와버려요. 가져오니까 자기는 성공했어. 실패자가 아니라 성공한 거예요. 이런 짓을 누가 잘 했느냐 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에요. 이런 사람들은 구약을 보면서 천국 가는 비법을 캐내는데 거의 선수급입니다, 누가 글 쓴 것처럼. 거의 선수급이죠. 역사 속에서 구원받는 구원의 보화를 캐는 방법을 캐내자. 선지자들을 본받아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차이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차이가. 가장 좋은 것은 다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가 꽉꽉 채우는 겁니다.

마태복음 19장에 유명한 청년 나오죠? 무슨 청년입니까? 부자 청년. 부자 청년은 평생을 자기를 비우고, 비우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우고, 할례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마음의 할례까지 모든 십계명을 다 지켰나이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직도 부족합니까?’ 그랬어요. 아 참, 진짜 중요한 말했어요. 내가 아직도 부족합니까? (마태복음 19장 20절) 여기서 더 뭘 추가해야 내가 영생을 따내는 비법을 가지겠습니까? 아직도 내가 부족합니까? 아직도 내가 부족합니까, 아직도?

그럼 자기는 어디를 주목하고 있어요? 나를 주목하고 있으니까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나’ 사이에 차이가 없어요. ‘내가 생각하는 나’가 곧 ‘내가 원하는 나’가 되고 말았어요.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내가 생각하는 나’와 ‘주님이 생각하는 나’가 엉뚱해야 되거든요, 엉뚱. 상상도 못할 정도로 ‘그게 나였습니까?’ 오히려 반문할 정도로 낯설어야 돼요.

낯설어야 되는데...... 낯설 정도로 “평소에 내가 무슨 짓을 했지? 헛짓했네요.” “그래, 헛짓했어. 내가 너한테 앞으로 숙제 준다. 계속 헛짓해라.” 이게 숙제에요, 우리에게. 아직 할 헛짓도 많이 남았어. 죽을 때까지 헛짓해야 돼. 헛짓할 때 전에는 억지로 했는데 이제는 즐겁게 헛짓하는 거예요. 그 일이 우린 남아 있습니다.

이미 죽은 자로서 이미 이 땅에서 내가 사는 게 아니라 죽었고 주님이 준비해놓은 나는 하늘나라에 생명이 이미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 차이를 여러분들 뒤에 화물칸에다가 싣고 돌아다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마귀의 종이 된 것을 지금 생각하니까 다행이라 생각됩니다. 당연한 조치라고 생각되고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만이 드러난다는 하나님의 절묘한 장치요, 배치요, 하나의 과정인 것을, 절차인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광주강의20210924b 민수기25장 3절(이스라엘의 이질성)-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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