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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7 18:01:52 조회 : 77         
강남-누가복음 7장 14절 (죽은 자에게 말걸기) 210907b-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59.12.122.247)
강남-누가복음 7장 14절 (죽은 자에게 말걸기) 210907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여러분들이 해야 될 사항은 죽은 자에 대해서 주님께서 잘못을 따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인간이 잘못을 따져서 인간이 개과천선할 인간 같으면 나무라겠는데 인간은 아예 누가 중심을 갖고 있느냐? 선악 지식이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악 지식을 뽑아낼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은 악마는 세상 신이기 때문에 세상 신은 세상보다 더 쎄기 때문에 악마가 집어넣어 준 것은 그 인간이 거기에서 못 빠져나옵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이 이런 비유했거든요. 하나님의 나라는 뭐냐? 자기가 알아서 그 집에서 인질범이 알아서 탈출하는 게 하나님의 나라 아니에요.


오히려 바깥에서 도둑처럼 담 타서 들어와가지고 주인을 꽁꽁 묶어놓고 그리고 그 집의 가재도구를 가져가는 식으로 그 동안 주인집에서 농락당한 그 인간을 강제납치 빼낼 때 주님은 그걸 가지고 성령이 임한 사람의 구원되는 절차로 본거에요. 과정으로 본거에요.


성령이 임한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제가 한 게 아무것도 없었고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나를 보쌈했잖아요. 납치했잖아요. 그러면 납치할 때 선악과 버리고 납치했습니까? 그냥 그걸 유지한 채 납치당했습니까? 선악 지식이 유지된 채 납치를 당했지요.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비교할게 있지요. 내가 바르게 사는 것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의가 이게 동질인가? 연결되는가 안 되는가? 연결될 리가 없지요. 내가 바르게 살면 살수록 점점 더 가리워지고 무시당하는 것은 뭐냐? 일방적으로 제공해주신 주의 의가 밟히죠. 발에 밟히는 거에요. 나의 착함에 밟혀버리는 거에요. 나의 성화론에 밟히는 거에요.


거룩을 추구하는 이 선악적인 본성에 주님의 십자가 피가 모독 받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잘못을 이야기하지는 않아요. 그럼 잘못을 이야기하는 건 뭐냐? 너 잘못했다고 하지 않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확인케 하십니다. 확인케 하십니다.


네 안에는 선악 지식으로 말미암아 정녕 뭡니까? “죽으리라” 잖아요.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의가 선악 지식을 따먹은 이 죄를 이겼다에 대해서 확인 작업을 하는 대상으로서의 성도를 다루십니다. 그러면 확인 작업하는 게 굉장히 우리는 편하게 느끼지요. 그렇잖아요. 편하게 느낀다고요.


미나리라는 영화에 보게 되면 80년대 미국에 이민 간 그 사람들의 직업이 뭐냐 하면은 병아리 감별하는 거죠. 병아리가 손들고 저 암컷이요 이럽니까? 가만 있으면 수컷 암컷 확인해주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런 식으로 확인해주는 거에요. 우리는 굉장히 하는 대로 살면 돼요. 확인은 내가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하시니까.


확인을 어떻게 하느냐? 이렇게 하십니다. 내 뜻대로 안되게 하셔요. 확인한다고 하니까 인생 뭐 수월하게 사는 줄 아셨지요. 아무리 트릭을 써도 내 뜻대로 안되게 해줘요. 내 뜻대로 안되게 해줍니다. 하나 예를 들어 볼게요.


주께서 내 뜻대로 안되게 해줄 줄 알고 기도를 할 때 주의 뜻대로 되는 것만 하는 거에요. 주님이여 이번에 우리 애가 고3인데 시험 잘 치라고 나는 기도 안하겠습니다. 그런 것은 기복신앙이고 그건 세속교회들이나 하는 거지 저는 그런 거 안합니다. 애가 어떻게 하든지 그것이 주께 영광이 되도록 모든 것이 주님의 뜻만 되면 저는 족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럼 주님께서 어떻게 합니까? 그 뻔한 거 기도하는 너의 저의가 뭐냐? 그렇게 뻔한 거 다 주님 계획인데 뻔한 거 그렇게 기도하는 저의가 뭐냐? 그렇게 잘 보이면 숨어있는 내 뜻을 그래도 잠깐 봐줘가지고 우회로 못 본 척해가지고 그래! 네가 금도끼도 네 것도 아니고 은도끼도 네 것이 아니니까 보너스해서 다 줄게. 그럴 줄 알았지?!


그런 트릭은요 기본적으로 주의 뜻을 몰라서 그래요. 여러분 가운데 창세기 19장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에요. 창세기 19장이 뭐냐 하면은 소돔과 고모라 안에서 유황불 떨어져서 멸망하는 소돔과 고모라 잘 아시지요?


소돔과 고모라에서 그 사회에 이데올로기 있고 잘난 사람 있지만 주님께서 딱 보는 것은 뭐냐 하면은 그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오면 돼요. 나오면 된다고요. 다음 것을 다 포기하고요. 부동산 포기고 펀드 넣어놓은 것 다 포기하고 그냥 나오면 돼요. 참 쉽죠 잉?


소돔과 고모라에 네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아니에요. 영광이고 뭐고 네가 주의 영광을 위해서 바르게 사는 것 필요 없어요. 그냥 나오면 돼요. 나오는 게 주의 뜻입니다. 그것도 뒤돌아보지 말고. 미련 없이.


오늘 본문이 그 이야기하는 것이 그겁니다. 그냥 죽어. 살리는 것은 내 몫이다. 내 몫. 네가 왜 자꾸 살려고 해. 예수 믿습니다. 피 믿습니다. 자꾸 십자가 믿습니다. 자꾸 이래서 살려고 떼를 쓰지 말고 애쓰지 마. 그냥 죽어. “저 예수 믿고 천당 갈렵니다.” “그것도 또 네 뜻대로 안해줄거야.” “방언하면 뭐 됩니까? 주여 방언해드리겠습니다.” 아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그냥 살다 죽어. 그냥 죽어. 너 잘하는 거 있잖아. 너 잘하는 거.


아까 잘하는 거 첫째 시간에 배웠습니다. 뭐냐 하면은 대접받고 싶은 것. 자기 자존심이 있잖아요. 자존심 챙기는 것. 누가 안 가르쳐도 잘해요 이건. 엄마 아빠 말하기 이전에 있어요 이건. 타고 났어 타고 났어요 이 자존심은. 자기 중심은.


생각해보세요. 선악 지식을 누가 따 먹었습니까? 아담이 따먹었지요. 그러면 아담 때에 선악 지식을 아는 주인공이 누굽니까? 선악 지식이 살아있다는 말은 곧 누가 살아있다? 그 지식이 살아있는 누가 살아있어야 된다? 자아. ‘나’가 살아있는 거에요. 나. ‘나’ 가 살아있고 이 ‘나’라는 것과 ‘주체’ 자 구분해봅시다.


‘나’는 타고난 것이고요. 아까 주체, 주체는 뭐냐? 사회에서 나를 어떻게 인정해줄 때 그 때 주체에요. 나는 ‘나’다. 깡패들도 그런 소리하겠다. 그런데 남이 안 알아주잖아요. 그러니까 고개 좀 숙이는 척 해야죠 뭐. 밥 먹고 살려면 취직할려면. 해야지요. 자기 자존심대로 대접 못 받더라도 좀 견뎌야죠.


나중에 집에 가서 엉엉 울던지 말던지 이 직장 아니면 내가 다닐 데가 없나. 아이고. 어머니 어머니 왜 날 낳았습니까. 그렇게 워워~~개 부르짖듯이 그렇게 하더라도 일단은 돈은 벌어야 될게 아닙니까. 돈은. 하나님과 인간의 특징이 둘 다 있어요. 둘 다 놀지 않는다는 거에요. 둘 다 쉬지를 않아요. 쉬는 것도 싫어요. 머리가 자꾸 생각하는 거에요.


내가 어디 가면 인간 대우받을까. 어디 가서 사람 대우받을까. 어디가면 내가 위로받을까. 쉬지도 않고 작동을 해요. 머리가. 왜? 왜 인정받아야 돼? 왜 나는 사랑받아야 돼. 나는 선악을 아는 자체가 착하니까. 나는 착하니까 에요. 착한 대우를 제대로 못 받아서 나는 지금 한 맺혀있고 억울하다고 보는 거에요. 나는 착한데 사회가 인정을 안 해주니까 나의 주체, 나의 원함을 안 해주니까 나는 창피스럽다는 겁니다.


에이 직장 때려치고 저 산속에 가가지고 자연인 될래. 뭐 자연인은 쉽습니까? 자연인은 쉬운 줄 알아요? 5일장 나가가지고 약초 가지고 흥정할 때 쉬운 줄 압니까. 중국사람 들어오는데 약초값 내려가는데 자연인도 못할 노릇입니다. 전에 약초 한 근에 오만원 쳐주더니 중국산 확 들어와가지고 2만원 쳐줄 때 아이고 이 짓도 못하겠다.


뱀 껍데기 잡아가지고 10마리 잡아가지고 한 10만원 쳐주더만 중국산 들어와가지고 2만원 3만원 쳐줄 때 자기는 산속에 있다고 세상 초월했다고 했는데 초월한 게 아닙니다. 산속에 전기세 오지요. 오랜만에 장날에 차타고 가가지고 범칙금 걸리면 한 달 생활비 다 나갑니다. 12만원.


사람이 죽을 때 여기 우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뭐가 잘못됐다는 거에요. 그러나 주님은 네가 잘못됐다. 살아있는 네가 잘못됐다. 네가 잘못. 네 잘못은 모르고 죽었을 때마다 아이고 잘못됐구나. 죽었을 때 잘못된 게 아니고 살아있을 때 잘못된 거에요.


그러면 이제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은 주님은 죽음을 어떻게 생명으로 바꾸느냐? 궁금해요? 이게 진짜 궁금하지요. 성도에게만 해당돼요. 성도 아닌 사람에게는 해당 안돼요. 성도에게 이 죽어가는 자를 지옥 가는 자를 어떻게 천국 보내느냐? 감사한 게 있어요.


뭐냐 하면은 죽음은 나의 죽음의 주도권을 주님이 일방적으로 가져가셨습니다. 죄 지었으니까 내가 죽어야지 이럴 경우는 내 죄진 것을 내가 책임지겠다는 의식이 강해요. “그래. 내가 나쁜 짓 했으니까 벌 받아야지. 못 된 건 나야.” 때리지 마세요. 이미 주도권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책망할 권한도 자격도 없습니다. 일체 없어요. 없습니다.


롯의 가족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빠져나온 것은 사전에 그들이 심판을 알아서가 아니에요. 이쯤해서 천사 올 때 됐는데 이거 아니었습니다. 천사는 롯의 가족이 초대한 게 아니에요. 그냥 난데없이 방문하는 겁니다. 오늘날 성령이 난데없이 방문하듯이요. 누가 보냈어요? 누가 보내긴 아브라함이 보냈지요. 삼촌의 기도빨로 보내진 거에요. 그게.


그래서 창세기 19장에 보면 롯을 건질 때 롯의 의로움으로 건졌다고 하지 않고 뭐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건졌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아브라함을 생각해가지고. 그러니까 롯의 운명을 누가 책임지느냐 하면은 그 삼촌 되는 아브라함이 책임진 거에요.


그러면 아브라함의 운명은 누가 책임졌냐? 아브라함에게 일방적으로 찾아오신 그 주님이 책임졌지요. 그러면 주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찾아온 것인가? 아브라함이 이뻐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언약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 자기 약속을 아브라함을 가지고 하나님이 자기 약속을 거기에 담기 위해서 하신 거에요. 그걸 ‘아브라함 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 자신을 아브라함의 언약, 이삭의 언약, 나 야곱의 언약이다 하신 이유가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네가 상상하지 말고 구체적인 인물에게 내가 그 인물들을 어떻게 약속으로 다루는지를 보라 이 말입니다. 그럼 마지막 언약은 뭐에요? 마지막에 누굴 다룹니까? 하나님께서 마지막 언약 누구지요? 예수님을 다루지요. 다뤘더니만 예수님 죽잖아요. 죽어버리죠. 죽었는데 끝입니까? 예수님의 영혼을 아버지께 바쳤잖아요.


그런데 아버지는 예수님의 영혼을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려냈잖아요. 그것도 영광스럽게 살려냈잖아요. 그 목숨이 아니고 영광스러운 목숨으로 살려냈잖아요. 그게 일관된 하나님의 일관된 하나님의 계획이 거기 들어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 예수님께 일어난 그 능력, 죽은 데서 살아난 그 능력이 죽음의 단발성이 아니고 자기 죽음을 개입시키는 예수님의 자기 죽음을 확산시키기 위해서 자기 죽음의 취지와 의의를 더 확대시키기 위해서 십자가를 앞장 세워서 들이밀지요.


그러면 십자가 배후에 뭐가 있습니까? 죽어도 살리라가 그 능력이 포함된 것이 들이미는 거에요. 부활로 들이미는 게 아닙니다. 뭐로 들이밉니까? 십자가로 들이밀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해요. 고린도전서 2장에서 “나는 너희가 십자가 외에는 일체 알기를 원치 않는다”고 되어 있고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나는 오직 뭐만 자랑한다? “오직 십자가만” 자랑해요.


재림을 자랑하고 성령 오심을 자랑하는 게 아니고 그냥 “십자가”만 자랑해요. 왜 십자가만 자랑해야 됩니까? 십자가만 들이댈 때에 바로 뭐냐 하면은 나의 죽음과 생명은 이미 모든 주도권이 내 손에 있지 않고 이미 넘겨졌습니다를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그렇게 고백하는 거에요.


십자가를 안다는 말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주도권은 주님 손에 넘어갔습니다라는 고백. 그게 십자가 믿는 거에요. 내 구원을 해주세요가 아니라 그냥 십자가의 효과만 드러나게 하옵소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뭐가 되든. 내가 집이 3채가 있고 땅이 15만평이 있더라도 남들 보기에 거부, 재벌이라 할지라도 나는 오직 십자가만 드러내게 하옵소서. 밥그릇 숟가락이 솔로몬처럼 다 금덩어리라도 거기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그냥 십자가보다 더 큰 것이 없음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구약에 사무엘하에 보면 암논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암논. 그리고 배 다른 여동생이 있지요. 다말. 다윗의 아들입니다. 암논은 첫 번째 낳은 아들. 다말은 딸이고, 배 다른 딸이고요. 다윗이 아내가 10명이나 되니까. 암논이 자기 배 다른 여동생이 너무 예뻤어요.


하여튼 이쁜 게 화근. 그냥 사는 것도 화근인데 이쁘게 사는 것도 화근이에요. 주위에서 가만히 놔두지를 않아요. 이쁜 것들은 가만히 놔두지를 않아요. 여러분은 조용하지요. 뭔가 이상하게 순조롭지요. 아무 문제없이. 자, 이걸 암논이 이뻐서 좋아한다. 이것은 상식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공감을 해요.


그러나 뭐냐 하면은 이뻐서 강제로 강간을 해놓고는 다말을 버렸습니다. 성경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그가 처음에 좋아할 때 보다 더욱 더 오히려 배나 미워했다”는 거에요. 남자는 다 그래 뭐 이런 겁니까? 남자라고 다 그런 거 아니에요. 왜 그랬을까?


뭔가 이것이 성경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는 것을 보면 같은 아담의 자손으로서 이러한 속성이 우리 안에 다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주께서는 이걸 언급을 하시기 위해서 이 사례를 끄집어냈거든요. 한번 적어볼게요. 인간의 본성을. 인간은 좋은 것이 있으면 갖고 싶다. 이게 소지성 또는 소유성. 인간은 아무나 소유하지 않습니다. 좋아 보이는 것을 갖고 싶어요. 좋아 보이는 것을.


좋아 보이는 것을 가졌으면 계속 좋아야 하지 않습니까? 왜 배나 미워합니까? 그게 뭐냐 하면은 암논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좋은 것을 갖고 싶은데 일단 갖고 보니까 기존의 좋은 것, 기존의 이미 소유된 것과의 조화와 품격이 갖고 있는 그것이 맞지 않을 때는 가차 없이 좋아 보이는 것도 본능적으로 그렇게 좋은 건 아니네 이래가지고 가차 없이 버리는 거에요.


인간의 이런 본능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초등학교 때 그림 그릴 때 나무를 그린다든지 초가집을 그린다든지 뭐 이런 거 그릴 때 이 색깔이 맞는가 싶어서 왕자표 크레파스알지요? 왕자표 크레파스 해가지고 그리고 보니까 이게 내가 원한 색깔이 아니에요. 분명히 좋아보였는데 가져왔는데 가차 없이 바꿔서 딴 걸 해가지고 이것도 아니네. 가차 없이 이렇게 해가지고 적절한 색깔을 찾잖아요. 결정은 누가 합니까? 좋고 나쁘고 결정을 누가 합니까? 내가 결정하지요.


그러니까 악마가 심어준 선악이라고 하는 것이 윤리 도덕만이 아니고요 모든 미학적으로 나한테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선, 나에게 추하게 보이는 것은 악이 되는 겁니다. 지나가는 어떤 사람이 못생겼다. 내가 그 사람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갑자기 욕이 막 나와. 죽어라. 저렇게 못생겨가지고 그것도 살 마음이나 가졌냐?


드라마나 TV에 나오는 사람들 아무 돈 관계나 금융관계 없는데도 대번 채널 막 넘어가잖아요. 꼴 보기 싫다고. 그런데 그 사람이 와가지고 만약에 그 사람 나중에 연줄로 해가지고 자기 딸 결혼할 때 부주 50만원 하게 되면 막 안 돌릴걸요.


그걸 가지고 나한테 플러스가 되고 나 대접받음, 나의 의로운 가치 나의 가치를 증강시키면 선이 되고 나의 가치를 추락시키면 악이 되는데 길가에 못난 사람은 아이고 내가 저 사람 알고 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나는 저 사람보다는 안 못났기 때문에. 이쁜 나에게 약간이라도 추한 게 섞여버리면 상대적으로 못남의 가치가 약간 손상을 받는다고요. 손상을. 손상 당하거든요.


친구라도 끼리끼리 해야지. 공부 못하는 친구는 괜히 오해 받아요. 나도 공부 못하는 것처럼. 지금 여러분들은 지금 아니라고 애를 쓰는데요 여러분들이 교회 50명 100명 교인들 한번 살펴보세요. 누구끼리 노는 줄 알아요? 돈은 돈 있는 끼리 놀아요. 배운 사람들은 배운 사람끼리 놉니다. 무식한 게 우리 이야기에 끼다니. 성경도 모르는 게.


왜 그러느냐 하면은 자신의 가치, 자신의 고귀한 품격을 한시라도 잊어버린적이 없어요. 인간은. 자기 아들 공부 못하는 친구 데려오면 혼나는 거에요. 아들 아들 이러다가 나는 너한테 실망했다. 친구 아버지 뭐하시노? 걔 아버지 죽었는데요. 만나지마! 이게 감출수도 없고 감춘다고 숨지도 못해요.


암논이 다말을 강간을 해놓고 남들이 왜 그렇게 열렬하게 사랑한다 사랑한다 해놓고 왜 미워하느냐? 암논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내 마음이다. 내 마음. 따져보게 되면 암논은 권력 1순위에요. 0순위. 왜? 다윗 다음에 왕 될 사람은 누가 봐도 암논이에요. 왜냐? 장남에게 아버지의 기력을 주기 때문에.


따라서 암논은 다말이 이뻐서 본능적으로 차지했지만 다말을 계속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어디에 저해될 가능성이 많느냐? 나의 인수인계에 상당한 장애 요소로 작용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 단도리에요. 타고났어 인간은. 내가 왜 죽어. 내가 왜 사람 대우 못 받아. 말도 안돼.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면 죽여버릴거야. 나는 나니까. 나 다움이 전부에요. 나 다움이 전부에요.


이게 바로 악마한테 사로잡혀 있는 가재도구. 악마 하우스의 가재도구. 아무리 교회 다니고 아무리 신학을 하고 성경을 백독 천독 기도해도 악마의 품성은 악마의 품성 그대로 있어요. 자기 손을 집어넣어서 수술 이거 못 끄집어내요. 끄집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꾸 마귀는 뭐라고 하느냐? 이제 새 사람 되야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야지. 에베소서 어쩌고 저쩌고 너는 새롭게 하심을 본받아 알기는 또 어디서 들은 구석은 있어 가지고 모든 것은 말씀을 집어넣어서 계속 우리한테 되지도 않는 할 줄도 모르는 우리의 위선만 조작해내는 그런 짓거리를 계속 하게 만들어요.


주님의 방법은 간단합니다. 네 뜻대로 안 되게 해줄게. 됐냐? 그걸로 족해요. 그냥 죽어. 그냥 죽어. 못난 자로 그냥 죽어 버려 그냥. 원래 죽게 되어 있는 게 죽는 거에요.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인간은 소유가 본능이고 이 소유는 소유자 나, ‘나’지요. 나의 품격을 높이고 나의 가치가 절대적 가치에요. 나의 의는.


나의 나 됨은요 하늘의 임금이고 대통령이고 누구도 나를 못 건드려요. 물론 돈 때문에 고개 숙이지만 그 본연의 나의 가치 건드리면 사표 내요. 너 죽고 나 죽자. 네가 대통령이면 다냐. 너 죽고 나 죽자 막 달려들어요. 그때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듯이 인간은 자기의 본질, 본질 같은 것을 버리지를 못합니다. 마귀적 본질이죠. 나는 나로 산다는 본질. 한번 적어볼게요. 나는 나로 산다.


신앙생활 한 50년 했습니까? 바람 부는 날 낙엽 떨어지는 날 툭툭 털어버리고 남는 것은 이것 신앙 같은 것 그것은 하나의 껍데기 날라갈, 덮힌 때, 먼지 같은 것이라서 무슨 계기이나 사건 터져버리면 50년 공들여서 새벽 기도한 것 성화론 그거 다 날라가 버리고 남는 것은 역시 나는 나야. 친구야 술 한잔 하자.


50년 끊은 술을 또 다시 마시고 60년 끊은 담배 또 피우고. 아휴 너 교회 다니잖아. 오늘은 먹고 싶다. 오늘만 먹겠습니까? 다른 사건 나오면 또 먹지. 그동안 술 먹고 싶어서 참는다고 얼마나 참았습니까. 술 먹고 싶어서 환장해가지고. 신자라는 이유 때문에. 신자이기 때문에 참아야 하느니라. 은장도 가지고 참아야 하느니라. 왜 참아요 그거.


인간은 좋은 것은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그걸 갖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도 주위에 소돔과 고모라와 그리고 이 악마가 설치는 세상을 하나님께서 완전히 여기에다가 포위시켜놨습니다. 네 뜻이 결국은 나의 계획이 아니다 라는 사실을 알려줄 때 이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내 뜻은 말로 기도 멋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은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나는 나 뿐이며 나는 나 좋은 것은 안 놓친다는 집요하게 안 놓친다는 것. 나는 더럽게 살지 않는다는 거에요. 죽은 고기나 먹는 어슬렁 거리면서 죽은 고기나 먹는 킬리만자로의 그런 산기슭의 그런 짐승이 아니고 나는 외롭게 산성에 올라가서 죽는 표범이 되고 싶다.


밑에 지저분한 인간은 뭡니까. 하이에나. 나는 표범이 되고 싶고. 양인자씨가 작사한. 이런 건 몰라도 돼요. 권력이라는 것, 이미 더 좋은 것이 있기 때문에 아니 말 바꿉시다. 나의 나 다움을 더욱 확고한 힘이 있다면 다른 것은 장난감 노리개 감입니다.


이 자체가 잘못 되도 너무 잘못됐기 때문에 주님은 거기에 대해서 일체 함부로 닦달 안 내십니다. 그냥 지켜봐요. 그래 그게 너의 전부야. 그냥 살아. 그러나 나는 네 뜻대로 뭐든지 안 해줄 때 이게 뜻대로 안 되는걸 이걸 주의 은혜인줄 알아.


그리고 아까 이야기했지요. “너를 정죄한 자는 어디 있느냐”라고 주께서 이야기합니다. 이 말은 이미 우리가 정죄를 백번 천번 받아도 마땅하다는 대상으로 주께서 그렇게 보고 있어요. 내가 아니면 너는 천국 끝났어. 이런 관점으로 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걸 새롭게 새롭게 느끼면서 새롭게 느낄 수밖에 없지요. 새로운 사항이 계속 주어지니까.


인간 세계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사항을 계속 맞닥뜨리니까. 그 가운데서 신앙이고 뭐고 말짱 소용없고 또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을 미친 듯이 거기서 달려드는 그 짐승 같은 속성을 내가 나를 말릴 수가 없어요. 말릴 수가 없어요. 그걸 어떻게 정지시킵니까.


실컷 죄는 죄대로 되게 하시고 그 다음에 아무도 너를 정죄하지 않지 하고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아이고 죄송합니다. 죄송은 네가 반성한다고 회개한다고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안 한다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마. 똑같은 속성이 다른 사항의 다른 사건을 네가 맞닥뜨리면 또 그 상황, 그 사건 속에서 또 숨기지 않는 본성이 또 튕겨져 나오죠.


이것을 가지고 뭐냐 하면은 이렇게 이걸 고상하게 하면 ‘나의 고유성은 없다’에요. 나의 고유성은 없어요. 이게 육면체니까 육면체 주사위가 있다. 1,2,3,4,5, 밑에 6. 주사위 있잖아요. 주사위에서 1이라는 의미는 무슨 뜻이냐 하면 2가 아니고 3이 아니고 4가 아니고 5가 아니고 6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반드시 ‘나’라는 자체의 고유성은 없고 2와 비교하고 3과 비교하는 거에요. 인생, 인간 사는 것은 나는 이렇다고 말하지 마세요.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 인간의 표현의 한계입니다.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 이게 바로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이 하는 이야기에요.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 그 이야기하는 거에요.


연애하는 남녀 사이에 묻지요. 여자가 묻습니다. 여자가 남자보고 “자기 나 사랑해?” “사랑해.” “어떻게 사랑해?” “많이 사랑해.” “에게 그거야?” “많이 많이 사랑해.” 이거 소용없어요. 그 때 여자가 정답을 알려줍니다. “너 엄마 물에 빠지고 나 물에 빠지면 누구 건질래?”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 둘 중에 한 사람만 살린다면 누구 살릴래? 철없는 남자는 엄마 살릴래. 연애 한 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사람은 “너 살릴래. 너 살릴래” 해 놓고 속으로는 너 한번 두고 보자 지금은 온전한 내 것이 아니지만 내 것 되고 난 후에 넌 죽었어. 너 살릴래. 여자는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지금 말이 중요한 거니까. 오빤 너무 좋은 거 같애.


모든 것이 상대적입니다. 자, 그러면 죽음의 주도권 이야기했지요. 죽음의 주도권을 주님께서 가져갔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뜻이라는 말은 내 기도한대로 안 된다는 뜻이 아니고 기도하는 그 이면에 있는 내 본성, 기도를 할 수밖에 없는 그 답답함에 몰래 감추고 싶은 나의 본성, 그 뜻대로 안 해주시는 거에요.


왜냐하면 나의 기도는 무엇에 전제를 하느냐 하면은 결핍이거든요. 결핍. 모자람. 불만족이거든요. 그런데 주님의 뜻은 뭐냐? 그냥 감사에요.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요. 그래서 결핍에서 뭐로 바꾼다? 감사로 바꾸기 위해서 우리는 내가 지금 이만큼 있는데 지금 이 점선, 이것만 채워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는데 있다는 이 자체가 유도하거든요.


자체를 이걸 부정해버리죠. 주님의 은혜가 이 전체를 복음이 전체를 다 덮어버립니다. 이 없는 부분을 도와주는 게 아니고 전체를 다 덮어버려요. 이게 뭐냐 하면은 너 새로 시작하자. 매일같이. 매일같이. 새로 시작할려면 뭐냐 하면은 내일을 없애 버리는 거에요. 어떤 의미에서는 내일로부터의 탈출이죠. 내일로부터의 탈출.


내일이 있다는 말은 오늘은 불만족스럽고 오늘은 결핍됐다 이런 의미가 있거든요. 그래서 마태복음에 보면 “너희는 염려하지 말라” 했지요. 그 이방인들이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것은 그 말씀에 의하면 무엇을 염두 해두고 자꾸 입을까 먹을까 생각하는 겁니까? 참새 이야기할 때 창고 이야기를 주님이 하시잖아요.


창고도 안 지었지만 창고도 짓지도 않았지만 내가 먹이고 그 들풀이 자기 치장 안 해도 솔로몬이 입은 옷보다 내가 더 이쁘다고 하는 이유가 뭣 때문에 그러느냐 하면은 내일은 내 몫이다. 주님의 몫이에요. 그러니까 뭘 중요시하느냐. 현장감을 중요시해요. 현장감. 현장감을 중요시해요.


현장에서 그 나라 의를 구하라 라는 말은 뭐냐 하면은 그 현장에서 주님의 계획이 지금 ‘나’라는 실존을 만들었다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주의 뜻에 의해서 내가 된 것을 인정한다면 그게 그 나라 의에 속한 사람의 사는 방식입니다.


자, 방금 한 것은 여러분들이 다 아는 이야기에요. 한 두번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다 아는 이야기에요. 아는 이야기는 알기는 알지만 그만큼 실천은 어렵다가 아니라 실천은 불가능하다는거죠. 그래서 이 방금 아는 이야기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제가 성경 구절 하나 찾아드리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7절. 죽음하고 관련 있습니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자, 이 세상사 모든 사람이 얼마나 다양합니까. 성격과 취미 다 다양하지요. 다양한 이것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그 사건은 주님이 보는 관점을 가질 때 가능합니다.


사람들이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은 타인과 비교해서 그래요. 타인과 비교하고 비교하면 경쟁이 되고. 장사하는데 경쟁 없는 장사가 어디 있어요. 취업도 마찬가지고 회사 되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아 나도 감사 좀 했으면 좋겠다. 어떤 사람은 그래요. 이근호 목사가 맨날 죄인이라고 그래서 짜증난다고 하는데 제가 죄인이라는 말만 한 게 아니고 감사까지 이야기했는데 왜 감사는 다 빼먹고 죄인 그것만 추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관심사가 그것이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감사까지 될려면 감사가 될려면 이 세상을 한꺼번에 모든 한 묶음으로 묶을 수 있는 어떤 질적인 것이 느껴져야 되지요. 그게 뭐냐 하면은 모든 사람이 아무리 취미가 다르고 학식이 다르고 지식이 다르고 돈도 차이가 난다 할지라도 미국사람 아프리카 사람 북한 사람 있더라도 하나같이 동일하게 그 때 누굴 쳐다본다?


구름타고 오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거에요 .바라볼 때 그 때 그들이 어떻게 됩니까? 7절 끝에 바라보고 뭐한다? 바라보고 기뻐한다 했습니까? 애곡한다 했습니까? 애곡하는 거에요. 산 것이 헛 살았어요. 산 것이. 그렇게 자기가 자기됨을 위해서 그렇게 살았는데 죽음이란 뭡니까? 죽음이라는 뜻은 ‘모든 것이 소용없었다’ 라는 뜻이에요.


죽음의 주도권을 열심히 살았던 나에게 주도권을 넘겨준 적이 없어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죽는 순간 그 열심히 산 것이 없어졌어요. 얼마나 헛되게 살았습니까. 죽음이 있다는 사실은 착실 곱하기 착실, 착실 제곱 착실해도 그건 착실한 것이 아니고 헛수고한 거에요.


그 내가 모아놨던 그 많은 재산과 그 모든 건강도 다 죽는 순간 사라집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요한계시록 1장 7절 한 것은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니고 애곡한다 이 말입니다. 애곡. 가슴치고 우는 거에요. 그런 인간들 속에 성도를 집어넣는 거에요.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그래도 부럽냐? 각자 자기만 쳐다보고 사는 인간들이 그렇게 부럽더냐?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이게 언제적 멘트인지 모르겠습니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부럽더냐. 심순애야. 신파극에 나오지요. 온 TV에 예능프로에 나오면 전부 다 잘된 것 성공한 것 결혼식을 하는데 수억 들어서 결혼식한 것 저택에 사는 것. 시시한 저택은 저택도 아니지요.


그런 거 해가지고 사람들 부러워하는데 결국 그들은 뭐냐? 애곡할 일만 남아 있습니다. 또 오늘 이 강의 들었다고 개뿔 돈도 한 푼 없으면서 위로한다고 니들 애곡이나 해라. 이런 식으로 남하고 비교하지 마. 너나 잘해. 너나. 너는 울거야 안 울거야? 그거 묻는 거에요.


평소의 관점이 나하고 남하고 왜 나는 부족합니까 이러지 마시고 주님의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면 의도적으로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애곡할 인간들 속에 집어넣은 거에요. 애곡할 인간들 속에. 저는 여기서 한마디 하겠습니다. 오늘 다른 것 다 잊어버려도 이건 잊지 마세요.


하나님보다 더 잔인한 분은 없다. 사람이 감히 흉내를 못 냅니다. 하나님의 잔인함에 대해서 사람이 흉내를 못내요. 애곡 안 할 수가 없어요. 왜? 인간은 그동안 눈에 보이는 세상을 향하여 자기가 살아 있게 하는 그 세상을 향하여 그 에너지, 돈의 에너지, 권력 에너지 그게 자기의 목숨줄인 줄 알고 어쨌든 간에 그거 하나 붙들어가지고 자기하고 자식이나 먹고 살라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자기가 이건 착실한 것이라고 보고 자기는 성실의 성실로 봤지. 이건 울 일이라고 상상도 못했지요. 교회 와서 예수 믿고 기도하는 이유는 뭡니까? 따지고 보면 뭐였어요? 자기 밥이나 먹고 사는데 하나님이 도움 필요해서 그 짓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뭐 복음 듣고 성경공부 나오면 하나님이 밥이나 더 줄 줄 알고.


주께서 이야기합니다. 너 밥 먹어서 뭐하는데? 밥 먹으면 더 배고파. 그럼 밥 먹지 말까요? 주는 거나 먹어 그냥. 내가 줄 때 먹어. 한 달 수입 2500주면 2500 적다 하지 말고 그냥 써. 우리하고 해당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차 벤츠 사주거든 그냥 잘 타고 다녀. 뭐 겸손하다고 티코 타지 말고. 그냥 주는대로 벤츠가 되든 뭐가 되든 그냥 타고 다녀. 다 헛되고 헛된거야. 뭐 겸손 떤다고 이거 팔아서 가난한 사람 준다고 그 짓하지 마. 그 짓하지 마.


내가 이건 감사할 것 이건 감사할 것 네가 정하지마. 그것은 주님께서 오시는 것만 생각해도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자기 성령을 영을 뿌려놓은 그걸 회수하거든요. 아까 생명과 죽음은 어떻게 된다고 했어요? 선으로 연결되어 있지요. 성령으로 연결되어 있는 거에요. 그래서 이 선은 우리 쪽에서 가위로 안 잘라져요. 악마? 아니에요.


로마서 8장에 나오지요. “권세나 뭐나 가난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어떤 세상의 권세자라도 주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이 주님의 계획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여러분 저한테 따질 거에요. 그러니까 목사님, 그 해당 혜택 받는 자가 ‘나’이냐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아느냐 이 말입니까? 또 이렇게 이야기 나올 거에요. 그 혜택을 어떻게 압니까?


제가 이야기해드렸잖아요. 그 혜택을. 사는 게 화근이라고. 뭐냐 하면은 주께서 내 속성을 다 드러내는 거에요. 암몬이 너고, 바리새인이 너고, 가룟 유다가 바로 너고, 배신한 베드로가 너고, 성경에 나온 모든 인물들이 바로 뒤돌아봤던 롯의 처가 바로 너고, 간음한 여인이 너고, 바리새인이 너다. 이미 구원받고 난 뒤에 그걸 보게 하시는 거에요.


아 이게 바로 내가 나답다는 내용이 바로 우르르 쏟아내니까 내장이 흘러나오니까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같은 아담의 족속이니까 그 나물에 그 밥이죠. 똑같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문제는 그들은 그렇게 나하고 똑같이 살면서도 주님을 몰라요. 왜냐하면 대접받는 것에 너무 급해서. 그러나 우리는 주님 알게 되었습니다. 안다는 것은 지식을 아는 게 아니지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내가 나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이 아는 거에요. 앞으로도 모를 것이고 알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아는 거에요. 말 너무 어렵다 이거. 내가 알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 또 알게 되면 또 자기 잘난 체 하기 때문에. 다만 주시는 어미가 둥지에 있는 모이 주듯이 그냥 주시는 거에요. 월 2500씩. 상가 임대료만 해도 1500씩. 상가가 6층. 아버지 재산 상속. 그것도 세금 어떻게 해가지고 상속비도 안냈어.


사회 정의 논하지 말고 그냥 받아 챙겨 누리세요. 그냥. 주시는 것 받으시고 그냥 ‘나는 이렇게 죄인입니다’ 라고 사세요. 오늘 너무 좋은 핑계를 줘가지고. 주님께서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도 쉬지 않는 주님의 일입니다. 내 일은 없어요. 다 주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주님의 계획대로 하는 거에요. 그리고 이 세상의 사람들하고 비교 할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주님이 너무 잔인하니까요. 어떤 분이 저한테 동영상을 보내주셨는데 그 동영상 내용이 너무 잔인했어요. 뻐꾸기가 나무둥지에다가 자기 새끼를 놔둬가지고 다른 새의 어미를 자기 새끼 키우는 도우미로 사용해가지고 먹이 주는 이런 짓을 다 한답니다.


자기 새끼를 안보일 때 딱 집어넣으니까 걔가 먼저 부화 되서 진짜 자기 자식인줄 알고 동그랗게 있으니까 품으니까 뻐꾸기가 온 뒤에는 사랑받기 위해서 남의 애, 원래 있던 새끼를 둥지에서 밀어내서 다 터트려 죽여버렸어요. 터트려 죽이는데 여기 먼저 부화한 새끼 뻐꾸기한테 예상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구렁이가 와가지고 뱀이 와가지고 그것부터 돌돌 감아서 죽여서 그걸 카메라로 생중계 다했습니다. 이 세상의 자연 세계의 잔인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주님은 더 잔인해요. 왜냐하면 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내 것은 없어요. 내 목숨이고 내것이 없었기 때문에 주님이 돌돌 감던 두리두리 감던 교통사고로 죽던 연탄가스로 죽던 배타서 세월호에 빠져 죽던 그것은 내 것 내가 죽이는데 네가 왜? 이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는 할 말 없어요. 암에 걸려 죽던 뭐 코로나 걸려서 죽던 그건 네가 걱정할 문제 아니고 네가 애곡 안 한 그것만 고마워할 줄 알어.


주께서 곧 들이닥치니까. 모든 세계가 바로 이렇게 무지한 가운데 있다는 그것을 알아주시면 여러분 성도입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무지한지 돈만 알고 권력만 알았지 이 십자가 복음을 모르는 거에요. 주께서 우리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모르는 거에요. 그분의 죽음이 나의 죽음을 미리 선행한 죽음임을 몰라요. 그분의 부활이 나의 영원한 부활인 것을 사람들은 들어도 몰라요. 왜? 자기 나름대로 살만 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자, 끝으로 한마디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성도가 누구냐? 바로 성도의 특징은 나 구원해달라고 하지 말고 본인이 사랑의 대상이 바뀌게 돼요. 사랑의 대상이. 이것은 아까 암논이 다말을 말릴 수가 없잖아요. 말릴 수 없을 정도로 미치듯이 사랑하듯이 주님에 대한 그 사랑을,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 받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6장 22절 말씀처럼 주님이라는 사랑이 이걸 내 힘으로 지울 수가 없어요.


주님보고 뭐 돈을 달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봉사하고 선교하란 말이 아닙니다. 주께서 원하는 것은 딱 한가지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정답을 이야기했지요. 제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주님. 중요한 것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나를 사랑해서 또 찾아왔다는 것이 이게 내가 빼도 박도 못하는 운명이 됐다는 게 이게 바로 주님의 사랑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래서 고린도전서에서 사랑은 은사, 선물이라고 되어 있어요. 선물. 사랑이 선물이에요. 내가 쪼다라는 것을 아는 게 선물이고 내가 뭘 해도 성경 못 지키는 죄인인 것을 아는 게 그게 사랑으로 사랑 랩으로 둘둘 감긴 상태에요. 사랑의 둥지 안에 있기 때문에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을 기쁨으로 할 수 있는 거에요.


이거 오래 갈려고 하지 마세요. 오래 가겠다는 것은 나의 또 성도다운 나 다움을 찾는 거니까. 그냥 사시면 내일분의 또 사랑을 또 주실 것이고 내일 안 주시면 모레 주시겠죠. 그 다음은 제가 강의할 문제가 아니고 주님께 맡길 문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다 계획이 있었습니다. 죽은 자에게 책임을 묻지 아니하시고 아예 죽은 자를 일방적으로 살리시고 다시 말하게 하시는 주님. 살아난 자로서 주님이 살렸다는 말을 주저 없이 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강남-누가복음 7장 14절 (죽은 자에게 말걸기) 210907b-이근호 목사.hwp (162.5K), Down: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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