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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4 12:00:18 조회 : 77         
27강-미가 7장 14-17절(악마집의 구멍)220713-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5.136.180.11)
27강-미가 7장 14-17절(악마집의 구멍)2207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미가 7장 14-17절까지입니다.

미가 7:14-17

“원컨대 주는 주의 지팡이로 주의 백성 곧 갈멜속 삼림에 홀로 거하는 주의 기업의 떼를 먹이시되 그들을 옛날 같이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옵소서 가라사대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이 내가 그들에게 기사를 보이리라 가로되 열방이 보고 자기의 세력을 부끄려서 손으로 그 입을 막을 것이요 귀는 막힐 것이오며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인하여 두려워하리이다.”

세상 사람이 볼 때는 폐쇄적으로 생각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따로 관리하셨습니다. 그 관리하는 장소가 바산과 길르앗, 이스라엘에 젖과 꿀이 흐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비옥한 곳, 그곳에 하나님께서 따로 안치하셨습니다. 그 안치하신 곳의 그들이 지금은 오히려 열방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 나라로부터 점령을 당하고, 거기서 죽임을 당하고, 거기서 추방되어서 하나님이 안치했던 그 자리는 악이 차지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선지자 미가는 예언하기를, 무엇을 끄집어내느냐 하면, 애굽땅에서 나오던 그 취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던 그 취지는 하나님의 약속이 살아 있는 한 역시 그 취지도 한결같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은 망했지만 그 약속은 약속대로 남아 있잖아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무엇을 중점으로 해야 되느냐 하면, 약속인 것과 약속이 아닌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돼요. 약속이 아닌 것은 뭐냐 하면, 내 인생입니다. 내게 일어난 모든 인생은 약속된 게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이 약속이 안 되었으면 우리 인생은 무엇의 대상이냐?

유월절 그 날밤, 그 날 밤에 있어서의 진리는 오직 죽음뿐이었습니다. 다 죽었습니다. 죽음이 주요 화제였어요. 그 날 밤에 인간만 살고 있다고 여기는 애굽 땅이었습니다. 인간들끼리. 그만큼 애굽이라는 대제국을 유지했고 거기에 히브리인들도 같이 살았어요.

인간에서 인간, 인간의 지혜와 능력과 노동력이 전부였던 그 날 밤에 외부세력이 끼어들었습니다. 그 순간 인간과 외부세력은 타협할 수 없고, 협상 대상이 안 되고 그 외부세력이 침입해 옴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인간들이 진리라고 여겼던 것은 전부 다 가짜였음이 들통났습니다.

진리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죽이는 게 진리에요. 하나님이 다 죽인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소용없다는 거예요. 너는 내 편이고, 또 너는 내 편이고, 이러한 인간의 편 가름, 패 가름도 다 죽이는 그 앞에서 소용없고요, 전체적으로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죽인다는 말은, 인간은 나름의 양심적인 어떤 장부라는 게 있어요, 회계장부, 그런 장부가 있어가지고 무슨 행동을 하나 해도 이것은 잘했을까, 하면 그것은 잘한 창고에 집어넣어요. 그리고 좀 못했으면 못했다는 창고에 집어넣어서 항상 회계검사를 합니다. 해가지고 내가 착한 게 분량이 많은지 인생에서 나쁜 짓을 많이 했는지 견주어봐요.

견주어 보는데 착한 일이 좀 많이 남아 있으면 좀 나쁜 짓 해도 착한 게 워낙 있으니까 손실을 봐도 나중에 착하다는 평가에는 지장이 없다, 인간이 그런 장부를 누구나 갖고 있어요. 왜? 선악 체계를 알았기 때문에 선의 장소 따로 악의 장소 따로, 그렇게 장부 정리를 하고 있는데 유월절 날의 밤에는 사적인 그 착함과 선함과 악함과 거룩함이 아무짝도 소용없이 다 죽었습니다.

인간을 죽이는 것, 유월절 그날 밤의 진리는 뭐냐? 인간을 죽이는 그것이 바로 진리다, 그리고 너는 죽음의 대상이다. 이게 진리입니다. 다른 진리는 없어요. 다른 진리는 없습니다. “인간이냐?” “예” “죽어라” 그게 인간들이 자기들끼리의 단속해서 자기들끼리의 지혜로 해서는 나오지 않는 진리에요. 외부세력이 끼어드니까 비로소 들통난 하나님이 안목에서 본 진리입니다. “인간은 죽어야 된다.”

그 죽어야 된다는 것, 그것이 이스라엘을 탄생시켰습니다. ‘이스라엘은 죽어야 되는데 왜 생겼는지?’ 이런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죽어야 되는데 왜 생겼지?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그들의 죽음을 담보로, 계속해서 그걸 담보로 쥐고 죽음을 유보 시킨 겁니다.

그날 밤에 죽이는 것이 진리인데 그 진리를 진리답게 ‘왜 죽어야 되는가?’ 그 진리의 내용을 위해서 이스라엘 집단에 대해서는 안 죽이고 결국은 다 죽어 마땅함을 신약 때까지 이걸 끌고 가기 위해서 그들을 죽음을, 멸망을 지연시킨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홍해 바다에 건너왔을 때 ‘아이고 살았다.’라고 이렇게 해석하면 안 되고요, 홍해 바다, ‘내 자아는 홍해 바다와 더불어 쓸려갔다.’ 이렇게 해석을 해줘야 돼요. 그러면 홍해 바다에서 나는 죽어도 뭐는 남는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는, 나는 죽었는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 지위는 내가 죽는 동시에 새로이 등장하는 겁니다. 새롭게 등장한 거예요. 인간 자체가 바꿔치기 된 거예요. 하나님의 진리에 의해서, 죽음이라는 진리에 의해서. ‘제발 죽어 줘. 내가 새것 줄게.’ 이게 주의 뜻이거든요.

자꾸 헌 것 가지고 조물락조물락 대지 말고, 남하고 비교한다든지 저 사람은 저렇게 사는데 나는 왜 이렇게 사나 그런 것도 하지 말고. 내 안에 장부가 있거든요. ‘착한 일 많이 적금 부어놨습니다.’ 그런 개인적인 장부는 찢어버리고, 유월절 진리를 담지한다, 담고 그걸 지속시키는 그 역할이 이스라엘 역할이었습니다.

유월절 진리의 취지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은 한때 유월절 날 또는 한때 홍해는 건너왔지만 그 다음에 광야를 통과하면서 ‘아이고, 이러다 죽으면 어떡하지?’ 자꾸 이런 공포감이 밀려와요. 인간은 그 공포심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나타내느냐 하면, 이런 현상을 나타내요. 완벽해야 된다, 실수가 없어야 돼, 인생을 완전하게 살아야 돼, 뭔가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은, 그 공포에 쫓긴다는 것은 곧 자기가 죽음의 진리 안에서 자기가 안 바꿔졌다는 뜻이에요. 바뀌었으면 그렇게 죽을까, 하는 공포를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설교를 다시 하겠습니다. 사람은 자기를 자꾸 기억하는데 성경은 뭐냐? 진리를 기억해요. 너를 기억하지 말고.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진리가 아니니까요.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해서 애석해하고, 집착하고, 미련 갖고 하지 말고 진리는 따로 있습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언약이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이 이스라엘, 약속의 나라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그 땅 이스라엘 땅에, 약속의 땅에 도착시켜 놓고 그 주변에 이방 민족들, 추방시킨 이방 민족들이 멀리 가지도 않았어요, 이스라엘이 정착한 그 주변에서 호시탐탐 노리면서 쫓겨난 이방 민족들이 포위하듯이 좍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진리에 대해서 오해를 한 것이 뭐냐? ‘진리는 나를 위해서, 나 구원하기 위해서 진리가 있다.’ 이렇게 자꾸 오해를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진리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이스라엘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활용한 이유가 여기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15절에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이 내가 그들에게 기사를 보이리라.” 하는데 16절에 “가로되 열방이 보고 자기의 세력을 부끄려서 손으로 그 입을 막을 것이요 귀는 막힐 것이오며” 귀가 막힐 일이 벌어진 거예요. 그다음에 17절에 보면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인하여 두려워하리이다.”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그러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너희들을 구원할 게.”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인간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그 뱀의 권세, 뱀의 세력, 그동안 인간들이 몰랐었는데 인간의 배후에 이렇고 이런 세력들이 인간을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는 그 사실을, 그걸 아울러 들춰내는 일, 그게 바로 하나님의 진리였고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 이건 뭐 수천 번 언급했기 때문에 여러분이 다 아시겠지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약속한 그것에 인간이 빠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 인간이 빠져 있다는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자의 후손이라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남자의 후손이지 여자의 후손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인간에 속하지 않은 어떤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새로운 인간이 등장하게 되면 그 인간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없다고 여겨지는, 없다고 여겨지는 뱀, 악마가 비로소 자기 정체를 드러냅니다.

인간들은요, 이 세상에서 악마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은 인간들끼리 결탁해서, 연합해서, 협동해서 그렇게 살아가는 그것이 진짜배기 현실이라고 그렇게 여기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인간의 세계가 전부다. 인간 말고 다른 세계는 없다. 악마니 하는 그런 검증되지 않은 소리는 하지 마라. 하나님 누가 본 사람 있느냐? 없다. 따라서 우리가 믿을 것은 같은 인간들 뿐이다.’라는 것이 인간의 생각이에요. 그게 열방의 생각이고 배후에 악마가 조종하는 그 생각들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에게는 귀가 막힐 일이 없어요. 인간들이 노력하게 되면 그들이 불가능한 일도 해낼 수가 있는 겁니다. 천국 가는 것도 인간의 노력과 기도와 열심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자부하는 것이 그게 바로 종교의 세계 아닙니까? ‘안되는 게 뭐가 있어? 다 되게 되어 있어.’ 이게 인간들의 다 같은 마음이에요.

그래서 현실이라는 것은, 인간이 역사 속에서 어떤 일을 했기에 이런 결과가 나왔느냐, 그 결과 나온 것을 모아서 그걸 역사 history, 역사라고 그걸 명명하고 있어요. 그렇게 이름 붙이고 있습니다. 역사에 신이 등장하지 않아요. 역사에 악마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인간의 용기와 지혜, 인간의 인내성, 참을성, 애씀, 겸손, 미덕, 희생, 인간의 희생, 그런 것들만 모아서 그것이 바로 지금의 이 문명이라는 현실을 이루었다.’ 학교에서 다들 그렇게 배우는데요, 학교에서 배웠다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본심이 그거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 미가에 보면 거기에 뱀이 나오잖아요. 뱀이 어디 있는데? 뱀이 없잖아요. 없는데 여기에는 뱀이 나온다고요. 그래서 인간은, “운명이라는 것은 운명이 있더라도 내가 하기 나름이어서 운명을 피할 수도 있고 운명을 새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의 자율성이고 자유의지”라고 그렇게 외칩니다.

인간의 자율성의 극대화, 인간은 뭐든지 할 수 있다, 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뭐냐 하면, 바로 사주팔자, 점치는 거예요. 타로점 치는 겁니다. 궁합 보는 것이고, 굿하는 거예요. 신을 믿는 것 같지요? 아닙니다. 운명을 미리 알아서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있다는 그 자신감을 보여주는 거예요.

사울 왕이 신접한 여인 만나서 미리 사무엘을 찾는 이유, 사무엘의 말을 들어서 일단 그 말을 참조로 듣지요. 왜? 사무엘은 고문관이니까, 고문이니까, 왕의 고문이니까 일단 듣고 결정은, 최종결정은 내가 내리기 위해서 사무엘을 찾은 겁니다. 인간에게 최종적인 의미와 가치는 오직 인간 자신에게 두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이스라엘을 그들 가운데 쓱 보냅니다. 그러면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 자기 나름대로 개척이 가능하다고, 어떤 장애도 극복이 가능하다고 자부하는 그 운명, 이스라엘을 통해서 먼저 그 내막을 보여줘요.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그 옆 주변에 있는 이방 나라하고 거의 일치하게 만들었어요. 일치하게 만들고 이방 나라 멸망하기 이전에 이방 나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이스라엘을 먼저 멸망시켜 버려요. 그러면 그 다음 차례는 누구냐? 이스라엘 멸망한 그 원칙대로 그다음에 이방 나라 차례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멸망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이게 우리에게 닥쳐올 운명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운명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이게 운명이다, 하고 점치듯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 운명을 이스라엘의 시간과 이스라엘의 긴 역사와 그리고 공간, 이스라엘이 살았던 그 지역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운명을 풀어서 설명해 주는 거예요.

그 운명을 설명하면서 “인간들의 삶의 현장은 이 세상에는 없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삶의 현장이었다. 모든 것이 주의 삶의 현장이었다.”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뒤바꿔주지요. 이스라엘의 모든 현장은 주님의 일하시는 현장이었지 이스라엘이 스스로 이겨 보려고 애썼던 그 현장이 아니고 오히려 그런 시도를 박살 내는, 저주하고 심판해버리는 주님의 삶의 현장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삶의 현장을 체험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멸망은 신약에서 보면그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보여주면 믿겠다, 그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가 멸망하는 역사를 한번 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때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그 원칙을 통해서 처음 이스라엘을 세웠던 원칙과 동일한 원칙으로 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따라서 멸망을 통해서 잊어버렸던 원래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될 수밖에 없었던 그 원칙, 그것이 오늘 본문에 뭐라고 되어있느냐?

그날과 같이. 15절에,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이” 그날처럼. 자, 그날에 어떤 현상이 있었는가? 그날에, 아까 유월절을 언급했습니다만 그 날에 어떤 현상이 있었느냐? 그 날은 이스라엘이 자진해서 하나님께 경배하게끔 되었던 그 상황이 터진 날이 그 날이에요. 자진해서 하나님께 경배하게 된 것.

이 말은 홍해를 건너오면서 이스라엘사람들이 놀라버렸어요. 홍해 바다가 갈라지면서. 갈라진 그 길을 애굽 군대가 놓치지 않고 그 틈을 포착해서 뒤따라 올 때 히브리인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런데 마지막 사람이 홍해를 완전히 건너고 난 뒤에 그 뒤에 막 따라왔던 애굽 군대가 있을 때 절벽이 되었던 그 물이 딱 마지막 이스라엘사람 건너오고 난 뒤에 모세가 지팡이 딱 대니까 물이 다시 합쳐졌지요. 합쳐졌어요. 합쳐지니까 그 애굽 군대, 따라오던 사람들 다 죽었습니다.

이럴 때 여기서 대합창이 일어났어요. 그 광경을 본 이스라엘에서 하나님께 저절로 찬송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출 15:1, 11) 찬양했습니다. “이 세상에 여호와 하나님 같은 분 누가 있으리오!” 이게 바로 그날의 현상이에요.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은 이런 겁니다. 내가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일방적으로 주께서 구원해주신 거예요. 다 구원해주신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바로 그동안 그 ‘하나님이 다 해주셨다’ 이렇게 계속 가야 되는데 그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자기가 거들려고 한 거예요. 자기한테 장부가 있으니까 하나님의 구원에 내가 한 수 거들려고 한 겁니다. 그거 누구한테 그런 더러운 버릇을 배웠는가?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이방 나라들이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런데 이방 민족은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을 그들은 몰랐어요. 이스라엘은 그걸 알아야 돼요. 이방 나라는 몰라도 이스라엘은 그 뱀의 후손이 지배한다, 뱀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들춰내는 기능이 창세기 3장 15절에 이미 예고되어 있고, 그 예고된 일의 삶의 체험현장이 인류의 역사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망하면서 어떤 원칙을 우리가 잊어버렸기 때문에 망했는가를 이스라엘은 알아야 되겠지요.

그 원칙이 뭐냐? 하나님의 일에 인간이 거들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인간이 따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보면 뱀이 좁은 구멍에서 나온다고 되어 있는데 이 구멍이 어떻게 생긴 구멍이냐 하면, 신약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세리와 창기, 창녀지요, 간음한 여인, 요한복음 8장에, 도둑, 십자가에 달린 강도지요, 도둑, 강도, 세리도 그 당시 도둑이었으니까, 이런 자들이 구원을 받아 버렸어요. 주님으로부터 구원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의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리와 창기와 도둑과 간음한 자가 구원을 받은 이것은 기가 막힌 하나님의 통쾌한 승리에요. 승리라는 거예요, 승리. 그 승리가 뭐라고 표현되어 있느냐 하면, 시편 74편 12-15절에서는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인간에 구원을 베푸셨나이다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악어의 머리를 파쇄하시고 그것을 사막에 거하는 자에게 식물로 주셨으며 바위를 쪼개사 큰 물을 내시며 길이 흐르는 강들을 말리우셨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용들의 머리를 깨 부숴버렸다. 예레미야 23장 19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라 나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뱀의 머리를 친다 했거든요. 창세기 3장 15절에 뱀의 머리를 치는 거예요. 뱀의 후손의 머리를 치는 거예요.

뱀의 후손이라는 것은 마지막 이 뱀을 따라서 끝까지 가보면 거기에 악마가 등장하는 그 자리라는 말이지요. 그 자리인데 그 대가리를 쳐버리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삶의 현장이었어요. 인간은 누구 악마의 대가리를 치는 게 우리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어느 학교 교훈에 “뱀의 대가리를 치자.” 이런 게 있습니까? “성실하고 착하고 아름답게” 뭐 이런 것 써 놓았지요. 뱀의 머리를 치자. 이런 것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는 나올 수 없는 거예요.

왜 그런데 하나님께는 세리와 창기와 도둑과 강도와 간음한 여인, 그 당시 유대교에서 가장 저주받았다고 치는 그 사람들을 왜 구원했느냐? 그 사람들을 아무 한 것도 없이, 그들이 아무런 거든 것도 없이 구원이 되어버려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구원이 되어버렸다는 거예요.

구원이 되어버리면 이것은 기가 막힌 하나님의 뱀에 대한 통쾌한 승리로 보는 거예요. 승리로 보니까 뱀이 그들을 붙잡고 있었는데 세리, 창기, 도둑, 강도, 이게 뿅, 뿅, 뿅, 빠져나오니까 거기에 구멍이 생기고 그 구멍 따라서 닭 쫓던 개처럼 그제야 뱀이 대가리를 싹 내미는 거예요.

“저거저거저거……, 내 새끼인데, 저거 내 편인데, 내가 저거 관리했는데 저게 어디로 건너가노? 어어, 저게 하늘로 가네? 저게 천국으로 가네?” 그제야 뱀이 고개를 내밀면서 구원받은 자를 두고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쟤는 지난번에 이런 죄를 지었고, 이런 나쁜 짓을 했고……” 고자질을 하는 거예요. 하나둘씩 따지는 겁니다. “쟤는 절대로 구원되어서는 안 됩니다.” 따지는 거예요.

그게 뭐냐? 우리 맘속에 숨겨져 있던 뱀의 정체였던 겁니다. 괴물이었던 겁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한 게 있어요. “제발 어른 노릇 하지 말고 따지지 마라. 결단코 천국 못 간다. 그런 인간은.”

‘결단코’라는 말이 나와요. 아주 주님께서 작심하고 이야기한 거예요. 내가 분명히 이야기하는데, 내가 변동 없이 확실한, 결정적 이야기를 할 텐데, 그게 ‘결단코’라는 뜻이지요. 마태복음 18장 3절에,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아이, 어린아이의 특징은 따지지 않습니다. 따지지 않아요. 자기에 대해서 자기가 평을 내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내가 노력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서 성도를 어린아이로 만들었어요. 남자 같으면 소년, 여자 같으면 뭐가 되겠습니까? 소녀가 되게 하는 거예요. 아무 철 없는, 그저 하하, 거리면서 그냥 웃는 그러한 소녀, 천진난만한 소녀, 천진난만한 까불이 소년 소녀, 연세가 7십이고 8십이고 간에 주님에게는 그냥 소녀예요.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예요.

그러니까 너 자신에 대해서 네가 따지지 말라는 겁니다. 인생을 어떻게 평생을 살았고 어떻게 실수를 했든지 실수나 실패를 따지지 말라는 겁니다. 구원은 그걸 따진다고 해서, 그런 것을 고려하거나 영향 입어서 그렇게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그런 것들은 마귀가 하는 짓이에요. 마귀가 그렇게 발목을 잡는 거예요.

자기가 놓쳐버렸으니까, 놓쳐버렸으니까 숨어 있다가 화가 나서 뿅, 뿅, 빠져버린 구멍이 생겼잖아요. 도망갔으니까, 구멍이 생기니까 거기에 모가지를 내밀면서 “쟤는 한 짓이 있어서 절대로 구원받으면 안 돼요, 하나님이여!”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 구멍이 그 구멍이에요. 지금 악마입장에서는 기가 막힙니다. ‘어떻게, 어떻게 저런 죄인들이 구원을 받아?’ 기가 막히지요. 이 기가 막힘이 처음에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될 때 귀 막힘, 귀 막힘 현상이에요. 인간들끼리 있을 때가 아닙니다. 그날 밤에 모든 인간을 죽여버리는 천사의 왕래, 내왕으로 인하여 세상은 인간들이 몰랐던 진리가 적용되어서 생긴 나라가 이스라엘이었고, 이스라엘이 뭐 잘났다고 바다가 “어서 옵쇼.” 하고 갈라졌겠어요?

하나님이 함께하니까, 하나님이 친히 만든 나라니까 그 홍해 바다가 길을 내었고 뒤따라 오던 애굽은 하나님이 차버렸기 때문에, 뱀의 자손이기 때문에 그냥 물로써 다 잠겨 죽게 만든 겁니다. “어딜? 어딜 감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은 주제에 어딜 감히 은혜에 나라에 들어온다고.” 안 봐주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가 이 세상에 주님의 자신의 활동하는 영역, 현장으로 만들어서 그걸 구분 짓는 거예요. 원래 땅이라 하는 것은요, 인간의 정복의 대상이었어요. 하나님께서 이 토지를 저주해 버렸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다 아시지요.

쉽게 가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캔 음료 마시고 쓰레기 있잖아요, 그 쓰레기를 밟고, 밟고, 밟아버리면 어디에 끼어 들어갑니까? 흙 속에 깊숙하게 끼어들지요. 이 토지는 하나님의 쓰레기장이에요. 저주한 것들은 다 모이게 하는 쓰레기장이었습니다.

뱀도 그 속에 있고요, 인간도 그 속에 있고요, 선악과 따먹은 인간, 캔을 그냥 버리는 게 아니고 밟아서 버리는 거예요. 짓밟아서. 거기서 악마는 대장질했고 인간은 그 대장질하는 악마가 대장질하는 것도 모르고 농락당하면서, 평소에 악마가 인간에게 심어준 그 선악 지식에 의해서 자기를 지적질하면서 평생을 악마한테 농락당하면서 무서움과 공포에 벌벌 떨면서 산 거예요.

맨날 자기가 자기를 장부를 펴놓고 측정하거든요. 오늘은 얼마나 착한 일 많이 했을까, 아주 착한 일 많이 했구나, 복 받을 거야 너, 이런다고요. 이것은, 인간은 이 세상 하나를 악마의 나라가 되도록 그냥 종처럼 부림을 당한 거예요. 그걸 ‘죄의 노예’라 합니다. 악마의 노예, 악의 노예가 되어서 부림을 당한 거예요.

‘믿을 것은 인간들 힘밖에 없고 지혜밖에 없다. 이 눈에 보이는 현실, 보이는 이 현실은 인간의 숱한 자들의 희생과 지혜와 노력과 영웅적인 봉사의 운명의 세계니까 이 현실을 우리는 아끼고 후세에 길이길이 물려 줘야 돼. 메탄 줄이고 탄산가스 줄여서 이 살기 좋은 환경을.’ 이런 식으로 학교에서 가르치는 거예요.

그게 인간들에 통용되는 진리라는 겁니다. 뭔가 위에서 받은 게 없어요. 은혜를 받은 게 없어요. 그냥 노력, 노력뿐이에요. 애씀, 절제, 철저한 자기관리, 실수줄이기, 완벽에 완벽을 기하기. 그만큼 무섭다는 거예요, 그만큼.

제가 술 먹는 사람을 안 좋아해요. 제가 술 먹는 사람을 안 좋아하는 이유가요, 술 먹는 사람들이 특징이 있어요. 뭐냐 하면 술을 먹을 때와 술을 안 먹을때를 인위적으로 자기가 구분한다는 것, 그게 제가 싫은 거예요. 인간은 술 안 먹을 때도 술 취해 있습니다. 인간은 술 안 먹을 때도 이미 술 취해 있어요.

그러니까 술 먹으면 자기를 위한 태도가 노골화돼요. 그러니까 술 안 먹을 때는 평소에 자기를 위해 살다가 술 먹고 난 뒤에는 그다음부터는 약간 더 노골화될 뿐이지요. 그런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술 안 먹을 때는 신사지만 술 먹으면 개 됩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술 안 먹을 때도 있습니다.”

자기가 괜찮은 때가, 멀쩡한 때가 있다는 것을,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가끔은 술을 먹는 거예요. 가끔, 자주, 뭐 술을 먹음으로써 술 안 먹을 때의 괜찮은 나를 부각시키는 그런 조작을 의도하면서 술을 먹고 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 조금만 봐주세요. 오늘 힘들어서 한 잔 합니다. 그래도 술 안 먹을 때는 저 멀쩡하지요?’ 자기 멀쩡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가끔은 술을 먹는 거예요.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얼마나 위선적이에요! 의도적으로 술 먹을 때와 안 먹을 때를 자기가 구분하고요.

인간이 술을 먹게 되면 다는 그렇지 않지만, 술 먹고 난 뒤에 특징이 있어요. 이건 술 안 먹을 때도 마찬가지지만 인간은 대화를 시도합니다. 자꾸 대화해요. 인간이 하는 모든 대화나 태도 행동, 이건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을 같이 있게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제발 좀 떨어져 나가줬으면 좋겠다, 하는 사람을 떨쳐내기 위해서 인간은 대화를 시도합니다.

그래서 같이 있어 주면 고맙고, 떨어질 사람이 알아서 떨어져 나가주면 고맙고, 그 노력이 대화고 대화가 안 되면 폭력이 등장하고 그러지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저주받은 땅의 티를 인간을 통해서 팍팍 냅니다. 인간은 일치성, 나와 같은 사람을 찾기를 원해요.

그러나 구원은 그렇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고 전혀 다른 사람이, 나와 일치성이 전혀 없는 분이 우리를 구원해요.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공통점이 하나도 없어요. 교회 와도요, 같은 사람끼리 이야기해요. 다른 사람, 안 좋아하는 사람과는 대화가 끊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보기에 모든 인간은 저주받아 마땅합니다. 진리는 뭐냐? 모든 인간은 죽어야 된다는 게 진리에요. 그런데 죽어야 될 인간들이 저희끼리 뭉쳤다고 안 죽고 그런 것은 없어요. 인간은 자기 본인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인간들이 자꾸 자기중심에 일치되는 것, 내 마음에 맞는 사람,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을 자꾸 찾고 있습니다. 그걸 가지고 뭐냐? 친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시편 41편 9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가룟유다에 대해 예언할 때 이 예언이 적용됩니다. 열 두 사람을 친구로 뽑아놓았어요. 그리고 그 친구 속에 배신자를 집어넣고 그 배신자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도 그 가룟유다와 다를바 없음을 열두 제자를 뽑아놓고 주께서 증명하십니다.

예수님 뜻은 이겁니다. ‘이 세상 중에서 내 마음과 뜻을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왜? 배후에, 배후에 악마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으로 생겨 먹은 것은 전부 다 악마의 마음으로 하나로 결집 되어 있기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악마의 심정에서 벗어나서 알아서 주님 찾아올 위인은 단 한 사람도 없음을 주께서 보여주시는 거예요.

친구로서 배신당하고, 나를 배신한 그 친구를 구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의 구원이에요. 그래서 구원받은 자는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느냐? 구원받은 사람은 절대로구원 받고 난 뒤에 주의 일을 거들지 않습니다. 주의 일을 거드는 사람은, 자기가 지금 노력하고 있는 사람은 구원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에요. 세리와 창기 주제에 뭘 거들 것이 있어요? 뭘 거들어요, 뭘?

이것이 이미 구약에 나옵니다. 창세기 37장 5-7절에 보면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여기 절한다는 말이 나와요. 형들이 지금 요셉을 미워하는데 요셉은 그것도 모르고 천진난만한 소년같이 그냥 자기 말을 해버려요. 9절에,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절한다는 이것은 이미 뱀의 머리를, 대가리를 쳤다는 거예요. 짓밟았다는 겁니다. 세리와 창기가, 간음한 여인이, 도둑이, 강도가 구원받는 것은 그들이 잘해서가 아니에요. 강도짓 잘해서가 아니에요. 배후에 그들의 죄를 지적하는 악마를 주께서 이미 짓밟아버린 거예요.

악마는 주님 앞에 절할 수밖에 없어요. 오늘 본문처럼 여호와께 돌아와서 주로 인하여 두려워할 수밖에 없어요. 악마가! 구원받았다는 말은, 내가 구원받아서 좋아라, 하는 뜻이 아니고 구원받는 시간과 공간 자체가 나의 활동의 영역이 아니라 주님의 영역이에요.

토지와 인간은 저주받은 구역입니다. 우리가 땅에서 태어나서……, 오늘 본문에 나오잖아요. 여기 보면 17절에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땅과 접촉되어 있고 땅에 밀착되어 있는 삶, 이게 바로 자본주의고 이게 바로 인간의 문명이에요. 땅을 벗어나서 못 사는 것.

지구의 환경 안 좋으니까 우리나라 누리호가 어디로 가려고 합니까? 지금 달에 가려고 하잖아요, 달에. 달에 귀한 금속이 있어서 그것 개발하면 산다고. 또 달 만원 되면 어디로 가나? 또 화성 간다고 난리에요. 화성 가면 저주 안 받습니까? 목성 가면 저주 안 받습니까?

하늘은 예수님의 영광이 나는 그 영역, 주님의 영광의 그 영역이 하늘나라에요. 주님의 영광, 인간이 영광 받는 나라 아닙니다. 주님이 영광 받는 나라에요. 그게 예수님의 재림의 순간이고요, 그게 유일한 현실이에요. 다른 현실은 없어요. 인간이 만든 현실은 전부 다 자기중심의 술 취한 상태에서 자기를 위해서 횡설수설하는 그런 잘못된 해석을 남발하는 그렇게 상상한 현실, 이것은 가짜 현실이에요.

진짜 현실은 주께서 악마의 구역에다가 저주받은 구역에다가 뿅, 뿅, 뿅, 구멍 뚫어서 거기서 일방적으로 주께서 자기 백성 끄집어내는 그 작업의 현장이 유일한 현장이에요. 구멍 뚫어서 보니까 내가 내 구원에 내가 보탠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진난만한 소년이 안 될 수 없고 소녀가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연세가 80이 되어도 다시 옛날의 그 소녀 시절로 돌아가는 겁니다. 소녀 시절? 소녀시대?

여기서 주의할 것은 내가 소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소녀가 된다는 말이 아니고 주께서 나를 소년으로 다루어주시고 소녀로 간주해주신다는 뜻입니다. 내가 소년 소녀 품성을 소유한다는 게 아니에요. 잘난 체하는 나는 죽여버리고 소년이라고 규정된 그 규정의 개념에 우리를 집어넣어서 주님의 규정에 일치되게 하는 거예요.

따라서 내가 생각하는 나는 이제는 불일치해요. 일치되지 않아요. 잊어버리세요. 내가 생각하는 나, 내가 내 안에 있는 장부, 선악 장부, 그거 주께서 안 봅니다. 일방적으로 십자가의 피 흘림으로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우리를 죽이시고, 주님의 일을 증거하라고 뿅, 뿅, 뿅, 악마에 발목 잡혀 살았다는 것을 증거하라고 주께서 우리를 그런 식으로 “아무것도 거들지 말고 내가 내주는 은혜대로 천진난만한 어린애처럼 살아라.” 결단코 말하노니 어린애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기가 막힐 주님의 승리였습니다. 통쾌한 승리였습니다. 악마의 입장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기가 막힐 일로 여겨질 겁니다. 주여, 십자가의 공로를 받고 보니 주님의 구원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앞으로도 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음을 더욱더 주께 기뻐하고 찬양하고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7강-미가 7장 14-17절(악마집의 구멍)220713-이 근호 목사.hwp (90.0K), Dow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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