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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6 16:22:42 조회 : 58         
서울의존강의20220714a 베드로후서 2장 22절(개와 돼지)-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하림(IP:119.192.96.3)
서울의존강의20220714a 베드로후서 2장 22절(개와 돼지)-이 근호 목사

베드로후서 2장 19절부터 하겠습니다.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베드로후서에 나오는 ‘저희’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육체의 정욕 가운데에 있는 사람입니다. 육체의 정욕은 그 특징이, 정욕이 나라는 것을 장악하고 있고 붙들고 있는 거예요. 빠져나올 수가 없죠.

여기 보면,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에게 종이 된다. 이 말은 전쟁을 재미로 한번 붙어보고 각자 자기 길로 가는 게 아니고 하나의 전쟁이 그 사람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확정지어버렸다는 겁니다.

둘이 누가 세나 한번 붙어보자 재미로 하자, 이게 아니라 여기서 만약에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된다는 그런 내기가 인간 세계에서 주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인간 세계에서. 인간 세계에 그 내기를 누가 하고 있는가? 자기 욕망과 했죠. 육신의 정욕으로 한 거예요.

첫 번째로 육신의 정욕과 육신과의 싸움이 있었는데, 두 번째, 정욕이 이기고 육신은 졌다. 세 번째, 따라서 육신은 정욕의 종이 되었다. 정욕은 이기고 육신은 졌기 때문에 육신은 정욕의 종이 되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정욕은 항상 육신에게 이기고 육신은 정욕에게 늘 지게 되어 있다는 말이에요. 베드로후서에서 이 전체를 가지고 인간이라 하는 겁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멀쩡하게 외부적으로 생겨먹은 것이 인간처럼 생겼다고 해서 인간이다, 가 아니라 그 내부에 육체의 정욕이 있음을 부정하지 말자. 인간은 “너 인간이다” 이렇게 되는 게 아니고 “네 속에 끊임없이 전쟁이 있는데 백날 붙어봐야 너는 그 육신의 정욕에게 지게 되어 있다. 그게 너야.”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 육신이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을 안다고 한다면 그 육신은 정욕한테 이기겠는가, 지겠는가? 우리가 그걸 생각할 수 있죠. 이 육신이 예수님을 알았다. 예수님을 안들, 육신은 이미 정욕에게 패배한 자체로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았다고 해서 정욕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그러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았는데 정욕한테 진 상태, 이걸 인간하고 좀 달리 이야기하면 이게 교인들이에요.

그러니까 인간도 구원 못 받고 교인들도 구원 못 받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교회 가서 열심히 해봐야 소용이 없어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포로 수용소에 철조망이 있는데 이 안에 어떤 애가 잡혀왔습니다. 그런데 철조망 바깥에 자기 아빠가 와 있단 말이죠. 애가 아빠를 알아보고 아빠한테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저 분은 우리 아빠에요. 아빠, 뭐해? 나 여기 갇혀있는데 빨리 나를 건져내라.” 이렇게 애를 써도 이 견고한 철조망이 애보고 뭐라 합니까? “너는 이미 이 수용소에 종 노릇하고 있기 때문에 네가 아빠든 바깥에 누굴 알아도 너는 종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결론은 뭐냐 하면 이 전체가 인간이라 했죠. 전체 이야기는 “인간은 구원이 없다” 뭐 그런 이야기죠. 뭐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는 거예요. 왜 구원이 없어요? 이미 졌기 때문에. 누구의 종이 되었다? 정욕의 종이 되었다. 그걸 여러분들이 확인해보라는 거예요, 베드로 사도가. “확인해봐. 네가 예수를 믿어? 그럼 네 육신의 정욕을 이길 수 있어? 예수 믿고 난 뒤에 정욕을 이겨본 적 있어? 없잖아. 없으니까 소용없지 뭐.” 이런 뜻이에요.

21절에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이 철조망 안에 갇혀있는 아들이 아버지보고 살려 달라 하는데 아버지가 “너는 정욕의 종이야. 노예야. 우리는 못 구해.” 이렇게 하니까 애 입에서 갑자기 욕이 나와요. “에이, 난 아버지 모르는 게 더 나을 뻔 했다.” 이런 뜻이에요. 차라리 예수 모르는 게 더 낫지. 예수 알아서 내게 보탬 된 게 뭐가 있는데? 내 정욕 하나도 못 이기는데 내가 예수 믿는 게 무슨 소용 있느냐.

그래서 22절에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여기 개 나오고 돼지 나오죠. ‘개돼지한테 교육시킨다고 개돼지의 성품이 달라지느냐?’ 라고 묻는 겁니다. 안 달라지죠. 그런데 개돼지뿐 아니라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말씀으로 교육받는다 해서 새 사람 되고 구원받고 하는 그런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은.

그러니까 이 말씀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분명히 알라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을 이기는 육체의 정욕이 어디서 온 거냐? 육체의 정욕은 악마로부터 온 겁니다.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온 거죠, 인간 육체의 정욕이. 인간의 정욕이 어두움으로부터 또는 악마의 세력으로부터 왔다 이 말이죠. 이 세상 신,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악마로부터 왔거든요.

그럼 악마로부터 온 인간들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말씀을 지키고 해도 이미 전쟁에서 졌기 때문에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하고 악마하고 언제 전쟁했습니까? 창세기 2장에서 선악과 따먹지 말라 했는데 따먹었잖아요. 에이, 한번 졌는데. 한번 진 게 영원히 진 거예요. 한번 지면 다음에 또 삼세판 하자, 이런 거 없습니다. 오징어 게임 그런 거 없어요. 전반전 뭐 준결승, 결승 이런 거 없어요. 딱 한번 지면 그걸로 땡이에요.

영원한 죄의 노예가 되는 겁니다. 죄의 종이 되는 겁니다. 로마서 6장에서도 그런 이야기했죠. 인간은 죄의 종이라고. 이것을 베드로는 보다 구체적으로 보다 보편적으로 인간의 전체적인 현상을 이야기한 겁니다.

20절에 보면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이런 이야기를 함으로써 성도는 대단히 즐겁죠, 이 이야기가. 왜냐하면 성도는 주님이 자아를 처리해줬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나만 웃고 있는가? 다른 사람들은 심각한데.

구원의 시작은 우리가 멀쩡할 때 구원해준 게 아니에요. 죄의 종일 때 구원했거든요. 그럼 죄의 종일 때 파닥거려가면서 자기 힘으로 벗어나려고 백날 해봐야 오늘 본문의 개돼지처럼 도로 돌아가요. 그게 교인들이에요. 성도가 아니고 교인들. 교회 와서 자기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성경 백날 이야기해봤자 자기의 정욕한테 지게 되어있다 이 말이죠.

뭐 다른 예를 들 수 있어요. 어떤 애가 시골 교회 크리스마스 행사에 참여해서 “예수님 이야기가 너무 재밌어요.” 이러고 있는데 그 엄마의 종교가 보살 수준이라. 불교에 특심한 사람이다 이 말이죠. 엄마 허락도 없이 여름 성경학교 하고 있을 때 엄마가 와가지고 “엄마, 한 시간만 듣고 갈게.” 하면 엄마가 용납합니까? “우리가 4대째 불도 집안인데 어디서 이게 허락도 없이... 가자, 가자.” 데려가잖아요. 그럼 돌아가는 거예요. 다시 개돼지로 돌아가는 거예요. 아무리 몸부림치고 맘부림쳐도 이미 부모 힘이 세면 부모 발언권이 있으면 걔는 교회 못 가고 절에 가든지 더 심하면 머리 깎고 어릴 때부터 절에 들어가서 꼬마 중 되든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죠.

그 정경, 인간 생활상을 그대로 지금 베드로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합니까. 내가 노력해서 구원받고자 했더라면 이런 꼴이 날 뻔한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진짜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가 이렇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 넌지시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자유인지 몰라요. 큰 자유죠.

주님께서 우리 자아를 날마다 죽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구나. 내 힘으로 구원 받으려 애쓰는 것을 무용지물로 만드시는 그 이유가 있었구나. 그 이유가 있어요. 성도는 내가 하나님의 법을 지켜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성도는 법에서 벗어나서 구원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법과 무관하게 벗어나서 그런 거예요.

지독한 법. 죄의 종이 될 수밖에 없는 그 법. 육신의 정욕은 우리 안에서 멈추지 않고 발작을 일으키고 주님의 율법은 거기서 그러한 우리 자신을 향하여 법이 원하는 수준으로 다 요구할 때, 거기서 성도는 딜레마를 느끼는 겁니다. 열심히 해볼게요. 최선을 다 해볼게요. 성심성의껏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와가지고 야, 절에 가자, 하면 끝나는 거예요. 엄마가 와서 야, 여기 왜 있노? 집에 가야지. 주일학교 여름성경학교 왜 참석했어? 데려가면 끝나는 거예요.

방금 이 이야기를 쉽게 말씀드리기 위해서 예수님의 비유를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비유입니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립니다. 밭에 씨를 뿌리면 밭의 성질에 따라서 이쪽에는 길 가에 씨가 뿌려지죠. 그다음에 안에 바위가 있는 농토. 이것은 가시덤불에 휩싸인 농토. 네 번째는 뭐겠어요? 그냥 옥토.

농부가 씨를 뿌리는데 길 가에 떨어지니까 마귀가 와서 주워 먹는다 했잖아요, 말씀을. 길 가에 새들이 와서 먹는다 했잖아요. 이건 허비된 거죠, 아무 결실 없이. 그리고 바위에 떨어지니까 바위가 그 기운을 막아서 더 뿌리가 자라지 못하겠죠. 이것도 허비됐잖아요. 그다음 가시덤불 때문에 또 열매를 못 맺잖아요. 이것도 허비됐죠. 옥토는 어떻게 됩니까? 열매가 몇 배죠? 30배, 60배, 100배. 허비된 것 보상 다 했네요. 남는 장사에요. 30배, 60배, 100배. 2배 정도 같으면 허비된 것이 더 많다 할 수 있는데 이거는 30배, 60배, 100배나 옥토에서 열매 맺으니 허비된 게 너끈히 보상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이 말씀(씨)은 두 가지 결과를 낳았습니다. 하나는 열매 없는 결과, 하나는 열매 있는 결과. 하나님께서는 열매 있는 결과와 열매 없는 결과를, 말씀은 이 둘 다를 보여줘요. 둘 다를. 따라서 열매 있는 결과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려면 열매 없음이 왜 열매가 안 생겼는지...... 하나님께서는 그 탓을 누구 탓으로 돌립니까? 농토에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하죠. 농토에 문제가 있다. 그래서 이 농부가 씨를 뿌렸다는 것은 열매 맺는 것도 목적이 있지만 이 세상이, 말씀을 뿌리는 이 세상에 얼마나 큰 문제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비유의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이 이렇게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이야기를 제자들이 듣고 있었잖아요. 열두 명의 제자들이 듣고 있었잖아요. 듣고 있을 때, 제자들은 본인이 어느 영토에 엮일까, ①길 가, ②바위, ③가시덤불, ④옥토, 자기가 어디 가고 싶어 할까요? ①번 간 사람 땡이고, ②번 간 사람 땡이고, ③번 간 사람 땡이고요. ④번 간 사람 땡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골라잡을 그런 권한이 없기 때문에. 골라잡을 권한이 없어요.

인간은 말씀을 지킬 수가 없는 존재에요, 애초부터. 애초부터 인간은 말씀을 지킬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애초부터. 인간이 구원 받은 게 남아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남아있게 하겠다는 게 주의 계획이에요, 말씀이.

그래서 성도로 하여금 법을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나 법을 안 지킨다.’ 이게 법을 벗어난 게 아니고 육신의 정욕에서 이미 인간은 종이 되었잖아요. 그 인간을 없애버리고 지워버리고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그 방법을 사용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을 없애는 방법의 법이 무슨 법이냐 하면 그게 바로 사랑의 법입니다. 그게 사랑의 법이에요. 로마서 7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을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남편이 죽으면 그 아내는 아내로서의 법 자체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그렇죠? 3절에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淫婦)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여기서 자유라는 것은 법의 자유를 의미하는 겁니다.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남편이 율법인데 율법 된 남편이 죽었으니까 아내에게 남편이 죽으면 이것은 남편에게 아내가 죽은 것과 동일하게 되어버려요. 둘 중에 한쪽이 없으면 다른 한쪽도 그 관계 자체가 날라가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4절에 보면 성도는 “율법에 대해서 죽임을 당하였으니”. 3절까지는 남편이 죽었잖아요. 율법이 죽었잖아요. 그런데 4절에 보면 아내가 죽었다는 거예요. 남편은 살아있고 아내가 남편한테 죽었다는 거예요. 죽었으니까 더 이상 법적인 아내가 아닌 거예요.

남편이 아내를 죽여 버렸단 말이죠. 그러면 그 남편한테는 아내가 없죠. 아내가 없는데 그 아내가 살아서 다시 부활해가지고 어떤 남자랑 사니까 “너 왜 내 여자인데 저 남자하고 사노?” 할 수가 없단 말이에요. “네가 죽였잖아, 네가! 네가 나를 죽여놓고 아직도 네 눈에는 네 아내로 보이냐?”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성도가 구원 받는다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 죽임을 당해야 돼요. 안 당하면 육신의 정욕한테 영원히 종 노릇해서 백날 교인으로서 열심히 해봐야 개돼지하고 똑같이 되는 거예요. 자기 딴에 열심히 해도 이미 종이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의 종, 욕망의 종이기 때문에 아무리 성경공부 하려고 해도 지금 친구 와서 친구가 ‘이따 좀 나올래?’ 하면 ‘응, 나갈게. 나 나갔다 올게요.’ 하고 간다니까요. 말씀 사랑요? 주님 사랑? 아니에요!

육신의 정욕이 예수님 사랑보다 더 세게 작동하도록, 우리는 주의 종이 아니고 육신의 정욕의 종이 된 겁니다, 인간은.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육신의 욕망의 종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원수의 종이에요. 하나님 편이 아니고, 하나님 원수 편의 종으로 사는 인간이 어쭙잖게 흉내 낸다고 교회 다니고 성경책 끼고 성경공부 하고...... 참, 마귀가 웃겠다. 아이고,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다녔노? 학원 6개월 끊었나? 공인 중개사 시험은 에듀윌, 뭐 이런 거. 공무원 시험도 에듀윌, 이런 거. 경찰 공무원도 에듀윌.

학원 끊어가지고 교회 다니고 교회 등록하면 구원 받습니까? 말씀 사랑한다고요? 참, 진짜 개가 웃겠다, 말씀 사랑. 내가 안 죽으면요. 인간은 자기만 사랑하게 되어있어요, 자기가 안 죽으면. 뭐 악마가 호락호락 놔주는 줄 알아요? 내가 안 죽었으면 악마가 ‘나한테 너 그동안 내가 밥 먹여주고 너 돈 갖다 벌게 해준 거 전부다 백배로 보상해라.’ 이 법을 내세우면 다른 데 시집가지도 못해요. 남편 빚도 못 갚았기 때문에. 이게 종인 거예요.

율법의 빚을 갚을 수가 없어요. 종이기 때문에.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네가 죄의 종인 것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네 원래 자리가, 응애~하고 태어나서 보니까 종으로 태어난 거예요. 죄의 종으로 태어난 겁니다. 죄의 종으로. 어떤 다른 상황은 없습니다. 철학을 공부하고 과학을 공부해도 인간이 누구냐를 제대로 이야기해주는 것은 이 성경말씀뿐이에요.

15년 동안 군만두 먹었던 올드보이가, 15년 동안 군만두 먹었으면 질문을 “누구냐, 너?” 이런 질문할 필요 없어요. 15년 동안 군만두 먹고 꼼짝 못했으면 자기는 누구냐 하면 바로 내가 너의 종이죠. 그러니 꼼짝 마라 했단 말이죠. 우리가 신앙 생활한다는 것은, 죄의 종이 되어서 꼼짝 마라. 백날 노력하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 백날 해봤자 우리는 도로 도루묵이다.

진짜 개돼지처럼 개가 토한 것을 먹듯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와 형편에 놓여 있었다. 이것을 절감하는 것이...... 성도라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아는 겁니다. 나는 15년 동안 군만두만 먹었다. 누가 주는 줄도 모르고, 누구 노예인 줄도 모르고... 나중에 구원 받고 보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의 원수로부터 노예가 된 거예요. 하나님의 원수로부터.

그러니 지금 이런 이야기가 무척 중요한 이야기인데 왜 그러냐 하면 성경말씀을 보고 또는 복음을 들었을 때에 반드시 내가 있을 원래 자리가 날아갔다는 사실을 알고 그런 느낌이 온 상태에서 성경말씀을 봐야 되는데, 성경말씀 백날 공부하고 자, 이제 내 자리 찾아가자. 자기 자리가 어디 있는데? 자기 자리가 없어요. 이미 우리는 우리 자리가 없다니까요, 우리 자리가. 우리 자리가 있어버리면 이미 그것은 육신의 종이 된 자리였어요. 육신의 종이 된 자리에 있든지 아니면 내 자리가 없든지 둘 중 하나만 하세요.

내 자리에 돌아오게 되면 반갑다, 친구야, 해서 육신의 정욕이 거기서 악마가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 네가 뭐 성경공부하고 어떻게 목사, 장로 되니까 신앙인인 것 같지? 그래, 이제야 네가 네 주제를 파악하네. 넌 안 돼! 너는 내 손아귀에서 못 벗어나. 이걸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말씀의 정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어떤 인간도요.

그러면 말씀을 보면서 그럼 제대로 신앙생활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해야죠. 말씀을 보면서 “도저히 육신의 정욕을 벗어날 수 없고 이 말씀을 지킬 수 없는 내가 어떻게 구원되었습니까?” 라고 이야기를 해야죠. 내가 노력을 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구원되었습니까? 그것은 나를 쥐고 있던 하나님의 원수를 주님께서 단번에 승리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성도한테는, 교인이 아닙니다, 용어를 잘 구분해야 돼요. 교인이 아니고 성도한테는 지는 일이 없어요. 혼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죄에서 이기고 악마에게서 이기고 사망에서 이긴 분이 함께 우리의 남편으로 있기 때문에 내가 나서서 이렇게 싸울 이유가 없다니까요.

만약에 밤에 아파트에서 자는데 비밀번호를 어떻게 훔쳐서 알게 된 강도가 들어와서 앞에 문 여는 소리가 들렸더라. 그때 밤귀가 밝은 아내가 같이 남편과 침대에서 자다가 그걸 알았거든 혼자 야구방망이 찾지 말고요. 옆에 남편을 깨우세요. 왜냐하면 남편은 이미 강도 잡는 베테랑 전문형사로서 25년 동안 형사했거든요. 집에 수갑도 다 있어요. 정 안 되면 권총까지 있어요. 사제권총도 있다니까요. 남편 태권도 7단이고, 아니 7단은 너무했다, 3단이고, 유도 2단이고 합기도 5단이고 뭐 그 정도 되는 유능한 형사가 옆에 자고 있는데 아내 자기가 연약한 손으로 야구방망이 들지도 못해가지고 낑낑거리면서 강도야, 이리와. 내가 너를 잡으리라!

강도한테 맞아가지고 쓰레기통에 도로 처박힐 때, 그게 바로 개가 토했던 것을 도로 먹고 돼지가 도로 (더러운 구덩이로) 돌아가는 거예요. 왜 네가 나대냐, 네가? 물론 그러기 전에 남편이 벌써 잠을 깼죠. 남편이 그 강도보고 뭐라 하겠습니까? “저 인간, 저거 나한테 한번 얻어맞고 또 왔네.” 강도는 뭐라 하겠습니까? “아이고, 형님. 내가 못 알아봤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도망가기 바빠요.

주님을 옆에 놓고 왜 우리가 설칩니까? 우리는 육신의 정욕을 못 이겼다는 것이 이미 판명 났는데요. 다 교인 생활 해봤잖아요. 교인 생활해서 구원 받았던가요? 교인 생활해서 지옥 갔잖아요. 교인 생활해가지고. 교회에서 하라는 등록하고 성만찬 빵 먹고 잔 마시고 다 해봤다 이 말이죠. 선교한다고 선교비 내고 또 뭐 성만찬 머리에 물 뿌리라 하면 물 뿌리고 다 했단 말이죠. 그래가지고 구원 받았습니까? 성당 같으면 고해성사 정기적으로 하고 처방전 받아놓고 다 했다고요. 그래서 구원 받았어요, 그래? 그게 구원인가요? 그게 육신의 정욕을 이기던가요? 그거 받고 난 뒤에는, 난 이제 돈을 돌같이 본다, 이렇게 되던가요? 턱도 없는 소리에요. 인간은 이 세상의 유혹을 결코 이길 수가 없습니다.

너무 중요해서 다시 한번 크게 적어보겠어요. [성도는 돌아갈 나의 자리가 남아있지 않다.] 장난칠 때 사소한 장난이지만 그래도 화나는 장난이 뭐냐 하면 제가 방금 의자에서 일어났잖아요. 그런데 뒤에 꼬마요정이 있어가지고, 강의한다고 정신없어서 있는데 의자 뺀 줄도 모르고 앉다가 와장창 넘어갈 때 짜증나죠. 장난도 좀 상황 봐가면서 해라. 짜증내죠. 성도는 자기 승리가 없습니다. 주님의 승리로서 충분하기 때문에 굳이 내가 나서서 나의 승리를 따로 챙길 필요가 없어요. 성도는 돌아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돌아갈 자리가 있어요. 교인들은 악마의 종이기 때문에 그래요. 악마의 종이기 때문에. 그럼 응용문제 하나 낼게요. 교인들은 돌아갈 자리가 있다, 없다? 있죠. 그게 악마의 자리죠. 백날 가봐야 몇 미터 못가고 도로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그럼 응용문제니까... 목사는? 목사는 돌아갈 자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그것 때문에 목사를 안 버리고 있는데.

이 돌아갈 자리가 뭐냐? 나의 자존심과 가치가 유지되는 곳이에요. 이 자리가 어떤 자리냐 하면 여전히 나는 □다,를 붙들고 있는 자리에요. 나는 □다. 앞에 뭘 하나 더 붙인다면, 날 무시하지 마. 적어도 나는 □다. 이걸 계속 유지하고 있다고요. 술집에 가서 술 먹는데, 수요일부터 술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되는데, 친구가 칭찬해줘요. 야~ 너 요새 술 많이 세졌다. 그게 자랑입니까, 술 센 게? 여러분, 술 센 게 자랑이에요? 너 요새 담배 많이 늘었네. 그게 자랑입니까?

성도는 일체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을 남겨두지 않았어요, 주님께서. 나로 인하여 자랑할 게 없어요. 성도가 기껏 이제 불평하는 건 이런 겁니다. 이 육신의 정욕이 얼마나 아직도 나를 괴롭히는지...... 한 달 수입이 이번 달에 이천육백 나오고 지난 달은 삼천이백 나오고. 왜 자꾸 돈을 버는지 모르겠어, 하여튼. 난 이미 성도인데 왜 자꾸 돈을 벌어가지고 돈이 자꾸 나를 유혹하는 것 같이... 나 아주 괴로워죽겠어. 이번 달은 사천팔백 만원 벌고. 아, 미치겠네, 정말. 날 왜 이렇게 괴롭히는 거야. 기껏 요 정도. 고 정도. 나는 십자가만 귀하고 십자가만 자랑하는데 왜 자꾸 돈이 십자가 앞에 얼쩡거리고 왜 자꾸 끼어드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성도는 지는 법이 없어요, 성도는. 하나님의 원수를 이긴 그 분 안에 함께 동거인으로 있기 때문에 지는 법이 없습니다. 동거인으로서 호적에 올라가있어요. 그걸 빌립보서 3장 20절에 우리의 호적은 땅에 있지 않고 어디에 있다 했습니까? 하늘에 있다 했죠.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우리의 호적은 하늘에 있어요. 땅에 있지 않아요. 땅과의 싸움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 성도가 된 것은 이 육신이 꺼져가면서 소실되어가면서 점점 늙어 없어져가면서 십자가로 승리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자랑질 하려고 우리가 아직도 살아있는 거예요. 너 강남에 빌딩 4채 있다며? 4채가 대수냐, 십자가가 최고지! 요렇게 하는 거예요. 이번에 또 외제차로 3대 바꿨다며? 그게 뭐 시시한 일이지. 그게 뭐 대순데? 십자가가 중요하지. 요고. 요고 하라고 주께서 3대나 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이 베드로가 악마 이야기, 2장부터 거짓 선지자, 거짓 선생들 이야기를 쭉 하면서 이 거짓 선지자들, 목사 아닙니까, 거짓 선생들 이야기하면서 결국 그들은 돌아갈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는 거예요. 내가 돌아갈 자리.

그럼 그동안 그들은 왜 교회 나왔느냐? 간 보기 위해서 나온 겁니다. 얼마나 맛있게요. 간을 보는 겁니다. 이 교회 간 보다가 맛없으면 다른 교회 간 보고. 그 간을 보면서 나는 어떤 내 자리를 내 식으로 확보하게 되면 구원을 보장 받겠는가, 그거죠. 쉽게 말해서 어느 보험을 들면 생명보험을 제대로 받겠는가 하는 것과 똑같은 의식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가 죽었어요, 안 죽었어요? 안 죽었어요. 안 죽었으니까 율법이 계속 공격하고 있는 거예요. 계속 지키라고, 지키라고, 지키라고.

그래서 이것이 에스겔에도 나오는 강의인데요. 미리 한번 잠시 하면 이렇습니다. 간음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간음죄뿐 아니라 모든 성경 율법에서 지적하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종이기 때문에. 죄의 종이기 때문에 그 티를 내요. 주님의 율법은 우리가 죄의 종이라는 것을 겨냥해서 계속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율법에서 벗어나 의로운 게 하나도 없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요.

성경에서 여러분들이 여러 가지 신기한 게 있지만 그중에 신기한 것은, 천국은 개인을 통해서 설명한다는 거예요. 하늘나라 천국을 개인을 통해서 설명해요. 거 참 이상하죠. 여러분, 하늘나라 저기 있습니다. 보이죠? 봤죠? 자, 들어가세요. 이러면 간단할 문제를 왜 개인문제, 자아문제로 파고드느냐 이 말이에요, 천국 얘기하면서. 아니, 천국은 아름답다, 살기 좋다, 평수가 몇 평이고 앞에 분수 있고 잔디밭 깔리고 이렇게 설명하면 오죽 좋아요.

그게 아니고 천국은 포도원에서 일하러 온 사람을 모집하는 포도원 주인과 같으니,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천국을. 거기에 누가 등장합니까? 아침 10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3시에 온 사람, 오후 5시에 온 사람 등장하죠. 인간을 왜 그렇게 등장시켜요? 천국 설명하고 좋다 싶으면 저 좋은 천국 가겠습니다, 하고 손들면 끝날 문제를 왜 개인 문제로 다가서느냔 말이죠.

그것은 천국이 예수님이라는 개인에 품어져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예수님을 모르면 천국은 물 건너 간 겁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천국 이야기하는 것은 교인들이에요, 교인들. 성도가 아니고 교인들이라니까요. 교인들은 좋다 하면 그거 다 찜하고 좋다 하면 악착같이 10억이나 통일교에 갖다 바치면서 자기 아들이 아베를 죽이든 말든 자기는 통일교 좋다고. 왜 좋으냐? 그게 내 자리거든요, 내 자리. 내가 괜찮은 자리를 내가 결정하겠다는데 10억을 줘서라도 통일교 들어가고 또 신천지 들어가서 십사만 사천 자리를 얻겠다는데...... 남들한테 열심히 전도하는 거, 자기 십사만 사천 거기 한 자리 얻으려고 하는 짓이거든요. 티켓 얻으려고.

임 윤찬 피아니스트 티켓 벌써 다 나갔어요. 방탄소년단 티켓 구하기 얼마나 힘든 줄 알죠? 힘드니까 도전할만하다는 거예요. 전도 많이 하고 봉사 많이 하는 경우에만 십사만 사천 확정된 제한된 좌석을 하나 할당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거 뭐 강남 아파트 당첨보다 더 열심히 매진해서 전도하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헌금 내고. 그 수법이 기존 교회 수법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이름 있더라도 게으르면 거기서 지워지고 탈락합니다. 그러니까 안 지워지려면 여러분이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고 이렇게 안심할 게 아니고 열심히 교회 충성 봉사해야 됩니다.’ 이게 기존 교회 목사 설교잖아요.

목사님 그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20절에,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교인들이 뭐 교인들이니까 성도가 아니니까 복음에 대해서 알 수가 없죠. 그러니까 목사의 그 발언 자체가 나의 육신의 정욕을 자극한 거예요. 일본말 써서 죄송합니다만, 요시! 이거 승부 걸만하다. 내 열심과 충성을 다해서 기어이 따내리라.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겠다는데 죽도록 충성해야지. 선교해야지. 학교 졸업하고 취업 때려치우고 파키스탄 가서 선교해야지, 이런 거. 울지마, 톤즈. 해서 남수단 가가지고 의사로서 봉사해야지. 이런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그게 바로 육신의 정욕이에요. 내 자리를 내가 노력해서 확보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목사한테 시켜만 주이소, 이렇게 하는 거예요. 시켜만 주이소. 뭐든지 하겠습니다, 뭐든지. 성경공부 하라면 성경공부하고 십일조 하라면 십일조하고 다 하겠다는 거예요.

내 자리는 없습니다. 그게 로마서 7장 4절에 나오잖아요. 이미 남편은 죽고 성령이 예수님의 십자가 영이 우리의 남편 되었으면 이거는 남편집이지, 더는 내 집이 아니거든요. 내 집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홀가분하고 존재의 가벼움이고 가뿐하고 편안한 삶입니까. 내 집 없어도 괜찮잖아요. 남편 집이 내 집이니까.

그걸 가지고 ‘법에서 벗어난 것’이라 해요. 법에서 벗어난 것. 일체 모든 법에서 벗어난 것. 이런 일 잘 안 하는데 여러분 한번 따라해 보세요. 법에서 벗어난 게 뭐냐? 따라해 보세요. ‘사랑’. 어화둥둥 내 사랑.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사랑. 사랑은 뭐라고요? 어디서 벗어난 거예요? 모든 법에서.

사랑의 특징은 내 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내 자리가 없어요. 그대 있음에 그대 있는 곳에 나 있으면 그게 오케이죠. 굳이 내 자리를 마련할 필요가 없어요. 형편 따라 성경공부 못 나올 수도 있고 형편 따라 헌금 한 푼도 못할 수 있고. 형편 따라 이렇게 예배참석 못 할 수 있어도 그게 법이라면 나는 그 법을 지키지 아니하겠노라. 왜? 사랑을 법이 가리면 안 되기 때문에.

그런데 육신에 남아있는 육신의 정욕이 계속해서 시비 걸어요. 성도가 되가지고 그것도 안하면 그건 기본도 안 되어있는 거지. 뭐 온갖 숙제를 계속 주는데 내가 지금 다 끝난 마당에 숙제할 이유가 없잖아요. 끝난 마당에. 구원은 됐지만 하늘나라 상급이 있어야 되지. 하늘나라 상급, 그거 누구 이름이 되는 거예요? 주님 상급입니까, 내 상급 돼요? 내 상급 되죠. 그럼 내 자리 있네요. 결국 내 자리 있네요.

천국, 안 가봤죠? 천국 가봤어요? 안 가봤죠? 요한계시록 4장에 천국에 가니까 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성도가 자기 상(常)이라고 여겼던 그 면류관을 어떻게 합니까? 방향을 보세요. 어디서 어디로 던집니까? 갖다 지옥으로 던집니까, 어디로 던집니까? 내 쪽에서 어느 쪽으로? 주님 발 앞에, 하나님 발 앞에 던지는 거예요.

그걸 성령께서 이 땅에 우리가 살면서 진작에 그 일을 하게 하시는 거예요, 진작에 그걸. 천국 가서 하는 게 아니고 벌써부터 하는 거예요. 이 구원의 공로를 왜 내가 확보해? 드려야지. 계속 주님 쪽으로 던지는 겁니다, 주님 쪽으로.

그러니까 그걸 그렇게 생각하는 방법은, 일어나는 모든 사건 가운데 그걸 적용할 수 있어요. 아내가 잔소리 좀 하더라. 그때는 잔소리하는 아내도 주께 던져버리세요. 어떻게 던지는가? 무거워서 못 들지만 어떻게 던지는가? 주께서 하게 하셔서 잔소리 한다, 이런 식으로. 자식이 “엄마, 또 수학 빵점이다.” 그걸 주님 앞에 도로 던져버리는 거예요. “그거는 네가 빵점 맞은 게 아니고 주께서 빵점하게 하셨단다. 너는 원래 백점 맞아도 네 자리 없고, 빵점 맞아도 네 성적 아니고 백점 맞아도 네 성적 아니야. 네가 지금 숨 쉬는 것도 주의 은혜인 줄 알아라.” “엄마, 너무 어려운 것 같아.” “너 크면 안다.”

이러한 이야기를 예수님께서는 벌써부터 예수님 말씀 가운데 다 했었어요. 여러 가지 말씀 이야기가 있지만 그 중에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바로 흔히 말하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어떤 사람이 강도 만났는데 제사장 지나가고 레위인 지나가고 그다음에 사마리아인이 와서 그를 돌봤다는 그 이야기.

그 이야기하기 전에 요한일서부터 보고 그 이야기 들어가겠습니다. 요한일서 3장 13절부터 제가 보겠습니다. p.390입니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이상히 여기지 말라.

아까 옥토하고 옥토가 아닌 밭하고 너무나 확연하게 차이 나죠. 내가 옥토가 될 수 없는 거예요. 옥토로 다루시는 것은 주님이지만 말씀이지만, ‘내가 옥토 할래.’ 나설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살아있어야지, 나는 옳은 선택을 했다, 라는 그 정도로 나는 괜찮은 존재라는 나의 괜찮은 존재를 남기는 나의 괜찮은 자리가 있으면 안돼요. 말씀의 자리로 넘겨버려야 돼요. 남편의 자리, 주님 자리로 넘겨버려야 돼요.

그게 혼인생활입니다. 아내가 자기 주장하면 그게 뭐 결혼한 겁니까. 그거는 아니죠. 결혼 안한 사람이죠. 결혼했으면 모든 주도권을 남편에게 넘겨야 돼요. 그 남편이 누구냐? 주님이란 말이죠. 세상 남편에게 넘기란 말이 아니고요. 여기서 말한 남편은 그냥 아저씨를 말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께 모든 걸 넘겨야 된다. 법으로 맺은 게 아니고 사랑으로 맺었거든요. 사랑은 모든 걸 용납했기 때문에 그래요. 사랑이 있는데 뭐가 더 필요합니까? 사랑만 있으면 되죠.

여기 보면 14절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되어있죠. 그래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말씀을 보면서 세상의 사람들이 이걸 율법으로 보고 있더라는 거예요. 이걸 사랑으로 읽어야 되는데 느긋하게 즐겁게 봐야 되는데...... 우리가 옛날에 이랬었지. 교인될 때 우리는 맨날 사랑, 사랑하면서도 실제로 주께서 형제를 위해서 목숨 바치라 하니까, 미쳤습니까, 내가? 형제를 위해서 목숨 바치게. 결국은 우리는 이 말씀을 지식으로는 알지만 실제로는 이룰 수 없는 그러한 자가 바로 우리 자신이었단 말이죠.

그러면 사랑을 알게 되면 어느 자리가 없어요? 내 자리가, 남아있는 내 자리가 없어요. 그러면 주께서 하게 하는 살아가게 하는 모든 것이 무슨 사랑입니까? 주님의 형제에 대한 사랑이 되는 거예요. 내가 마음먹고 사랑해봐야지, 이렇게 나서는 게 아니고 우리가 살아가는 자체가 형제 사랑이 되는 거예요.

그럼 어떤 사람이 나보고 돈 천만 원 빌려달라고 하는데 같은 성도인데 좀 빌려달라, 하는데 빌려줘야 되는가? 안 빌려주면 형제 사랑 아닌가? 라고 하면 그게 형제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본인이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이지, 형제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돈 천만 원 없다고 돈 빌려달라고? 진짜 형제 같으면 이렇게 해야 돼요. “돈 없이 그냥 지금 당장 죽어, 인간아.” 이럴 때 “아멘” 하면 형제고 “그래도 돈 있어야지.” 이건 형제 아니에요. 형제를 이용하는 교인이지, 형제 아닙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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