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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6 17:13:53 조회 : 56         
서울의존강의20220714b 베드로후서 2장 22절(개와 돼지)-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하림(IP:119.192.96.3)

서울의존강의20220714b 베드로후서 2장 22절(개와 돼지)-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천국 이야기하는데 여호와 증인 같은 데서 천국 이야기를 할 때 천국의 그림을 아름답게 그려놓고 ‘여러분들이 거기 갈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선택 잘 하시면 천국 갈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데 성경의 천국은 우리가 하늘에 그려놓고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게 아니고, 천국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어 있어요.

찾아오는데 사람들로부터 천국이 거부당하고 막히게 돼요. 막히는 게 뭐냐 하면 인간의 자아성, 자기 자신이에요. 이것을 바리새인,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대표적으로 보여주는데 그게 자기 의였습니다. 자기 의. 자기 가치. 자기 의미.

예수님께서 천국을 설명할 때 자꾸 자기 의를 공격하면서 설명을 하거든요.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아침 10시, 12시, 3시에 온 사람 전부다 화냈는데 제일 뒤에 온 사람만 좋아했다, 이런 거. 천국을 설명하면서 그냥 곱게 주시지, 왜 인간이 그토록 집착하는 자기 의를 건드리느냐 말이죠, 그 천국이.

그것은 천국이 개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천국이 어떤 영토가 아니고 개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라는 개인 속에 천국이 거기서 펼쳐지고 전개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천국이에요. 예수님이 생명이고. 예수님이 생명을 주시는 게 아니고 예수님 자체가 생명이고 예수님 자체가 길이고 예수님 자체가 진리가 되는 겁니다.

빌라도가 예수님 죽이고 또 다른 기회가 있겠지, 가 아니라 빌라도는 진리 자체를 죽인 거예요. 자기가 진리를 죽여 놓고 진리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왜 빌라도가 예수님을 그렇게 죽이고자 허락했느냐? 본인이 진리기 때문에 그래요, 본인이.

본인의 가치가, 본인의 의미가, 평생 동안 내가 일구어온 내 인생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고 자부하는 그 자체가, 최종적인 생명과 진리가 자기로 이미 굳어진 상태입니다. 이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고 본디오 빌라도인데...... 아니, 이 세상에 그렇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어요? 다 그렇죠. 모든 인간이 다 그렇죠. 그런 인간이 천국 간다는 게 이상해요. 그럼 마귀가 거짓 복음을 전한 게 분명합니다.

애시당초 천국을 못 가는 인간이에요. 나 자신이, 하나님과 인간이 어떤 계약을 해도 인간자체는 계약 상대자가 되지를 못해요. 그래서 중간에 주님께서 들어가시는 거예요. 인간하고 계약이 안 되기 때문에. 누구를 대신해서 계약한 게 아니고 예수님 본인으로서 계약자가 마감됩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예수님 본인뿐이라는 뜻이에요. 아무도 구원될 사람 없어요. 자기 구원 하나로 완전히 끝나버렸어요.

끝내놓고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이제는 아버지 이름이 아니고 자신의 이름으로, 자기의 공로를 사랑으로, 아내 이름으로 신부라는 이름으로 또는 창세 전에 아버지와 예정되었다는 그 약속된 이름으로 자기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예수님 자신이 기록한 그 이름, 그 명단에 있는 자기 백성을 예수님 자기 고유 권한에 의해서 선택한 자에게 주님께서 자신의 영을 거기에 나누어줍니다. 영을.

그러니까 성령이 오는 것보다 더 큰 행운은 없어요. 축복은 없습니다. 성령이 오는 것, 예수님의 영이 오는 것. 예수님의 영이 되게 되면 그 사람은 아까 요한일서의 말씀처럼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어요. 성령이 오게 되면.

옮길 때 실제로 나타나는 기호,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것을 기표라 하는데 기표라는 말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그냥 기호. 이 세상에 나타나는 기호는 성경 히브리서 같은데서 굉장히 강조하는 것인데 그게 뭐냐 하면 ‘피’입니다, 피. 죽은 자가 피로 말미암아, 오직 피로 말미암아 사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도 나오죠. 어린 양의 피로 씻음 받은 자. 히브리서 같은 경우에는 피 언약이니까 피가 한두 번 나오는 게 아니고 많이 나와요, 피.

이것은 예수님이 마지막 언약 때 내 살과 내 피라 할 때 그것도 같은 뜻이에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와 계약이 완성되었어요, 예수님의 자기 피로. 잘 들으세요. 아버지 앞에 예수님이 뭐라고 계약 맺었다고요? 자기의 살과 피로 계약 맺었어요. 그럼 계약조건은 이미 확정되었어요. 다른 것은 하나님 쪽에서 계약조건으로 안 받습니다. 예수님의 피로만 계약되었기 때문에 계약조건이 피에요. 그 피를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나눠주는 거예요. 그 피가 우리에게 도달되도록.

그게 바로 제자들에게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피다.” 제자들은 뭘 먹었어요? 예수님의 피를 먹었죠. “받아먹어라. 내 살이다.” 제자들은 뭘 먹었습니까? 살을 먹었죠. 그걸 오늘날 성도가 제자들이 먹었던 그 살, 그 피 그걸 우리가 지금 먹는 거예요. 이제는 나의 몸이 아니고 예수님의 몸을 받고 예수님의 그 피를 받는 거예요. 이 말은 내가 피를 흘린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순교한다는 말이 아니라, 나 말고 예수라는 외부인이 와서 그 피와 그 살을 우리에게 허락해주신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내 노력과 행함과 내 업적과 성과는 뭐가 됩니까? 피를 피답게 하는 그런 환경으로 작동하죠. 피를 피답게. 그러면 예수님 피는 어느 가운데 생겼습니까? 예수님 피는 바로 하나님의 원수들로 인하여 생긴 것이 피잖아요. 그래서 피를 피답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원수가 어떤 생각을 갖고 활동하는지 우리 육신을 통해서 보여줌으로써 우리 안에서 피가 피답게, 언약 완성이 완성답게 드러나는 증인으로 사용해주시는 겁니다.

자, 여기서 이제 어려운 것은 뭐냐? 주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장을 잠시 한번 보겠습니다. 5장 44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뭐하라 했습니까?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했죠. 사랑하라. 야, 이거...... 원수를 사랑해야 너는 내 형제가 된다고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원수를 사랑해야.

이 말씀은 제자들이 지킬 수 없고 제자들이 뭔 뜻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이 나중에 예수님의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예수님의 영이 임해서 예수님의 영토에 함께 있는 자라야 원수가 누구인지 그때 규명이 되는 거예요. ‘아, 원수라 하는 것은 인간 자체, 모든 육신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였구나.’ 그걸 알게 돼요.

그런데 성령을 안 받으면, 나의 원수가 나의 원수가 되어버려요. 내가 이미 원수된 것을 내가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원수는 아니고 원수 될 뻔한 자를 사랑한다, 이거는 가능한데 이미 원수가 되어버린 자를 사랑하는 그 법은, 그런 것은 우리 육신의 욕망으로서는 성사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원수, 하나님의 원수된 자를 사랑하라. 이것은 말씀이죠. 말씀이 이미 성도된 자를 가지고 활용해서 그것을 실현에 옮깁니다. 주님이 그렇게 주의 일을 하세요. 그걸 가지고 ‘내가 한 게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하였다.’가 되는 겁니다, 주의 이름으로.

사도행전 3장에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 있죠. 자, 한번 물어봅시다. 앉은뱅이가 하나님의 원수입니까, 원수 아닙니까?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에요. 왜냐하면 육신의 영 안에 사로잡혀 죄의 종이기 때문에 원수입니다. 악마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이고 악마가 인간을 붙들고 있는 이상, 그 종이 된 이상, 거기서 못 빠져나오는 이상 인간도 하나님의 원수와 한통속으로 한마음을 갖고 있어요. 그러면 앉은뱅이가 하나님의 원수입니까, 원수 아닙니까? 원수죠.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뭐라고 합니까? 내가 너한테 주는 것은, 이 아니고 “오직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의 이름으로 걸으라.”할 때 이것은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게 돼요. 내 이름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하고 있음을 베드로와 요한은 그걸 목격자로서 옆에서 증언하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 너를 사랑하신단다. 얘, 일어나.” 그런 뜻이란 말이죠. 그게 전도거든요. 네가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니고.

‘주의 원수를 사랑하라’를 실천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못해냅니다. 우리의 육신으로서는 할 수가 없어요. 자, 그럼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에 도달했습니다. 원수의 특징은 ‘동질성’이에요, 동질성. 어렵지만 쭉 그냥 나가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이해하리라 기대하면서.

‘동질성이란 시간과 공간이 나의 동질성 유지를 위하여 있다고 믿는 가운데 나오는 결과다.’ 이렇게 해서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죠. 동질성이라 하는 것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똑같은 사람이라고 보장해주기 위해서 이 시간과 공간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하나님의 원수 된 자의 마음자세입니다.

어제 침대에서 잤다. 오늘 일어났다. 침대에 어젯밤에 누웠던 나와 침대에 누워있는 그 공간, 그리고 시간, 7시간 지난 시간. 그 시간과 공간은 침대에 누웠던 어제의 당사자가 그 침대에서 일어난 오늘 나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보장해주는 시간과 공간이라고 여기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 된 사고방식이에요. 너무나 당연해보이죠.

인간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가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 시간과 공간에서 어떤 1초, 어떤 순간에도 똑같은 적은 있은 적이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 동일성을 주장하는데 이건 환상이에요. 내가 그러고 싶어서, 같은 인간이고 싶어서 같은 인간이에요.

그리고 인간의 시간과 공간은 주님을 위한 시간과 공간이지, 주님의 동질성을 위한 일이지, 나의 동질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이 있는 게 아닙니다. 주님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나의 동질성으로 해석하고 설명하고 이해하다 보니까 그 자체가 주님의 동질성을 가로막는 하나의 원수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쉽게 이야기하는 것, 주님이여 내가 주를 위해서 이렇게 충성했는데 주님은 왜 저를 힘들게 합니까? 그냥 무심코 아무 격의 없이 편하게 그냥 속내를 툭 드러냈는데 여기에서 전혀 그 사람은 지금 예수님의 세계를, 예수님 중심의 현실을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주님만을 위해서 허락된 시간과 공간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원수들이 주장하는 주장에 불과한 거예요.

“지금껏 주를 위해서 살았는데 주께서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주님께서 “너 몇 년 했는데?” “10년 했는데요.” “10년 시간이 어떻게 너를 위한 시간이냐? 그것은 내 활동을 위한 시간인데 왜 너는 주님 활동을 뺏아가서는 10년 동안 난 이렇게 노력했다고 너를 증명하는 시간으로 왜 건방지게 가져가느냐?” 그렇게 물으면 뭐라고 답변하겠어요?

그러니 원수들의 특징이 뭐냐? 왜 천국을 설명할 때 말씀이 개인의 자아를 겨냥해서 천국을 설명하는 이유가 뭐냐? 이미 인간의 자아는 자기 중심의 현실을 따로 환상처럼 따로 갖고 있어요. ‘이 세상은 나한테 이렇게 의미가 있고 내가 살아있는 것이 너무나 옳았다는 것을 확인해줄 배경으로서 지금껏 내가 이만큼 살아왔다. 여기서 살았다.’ 자꾸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 내가 무슨 뜻에서 이야기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인. 선한 사마리아인. 강도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 첫 번째, 제사장이 그냥 가죠. 강도 만난 사람. 어떤 공간에,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만났어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거예요. 그 강도 만난 사람의 공간은 범죄한 공간이죠. 이 사람이 강도를 만났다는 사건이죠.

그러면 제사장이 이 공간을 그냥 지나가요. 왜 이 공간을 그냥 지나갑니까? 자기 나름대로의 공간이 따로 있기 때문이에요. 자기는 빨리 여리고에서 예루살렘 올라가면서 지금 제사지내야 돼요. 예루살렘이 자기의 자기 됨을, 자기 동질성을 보장해주는 공간입니다. 남의 일에 끼어들 이유가 없죠. 타인의 공간이기 때문에. 나를 위한 공간이 아니고 그 사람이 아쉬운 공간이지, 내가 아쉬운 공간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제사장이 지나갔다고 의도적으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강도 만난 자의 공간, 이 공간을 위해서 제사장이 그 타이밍에 지나가게 했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지나가면서 제사장은 그냥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고 지나갈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말은, 예수님 중심의 시공간에서 인간은 모두 비켜나가고 있는 그러한 실정을 그대로 지금 폭로해주고 있는 거예요.

그 원인이 뭐냐? 자기 동질성에 거의 중독이 되어 있기 때문에. 나만 잘 되면 되지. 나만 바르면 되지. 나만 의로우면 되지. 내가 남한테 해코지 안하면 되지. 나만 반듯하게 살아서 나중에 나만 천국가면 되잖아. 이게 자기 동질성이에요.

수련회 때 내가 강의하려고 준비한 게 있는데 인간에게 놀라운 사실을 과학이 밝혀줬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들과 나 사이에 동질적 요소가 있다는 거예요. 동질적 요소가. 그 기표가 뭐냐? 그 기표가 DNA에요, DNA. 이게 대단히 신기한 일입니다. 왜 신기하냐 하면, 그야 닮아서 그렇지, 가 아니라 왜 닮느냐는 거예요, 왜? 왜 굳이 닮아야 되느냐 하는 거예요.

과학적으로 DNA가 있어서 닮았다, 지금 그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게 아니고 나는 나만이어야 돼요. 누군가 나를 닮으면 안돼요. 이게 육신의 정욕입니다. 왜? 악마는 신이 되고자 했기 때문에 나만이 신이어야 돼요. 나만 절대자이어야 됩니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돌아가는 모든 환경은 나만을 위해서 내게 적합한 시간과 공간으로 우리가 개조하고 변경시켜서 우리의 남은 인생을 이만큼 살아왔었어요. 왜? 그 목적이 뭐냐? 오직 이 세상 천하에 둘도 없이 오직 나. 오직 나는 나만 나다워야 돼요. 나같이 닮은 거 둘 있으면 안돼요.

여러분, 이런 걸 한번 상상해보세요. 공중 화장실에 갔다가 볼일 보고 나오는데 나하고 똑같이 생긴 사람이 바깥에 그다음 차례로 들어가려고 대기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똑같이 생긴 사람. 하나의 복제물로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1번-반갑다, 2번-죽여 버린다, 몇 번입니까? 죽여 버리죠.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인 거예요.

주님은 나와 똑같은 나를 만들어버렸어요. 죄인인 나 대신에 예수님께서 만든 똑같은 나를 만든 거예요. 예수님의 씨앗, 피, 언약을 집어넣어서 똑같은 나를 만들어버린 거예요. 그래야 우리가 천국에 살 수가 있습니다.

내가 닮았다는 것은 우리가 DNA적으로는 규명되지만 우리의 모든 평소의 행동과 본성은 그걸 거부하고 싶어요. 동생하고 내가 왜 닮아야 되는데? 그게 뭔데? 동생은 동생이고 나는 난데 내가 왜 닮아야 되는데? 완전 에서와 야곱처럼. 왜 닮아야 되는데? 이 미경씨 왜 닮아야 되는데? 닮을 필요가 없는데. 자기는 자기고 나는 나지. 너는 네 인생, 나는 내 인생. 이게 동질성이라는 겁니다.

동질성은 바로 하나님의 원수라는 티를 내는 거예요, 하나님의 원수.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는 것을 악마는 몹시 불쾌하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악마의 독자적인 것으로 확보하고 싶은 것이 악마의 생각이에요. 악마는 육신의 정욕으로서 인간을 종으로 삼아서 전부다 거기다가 나처럼 이 악마처럼 너도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해서 살라고 다 집어넣은 거예요.

그래서 교인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사실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힘을 이용해서 자기가 하나님 되고자 교회 가는 거예요. 교회 가는 이유가. 제가 안양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모든 교회 기도는 넋두리라 했어요. 넋두리하고 기도하고 내용 차이 뭐 있습니까? 혼자서 공원에서 중얼거리는 그 이야기를 그대로 교회에서 하면 그게 기도에요. 그 넋두리 내용, 그 원고를 누가 작성해줬습니까? 마귀가 작성한 거죠. 너는 너다워야 돼. 어제의 너와 오늘의 너는 동일해야 돼. 네가 달라지면 안 돼. 너는 꼭 너를 쥐고, 항상 나는 나답게, 이걸 붙들고 가야 돼.

그게 원수의 이야기이고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설명하면서 개인을 건드린다 하죠. 개인을 건드린다고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좋은 나라 있습니다. 가세요.’가 아닙니다. 그냥 개인을 건드려요. 자아에 구멍을 뚫어야, 자아에 구멍이 뚫어져서 더 이상 돌아갈 나의 자리가 없게 만들 때, 뚫고 그 뚫은 자리에 동전 꿰듯이 꼬치 꿰듯이 거기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꿰어버리면 그게 바로 천국 백성이에요. 내 건 없는데 줄줄이 형제들하고 주님하고 주님 중심으로 꿰어져 있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중간에 관통하고 있는 그 작대기, 언약이라는 작대기, 그것은 동질합니까, 동질하지 않습니까? 작대기, 천국 백성을 통과하는 작대기는 동일해요, 동일하지 않아요? 동일하죠. 그게 바로 예수님의 동질성이죠. 예수님의 동질성에 인간들이 거기서 반항하고 대항해가지고 대척관계를 만든 거예요. 악마가 그렇게 만든 거예요. 그것이 알고 싶다. 예, 이거에요.

인간이 뭐냐? 자기 동질성으로서 예수님께 대드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육신의 정욕이 그렇게 해요. 교인들은 ‘하나님 믿고 하나님 사랑합니다. 십자가 이제 알았습니다. 회개합니다.’ 백날 해도 교인들은 육신의 정욕이, ‘네가 기도했지?’ ‘기도했어.’ ‘헌금했지?’ ‘헌금했어.’ 헌금한 너, 기도한 너, 신학한 너, 너는 너를 믿어야 돼. 이게 바로 교인들이에요. 그게 신학입니다. 예수 믿는 너를 믿어야 돼. 그래야 네가 구원 받아.

구원은 내가 없어져야 구원이 되는데 자꾸 내가 있는 채로 구원이 되라고 악마가 자꾸 부추기는 거예요. 그래놓고 네가 얼마나 믿음 있는지 돌아보라. 말씀대로 얼마나 살았는지. 말씀대로 못 살면 너는 안 돼. 탈락이야. 더 열심히, 더더더더 더 열심히 해야 돼. 그러니까 10억이나 갖다 바치고 그러죠. 자기 아들도 아베 죽이고 하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뭐 아베 죽이는 그런 일이 일본에 있었지만 그거 아니라도 아들이 유리창 깨고 하는 일은 허다합니다. 엄마보고 설득이 안 되니까 유리창 깨고, 딸이 신천지 빠지니까 온 친척들 다 동원해서 친척들이 딸 납치해가니까 신천지에서 고소해서 그 부모들이 고발당하고. 완전히 애 하나 두고 밀고 당기고 난리도 아니에요. 왜 그렇습니까? 너는 우리 가족이잖아. 우리의 동질성이잖아. 저쪽은 우리 신천지 동일성이잖아.

무슨 내 자리가 어디 있어요, 내 자리가.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했는데,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요. 무슨 내 자리가 있습니까. 내 자리를 통과하는 예수님의 언약이 있을 뿐이죠. 말씀 완성이 있을 뿐이에요.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움직이고 말씀에 의해서 다루어지고 말씀에 의해서 움직일 뿐이에요, 성도는.

교인은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지만 성도는 말씀이 속에서 작동하는 사람이에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제가 또 이런 이야기하면 또 ‘목사님, 저는 말씀이 나를 안 움직이는데요.’ 이렇게 하고 있다고요. 그거는 네가 네 동질성이 아직 남아있으니까 자꾸 측정하려고 할라 해요. 내가 지금 말씀을 지키나 안 지키나. 내가 나를 자꾸 측정하려고 판단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냥 죽었다 치고 ‘내가 살아있고 움직이는 것은 다 주께서 주시는 힘으로 한다.’ 하면 되는데 ‘주여, 주의 지시에 따라서 지금 밥을 먹습니다. 90도 각도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왜 자꾸 자기가 말씀 지키는 데에 중간 다리로 끼어드느냐 말이죠. 이미 죽은 놈인데, 나는.

우리는 결과물이에요. ‘말씀이 이렇게 했다. 그것이 너다.’ 이렇게 결과물로 나와야 되는데 시작을 나부터 하려고 하는 거예요, 나부터. 그것은 나의 동질성을 포기 못했기 때문에, 내가 나답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육신이 있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에 놀아나요. 이렇게 베드로후서 주신 말씀은, 성도는 일체 그런 일이 없다, 가 아니라 성도한테는 활발하게 개와 돼지로 돌아가는 일이 있더라도 그걸 즐겨라 이 말입니다. 그걸 가볍게 보라 이 말이죠. (웃으면서) ‘내 육신이 이렇구나. 아이고 죽어라, 이 육신아.’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데 ‘아니, 이러면 나 구원 못 받은 거야.’ 이거는 육신의 문제가 아니고 자아의 문제에요. 성령을 안 받아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아나니아, 삽비라가 왜 헌금을 반 속입니까? 자기가 헌금 반으로 돌아갈 내 자리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반 드리고 반 내 것 챙기고. 챙기는 건 둘다 다 죽어버렸으니까 챙길 사람도 없어졌어요. 둘다 죽어버렸으니까.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죠. 세 번째 한번 봅시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어디를 보셔야 되느냐 하면, 35절 봅시다. 이튿날에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과 자기가 동질성 됐죠. 그 사람이 강도를 만난 사건이 이게 자기 사건이 된 겁니다. 자기 사건이 된 거예요. 그러면 강도 만난 사람과 선한 사마리아인은 복제물이에요. 쌍둥이에요. 왜? 동일한 시간과 동일한 공간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게 성령을 받으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시간과 공간이 성도의 시간과 공간이 되어버려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영원한 시간이잖아요. 성도의 시간도 십자가 안에 있다 했잖아요. 사도 바울이 나는 십자가 안에 있다. 나는 성령 안에 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했죠. 예수 안에서 구원 받는다 했죠. 그럼 예수 안의 시간과 공간은 성도들과 공유되는 주님의 시간입니다. 거기에는 주님의 동질성이 부각되는 거예요, 주님의 동질성이.

거기서 인간들의 동질성은 날라가 버리죠. 주님의 동질성을 인간들의 동질성이 우호적이 아니고 십자가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방해했기 때문에 그래요. 내 동질성, 내 자아가 굳건하면요. 우리는 뭐든지 남을 이용하려고 해요. 남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타자 또는 타인과의 동질성을 예수님께서는 언급하시는 거예요. 타인과의 동질성. 자, 뭐부터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이건 좀 복잡하지만 중요한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게 우리 대신 지셨다 이렇게 되어있죠. 우리 대신. 고린도후서에도 나오고 여러 군데 나옵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내 일이 남을 대신할 수 있는 일이, 인간세계에서 과연 그게 가능하냐 이 말입니다.

불가능해요.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각자의 동질성이 다르고 각자의 시간과 공간을 따로 생각하기 때문에 똑같이, 똑같이 그 사람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대신하는 게 아니에요. 모방하는 거죠. 부처가 가는 길을 모방하는 것이지, 대신하는 게 아닙니다.

부처가 노력했다면 나도 노력하면 되고 소크라테스가 노력하면 나도 노력하면 되는 거예요. 소크라테스가 내 인생을 대신해주지 않아요. 부처가 내 인생을 대신하는 게 아닙니다. 대신해주고 싶어도 논리상 대신이 안돼서 그래요. 대체가 안돼요. 대신이 안 된다니까요. 똑같아야 대신이 되는데 똑같지 않으니까 대신이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35절에 봅시다. 첫째 날 급해서 돌봐줬잖아요.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내가 돌아올 때에 뭐라고 했습니까? “갚으리라 하였으니” 갚으리라 했죠. 결국 이 강도 만난 사람은 이 선한 사마리아인에게 남입니까, 남 아닙니까? 남이 아니죠. 곧 나가 되는 거예요, 나가.

왜 예수님께서 이런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했느냐? 아무도 해낼 수 없는 대신하심, 이웃을 위해서 대신 죽으심이, 오직 예수님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내가 이 땅에 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거예요. 끝까지 책임지잖아요. 만약 모자라면 내가 돌아와서 마저 채우겠습니다. 내가 갚아주겠습니다. 이거는 강도 만난 사람과 선한 사마리아인 본인을 동일시, 동질시하는 거예요.

더 이상 타인이 아닌 거죠. 네가 나이고 내가 너라는 거죠. 두 개의 나가 아니라 하나의 나가 된다 이 말이죠, 하나의 나가. 이게 신약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그리스도와 우리가 세례 받음으로 한 몸이 된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그게 논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안 되죠.

안 되는 이유가 우리는 이미 우리의 동질성으로 독자적으로 확보되어 있기 때문에 누가 나와 동일시될 수가 없어요. 이걸 자충적이라 하는데 스스로 충족되기 때문에, 모든 게 만족하다는 뜻이 아니고, 지금의 나의 나됨은 내가 있는 그것으로 나됨으로 나됨의 요소로 가득 차 있고 그다음에 누가 나를 도와준다면 내 허락 맡고 들어오면 그게 내 것으로 추가되는 것이지, 허락 없이 그냥 들어와 버리면 이건 이질적이 되는 겁니다.

이건 박테리아나 바이러스가 돼요. 바이러스랑 우리가 지금 몇 년째 싸웁니까. 내 허락도 없이 나의 동질성에 이질적인 것이 들어왔다고 나가라고 난리잖아요. 예수님이 코로나 바이러스입니까? 바이러스 아니죠. 그런데 사람들은 교인들은, 성도 말고 교인들은 거리를 띄워놓고 하는 거예요. 내가 아쉬울 때 부를 테니까 그때 오세요. 내가 아쉬울 때. 내 허락 없이 예수님 들어오면 안돼요.

그러면 무엇이 허물어집니까? 평생 동안 일구어놓은 나의 나됨이 와르르 무너지는 거예요. 성경공부도 내가 알아서 갈게요, 이런 거. 헌금도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주님은 받기만 하고 내가 참석하면 고맙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지금 내 일 바빠요. 내 일이 있어요, 내 일이. tomorrow말고 나의 일. 나의 일이 있어요. 무슨 나의 일이 있습니까? 당신이 무슨 나의 일이 있냐 하면 평생토록 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는 내 일을 얻기 위해서 내가 구축하기 위해서 지금껏 살아왔다는 거예요.

시간과 공간, 그거 누구를 위한 건데? 그거 주님을 위한 거잖아요. 그럼 당신은 도둑놈이네. 주님을 위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기는 딴 살림 차리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강도죠. 그럼 성도는 뭡니까? 그 강도한테 얻어터진 사람이죠. 강도 만난 사람은 거의 죽을 뻔했어요,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자기 동질성이 지금 다 허물어질 판이다 이 말이죠.

그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여기에 사마리아인 비유 누가복음 10장 27절에 보면 율법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는가. 율법에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천국의 특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만 운집해있는 나라, 이게 천국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에서 그 이웃에 뭐를 포함시켰습니까? 원수까지 포함시켜버렸죠, 원수.

자, 한번 복습해봅시다. 원수가 뭐라 했죠, 원수? 자기 동질성이라 했죠. 원수라 하는 것은 자기 동질성입니다. 나만의 독자성, 나의 독립성. 예수님은 그냥 이용대상, 하나님은 그냥 이용대상. 내 것을 내 마음에 맞도록 채우기 위해서 그냥 기도하고 헌금하고 온갖 알랑방구를 끼면서 헤헤거리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빼낼 거 다 빼내겠다는 겁니다. 자기 자립성, 독자성이죠. 독자성, 이게 하나님 원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네 원수를 사랑하라 했죠. 사랑. 사랑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시간과 공간 자체가 주님을 위한 겁니다. 주님의 동질성을 위한 거예요. 그런데 주님의 동질성을 위한 이 환경에 이런 마귀적인 것, 독자적으로 독립 선언한 인간들이 등장한 거예요. 선악과 따먹고 악마가 시켜가지고 악마가 배후에서 쫙쫙 밀어서 그렇게 된 거예요. 그렇게 하니까 어떻게 사랑하느냐. 독자성을 갖고 있는 이것을 허물어버리고 주님의 독자성, 동일성으로 이걸 품어줘야 되겠죠. 품어줘야 되죠.

품어주려면 내 동질성이 깨진 사건이 터져야겠죠. 그게 무슨 사건이냐? 강도 만난 사건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자기도 역시 인간이라 자기밖에 모르잖아요. 자기가 뭐 강도보고 때려달라고 돈 주고 부탁한 적 없잖아요. 그냥 강도 만나기를 두려워하면서 자기 단속하면서 살았는데 강도가 와서 때렸다 이 말이죠.

그래서 여기서는 누가 나쁘냐, 누가 의로우냐의 문제가 아니고 누가 누구를 좋아하느냐, 누가 누구를 싫어하느냐 그 문제에요. 제사장과 레위인은 누구를 싫어합니까? 강도 만난 사람을 싫어하고 그 선한 사마리아인은 누굴 좋아해요? 강도 만난 사람을 좋아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온 것은 우리가 잘해서 못해서를 따지는 게 아니고 그냥 좋아하기 때문에 오신 거예요. 내 기뻐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너는 내 기뻐하는 자라. 누가복음 2장에 나오잖아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2:14)

주님이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우리를 그냥 받아주는 거예요. 네가 무엇을 하며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그건 옥경이한테 물으라 해요. 옥경이한테 묻고, 희미한 등불 밑에서. 그거 말고 그냥 받아주는 거예요, 그냥!

원수와 한 동질성을 이루는 거예요. 그런데 그 원수가 다 깨질 판이에요. 와장창. 그래서 주님께서 그 원수의 죄를 대신 갚아주는 겁니다. 어떻게 갚아준다고요? 부비가 더 들면 더 주겠습니다. 끝까지 갚아주는 거예요. 끝까지 사랑하시는 거예요.

그럼 끝까지 사랑하는지는 그때 돼봐야 알지 않습니까? 그때까지 안 가봐도 알아요. 왜냐하면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을, 성령을 보냄으로써 성령이 최종적인 보증이 되는 겁니다, 보증. 혹시 네가 일 있거든 네 안에 있는 보증수표 꺼내라. 그게 뭐냐? 성령이에요. 주여, 제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아하하하하 웃으면서. 이미 죄 사함 받은 성령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육신이니까 육신의 정욕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고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아까 안양강의하면서 인간의 마지막 유혹은 자기 자신이다. 이것을 오늘 시간으로 한다면 자기의 동질성이다. 동질성. 나의 나다움으로 둘러친 그 구역, 그게 나에요. 나의 나다움으로. 어느 곳까지 내 손길, 내 애틋함이 안 닿은 곳이 없는 그 동그라미, 이게 내 동질성이에요. 어떤 사람이 만약에 내 차를 툭 치고 가면 우리가 그걸 보고 화내죠. 왜? 내 손길이 닿은 것이거든요. 어떤 사람이 내 자식 욕하면 우리는 가만있지 않죠. 왜? 그 자식에 내 손길이 닿아있으니까. 그게 나의 동질성, 자아성이에요.

자, 좀더 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3절에 보면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불쌍히 여겼다고 되어 있죠. 이게 바로 긍휼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불쌍히’가 그릇에 담겨있는 사람이 성도에요. 주님의 불쌍히 여김이. 아이고, 불쌍한 것. 하고 불쌍함이 여기 안에 들어있어요.

어디까지 불쌍하냐? 우리 육신이 남아있을 때까지 끝까지 불쌍해요. 끝까지 도와줍니다. 끝까지 갚아주십니다. 끝까지 죄를 다 갚아줘요. 갚아주는데 예수 믿어도 또 율법 지켜야 되지 않습니까? 아니에요. 그건 골로새서 2장에 나옵니다. 골로새서 2장에 보게 되면, 여러분 아는 이야기지만 이것과 관련해서 이렇게 알아두면 더 좋죠. 2장 14절,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되어 있죠.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은 우리의 육신의 정욕이 예수님께 원수였다는 사실을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계속 그것이 같이 연동해서 일어나야 된다는 말이죠.

자, 이게 율법책입니다. 율법책이 펄럭인다고 봅시다. 십자가가 이 율법책을 관통해서 꽂아 벽에 박아놨어요. 율법책을 통과해서 십자가로 박아버린 거예요. 이 율법이 작용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우리 육신이죠. 이 육신을 십자가로 박은 거예요. 앞으로 들어가서 뒤로 튀어나와버렸어요, 십자가가.

사도 바울은 나는 십자가 안에 있다는 거예요. 이 말은, 율법에 대해서 이미 내 육신이 죽은 자가 돼요.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된 거예요. 죄가 죽었다는 말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내가 더 이상 관여할 게 없다 이 말입니다, 죄에 대해서.

죄는 계속 나오는데 그 죄가 십자가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일어나야 될 주님의 시공간 가운데 주님의 말씀의 작용이다 이 말이에요. 그럼 죄가 뭡니까? 죄는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원했던 게 죄이고. 원수가 뭘 원했습니까? 그건 자기의 동질성이에요.

쉽게 말해서 혼자 살고 싶다는 거예요, 나는. 예수님도 좋고 하나님도 좋은데 결국은 나 절대성, 나 독자성, 천상천하 유아독존 그렇게 살고 싶다는 겁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게 불교이론이잖아요. 모든 인류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는 게 불교에요. 모든 인류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는 겁니다. 니체란 철학자도 불교 쪽, 헤르만헤세 데미안도 불교 쪽, 들뢰즈란 철학자도 불교 쪽, 라캉도 불교 쪽. 유대교는 물론이고 소위 수도하는 프랑스의 수녀들, 수도원 전부다 불교 쪽이에요.

불교는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겁니다. 내 마음의 평정이에요. 이 불교와 한판 붙은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이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17장에서 불교하고 붙었어요. 그 당시 불교가 스토아학파에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게 목표에요. 지금의 통일교하고 똑같은 거예요. 통일교.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거예요.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거예요. 가정에 토대를 삼아서.

지금 그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개돼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 그 인간들을 끌어 모아놓고 교인 끌어 모았다고 우기고 있어요. 전부 개돼지로 다 돌아가는데요. 예배 후딱 끝내고 자기 할 일 하기 바빠요. 말씀 앞에서의 자아가 중요하지 않고 내가 이뤄놓은 성과가 나의 나됨을 증명해주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나의 가치, 자기가 후딱 돌아갈 내 자리가 있어요. 그 자리는 어쩌면 천국보다도 십자가보다도 그게 더 마음에 와닿고 있죠, 사람들에게.

뭐 남 이야기할 것도 없이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놀라운 사실은 그때마다 다시 못 박힌 십자가가 관통된 것을 느끼게 하시는 그 역할은 누구 몫입니까? 그건 오직 성령께서, 내 그럴 줄 알았지. 쥐어박으면서 날마다 우리를 일깨워주는 겁니다. 이 말씀으로. 성경말씀으로.

너를 살리는 게 문제가 아니고 말씀, 이 언약, 십자가를 살려내기 위해서 내가 애쓰는 너는 피조물이야.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은 없어요. 하나님을 위해서 주를 위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기 위해서 피조물이 있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이 말씀드리고 물어보고 답변하고 끝내겠습니다. 매니지먼트에서, 매니저가 중요합니까, 가수가 중요합니까? 매니저가 맨날 가수 앞장세워서 칭찬하는데 그거는 누구를 위함이에요? 매니저 자신이 자신을 위해서 가수를 이용한 거죠. 앨비스 프레슬리 매니저가 파크대령이라고, 그 사람 영화가 <앨비스>라는 영화에요, 얼마 전에 개봉했어요.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대사가 “앨비스는 여기 없다.” 자기는 여기 있죠. 우리가 예수님의 매니저 노릇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를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는데 이게 전도되고 거꾸로 되고 말았습니다. 나를 위해 예수님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속으로 남한테 들키지 않는 마음으로 있는 이 마음. 남한테 들키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들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서울의존강의20220714b 베드로후서2장 22절(개와 돼지)-이 근호 목사.hwp (99.0K), Dow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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