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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5 07:23:44 조회 : 54         
20220902b 울산강의-역대기상(13강) 11장 5절 : 인간에서 장소로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96)
20220902b 울산강의-역대기상(13강) 11장 5절 : 인간에서 장소로
(강의:이근호 목사)


성경에 나오는 사울이나 가룟 유다 인생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참 사는 게 힘들어요. 얼마나 노력하고 애쓰는지 몰라요. 사울은 자기가 나라의 왕이잖아요. 왕이기 때문에 백성들의 존경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요. 자기 권력에 누수가 생기면 안 되기 때문에. 따라서 자기가 책임져야 될 이 나라에 뭔가 다윗 같은 존재가 등장해버리면 그 흠집을 제거해야 다시 온전한 자기가 정상적인 왕이라 하는 것이 증명이 될 수 있지요. 그래서 내가 정상적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누구를 공격 목표로 따로 뽑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야 나의 의가 유지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정치란 것도 그렇게 사회 모든 관계가 의도적으로 적을 만들어서 적을 공격함으로써 자기 약점을 노출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인간은. 아이가 세 명 있다면 추석날에 부모가 자기를 나무란다 싶으면 첫째 아들이 문제 있으면 둘째, 셋째를 막 공격함으로써 자기 문제 있는 것을 상쇄시키는 방법이죠. 나보다 더 못한 것을 밟음으로써 자기가 그렇게 못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죠.

하나님께서는 그 반대 방식을 사용해서 다윗을 높여버립니다. 그게 역대상 11장 4절부터 보게 되면, “다윗이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예루살렘 곧 여브스에 이르니” 여브스는 지금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그 예루살렘 빼놓고 다른 덴 다 차지했어요. 예루살렘 그 핵심부분만 빠져있는 거예요. 여브스 토인, 원주민들이죠. “여브스 토인이 다윗에게 이르기를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나” 이렇게 돼 있어요. 그 대목이 사무엘하 5장 6절에서 8절에 보면 아주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왕과 그 종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거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저희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성이더라 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수구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절뚝발이와 소경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소경과 절뚝발이는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아까 처음에 제가 이야기한 거죠. 인간이 아니고 장소문제에요. 인간문제가 아니고 장소 문제인데, 인간문제 같으면 너라는 인간과 나라는 인간 가운데 누가 더 세냐, 누가 더 못하냐? 그게 인간문제에요. 인간이 늘 비교하잖아요. 누굴 만나면 저 사람이 나보다 못할까, 나을까 생각하잖아요. 인간문제는 개인의 존재를 두고 비교우위가 되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문제가 아니고 장소문제가 돼버립니다. 그러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함에 특수한 장소의 창조, 새로 생김, 발생되는 거예요. 개인이 누가 누군지 나은지 문제가 아니라 개인문제를 장소문제로 확장시키는 겁니다. 이걸 신약에서는 지옥 가는 사람은 예수 안으로 들어오질 못해요.

그러면 예수 안이라는 공간을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예수 안이라는 이 공간은 그전에 어떤 특정 인간이 자기가 남보다 우월하고 잘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 순서가 필요해요. 인간으로부터 출발해야 장소가 되는 거예요. 그냥 장소가 주어지는 게 아니고 인간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인간은 뭐한다고요? 네가 잘났나, 못 났나 비교한다 했지요. 제가 방금 이야기했지요.

사울이 없이는 다윗의 취지, 의미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사울은 다윗 네가 낫나, 내가 낫나? 백성들도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사울을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 이렇게 봤잖아요. 그런데 다윗은 네가 낫다, 내가 낫다가 아니라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장소, 이스라엘 장소가 네가 옳다, 내가 옳다, 네가 잘났다, 못 났다는 이걸 완전히 뛰어넘는 여분의 공간이라는 거예요. 인간의 생물학적 공간 말고 여분의 언약이 주어진 것이 바로 장소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되어야 다윗이 자꾸 사울 왕을 살려주려 하고 사울 왕이 아들과 함께 죽었을 때에 사무엘하 1장에 보면 다윗이 얼마나 애통해하고 웁니까. 그걸 보고 성경 보는 사람마다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자기를 잡아 죽이려고 그렇게 저주를 퍼붓고 현상 수배하던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가 하나님에 의해서 붙여줬으니까 하나님 찬양하고 이제는 나를 괴롭히던 인간 제거되었으니까 속이 시원하다, 이렇게 되는 것이 인간으로서 자연적인 흐름이잖아요. 성경을 천 독을 해도 마찬가지에요.

사무엘상의 끝은 사울 왕이 죽는 거예요. 아들과 함께. 사무엘하 시작은 뭐냐? 다윗이 사울 왕 죽었다고 애통하는 것부터 시작해요. 그게 인간들이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그리고 다윗이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을 때 다윗을 막 도망가잖아요. 사막에 동굴에. 그럴 때 먼저 사울을 죽일 기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부하 신하가 죽이자고 할 때 다윗은 처음에 안 죽이고 사울의 옷 가를 칼로 베었어요. 나중엔 그것도 후회해요. 내가 감히 기름부음 받은 사울 왕의 옷을 베다니 내가 잘못되었습니다. 그 정도로 나와요.

그럴 때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왜 이해를 못하느냐 하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과 다윗을 두고 누가 다음에 차기 왕이 되어서 우리나라 이스라엘을 통치할 것인가? 그것만 생각해요. 존재만 생각한 거예요. 장소를 생각 못하고. 이스라엘 장소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장소로 생각 못하고 개인적으로 근사하고 개인적으로 잘 먹고 잘 살면 그걸로 하나님이 이용한 충분한 대가를 얻었다고 생각한 거예요. 요새 같으면 교회 나온 이득을 얻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그 사울 왕이 죽을 때 다윗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차라리 내가 죽을 걸. 참 이스라엘 용사, 아까운 용사가 죽었다.” 사울 왕한테는 다윗이 누가 잘났는지 비교대상이 돼요. 존재니까. 그러나 다윗의 입장에서는 사울도 이스라엘의 일부라고 본 겁니다. 이스라엘 전체의 공간에서 우리가 얼마나 비정상적인 본질을 갖고 있는지 사울과 그 백성들과 사울의 자녀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선 이스라엘 공간을 통해서 충분히 다 폭로시키고 들춰내는 그런 그릇(도구)으로 사용했다는 겁니다.

우리도 남들 보기에 내가 저 사람보다 낫다고 보시면 안 돼요. 그들이 십자가를 거부하고 지옥 가는 것은 바로 내가 그런 자로 태어났음을 그런 자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인정해줘야 돼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돼요. 이건 내 노력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내 일함으로 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일하심의 결과로서 누구와 시합 붙는 게 아니고 내가 놓여있는 공간 자체가 예수 안이라는 놀라운 공간에 이미 포함이 됐다는 사실에 우리는 감격해야 되지요.

그걸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 이렇게 보셔야 신약도 풀려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여기 예수 그리스도는 그냥 존재가 아니고 어떤 새로운 공간을 만드신 거예요. 예수 안이라는 공간. 그 공간을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에서는 그걸 십자가 안이라고 이야기해요. 참 생각해보면 십자가 안이라니 그게 몇 평이나 된다고 그 안에 온갖 예수 믿는 사람 다 들어있겠나, 생물학적으론 말도 안 되지요.

그렇지요. 예수님 십자가, 골고다 언덕 몇 평이나 된다고 몇 사람이면 정원 꽉 차잖아요. 심지어 십자가에 달랑 세 명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도 세 개의 십자가에 세 명 달렸거든요. 그러면 하나의 십자가에 한 명. 그러면 십자가는 몇 명입니까? 달랑 한 명. 그런데 예수 안에 예수님만 들어있지 다른 사람은 들어있을 수 없지요. 그런데 성경은 사도 바울은 뭐냐 하면 예수 안에서 이방인들도 복을 받아서 구원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 안에 어떻게 됩니까? 예수 안이 확장되지요.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역대상 11장 보겠습니다. 여기 보면 역대상 11장에 인간문제가 장소문제로 전환되면서 토착민 여브스, 예루살렘 원주민들이 뭐라 했느냐 하면 다윗이 쳐들어오면 우리 성 안에 있는 절뚝발이와 소경이나 장애인들도 다 쳐 부셔서 여브스 성, 우리 성채 안에 못 들어오게 할 것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아까 사무엘하 5장 6절에서 8절, 분명히 맞지요.

여기서 여브스 사람이 뭐가 되느냐 하면 못 들어온다. 그러니까 우리 쪽에 있는 소경과 절뚝발이가 나가 전쟁해도 너희에게는 이긴다는 이 말은 일체 너희들 다윗의 군대는 못 들어온다고 아주 최상급으로 강조하고 있는 거예요. 못 들어온다. 들어올 수가 없다. 이게 왜 중요하냐? 이게 바로 그대로 확장되어서 살아서 천국의 확장이 아니고 뭐부터 확장하느냐? 지옥부터 확장시켜버리면 성도는 어떤 경우라도 지옥에 못 들어갑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천국 들어간 것만 생각하잖아요. 그건 벌써 시작이 잘못된 거예요. 천국 들어간 것만 생각하는 건 아직까지 내 존재만 생각하는 거예요. 이거는 예루살렘 성에, 나중엔 시온 성이 돼요. 예루살렘 성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 한 명도 못 들어갑니다. 들어갈 수가 없어요. 이 말은 정리하면, 인간이라면 단 한 명도 천국에 못 들어온다는 그 하나님의 대원칙을 여브스 토착민을 통해서 먼저 운을 떼게 만들었어요. 지금 여러분 지금 무슨 뜻인지 제가 말하는 취지를 아셔야 돼요.

인간은 선악과 따먹었잖아요. 선악과 따먹은 인간인 이상은 어떤 단 하나라도 선악과 따먹은 것 때문에 생명나무를 못 따먹게 돼 있다는 것이 주님의 한 결 같은 대원칙이고 그 원칙은 변함없이 여전하다 이 말입니다. 단 한 명도 선악과 따먹었다는 생명나무 있는 곳으로 못 갑니다. 이것을 여브스 사람들은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떤 경우라도 소경과 절뚝발이도 너희를 물리쳐서 이스라엘 사람은 한 명도 이 여브스 이 땅에 못 온다는 거예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어떻게 됩니까? 결과적으론 이 속담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뭐로 바뀌었는가? 사무엘하 5장에 보면,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소경과 절뚝발이는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이렇게 바뀐 거예요. 못 들어가는 곳에 다윗이 정복했잖아요. 그러면 무엇에 대한 무엇의 정복이냐 하면 추호도 못 들어간다는 그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정복을 하신 거예요.

그러면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 그 안에 뭐가 계속 살아남아야 되느냐 하면 추호도 못 들어간다는 원칙은 여전히 계속 살아있어야 되는 거예요. 지옥 갈 사람은 추호도 천국에 못 들어가고, 천국 갈 사람은 추호도 지옥에 못 들어가는 겁니다. 둘 중에 어느 게 기쁩니까? 여러분 지옥 못 들어가는 게 기쁩니까, 천국 가는 게 기쁩니까? 여러분 어느 쪽이 기뻐요?

다윗을 따라갔던 사람들은 그 속담이 어떻게 다윗 때문에 바뀌어졌는가에 대해서 즐거워하는 거예요. 못 들어간다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들어왔다는 말은 이제는 여브스 사람은 단 한 명도 어디 못 들어간다? 시온 성에 못 들어가게 된 거예요. 왜? 그쪽부터 시비를 걸었으니까. 시온 성에 못 들어오는 겁니다. 그게 다윗언약이에요. 다윗이 뭘 했다는 게 아니고 다윗으로 하여금 활동 하에 있는 모든 공간과 그 자리, 그 현장에서 일어났던 속담과 그 말조차도 주께서 하나도 버리지 않고 그 취지를 계속 살려내는 식으로 천국과 지옥을 갈라내는 겁니다.

이것은 여브스 사람 말이 맞아요. 단 한 명도 이스라엘 사람 못 들어갑니다. 그런데 다윗은 언약의 사람이에요. 생물학적으로 다윗이 할 수 있는 그 여분의 것이 있어요. 왜? 다윗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결과물이기 때문에. 여브스 사람은 눈에 보이는 다윗만 보고 그 군사들만 봤어요. 뭘 못 봤는가? 다윗에게 하나님이 함께 있음을 못 본 거예요.

이 예루살렘을 누가 정복 못했는가? 사울 왕은 정복 못했어요. 사울 왕 때는 정복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 왕은 사울 왕 본인이 한 것만 쳐다보면서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평생을 살아온 거예요. 하나님 믿고 전쟁할 때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전부 다 본인이 다 하는 거예요. 내가 기도하고 내가 헌금하고 전도하고 본인이 다 한 거예요.

그 본인이 다 한 것 여브스 사람은 코웃음 쳤지요. 사울 왕 백날 해봐라. 우리 동네 절뚝발이, 소경도 너희 군대한테 이긴다. 그런데 왕이 다윗으로 바뀌었잖아요. 바뀌어도 맨 그 군대가 그 군대지 뭐. 뭔 볼 일 있겠어. 똑같이 적용합니다. 다윗 너희들 사람 한 명도 못 들어간다. 왜? 우리의 소경과 절뚝발이도 너희들보다 세기 때문에, 라고 큰소리쳤던 그 여브스의 예루살렘을 다윗이 이깁니다. 그럼 누가 이기게 했습니까? 성경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다윗이 가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느니라.

이게 우리한테는 적용이 왜 안 되는지요? 이걸 다시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켜봅시다. 사울을 뭘 보느냐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합니다. 왜냐하면 사울 자체가 나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그건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자기를 뭐로 봅니까? 자기를 비정상인으로 보지 않고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을 보지요.

다윗 왕은 어떠냐? 골리앗과 전쟁할 때 이 전쟁은 누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닌 나. 주님께서 샤먼에게 주신 말씀, 네가 왕이 된다는 그 말씀 있잖아요. 물론 그게 사무엘상 16장이잖아요. 17장에 보면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이깁니다. 이기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전쟁은 내게 속하지 않는 전쟁이에요. 내게 속하지 않는 전쟁에 하나님께서는 그 공간에 참여시킨 겁니다.

여러분 십자가 졌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나는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는 거예요.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서도 생성된 공간에 사도 바울은 거기에 본인이 속해 있는 거예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 맞는 말이에요, 이게. 남들 보기에는 그게 안 보이지만 사도 바울은 그걸 본인이 아는 거예요. 내가 잘났다, 못 났다가 아니라 어떤 공간 안에 속했다는 겁니다. 예수 안이라는 공간 안에서 구원 받은 거예요.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면 그렇게 돼 있습니다.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 너희를 선택한다. 창세전에 예수 안이라는 공간, 내가 너희에게 어떤 건물을 보낸다. 투망, 망을 보낼게. 망이 너를 건질 것이라는 거예요. 어떻게? 값없이, 일한 것도 없이. 그게 아브라함에게 복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자기가 잘나서 알아서 가나안 땅까지 왔습니까? 아니지요.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했잖아요. 그 말씀의 투망, 그물망, 그 망 안에서 아브라함은 자기 마음대로 못 움직여요. 주께서 그렇게 몰아세운 겁니다. 호되게 몰아세운 거예요.

이것을 지난 수요일 설교 제목으로 장했어요. <존재의 뒤편> 내가 생각하는 존재의 현실 망 말고 주께서 나를 움직인다는 걸 그게 보이는 다른 관점이 있는 자리, 그게 존재의 뒤편으로 가는 거예요. 쉽게 하면 쇳가루를 종이 위에 뿌려놓고 종이 밑에는 지남철을 대서 움직이면 서로 거리가 가깝고 멀어지는 모든 움직임이 지남철의 움직임에 따라서 비례해서 같이 움직이잖아요.

존재의 뒤편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있는 주님이 자기의 언약의 장을 형성하고 그 장에 속한 그 백성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성도가 되게 하신 거예요. 네가 성령을 받으면 누구의 증인이 되리라? 예수님의 증인이 되리라. 증거 되기 위해서 어떤 직업이든 어떤 아이큐든 어떤 직장이든 상관없이 가족이 몇 명이든 상관없이 증거 하라고 주께서 일을 벌이는 거예요. 내가 일을 벌인 게 아니고 주께서 일 하셨습니다. 내 존재가 문제가 아니고. 에게 속하지 않는 일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은 그 여브스 사람의 예루살렘을 이름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다윗 성으로 바뀌지요. 이게 시온 성으로 바뀐다고요. 시편에 보면 하나님은 어디 계시느냐? 시온 성에 계셔요. 시온 성에서 자기 백성의 방문을 받습니다. 만남의 장소에요. 하나님의 시온 성. 그래서 이게 뭐냐 하면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이 맞아요. 여브스 말이 맞는다고요. 사울에 속한 이스라엘은 아무도 못 들어갔어요. 왜? 사울 왕이 함락을 못 시켰으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요소에 사울 요소만 있는 게 아니에요. 다윗 요소도 있는 거예요. 그 다윗 요소가 뭐냐?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공간으로서의 이스라엘을 증거 하는 다윗. 다윗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 나라로서의 다윗, 거기에 대한 표식으로 등장하는 다윗의 나라가 예루살렘을 접수하고 함락을 시켜버렸어요.

그렇다면 이 다윗 성은 뭐냐 하면 어떤 이방인들도 어떤 사람들도 이 다윗 성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들어올 수 없는 공간, 그런 세계가 되는 겁니다. 천국에는 아무나 가는 게 아니에요. 다음과 같은 질문은 잘못된 거예요. “어떻게 하면 천국 갑니까?”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이렇게 해야 돼요. “천국은 어떻게 누가 만들었습니까?”

천국이란 장소로 설명해야 돼요. 누가 만든 공간입니까? 이렇게 해야지요. 내가 들어갑니까, 못 들어갑니까, 라고 질문하면 안 돼요. 그래서 잘못된 질문이 뭐냐 하면, “목사님, 저 선택받았어요, 선택 안 받았어요?” 그 질문이 잘못된 질문이에요. 공간은 개인을 묻지 않습니다. 똑같은 질문에 이런 거예요. 이 질문을 얼마나 많이 해대는지요. 드디어 찬스가 왔네요.

히브리서 6장에,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4~6절) 그러니까 성령의 선한 맛을 보고도 범죄 하게 되면 천국 못 가고 지옥 갑니까, 라는 질문들.

이런 질문들을 이 대목으로 많이 하잖아요. 그 질문하는 태도가 뭡니까? 나 어떻게 돼요? 또 나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사울이 이야기했던 것과 똑같이 나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그러나 성도는 내가 구원 받았다는 걸 증거 하기 위해서 천국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만든 그 공간을 증거 하기 위해서 성도가 된 거예요.

나와 예수님 누가 세냐고 견주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아예 날 사람 취급도 안 했다는 것을 증거 하는 용도로 천국을 만든 거예요. 어떤 인간도 천국을 갈 수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천국을 만든 겁니다. 어떤 인간도 천국 갈 자격이 없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 천국을 만드신 거예요. 그러니까 천국 온 것은 횡재한 거죠.

그것을 주일학교 설교 때 이렇게 했어요. 구원 받는 것은 확률이 0%라 했어요. 제로입니다. 왜? 우리는 선악과에서 뭘 했느냐 하면, 인간이 선악과 먹었잖아요. 여기서 인간 나라가 만들어졌어요. 인간 나라 장소가 생겨버렸어요. 이 인간의 장소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물어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고,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살 수 있습니까?” 인간에게만 물어요. 훌륭한 목사에게 묻는 거예요. 주님께 묻는 게 아니고. 왜? 주님은 이 세계와 관여 안 하기 때문에. 여기 훌륭한 목사들, 종교인들 많이 있거든요.

그 사람들한테 묻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계속 선한 존재로, 의로운 존재로 유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타고났어요. 선악과 따먹은 갇혀있는 인간들 특징은 자기 잘남을 스스로 포기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자기가 스스로 못 나지기를 원했던 적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인생이 고롭고 인생이 힘들어요. 그것 때문에. 지 잘났다는 생각 때문에 사는 게 그렇게 고생을 자처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 받은 성도는 예수 안에 있잖아요. 예수 안에 있으니까 뭐가 거치적거리는 거예요, 거추장스러운 거예요? 성령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누가 거추장스러운 거예요? 나지요. 그래 기도가 뭐냐? 제발 나를 치워버리게 해달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일주일 뒤에 이사한다 하면 기도를 어떻게 해야 됩니까? 주여 이사할 때 비 안 오고 잘 하도록, 이게 아니라 그 이사하는 모든 것에서 나의 지식과 내 경험과 기억을 제발 주께서 개 무시해주옵소서. 주께서 이끄시는 대로 가게 해주세요. 왜? 그래야 주의 일만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고 난 뒤에 이사하고 나니까 결혼반지 다이아 잃어버렸다. 그럴 경우에 인간의 첫 번째 반응은 뭐였습니까? 당황스럽다. 당황스러우면서 나오는 반응은 왜 하필 저에게 이런 시련을, 이렇게 나오죠. 두 번째 반응은 뭡니까? 내가 다이아는 잃어버렸지만 주는 안 잊어버렸다, 이렇게 되지요. 왜? 예수 믿은 게 나의 의가 돼버렸으니까. 그게 자기의 토치카, 기어이 나는 이 정도 신앙이야. 다이아 하나 잃어버려도 나는 복음으로 살 정도로 괜찮은 신앙인이야, 하고 여전히 뭡니까? 자기 존재에 대해서 그런 거죠.

그리고 세 번째는 깨닫는 것은 뭐냐? 내가 바로 주님의 일을 방해했던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그 마태복음 6장의 말씀을 나는 해당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이아 잃어버리고 나니까 구원 받은 기쁨보다 다이아 잃어버린 슬픔이 열 배나 더 아프게 나에게 상처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렇지요.

상처 받은 다윗,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일을 증거 하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상처 받은 나, 이게 주께서 나와 함께 일하고 있다는 걸 유일하게 증거 하는 것은 이겁니다. 십자가 증거하는 건 이 방법이에요. 도대체 우리가 어디까지 상처를 받아야 되는가? 강도까지만 하세요. 누구 남의 집안을 작살을 내서 사형당해서 전기의자 앉는 것 말고 십자가로 공개적으로 고 정도까지만 가셔서 거기서 준비된 멘트하세요.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러면 돼요.

그게 가룟 유다와 성도의 갈림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했잖아요. 베드로가 그 이야기를 감춥니까? 요한복음에 나와 있지요. 자기가 배신했다는 것, 도망쳤다는 것 사도 요한이 다 기록하고 있어요. 본인 이야기인데 본인의 수치스런 상처를 다 기억하고 있다고요. 그리고 사도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 잡아서 옥에 가두고 죽이는 것 이야기 다 했어요. 자기가 폭행자라고 했어요.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란 걸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증거 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십자가를. 성경 지식으로 신학으로 증거 하는 게 아니고 말씀 달달 외워서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망해버렸을 때 더 이상 내세울 어떤 근사한 것이 없을 때에 요모조모 따져서 나의 의라는 게 없을 때에 세리와 창기가 됐을 때에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되었을 때에 주여 죄인입니다,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때에 주께서는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그러한 주님의 은혜가 준비돼 있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그 점을 에베소서 2장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 하기 전에 역대상 11장을 그다음부터 끝까지 다했다고 볼 수 있어요. 왜냐하면 그다음부터 전쟁이 나오는데 그 전쟁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에요. 전부 다 이거는 생물학적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다윗이 군대라는 이름 때문에 여분의 힘이 등장해서 그 공간을 주변에 남아있는 공간을 하나님의 공간, 다윗 나라의 공간으로 완전히 전환시키는 데 용사들의 명단이 쭉 나와요. 그런데 거기서도 다윗이 약간의 실수를 하지요.

역대상 11장 17절 같이 봐야 돼요. “다윗이 사모하여 가로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하매 이 세 사람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리고 가로되 내 하나님이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를 어찌 마시리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 아니하니라”

여기서 다윗이 다윗의 전과 후가 마음가짐이 차이 나게 묘사되고 있지요. 다윗도 불쑥 나 이 정도할만한 자격 되잖아, 자기 의가 나와 버린 거예요. 우리의 일상처럼. 우리는 매일 그 텀의 반복이에요. 우리는 주께서 일하는 것 싫어. 내가 일해야 돼. 내가 일해서 내가 기대한 결과가 나올 때 내가 잘난 존재인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싶어요. 남한테 기죽기 싫어요.

인물 되지 믿음 되지 돈 되지 다 되지 이러고 싶어. 건강 되지. “나 같이 복 받은 사람 나와 보라고 그래.” 이렇게 자랑 질하고 싶어. 불쑥불쑥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내가 선한 일, 내 딴에 신앙적인 것, 상당히 마음 낮춘 것처럼 보이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런데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도 해놓고 갔는데 다윗이 후회했지요. 안 갔으면 좋겠다. 내가 농담 삼아 이야기한 것을 진담으로 안 들었으면 좋겠다, 이러고 싶지요.

그런데 그 졸병들이 왕에게 아부하겠다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적군 속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다가 엉뚱한 다윗 왕 개인을 위해서 뭔들 못 하리, 하면서 거기서 나온 게 사랑 is 뭔들, 사랑을 위해서 뭔들 못하겠습니까, 물을 길어온 거예요. 아하. 참 그런 경우가 목사한테 굉장히 많아요. 목사가 부흥회 하면서 겨울철에 수박 먹고 싶다, 이 말하면 초빙한 당회장 목사가 수소문해서 수박 키우는 비닐하우스에서 수박 갖다 바치지요. 오늘 짬뽕 먹고 싶네, 하면 짬뽕 갖다 바치지요.

이게 바로 개인 존재가 아니고 다 같이 은혜 받는 공동의 공간이잖아요. 하나님이 나에게만 여분의 힘을 주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에게 다 준 거예요. 왜? 사울 왕 시대가 끝났으니까요. 그래서 여기 여브스 예루살렘 성이 되었지만 이름은 다윗의 성이지만 실은 그 성뿐 아니고 모든 지역은 이스라엘 왕의 신하들이 정복에 나서서 정복에 나선 용사들 명단이 11장 끝까지 나와 있어요.

여기 어떤 사람 보면 23절에, “또 장대한 애굽 사람을 죽였는데 그 사람의 키가 다섯 규빗이요” 이렇게 돼 있다고요. 다섯 규빗이면 얼맙니까? 2미터 50이 넘어요. 그 장대한 사람, “그 손에 든 창이 베틀 채 같으나 저가 막대기를 가지고 내려가서 그 애굽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죽였더라” 이건 누가 했던 거냐 하면 소년 다윗이 골리앗에게 한 것 있잖아요. 그 연장선이에요. 그런 능력이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신하들 속에까지.

주님에게 일어난 일이 주님의 자기 공간에 끌어안은 그 인간에게 계속 일어나는 거예요. 오늘날 성도한테 일어나요, 주님께 일어난 일이. 그래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저 산을 들어서 저 바다에 빠지라 했어도 네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했을 것이다, 라고 하잖아요. 그럼 제가 문제 내겠습니다. 산이 뽑혀 바다에 빠지는 이게 큰 믿음이냐, 아니면 내 죄가 사해지는 것이 큰 믿음이냐? 내 죄가 이게 더 크지요. 왜? 우리는 그 천국에 못 가기 때문에.

선악과 따먹은 자는 생명나무를 못 따먹는다. 창세기 3장 24절의 대원칙에 의하면 우리는 천국에 못 갑니다. 그런데 주의 능력으로 주의 새로운 공간에 죄인이 필요해서 죄인으로 들어가서 주님의 의의 피와 만나서 의인 되거든요. 여기에 초청받은 이 사람만 천국 백성 되는 겁니다. 왜? 예수님만 증거 하기 때문에.

“주의 하시는 일을 가리지 않도록 주여 나를 죽여주옵소서.” 이게 사도 바울이,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 많아요. 목사님, 제 소원이 있는데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그런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에요. 복음을 잘못 전했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게 잘못 들으면 자기가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하루하루 사는 게 너무 괴롭고 힘들어서 그만 속 시원하게 자살하듯이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거고.

그게 아니고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죽는 것이 소원이란 말은, 내가 주의 일에 방해하는 존재기 때문에 빨리 주의 일을 그만하라고 치워달라는 식으로 사도 바울처럼 기도하면 돼요. 주여 나 같은 인간은 쓰레기 치워서 주의 일에 훼방되지 않게 하옵소서. 그런데 응답받기를 네가 있어줘야 주의 일이 되기 때문에 너 말고 다른 사람 구원하기 위해서 네가 더 살아야 돼, 이런 응답을 받았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힘들다고 죽여 달라고 하지 마시고 평소에 어떤 일이 있을 때 나의 의가 나타나지 않도록 기도하시고 반대로 하세요. “내가 이 일을 통해서 내가 죄인 됨을 더욱더 드러나게 하옵소서.” 그렇게 해야 돼요.

마지막으로 에베소서 2장에 봅시다. 사울과 다윗 요소가 다 나온다는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요. 신약에 오게 되면 에베소서 2장 11절에 보면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못 들어오지요. 그리스도 밖에 있었습니다. 못 들어옵니다.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여러분 이걸 놓치면 안 돼요. 천국에 갈 권한이 있는 게 아닙니다. 아예 없었습니다. 그다음에 13절에,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자, 그리스도를 다윗으로 대입시켜보세요. 이해 다 됩니다. 이스라엘은 사울이 블레셋에 져서 망했어요. 여러분 아시겠지만 사무엘상 마지막에 사울이 죽지요. 그럼 나라가 누구 손에 넘어간 거예요? 블레셋이 이긴 거예요. 이스라엘이 진 겁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에 예속 받는 그런 형편에 있어요. 누가 없다면? 다윗이 없다면.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 사울을 주께서 없애버립니다.

인간이 하는 일을 인간이 내 것이라고 없어지니까 그리스도가 나오시는 거예요. 성도가 뭐냐? 성도는 날마다 내가 하는 일이 실패로 끝났을 때 예수님께 그게 실패가 아니고 그게 너 치료하는 거야. 네 죄 사함이야, 그게. 네가 잘난 척 있으면 그건 죄 사함이 아니야. 네가 못난 자가 될 때 네가 용서받았다는 뜻이야. 네가 세리가 되고 창녀가 되고, 네가 강도가 될 때 그게 없던 사랑이 주님의 사랑이 감사가 되는 거야. 그게 치료고 용서고 그게 구원이거든요.

예수님이 다윗이라 봅시다. 주께서는 다윗을, 그러니까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에요. 이스라엘도 이방인이라 보면 돼요. 율법 있으면 뭐합니까? 못 지키는 건 마찬가지죠. 예수님께서 다윗으로 오신 거예요. 다윗이 품고 있던 이스라엘이 따로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까 역대상 11장에서 이스라엘은 누구와 언약을 맺었지요? 다윗 왕과 언약을 맺었지요.

똑같이 에베소서에서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오실 다윗이니까 예수님과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다윗으로 오셨으니까 인간이잖아요.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마지막 언약이 성공적으로 체결이 된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계약조건은 뭐로 보느냐 하면 유월절 피만 묻으면 내가 그냥 넘어가줄게.

내막은 아시죠. 그 피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흘린 저주받은 심판을 이미 받았다는 표시로서의 피기 때문에 심판을 한 번 받은 것은 다시 심판 때리지 않기 때문에 넘어간다. 상세히 하면 그렇지만 어쨌든 간단하게 되면 예수님의 피만 보고 그냥 하나님께서 문제 삼지 않아요. 넘어가요.

그 피가 다윗으로 왔다면 그 피를 피 되게 증거 하는 사람이 새로운 이스라엘이 주님이 나서서 모집을 해요. 주님이 나선다는 것을 주님의 영, 성령을 보내서 자기 사람 모집에 나섭니다. 그 모집의 대상이 어떤 사람이냐? 약속 밖의 사람이고 시온 성에 못 들어가는 사람이고 천국에 못 가는 사람이고 오직 자기 생각밖에 모르는 그런 사람이죠.

그런 사람인데 주께서 성령이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오게 되면 그 성도가 뭘 아느냐 하며 나는 약속 밖의 사람이고 천국 못 가고 죽어 마땅하고 이걸 알게 돼요. 내가 나한테 필요한 존재가 아니고 주님에게 필요한 존재로 인생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먹든지 마시든지 사나 죽으나 이게 누구의 것이냐 하면 주의 것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성도의 남은 삶은 뭐냐 하면 이제는 두 가지를 보여주면 돼요. 하나는 사울 요소, 가룟 유다 요소입니다. 사울 요소를 보여주시면 돼요. 참 쉽지요. 사울 요소 너무 쉬워요. 내가 고생한 것 내 거란 것. 사울 요소 보여주시고 경과란 거예요, 경과. 그다음에 피를 거기다가 만나게 해주는 거예요.

피를 만나게 해주면 결과적으로 뭐가 됩니까? 전에는 내 세계란 게 따로 있었는데 이제는 피 안에 예수님 안이라는 새로운 공간 안에 예수님의피를 증거 하기 위해서 이미 이쪽에 들어와 버렸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미리 예언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라. 그런 이야기했지요. 이미 죽은 잔데 살게 된 거예요. 따라서 살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날마다 죽을 이유를 매일 삶 속에서 내가 죽어 마땅함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울의 남의 이야기 아니고 우리 이야기였고 역시 가룟 유다도 우리 자신이었습니다. 잘난 체하면서 남들과 뒤떨어지지 않고 지기 싫어하는 이 모습을 십자가 앞에서 새삼 발견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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