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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0 14:19:24 조회 : 240         
서울의존강의20180608b 베드로전서1장 13-15절(필연)-이 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IP:122.43.178.64)

서울의존강의20180608b 베드로전서1장 13-15절(필연)-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한 것이 조금 어려워하는 표정이라서 쉽게 가겠습니다. 뭐냐 하면 지금 필연이라는 말은 반드시 그런 결과가 나오도록 내가 원인을 단단하게 집어넣었다는 뜻이에요. 거룩이라는 결과를 낳기 위해서 거룩에 필요한 재료는 다 집어넣었다는 이 말입니다. 근데 제가 하는 말이 뭡니까? 몇 가지를 집어넣었는데? 지금 이걸 묻는 거예요.

 

하나님이 거룩하라고 하니까 거룩하고 싶어요. 거룩하고 싶은데, 니가 아는 몇 가지를 집어넣었더니만 거룩이 됐느냐를 한번 따져보자는 겁니다. 니가 세상을 다 알아요? 기껏 지가 아는 것은 몇 가지가 안 되는데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기도하기, 헌금하기 이거 해가지고, 경상도 말로 쑤시뭉티 라고 하는데, 표준말로 번역하면 서로 안 맞는 것을 한데 모으다. 서로 맞지 않는 것을, 사맛디 아니할세를 끌어 모으는 것. 그걸 간단하게 쑤시뭉티. 그냥 쑤셔서 뭉친다는 거예요.

 

억지로 해놓고, 이건 거룩하라고 했으니까, 거룩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한테 거룩한 자로 봐달라는 거예요. 주님께서 “니 몇 가지 아는데?” “뭐 헌금하고 십일조하면 거룩 아닙니까?” “누구 마음대로?” 그게 반드시 원인을 집어넣었으니까 이런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가지고 제가 첫 번째 시간에 그걸 뭐라고 했느냐 하면 필연이라고 했죠. 필연.

 

이 필연이 뭐냐, 미리 이야기할게요. 필연이 뭐냐 죄입니다. 필연=죄, 반드시 내 뜻대로 된다는 것이 죄예요. 그게 사욕이라는 겁니다. 사욕. 거룩이라고 이야기하니까, 거룩을 사람들이 고상함, 죄가 없음, 이런 걸로 본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거룩하기 위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죄에 해당되지 않는 것, 굉장히 경건해 보이는 것, 이런 몇 가지를 뽑는 거예요.

 

20대 뽑는 것이 다르고 30대 뽑는 것이 다르고 50대에 뽑는 것이 달라요. 어쨌든 간에 거룩은 죄 없음이니까 자기기 행한 가운데서 여러 가지가 있지만, 죄 없이 행한 것, 헌금해도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그런 것 있잖아요. 그런 것을 뽑아서 이걸 꽃다발 만들어서 거룩이라고 억지를 부리면서 그렇게 쳐달라는 거예요. 쳐달라고.

 

그런데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도는 죄 짓지 않습니다.”라고 합니다. 요런 수는 몰랐지? 요런 수는 몰랐죠? 서울대학교에서 수능시험으로 모집을 하는데, 서울대학교에 가려고 노력을 굉장히 했어요. 무지하게 노력했어요. 서울대학교 입시요강이 나왔어요. 딱 보니까, 서울대학을 아무 공부하지 않고 값없이 들어간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 합격시키겠다는 그런 입시요강이 나와 버렸어요. 그러면 이거는 생뚱맞는 거예요. 이거는. 이거는 내 아이디어에서 절대로 나올 수 없는 거예요.

 

서울대학교는 굉장히 좋은 대학이다. 좋은 대학은 좋은 사람을 뽑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좋은 학생이 되어야 한다. 좋은 학생이 어떤 것이냐, 필연적으로 좋은 학생은 언어영역 몇 점이고, 토익 몇 점이고, 수학은 몇 점이고... 이런 것들이 꽉 들어있었던 거예요. 이거는 본인이 알고 있던, 서울대학을 예상해서 알고 있던, 지가 만들어낸 입시요강입니다. 서울대학에서 뭘 이야기했느냐를 모르고, 아마 이쯤하면 하늘나라는 거룩하기 때문에, 거룩한 곳에 가려면 여기서부터 죄를 줄여서, 죄를 적게 진 사람이 들어가기에 유리하다. 이렇게 지 맘대로, 지 멋대로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입시요강이 터졌는데, 성도는 죄를 짓고 싶어도 죄를 지을 수 없다. 이게 입시요강이 됐습니다. 그러면 이 지상에서, 인간의 내부적으로 인간이 나쁜 짓하면 그게 죄가 된다고 알고 있는 사람한테는 그 입시요강과 맞아요? 안 맞아요? 안 맞죠. 왜냐하면 요한일서 5장 18절을 봅시다. 이거 보면 뭐 구원파 생각난다고 할 수도 있어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아무도 모르는데요? 여기서 안다고 했는데 우리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이어서보면,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이래 되어 있죠. 이 성경구절 매직으로 없애버릴까요? 가위가지고 오려버릴까요? 왜 공평하게, 정당하게 경쟁 안 시킵니까? 누가누가 착하나, 하나님께서 왜 경쟁 안 붙여요? 교회는 잘도 시키는데. 누가누가 십일조 제대로 하나. 누가누가 착한일 제대로 하는가 보자. 누가누가 경건하게 사는가 보자. 교회는 경쟁마당이에요. 게으르지 말고 주를 섬기세! 이거 하잖아요.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고! 이거 교회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아닙니까? 죽도록 충성하라! 이런 거요.

 

그런데 요한일서 5장 18절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어떻게 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한다고 되어 있죠. 범죄치 아니하죠. 본인이 착해서? 훌륭해서 범죄치 아니해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지키죠. 그러면 하나님의 완벽한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이건 인간은 솜씨가 아니고 하나님 본인 솜씨죠.

 

그러면 인간은 자기의 자체적으로 형성하는 필연을, 그 숱한 노고와 노력을 통해서 형성된 그 필연, 내가 생각하는 원인을 집어넣으면 반드시 필연적으로 나오는 그 결과, 그 관계를 어떻게 하는가? 그걸 포기해야 되겠어요? 포기 안 해야 되겠어요? 그걸 포기를 해야죠.

 

오늘 제가 아무리 쉽게 하려고 해도 도저히 이거는 너무 어려워서 쉽게 할 수가 없어요. 듣든지, 믿든지 저는 모르겠어요. 우리 인간은 내가 누군지 알아야 돼요. 겉으로 보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구성한다.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게 말이 안 돼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은요, 내가 몰라요. 내가 안 정해요. 누가 정하느냐 하면, 주위에 약 올리는 패들이 있어요. 주위에서.

 

예를 들어서 내가 열심히 돈을 모아서 13평짜리 서민아파트를 장만해가지고,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하면서 만족하고 싶었더랬는데, 여기는 70평짜리, 여기는 펜트하우스고. 이거는 뭐 물건 사는 것도 구멍가게에서 그때그때 필요한 빵이나 사고 끼니를 때우는데, 마트에 한번 가니까 무슨 물건들이 그렇게 많은지.

 

이것들을 보게 되면서 그 다음부터 뭐가 생기느냐 하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주변에서 입력된, 들어온 삶의 정보가 나로 하여금 들썩이게 만드는 겁니다. 내 인생에 대해서 불만과, 그리고 인생에 대해서 좌절감을 가져다주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촌이 있는데, 초등학교도 안 나오고 전부 다 농사일을 했다. 박씨 집도 아들을 바로 밭에 투입하고, 그 딸도 시집이나 가라 해서 배울 필요 없다고 바로 도시에 식모로 팔리고. 식모라는 용어를 오랜만에 씁니다. 식모로 팔아먹고. 노예로 판 거죠. 하여튼 그 동네는 어느 누구도 중학교에 진학시킨 사람이 아무도 없다. 마을 전체가 얼마나 행복한지. 그게 그들이 아는 필연이에요. 아들딸 놓고 그저 초등학교에서 배운 셈만 하게 되면 사는데 전혀 지장 없다. 이게 그 동네의 필연이에요. 필연. 그 필연은 그들에게 행복감을 줍니다. 행복감을.

 

그런데 그 동네에 대학물 먹은, 그것도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시집이나 가지, 대학까지 나온 여자가 들어오게 되면 그 마을사람들 전부에게 뭘 주느냐 하면 목욕 값이 아니라 모욕감을 줍니다. 모욕감.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쪽에서 온 새로운 요인, 새로운 어떤 사건이 하나 오니까, 그 사건에 비추어서 전부 다 모욕감을 느끼는 겁니다. 뭐지? 바깥소식을 왜 그렇게 알지? 남의 나라에도 안 가봤는데 영어를 하다니? 뭐 저럴 수가 있어? 이런 사례를 여러분 염두 해두세요.

 

두 번째 사례, 이 마을, 똑같은 마을이에요. 평화롭게 서로 형님! 아우! 해가면서, 농심라면CF처럼 아우먼저 형님먼저 했는데, 그 마을에 외부에서 들어온 어떤 남자가 그 마을의 처자를 죽여서, 그 다음부터는 국립과학수사에서 오고 경찰이 올 때에, 역시 그 마을은 뭐가 되느냐 하면 범죄의 마을이 되면서 모욕감을 준 거예요. 목욕탕이 없어도 자꾸 모욕감을 줘요. 외부의 사건이 터지지 않았으면 나름, 나름 불행하지 않고 행복했어요. 행복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관계없어요. 자기들끼리 상부상조하면서, 평균수명이 57세에요. 그냥 환갑이 안 돼서 죽어도 그게 평균수명이라고 생각하지, 링거 꽂고 70, 80세 하는 것은 그 동네에 없어요. 그냥 늙었다 싶으면 보내버려요. 아이고, 할아버지 잘 가세요. 50세가 안 돼서 죽어도 그게 천운을 다했다고 여겼어요. 외부에서 90세 노인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어때요? 정보의 부재잖아요. 정보가 모자랐던 거예요. 아는 게 탈이라. 그놈의 인터넷이 문제라. 아는 게 탈이고 인터넷이 문제고. 그냥 조용하게 살 것을 괜히 서울에 갔어요.

 

서울에 가서 비교해보니까 자기 동네하고는 차이가 나는 거예요. 특별히 아가씨들에게 또 모욕감을 준 게, 그 마을에 사는 총각들은 그 중에 누구 집 딸이 세계에서 제일 예쁜 줄 알고 있었어요. 세계에서. 만약에 이 동네에 교회가 있다면, 교회는 특히 누가 예쁘냐 하면 오르간 치는 반주자 아가씨가 제일 예뻐요. 오르간 치는 반주 아가씨는 겨울 때마다 또 치마를 입네. 다 주시하니까. 설교 안 듣거든요. 반주자 보고 있다고요. 그런데 그 중에 총각 한 명이 강남에 갔다 왔는데, 그 아가씨는 아가씨도 아니에요. 아줌마에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 짓지 않는다는 것을, 이걸 안 적이 없다면 경쟁부터 해요. 누가누가 거룩하냐, 누가누가 경건하냐, 이게 단순히 누가 거룩하냐, 경건하냐의 문제가 아니고, 인간은 경건한 만큼 이 세상에서 복을 따내고, 경건하지 않으면 삼대에 걸쳐서 저주를 받는다는 쪽으로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어쨌든 간에 예수 믿었으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거예요. 영광 돌리는데 어떻게 하느냐, 거룩하라고 했으니까 거룩한 쪽으로 영광 돌린다는 거예요.

 

거룩이 뭐냐, 경건에 경건을, 경건에 경건을... 계속해서 추가적인 경건을 더 보태면, 보태면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 보태면, 내가 이 땅에서 오래 사는데 유리한 조건을 주께서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왜? 기본은 아까 이야기한대로 살고보자니까. 살고보자.

 

자, 그러면 핵심이 되는, 요한일서 하기 전에, 베드로전서 거룩이 뭐냐, 맨 이 내용이에요. 베드로사도나 요한사도나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세상은 이처럼 자꾸 필연을 언급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생각하는 세상이라는 것은 ‘갱신된 픽션’입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세계라는 것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업그레이드되는, 갱신되는 픽션.

 

픽션이 뭡니까? 허구 또는 소설이죠. 20대 알고 있는 세상, 30대에 알고 있는 세상이 달라요. 40대에 알고 있는 세상이 다릅니다. 그러면 20대에 알고 있는 세상과 30대에 알고 있는 세상과의 차이는 뭐냐, 새로운 정보를, 새로운 인생체험을 해서 업그레이드 된, 갱신된 픽션이죠. 뭐가? 세계관이. 30대에 이렇게 한 것이 40대에 보면 웃기죠. 50대에 보면 이 40대가 웃기는 거예요.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각자 나름대로 그때그때마다 요렇게 투입하면 반드시 이런 결과가 나오겠지, 하는 것을 계속해서 꾸준히 노리는 겁니다. 우리는 복음도 알고 예수님 말씀대로 사는데, 왜 집안이 이 모양 이 꼴이냐 돈도 없이. 이거 뭐예요? 그러니까 계산된, 갱신된 픽션을 걷어내라 이 말이죠. 그 필연을 걷어내면 남는 것은 뭐만 남느냐 하면 내 몸뚱아리만 남죠. 내 몸뚱아리가 외치고 있는 거예요. 왜 이 세상은 나를 내 뜻대로 안 살려내느냐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결국 뭐냐 하면은, 오늘 본문에서 사욕, 개인적인 욕심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거룩이 됐든, 예수님의 복음이 됐든, 반드시 어떤 필연적인 결과가 나올 때만 내가 믿을 용의가 되어 있는데, 그게 뭐냐 지금의 나를 풍족하게, 여유 있게, 행복이라는 말을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행복이라는 것은 주변의 새로운 정보가 나오면 이미 행복도 바뀌어요.

 

이 동네가 전부 다 농사짓는 동네 같으면 농사지으면서 행복했어요. 근데 그 동네가 골프장으로 졸지에 변해버리면, 서울에서 내려와 골프치지 않으면 이 마을사람들은 행복 안 한 게 돼버려요. 괜히 골프 봤어. 안 봤으면 괜찮은데. 그러니까 남의 집에 갈 때 주의하세요. 남의 집에 갈 때 신형냉장고나 새로운 텔레비전이나 화장실 바닥이 대리석으로 깔려버리면 행복으로 왔다가 불행해져서 집에 돌아갑니다.

 

갱신된 세계가 돼요. 나름 행복했는데, 돌아갈 때는 갱신되어서, 업그레이드되어서 ‘나 같은 인간은 지금까지 뭐 했노?’ 이렇게 됩니다. 자기가 자기한테 자책을 하고, 괜히 집에 있는 남편한테 욕하고. “이 등신 같은 인간아! 요새 세상에 이렇게 사는 데가 어딨노? 나니까 이렇게 살지.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갈라서자고 했을 거야.”라고 하죠.

 

인터넷에 김치녀(사치와 허세, 경제적인 지원은 가족이나 남자친구에게 기대는 된장녀 플러스 개념 없는 행동들을 일삼는 여자를 비유)의 어떤 글이 나왔는데, 남편이 연봉 팔천 번다고 갈라서자가 합니다. 자기욕망에 충족이 안 돼서. 연봉 팔천인데 이래가지고 숨 막혀서 못 살겠다는 거예요. 얼마 전에 세계적인 유명 디자이너가 자살했죠. 밥 못 먹어서 자살했습니까? 아니에요. 갱신된 세상이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자살한 거예요.

 

교회에 와서 기도하는 내용이 뭡니까? 갱신된 세상에, 업그레이드된 세상에 내가 거기에 같은 균형을 맞춰달라고 지금 기도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기도에 균형 맞춰줘도 소용이 없어요. 다음에 또 균형 맞춰달라고 해요. 또 새롭게 갱신했답니다. 그냥 살 때는 앞산만 보였는데, 앞산에 가니까 앞산에 가려졌던 뒷산까지 다 보이네. 그 욕심을 누가 말립니까? 말릴 수가 없어요. 그게 인간에게는 필연이에요. 진짜 내가 거룩하다면 세상에 내가 기대한 것도 들어줘야 이게 거룩 값을 한다는 겁니다. 인간 주변에 포진되어 있는 악마의 유혹이 만만치 않아요.

 

그러면 베드로전서의 거룩을 하기 전에 요한일서 5장 18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아까 봤지만.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한 줄을 알죠. 사람이 범죄 하는 이유가, 범죄 하는 것이 좋아서 범죄 합니까? 아니면 내가 사는데 지장이 있어서입니까? 우리가 죄를 싫어하는 이유가 죄가 싫어서 죄를 싫어합니까? 아니면 살고 싶은 나에게 지장이 될까 싶어서 싫어합니까? 어느 쪽이에요?

 

왜 우리는 양심을 속이고 보기 싫은 권력자 앞에 고개를 왜 숙이고 합니까? 죄짓는 것이 취미라고 그럽니까? 아부하는 취미가 있어요? 아부하는 게 취미라서 자꾸 아부만 해요? 화분 던지고, 가위 던지고, 서류봉투 던지는데, 거기에 대해서 예! 예! 하고 굴복하는 것이, 평소에 “누가 좀 나한테 화분 안 던지나?”라고 기대했는데, 던지니까 감사해서 하는 거예요?

 

이명희 그 여자가 던질 때, 왜 고개 숙입니까? 이유가 뭡니까? 집에 있는 울타리에서 새끼가 뭘 벌려요? 밥 달라고 입 벌리잖아요. 나하나 참으면 되지. 나하나 참으면 걔들 입에 밥 들어간다니까요. 내 성질대로 더러워서 이 회사 그만둔다고 이래 나오면 걔들은 무슨 죄가 있어요? 애 다섯이나 낳았는데. 까짓것 애 하나면 맞벌이해서 살긴 사는데. 애가 다섯이면 여자는 집에서 전담자로 키워야 돼요. 남자 하나 벌어서 애 다섯을 어떻게 키우는데요?

 

회사를 걷어치우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 이 말이죠. 나의 행복 때문에 참잖아요. 나의 행복의 구성요소가 뭡니까? 행복만 찾지 말고, 어떤 때 행복하던가요? 오늘 배운 대로 합시다. 돈이 있다고 행복해요? 아니에요. 이건희가 행복해요? 건강하면 행복해요? 자식 잘 되면 행복해요? 아닙니다.

 

행복은 뭐냐, 내 필연대로, 내 뜻대로 될 때 행복해요. 세상이 내 뜻대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할 때 행복해요. ‘아, 나도 세상에 대해서 알긴 아네.’ 자기의 존재가 긍정되고, 자기의 예상이 맞아떨어질 때 행복해요. 여러분들도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나 빌어먹을 거야.’ 예상하세요. 딱 빌어먹죠. 문제는 나 빌어먹을 거라는 기대를 안 한다는 것이 문제죠.

 

사람이 왜 죄를 지었습니까? 죄짓는 것이 취미라서가 아닙니다. 마귀가 사람들에게 죽음을 무서워하게, “니 그러면 죽는다.” 죽음을 담보로 해서 볼모를 잡아놨어요. 인간의 목숨을 악마가 딱 거머쥐고 있는 거예요. 착하면 니가 잘 될 것이고, 니가 악하면 니는 졸지에 망할 것이라는 선악체계를 가지고 인간의 목숨을, 영혼을 갖고 놀고 있는 거예요. 마귀가.

 

제가 방금 마귀라고 했습니까? 그럼 말을 바꾸겠습니다. 목사가. 목사가 그 짓 한다니까요. 목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니 삼대 째 망한다고, 저주받는다고 이렇게 한다니까요. 왜냐하면 그게 인간에게 먹히니까. 그럼 목사님 어떻게 하면 돼요? 십일조를 해야 된다고. 주일성수해야 되고. 교회 충성해야 되고. 목사를 섬겨야 되고. 선교헌금 내야 되고. 일찍 와서 기도해야 되고. 성경 읽어야 되고. 교회이바지해서 하늘나라 확장하는데 보탬이 되어야 되고.

 

그러면 사람들은 그렇게 하죠. 왜 합니까? 뭐 주님 좋아서 합니까? 악마가 내 영혼을 볼모로 잡았잖아요. 분명히 성경에서는 우리가 마귀에게 볼모잡힌 것에서 끊어졌다 이 말이죠. 집에 도둑이 왔는데, 도둑이 와서 그냥 우리를 데려가지 않아요. 우리를 데려가면서 누가 묶인 것을 봅니까? 그동안 집주인이 행세하던 그 집주인이 예수님에 의해서 꽁꽁 묶였다는 것을 보게 해요.

 

그 집주인이 누구였던가요? 왜? 뭣 때문에 꼼짝 못했습니까? 아까 누구 때문에 우리 목숨이 꼼짝달싹하지 못했습니까? 우리 집주인이 누구예요? 마귀잖아요. 마귀를 예수님께서 묶어놓고, 그 다음에 마음 놓고 유유자적하면서 우리를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는 거예요. 그게 예수님이야기 아닙니까? 예수이야기. 그게 예수님이야기라고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좋기는 좋은데, 저 개가 물면 어떡해요? 아니, 주인을 묶어놨는데 개가 우리를 물을 리가 있겠어요?

 

그게 요한일서 5장 18절에서 뭡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보디가드, 지키시는 분이에요. 북한 경호원들 봤죠? 옷도 촌스럽게 입고. 그 보디가드가 우리 옆에 있다니까요. 보디가드, 수호천사들이 있다 이 말이죠. 지키신다 이 말이죠. 보디가드 알죠? 웬다이아!(And I) 보디가드영화에 나오는 노래죠. 아니, 믿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성경 뭐 봤습니까?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들이 지금 꼼짝 못하고 있는 것은 누구의 볼모가 된 것이다? 악마의 인질이 된 거예요.

 

그 인질이 된 게 뭐냐 하면, 죄지으면 우리 집안 망한다는 거예요. 나 망하면 우리 집안 다 망한다는 거예요. 그게 인질이라니까요. 그게. 그 사고방식이 인질이라니까요. 지금 죄만 지어도 잘 살기만하네. 저쪽 카알기 대한항공. 화분만 던져도 잘 사는데. 가위 던지고 화분 던져도 잘 사는데. 집사님 던져봤어요? 안 던졌는데 잘 삽니까? 교회가도 인질. 교회 목사가 마귀고. 모든 구석이 전부 다 마귀천지라.

 

왜?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어떤 공포에 시달리면서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죄가 싫어서 안 짓는다니까요. 죄의 그 후속조치가 겁난다니까요. 후속조치가. 남이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용납이 안 돼요. “내가 행동 잘못해서 내 집구석 망하면 나 어떡해? 절망적이고 자살할거야.”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자, 내 행동 잘못하면, 원인이죠. 원인은 필연이니까 행동 잘못하면 폭삭 망한다는 결과가 나오죠. 이게 필연이라니까요. 필연.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얼마나 안다고. 자꾸 필연을 강조해요. 필연을. 나 이 정도는 안다고.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압니까? 세상에 대해서 아는 분은 주님밖에 없어요. 우리는 몰라요.

 

살아도 기껏 백 살이고 사는 환경도, 세상에 대해서도 몰라요. 계속해서 변하고 있는 이 세상의 우연적인 사실들에 대해서, 그 우연적인 사실이 하늘나라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아무도 몰라요. 저 모기는 왜 날아다니는지. 모기와 십자가를 논하라. 여러분, 모기 나는 것과 십자가를 논할 수 있어요? 그거 다 알아야 구원받습니까? 모기가 나는 궤적과 십자가 지심과 연관시켜서 알아야 구원받습니까?

 

주님이 뭘 지키는가를 보세요. 우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오늘 강의에서 제일 결정적인 거예요. 주님이 지키시는 것은 죄사함 조치입니다. 주님의 자기조치에요.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다 이루시고, 그 다 이루심을 지켜요. 이게 다 이루신 필연이에요. 그 필연에 내가 개뿔도 모르면서 내 필연으로 그 필연에 개입되는 것을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사욕이라고 해요. 너의 개인적인 사사로움을 거룩 앞에 가로막지 말라는 거예요. 이순신 장군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 죽음을 적들에게 알리지 말라.

 

성령은 바빠요. 지금 바쁩니다. 뭐냐 하면 십자가에 다 이루심을, 인간의 그 사적인 필연, 내가 나쁜 짓하면 집안이 박살나고 교회가 박살날 것이라는, 그게 주님 좋아라고 한 게 아니에요. 내가 나를 지켜야 되는데, 그 지킨 것이 무효가 될까봐 겁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예요? 나는 지킬만한 가치가 있다? 없다? 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누가? 내가 나에게. 무슨 근거로 자기가 가치가 있단 말입니까? 무슨 근거로?

 

근거가 있어요? 없어요? 없죠. 분명히 배후에 악마가 작용한 거예요. “딴 사람은 다 망해도 니는 잘 될 거야.” 분명히 악마가 그렇게 한 거예요. “당신 복 받을 거예요. 당신 구원받을 거예요.” 교회 부흥사들이 교회에서 한 게 그거에요. 긍정적 사고방식을 가져라. 긍정적 마인드를 가져라. 계속해서 어디에 관심 두게 합니까? 우리 자신에게 관심 두게 하죠. 성경은 어디에 관심 있습니까? 예수님이야기. 왜? 어느 나라에 가기 때문에? 내 나라 갑니까? 예수님 나라 가죠.

 

주께서는 죄를 짓지 않게 하십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너는 이미 죽었다. 너의 필연 그것 때문에 너는 이미 죽은 자다. 죽은 자를 사용하시는 이유는, 죽은 자에 대해서 미련이 있어서가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님의 행하심, 죄사함의 그 하신 일을 주께서는 죽을 자를 통해서 증거 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이 어디에 초점이 있고 어디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죽어야 마땅한 우리를 갖고 놉니다. 우리를 사용하셔요.

 

누가 달려듭니까? 바로 요한일서 5장 18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죠. 범죄가 뭐냐 하면 죄사함에 대해서 선악과로, 생명나무에 대해서 선악과 원리를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죄에요. 여러분 한번 물어봅시다. 간음이 죄입니까? 죄 아닙니까? 간음이 죄죠. 간음 자체가 죄가 아니고, 간음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게 무슨 죄에 해당이 되냐면 간음죄에 해당이 돼요. 거짓말 하는 것이 죄입니까? 죄 아닙니까? 죄죠. 근데 거짓말을 사랑 안 하게 되면 거짓말 하는 죄가 돼요.

 

왜냐하면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이 모든 계명이 있더라도, 무엇이 다 이루었다? 무엇이 다 이룬 거예요? 예수님이 뭘 다 이루었습니까? 아까 죄사함이라고 했죠. 그걸 두자로 하면 사랑이죠. 사랑. 모든 율법은 사랑이 다 이루죠. 로마서 13장 8절에 나오는 말씀이죠. 사랑하면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잖아요.

 

아가서에 보면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에게 어떻게 합니까? 율법을 들이댑니까? 사랑합니까? 율법 지키라고 하면서 빚쟁이처럼 “율법 얼마나 지켰노? 얼마나 거룩한가 보자!” 이래 안 하죠. 사랑해달라고 했습니까? 다윗언약에 있는 언약자가 일방적으로 그 시커먼 술람미 여인, 애굽 여인을 계속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면서 끝까지 사랑하죠. 싫어서 문 닫았는데 문틈에 손이 끼일 정도로 사랑한다니까요. “내가 싫더라도 내 손에 있는 판콜500은 먹어라. 약은 먹어야지. 감기 들었으니까. 아침에 보니까 니가 기침하고 감기 걸렸는데, 감기약 판콜500은 먹어야지.” 그거하고 떠나요. 문에 손이 끼었어도 판콜500은 기어이 남겨주고 가요.

 

구원은 어떻게 됩니까? 내가 율법 지켜서 구원받습니까? 뭐로 구원받죠? 우리는 애초부터 구원될 자격이 없어요. 왜냐하면 기껏 생각하는 것이 나 살고 싶다와 나 살기 위해서 필연을 조작해요. 필연을. 근데 조작하는 정보가 제한되어 있어요. 몇 가지 밖에 안 돼요. 이 세상 모든 것을 모르잖아요. 태어나서 우리가 아는 것이 뭐가 있다고? 그것가지고 나름대로 이 정도하면 하나님께서 받아주겠지, 이 정도 순종했으니까 착하다고 하겠지, 지 맘대로 일방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인간 쪽에서 하나님 쪽으로 구원받고자 시도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뭡니까? 그 모든 인간의 작업을 무효화시키는 거예요. 참,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교회를 생각하면, 교회가 아주 지옥 보내는 여행사 같아요. “유럽여행 2,999,000원” 그런 것 있잖아요. “이제 마감시간이 20분 남았습니다.” 뭐 이런 것 있잖아요. 인간이 행해서 구원받는 법이 없어요. 주님의 사랑을 믿어서, 십자가 피를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그 모든 행함에는 뭐가 들어있다? 나 살고 싶다가 들어있으니까, 이거는 거룩을 가로막는 사욕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욕. 사적인 욕심이라니까요.

 

아까 소돔과 고모라이야기 했죠. 소돔과 고모라는 이미 결정된 거예요. 이미 멸망의 심판을 받기로 결정된 겁니다. 그것을 아브라함이 빽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언약의 시행자이신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천사가 롯을 빼내는 겁니다. 빼낼 때 롯은 이미 죽은 자예요? 산 자예요? 이미 죽은 자로 빼내는 거예요. 같이 멸망당해야 빼내는 거예요.

 

오늘날 성도가 구원받게 되면, 성도가 구원받았으면, 구원받을만해서 구원된 거예요? 구원될 수 없는 자를 구원한 겁니까? 이미 죽은 자를 구원한 거죠. 이미 죽은 자를 구원했으면 그 사람은 계속 죽어있어야 돼요. 우리는 죽어있고, 우리의 내부성인 필연은 죽어있고, 우리의 외재성, 성령, 성령에 의해서 예수그리스도가 죽은 우리 속에서 계속해서 살아나야 된다 이 말이죠.

 

우리 죽을 육체에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남은, 나는 날마다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전달되게 함이라, 나타나게 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 10-11절에 나오잖아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이게 아니라, 성도는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죄를 짓고 싶고, 간음죄, 살인죄, 뭘 하고 싶어도, 지키시는 분의 그 권한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사람 찔러 죽여도 죄가 아닙니까? 라고 이렇게 또 묻고 싶죠. 그 질문은 아까 강의를 놓쳐서 그래요. 뭐냐 하면 죄가 뭐라고 하던가요? 인간 쪽에서 죄는 내 필연성에 위반되는 것이 죄지만, 이미 예수님 쪽에서 죄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를 훼손하고, 의심하고, 그걸 사랑하지 않고, 거기에 대해서 고개를 돌리는 이게 죄예요. 성도라는 것은 주님이 지키시매, 성도가 완벽을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성도 안에 있는 예수님의 죄사함이, 니가 어떤 행동을 해도 죄사함이 취소되거나 변경되지 아니함을 지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는 겁니다. 예수님 덕분에 나 이만큼 거룩하다, 지 잘났다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거는 기존의 교회에서나 그따위 소리를 하라 이 말이죠. 교인들끼리 시합붙이기 위해서. “나는 십일조 할 때 집에서 다리미질 합니다.” “아이고, 나는 그냥 냈는데. 믿음도 없이.” 그 다음부터 다리미질 하다가 다 태워라. “아이고, 어떤 사람은 주일예배에 10시 30분에 와서 박수치며 찬양을 하던데.”

 

우리교회를 보면 처음 나온 사람은 10시 30분까지 와요. 그 다음 주일에 10시 50분에 옵니다. 그 다음 주일에 11시 넘어서 와요. 왜? 목사가 막살라고 그랬거든요. 처음부터 막 안 살고 막사는 티를 안 냈지. 진짜 가면 갈수록 점차 막살기 시작해요. 왜냐하면 막살아도 벌 안 받는다고 하니까. 이미 주님이 저주를 다 담당했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살아도 저주가 되는 법은 없다는 것을 알거든요. 저주가 되는 법이 없으니까 그 다음부터 막살아도 되는데, 문제는 본인이 죽었다는 사실을 지금 모르고 있는 게 문제에요.

 

이래 살아도 죽은 놈이고 저래 살아도 죽은 놈이라는 것을 몰라요. 아주 신났어. 이제 막살기에 일가견을 가졌어요. 일가견. 어떻게 하면 아주 극단적으로 막살 수 있는가. 본인이 죽은 존재에요. 착해도 죄고, 죄지어도 죄가 돼요. 우리의 관심사는 내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사느냐가 아니라, 나에게 도대체 뭐가 덮쳤느냐 하는 겁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죄사함을 주께서 지키십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세간이 얼마나 깔끔하고 윤기 나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 세간을 데려가는 것은, 저 주인을 묶어놨다는 그 사실 때문에 데려가거든요.

 

그러면 주인이 관심 두는, 마귀가 묶였다는 거기에 관심을 둬야지, “저 사투리 어때요?” “저 냉장고 깨끗하죠?” 자꾸 자기가 깨끗한 것, 그걸 근거로 해서 구원은 십자가지만 이제 내가 복 받는 것은 내 깨끗함에 달렸다. 이런 식으로 이중플레이하면 안 됩니다. 그거는 자기가 지금 살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죽은 사람이라면 죽은 티를 내야 돼요. 뭘 해도 나밖에 모른다는 사실을, 뭘 해도 나 잘난 맛에 살아간다는 사실을, 이것 때문에 주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생각해야 됩니다.

 

자, 다시 한 번 정리하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한다는 말은, 주께서 이미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시고, 주님께서 죄사함을 우리에게 덮어씌웠으니까, 주님의 관심사가 우리가 얼마나 완벽하냐를 보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 완벽함이라는 것이 내가 아는 요소들은 완벽해보이죠. 하지만 생각하지 못한 다른 구성요소가 들어와 버리면, 다른 요건이 들어와 버리면 나의 완벽함이 순식간에 깨져버립니다. 순식간에 깨져요.

 

20년, 30년 동안 천사처럼, 아엠 천사, I am angel, “권사님, 어떻게 그렇게 천사의 형상을 띱니까?”라고 이렇게 했는데, 어느 날 교회에서 누가 건드리니까, 졸지에 천사가 날라 갔어요. 악녀로 바뀌어버렸어요. 으악! 옆에 있는 화분 던져버리고. 나름대로 필연을 갖고 있는데, 그 필연이 그동안 자기한테 족쇄가 된 겁니다.

 

지금 여러분의 족쇄를 여러분이 채운 거예요. 옛날 마귀 습성이 있기 때문에. 요렇게 채우면 내가 잘 먹고 잘 살 것이라는 것. 이 땅에서 오래오래 살 것이라는 것. 자꾸 그런 본성 때문에, 본인이 본인을 자꾸 심사하고, 측정하고, 채찍질하고, 벌칙세우고, 자기가 자기한테 율법주고.

 

주님은 정작 죄사함의 십자가에 가있는데, 우리의 관심사는 자기가 얼마나 철저하냐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더란 말이죠. 그래가지고 누구하고 비교합니까? 옆에 있는 집사하고 누가 더 철저 한가 시합하려고 교회에 가고. 교회 가는 목적이 뭡니까?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를 계산하고 숫자세려고 가잖아요. 교인 몇 명 되지도 않는데.

 

자, 다시 베드로전서로 돌아가서 보고 마치겠습니다. 15절에 보면,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했는데, 이 부르심이 뭐냐, 관계입니다. 관계.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아는 데에 있어서의, 혼자서는 자기를 몰라요. 산에 올라가서 나 여기 있다고 소리친다고 누가 알아줍니까? 다람쥐나 놀라서 도망가지 아무도 안 알아주죠.

 

인간의 자신의 모습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알 수가 있어요. 타인. 그 타인 중에 누가 섞여있는가 하면, 바로 우리 주님이 섞여 있거든요. 모든 사람의 타인은 나의 비교대상이 얼추 될 수가 있어요. 하지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그 타인 속에 섞여서 내 눈앞에 등장하게 되면, 그 분 앞에서는 할 말을 잊었지만은~ 그 분 앞에서는 할 말이 없어요.

 

‘앞으로 내가 이렇게 적금 넣어서 아파트를 사야지’라고 하는데, 십자가 지고 피 흘리는 모습으로 오게 되면, 아파트 소리 한 내입을 쳐버려요. 아파트 사서 지옥가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아파트 사서 지옥가면. ‘돈 모아서 유럽여행 가야지’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오게 되면, 물론 유럽여행 가세요. 갈 때 십자가 알고 가세요. 유럽여행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고, 혹시 유럽여행 중에 물에 빠져 죽는다고 하더라도, 처음부터 죽은 자를 때가 되매 주께서 부르신 것이니까, 구애받지 말고, 겁내지 말고 유럽여행 다녀오셔야 돼요. 돈도 안 드리고 이런 이야기해서 미안합니다.

 

중요한 것은 유럽여행이냐, 아니냐, 죄냐, 아니냐, 사치냐가 문제가 아니고, 누굴 쳐다보면서 누구하고 비교하면서 살아가느냐 하는 겁니다. 그렇고 그런 인간들하고 비교하지 마세요. 제가 아까 안양강의하면서 했어요. 아담에서 아담으로. 인간들은 자꾸 아담하고 비교해요. 선악과 누가 따 먹었는지 생각도 안 하고, 생명나무 못 따먹은 것은 생각 안 하고. 같이 못 따먹은 주제에 같이 비교하고. 같이 선악과 따먹은 인간들하고 비교하고.

 

누가 더 착하냐, 누가 더 악하냐,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김부선하고 놀아났다느니, 있으면 사진 내놔 봐라, 둘 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차라리 저 같으면 이재명이 너 십자가를 아느냐? 뭐 이러겠어요. 그런 이야기를 해야죠. 니가 죄인인 것을 아느냐? 떨어져도 감사하다고 할 수 있느냐? 뭐, 그런 이야기를 해야 될 텐데, 김부선하고 잤느냐, 안 잤느냐, 사귀었느냐, 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요.

 

얼마나 공포입니까? 인간이 살기 위해서 착한 일 해야 된다는 악마가 준 이 무게가 쇳덩어리 같아요. 평생을 눌려가지고 어깨고 허리고 다 아파요. 평생이 짐이에요. 살기 위해서는 착해야 된다. 거룩해야 된다. 거룩을 원해서가 아니라 나 살기 위해서 거룩해야 되고, 나 지옥 안 가기 위해서 거룩해야 되고. 그게 바로 사욕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죄사함을 받은 자에게는 죄가 없다는 이 사실을 누가 방해하느냐, 세상에! 나 하나 목숨부지하려고 이런 짓거리를 하면서 지금도 살고 있잖아요.

 

베드로전서 1장 15절에, “오직 너희를 부르신”,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라고 했고, 그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거룩한 자처럼”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성령님이죠.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처럼 뭐하라? 거룩하라. 분리된 겁니다. 구약에서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따로 관리하는 거예요. 각자 개체를 분리시켜놓고 각자의 중심에 집중되게 만듭니다. 진짜 이거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냥 방치하는 것이 아니고, 분리시켜놓고 각자의 중심이 있어요. 중심으로 집중하게 되어있어요. 안 믿는 사람들의 중심이 뭐냐, 선악으로 집중해요. 착하면 나는 복 받는다는 것. 이쪽은 어디로 집중합니까? 생명이니까, 나 같은 못난 자, 죽은 자를 죄사함이 나를 살렸다는 쪽으로 집중하게 되어 있어요.

 

제가 집중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개인적인 사견으로 살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인간은 반드시 자기주관이 있더라도 주위에서 우르르 하면 다 따라가게 되어 있어요. 다 고개 숙이게 되어 있어요. 권력 앞에서 누구도 못 따라갑니다. 아무리 착하더라도 여기서 같이 합세해서 죄 지으면 양보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연약함이에요. 북한을 보세요. 거기에 바보 같은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똑똑해요. 하지만 김정은이한테 다 복종하죠. 김정은이가 훌륭해서 그렇습니까? 공부를 많이 해서 그렇습니까? 아니죠. 밥 먹고 살기 위해서 고개 숙이는 거예요.

 

그런데 이쪽 생명 쪽은 고개 숙이고 싶어도 고개 숙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워낙 본인이 개판이니까. 개판인데 뭐가 있다? 이 개판인 나에게 죄사함을 주셨잖아요. 이 죄사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더욱더 어떻게 몰아세웁니까? “니는 니 자체적으로 구원받을 수 없어. 니는 엉망진창이야.”라는 것을 더욱더 알게 되고. 선악이 중심인 이쪽은 자기들 각자 잘난 맛에 살아가고. 여기는 자기 의로. 여기는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감히 고개를 못 들고. 예수님이 오셔서 이쪽을 의인이라고 하고, 바리새인은 뭐로 만들었습니까? 천하의 죄인으로 이미 판결을 내렸습니다.

 

얼마나 한국교회가 위험한 곳인 줄을 이제 아시겠죠? 계속 선악으로, 우리의 목숨을 담보로 잡고, “당신이 교회에 충성 안 하면 삼대 째 저주받고 빌어먹는다. 그런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보여준다고 간증집회해가지고 돈 끌어내고 협박, 공갈하는 것, 우리는 다들 그러는 줄 알고, 그게 진리인줄 알고, 무거운 짐을 스스로 자신한테 율법의 족쇄를 채워서, ‘가만히 보자. 우리 집이 이렇게 살 정도니까, 그러면 내가 얼추 착하구나.’ 자기의 착함과 자기의 경제적인 것을 가지고 필연적인 문장을 만들어놓는 거예요. 그게 악마가 준 수갑인데.

 

오늘 제목을 수갑으로 할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속아도 정말 엄청나게 오랫동안 속아 넘어갔습니다. 죄 짓지 않는다고 그렇게 당부해도,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얼마다 귀한 복음인지도 모르고, 여전히 자기 살 궁리하면서, 바르게 살지도 못하면서, 우기면서 바르게 살았다고 자부하는 우리. 이제 성령이 오셔서 그게 바로 죄인의 모습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서울의존강의20180608b 베드로전서1장 13-15절(필연)-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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