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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7 21:31:06 조회 : 212         
강남-요한복음 17장 3절(인간이 없는 세계)180605a-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121.165.203.222)
강남-요한복음 17장 3절(인간이 없는 세계)180605a-이근호 목사


자, 첫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7장3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렇게 되어 있지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 선교단체 대학생이라면 제가 간사라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할거예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제가 영생을 받는 비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성경대로 하겠습니다 라고 이야기 하면서 요한복음 17장 3절을 받아쓰세요 라고 빈칸에 쓰는거 있잖아요 쓰면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딱 썼지요? 물어놓고 이제 여러분들은 이 사실을 알았으니까 영생 받았어요? 안 받았어요? 물어보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대로 합시다. 성경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면 이단되기 때문에 절대로 이단에 빠지면 안 되기 때문에 성경대로 해야되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이제 그 하나님 아시고 예수님 알았으니까 영생을 얻었어요? 안 얻었어요? 이렇게 물어보지요. 그러면 학생들이 한글로 번역된 한영으로 번역된 이것으로 하던 뭐 한글로 보라고 하면 또 꼭 영어로 찾아보는 사람 있어. 잘못됐는가 싶어서 그거나 이거나 똑같은 거예요. 헬라어도 마찬가지고.


어 그럼 우리 영생 얻었네요. 이렇게 한단 말이죠. 예 이제 영생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참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게 되지요. 그러면 요한복음 17장 오기까지 창세기부터 구약, 신약에 모든 이야기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이에 다 날라가버려요. 소용없는 이야기입니다.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 이야기가 왜 필요할까요? 바로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 바로 예수님 보내가지고 나 아니? 나 예수다. 알겠습니다. 구원 영생 끝나는 문제이지요. 왜 구약 이스라엘이 왜 있고 이스라엘 역사가 왜 있고 광야가 왜 있으며 여리고 성이 왜 있으면 신약에 예수님께서 그냥 와 가지고 나 예수다 믿어라 나 예수거든 이렇게 해서 알려주고 영생 얻고 하지않고 왜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왜 그리 복잡한 절차가 왜 필요하냐 말이죠.


이게 뭐냐 하면은 영생이 인간 없는 세계예요. 인간이 없어요. 인간 없는 세계입니다. 천국은 인간이 없어요. 인간의 자리에 아들이 계신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천국이 아들의 나라예요. 사람은 빠져야돼요. 예수님이 제2의 아담이고 마지막 아담이거든요. 예수님에 의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만들어진 자, 그들만 영생의 혜택을 누리는 겁니다. 기존의 인간들아 가라 이 말입니다. 뭐 알고 자시고 믿고 필요 없어요. 그냥 가는 거예요. 그냥 그거는 돌려보내버리는 겁니다. 단 인간이라는 이유 때문에. 인간이라는 이유 때문에 아담에 속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은 영생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취지가 단호한 취지가 창세기 3장에 에덴동산에서 추방하는 취지와 딱 맞아 떨어져요. 생명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지금 식으로 하면 영생을 영생답게 보호하기 위해서 필히 인간은 영생이 있는 그 자리에 흔적 없이 그걸 퇴출시켜야 된다는 원칙. 그 원칙을 그대로 지금 요한복음 17장까지 끌고 오고 있습니다. 애들 모아놓고 간사되어서 자 노트 적으세요 그런 문제가 아니예요. 요한복음 17장3절 백날 외워보고 백날 해봐도 그래가지고 영생 되는게 아닙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여기에 대해서 이런 하나님의 취지에 대해서 인간들은 단호하게 거부를 하겠지요. 왜냐하면 본인이 속하지 않은 나라는 아무리 그게 천국이라도 나한테 실적이 없잖아요. 실적이 없으면 인간은 무의미하게 봐요. 내가 그 주인공이 되어야 돼요. 내가 그 자리에 참여돼야 돼요. 왜냐 인간들은 줄곧 그런 식으로 살아왔어요.


내가 존재함에 그걸 최종적 의미로 두고 살아왔다 이 말이죠. 자기가 여기 있음을 밝히는 그걸 최종적 의미로 두고 살아왔어요. 나 빼놓고 남들끼리 좋은 잔치 벌리는 것 어떤 파티 벌리는 것 그것은 아무리 그 잔치가 영광이 되더라도 그것은 나의 분노의 표적이 될 뿐입니다. 나를 도외시했기 때문에. 그런데 인간이 없는 세계예요 영생의 세계는. 영생은 인간이 없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이 영생이라는 것이 그냥 주면 될텐데 영생이 이 땅에 와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전쟁을 벌리지요. 그게 그 전쟁이 뭐냐하면 이겁니다. 무상으로 심판해드리겠습니다. 원래 공짜라 하면 되게 좋아하잖아요. 되게 좋아하는데 공짜로 공짜를 준다 이렇게 하게 되면 굉장히 좋아해요. 공짜라 하면 옛날 말에 양잿물도 마신다 했습니다. 어릴 때 양잿물 그게 괜찮은 주스인줄 알았어요. 어릴 때는 몰랐으니까. 주스 탄 물인줄 알았는데 아니였어요. 죽는 물이였어요. 공짜라면 챙기고 보잖아요.


주님께서 하신일은 뭐냐 무상으로 심판을 해주겠다는 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자력으로 영생에서 떨어지지 않으니까 내가 공짜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공짜로 천국에서 떼어내 주겠다는 거예요. 너 분수에 맞도록 떨어져 나가도록 해주겠다는 겁니다. 이게 주님이 하시는 전도입니다. 우리가 아는 전도하고 완전히 180도 다르지요. 떨어져 나가는 거예요. 떼어내는 겁니다. 그게 누구로부터 떼어 내느냐 하면은 예수그리스도 앞에 얼쩡거리지 마라. 예수그리스도 앞에 얼쩡거리지 말라.



4절에 봅시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절에 보면 제가 방금 말한 근거가 나옵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자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따로 선별해서 다른 장소에 따로 인간과 예수님 사이를 따로 구분 지을 필요가 있는 겁니다. 그것도 무상으로. 인간의 노력 말고 주님 자신의 노력으로 떼어낼 필요가 있어요. 주님의 심판은 무슨 심판이냐 하면 인간들과 예수님 본인을 혼자 떼어놓는 작업이 이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말한 심판입니다. 내가 온 것은 심판하러 왔다고 되어 있지요. 그 심판이 뭐냐 하면은 바로 구분 짓는 거예요. 사람들 일부로서의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이 따로 다른 예수님 외에 모든걸 따로 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보게 되면 그 심판에 대해서 3장 또 유명한거 있지요. 3장 18절에 보면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뭐다?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되어 있지요. 지금 이 말씀을 보게 되면 내가 내 아들을 세상에 보낸 것은 심판을 위함이 아니요 라는 그 말만 들으면 하나님께서 봐주는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그게 아니고 봐주는게 아니고 노골적으로 본격적으로 심판 이미 받았다는 것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거예요. 논리가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시험할 때 산성이냐 알카리냐 할 때 그냥 아무것도 그냥 없이 가만보면 그냥 용액이예요. 그런데 뭐 하나 들어갔다 나와요. 리트머스 시험지를 해가지고 들어갔다 나오는 겁니다.


산성은 푸른색을 리트머스 푸른색을 붉은색으로 바꾸는게 산성이예요. 그래서 외울 때 이렇게 외웁니다. 푸른 산에 불난다 이렇게 외워요. 푸른 산이니까 푸른 산에 불난다 이렇게 외우는 겁니다. 거기에 뭐가 들어갔다 나오면서 이거 시험하기 이미 이전부터 그거는 산성이였어요. 이 세상은 그냥 있으면 심판이 심판 받는다는 것이 납득이 안돼. 왜 그냥 태어나서 그냥 살 뿐인데.


다시합시다. 다시. 오늘 17장 3절에 보면 영생은 하나님의 아들 그 보내신 아들 믿는거라 했잖아요. 했지요? 그러면 이 말은 영생에 대해서 언급한거예요. 영생에 대해서. 그런데 그 영생에 대해서 영생은 하나님과 그 보내신 아들 예수그리스도 현재 이 예수님은 이 말씀하실 때 예수님이 사람들 보기에 사람이예요? 하나님예요? 인간들 보기에. 그냥 사람이지요.


그러면 하나님 계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계시고 자기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고 백성들이라고 보잖아요. 그걸 구분하는거예요. 니들이 아버지를 아는게 아니고 유독 오직 only 예수님 자신만 예수님 하나님 아버지를 유일하게 안다는 것을 알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이겁니다.


왜냐 모든 인간은 자기를 하나님이 아는 자로 끼워넣기 하기 때문에. 그 끼워넣기를 빼는 것이 바로 이것이 무상으로 심판해주는 거예요. 예수님을 모른다 하면 아 내가 예수님 몰랐네 이게 아니고 예수를 모른다는 사실이 그냥 예수님 모른 것에 대해서 지식이 모자른 것이 아니고 그 자체가 처음부터 심판의 대상이었다는 유일한 증거가 된다는 사실을 예수님 단독적으로만 아버지를 안다는 것을 통해서 지금 증명해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 인간을 보세요.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나머지 인간은 뭐냐 인간없는 세계예요. 영생은. 그 인간 없는 세계의 취지는 무엇과 같다고 했습니까? 에덴동산에서 영생나무 하나 터치하지 말라고. 단지 영생나무 터치하지 말라고 그 자신이 만든 인간을 과감하게 저 저주받은 땅으로 내쫓아 버리잖아요.


그 저주받은 땅에 대해서 제가 아까 그 오기 직전에 유투브 첫 번째 강의할 때 뱀이 저주받을 때 배를 땅에 대고 온다 했지요. 배를 땅에 한번 대 보세요. 땅에 대면 시야가 뭐 밖에 안보입니까? 이거는 지평선 밖에 안보이지요. 모든 태어나면서부터 땅에 엎드렸다고 보게되면 땅이 자기 세계의 전부예요.


땅에서 출생하면 성공한거고 땅에서 실패하면 실패자로 보는 겁니다. 보는게 납작 엎드려서 밀착형 땅 밀착형 존재예요 인간이. 마귀가 그렇게 저주 받았으니까 인간도 마찬가지인거예요. 그 마귀의 품성 따라가니까.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람은 땅이라는 그 테두리 범주 안에서 너 잘났다 나 잘났다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도 종교가 있고 신이 있고 하늘이 있지 않습니까? 물으면 그것은 뭐냐하면 땅의 밀착형이 여기에 이 땅에 없는 것을 상상하게 되겠지요. 그걸 유토피아라고 하는데 미지의 세계. 없는 세계를 상상하게 되어 있어요. 땅이 있으니까 너무 고되니까. 땅에 밀착해서 땅의 것을 먹는다 이 말이죠. 땅의 것이라는 것은 뭐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죠 뭐. 돈은 하늘나라에는 필요 없거든요. 돈은 어디에 필요합니까? 땅에서 살기위해서 필요하잖아요. 그러면 땅에서부터 나서 흙에서부터 나서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것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그렇게 생각 안하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다 그렇게 생각하지. 그게 제 말이에요. 그게 제말이에요 그게. 제가 그 말에 아주 적극적으로 동조합니다. 그러면 또 동조한다고 기분 나빠해요. 그러면 천국은 누가 갑니까? 이렇게 또 삐진다고요. 동조해줘도 문제라. 천국 누가 갑니까?


영생이라는 것은 천국 갈 사람이 없어야 그게 영생의 나라예요. 왜 자꾸 갈 사람이 없다는데 왜 우기냐 이 말이죠. 마귀 심보예요. 못 들어가는데 안 들어가면 되지 왜 못 간다는데 왜 굳이 들어가야 되느냐. 천국에 갈 사람은 인간은 없습니다. 그럼 인간은 없다는 말은 그러면 여기 요한복음 11장에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자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자는 따로 있는데 그럼 이 사람들 인간 아니냐? 있네. 왜 자꾸 없다고 우기느냐 이렇게 나올겁니다.


인간부터 출발합니다. 인간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사물로 바뀌어야 되요. 사물로 바뀌고 여기서 인간 또 나와요. 이 앞에 뭐가 붙어요. 뭐가 붙느냐하면 ‘새 인간’ 붙습니다. 새 인간 되려면 인간에서 새 인간은 안돼요. 인간에서 하나의 사물 물체 창세기 3장에서 뭐라 하느냐면 흙.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흙 죽음이죠.


그리고 그 에스겔 37장 말씀에 의하면 바짝 마른 뼈, 곧 흙이 되기 직전의 뼈. 그런걸 의미하는 겁니다. 인간에서 사물로 변하고 새 인간 되지요. 그러면 바라기는 이거는 그냥 기대 사항이지만 진짜 내 소원인데요 여러분들이 성령받아서 새 인간되기를 저는 소원합니다. 정말 너무 소원해요. 뭐 언제봤다고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마음은 그런 마음이에요. 여러분들이 새 인간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새 인간되려면 여러분들 인간으로 보면 안 되고 자기 자신을 뭐로 봐야돼요? 인간에서 사물로 흙이거든요. 인간에서 사물로 안 그러면 그 나무로 나무라 하는 것은 뭘 의미하냐 하면 바로 요새 장례치를 때에 나무에다가 육을 뿌리는게 또 유행을 탔어요. 돈 좀 비싸지만은. 뭐라하죠? 수목장, 수목장할 때 그 나무 잎사귀가 여러분 그 나무 잎사귀 줄기가 인간에서 사물로 인간이 결국 인간에서 사물이 된다는 이런 소설 써서 상 받은 사람이 있어요. 한강이라는 한씨고 이름이 강이라는 여자 작가가 이거 써서 상 받았어요. 이거 제가 평을 해놓은거 같은데. 하여튼 있습니다.


사물로 결국 인간은 사물이 된다는 거예요. 바짝 너무 다이어트 오래 하지 마시길. 새 인간이 될 경우에 새 인간은 인간에서 나오는게 아니고 바로 나의 죽음을 전제로 해서 나오죠.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오잖아요. 예수의 생명이 내 죽을 육체에 통해서 온다는 말은 예수님이눈으로 우리를 볼 때 뭐로 본다? 인간으로 보지 않고 죽을 육체로 보는 거예요. 하나의 사물로 보는 겁니다. 하나의 바짝 마른 뼈로 보는 겁니다.


뼈로 봐가지고 우리를 살려냄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자기 솜씨를 맘껏 자랑질할 수 있는 거예요. 너 같은 인간도 내가 살려냈잖아 라고 동네방네 자랑하는거. 그 자랑하는데 편승한 사람이 바로 사도요 전도자가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나를 생전 예상도 못한 인간으로 만들어 놨다. 오죽했으면 사도 바울보고 미쳤다고 이야기 했겠어요. 네가 미쳤구나. 그래 미쳤다 왜! 아이고 네가 미쳐야 되는데 못 미쳐서 내가 안타깝다 라는 겁니다. 못 미쳐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쳐야 되는데 왜냐하면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아니한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는 이 명제, 이 문장 자체도 이게 미친 사람 아니면 이게 어떻게 서슴없이 그게 나옵니까. 그것도 가족들 올케한테. 올케 시누이한테 이게 나옵니까? 혹시 시누이 계시면 이게 나오든가요?


아이고 형님 동서간에 형님 이래가지고 뭐 이렇게 반갑게 맞이하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게 동서 형님 만난 인사입니까 이게?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 속으로 누르고 누르고 눌러야지. 분명히 제가 이야기 했어요. 이 세상은 인간이 없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주인공 되는 세계를 세상으로 봐요. 그게 뭐냐 바짝 엎드려서 땅에 밀착형이기 때문에. 땅 외에는 안 보이고 믿을 거는 땅 밖에 믿을게 없어요. 땅에서 얻는 수확가지고 목숨을 부지하려는 악마가 내 안에 집어 넣어준 그런 생존의 방식 외에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이거는 교회 가도 마찬가지고 교회 안 가도 마찬가지고 교회 다니나 안다니나 공통점은 뭐냐? 이 땅의 것으로 사는 것이 사는 거다.


그러면 그들에게 물어봐요. 영생은 뭡니까? 물으면 영생은 오래 길게 사는거다. 오래 길게 사는거. 창세기 3장도 안 읽어봤어. 오래 길게 사는 것을 염려해서 주님께서는 그걸 짧게 살라고 에덴동산에서 추방한거예요. 그들이 그 상태에서 그 썩어빠진 그 성질 가지고 생명나무 따먹어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이거는 안 되거든요. 그래서 그들을 죽이기 위해서 세상을 만든겁니다. 왜 우리가 태어났는가 왜 죽는가를 알리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4월 15일은 김일성 생일이예요. 4월 15일 기억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거는 뭐 이야기 안합니다. 제 딸의 생일인데. 왜 태어났는가? 죽음이 뭔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태어난거예요. 이 땅에서. 왜 하나님은 인간을 안 받아주는가 증거하기 위해서. 왜 영생은 인간이 없는 나라인가. 인간이라는 것은 이미 인간 자체가 이미 수상한 인간이에요. 불신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라고 할 때에 결국 요한복음 16장은 뭐냐하면 창세기 이스라엘 역사 통해서 보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은 아니라고 했지요. 부활은 내가 안 죽는 지금 인간으로 계속 인간으로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이 부활이 생기기 때문에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 될 수가 없어요.


나 살겠다고 인간은 어떤 수단도 다 부릴 참인데 그 부활하니까 좋다고 굉장히 좋아해요. 교회 이름이 부활의 교회가 있어요. 뉴스에 나왔어요. 부활의 교회라고. 보이스피싱이 그 교회 앞에다가 보이스피싱하다가 부활의 교회 전도사들이 잡아가지고 신고해가지고 표창받은 그 이름 보니까 부활의 교회예요. 십자가 해놓고 무슨 부활의 교회라고.


주님께서는 이 영생 만드는 작업에 인간이 이렇게 무지하고 몽매해도 주님은 인간의 무지몽매하는 이유 때문에 영생 만드는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쓰는게 뭐냐 하면 무상으로 앞에 무상으로 하면 잘 이해 안 되니까 중간에 넣읍시다. 무상으로 그 다음에 친절하게 친절하게도 심판해주십니다.


이게 바로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내용입니다. 심판에 관한겁니다. 지난 그 대전 겨울수련회 할 때 세 번째 시간이였습니다. 제목이 엘리사와 엘리야인가 그런 제목에 보면 그런 이야기를 내용으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왕 중심의 세계로 이스라엘 하다가 왕 중심의 왕 자체의 다윗 언약 이후에 이게 내리막길로 꽂아 내려가요.


왕으로 지상에 천국을 만든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줄기차게 나오는 왕 있잖아요. 그 왕이 점점 더 쇠락해져요. 아무리 훌륭한 왕이 등장해도 그 왕은 실패로 끝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왕 중심의 체계에서 뭐로 바뀌느냐 하면 선지자 중심의 체계로 바뀌는 거예요. 선지자 중심의 체계로. 바뀌면 왕 중심은 땅의 힘 지상의 힘으로 왕 중심으로 눈에 보이는 나라를 건설하는 겁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뭐냐 하면 천상 위와 관련되었기 때문에 선지자의 역할은 뭐냐 하면 세우는 것이 아니고 세우는 것을 헐어버리는 역할을 해요. 46년동안 지은 성전을 깨뜨린 취지도 그런 취지입니다. 그러면 건축물을 헐어버리면 거기서 뭐가 남겠습니까? 얼마 전에 4층 건물 무너졌는데.


자, 건축물이 허물어졌다. 그러면 뭔가 허물어 졌으니까 남는게 없겠지요. 그런데 시편 118편 22절인가 거기에 보면 남는게 있어요. 뭔가 있었는데 뭉게져야만 남아지는게 있어요. 읽어볼께요. 22절에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자, 그러면 그 버린돌 하나 하나님이 건져내기 위해서는 무엇을 용납하는 겁니까? 인간들이 세운 건축물이 세우도록 하나님께서 허용을 하겠지요.


그러면 인간들이 건축물을 세운다는 말이 성전을 의미하는데 인간들이 성전을 세우고 성전이 있다는 것을 통해서 그것을 어떤 느낌이 드느냐 하면 우리가 있으니까 성전이 있으니까 성전을 지었으니까 설마 우리를 버리지는 않겠지..가 되겠지요.


자, 다시 이야기 합니다. 인간이 성전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세웠습니다. 그러면 인간들 생각은 뭐냐 하면 하나님 지시한데로 성전을 세웠으니까 솔로몬 성전 세웠으니까 이 성전을 하나님 쪽에서 우리를 내치지는 않을 거라고 보는 겁니다. 내치지는 않는다. 우리를 받아준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께서 인간이 세운 것을 허물어 버린다면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무슨 메시지냐 하면 성전을 허무는 정도가 아니고 내가 애초부터 너희를 내친다는 그 주님의 심중이 성전이 허물어진 그 성전을 허무는 그 사역에 작업에 담겨있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과 하나님 완전히 결별되었지요? 그러면 허물어진 그 벽돌의 조각 하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에요?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가 되어 있지요? 그러면 그 중의 하나의 돌. 모퉁이 돌 그 버린 돌을 쥔다면 더 이상 그 돌에서 인간들이 자기 권리나 자기 천국 주세요 영생 주세요 하는 그 권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인간이 사물이 된 상태에서 나는 인간이니까 하나님이 만든 인간이니까 하나님이 저 만들었잖아요. 만들었으니까 천국 보내주세요 하는 권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대학생들 아까 모아 놓고 요한복음 17장 3절 글 써가지고 예수님 알고 하나님 알았으니까 영생 얻었다. 그런 소리 그렇게 한다고 영생 얻어지는게 아니지요.


요한복음 글 쓰는거 자기가 썼고 이거 너희들 예수님 아니? 안다고 고백 본인들이 고백했어요. 그러면 거기에 주님이 버림받은 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리는 없지요? 주님이 버림받은 모습으로 들어갈 자리는 아니다 이 말이죠.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나 이거 글 안 쓸래 간사님 나 안 쓸래 예수 안 믿어 이러면 몰라.


이러면 주님께서 버림받은 모습으로 갈 수 있는데 시키는대로 얼마나 착한지 요한복음 17장 3절 딱 쓰고 영생은 영생은 받아적으세요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겁니다 딱 적어놓고 이거 외워야 오늘 수련회 점심 때 짜장밥 주고 이거 안 외우면 짜장밥 안줍니다. 이렇게 되어가지고 이거 외워가지고 짜장밥 식판들고 영생은 하나님 아들 예수님 아는 겁니다. 합격. 이런 식으로 하게 되면 거기에 무슨 버림받음이 들어갑니까? 내침이 들어가요? 무슨 심판이 들어갑니까? 지가 잘나서 영생 얻었는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전도하지 말라는 이야기네요 하는데 전도는 심판하시는 그것이 전도예요. 전도의 내용은 심판입니다. 아까 유투브할 때 했지요. 믿으라가 아니라 못 믿는다예요. 믿을 수 있는 재주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 했잖아요.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한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영생을 얻은 사람 여러분들이 그렇게 되기 원해요. 여러분들이 영생 얻기를 원합니다. 또 얻은 사람 되기를 바랍니다. 영생을 얻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바로 새로운 인간이 될 때에 전에 내가 알던 인간의 믿음 갖는게 아니고 어디에 감사해야 됩니까?


내가 할 수 없었던 것 그게 뭡니까? 나는 죽을 육체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그냥 이론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이게 죽을 육체를 질질 끌고 가는 겁니다. 광야에 장고가 관 끌고 가듯이. 이건 장고만 이야기 하는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6장에서 이야기한거예요. 자기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관을 질질 끌고 자기 십자가를 질질 끌고 나를 따라오라.


그 자리에 영생 없는거예요. 네 모습 그대로 오는게 아니고 죽여서 오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죽인다는 것이 인간으로 이게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까? 불가능하지요. 그러니까 무상으로 심판을 해준다니까요. 그것도 친절하게.


여러분 어깨가 좀 결린다. 그러면 평소에는 누가 내 육체에 손대는거 싫어해요. 하지만 어깨가 결린다. 팔다리가 저린다. 그러면 돈 주고 어디 갑니까? 돈 주고 마사지 샾에 가가지고 웃통 벗고 주물러 달라고 하지요? 그거는 돈 내야 되잖아요. 뭐 30만원? 고급스러운데 진흙 쳐 바르는데나. 오래걸리는데나.


그런데 그걸 주님께서 어떻게 한다고요? 고맙게도 30만원이 아니라 무상으로 심판을 해준다니까 발로 밟아 죽여준다니까. 얼마나 감사한지. 사물이 될 때 그것이 바로 주의 절차라니까 그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짜 인간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절차에 이미 돌입한거예요. 오늘 제목은 인간 없는 세계예요. 인간이라는게 없습니다. 하늘 아래 인간은 없어요. 사물로 바뀐 겁니다.


어떤 분이 저한테 그런 질문을 한 것 같아요. 육과 영과 혼에 대해서 질문을 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대전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지금 육이냐 혼이냐 영이냐를 따질 문제가 아니고 육과 영과 혼을 따진다는 것은 뭔가 있다는 겁니다. 뭔가 있으니까 이걸 뭔가 있는 이걸 주께서는 어떻게 하겠지라고 하는 거예요.


뭔가 있는데 그게 뭔가 있는 그게 자아고 주체고 나란 말이죠. 내가 뭘 알아야 구원 받겠습니까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대전강의에서 뭐냐 하면 뭔가 육이 됐든 영이 됐든 혼이 됐든 대전강의에서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육이 혼이고 혼이 영이라고요. 이렇게 보거든요.


왜 그렇게 따지지말고 개념상은 달라도 같이 보는 이유가 중요한 관건은 뭐냐 하면 내 몸이 어떻게 되느냐가 아니라 옆에 외부에서 말씀이 하나의 말씀이 광야 이야기할 때 그 이야기 했어요. 주의 말씀이 나를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달린 거예요. 내가 어떻게 정리정돈하는게 아닙니다. 서랍정리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예요. 내 정신세계를 어떻게 신학체제와 교리체제를 어떻게 내가 갖추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외부에서 누가 이걸 타결하느냐가 문제예요.


말씀이 와버리면 몸이 됐든지 혼이 됐든지 영혼이 됐든 관계없이 말씀이 나를 갖고 뭐가 되느냐 하면 하늘에 속한 형상을 만들어내요. 하늘에 속한 형상을.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있던 승천한 형상있잖아요. 그 형상이 성도의 형상이예요.


그러면 그거는 어떤 경우냐 하면 말씀이 내재되어있을 경우에만 돼요. 하나님의 말씀이 내재되어 있는 사람. 그걸 히브리서 10장에 이야기하게 되면 새 언약이 우리 안에 침투된 사람. 우리 안에 육이 됐든 혼이 됐든 영이 됐든 관계없어요. 하나님의 새 언약이 들어오게 되면 옛날 언약은 우리 앞에서 스탑돼요. 우리 앞에서 율법화되서 스탑되지만 그거는 옛 언약이고 새 언약은 율법의 완성이 우리 안에 허락도 없이 여기 안에 들어와버려요.


들어와버리면 내 안에서 이 언약이에요. 언약대로만 움직여요. 언약대로만. 심판을 한다니까요. 언약대로. 이 절차 인간에서 사물로 흙에서 인간 이 절차를 말씀이 알아서 자동적으로 그게 엔진이 가동되어 버려요. 그러면 기존의 육으로 육적 세상 나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을 육이라고 하거든요. 나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거는 뭐가 되느냐 하면 pinch 위기라고 합니다 위기. 위기가 발생돼요.


위기가 발생되면서 뭐냐하면 종교 중독 믿음 중독 이렇게 중독돼요. 신앙 중독 기도 중독 인간의 중독성을 드디어 거기서 드러내게 시작합니다. 왜? 중독성이라고 하는 것은 탈출을 찾고자 하는 몸부림을 가지고 중독이라고 하거든요. 술 중독 담배 중독 마약 중독 등산 중독 낚시 중독 영화 중독 독서 중독 이런 것. 인간들은 계속 뭔가 거기에 어떤 취미생활 중독 매진하는 것은 다른 탈출구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참 절망적인 것이 어느 지점에서 탈출했잖아요. 탈출 했는데 그 탈출이 미로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합니다. 새로운 미로를 만날 뿐이에요. 평생 그 짓해요. 평생. 이곳에서 벗어나면 이곳 미로 끝나면 새로운 미로가 나를 마중나오지 다른거 안 나와요. 역시 탈출구 없기는 마찬가지예요.


그 옛날에 70년대인가 유명한 노래 남성중창단 노래 이런거 있어요. 술 한잔을 마시고 또 마셔도 취하는건 마찬가지라고 수련회 때 이야기한거 기억나지요? 여러분 한 번 물어볼께요. 마지막 술잔은 언제입니까? 마지막 마실 수 있는 마지막 마시는 술잔은 몇 월 몇 일쯤 되겠어요? 없지요.


어디서 마지막 술잔을 마실 수 있느냐? 어디서? 어디서 무엇이 돼서 만날까 이런거 있잖아요. 그거는 어느 화가가 예술하는 그런 제목이 있어요. 서양화가인지 한국화가인지 모르겠다만 어디서 무엇이 되서 만나랴. 한국에 김환기인가 모르겠어. 어디서 마지막 술잔을 먹을 것이냐?


인간은 늘 자기가 망가진다는 걸 미리 간파해서 항상 큰 소리치고 항상 결심에 결심을 합니다. 교회갈 때마다 새벽기도 할 때마다 결심을 해요. 두 번 다시 이런 짓하면 개다. 이런 짓하면 개다라는 뜻은 자기가 지금은 개 아닌 줄 알고있어요. 본인이 지금 본인에 대해서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사는게 중독이라고요. 사람 사는게 중독 다른 말로 하면 사람 사는게 탈출구가 없어요.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7번 결혼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5번 결혼하고 지금 사귀는 남자가 6번째. 이게 돼. 인물이 되니까. 인물이 되니까 까짓것 배부르거든요. 이게 되니까 이게. 인물이 안 되니까 한번밖에 못하지. 이게 되니까. 그런데 그것조차도 결국은 탈출구 영원한 탈출구가 될 수 없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준 것은 탈출구가 있다 없다? 탈출구가 없습니다. 믿음 백날 믿음 봐야 교회 가봐야 탈출구가 아닙니다. 구원 안 됩니다. 천국 못 갑니다. 그냥 몸부림 쳐보기 위해서 교회 가는거예요. 그냥 몸부림 쳐보기 위해서. 이거 아니지만 혹시나 이래가지고 가보는 거예요.


자, 그러면 이렇게 안 되는 이유가 있어요. 안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관심사가 하나님의 일의 목적이 너희를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란 인간들 무리 속에서 예수님을 따로 떼어내는 것이 목적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작업이 무슨 작업이냐 하면은 영생 작업이에요. 영생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고 그 다음에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를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에요.


하나님과 예수님을 안다는 말은 이 자체가 인간 세계에 대한 이게 심판이 되는 겁니다. 어느 인간들 중에서 예수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은 한 사람 있다 없다? 이 없음을 분명히 해야 되는 겁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전에 고백한 것은 그거는 베드로가 아는 것이 아니고 혈육이 아니예요.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아시는 거예요. 그 공로를 베드로 공로로 돌리면 안 됩니다. 겟세마네 기도할 때에 지금 제자들은 지금 곧 예수님을 배신할 타이밍에 와 있어요. 배신하는 겁니다. 배신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몰랐다는 거예요.


영생은 누굴 아는 거라고요? 영생은 누구를 아는거다? 예수님을 아는 건데 제자들은 알았다 몰랐다? 이 시점에서 지금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영생은 꾸준하게 영생작업을 고유의 작업을 인간들이 몰랐다는 이유 때문에 안하는 것이 아니고 아이 실망했네 이렇게 삐지는 것이 아니고 바로 모른다는 모르게 된다는 그 자체가 바로 성공적으로 지금 움직이고 있는거예요.


그래서 정말 지금 성령 받아서 안다면 안다고 이야기 하면 안 되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즐긴다가 되어야 돼요 즐긴다. 아는 것은 지식으로 알면 안 되고 이게 여유있게 즐겨야 돼요. 만끽해야 된다니까요 만끽. 즐긴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즐긴다는 말은 이것은 새로운 환경에 소속되었다는 것을 마음껏 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새로운 환경.


그런데 그 새로운 환경 조성이 즐긴다는 말은 인간은 자기로 인하여 즐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즐거움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끝날지를 자꾸 생각하기 때문에 즐기는 가운데도 불안해요. 여러분 그런 일이 있잖아요. 갑자기 아무 탈 없이 일이 잘 풀릴 때는 이상하게 겁나. 주님께서 복 줘놓고 내일되어서 다 빼았어가는게 아닌가? 사형수를 마지막 사형당하기 전에 족발이나 편육 먹이는 것처럼. 뭡니까 할머니 무슨 할머니? 원할머니 보쌈집에 가서 마음껏 먹이는게 마지막 통통하게 살찌워서 잡기 위해서 마지막 먹이는게 뭔가 불안해요.


인간이 즐기는 것은 끝이 뒷끝 있어요. 뭔가 이상해. 그러면 즐길 때는 나로 인하여 즐거워지게 되면 이것은 얼마 못갑니다. 나한테 일어나지도 않는 일인데 내가 원인을 제공 안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 짓도 안했어. 아무 짓도 안했는데 나와 무관하게 주께서 영생을 줬다면 그건 내가 영생 얻으려고 애쓴게 아니잖아요. 그럼 남는 일은 뭐만 남았어요? 즐길 일만 남았지요. 그래서 즐길 때 영생 아는 겁니다.


이거 17장 안 써도 노트에 이거 안 써도. 그러면 영생 못 받은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 할거예요. 너는 어떻게 해서 그것을 획득했느냐? 어떻게 라고 묻지요? 어떻게 라는 말은 나한테 할 물을 말이 아니고 누구한테 물어야하냐 하면은 예수님한테 물어야 될 문제예요. 어떻게에 대해서 답변을 하시되 그 답변과정이 복음 전파가 되는 거예요. 뭐냐 하면 나 아니요가 되요 나 아니요. 복음은 본격적으로 계시되는 겁니다.


개뿔도 아무것도 없으면서 즐기고 있어요 인생을. 개뿔도 아무것도 없어 돈도 없는데 즐기고 있어요. 어떤 사람은 돈 수천억 갖고 있으면서도 벌벌 떨고 있어요. 맨날 사과하고 사과하고 심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하고 있고 모녀가 다 같이 이런 사람도 있고 아들까지 이제 들어갈 판.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데 즐기고 있는 사람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럴 때 너는 뭐 믿고 그렇게 즐기느냐 할 때 어떻게를 이야기하면서 복음 전할 타이밍이 왔어요. 타이밍이. 그래서 요한복음 14장의 이 내용은 지금 제자들을 배제하고 아버지와 아들 대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17장 끝에 가게 되면 처음에는 아버지와 아들만의 대화가 됐다가 나중에는 뭐가 되느냐 하면 물론 사람하고는 대화 안합니다. 기도 자체가 사람하고 대화하는게 아니고 아버지와 대화하는거 아닙니까.


그 내용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내가 이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관리 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이끌겠습니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어요. 따라서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이 기도내용은 우리의 운명입니다. 우리 성도의 운명이고 성도의 일상의 원칙과 원리를 제공하는 근거로서 지금 요한복음 17장이 있어요. 성도라면 이런 식으로 인생이 전개된다는 진행된다는 겁니다. 초반부터 영생 나왔으니까 이거는 일단 받고 들어가는 거예요. 영생 받고. 영생 누리고 영생 즐기고 들어가는 겁니다.


즐길 때 입 확 닫지말고 내가 이렇게 즐기게 된 것이 예수님의 하신 일이라는 것을 예수님을 증거하라고 일단 우리를 영생주고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니 전도를 못 할 이유가 없지요. 전도가 안 된다는게 이상한 일입니다. 왜냐 본인이 즐기고 있으니까. 마음껏. 이 영생 안에서는 자기가 뭐라고 했습니까?


다시 한번 봅시다. 영생 안에서 인간은 인간이 아니고 뭐라고 했나 하나의 사물이라고 했지요. 사물인데 고린도후서 4장에 의하면 이걸 죽을 육체라고 했지요. 주님께서 우리를 죽을 육체 우리는 죽을 육체인데 왜 이렇게 심장이 뛰고 왜 이렇게 머리가 자라고 왜 이러느냐. 예수님의 생명이 장악했기 때문에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생명이 나온다 이 말이죠. 예수님의 생명이. 그냥 생명이 아니고 예수님의 생명이에요.


예수님의 생명은 모든 생명 가진 인간들이 몰랐던 그 생명이라 이 말이죠. 예수님의 생명과 우리 생명이 달라요. 우리 목숨은 살다가 점점 더 이렇게 쇠락해지는 끝이 갈라지는 흙으로 수렴해 나가는 approach 해가는 그런 목숨이라면 주님의 영생은 갈수록 즐기고 또 즐기고 즐기는 그런 생명이에요. 예수의 생명이. 가는 방향이 반대 방향이라니까요.


한쪽은 울고불고 한쪽은 지금 여유만만하고. 한쪽은 탈출구를 찾기 위해서 또 한잔을 마셔도 취하는건 마찬가지. 맨날 노래 이 노래 부르면서 또 핑계대면서 또 한잔 더 먹고 취하는건 마찬가지인데 또 먹고. 이게 하나의 해결책이 없는 탈출구를 찾다가 또 실패했다는 그 심정을 술집에 가서 또 달래고 있습니다. 술하든지 담배하든지 중독성 있는 일을 통해서 계속해서 자기가 즐길만한 것을 찾는거예요. 자랑질할만한 것 즐길만한 것.


젊은 사람들은 시간이 바빠서 죽겠다하지요? 은퇴한 사람은 시간남아 죽겠어. 시간 남아서 시간에 치여 죽겠다 합니다. 할 게 없어. 집에서 그냥 뒹굴지. 뒹굴면 허리가 아파. 집에서 뒹굴고 오후에 마사지 받고 집에서 뒹굴고 오후에 마사지 받고. 운동가다 다쳐서 또 집에서 쉬다가 또 쉬다가 담 걸려서 또 운동 더하고 또 다치고 또 집에서 쉬다가 다치고.


탈출구가 없어요. 여러 번 이야기 합니다만 탈출구 없을 때는 좋은 방법을 알려드릴께요. 그냥 선거판에 뛰어 드세요. 돈도 벌고 춤도 추고 남을 또 씹을 수 있는 그런 공적으로 허용된 씹는 시간까지 주니까 그 시간만큼은 자아를 잊을 수 있어요. 자아를 잊을 수가 있습니다. 아주 신이 났어 신이 났어. 남의 벽보 떼고 뭐 이런거.


즐긴다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바로 피로 피로감입니다. 놀아도 피곤해요. 모든게 다 피곤해. 그래서 이 피로감에서는 인생 산 시간 보내는 자체가 피로해요. 피곤해요. 우루사 백날 먹어도 안 되고. 우루사 먹고 뭐 아로나민 골드 먹고 박카스 먹고 비타 600 비타500 뭐 먹어도 그건 안 됩니다. 썩을 육체를 저지 못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피곤하기 때문에 즐길거리가 중독이 되는 겁니다. 해외여행 왔다갔다 맨날 그것만 생각하고. 비행기 타면 힘들고 집에 오면 비행기 타고 싶고. 또 나오고 싶고 나왔다 하면 두 번 다시 비행기 못 타겠다 하면 또 한달 지나면 또 짐 싸는 재미가 또 있어요. 캐리어 끄는 재미있잖아요. 또 나오고 싶어요.


그래서 움직이지 말아야돼요. 사람이 움직인다는게 뭐냐 하면은 폭주거든요 폭주. 그냥 시속 200날리듯이. 인생을 계속 움직이게 되면 생각이 많아지잖아요. 생각이 많아지면 생각의 폭주가 일어나가지고 자기 자신을 종잡을수 없게 됩니다. 혼돈에 빠져 버려요. 제가 대구 강의할 때 이렇게 가운데를 뭐라 했냐 시야협착이라고 했지요. 시야가 딱 들어붙어 협착하다.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제주도 한번 안가고 바다 구경 못했어요. 대통령이 누군지도 아 그건 너무 심하다. 누군지 몰라도 괜찮아요. 감자심고 감자 잘 나는거 그 외에는 몰라요. 불행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온 맨날 해외여행 다니고 이렇게 하면 생각이 복잡해져가지고 자기가 똑똑한 바보 있잖아요. 자기가 많이 아는데 바보같아. 종 잡을 수 없어 본인이 본인을 종 잡을 수가 없어요. 그 끝은 자살이지 뭐. 마지막은 자살이에요. 자기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예요.


그걸 과대평가 이걸 오늘날 SNS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과잉접속. 뭐 하나 놓치면 안 되나 싶어서 온갖 것 다 쑤시고 다녀요 다 쑤시고 다녀요. 접속. 계속 접속과 접속으로 이어져요. 좋아요 엄지 척 좋아요 막 아는 사람도 아닌데 언제 봤다고 좋아요. 좋아요 여러번 하고 이 과잉접촉이 어떤 탈출구 되려고 하는데 이게 사물이 되어가는 자기 자신을 도로 인간으로 인간이다 라고 끊임없이 고집 피우는 모습이에요. 나는 인간이고 싶다. 누구 맘대로 인간인데! 주님께서 인간이 아니라고 하는데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인간이고 싶은거예요. 사람대우 받고 싶다. 나도 사람이다 이렇고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 접속에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걸 접속절제라고 표현하고 싶은데요 어쨌든간에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평가할 수 있는데 결국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어떻게 손 댈 수가 없다는 거예요. 손 댈 건덕지도 안 돼요. 그럼 이런 절망적인 것을 주께서는 어떻게 시도하느냐 그건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강남-요한복음 17장 3절(인간이 없는 세계)180605a-이근호 목사.hwp (71.0K), Down: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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