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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1 14:33:18 조회 : 117         
강남-요한복음 20장 11절(부활의 공격성)190122b-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175.195.96.96)
강남-요한복음 20장 11절(부활의 공격성)190122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현재적 상황을 평할 수 있는데 있어서 인간은 그 어떠한 기준도 제시할 수 없습니다. 현재적 상황. 인간상황을 핵심적으로 이건 이것 때문에 이렇다 할수 있는 그 기준에 인간이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현실상황 속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빠져있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은 잘못 살아가고 엉뚱한 곳으로 지옥으로 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천사를 호출할 수가 없어요. 불러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고 성령이고 인간은 그럴 자격도 안 되고 권한도 없어요. 인간은 자기 주제파악이 안됐기 때문에 엉뚱한 곳으로 방향이 하나님을 부르든 그게 우상숭배인데 예수 자체가 다 우상숭배에요. 그 왕따 당하는 여자 목사님이 하는 이야기가 얼마 전에 안수 받았는데 하는 이야기가 언약을 알고부터는 하나님이 우상인걸 알았답니다. 세상에 그런 기적이 어디 있어요.


목사인데 목사가 하나님이 우상이라는걸 이제 알았다 언약을 알고부터는. 문제는 그걸 같이 나눌 수 있는 주위에 사람이 없다는 거에요. 제가 그럴줄 알고 20년, 30년전부터 요령들을 이야기했거든요. 교역자로 들어갔거든 거기서 복음을 알았거든 수단을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인들을 빼내라. 어차피 갈라설 거. 내 양을 빼내야지 내 양을 맡기면 곤란하잖아. 그거는 직무유기에요.


에스겔에 나오지요. 네가 외치지 않아서 그 사람이 지옥 간다면 책임을 에스겔 너한테 묻겠다 하잖아요. 그런데 네가 이야기 했는데 말을 안 들으면 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고 나는 너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에스겔에게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예수님보고 이야기한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편한 길로 못가요. 내 뜻대로 못해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쪽으로 가야 돼요. 예수님 사는 원칙이 절대로 내 뜻대로 안되게 해주옵소서가 예수님의 생활 방식이었습니다.


왜? 나는 사적이니까. 주님은 공적인일을 해야되는데 자꾸 공적인 일에 누가 방해하느냐? 알 수 없는 공포, 내 개인적인 공포가 주의 일을 훼방하고 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은 상황을 그때그때 적절하게 최적의 상황을 만들어 냅니다. 뭐 기침을 하든 뭘 하든 주님 보시기에 모든 것이 NO가 아니요 NO가 아니요 뭐다? YES 전부다 모든 것이 그래야만 되는 거에요. 그래야만 하는 겁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서는 하자 없고 실수가 아니고 필수적인, 필히 그래야만 하는겁니다. 해보고 말자 그런거 없어요. 해보고 잘되면 그런거 없어요. 필히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는거에요. 사람들은 그걸 예정론을 가지고 설명을 해요. 하나님이 예정된 사람들 필히 그렇게 한다고. 예정론 하면서 뭘 빠트려버리면 예정론 자체가 뭉개집니다.


예정론 하나도 사람들은 잘 몰라요. 제가 예정론에 대해서 제대로 정리해 드릴께요. 에스겔 35장 11절 한번 찾아보세요. 이거 아시면 여러분 예정론 다 아는 거에요. 진짜 예정론 알려면 동네 병원에 가지 마세요.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에스겔 35장 11절. “그러므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그들을 미워하여 노하며 질투한 대로 내가 네게 행하여 너를 심판할 때에”


예 됐습니다. 거기 읽고 그것 가지고 이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거든 여호수아 11장을 한번 봅시다. 지난 오후설교 때 한 본문인데요. 여호수아 11장 이거 알면 예정론 끝납니다. 하늘나라 예정론 시험이치면 이거 딱 나올거에요. 여호수아 11장 20절 예정론 아냐 모르냐를 이 본문 하나면 있으면 됩니다. 누가 한번 다른 분이 한번 읽어보세요.


11장 20절. 시간 가는거 아까우니까 내가 읽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을 진멸하여 바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을 멸하려 하심이었더라”


그래놓고 에스겔 다시 읽습니다. 35장 11절. “그러므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그들을 미워하여 노하며 질투한 대로 내가 네게 행하여 너를 심판할 때에 그들이 나를 알게 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하나님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 어떤 사전에 하나님 원인을 집어넣느냐 하면 하나님의 미움이 적극적이고 소극적이고 하나님의 미움을 미워해서 너희들은 절대로 네 십자가 복음을 절대로 믿어서는 안된다가 예정론이에요. 그동안 예정론을 왜 거부하느냐 하면은 전부다 자기 사적인 구원을 위하여 예정론을 연결시키기 때문에 예정론이 전부다 엉터리 예정론이에요.


칼빈도 그렇고 전부다 유대예정론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칼바르트도 마찬가지고. 예정론. 전부다 잘못되어 있는거에요. 미움과 연결되어야 돼요. 에스겔 35장 11절. 어떤 사람이 복음을 전해도 복음을 아는 목사가 전해도 교인들이 삐지고 화나고 “엄마 이 교회 오지마”하고 엄마하고 딸하고 아들하고 와서 아들 삐져서 갔다면서 화내고.


이명진 목사님이 복음을 전했다는 조건하에 그거 듣고 삐졌다는 말은 절대로 그들이 그들의 역량이 아닙니다. 그 화가 그들의 솜씨나 그들의 의지가 아니에요. 주님은 주님이 인간을 미워한다는 적극적으로 미워하게 하신거에요. “나 너 밉다 오지마” 라는 그 표시를 그 현장에서 드러낸거에요. 주님이 미워하는데 주님이 자기의 삶을 맹세해서 내가 너 미워한다는데 인간이 어떻게 달래가지고 그래도 얘는 봐줘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 짓 하지 마세요. 주님이 미운 개, 돼지 되는데 왜 되도 않는 인간이 나서서 봐주세요 이렇게 할 수 안 되지요 하지도 않지요.


이스라엘 백성도 구원될 때는 반드시 뭘 거친다? 미움을 거쳐서 구원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다 죽여버린다고 하니까 모세가 뭐라고 했습니까? 저를 봐서라도 봐주세요 해서 돌판 하나 더 줬잖아요. 반드시 출발점은 우리는 미움 미운털이 박힌 그런 박스에 악령의 바람이 불어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무슨 공부를 해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무슨 인간성이 좋아서 복음을 받아들입니까.


복음은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내쫓고 난 뒤에 찾아왔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자력으로 자기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다? 없다? 못 받아들여요.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이성에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내 이성 내 합리화 내 과학화 문제 있다 그걸 자인해야 되지요. 십자가에 대해서 내가 똑똑하다. 십자가에 대해서 무지하다 이게 아니고 십자가 말고 평소에 대인관계나 평소에 하는 모든 행세. 빨래할 때 샤워할 때 밥 먹을 때 하는 모든 일상에 나오는 성격 있잖아요. 그게 하자있고 문제 있다는 거에요. 인간에게 이런 질병이 있다.


제가 오후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인간은 날 때부터 제한이 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내가 질환이 있는 사람을 부르러 왔다. 질환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가라 이 말이죠. 의사는 누구한테 필요하다? 병자한테 필요한거에요. 그래서 나 내일까지 살아있으면 나 금식하고 병원갈거에요. 의사가 필요하다면 갈거에요. 또 무슨 바람이 불지 모르죠. 그건 내 소관 아니니까 주님 소관이니까.


날마다 잃어버렸다가 날마다 살아온 것에 그것에 대해서 내가 몰랐던 새로움이 나와요. 성령이 주는 새로운 기쁨. 기존 것 감사하라고 하면 식상해요. 감사할 수가 없어요. 늘 감사 해야 돼요. 늘 감사. 참 그저 오스카 와일드가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은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절대로 결혼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했거든요.


왜냐하면 결혼은 사랑의 끝이니까. 지루함의 시작이 곧 사랑의 끝이거든요. 새로움이 안 나오잖아요. 따라서 늘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이라면 절대로 인간은 결혼해서는 안된다. 그 사람 논리입니다. 논리는 맞는 이야기인데 가만 들어보면 이상해. 그래서 유명한 소설가에요. 남들이 상식적으로 아는 이야기를 안해야 되거든요.


우리나라의 어떤 유명한 시인이 있잖아요. 어떤 여자가 아름다운가? 제가 여러번 이야기 했죠. 어떤 여자가 아름답다고 해요?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 고은. 미투운동 고은이 지은 가사에 보면 가을편지 가사에 나와요.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기대감을 주니까. 가을되면 맨날 나오는 노래인데.


환경은 기존 환경은 새롭지 않습니다. 기존의 두달전에 은혜 받은거 은혜 받았다고 자꾸 우기는데 그건 지금이 재미없다는 뜻밖에 안돼요. 재미없으니까 그런 희망을 거는데 환경은 기존환경이란 우리는 우리 생각이지 없습니다. 늘 새롭게 적절하게 만들어 집니다. 인간은 뭐냐 하면 자꾸 있는 것을 내 것으로 붙잡으려고 하고 정착하려하고 자꾸 그걸 고정화시키려고 해요. 이게 무서운 공포로부터 도피하는 본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편이 아프다. 아내가 혼이 나가지요. 왜 그렇습니까? 건강한 아내와 건강한 나 이게 고정화시키기 때문에 그래요. 자꾸만 고정화시키기 때문에. 고정화시키면 우상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우상성을 자기 자신을 우상으로 자꾸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 우상을 섬기기 위해서도 그 환경도 내 우상에 적절하도록 환경을 고정화되라고 억지로 강요하는 경향이 있어요. 억지로. 그러다보니까 억지로 만들어낸 환경을 자기 기대사항인데 약간 좀 비뚤어지고 변화가 일어나면 질겁을 하고 혼이 나가지요. 이러고는 못산다 이러고는 못산다 이러지요.


제가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아내가 남편이 먼저 죽으니까 아내가 나 놔두고 왜 죽느냐고 하잖아요. 나 놔두고 왜 죽느냐. 죽을 때도 얼마나 자기만 먼저 챙긴다는 것이 티가 나 버렸어. 엉엉 울어요. 왜 나 놔두고 왜 죽습니까? 그런데 천사가 뭐라고 합니까? 천사가 그때 나타났다 칩시다. 그것도 두 명 나타났다 칩시다. 뭐라고 합니까? 여자여 왜 우느냐? 왜 우느냐? 이게 울 일이냐 라고 묻는거에요. 이게 울 일이냐?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서 웁니다’ 하지요. 13절에 봅시다.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시체를 어디다 두었는지 모릅니다. 마리아 입장에서 시신은 시신다워야 한다는거에요. 이거 마리아 생각입니다. 마리아 생각인데 17절을 봅시다. 17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초반부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됐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했지요. 이게 인간세계에서는 시체 아니면 살아있는거 딱 둘이에요. 살아있는 나를 만지던지 아니면 이미 죽었던 시신을 만지던지 둘 중에 하나에요. 내 거울에 내 모습이 보이던지 아니면 죽은 시체를 내가 주시하던지. 또 살아있는 남을 친구를 보던지. 딱 이 두가지에요. 살아있는 것을 보고 그리고 살아있지 않은 것처럼 죽은 것을 보고. 딱 이 두가지인데.


부활의 세계에는 뭐가 여기 첨가되었습니까? 보기는 보되 만져서는 안되는 것.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이게 ‘증강현실’이에요. 현실에 어떤 새로운 현실이 덮친 거에요. 보태진 거에요. ‘혹불’. 혹. 혹불이라고 하는 것이 표준말입니까? 그 옛날 전래동화에 있지요. 할아버진데 혹 난 할아버지. 욕심이 많아서 혹 붙이는거 있지요.


부활은 이 세상에 하나의 말미잘처럼 불쑥 돌출되어 있어요. 붙어있어요. 그런데 붙어있으면 누가 세상의 모든 일어나는 변화나 모든 환경은 주어진 모든 그것은 그걸 실시하는 주최측이 어디입니까? 부활측이에요? 인간세상측입니까? 부활을 부활로 드러내기 위해서 십자가를 십자가로 드러내기 위해서 이 세상의 모든 변화가 그렇게 주님의 손에 의해서 조종하고 적절하게 재배치가 되고 재편되는 겁니다. 늘. 모든게.


개인적으로 주의 뜻이다 하지말고 나뿐만 아니고 나와 무관한 김정은 이야기라든지 북한 이야기라든지 모든 일어난 변화도 십자가와 부활을 위해서 벌어지게 되는거에요. 제가 만약에 감독이나 시험 출제위원이라면 이렇게 낼거에요. ‘북한의 핵문제와 십자가의 관계를 논하라’. 아마도 못 알아맞출거에요. 북한의 핵문제와 십자가를 논하라. ‘여러분의 치통과 십자가를 논하라’. 이 문제 더 어려운 문제네. ‘당신이 연애하는 것과 십자가를 논하라’. 이러면 또 엉뚱한 답변이 너무 많이 나와서 안돼. ‘저 여자 얻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십자가 고생했는데’ 또 이렇게 되도 않는 사적인.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어떻게 사적인 것의 한계를 공적인 것이 제공했느냐가 나오면 정답이 되겠습니다. 부활이라는 공적인 이야기가 개인적으로 구원 받겠다는 이 의도를 차단시키느냐 하는 것은 언급하게 되면 이게 정답이 되겠지요. 십자가는 사적이 아니고 공적인 구원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구원’이거든요. 우리가 죽었다 살아나도 뭐 된다? 내 몸 안되고 누구 몸 되요? 그리스도의 몸이 되잖아요.


얼마나 우리가 공적입니까. 나 지금 공적으로 알레르기 걸렸다. 공적인 우리가 하나하나 공적인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것 때문에 형제를 무시하지 말라고 나와요. 서로 사랑하고 서로 교제하고 교통하라는 것은 앞에 조건을 붙여요. 예수 안에서. 같은 몸끼리 왜 싸우냐 이 말이죠. 어떻게 눈이 발한테 쓸데없는 소리를 왜 하느냐 그런 이야기가 개인구원이 이거는 사기다 아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거에요.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천당 가서 자기 집안식구 자기 성씨 집안 광산 김씨만 모아놓고 거기다 또 이 세상처럼 또 하게 되면 그럼 남자는 남자가 되고 여자는 여자가 되고 남편은 남편이 되고 아내는 아내가 되잖아요. 그거는 죽음의 세계의 살림살이지 천국 가서 또 그렇게 살라고요? 거기서는 시집도 아니가고 장가도 아니간다 했어요. 그 말에 삐져서 천국 안 가려는 유대인들 많을거에요. 시집가는 재미도 없으면 무슨 재미로 가나. 천국 가서 뭐하나 당구 치나. 천국가면 당구 500치는 사람 얼마나 또 뽐내겠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내가 추진한 모든 일이 내가 낭패로 끝나야 될 이유를 이제 아시겠지요? 내가 추진한 일이 다 실패로 끝난다고 생각하지 말고 ‘무의미’로 무의미하다. 실패하고 무의미하고 달라요. 실패하게 되면 안타까워 어떡하나 조금만 이렇게 달리 했으면 성공했을텐데. 무의미한 것은 의미가 없어요. 성공해도 의미가 없고 실패해도. 건강해도 의미가 없고 아파도 의미가 없어요. 의미 없이 아파 죽어야 구원받습니다. 자기가 무의미하다는 것.


왜냐하면 나를 의미 주려고 나에게 이런 조건 적절한 환경을 주는게 아니고 예수님이 살았있잖아 그거 알려주려고 이러한 환경을 만들어 주신거에요. 어차피 이거 이 세상 사는거 잠깐이거든요. 제 말 아니잖아요.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데 어떻게 잠깐하고 성분 2cm하고 200km하고 비교가 됩니까. 천국은 2000km보다 더 길어요. 이거는 2cm보다 더 짧아요. 있으나마나한 그것 오죽했으면 ‘안개’라고 했겠어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저버리는 ‘끝’.


그 안개하고 영원한 주님이 살아계시는 영원한 그 세계하고 그거는 비교가 안되지요. 현재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지금 고난 잠깐 필요 없어요. 지금 여기서 연습게임 잠깐 뛴다고 보면 됩니다. 그냥 연습게임했다고 보면 돼요. 연습게임. 연습게임 좀 그러면 친선게임. 친선게임. 같이 결혼한거 친선게임. 부부라는게 뭔줄 알아나보자 해가지고 친선게임 붙은거에요. 어차피 올라가지도 않고 상금도 없으니까.


아 이렇구나 부부라는게 아 자식 놓는게 이런 기분이구나. 내가 추진한 이 자식놓기가 결국 나에게 낭패로 돌아서는구나. 개 키워보세요 마찬가지고. 하루에 7만 개가 돌아가신답니다. 우리나라의 통계에 보면. 7만명. 7만명이 아니고 7만 개. 처음에 개 키울 때 얼마나 좋아했어요. 갖다 버릴데 없어가지고.


성경이 사적으로 끌어당길 문제는 아닙니다. 시편 16편10절 한번 봅시다. 시편 16편10절. 이왕 죽을거 고함지르고 죽자. 어차피 살아봐야 무의미하고 강의해도 다 무의미한건데 내가 강의한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라고 했잖아요.


이 시편 16편10절에 나온 본문을 볼 때 우리는 얼마나 사적으로 이용해댔습니까. 나에게 주어진 공포심을 내가 이거 해소해보려고 그 다음에 뭐냐? 나는 이 말씀을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뭐냐? “믿습니다” 거든요. 그 “믿습니다”가 ‘행함’이에요 그게. 믿음이 아니고. “나는 믿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게 ‘믿음’이에요.


의인은 죄에서 나오듯이 믿음은 불신앙에서 나와요. 불신앙이 없는 곳에는 믿음이 안 나옵니다. 제가 주일낮에 했잖아요. ‘천국의 열쇠’. 천국의 열쇠는 어디서 나온다? 교회를 망하게 하는 그 힘에서 나와요. 교회가 망했을 때 그 현장에 보니까 천국의 열쇠가 있는거에요. 따라서 교회에 있을 때 교회가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왜? “교회는 있으나마나 무의미합니다” 라는 말 해야 그게 ‘교회’에요. 그게 교회라고요.


천국의 열쇠가 어디 있느냐 하는 그거 주일날 설교 생각하면서 잠깐 드라마를 보니까 알함브라 궁전에 보니까 마지막 장면에서 혜미? 여자 주인공이 남자주인공 현빈을 칼로 찔러 죽여버려요. 그 칼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은 천국열쇠거든요. 천국열쇠 딱 열면 칼로 되어 있고 그 칼 가지고 컴퓨터게임 버그 지운다고 버그가 누구냐 바로 버그를 해결할 해결자가 버그였어요. 반전 좀 있어야 뭐 좀 있어보이거든요.


꼭 십자가같애. 죽여버립니다. 기타 치고 따라라따라라 알함브라 궁전 한번 치고 죽여버려요. 유대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서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죽임을 당했어요. 일종의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버그에요. ‘적폐요소’, 적폐요소.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 요소에요.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 요소가 이스라엘한테 이스라엘 망하지 말라고 이스라엘을 죽였거든요. 이게 요한복음 11장에 나옵니다. 한사람을 죽여서 누가 살자? 이스라엘 살자.


그런데 그 죽어야 그렇게 해줘야 복음을 싫어하는 예수님을 싫어하는 자가 있어줘야 주님의 사랑이 미워하는 속에서 비로소 나와요. 너 주님 미워함 받을래? 사랑함 받을래? 전부다 주님 사랑 받고 싶죠. 아니요. 내가 바로 미워하는 자의 구성원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줘야 비로소 그걸 자인하는 것을 성령이라고 하거든요. 성령은 깨닫게 하는 것. 모든 결과를 깨닫게 하는 것. 비로소 이런 사태가 바로 성령이 임한거에요. 그게 사도행전 2장에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어찌할꼬 하잖아요. 어찌할꼬 하는 이유가 뭐냐? 우리 손으로 오신 메시아도 우리 손으로 되돌려 보내었습니다. 어찌할까요. 세상에 피자 배달시켜놓고 피자 온 사람을 도로 보냈어요. 도둑놈인줄 알고. 못 먹는 피자는 더 맛있어요. 주님을 돌려보냈으니까 어찌할꼬. 잘못했습니다 하고 그 다음에 성령이 찾아오게 되면 구원을 얻으리라.


그러면 거기서 바뀌는게 있어요. 내 쪽에서 했다 에서 내 이름으로 할거잖아요. 이제는 네 이름을 청산하고 이제는 모든걸 주께서 하셨다 해서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고백을 하란 말이죠. 사도들이 기적을 행해도 ‘주의 이름’으로 하잖아요. 귀신들도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하고 있는 그 사도들의 이름으로 하는게 아니라 내 자신의 견문과 능력으로 하는게 아니다 했어요.


주님께서 그 사람들을 직접 구하시고 나는 목격자죠. 사람들 말하기를 주님께서 언제 그 앉은뱅이를 낮게 했느냐? 그러니까 ‘증강현실’이죠. 그냥 현실 속에서는 주님이 보이는데 다른 사람은 안보이는거에요. 성도가 느끼는걸 다른 사람은 못 느끼는 겁니다. 그럼 성도는 제자 사도는 왜 느끼느냐? 본인이 존재 자체도 나로 인하여 있지 않다는 것을 늘 느끼다보니까 누구 하나 나처럼 그렇게 구원받았으면 이거는 어떤 권사가 집사가 전도하는게 아니고 주님이 직접 전도한거에요.


전도받은 사람은 처음에는 몰랐지요. 저 권사가 집사가 고구마 전도라고 해가지고 기도 많이 해서 내가 전도된 줄 알았는데 가만 보니까 그게 아니고 주님이 직접 나를 건졌다는 것을 알지요. 그래서 전도받은 사람이 누굴 전도하게 돼요? 자기 전도한 사람을 전도해야 돼요. “집사님 그렇게 하는게 아닙니다. 기도 많이 해서 전도한게 아니고 중보기도한게 아니고 주님이 찾아올 때만 구원됩니다”.


그럼 저 사람은 삐져가지고 배은망덕도 이런 배은망덕이 없다. 너 전도한다고 투자한게 얼만데 올 때마다 밥 사주고 차비주고 택시 태워준거 돈이 얼만데 다 내놔라. 정성이 얼만데 너 때문에 새벽기도 중보기도한다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거 보세요 집사님 자기 공로 남아 있잖아요.


그때그때 자기가 말렸다는 것을 깨닫고 ‘아 주의 은혜로 했지’ 뒤늦게 은혜 갖다붙여봐야 그게 어색하지요. 대화하다가 갑자기 복음 아니란게 들통났잖아요. 후딱 갖다 붙여요. 그것도 그냥 붙이는게 아니고 후딱 갖다 붙여요. 아 참 내가 주의 은혜로 은혜로 은혜로. 주의 은혜로 했지. 주의 은혜와 우리 행함이 어떻게 결부가 됩니까? 말이 안되지요.


주의 은혜는요 주의 은혜는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죄인의 행함이죠. 주님이 죄인의 행함을 ‘의’로 바꾸신거에요.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방인과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과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뭐냐 하면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그럼 제가 만약에 예수 같으면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그건 하나님의 은혜로 주십니다 이렇게 할거란 말이죠. 그렇게 할 수 있잖아요. 자꾸 염려하지 말고 주님이 직접 주십니다 이렇게 하면 되겠다 이 말이죠. 우리가 만약에 고상한 점잖은 도 닦은 유대인이라면 그렇게 하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하게 되면 사적인게 돼요. 어쨌든 먹을거 입을거 있어야 내가 죽음을 이길수 있는 그 공포심을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이제는 내 힘이 아니고 주의 은혜로 주신다는 그런 공식으로 구실을 갖다 붙인게 돼요. 얼마나 교회마다 다 그래요 교회마다 내가 보니까. 아이고 목사님 은혜롭다. 들어보니까 그 이야기야. 사적인 것을 못 벗어났어요. 옛날에는 내가 노력해서 얻었는데 주의 은혜로 얻었다. 굉장히 은혜스럽죠.


그러나 결국 결론은 뭡니까? 은혜든 뭐든 내가 살아서 땡 잡았잖아 그쪽이에요. 개인적인 이득으로 그만 마감돼요.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 나라와 의를. 다시 말해서 이방인들은 뭐다? 이방인들은 전체가 목적 자체가 죄가 됩니다. 먹을거 입을거 구하는것 자체가 죄안에서만 한계 지어서 그 안에서만 순환되는 종교적 논리구조입니다.


그 나라와 의는 바로 내가 은혜로 먹고 살아보겠다고 노력했던 그것도 주의 은혜로. 주님께 감사하는 용도로 나 살았다하는 자들의 손에 의해서 누가 죽었어요? 메시아가 죽었잖아요. 이제 감이 오십니까? 교회가 어느 정도로 지금 엉망인지. 집단으로 얼마나 주님이 안 계시는 쪽으로 사람들을 얼마나 몰고 가는지 아시겠습니까? 인천 순복음교회가 불이 활활 타는 동영상을 보고 순간 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요. 좀 다 탔으면 좋겠다.


그러다 아차 갑자기 성경구절 한두군데가 막 튀어나오는거 아니에요. “망대에서 18명 죽었다고 좋아하지 마라”. 원수가 나쁘다 할 때 좋아하다가 너도 당한다가 마태복음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 막 나와요. 에돔이 왜 벌 받는지 알아요? ‘이스라엘이 형제인 이스라엘이 망할 때 너 기뻐했다’는 죄목으로 망해버려요.


갑자기 좋아했다가 갑자기 우리 교회 누전이 안 되는가 싶어서. 그러니까 주께서 불나는 조건도 보세요. 얼마나 적절하십니까. 모든 인간은 사적으로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 자기 힘으로 자기 공포심을 이겨보려고 노력하는 원인을 수정해서 결과를 변화시키겠다는 그 노력 외에는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어요.


자, 그 변화를 초월해서 주어지는게 뭐냐? 하나님의 미워하심이에요. 그럼 복음전파의 목적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미워하심이 어디서 등장하는지 어떤 현장에 등장하는지 하나님의 미워하심 좀 보자 하는 식으로 복음을 전하면 되지요. 어차피 종은 자기 일이 아니고 주인 일이니까. 주님이 미워하신다니까. 누가 미워하는지 알 수가 없잖아. 그러나 복음을 전하면 아 주님이 미워하시는 사람이 등장하게 될거에요. 미워하심의 특징이 뭐냐 절대로 복음 쪽으로 안 온다는 거에요. 어떤 경우라도 기를 쓰고.


이 테스트를 예수님이 어떤 여자한테 했어요. 나 너 미워한다. 아~참 인간을 모독한 참 심하게 모독한 테스트. “어디 개 같은 여자가 아들만 먹는 것을 먹느냐! 하늘 아들에게 준비된 양식을 네가 왜 천국의 떡을 네가 이방여자가 먹어!” 그 여자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지혜롭게 대답해요. 주님의 그 의도를 알아채고 답변을 한 거에요. “옳습니다. 저 이방여자입니다. 개입니다”. 개라고 하는 것은 그 당시 유대사회에 이방인들을 개로 봤으니까.


왜 개냐면 할례 없는 것은 개가 돼요. 할례 없는 족보는 인간으로 취급을 안했어요. 그래야 진멸이 정당화 돼요. ‘진멸’. 애 젖먹이부터 다 죽이는게 진멸인데 할례 없으면 다 죽여버리라는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백성으로서 마땅한 도리입니다. 팔레스타인 다 조져야 돼요. 예루살렘 뭐 황금돔 내가 유대인의 대통령 같으면 벌써 해결했어요.


그 핵폭탄 설치해가지고 핵기지 만들고. 어디 이 땅이 누구 땅인데 아브라함 약속의 땅인데 누구 땅인데. 가자 지구고 뭐고 전부다 가라 너희들 알아서 가라 난민하든지. 지중해 배타고 가든지 가라. 이 땅은 우리 땅이다. 주의 뜻이다. 왜 이 유대인들이 그렇게 못하느냐 하면 그들이 여호와를 안 믿어요. 그들이 믿는 것은 이스라엘을 믿지. 이스라엘을 믿지 여호와를 안 믿어요. 여호와 믿는 인구수가 15%도 안돼요. 나머지는 안 믿어요. 잘 사는 나라 믿어요.


그래서 정치적 협상을 하고 있는 거에요. 계산이 이거 쫓아내면 얼마나 귀찮게 이거 군사무기 뽑는데 예산 얼마 들고 핵폭탄 200개 되는데 더 만들어야 되고 아 귀찮다 대충 나중에 힘 있을 때는 모르겠지만 봐주고 있는거에요 지금. 이 모습이 오늘날 어쩌면 우리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잖아요. 우리 모습. 무슨 이야기하다가 이스라엘 이야기하고 있나.


아까 그 개 같은 여인. 개 같은 여인이 하는 말이 뭐냐 하면 개 같은 이방여자가 하는 말이 ‘현재 이스라엘이 완결된 이스라엘 아니잖아요’ 하는 뜻이에요. 주님의 앞서 할 계획을 이방여자가 물론 성령을 통해서 알아챘겠죠. 그러니까 “네 믿음이 크도다” 이야기하지. 어떤 절차를 주께서 하는 절차를 보여주는 거에요.


네 믿음이 크다는 말은 유대인 사회는 믿음이 있다 없다? 없다는 거에요. 내가 이방여자한테 믿음을 만들어서 그 믿음에 내용대로 착착 이제부터 현실화시켜 나갈거야 라는 거에요. 백부장도 마찬가지고. 기존의 아브라함 자손은 다 쫓겨날 것이고 천국은 이런 자들이 차지 할 것이다. 어디 남의 나라에 지옥 갈 인간이 찾아와 나가!! 나가라고 할 때 기준이 누구입니까?


기준은 이방 백부장이 기준이지요. 기준은 누가 만드냐 하면 주님이 만들어요. 부활이 포함된 세계가 만들지 부활이 빠진 세계는 이 현실을 이룰 수 있는 자격이 못됩니다. 내 인생을 우리가 함부로 평하지 마세요. 우리는 부활을 계산 안하고 평해버리면 안돼요. 부활을 계산하고 평한다면 우리는 내 인생의 행함이 내 환경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저 주어진 그대로 찍으라고 하면 엑스레이 찍고 약 먹으라고 하면 약 먹고 그 일에 고분고분 순종하는 거에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른 사람 보기에 목사님 믿음 없는 사람과 똑같이 행동합니다. 똑같애요 똑같애요. 똑같지 뭐. 나 이거 찍고 나을래 나 죽을 때 안됐어. 왜? 나 죽기 싫어 이런 행동이나 말로만 죽겠다 죽겠다 해놓고 더 좋은 약 없습니까? 뭐 민간요법 없습니까? 똑같지. 예수님이 그래요 똑같애요. 예수님이 맨날 큰소리치는 것 같애. 아버지가 나와 함께 있다. 큰소리 쳤는데 맥없이 죽었어요.


고린도후서 14장에 나옵니다. 약해서 죽었어요. 약한 그것이 약할 수 있다는 그것이 곧 강함이라. 그래서 너도 약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라. 네가 망가져도 괜찮다는 믿음을 가져라. 있는가 스스로 자기를 증명해보라. 교회 부흥시킬 능력 있느냐? 그 이야기하는게 아닙니다. 약할 수 있는지. 망가질 수 있는지.


너 복음알고 집구석 쫓겨나도 노숙자 되도 잘 살 자신 있는지. 복음 알고 노숙자 되신다면 멀쩡한 집안에서 행복하게 사시면서 본인을 노숙자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 그러면 애가 서울의대 안가도 건강해준 것만 해도 고마워요. 원피스 하나 입고 온 유리창에 낙서 이렇게 안 설쳐준 것만 해도 고마운줄 알아야 해요. 스카이캐슬 이야기입니다. 그냥 어머니 저를 다 믿으세요. 저를 믿으셔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평소에 제 믿음 이야기 아니고요. 예수님 평소에 얼마나 유대인 보고 이야기했어요. 나 믿어야 된다고. 김주영이가 보통 날 믿으셔야 됩니다. 그런데 갈수록 뭡니까? 믿을 수 있는 요건을 의도적으로 빼버려요. 제자들아 너 이게 믿으라고 했지? 일부러 빼요. 베드로가 화 안날 수 없고 베드로가 배신 안할 수가 없어요. 배신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 믿는 것은 다 빼니까. 믿는다는 말은 어느 쪽에서 어느 쪽으로 간다? 내 쪽에서 주님 쪽으로 가는 그 코스를 주께서 절대로 안 받는 코스에요. 떡을 먹었다 쫓아온다 안 받는 코스입니다. 저런 코스라 하는 것은 나를 죽이고 죽고 난 뒤에 그 죽은 시체 속에서 내 살과 내 피를 그걸 뽑아서 먹어라 이 말이죠.


내가 죽인 그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내가 죽였다는 그 증거가 생생히 남아있는 그걸 입에 집어 털어 넣어라 이 말이죠. 그게 사는거다 이 말이죠. 나는 죄인이다 하고. 그게 사는 길이에요. 목회한답시고 교회 만들어서 천국 가려했지요. 기도한다고 새벽기도해서 주님의 기도 다 막아놨지요. 헌금한답시고 해가지고 아나니아 삽비라 헌금 다 했지요. 모든 성경에 나온 우리의 한 짓거리 할 것이 그것밖에 없는데 그것 하는것 조차도 주님 보시기에는 아주 적절한거에요. 왜? 미움 안에서 뭘 끄집어낸다? 미움 받아 마땅한걸 통해서 주님께서 사랑을 비로소 미움 속에서 사랑을 끄집어내는 거에요.


오호라 나는 어떤 사람이다? 곤고한 사람이다. 이게 지금 연출하는 겁니까? 지금 사도바울이 연기 뭐라고 하면 구원받지? 지금 연기하는 거에요?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인상 이래가지고 “아아아~~~”이렇게 하는겁니까? 곤고한 사람으로 자기 존재는 끝났어요 거기서. 자기 존재로서의 할 역량은 곤고한 사람이라고 파악하는 그걸로 끝났어요. 나중은 성령에게 맡겨야 돼요.


찬송하리로다 하지요. 그 찬송 비로소 찬송이 나옵니다. 찬송하리로다. 8장 1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정죄함이 없나니”. 그래서 제가 로마서 책을 지으면서 제목을 그걸로 정했습니다. 정죄함이 없나니. 정죄함이. 나는 너를 죄인이라고 누가 뭐래도 옆사람이 옆에서 누가 뭐래도 나는 너를 죄인이라 하지 않겠다. 현장에서 간통한 간음한 여자를 만나도 나는 너희들을 죄라고 하지 않겠다.


왜? 왜 그런데요? 내가 그렇다하면 그런거야 내가.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은 그런거에요. 저 사람은 착한데요. 저가 나를 미워했으면 나는 저를 계속 미움의 대상으로 내가 미워하는 행위에 열매 실적으로 내가 내 쪽에서 밀어내겠다. “오지마! 천국으로, 너 지옥가!” 왜? 너의 의사와 관계없이 내 의사이기 때문에. 주님의 의사이기 때문에. 이 정도로 주님이 무서워요. 차가운 여자입니다. 정말 차가운 분입니다. 너무 차가워요.


주님이 하는 일은 처벌하는 일이에요. 심판하는 일입니다. 심판한 그 일을 아가에 보면 시커먼 얼굴을 가진 술람미 여인한테는 내가 보기에는 이 세상에 너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가 있는가? 왕궁에 왕의 격에 맞는 이 모든 것을 너의 격에 맞는 것으로 내가 안아줄게. 자기 세계 안으로 확 안아버리죠. 어떤 균열이 일어나지 않도록. 안아버려요. 그전에 그만큼 갈라졌다 갈라졌고 여자와 갈라져있고 서로 모르는 사이였고 그 속에 사랑이 꽂히니까 사랑의 둘이 하나가 되겠지요.


결국에 남는 것은 솔로몬은 사랑의 왕이었다. 주님은 누구였다? 사랑의 왕이었다. 누구에게만? 천사가 말을 건낸 사람에게만. 성령이 말을 건낸. 막달라 마리아한테는 주님이 사랑이었고 미움이 아니고 그냥 사랑이 아니고 전혀 어떠해도 안 미워하는 사랑이고 저쪽은 어떤 이쁜 짓을 해도 미움이고. 내가 밉도록 작정했기 때문에. 그게 예정론입니다 예정론. 무섭지요. 내가 밉기로 확정했다는게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15절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이거는 천사가 자기 역할 끝나고 그 뒤에 직접 누가 왔습니까? 마리아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지금 이 교회에 이 장소에 저희들이 가봤거든요. 떠들기만 하고 천사는 못 봤어요. 랍오니 이런거 예수님 못 봤습니다. 그런데 마리아한테는 나타났어요. 왜 우리는 못 보느냐?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에. 기도로서 보여주옵소서 한다고 붙잡을 수 있는게 아니에요.


우리 쪽에서 만약에 어떻게 나타났다면 기도해서 나타났다면 그 기도조차 주께서 유발하신거에요. 히스기아 왕처럼. 항상 출발을 성경해석을 신약, 구약 성경 해석은 오직 기준은 하나 인간은 끼어들지 마라. 오직 뭐로 해석한다? 십자가와 부활로만 모든 성경을 다 해석하라. 해석의 기준은 결정났어요. ‘십자가와 부활’.


십자가 부활은 우리를 해석할 자격이 있다고 우리를 죽은 자로 봐요. 죽은 자의 해석은 산자만이 해석할 수 있다 이런 뜻이거든요. 그래서 신학교 가서 공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몰라요. 신학교가서 신학이 나를 계속 살릴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공부하고 있는데 어떤 해석도 다 엉터리에요. 예수님 살아있다는 것도 엉터리고 부활도 엉터리고 재림도 엉터리에요. 주께서 인정 안하거든요.


지금 이 상황보세요. 지금 막달라 마리아가 울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울고 있어요. 막달라 마리아가 지금 곗돈 깨져서 우는게 아니잖아요. 예수님 보고싶어서 울잖아요. 예수님 보고싶어서. 그 현장에 어디 갔는지 그냥 동산지기인줄 알았어요. 알고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히브리는 유대인 때는 원래 아람어라 하는데 히브리 맞아요. 어떤 학자들은 하는데 하여튼 학자가 문제라. 히브리 맞습니다만은 히브리 중에 두 가지가 있어요. 이후에 보면 히브리도 두 종류가 있어요. 그 당시에 또 다른 히브리말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의하면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느니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강의 처음부터 하겠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현재 우리 사는게 정상이고 정상인데 다만 우리가 놓친게 성경을 안 보니까 놓친게 부활을 놓치고 십자가를 놓쳤구나. 현재 이 사고방식에다가 이거 하나 갖다 붙이면 정상에다가 더 추가해서 온전화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사람들이. 사람들이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왜 그리 민감하고 반대를 하느냐 하면 제발 내 것 좀 건드리지 말아라는 거에요.


그동안 3,40년 신앙생활한 것 좀 건드리지 말라는거에요. 무슨 교회입니까? 김성수 목사 서머나교회에서 자기도 복음 안다는거에요 자꾸. 전면적으로 다 고쳐야 되는데 다만 그들은 바른 복음 찾으려고 하는 자기 자신은 문제가 없고 기존 교회는 찾을 수 없었는데 김성수 목사님께서 이렇게 돌아가시면서 순교까지 하시면서 우리에게 전해준 이 말씀을 첨가했기 때문에 기존에는 문제없고 첨가된게 괜찮기 때문에 우리는 괜찮다 이렇게 보는거에요.


바른 복음을 찾으면 그 자신은 자기 자신은 손댈게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복음은 근원적으로 다 뚫고가거든요. 복음은 여기 있는데 하나 첨가하는게 아니에요. 처음부터 우리의 사고방식 다 파헤쳐요, 다. 내가 뭔가 내가 추진을 했어 그동안. 내 구원에 천국 이런 식으로 추진을 한 그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계속 역으로 파들어옵니다.


그래서 제가 대구강의에서 했지만 우리가 할 일은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의 할 일은 아무도 안 들었구나. 죄 짓는거에요 그냥. 어떤 죄? 엑스레이 찍으면 이제 낫겠지 이거. 천식 낫겠지 주여 살려주시옵소서. 이런 죄 짓는거에요 이게. 예 시키는대로 다 하겠습니다 금식하고 사진찍고 다 하겠습니다. 양 맞춰 식사 후 30분 꼭 지키겠습니다. 다 해보는거에요. 적절한 주님이 주신 환경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너의 생명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하나님의 적절한 기회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비록 마리아가 부활을 몰랐지만 그런 적절한 환경조차도 의도하셔서 만들어 주셔서 자신의 부활의 현장에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을 끌어모으신 하나님의 절묘한 그 전략을 지금도 우리 가운데 실시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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