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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3 06:53:34 조회 : 57         
279강-YouTube강의(배신)20190618-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하림(IP:61.102.247.43)
279강-YouTube강의(배신)20190618-이 근호 목사


제279강, 제목은 ‘배신’. 이 세상에서는 진정한 배신이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면 유일하게 배신당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기에 그 누구도 배신당했다는 소리를 함부로 하면 안 돼요.

배신이라는 말을 쓰려면 그만큼 그 전에 은혜를 주시든지 창조했든지 키워줬다든지 근거가 있어야 배신이지 자기 이익을 위해서 뭘 해놓고 ‘배신당했다’라고 하면 이용하다 실패한 것이지 배신이라고 할 수 없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한테 배신당한 거, 그게 가장 결정적 배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이 배신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기본으로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에 대한 관점, 세상을 보는 안목 이런 것을 배신을 통해서 다 밝히 보이고자 하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여기에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나봇의 포도원이 나와요. 나봇의 포도원이 나오는데 거기에 아합의 왕궁 근처에 나봇의 포도원이 있었어요. 이렇게 보면 여기에 배신이라는 개념이 나올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왕은 왕대로 지 생활하면 되고 나봇은 그냥 자기 소유의 포도원 관리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아합 왕이 고민에 빠져요. 더 큰 넓이의 포도원 줄테니까 너 그 포도원 달라고 하니까 나봇이 못하겠다는 거예요. 여기서 아합 왕은 어떤 배신감을 느끼는 겁니다. 왜냐면 배신감 없이는 복수라는 게 성립이 안되기 때문에.

그만큼 아합은 무엇을 느꼈냐면 ‘나는 이스라엘 나라의 왕이다’ 이 말이죠. 왕 같으면 백성들은 누구의 혜택을 입고 있냐하면 왕의 혜택을 입고 있다고 봐야 됩니다. 왜냐면 적군이 쳐들어 왔다든지, 그리고 치안 문제, 예를 들어서 내가 가게에 있는데 강도가 왔을 때 경찰이 있어야 중재하고 막아줄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평소에 국가라 하는 것은 국가가 큰 울타리가 되가지고 국가 없이 혼자 있으면 누가 와서 뺏어 가도 법적으로 항의할 데가 없잖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평소에 자기 식대로 산다 하지만 은연중에 국가의 치안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건 누가 아느냐 하면 일반 백성들이나 국민들은 못 느껴요. 어려울 때나 느끼지 못 느낍니다. 그러나 지도자쯤 되면 늘 그걸 느끼는 거예요. ‘이것들아 내 덕에 사는 줄 알아라’ 라고 늘 생각하는 거예요, 북한의 김정은처럼.

북한의 김정은은 그걸 모를까 싶어서 맨날 박수치라 하고 충성하라 하잖아요. 그러니까 더 밉상이죠. 경제만 살리면 뭐 박수치지 말라고 해도 박수치는데 이건 완전히 인민들 굶어 죽게 해놓고는 그게 부끄러운지 박수치고 환영하고, 까불면 백프로 쏴죽이고 이런 짓한다 이 말이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나라 대통령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면 그만큼 혜택을 줬으면 그 임금이 그냥 공짜로 달라고 합니까. ‘더 넓은 것, 더 좋은 포도원 니가 골라. 니가 바꿀 수 있는 포도원 골라. 나는 니가 재배한 포도원, 그것을 갖고 싶은데 좀 바꾸자.’ 라고 사정했어요.

그런데 나봇이 ‘못 바꾸겠습니다.’ 나오는 거예요. 여기서 무슨 마음이 울컥 올라오느냐 하면 저게 왕의 은총도 모르고...뭐 이렇게 되겠죠. 니가 왕하고 니하고 친구인줄 아느냐 뭐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여러분 그런 거 많이 안 느낍니까? 여러분이 친구한테 잘해줬는데 자기 사소한 거 도와달라고 하니까 친구가 일언지하에 끊어버리면, 평소에 니가 그 사람한테 해준 많은 공들였던 것들이 한꺼번에 뭘 느낍니까? 배신감을 느끼는 거예요. 지는 받아먹고 내 좀 도와달라고 하니까 안 도와준다. 그렇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 이 가룟 유다의 배신감이 항상...우리가 어디서 화가 나느냐하면, 가룟 유다가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 늘 잠재적으로 배신할 수 있는 여지가 내부에 출렁이고 있는 겁니다. 배신이 어디 가룟 유다만 하는 게 아니에요. 주제파악이 안된 모든 인간들은 배신감을 느끼기 마련이에요.

일개 농부가 왜 임금 말을 안 들어요. 그걸 안 듣는다고 소문 나 보세요. 다른 백성들이 왕의 위신을 얼마나 우습게 보겠습니까. 이참에 조져버리자. 그게 누구냐면 부인 이세벨이 그렇게 나온 거예요. 이참에 왕의 왕다움의 본대를 보이자는 거예요, 본대를.

백성들을 가만 둬버리면, 백성들이 소문나면 너도나도 왕의 말을 우습게 여길 게 아니냐는 말이죠. 왕이라 하는 것은 뭐냐면 누구도 허락없이 그냥 군사력으로 함부로 빼앗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왕이다 이 말이죠.

그런 사람인데 자기 딴에는 많이 낮춘 거예요. ‘바꾸자’ 이게 많이 낮춘 거예요. 그러면 나봇이 왕의 화를 안 돋워야지... 상대방이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게 아니고 칠 수 있는데도 봐줬으면 그 봐준 어느 정도의 거기에 대한 합당한 대우도 나봇이 해주는 것이 세상사는 모습 아닙니까.

나봇은 손톱도 안들어갑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에. 여호와의 율법의 구체화가 지금 포도원이라 보는 거예요. 왕이 보기에 그거 너 소유라고 보고, 나봇은 내 소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소유며 나는 하나님이 넘겨준 땅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나는 목숨 걸고 왕이 아니라 누가 와도 내가 지켜야 될 게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거라서 율법에 준해서 이것은 넘겨줄 수 없다는 겁니다. 율법이냐 아니면 내 목숨이냐 해서 나는 내 목숨 버리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지금 나봇이 나왔다 이거에요.

그러면 왕이 나봇을 건드린 것은 누구를 건드린 것이냐면 그건 나봇을 건드린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을 건드린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을 건드리면 그 나봇이 그만큼 살도록, 이스라엘 유지하도록 누가 했습니까? 왕 위의 왕인, 누구에요? 여호와 하나님 아닙니까?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배신.

잘못 건드린 거예요. 아벨을 가인이 잘못 건드린 거예요. 아벨로 하여금 제사 받은 것은 아벨이 정교한 제사를 드려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받고자 해서 그냥 그 제물 자체를 응답이라는 형식으로 그냥 받은 거예요. 그러면 아벨을 건드린 것은 누구를 건드린 겁니까? 하나님 자신을 건드린 거예요.

하나님은 온 천지가 가룟 유다인 것을 가룟 유다를 통해서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온 천하가 지 주제파악 안되어 가지고...지 주제도 모르니까 어디 감히 나를 건드려. 전부다 선악과 따먹고 신이 되어 가지고 어딜 나를 건드려. 어딜 나를 건드려.

건드려도 가만히 있는 사람은 누구밖에 없느냐면 세리, 창기, 그리고 강도밖에 없어요. 나머지는 지 잘난 맛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배신의 보편화. 전체가 배신의 바다예요. 바로 나봇의 포도원은 그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게 되면 엘리야 시대에 엘리야가 과부집에 갔지요. 사르밧 과부집에 가서 먹을 것 없어서 줬잖아요. 줬다 이 말이죠. 그러면 감사하잖아요. 그런데 열왕기상 17장 17절에 보면 그 아이가 죽었어요. 그 때 사르밧 과부가 뭐라고 하냐면 18절,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라고 화를 내는 겁니다.

둘다 죽으려고 작정했으면, 죽은 사람 빼주니까 내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으로 죽을 때 살려주시면 고맙다고 얘기해야 되는데, ‘이런 수모 당하려고 살려주셨습니까?’ 이런 식으로 대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을 때 ‘하나님 고맙습니다’ 하잖아요. 이게 진정 고마운 게 아니에요. 자기 욕망을 달성했다 그래서 감사하다는 것이지 주의 뜻을 알아서 감사한 게 아닙니다.

진정한 주의 뜻은 이거에요. ‘내가 은혜를 받고서도 주님 앞에 배신할 수 있는 죄인에 불과하다.’ 이러한 것을 뽑아내는 것. 이게 기름 채워준 거보다 더 큰 은혜입니다. 그 죽은 아들 다시 살림으로써 두탕 뛰죠. 같은 집에 두 번이나 엘리야가 관여합니다.

바로 잃어버린 데에 관여하시고. 주께서 지금 십자가를 통해서 죽은 십자가를 부활함으로써 우리도 똑같은 절차로써 죽은 우리를 살리는 두 개의 관여로써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첨부파일 : 279강-YouTube강의(배신)20190618-이 근호 목사.hwp (32.5K), Dow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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