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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7 01:46:07 조회 : 71         
강남-요한복음 21장 12절(꿈속에서)190618a-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59.12.122.247)
강남-요한복음 21장 12절(꿈속에서)190618a-이근호 목사



자, 시작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2절 그리고 13절 14절까지 제가 읽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이 본문에서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을 때에 그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과 돌아가시기 전에 예수님과 그런 신체적인 연속성을 또는 동일성을 갖느냐 갖지 못하느냐 하는 그 문제를 예수님이 스스로 문제 제기하시고 스스로 정답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 전에 예수님과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의 예수님이 동일한 예수님입니다. 왜? 고기도 같이 잡수시고 떡고 같이 먹으니까 동일한거에요. 동일한 예수님의 신체를 갖고 있으나 제자들은 그 예수님 돌아가시기 전의 예수님과 후의 예수님을 동일하게 대하지 못하는 이유는 제자들 자체에게 문제가 있는거에요.


그 문제가 뭐냐 하면 그 문제에 대해서 요한복음 20장에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하는 거기서 이미 주께서 그 내막을 소개했어요. 믿음이라는 것이 형식적 의례적인 요소를 두고서 믿는 것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의 종교의 한계입니다.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요소를 두고서 믿는거에요. 이게 교회사에서 그동안 교회 이천년동안에 계속 교회가 추구한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믿고 예수 믿을만한 그런 형식적이고 의례적 의식이죠. 제사방식 이런 것. 이런 것을 두고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고 하나님께 믿습니다라고 시도 해온거에요. 거리를 두고서.


내가 믿어야할 분은 저쪽에 있고 내가 믿는 주체는 나는 여기 있고 중간에 거리를 두는거에요 거리를. 거리를 두는 이 믿음에 대해서는 주님께서는 생활 밀착형 신앙을 줘버린거에요. 생활밀착형. 그럼 뭘 빼는 거에요? 그 거리를 빼는 거에요.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요소를 빼는 겁니다. 몇 시에 기도해야 되고 몇 시에 뭐 헌금은 따로 해야 되고 이런 모든 요소를 빼버리고 생활 속에 직접 주님께서 거리를 없애버리는 식으로 믿음을 줘버립니다.


그 믿음을 제가 좀 함축해서 표현한다면 이렇습니다. 믿음이 필요 없는 신앙. 함축해서 이야기합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거리를 두고 믿는게 믿음이거든요. 어떤 사람이 만약에 나 당신 좋아합니다 믿습니다라고 할 때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좋아한다고 하면 우리는 용납이 돼요. 그런데 좋아합니다 해놓고 10m 에서 5m 좋아합니다 3m 좋아합니다 10cm 이러면 막 땀 냄새나고 막 이러면 우리는 밀치죠.


좋아하는건 좋아하는건데 너무 가까이 하지 마세요라고 우리는 밀어내잖아요. 우리 약간 떨어져서 믿읍시다. 약간 떨어져서 사랑합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상대방을 좋아하는건 좋은데 너무 사생활까지 너무 깊숙이 개입을 해버리면 이게 부담이 되고 감당이 안 됩니다.


내가 나인지 내가 저 사람 것인지 분간이 안되잖아요. 내 것이 없어질 때는 우리는 위기를 느낍니다. 내 것. ‘나’라는 어떤 것이 뭔가 이렇게 마련이 되야 되지 ‘나’라는 댐이 무너져버리면 우리는 살 이유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하지요. 친구도 좋지만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마라. 너 너무 많이 알려고 하면 다친다. 다치죠.


이것은 뭐 사람뿐만 아니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예수님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이 우리 복주는 것은 좋은데 너무 가까이만 오지 마세요. 감당이 안 됩니다. 주님이 너무 가까이 오면은 내가 나만의 생활이 이게 파괴되고 날아가버리면 내가 살 이유가 같이 덩달아 파괴되어버리잖아요.


사람은 뭐 좀 고민해야 재미있지 않습니까? 뭐 내 문제도 좀 고민하고 그 고민이 속 시원하게 해결될 때 “그래! 사는 맛이 이거야.” 뭐 이런게 있는데 나를 너무 가까이 찾아와서 내 것 자체가 소실되어 버리면 고민거리도 없다면 그건 왜 삽니까? 사는 재미가 없잖아요. 희망하고 성취되고 또 희망하고 성취되고 사는 재미가 바로 여기서 사는 재미가 있는 거에요.


내가 기대하는대로 이루어질 때 “그래! 나는 아직 여기 있어. 나는 여기 있는거야. 나 분명히 살아있어.” 내가 기대할만한 것을 자꾸 찾아요. 내가 기대할만한 것을 찾고 내 뜻대로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숨통이 트이죠. 사는 숨통이 트여지는 겁니다. 아직 9승에 머물러있는 류현진. 10승을 내다볼 수 있어요. 16살 밖에 안 되는 이강인. 나중에 20살 되면 메시가 될지 날두형님이 될지. 호날두가 될지 모르거든요.


그런 희망 품고 직장에서 오는 모든 괴로움을 이강인과 류현진에게 쏟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도박이고 도박이 주는 효능, 특히 도박이 심하면 다른 것으로 바뀌죠. 주식. 주식, 도박하고 같은거거든요. 도박, 주식 같은 겁니다. 주식은 좀 고상한 거고 좀 유식해보이고 도박은 이거는 막무가내고요.


홧투는 뭐 생각하는건 귀찮아. 딱 해가지고 그냥 가자. 희망이 중요하니까. 희망이 중요하지 내가 희망을 품는다는 것 내가 살아가는 보람이 있다는 것 이 도박보다 좋은게 어디 있어요. 도박보다. 아가씨들이 30대 아가씨들이 직장생활하면서 연차내가지고 배낭 매고 북유럽 여행가는 것은 이건 희망. 혹시 아나? 꿈에 예상치도 못한 이상형 남자를 만날지. 이래가지고 스페인 돌아다녀가지고 유해진 만나고 돌아다니고. 온 천지 돌아다니면서 헝가리 가서 물에 빠지고 하지요.


희망이라는 것은 나의 세계의 파괴요 나의 세계의 부풀기. 나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까지 확대될 수 있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나만의 것, 거기서 나만의 것을 꼭 쥐고있어야 되는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 나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무슨 행동이 나오느냐 하면 괜찮은 분을 우리가 믿기로 작심합니다.


나 이제 오늘부터 예수 믿기로 작심했다. 나 하나님 믿기로 작심했다. 왜? 그게 내 희망사항 중에 희망 wish list 내가 하고 싶은 것 중의 하나가 등장했기 때문에. 예수님 믿는 그것이 내가 앞으로 내가 더 잘 되기 위한 하나의 요소가 된다고 희망을 갖고 싶어. 다른데 희망 없거든. 하나님 믿는데 희망 갖고싶어 라고 해서 믿는거에요.


그래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거리를 두고 믿는게 믿음이죠. 오늘 요한복음 21장에서 여러분들이 21장에서 내용이 뭡니까 라고 묻는다면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딱 한마디로 뭐냐 하면 제자들이 있는데 주님이 찾아왔다 그 이야기거든요. 21장 이야기가.


제자들은 그냥 있는데 제자들은 예수님과 관계를 끊었어요 이미. 있는데 그냥 예수님이 그냥 찾아온거에요. 20장 한번 봅시다. 20장 28절에 봅시다. 27절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이게 뭐냐 하면은 일단 예수님하고 도마하고 이야기해가지고 인간에게 믿는다는 의미는 이렇게 통용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 믿는다는 의미가 뭐냐 하면 내가 믿는다는 거에요. 인간에게 믿는다는 것은 앞에 뭔가 생략되어 있는데 생략되어있는 것을 집어넣으면 누가 믿는다? 내가 믿는다. 내가 믿을만한 누구를 믿는다는 거에요. 이게 인간의 믿음의 한계고 전부에요. 이것 벗어나는 것은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여기에다가 뭘 집어넣느냐 하면 인간의 믿음의 한계가 어디서 왔느냐 하면은 바로 인간의 육체 육신을 본인이 만지고 보고있다는 그 점. 보고있다는 그 점이 인간이 자기 믿음의 한계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 이야기합니다. 앞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내가 믿는다’를 인간이 자기가 포기를 못해요. 내가 믿는다.


내가 믿으면 그건 믿음이 아니에요. 그럼 내가 믿는 믿음을 내가 믿는 믿음이 믿음이 아니고 믿음도 아니고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려면 주님께서 뭐냐 하면 인간의 육체에서 할 수 있는 한계가 뭐냐? 보고 믿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보지 않고 믿는게 믿음이다 라고 했을 때 이건 결국은 뭐냐 하면 곧 “인간의 육체는 이런 정도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 얘들아” 라고 한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요구하는 것은 네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서 믿는 믿음을 가져야 이게 진짜로 나와 너 사이에 관계다 라고 하는 겁니다. 무슨 수로 인간이 자기 육체를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21장에 와서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인간은 실현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구 쪽에서? 주님 쪽에서 실현하시는 거에요.


그 방법은 뭐냐 하면 보고 저쪽에 계시고 우리는 이쪽에 있어서 거리를 띄워두고 믿겠습니다 하는 그것의 거리를 없애버리는 거에요. 없애는 방법은 뭡니까? 주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버리는 겁니다. 주님께서 들어와버릴 때 ‘아 주님은 아마 귀신일거야 유령일거야’ 라는 생각을 할거란 말이죠.


육체를 가지고서는 그럴 일 없어. 인간의 육체는 거리를 띄우고 보고 믿는게 이게 육체가 할 수 있는 전부의 최고의 믿음인데 육체를 가진 이상은 믿음은 성립되지 않는다에 대해서 주님께서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육체를 가지고도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생산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육체를 가지고 그냥 제자들에게 찾아온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 오늘 본문 14절에 와서 떡도 같이 먹고 생선도 같이 잡수시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은 육체는 육체성 그대로 있지요? 떡을 먹고 생선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가 인간이 떡을 먹고 생선 먹는 것과 동일한 육체를 갖고 있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귀신 믿듯이 믿자 지금 이런 믿음이 아닌거에요.


귀신 믿듯이 믿자하면 자칫하면 영지주의가 되고 요한일서에서 주의사항 했잖아요. 예수님의 육체로 오신 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그게 바로 적그리스도라고요. 그러면 육체로 온걸 믿지. 육체로서 믿어버리면 우리는 믿음이 아니고 보고 믿는 믿음밖에 안된다니까요. 거리를 두고 믿는거에요. 교회역사를 통해서 교회는 어떤 식으로 인간을 속여왔습니까?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형식과 또 뭡니까? 형식 가지고 그냥 형식 가만 둡니까? 피아노만 두고 피아노만 두고 예배드리면 예배에요? 피아노를 뭐 띵띵띵 쳐야될게 아닙니까? 형식 + 뭐라고 했습니까? 의례 또는 의식. 찬송 부르기 4절까지, 기도하기, 대표기도 누구하기, 어느 특정 장소에 모이기, 특정 시간에 모이기.


이게 전부다 주님을 믿을 때 하나님 믿을 때 우리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런걸 집어넣고 그 집어넣은 것을 행함으로 우리는 믿음 있는걸로 치자고 교회는 그렇게 사람들을 속여온거에요. 생활밀착성 믿음이 아니라니까요. 거리를 두고 믿는거에요. 그래서 주님한테 이거이거 했습니다. 뭐 수련회했습니다. 뭐 십일조했습니다. 선교비 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는거에요.


제가 지난 낮설교에 ‘범죄와의 전쟁’ 그 내용 이야기 했지요. 최민식. 느그 서장하고 밥묵고 등밀고 느그 서장하고 손톱깎고 나 이정도야. 그렇게 제가 예를 들었지요? 나 교회와서 십일조했고 나 기도했고. 그런데 그걸 뭐라고 한다 했죠? 허당이라고 했죠 ‘허당’.


그래서 주께서 행하는 것은 뭐냐 하면 거리를 줄이는 믿음, 그 믿음을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뭐라고 썼어요? 여기 한번 주일학교 애들처럼 다같이 읽어 봅시다. 시작. ‘믿음이 필요없는 신앙’. 믿음이 필요 없는 신앙이에요. 여기 필요없는게 중요해요. 믿음이 필요없어요. 구태여 내 쪽에서 믿을 필요가 없다니까요. 내 쪽에서 믿는다는 것은 거리를 이미 주님 여기까지만 오시고 더 이상 오시면 안 됩니다 되는 거에요.


인간의 육체가 ‘나’라는 육체가 늘 보고 있기 때문에 보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면 보지않고 믿는 믿음이라면 이거는 인간의 육체의 능력을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믿음이죠. 그러면 그 믿음은 주님께서 우리가 열심히 충성 봉사하는게 아닙니다. 흔히 목사들이 21장 이야기하면서 시몬 베드로야 네가 날 사랑하느냐 이 대목 가지고 얼마나 이 대목 청년회 헌신회 할 때 얼마나 인용합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여전도회 헌신예배.


이거 설교하고 난 뒤에 끝나고 돈 걷고. 이거 얼마나 해댔습니까. 그 설교에 모든 설교가 이구동성 하는게 뭐냐 하면 이제 주님을 사랑하자 이 이야기하고 있어요. 주님을 사랑하자고요. 베드로처럼. 주님이 찾아왔다는 것은 이제는 네가 네 육체를 네가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사용하겠다는 겁니다.


내가 사용하고 네 육체에다가 내가 한 그 모든 것을 내 육체로 사용하고 예수님이 하신 모든 그 성공한 것을 거기에다가 다 집어넣겠다는 겁니다 그 내용을. 그러면 그 내용을 좀 간추려서 이야기하면 이겁니다. 역사에 대해서 비역사로 찾아오신 분. 인간의 육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항상 자기 스토리를 구성하게 되어있어요.


이것은 본인이 하고싶어하는게 아니고 스토리가 구성되는데 이것은 스토리 구성 되는게 왜 그러느냐 하면 기억 때문에 그래요. 계속 인간은 자기 과거 현재 미래를 예상하고 과거는 자꾸 생각이 나고 이게 하나의 연결된 스토리가 있거든요. 인간은 자기 역사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 자신으로 봅니다. 자기 자신의 본질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구강의 때도 했지만 자기 역사의 본질이 선악과를 따먹었거든요. 그럼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자기 역사의 본질에 대해서 뭐로 평가 하겠어요? 선이냐? 악이냐? 평가하겠지요. 그럼 선이냐 악이냐 평가하니까 이 자체가 이 인간의 기억 속에 나는 좋은 인간인가 나쁜 인간인가 그게 유지된다는 말은 아직도 선악체제에서 구출됐어요? 안됐어요? 안된거에요.


그런데 그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게 ‘역사’라 하거든요. 사람들은 역사를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걸 현실로 봅니다. 현실. 현실로 보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자기 현실을 고수하다 보니까 자기의 괜찮은 스토리를 유지하다 보니까 같은 말로 자기 역사를 고수하다 보니까 같은 말로 자기 현실만이 진짜 현실로 고수하다 보니까 예수님의 그 잔소리에 예수님의 그 지적질이 무엇을 훼손한다고 보는거에요?


나의 괜찮은 역사를 나의 괜찮은 가치를 훼손한다고 보고 밀쳐버리니까 돌아가신 거에요. 뭐 남 얘기할거 없지요. 12제자. 12제자가 예수님을 떠났잖아요. 뒤에 제자라는 말이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원래 제자가 되려면 스승이 있는 조건하에 제자가 되는데 스승 없이 자기들끼리 스승입니까? 스승이 없는 제자가 어디 있어요?


제자들이 스승을 내쳤다 이 말이죠 제자들이. 나 몰라라하고 비겁하게. 가룟 유다가 주동되고 나머지도 마찬가지에요. 도망을 친거에요. 제자 그만 할래 이 말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들은 제자는 뭐냐 하면 스승과 제자 사이를 거리를 둔거에요. 스승답게 행동하면 내가 스승으로 인정해 드리겠습니다 하는 조건하에 계속 스승으로 대우한거에요.


그런데 그 스승이 내가 원하는 스승이 없을 때는 나는 언제든지 그 스승을 떠날 그런 인간의 본성을 발휘한겁니다 제자들이. 그걸 가지고 저는 뭐로 보느냐 하면 자기 건전하고 자기 고상한 역사를 사수하려면 결국은 누굴 결별해야돼요. 누구하고? 예수님하고 결별해야돼요. 예수님하고 보고 믿겠다고 거리를 둔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내 쪽에서 언제든지 철회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내 쪽에서.


교회라는게 뭡니까? 교회라 하는것은 자기 역사 자기 스토리 내 인생에 대해서 계속 좋은 쪽으로 좋은 쪽으로 역사가 써나가는 조건하에 나는 교회를 다닐 용의가 있습니다. 이게 교회 아닙니까? 그렇지요? 교회에서 사람이 날 놀린다. 미쳤다고 그 교회 다닙니까? 안 나오죠. 내 역사에 유리하게 작용할 조건하에 교회 나와요.


이 말은 내 조건에 유리하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시시한 인간되기 싫다는거죠. 시시한 인간되기 싫다. 다른 말로 하면 유명한 그다지 유명한 사람되면 귀찮으니까 그냥 대충 어쨌든 간에 유명한 사람이 부럽다는 것.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은근한 그런 마음이 있어요.


유명하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우리가 속한 현실 세상 조건에 맞아 떨어졌다 이 말이거든요. 이 세상 조건에. 그런데 여러분들이 우리 잠시 하나님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 말 듣겠습니까? 아니면 전혀 이름도 없는데 바른 소리하는 사람 말에 기울이겠어요? 여러분들이 하나님이시라면.


사람들에게 높임 받는 그 사람 편에 서시겠습니까? 아니면 높임 받는 것 때문에 무시당해가지고 시시하게 처리하는데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진리를 외치는 그 사람 말을 듣겠어요? 어느 쪽이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이라면. 안 유명해도 괜찮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왜 자꾸 우리는 유명한 것을 부러워합니까? 내 자식이 유명해지고 내 친척이 유명해지고.


우리나라 20세 이하 월드컵 가운데서 최준하고 이강인 그것밖에 생각 안나요. 그 애 또 있다 빛광연하고. 왜? 언론에 안 나오니까. 다른 사람은 안 유명해요. 얼마나 우리가 이 땅에서 사람에게 높임 받는다는 것이 이게 하나님에게 미움 받는 조건이라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현실적으로 수용했습니까?


주님께서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했지만 그 보지 않는다는 것이 유리하다는 뜻이 아니고 소위 너도 나도 보이기를 힘쓰는 가운데 처져버린 사람들의 목소리. 그들의 존재의 의미. 거기에 귀 기울이냐를 우리에게 묻는 거에요. 큰 교회 목사 유명. 나도 어떻게 유명해졌는가? 유명하다는 말은 주님과 우리 사이에 세상이 끼어들었다는 거에요.


끼어들어서 눈치를 누구 눈치 보느냐 하면 주님 눈치 보는게 아니고 하나님께 복 받아 가지고 세상에서 떠들 수 있는 꺼리를 만들겠다는 거에요. 하나님께 복 받아가지고. 나 이 정도야 라고 세상에 나설만한 어떤 꺼리를 만들고 싶다는 거에요. 어떤 작은 차가 와서 내 큰 차를 받아버리면 흠집은 나도 수리하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트랙터가 와서 거대한 트랙터나 트럭이 와서 나를 받아버리면 우리는 흔적 없이 찌그러지잖아요. 그게 밀착성 믿음이에요. 생활밀착성. 완전 주님이 와서 찌그러져버린 거에요. 뭐 믿음이고 자시고 뭐 건질게 있어야 건지지. 유명하고 싶어도 뭐가 있어야 유명하죠. 할 때마다 박살내고 할 때마다 박살내는데요.


왜 이렇게 나를 괴롭히고 나를 천식이고 기침이고 왜 이렇게 하게 하십니까? 네 몸 아니거든. 그게 밀착성 믿음이거든요.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는 거에요. 왜 제가 감기 걸립니까 질문해서는 안 되고 이번 차례는 감기입니까? 이래야돼요. 이번 6월달은 감기로 보내기로 작정하셨습니까? 오! 네가 믿는구나. 생활밀착성 믿음을.


감기 안 걸려서 멀쩡한게 기분 좋아요. 감기 걸리면 사람이 찌질해지고 행동에 뭐하나 반듯하게 행동 못합니다. 머리가 아픈데 뭐 신경쓸게 어디 있어요. 하지만 이러나 저러나 그것 조차도 주께서 나를 활용하시고 사용중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그게 바로 유령처럼 믿는게 아니고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에요.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소자 없는 믿음이 좋은 믿음이 아니고 소자를 소자로써 우리를 작은 자로써 지극히 작은 자로 다루신다 그런 관계성이 바로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에요. 왜? 세상 사람은 지금 큰걸 다 보기 때문에.


다시 이야기합니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이게 자기 스토리를 만들어요. 자기 스토리를 만들면 스토리가 원해 간격이 생기기 마련인데 여기 시작부터 끝이 생기거든요. 그런데 비역사라고 하는 것은 그걸 완전히 무시해버립니다. 시작 끝이 없어요. 그건 왜 그러느냐 하면 시작 끝을 예수님이 시작하고 예수님이 마감하는데 네가 그렇게 시작 끝을 만들면 안된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고 하시고 제자들에게 맡기지 아니하시고 제자들은 할 능력도 없으니까 예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육신, 육체를 가지고 실제로 육체를 가지고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육체로 말미암아 육체의 요소가 우리 제자들의 요소 속에 육체 속에 이것이 들어오게 되요. 예수님이 여기 오늘 본문에 여기 14절에 보면 몇 번 나타났다고 했습니까? 세 번째지요? 첫 번째는 제자들의 문에 요한복음에 보면 첫 번째는 제자들이 문닫고 벌벌 떨 때 찾아왔고 두 번째는 도마한테 찾아왔고 세 번째는 여기에 찾아오신거에요.


그런데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는 하면서 첫 번째는 성령 이야기하셨어요. 성령이 네게 오실 것이다. 두 번째는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면 성령이 오셔서 그 다음에 우리를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주신다. 이게 성령 오셨다 첫 번째. 두 번째는 보지 않는 믿는 이야기.


세 번째는 뭐냐 하면 이 두가지를 합쳐서 성령께서는 이런 패턴으로 일할 것이다. 제자들이 그냥 자기들끼리 고기잡는데 쳐들어온거죠. 갑자기. 쳐들어왔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어디계시다가 오신거에요? 예수님께서 어디 계시다 오신거에요?


자, 제자들 7명이 여기서 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고기를 잡고 있는데 이 순간 나타나기 5초전에 나타나기 5분전에 예수님 어디 계십니까? 어디 계시지요? 다시 이야기할께요. 제자들은 자기 기억 속에 자기 육체가 있는 이것을 가지고 뭐로 봤습니까? 이걸 현실로 보죠. 현실. 이걸 현실로 봤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 생각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었다고 되어 있지요. 자기들 현실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죽은거에요. 죽었는데 첫 번째 두 번째 오실 때 죽으면 안 나타나야 돼요. 그런데 주께서 나타났잖아요.


현실의 죽음에 안 나타나는 것이 현실의 원칙인데 공식인데 현실에서 죽으신 분이 부활해서 나타났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그들이 갖고 있는 현실관을 포기를 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포기를 하게 되고 주님이 죽으셨지만 지금은 살아계시다는 것을 지금 현실에 넣으려면 이렇게 그냥 더하기 플러스해서 보태서 할 수는 없고요.


뭘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그냥 보태버리면 수월하게 보탤 수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현실관 때문에 죽었으니까 죽으셨기 때문에 이 죽으신 분이 나타날 때는 이 현실관을 현실이 아니라고 부정을 해야 되죠. 부정을 하는 방식으로 결합이 되는 겁니다. 그럼 이 현실은 뭐냐? 꿈이죠. 꿈이죠. 오늘 제목은 “꿈속에서”에요. 제자들은 현실로 보지만 주님은 꿈 같은거에요.


그들의 스토리 역사, 역사라는 것 현실이라는 것 전부다 꿈속에서 복작복작거리는 것이고 꿈속에서 구성된겁니다. 그들이 꿈을 꿈인줄 모르고 현실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현실 밖으로 나가버리신 거에요.


나가버리시고 안 찾아오시면 그만인데 세 번씩이나 찾아왔다는 말은 결국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이 모든 현실이 일종의 연극 무대가 되어 버리고 주님은 연극 무대를 조종하는 뒷부분에 계시다가 인간들이 이해하는 무대에 오신거에요. 무대 뒤에 연출자로 계시다가 온거라 이 말이죠. 예수님이 계신 것이 진짜 현실이라면 이쪽은 뭡니까? 그냥 무대죠. 가상무대. 그냥 꿈속인겁니다. 꿈속이에요.


이 무대에서는 보는게 전부에요. 보는게 전부고. 그리고 이 세계에서는 자기의 역사 아까 기억 속에서 내가 얼마나 선하냐 악하냐 그 논리 외에는 다른 논리는 통하지 않는 세계. 그냥 그 꿈속에 있습니다. 그 꿈속에 있으면서 그들은 이유도 모르는 채 죽습니다. 이유도 모르는 채 죽어요.


그들이 예수님을 자기 현실을 현실답게 고수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면서 버렸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죽고 난 뒤에 안 찾아오면 자기는 최선의 노력 인간으로서 할 도리는 다 했다고 자부하겠는데 찾아옴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예수님을 무서워서 예수님과 같이 있다는게 무서워서 도망쳤다는게 그게 뭐가 되느냐 하면 무의미가 되요. 무의미.


그걸 제가 꿈이라고 했잖아요. 꿈은 뜻은 뭐냐? 헛방이죠 헛방. 꿈은 백날 해도 그거 아무 실용성 없잖아요. 꿈은 개꿈으로 끝나지 않습니까? 그렇잖아요? 아무 의미 없는거에요. 그 꿈속에서 그들은 뭐라고 외치느냐 하면 제발 살고싶다고 외치는 거에요. 꿈속에서. 왜 살고 싶으냐? 죽음이 목을 졸라. 매일같이 죽음이 목을 졸라. 숨이 막히도록.


남자 여자 어린아이 할 거 없어요. 헝가리에서 죽이고 세월호에 빠져서 죽이고 그것보고 무서워서 물조심하라고 하고. 여자가 밤늦게 다니다가 뭔가 당하게 되면 그걸 보는 모든 사람은 뭐라고 합니까? 야 이 세상이 이렇게 험하니까 너는 일찍 들어오너라. 일찍 들어오라는 말은 죽기 싫다 이 말이거든요.


죽기 싫다는 그걸 그들은 생생하게 실감나는 현실로 보지만 그들은 지금 꿈속에서 죽기 싫은거에요. 꿈속에서. 뒤통수 때려가지고 꿈속에서 깨어나면 참 좋겠는데. 꿈속에서 살고 싶고 꿈속에서 죽기 싫고 꿈속에서 출세하고 싶고 꿈속에서 승진하고 싶고 꿈속에서 감기 낫고 싶고 꿈속에서 알레르기 없애고 싶고. 전부다 모든 돌아가는 것이 한낱 꿈에 불과한거에요 꿈에.


인간은 역사라고 하지만 주님보시기에 꿈인거에요. Dream. 꼭 자신있는 영어만 해요. 이 문제를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님께서 이렇게 해결하십니다.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있을 때 고기잡을 때 주께서 사전에 예고 없이 쳐들어왔다는 말. 그것은 뭐냐 하면 그걸 가지고 현장성입니다 ‘현장성’.


현장성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 작살나고 날라가느냐 하면 스토리와 다른 말로 하면 역사죠. 역사성이 역사라는 것이 무의미해져버려요. 역사가 무의미해버려요. 류현진이라는 투수가 저는 중계방송 안봅니다만은 예를 들어서 야구 하면서 4회까지 2:0으로 이기고 있다고 칩시다. 그건 모르지만 하여튼 2:0이라고 칩시다.


할 때 잘하면 뭐하겠다는거? 10승하겠다는 이렇게 되죠. 잘하면. 잘하면 실수 없고 뒤에 선수들이 잘하면 10승하겠다라고 생각하는데 2:2 됐잖아요. 수비실수 때문에. 10승하겠다 할 때 이게 예고죠. 예고, 기대죠. 그럼 이건 뭡니까? 이거는 현재 상황은 2:0이지만 계속 앞으로도 2:0으로 나갔으면 좋겠다죠? 그럼 이거는 이미 어디서 벗어났느냐 하면 현장성에서 오바하고 있는 겁니다. 현장성에서 오바하고 있는 거에요.


우리 아들이 있는데 아들이 늘 모의고사하면 전교 1등. 전국수석해도 0.1%. 이대로 가다가는 서울대 또는 서울의대 들어가겠다라고 하지요? 기대하지요? 막상 수능 쳐서 본고사에 조져버렸는데요. 한칸 밀어썼는지 해가지고 재수한다고 할 때 결국 이것은 뭘 하느냐 하면 그 사람이 꿈속에 있으면서도 꿈을 뭐라고 여기느냐 하면은 황당하게도 꿈을 뭐로 봤습니까? 현실이기를 간곡히 원하고 있는거에요.


그러면 주님께서 그건 꿈은 꿈이야라고 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은 현장성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거에요. 내일 일은? 내일 염려는 언제 하라고 했습니까? 내일 염려는 내일 하라고 했지요? 오늘 이야기하셨죠? 주님께서. 그럼 내일 안됐지요? 그럼 염려하란 말입니까? 염려하지 말란 말입니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내일 되면 또 바쁜데 그게 아예 염려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오늘 염려는 내일 하라니까. 오늘은 내일 염려하지 말라는 거에요.


그게 현장성이에요. 현장성은 뭐냐? 인간은 애초부터 무능하다는 겁니다. 무능한거에요. 철저하게 무능한겁니다. 이 무능을 이 현장성을 너무나 이게 듣기 싫어서 나름대로의 미래를 개척하는 것, 그게 바로 종교라는 거에요. 기독교, 불교, 천주교, 이슬람교. 이게 종교가 뭐냐 하면 현장성에서 자기가 획득한 그 재료를 가지고 그 정보를 가지고 내 운명은 아마 몇 년 후에 죽으면 그렇게 될거야라고 예측하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자기 역사를 그대로 고수하게 되지요.


이 말은 뭐냐. 아니야 아니야 이건 절대 꿈이 아니야 이럴거라고요. 꿈이 아니라고 누가 이야기합니까? 인간들 못난 인간들 자기끼리 이야기 하고 자기끼리 협의하고. 종교라는 것은 누가 만드느냐? 인간이 만들어요. 어떻게? 서로 협의해서 만들어요. 주님은 종교라는 것을 만든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종교가 하나의 중간의 하나님과 신과 인간 사이에 중간에 거리를 두게 하는 하나의 요소가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을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펜팔하고 글로써 글 남기고 주고받고 메시지 남기고 그런건 좋아요. 그러나 현장에서 딱 보면 그 얼굴이 그 얼굴이 내가 예상한 얼굴이 아니다 이 말이죠. 요새는 화상통화 있어서 좀 확인이 됩니다만은. 전에 화상통화 안될 때 펜팔은 누구 것 베껴가지고 얼마나 이쁘게 써요. 그러고 만나보면 여자나 남자나 서로 상상한다고요.


아 글 보니까 글을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키는 180이 될거고 쭉 이렇게 하는데 막상 현장성 딱 와보니까 현장에 둘 다 카페에 앉았는데 서로 다른 사람 찾고있어요. 저렇게 뚱뚱할 리가 없을거야. 저렇게 대머리는 아닐거야 이러면서 찾고 있다 이 말이죠. 장미꽃을 들고 만납시다 이렇게 하는데 만약에 여자 쪽에서 먼저 남자 장미꽃을 보고 자기의 꿈에 그리던 것과 다르다면 장미꽃 몰래 쓰레기통에 갖다버려요. 오늘 안 나온걸로 쳐요.


네가 뭔데 내 역사성에 훼방을 놓느냐 이런 식이에요. 네가 뭔데. 인간이나 제자들의 꿈을 확 깨놓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설마 죽을 줄은 몰랐죠. 내가 죽으신 분 따라가려고 내가 3년동안 했다는 내 처지가 내가 바보같아서 실망스럽다. 이게 제자들의 마음가짐이에요.


다시 말해서 제자들이나 우리나 항상 일관되게 생각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현실이고 그리고 나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건전하게 선하게 존재하고 나는 내 탓 할게 없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그 다음부터 신을 찾고 메시아를 찾는 거에요. 그게 종교라니까요 그게. 나는 하등의 문제가 없고 문제 있더라도 뭐 좀 있겠지. 그러나 반성하면 된다는 겁니다. 나한테는 문제가 없다는 거에요.

참 그래서 이 종교세계에서 주님이 찾아오면 되는데 주님이 찾아오게 되면 약속대로 찾아와요. 약속대로 찾아오게 되면 약속이 유일한 약속의 전개가 유일한 현실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약속이 오게 되면 이 약속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으로 오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짓거리를 해도 이게 하나의 죽음 속에서 꿈꾸는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요.


그리고 우리가 이게 이제 내 믿음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내 믿음은 믿음이 아닌거죠. 믿음이 아니라도 기분 좋은 이유는 약속이 필요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님 쪽에서 먼저 우리에게 찾아들었기 때문에 구태여 고물같은 더러운 꿈같은 꿈에서 꿈꾸던 갖고 있던 그런 것은 이건 꿈이니까 버려도 되는 거에요. 믿음을 자기 믿음을 버리는게 믿음이 되는 거에요. 내 믿음을 주저없이 버릴 수 있는 자유를 얻는겁니다.


제가 지난 낮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이미 신약에 있어서의 기도라고 하는 것은 응답받은 후에 하는 기도라고요. 기도라는 자체가 응답의 일부에요. 기도 자체가. 그걸 성령으로 하는 기도인데. 기도가 되려면 이건 여러분들이 아셔야 되는데 기도가 되려면 진짜 기도 되려면 그 기도 내용과 뭐가 같이 가느냐? 내 귀한 목숨과 이게 동등해가지고 맞바꿀 수가 있는 내용이여야 돼요.


나는 기도 응답받아서 내가 살겠다는 그런 식으로 하게 되면 그건 목숨을 안 내놓은 기도란 말이죠. 목숨을 안 내놓고 기도한다는 것은 이거는 얍삽한 짓이라니까요. 목숨을 내놓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그 기도는 내 목숨을 유지하겠다는 거에요. 내 건전한 스토리, 역사를 계속 쥐고 있겠다는 꼼수에 지나지 않아요. 이것이라면 제 목숨도 내놓겠습니다 하는 기도가 되어야 그게 기도가 되는 거에요.


그럼 내 목숨 내놓는다하는 것은 내 목숨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나는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습니다 주여 저한테 어떤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어요. 주의 약속만 이루어진다면 그까짓 것 제 목숨같은건 마음껏 사용해주옵소서 이게 바로 기도다 이 말이죠 이게. 주님의 밀착성 믿음으로 쳐들어왔기 때문에 그런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베드로보고 하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거거든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인생 거덜내자는 겁니다. 도망쳐도 소용없다. 내가 너 끝까지 찾아갈거야. 도망쳐도 소용없어요. 나는 너 끝까지 네 육체를 내 식사 떡을 먹고 생선 먹듯이 너도 동질성을 유지한 다시 말해서 구원받기 전의 육체와 구원받은 후의 육체가 동일하게 연속성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을 내 쪽에서 증명해줄게. 주님 쪽에서.


죽고 난 뒤에 주님 만납시다. 아니 그거 필요 없어. 죽기 전에도 주님과 함께 있음을 내 쪽에서 손 대가지고 그렇게 작용하도록 해줄게. 그게 주님의 전략이에요. 찾아오신 이유가 그렇습니다. 저는 그걸 인수인계라고 하는데. 주님께서 몽땅 인수인계 예수님께서 육체로 있으면서 당했던 모든걸 이제는 누구 차례다? 제자들 차례로 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 방식이 요한복음 14장에 취지가 있어요. 14장 18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주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는다. 그런데 이 제자들은 자기를 고아라고 여겨본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제자들 편에서 예수님을 믿을까 말까 본인이 결정했기 때문에. 믿기 전에도 고아 아니였고 빠이빠이 할 때도 고아 아니에요. 고아라는 관점은 어떤 관점이냐 하면 예수님의 관점. 그걸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약속’, 예수님의 말씀의 관점에서.


요한복음 14장 18절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려면 제자들은 일단은 예수님 약속 안에서 뭐로 바꿔야 됩니까? 고아로 바뀌어야 되요. 고아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일가 친척이 없어야 되요. 다시 말해서 이미 이들은 예수님에 의해서 이 땅에서 아무 아는 사람 없이 이미 죽은 자가 되야 되요. 그 죽은 자가 뭐냐? 꿈에서 벗어난 자에요. 꿈에서 벗어난 자.


꿈에서 벗어난 자로 꿈인줄 모르고 현실이라고 우기던 그 속에 같이 섞여 살면서 예수님이 하는 일을 계속 해나가시는 겁니다. 그들 안에서. 그 제자들 안에서 주께서 일하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성령의 패턴이에요. 성령께서 일하시는 패턴은 뭐냐 하면 우리를 항상 고아같이 버려두지 않기 위해서 나는 너를 사용한다는 겁니다.


우리 일가친척 우리 형제만 5명인데 고아 아닌데. 고아야. 왜? 다른 동네 식구기 때문에 패밀리이기 때문에 고아인거에요. 이 땅에 너같이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거에요. 그래서 교회는 뭐냐? 교회는요 기적이에요. 이렇게 설교하면 좀 알아들으세요가 아닙니다. 알아듣는다는 것이 알아듣는다는 것을 기대하게 되면 자칫하면 교회가 현실 돼요.


교회는 꿈이어야 되요. 꿈이기 때문에 꿈속에서 약속만 현실로 도드라져야 되지 교회라는 어떤 형식체가 있어 버리면 또 이건 믿음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예수님 사이에 교회라는 것이 중간 매체로 들어가가지고 보고 믿고 교회에 보고 믿는 것 밖에 안 되니까 그건 안 되지요.



항상 성령께서 간단하게 말해서 계속 꿈이 꿈이라는 사실을 계속 우리에게 각인시키고 확인시키고 증명하는 식으로 주께서는 성령께서는 일하십니다. 이건 꿈이다. 켁켁 기침 나오는게 이게 꿈이래. 이게. 기침 나는데 이게 꿈이래. 이게 되지도 않는 이야기가 어디 있습니까 하는데 그건 내가 기침한다 하면 현실이지만 주께서 기침케 하신다면 그거는 주께서 하셨다는 것이 약속으로 꿈이 아닌 것 속에 주께서 하심이라는 유일한 현실이 삽입되어 있고 섞여있는 거에요. 주께서 하심이.


한달째 기침하는데 안 나으면 어쩌지? 죽으면 되지. 죽으면 돼 기침하다 죽으면 되죠. 왜? 왜 죽어야 됩니까? 어차피 꿈에서는 꿈에서 이미 꿈이 아닌 사람은 이 세상에서 이미 꿈에서는 죽는 사람으로써 다뤄지기 때문에 그래요.


사도 바울의 소망이 뭐였습니까? 꿈에서 깨어나게 하소서. 이 지긋지긋한 꿈속에 벗어나서 어서 주와 함께 만나고 싶다. 현실이 있는데 이 땅에서 이미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는데 주의 뜻에 의해서 계속 꿈속에서 꿈같은 세상에서 계속 사는거에요.


다시 한번 정리해봅시다. 이 세상의 특징은 뭐가 없다? 역사성이 있다 없다? 역사성이 없어요. 왜? 주와 함께 있기 때문에 역사성이 없는데 우리는 꿈인지를 모르는 순간 뭐가 등장합니까? 아이고 난 내 인생 이렇게 살았는데 내 인생 이렇게 조지면 안되는데 앞으로 잘 되야 될텐데 앞으로 좋은 색시 만나서 더 멋있게 살아야 하는데 계속해서 자기 자신이 그만한 권한이 있고 그만한 자격이 있고 그만한 정도로 건전하고 우수한 존재라고 계속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못 놓고있는 거에요.


더 하다가는 무슨 소리할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일단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강남-요한복음 21장 12절(꿈속에서)190618a-이근호 목사.hwp (195.5K), Down: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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