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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7 11:52:37 조회 : 94         
193강-창 49장 27-28절(베냐민에 대한 예언)190626-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06.240.236.10)
193강-창 49장 27-28절(베냐민에 대한 예언)1906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9장 27-28절입니다. 구약성경 79페이지입니다.

창세기 49:27-28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십 이 지파라 이와 같이 그 아비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되 곧 그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아버지 야곱이 열 두 아들에게 축복을 했는데 그 축복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자기 뜻을 드러낸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래서 이들이 받은 축복을 나 몰라라 하지 말고 이 축복이 성경의 계시로 담겨 있는 것은, 하나님은 이들을 축복한 그 원칙대로 세상을 운영하고, 그리고 이끄시고, 그대로 전개시켜 나간다는 예고를 이들을 통해서 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들이 받았던 열 두 가지 축복을 우리가 무시하고 모른다고 한다면 전혀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그냥 산속에서 기도하고 주의 뜻, 계시를 받았다 하지 말고 우리의 선배 되는 이 열 두 지파에게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그들의 미래를 예고했는지 그것을 봐야 됩니다.

그들에게 예고된 그 미래의 내용이 오늘날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새로운 성도들에게 그대로 적용이 되는 예언입니다. 쉽게 말해서 그들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날 우리 이야기에요. 그 중에서 마지막 열두 번째 예언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27절에 나와 있는데 베냐민은 막내지요.

막내에게 예언을 줬는데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난폭한 이리다.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난폭하게 물어뜯어서 먹잇감을 뜯어먹는다. 베냐민 지파가 이 땅에서 존재해야 될 이유는, 난폭성, 잔인함, 상대방에 대해서 배려라는 것은 없고 오직 자기 자신만 먹을 수 있다면 인정사정 보지 않고 달려들어서 빼앗고 뜯어먹고, 그런 식으로 하는 그 모습이 베냐민이 보여줘야 될 축복이라는 겁니다.

축복치고 좀 이상한 축복이지요. 이렇게 잔인하고 난폭한 축복도 다 있나, 그렇게 생각하게 될 겁니다. 이런 축복 같으면 우리한테 안주셔도 참 좋겠습니다, 하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셔야 될 것은, 이스라엘이 있고 축복을 해준 것이 아니고 축복이 먼저 준비되어 있고 거기에 맞춰서 이스라엘이 이 땅에 움직인다는 사실입니다.

성도라는 것은 성도 개인의 희망사항을 들어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예상한 구원, 천국이 먼저 있고 그 천국의 원리와 법칙에 맞춰서 성도를 개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이 되려면, 그것을 하나님의 일이라 할 수 있고 또는 하나님의 선택이라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선택 앞에서 소소한 우리 개인의 희망사항이나 우리의 기대, 거기에 따르는 우리의 선택은 하나님 앞에 깡그리 무시당합니다. 거부당합니다. 왜? 하나님의 선택이 더 우월하기 때문에, 우세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우리 뜻은 그 주님 뜻 앞에서 철회되어야 되겠지요.

그 다음에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자기가 먹고 남는 것은 그냥 남에게 준다는 겁니다. 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또 그것이 이스라엘의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미리 알려주는 이스라엘 장래라면 이것이 어떻게 축복과 이어지는지 상당히 예민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본문의 내용을 보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살펴봐야 돼요.

우리가 이 21세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면서 베냐민이 어떤 축복을 받았는지 그런데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베냐민 지파가 뭘 받았는데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게 우리한테 궁금할까요? 궁금하지 않지요. 베냐민 누구세요? 우리는 별로 관심도 없어요. 내가 중요하지 베냐민은 안중요한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만든 신이라 하는 것은 가짜가 되고 우상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 뜻이 먼저고, 내 기대치가 먼저고 그것이 잘 안 된다 싶을 때는 하나님께 기도해서 내 뜻대로 수월하게 이뤄지게 하옵소서. 순서가 그 다음에 하나님의 손목을 잡아 당겨서 내 뜻을 달성하려고 애를 쓰거든요. 그러니까 베냐민이 무슨 축복을 받았는지 그것은 전혀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다급한 문제가 아닌 겁니다. 자기 자신의 문제가 다급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하나님의 계시가 되려면 이런 오늘날 현대인의 사고방식, 자기가 우선이고 남들은 뒷전이다, 하나님도 뒷전이고 남도 뒷전이고 우선 내 급한 것부터 챙기고 안 되면 남에게 도움 얻고 하나님에게 도움 얻겠다, 하는 그 사고방식, 그 사고방식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지파, 이러한 인간들의 본성을 그대로 까발릴 수 있는 지파, 그 역할은 베냐민 지파가 하는 겁니다.

베냐민 지파를 알려면 그 소속이 어디냐를 알아야 돼요. 베냐민 지파는 야곱의 막내아들이라고 하는 그 말은 틀린 말은 아닙니다. 틀린 말은 아닌데 베냐민의 특징을 제대로 이야기 못해요. 베냐민은 누구냐 하면, 잃어버린 요셉을 대신하는 대역으로서의, 요셉의 대타로서의 베냐민이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 받아서 죽을 뻔하다가 겨우 살아나서 애굽에 노예로 팔렸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애굽의 가정에서는 없는 존재, 소멸된 존재와 같은 거예요. 베냐민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요셉을 사랑했지요. 요셉을 잃어버리고 난 뒤에 그 대타로 이 베냐민을 사랑하기로 마음먹고, 죽어버린 사랑하는 아들의 대역으로서 베냐민을 그렇게 아낀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베냐민에게는 자기의 자아성이나 주체성이 없다는 말이 되어버려요. 자기가 이 땅에 몸으로 태어났는데 그 몸으로 태어난 그 몸이 내 몸의 주인으로서 권한을 행사를 해줘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나는 누구의 대타가 되어버려요. 아담에 의해서 범죄한 그 자식으로서의 인간은 자기의 내부에 신처럼 되어야 할 본능이 자리 잡고 있는데 세상 돌아가는 것은 나의 나됨을 주위에서 인정하지 않고 나의 나됨을 완전히, 깡그리 무시하고 그 누구의 그림자로서 누구를 대신하는 인생을 산다면 인간의 근원적인 자아성은 상처받게 되어 있어요.

뿐만 아닙니다. 창세기 44장 12절에 보면,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어 있을 때에 그 요셉 형이 자기자신인줄 알면서도, 동생을 사랑한다고 평소에 말을 하면서도 도리어 요셉이 자기에게 점치는 잔을 훔쳤다는 도둑놈으로 몰아서 모함을 해버려요. “너희 가운데 도둑놈이 있다. 너희들이 우리나라에 양식 사러 온 것이 아니고 스파이로 왔는데 이제는 우리 주인님이 점칠 때 쓰는 영험한, 신적요소를 갖고 있는 제사에 쓰이는 잔까지 훔치느냐? 너희 가운데 잔을 훔친 자가 있다면 용서치 않으리라.”

이렇게 요셉이 오버를 하면서 베냐민을 붙들어두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지요. 형들은 말하기를, “그럴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양식을 사러왔고 순수한 사람들입니다.” 하니까 요셉이 순수하고 안하고는 조사해보면 안다 하면서 군사들을 풀어서 형들이 자기 고향으로 가는 길을 막고 짐을 다 풀게 했어요.

딱 걸린 놈은 나의 종이 되고 집에 못 간다 하고 짐을 풀어보니까 그 잔이 베냐민은 짐에서 나왔습니다. 의도적으로 요셉이 속여서 베냐민의 짐에다 그 잔을 집어넣어 놓았던 거예요. 그러니까 또다시 여기서 베냐민은, 자기가 원치 않았는데 자기 짐에 들어 있던 물건으로 그만 인질이 된 거예요. 애굽나라의 인질이 되어서 집으로 가지 못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나라는 인생이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환경에 의해서 휘둘린다는 거기에 대해서 자아성을 놓치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를 누가 구원하느냐? 유다가 구원해요. 유다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결탁되어 있기 때문에, 창세기 44장 30절에, 그리고 33절에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유다가 나서서, “내 목숨을 이 베냐민의 목숨과 대신 바꿔줄 테니까 얘는 그냥 놔두시고 차라리 얘 대신 내가 잡히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베냐민은 어디에 속했느냐 하면, 유다와 요셉사이에 낀 존재가 돼요. 탁구공처럼 그 틈 사이에. 탁구를 치는데 그 탁구공 역할밖에는 하지 않아요. 베냐민은 출생 자체가 요셉의 대타였고 요셉에 종속이 되어버려요. 쉽게 말해서 요셉의 보조적인 위치밖에 안돼요.

그런데 지난 시간에 했듯이 이 열두 지파지만 나중에 이 열두지파가 어떤 중심성을 갖는데 그 중심성이 12에서 2로 변합니다. 유다냐 요셉지파냐? 나라가 둘로 쪼개지니까. 북쪽은 요셉, 남쪽은 유다. 12가 2가 되고 그 2에서 1이 돼요. 구원은 유다지파에서 나오는 것은 맞는데요. 요한복음 4장에 나오듯이. 구원은 유대인에서 오는 것이 맞지만 그 유대인자체가, 곧 유대인의 선조가 유대에서 나온 자손을 배척하고 배제해버리는 겁니다.

다윗의 자손이 메시아이긴 하지만 그 다윗의 족보들은 다윗의 자손을 미워하고 핍박하고 죽이는 거예요. 예수님은 유다 나라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12에서 2가 되는데도 이유가 있어야 되고, 2에서 1이 되는데도 이유가 있어야 되고, 그 1에서 다시 새로 이스라엘이 되니까 12로 퍼집니다. 열 두 제자를 뽑으니까.

뽑을 때 12에서 2, 2에서 1, 1에서 12, ‘12→2→1→12’ 이렇게 화살표의 모습으로 전환되고 변환되는 그 원리, 어떤 원리에서 그렇게 변화가 촉구되느냐 하면, 베냐민지파에게 준 축복의 내용이 그 변화를 야기 시킵니다. 베냐민지파의 축복을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상당히 잔혹하고 난폭한 속성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베냐민지파의 성격인데 이 성격은 어디서 나왔는가? 이것은 상처가 없으면 이런 잔인함은 없어요. 인간이 상처를 받게 되면,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자기 내부의 분노성을 자극하는 거예요. 잠자는 내 분노를 자극하는 것은 외부에서 내 자아성, 내 독특함, 나만의 나를 누가 무시한다든지 건드릴 때는 내부에서 강한 잔혹함이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말을 어렵게 했는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내 것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는다. 그런데 베냐민은 그 내 것이라는 것을 내 것으로 인정하지만 주위에 돌아가는 모든 형제들의 상황이 내 것을 내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을 처리하는데 자기는 그냥 탁구공처럼 휘말려 들어가는 입장에 있어요. 자아성이 상처받은 거예요. 나의 나 됨을 어디서 챙겨줄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는 분노가 유발될 수밖에 없고 잔인하게 나올 수밖에 없어요. 제가 이 베냐민지파가 이처럼 누구의 보조적인 위치에 있지 주인적인 입장이 아니고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라고 느끼면서도 그것을 외부에서 일체 무시하고 요셉의 보조적인 역할밖에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창세기에는 잔혹함으로, 물어뜯는 이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눈다 할 때의 그 나눔이 뭘 굉장히 베풀어주는 것 같기도 하고 배려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것이 아니고 잔혹해서 얻은 그것을 베풀어주는 거예요. 나눠주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모든 열두 지파에게 베냐민 요소가 전부 삽입되어서 배당이 되고 배급이 되는 양상이 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하게 되면 여러분이 잘 이해가 안 될 것인데요. 여러분이 빙수를 먹을 때 우리나라 빙수의 역사를 알고 먹습니까? 빙수는 조선 영조 때 처음으로 서빙고에서 얼음을 꺼내서 화채를 먹었다는 이야기가 문헌에 있다. 그것을 모르고서는 빙수를 못 먹습니까? 일제 때는 드디어 얼음을 갈기 시작했고 6.25때 거기에 빨강, 그리고 노랑 주스를 부어서 먹었고 70년대에 와서는 거기에 미숫가루나 팥을 넣었다. 그런 것을 다 알아야 빙수를 먹습니까?

빙수는 그냥 먹는 거예요. 그 역사까지 알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요. 어디서 누가 만들었는지 생각 안하고 먹잖아요. 그러나 그렇게 되어버리면 빙수는 빙수 먹는 사람을 우상화시키는 도구에 지나지 않아요. 제가 처음부터 설교하는 것이 어디에 근거하느냐 하면, 지금 이스라엘이 열두 지파로 구성되었다 할 때는 필히 아담의 죄악 된 본성 하에 있는 입장에서는, 우리 이스라엘은 최고라는 우상화작업에 이미 그들은 동원된 겁니다.

내가 이스라엘 되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이 자체가 우상스럽다, 이 말이지요. 우상이라는 것은 특화되는 거예요. 특별한 대우를 해 달라고 남들에게 요청하는 것 그것이 우상이에요. 이스라엘이 우상이 되고 교회가 우상이 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축복을 주면서 그 축복이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인간의 우상성을 까발릴 수 있도록 이스라엘 역사를 전개하는 겁니다.

그게 빙수의 역사가 아니고 이스라엘역사에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야곱의 열 두 아들에게 복을 줬건만 그 복을 받았다는 자부심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적인 나라로 그들은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고 육의 한계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12→2→1, 할 때, 화살표가 연결될 때, 화살표 안에 들어 있는 그 변화가 뭐냐 하면, 인간의 근원적인,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상처 때문에 그 상처로 인하여 뭔가 분노가 일어나고 그 분노와 동반해서 탐욕과 욕심이 인간 속에, 광산에 있는 하나의 금속처럼 잠복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전체의 모든 지파에 근원적으로 들어 있다는 거예요.

베냐민지파에 대한 예언은 베냐민 지파 말고 나머지 열 한지파의 뿌리를 건드리는 겁니다. 먼저 베냐민 지파가 자신의 죄악 된 그 요소를 자극받아서 건드려서 잔인한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야 하는 그 모습이 시작은 베냐민이지만 나중에 그 베냐민지파의 속성이 모든 지파에 흘러들어서 그 뿌리, 근원의 사실이 노출돼요.

노출되면 하나님은 열 두 지파를 유지하다가 그 열두 지파를 살리는 방향으로, 열 두 지파를 두 지파 중심축으로 통합시키고 그 두지파도 안되어서 한 지파, 유다나라만 살리고 그 유다나라가 주님의 진짜 메시아, 하나님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육적으로 생각하는 이스라엘이라는 이것은 우상적인 이스라엘이고 그들이 아는 하나님은 우상적 하나님이라는 것을 폭로시키는 방식으로 야곱에게 받은 축복을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래도 잘 모르겠지요? 이스라엘 역사가 참 어려워요. 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염색에 두 종류가 있어요. 침염이 있고 날염이 있습니다. 침염이라 하는 것은 염색물을 양동이에 넣고 거기에 원단을 집어넣고 통째로 염색하는 것을 침염법이라 해요. 날염이라 하는 것은, 스크린 날염이라 하는데, 원단에다가 무늬마다 따로 쪼개서 그냥 복사를 입히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성경에서 열두 지파를 보게 되면, 사람들은 보는 사람 누구나 생각할 거예요. 열 두 지파의 축복의 내용이 다 다르다는 것은 원래 원단이 이스라엘이라면 요셉염색 따로 있고, 유다염색 따로 있고, 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해요. 날염으로 염색해서 이스라엘 만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침염이라는 생각은 아무도 못해요.

침염은 뭐냐 하면, 베냐민이 갖고 있는 잔인함 속에 열두 지파를 전부 다 담가버리는 겁니다. 너도 똑같다는 거예요. 근원적으로.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다. 베냐민만 그렇겠느냐? 유다도 마찬가지고, 레위도 마찬가지고, 요셉도 마찬가지다. 다 물어뜯는 것이다. 베냐민 지파와 다른 지파가 같이 이스라엘을 구성함으로 말미암아 베냐민지파로 인하여 촉발된 그 베냐민지파의 잔인한 속성이 점차 열 두 지파 전역에 퍼지게 되는 겁니다. 이게 나눠지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증거를,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을 성경에서 찾아야 되겠지요. 찾기 전에 설교를 다시 한다면, 이 베냐민 지파는 자기 자아성은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요셉의 대타니까. 아버지가 베냐민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요셉을 사랑했는데 요셉을 잃어버리니까 요셉대타로 가는 거예요. 형제간이 있는데 형이 베트남전쟁에서 죽었다.

그러면 동생이 동생 나름대로 자기의 자아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자기이름을 안 부르고 형 이름을 부를 때에 듣는 동생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아버지, 형 죽었습니다. 나는 나입니다.” “글쎄, 나는 네가 있는지 어떤지 모르겠고, 나는 네 생각은 전혀 없고 나는 죽은 네 형 생각만 한다.” 이러면 동생이 얼마나 열불이 나겠어요.

인간이 화나는 것은 내 것 건드릴 때 화나요. 요새 왜 현대인들이 성경을 안 보느냐 하면 아직 자기 것을 안 건드렸다고 생각하니까 안보는 거예요. 건드려버리면 하나님이고 뭐고 간에 막 욕합니다. 그 잔혹한 속성이 그대로 나와요. 마치 우리 내부에 휘발유 증유기가 있어요. 증유기라 하는 것은 휘발유가 기체상태로 되어 있는데 거기에 뭔가 불씨 하나를 던지게 되면 완전히 폭발하는 거예요.

증유기. 주유소에서 화재가 났을 때 거기 날아다니는 휘발성기체 때문에 폭발이 일어나잖아요. 그처럼 우리는 아무리 점잖게 해가지고 교회 앉아 있어도 내 것 건드리면, 내 자식을 아프게 한다든지 그런 것, 그렇게 내 것 건드리면 폭발해버려요. 갑자기 열이 난다든지, 약을 먹어도 안 낫는다든지 이런 경우 있으면 인간은 정신을 못 차립니다. 이것은 나가 아니라 괴물이에요. 인간 속에 전부 다 괴물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괴물을 지금 억누르고 있기 때문에 괴물 아닌 척 하지요. 그런데 그걸 촉발하게 되면 괴물 되는 겁니다. 베냐민 지파가 이 괴물노릇 하는 대목이 사사기 19장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나중에 중심축이 유다와 요셉으로 투톱이 되는데 베냐민 지파는 그 12, 열 두 지파가 두 지파 중심으로 전환하는데 있어서 부정적 역할로서 계기가 됩니다.

16절에 “이미 저물매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니 그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서” 에브라임산지의 사람이라는 것은 본래 요셉지파입니다. 요셉지파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냐? “기브아에 우거하는 자요 그곳 사람들은 베냐민 사람이더라.” 기브아, 베냐민지역에 살았어요.

장인이 살던, 레위사람의 첩이 머물던 유다 베들레헴(남쪽)에 들렀다가 자기가 살던 에브라임(북쪽)으로 가려고 했던 레위인이 베냐민지파 지역에 머물게 된 거예요. 북쪽은 요셉지파고 남쪽은 유다지파고 그 사이에 끼어있는 것이 베냐민 지파에요. 그 사이에 끼어있는 베냐민 사람들이 레위지파의 첩을 어떻게 했는가가 사사기 19장 25절에 나옵니다.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무리에게로 붙들어내매 그들이 그에게 행음하여 밤새도록 욕보이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돌아가면서 욕을 보였는데 아침이 되니까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레위지파 사람의 첩이 얼마나 욕을 보였으면 죽어버렸습니다. 내 여자를 건드렸으니까, 내 것을 건드릴 때는 잠자고 있던 잔혹함이 깨어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레위사람이 죽은 자기 첩의 시체를 열 두 토막을 내는 겁니다. 토막 내서 온 열두지파에 다 보내버려요. 나눠버리는 거예요. 어디에서? 베냐민지파의 지역에서 일어난 그 사건이 단순히 요셉지파와 유다지파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전 지파의 사건으로 확대되어 버리는 겁니다. 여자의 시체를 쪼개서 택배로 다 보냈다고 생각하면 돼요.

그걸 열 두 토막 살인사건이라고 해요. 이스라엘 내에서. 사사기에서. 왜 이런 일이 기록되어 있느냐 하면, 그 당시에 유다지파에서 나오는 왕, 다윗이 오기 전에 왕이 없을 때의 사람들은 자기 맘대로 살았다는 그 ‘자기 마음대로’, 열둘이 자기 마음대로 산거예요. 그렇게 열둘을 방치하게 되면 잔혹과 잔혹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열둘이 정비가 되려면 열둘에서 둘로 정비가 되어야 돼요. 화살표가 12에서 2로, 12→2로 가야 된다고요. 화살표가 그렇게 가는데 거기에 촉발하는 계기가 뭐냐 하면, 베냐민지파의 잔혹함이에요. 잔인한 이리 같아요. 우리 동네에 너희 뜨내기가 왜 왔느냐는 그런 식이에요.

우리 동네에, 내 영역에, 내 공간에 너희들이 왜 들어와서 있느냐? 이 영역, 내 나와바리, 내 영역에서는 우리가 뭘 해도 너희는 뜨내기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조치를 해도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해야 된다. 싫으면 너희동네 가든지, 우리 동네에서 유숙을 하고 여기서 하룻밤이라도 자게 된다면 이 동네의 원칙과 법을 따라야지, 하는 것이 베냐민지파의 주장입니다.

아주 잔혹하고 잔인해요.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레위지파에 속한 그 사람은 잔혹함에 대해서 뭐로 대처하느냐 하면, 잔혹함에 대해서 더 큰 잔혹함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어요. 누가 한 유명한 말이 있지요. “우리 막가자는 이야기입니까?” 다시 말해서 저쪽으로 하여금 “이건 나보다 더 나쁘네.” 하는 그런 감각을 줘야 돼요.

베냐민지파에 의해서 촉발된 사건이 모든 이스라엘 전체 심리적 내부 안에는 베냐민을 능가하는 잔혹함이 잠복되어 있음을 폭로시키는 계기가 바로 사사기의 왕이 없던 시절에 일어난 일이에요. 지금 이스라엘이 복 받았다고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요? 그들은 알아요. 자기들이 모든 민족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을 믿는 축복된 민족이고 구원받은 민족이라고.

그러나 그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을 중심으로 우상화된 이스라엘을 생각한 겁니다. 내가 거기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중요하다는 거예요. 다른 지파도 공통적으로 다 마찬가지입니다. 열 두 지파가 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들의 그 잔인함의 결과가 뭐냐? 그 잔인함의 결과는 베냐민지파가 사라져 버렸어요.

열 두 지파가 되어야 할 나라가 열 한 지파가 됨으로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겁니다. 어? 앞니가 열두 개가 있어야 하는데, 열두 개가 있을 때 네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인정받는다면 앞니가 하나 깨져서 열한 개밖에 없어요. 그러면 이것은 나머지 열 한 개도 하나님 보시기에 그 약속된 그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셈이 되어버렸어요.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데, 그 언약을 무시할 수는 없는데 어쩌다 보니 자기정의감에 도취되어서 한 지파를 작살낸 겁니다. 그런데 그 작살낸, ‘베냐민 지파는 없어져도 마땅해. 다 죽여도 마땅해. 우리는 저 못된 성깔머리를 이 참에 고치자. 그래서 다른 지파들에게 본이 되도록, 우리 이스라엘은 저런 나쁜 짓은 하면 안 된다는 그 본때를 보이자’라는 사고방식이 굉장히 정의롭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뭐냐 하면, 왕이 없던 시절에 일어난 일이에요.

그렇다면 그게 나중에 12→2가 될 때는 왕이라고 누가 중심축이 되는 유다지파가 있어야 돼요. 그 유다지파의 중심축을 누가 하느냐? 바로 다윗이 와서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진짜 이스라엘 되려면 진짜 이스라엘과 육적인, 우상적인 이스라엘 사이에 하나의 매체, 유다지파라는 끈이 연결되어야 돼요. 그걸 다윗언약이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야곱언약이고 다윗언약에 와서 12→1로 구축이 되지요. 그 과정에서 2가 되었다가 요셉지파는 북쪽으로 떨어져버리고 나중에 북쪽 이스라엘은 서서히 사라져버립니다. 유다지파만 남지요.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유다는 내가 선택했고 요셉은 버렸다는 시편 78편의 말씀처럼, 그런 식으로 역사가 육적인 이스라엘에서 영적인 이스라엘로 전환하는데 있어서 오늘 받은 베냐민지파에 대한 축복이라는 것이 인간의 모든 내부에 잠재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겁니다.

이게 날염이 아니고 침염이지요. 아예 베냐민지파의 잔혹함에 모든 인간을 다 집어넣는 거예요. 베냐민 지파가 잔인함을 나타내는 이유가 뭐냐? 이리처럼 물어뜯고, 그래야 먹는, 잔인한 그것을 계속해서 지키고 그 잔인함을 당연시 하는 그 이유가 뭐냐?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건드리면 베냐민지파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다 그런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베냐민이 대표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 베냐민의 속성은 모든 이스라엘지파에 나눠지리라. 퍼져버리는 거예요. 계속되는 사건, 사건에 의해서. 이 베냐민 지파가 나눠지고 나중에 사라지는데 특히 그 베냐민지파의 특징이 사사기 3장에 보면 상당히 흥미롭게 나와 있습니다. 3장 15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왼손잡이 에훗이라 하거든요. 여기 성경에서 왼손잡이라 하는 이것은 일종의 장애자라는 뜻이에요. 항상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했거든요. 그런데 왼손잡이가 구원했다는 말은 그 만큼 다른 사람들은 등신이고, 병신이고, 믿음도 없다는 그 말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오죽 못났으면 못났다고, 왼손잡이니까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상이 아니다, 라고 여기는 그 인간을 택해서 소위 잘났다는 인간까지 구원하겠어요.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추궁하는데 있어서 이스라엘자신이 인간 같지도 않게 여기는 그 왼손잡이를 통해서, 인간 같지도 않은 네가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자답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왼손잡이 에훗을 통해서 구원하는데 그 왼손잡이 에훗이 바로 베냐민지파에요. 그런데 사사기 20장 16절에 보면 “이 모든 백성 중에서 택한 칠백 명은 다 왼손잡이라 물매로 돌을 던지면 호리도 틀림이 없는 자더라.”

베냐민 지파의 군대의 특징은 한결같이 왼손잡이고 전부다 특수부대에요. 발군의 실력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왼손잡이들 때문에 오른손잡이들이 패배하게 되는 겁니다. 이 왼손잡이 나중에 다 죽습니다. 결국 왼손잡이들의 소멸, 베냐민의 소멸. 누구에 의해서? 그 왼손잡이 못지않게 잔인하고 잔혹한 자들, 그것은 바로 자칭 정의롭다고 여겼던, 피해자라고 여겼던 그들이 베냐민 지파의 잔인한 속성을 이미 분배받고 있었던 겁니다. 동일하게 다 공통적으로 갖고 있던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베냐민 지파는 보조적인 거예요. 그 지파는 큰 덩치, 중심, 요셉지파와 유다지파 두 개, 12→2가 되는 큰 덩치로 전환되어야 될 이유를 보여주는 보조적인 위치에 지나지 않아요. 이것은 베냐민 지파뿐이 아니고 유다와 요셉지파 빼놓고는 나머지 지파도 마찬가지에요. 본래의 것을 유지하면 안돼요.

인간의 우상이라 하는 것은 내 것이 영원하리라고 여기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자신이 우상시되고 그것을 지키다 보니까 분노와 잔인함과 상처를 낳는 거예요. 사람이 상처를 안고 있으면요, 본인도 깜짝 놀랄 정도로 잔인함이 나옵니다. 굉장한 잔혹함이 나와요. 평소에 점잖은데 뭔가 상처를 입었다. 그러면 그 상처의 째진 틈을 통해서 내가 이 정도로 괴물이었어, 라는 요소가 나오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하나의 예를 들면, 어떤 훌륭한 목사님이라고 소문이 나가지고 그 목사님은 복음만 전하고, 돈도 안 밝히고, 여자, 돈, 세상적인 것은 하나도 안 밝히고 오직 복음을 위해서, 주를 위해서 봉사하고 희생하면서 교회를 위해서 늘 기도하시는 분이다, 라고 소문난 목사인데 어느 날 교인들이 “목사님, 우리교회 오신지 15년도 넘고 20년 가까이 계셨으니 이제 그만 나가주세요. 목사님 덕분에 교회도 부흥이 되었으니까 섭섭지 않게 퇴직금 한 2백만 원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니까 갑자기 그 교회 목사가 “이 교회 누가 부흥시켰는데? 2백만 원? 껌 값도 안 된다. 내가 전도해서 데려온 저 사람이 십일조만 해도 1년에 2백만 원은 넘겠다. 어디서 합세해서 날 내보내려 해? 나가려면 너희가 나가라. 나는 이 교회에서 안 나간다.” 갑자기 복음은 다 어디 갔어요? 내 것 건드렸어요, 내 것.

설교단에서는, 오직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겠습니다, 해 놓고 그것은 입에 발린 소리를 했지요. 막상 그 인간을 건드리니까 “내가 뭐 어째서? 내가 어쨌다고 나를 이렇게 미워해? 내가 뭐 어째서?” 갑자기 잔인한 속성이 막 튀어나와 버렸어요. 설교 시간에 “저 인간은 저주 받아야 해. 저 인간은 악령 받았어.”

평소에 주를 증거 하는 사람인줄 알았더니 자기 잘남을, 자기가 주의 종인 것을 증거 하는 식으로 그 목사는 살아왔던 거예요. “그래도 목사님 나가 주셔야 됩니다.” “그러면 큰 것 두 장 내라. 2억 안내면 안 간다. 교회 재정 내가 다 아는데 2억은 써라.” 결국 마지막에는 돈으로 끝나요. 그것 때문에 교인들이 상처받는다고요? 교인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야, 우리 자신이 구원받은 우리 자신이 우상화되면 안돼요. 특화되면 안 된다고요. 내 구원을 목적으로 주님이 오신 것이 아니고 처음에 설교했듯이 주님의 구원은 뭐냐? 주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만든 나라, 거기에 맞춰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뽑힌 거예요. 내가 감추고 감춰도 건드리면 나는 폭발하는 유증기같은 잔인함이 있음을 알 때 그 안다는 자체가 바로 하나 되는, 그리스도께 속한 성도, 진짜 이스라엘입니다.

제자들은 배신하는 경험, 그리고 배신하고 주 앞에 분노했던 경험, 그리고 그들에게 성령이 오게 되니까 사도들은 이제는 정말 주를 위해서 살게 된 겁니다. 그것이 참된 이스라엘이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감추면서 하나님 잘 섬긴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무슨 사건이 촉발될지 우리는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차라리 우리 자신이 우상이고, 예수님을 이용하려 했고, 남들 앞에 잘난 체 했던 우리 자신임을 미리 깨달을 수 있도록 주께서 성령으로 역사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93강-창 49장 27-28절(베냐민에 대한 예언)190626-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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